욥의 하나님
2019년 10월 27일 본문 말씀: 욥기 1:4-5
(1: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욥기가 1장 1절부터 오늘 본문까지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우선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간주하고, 이 주어진 ‘인간됨’을 바르게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흔히 말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라 옳은 말이다고 알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문제삼으시는 겁니다. ‘내가 사람이다’는 당연시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에는 필히 ‘조건’이 붙는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내가 사람이다’는 것에는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이 빠져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나 알고보자’라는 식으로 성경을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며, 그래서 나는 지옥 가서는 아니되며 필히 천국가야 하며 이런 나에 합당하는 조건을 찾아보자’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욥기 1:1-5로 충분합니다. 거기에 보면, 욥은 부자였으며 이는 필시 하나님께서 욥을 긍정적으로 봤기에 복을 내리신 결과이며,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해 욥은 자신에게 어떤 원인을 집어넣은 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욥은 우리하고 같은 인간입니다. 욥이 하나님에게 잘보여서 복을 받았다면 오늘날 우리들도 부자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바르게 살았기에 복을 주어 부자되었다면, 그 ‘바르게 살기’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궁금하게 마련입니다. 나도 욥처럼 훌륭하게 되면, 부자되든지 아니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나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 아닌가하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오늘 본문 뒤를 구태여 볼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 인간이 궁금해하는 것을 다 알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줄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의 기대는 다 무너지는 겁니다.
욥이 아는 하나님에게는 ‘죽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구태여 죽을 이유에 대해서 욥은 전무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가짜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겠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근본 바탕을 뒤엎는 추가적 작업이 필요할 겁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투입하는 노력과 그 대가가 순조로운 비례를 유지하면서 진행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많은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법이라는 것은 구태여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식적으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이 투입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거부하십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쪽에서 새로운 원인을 집어넣기를 원하십니다. 그 투입되는 원인 안에는 ‘죽으시는 하나님상’입니다. 이 원인으로 인하여, 인간이 계속 자신을 인간으로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는 생각임을 밝혀내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지금의 인간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나는 인간답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그 주장과 그 외침이 부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새로이 창조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도 죽음에서 다시 재창조되어야 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다움으로 아무리 자식들에게 신앙교육을 잘 시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인간을 위하라고 하나님께서 계신 게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존재 자체를 ‘참된 인간’이라고 할 근거는 없습니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이 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6:22-23에,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만납니다.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이때 기드온은 본인으로서 사명만 제대로 수행하면 자신이 계속 괜찮은 자로 유지되고 이스라엘도 살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디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사명 속에서 하나님 자체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갖지를 못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기존의 알던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으로 나타났음을 알지를 못합니다.
이점은 삼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 13:21-22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의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 마노아가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의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삼손의 부모들이 하나님을 만나면 죽은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왜 인간이 죽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정에 사명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그 사명 속에는 타인들을 쳐부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지만 남들에게는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삼손이 태어나고 삼손은 이스라엘의 적인 블레셋을 괴롭히기 위해 수수께끼를 냅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사흘이 되도록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였더라”(삿 14:14) 하지만 삼손은 이 수수께끼가 결코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강한 삼손에게서 ‘죽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복음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외부 인물을 이스라엘에 투입시킵니다. 그 사람은 룻입니다. 룻이 알게 된 참 하나님은 자기 시갓집의 남자들을 다 죽여버리는 그런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죽이시는 그런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룻의 4대 후손이 바로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과연 다윗에게 준 사명이 무엇일까요? 사무엘하 11:11에서 우리아 장군은 다윗의 요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전쟁에 충실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아 장군은 아내를 잃고 자기 목숨마저 잃게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솔로몬은 누구의 자식일까요?
마태복음 1:6에 두 남성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윗과 우리아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들입니다. 다윗의 사명은 자신이 죽어 마땅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분이 참된 하나님인 것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죽음이 빠진 사명은 아예 사명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9-10-27 20:32:16 | 조회 : 31 | 2강-욥기 1장 4~5절(욥의 하나님) 20191027-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4.55.184.154) | | 2강-욥기 1장 4~5절(욥의 하나님) 201910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장 4~5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가 시작해서 만약에 욥기가 1장 1절부터 5절까지만 구성되어 있고 뒤에 내용이 없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여기 읽은 대목만 달랑 있고 우리가 이 욥기에서 뭔가 교훈을 얻고자 본다면 우리는 누구처럼 살고자 누구를 모델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느냐면 욥을 모델로 삼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욥이 자기 자식에게 행한 것을 보자는 겁니다. 욥이 복 받은 것이 다 이유가 있었다고 여기죠. 철저하게 자기 자식을 관리하는 것은 곧 자기 관리거든요. 자식에 대해서 그 정도로 한다는 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놓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욥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할 수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욥이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고 같은 인간인데 욥이 이 정도 한다면 우리도 욥처럼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할 수 있죠.
1절부터 5절까지만 있고 뒤에 욥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유념합시다. 1~5절까지만 있다면 여기서 어떤 요소가 누락되었는가를 살펴봐야 해요. 1~5절까지만 있다면. 6절을 보게 되면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라고 되어있어요. 드디어 6절에 와서 5절이 펼쳐지는 무대와 6절이 펼쳐지는 무대가 확연히 다릅니다.
5절까지는 땅의 일이고 6절에서는 하늘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돼요. 방금 우리가 1절부터 5절까지만 있다면 욥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이고 다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얼추 따라 붙일 수가 있는 겁니다. 있는데 6절에 대해서는 욥도 영향력을 행사 못 하고 우리도 6절의 내용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능하다는 말은 내 행위를 원인으로 잡고 거기에 대해 합당한 결과를 요구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이렇게 내가 사니까 반드시 이런 결과를 도출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는 정상입니다’라고 주장할 수가 없어요. 제가 지난 광주강의에서 두 가지의 원인론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하나는 사적인 원인과 결과인데 사적은 원인과 결과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하게 되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거, 이것이 개인적인 사적인 원인론이에요.
사적인 원인론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코앞에 눈앞에 있는 자기의 이용 거리만 챙기는 식으로 거기에다 자기 원인을 투입하는 그런 소소한 제한적인 겁니다. 그런데 제가 또 하나의 원인론을 말했는데 구조적 원인론이라 했습니다. 구조적 원인론, 인과론이란 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조차도 내가 영향을 줄 수 없고 손댈 수 없고 관여할 수 없는 다른 원인 요소에 의해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거, 여기 나왔다는 거예요. 구조적으로.
우리 인간은 작으니까 부분이잖아요. 부분은 전체가 어떤 의도에 의해서 움직이는 결과에 불과한 거예요. 그럼 성경 욥기에서 1절부터 5절까지만 있어도 되는데 여기까지만 있어도 우리 인간들은 여기에 충분히 동의하고 동감합니다. ‘아멘’이 절로 나올 거예요. 욥이 이렇게 그 당시 동방에서 최고의 재벌이었다면 사람들이 ‘재벌이었어? 나 그렇게 되고 싶은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돼죠?” “욥기 1장 1절부터 5절까지 보세요. 4~5절을 보세요. 자식 관리를 어떻게 했는가”
‘야~, 자식 관리 철저하구나’라고 생각하죠. 무슨 철없는 아이들 해놓고 혹시나 그들이 모르는 죄를 범할까 싶어서 아버지가 대신해서 나서서 하나님 앞에 그들이 모르는 죄까지 용서해 달라고 미리 사전에 제사까지 드릴 정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보며 ‘아,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되었구나. 나도 부자가 되고 싶어. 행복하고 싶어. 자식들 죄 안 짓게 하고 싶어. 죄 안 지었으니까 죽을 때 좋은 나라 가는 것은 당연지사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욥기 1절부터 5절까지만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를 않습니다. 필요하지 않죠. 내가 착하게 살면 그 결과로 합당한 부자라는 것과 그리고 나중에 천국 간다는 보상이 주어지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 안 될 이유가 없죠.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욥기는 바로 그 점을 엎어버립니다. 지금 우리가 욥기 1장 1절부터 5절까지 보는 자세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 아직도 우리가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여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문제 삼습니다. 어디를 봐서 네가 인간이냐는 거예요. 우리는 할 말이 많아요. “인간이니까 인간이죠. 원숭이에서 원숭이 나오듯이, 사과나무에서 사과 열리듯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인간이니까 그 인간에서 나온 인간이 인간이죠”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인간이라는 증거 대봐라” 증거 대보라고.
아버지 어머니가 인간이라는 증거를 대보라는 말은 아버지 어머니가 인간답게 살았다는 증거를 대보라는 뜻이 아니에요. 인간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더 파고 들어가서 인간이 뭐냐는 것을 한 번 보라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주일 낮 설교에 산책하다가 인부들이 쓰레기 버리는 거 지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보도블록을 전면적으로 뜯어내고 수리하고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보도블록에 침 뱉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죠.
제가 어제 또 산책을 가보니까 그 보도블록을 다 깔았거든요. 깔았는데 일부를 또다시 뒤집었어요. 제대로 안 된 모양이라. 또다시 뒤집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이냐 하는 것을 우리 힘으로는 뒤집을 수 있는 어떤 방식도 없어요. “나는 인간이다”라고 하면 “증거 대봐라”라고 할 때 증거 댈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인 것을 인간이라고 하는데 왜 그걸 문제 삼느냐는 말이죠.
대장금에서 나오는 소녀 장금이가 이야기하죠. 임금님이 “그게 왜 맛있느냐?”라고 물으니까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라고 하죠. 맛있는 것을 맛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인간인데, 거울 봐도 인간이고, 남들도 인간이라고 하는데, 내가 원숭이도 아니고 낙타도 아니고 인간인데 그게 무슨 이유가 있느냐는 거죠.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엎어버릴 수가 없어요. 여기 욥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원인과 결과를 엎어버립니다. 사적인 원인과 결과는 하나님에게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6절에 보면 하루는 사탄이 서 있고 거기에 천사도 서 있는데 이것을 왜 우리에게 알리는 겁니까? “예~, 사탄 있는 줄 알고 천사 있는 줄 아니까 우리가 아니까 알려주지 마시고 우리가 할 도리만 이야기해주세요”라는 식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1~5절까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부터는 보도블록을 뒤집듯이 완전히 다 뒤집어 버립니다. 네가 인간이라는 원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이러면 죽지 않을 거죠’라는 그 자체가 원래 인간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자체, 그것이 죽음으로 오신 하나님과 같은 편이 아니에요.
죽음이 없어 버리면 새 창조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인 “나 죽기 싫어”라는 말이 달리 이야기해서 “나는 새 창조 되기 싫어”와 같은 말이 되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원형을 창세기 2장에 보면 원형이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되어있어요. 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그냥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에 부합된다는 조건 하에 인간인 겁니다.
인간 이전에 조건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우기면서 만들어진 형상은 떼 내고 그냥 만들어진 이것만 가지고 쭉 가자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없더라도 인간이라고 해달라고 전부 다 그렇게 한통속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잃어버린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집어넣어 주는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입니다. 오전에는 그것을 ‘빛’이라고 했는데 오후에는 그와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으면 인간은 죽지 않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없는 이유로 너는 죄가 되고 형상이 없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고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저주예요. 지옥이고 심판입니다.
그래서 1~5절까지만 있으면 안 되겠지요. 이 자체가 무효가 되는 거예요. 욥이 자식에게 잘했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원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악마가 개입해버리면 그렇게 잘 되던 욥의 작품들 자식들이 하루 순간에 다 없어져요. 자식이 있었는데 없어졌다고요. 인간이 배워야 할 것은 그거예요. 있기 때문에 늘 있어야 한다는 그 선입감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있는 자식에게 잘했다. 왜 잘하는가? 그 자식이 죄 안 짓고 하나님 경외하고 천국 가서 또 살도록 그게 인간이 인간부터 출발할 때 그런 한계를 지니고있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성경을 보면서 생각하는 바가 죽으려고 보는 것은 아니거든요. 더 살라고 보잖아요. 그러니까 실수한 거예요. 죽는 것이 필수이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도대체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는 알고 죽자는 생각을 안 갖는다니까요. “주여 죽이지 마옵소서”라고 하며 가죠. 우리가 안 죽어 버리면 우리가 사는 이유도 모르게 돼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실 텐데 쉽게 해보겠습니다. 어느 노래 2절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널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네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이제 김종환의 유명한 ‘존재의 이유’ 2절 가사입니다. 여기 보면 김종환이라는 사람이 자서 적으로 쓴 글인데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라고 자기가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기정사실로 하고 있어요. 김종환 씨가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이렇게 죽는 것이 바르고 마땅한 거야’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이거 말고 달리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야’라고 했어요.
얼마나 힘들면 저녁 늦게 잠이 들었는데 너를 그렇게 보고 싶은데 너무 피곤해서 너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옷도 못 벗고 그냥 쓰러져 잠이 들은 거예요.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한 손에 너의 사진만 붙들고. 그저 희망이 뭐냐 하면 그래도 내가 자살 안 하고 살고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네가 있어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김종환 씨가 현재 이 노래 속 주인공 여자분과 결혼했어요. 부인이랑 잘삽니다. 옛날에는 말랐는데 지금 둘 다 살도 찌고 잘살고 있습니다. 드디어 소망 달성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죽고 싶어도 악착같이 살 수 있는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너’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주저앉으면 나는 짐승이 되고 타락한 인간이 되지만 너를 생각할 때마다 절대로 자기는 몰락하면 안 되고 무너지면 안 되고 버텨야 하는 겁니다. 왜? 네가 있기 때문에.
너의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서 나는 힘들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거예요. 신림동 하숙방에서. 다시 거기서 또 박차고 눈물 흘리며 일어나서 짜장면 배달하고 신문 배달하면서 그렇게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 만약에 김종환 씨가 천국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나처럼 이렇게 충실한 사람이 천국 가지 지옥 갈 일은 없다”라고 하겠죠.
나같이 훌륭한 사람, 오직 순수한 여인을 사랑해서 그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이런 인간이라면 이건 누가 뭐래도 천국 간다고 하겠죠. 바로 그것이 자기의 치명적인 결함이고 오류입니다. 자기 바탕을 몰라요. 여기 본문에 보면 1절에 “하나님을 경외하며”라고 되어있는데요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욥은 하나님이 두 종류라는 사실을 몰라요. 살아있는 하나님 한 종류만 생각했지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못 한 겁니다. 하나님이 죽어야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져요.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라면 열심 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습니까? 욥을 박살 내고 죽지요.
왜냐 하면 욥이 생각하는 하나님 자체가 박살나게 하기 위해서 욥 자체를 박살 내면서 내가 믿었던 하나님이 허상일 수 있고 이게 가짜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욥에게 그걸 직접 가르치는 절차가 필요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보면 이 한국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집단인지를 알 수 있지요. 욥기 1장 1~5절까지만 가르치면 끝나는 거예요.
죽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영적 세계가 나타났을 때 사사기 6장 23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드온이라는 사람에게 사사가 되고 싶지 않은데 갑자기 밤에 나타나서 사명을 부여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하죠. 그래서 기드온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해서 드디어 미디안 군사들을 압제하고 승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사사기에 있어요. 왕이 등장하기 이전에 인간들이 아는, 인간들이 기껏 아는 관계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 사사기예요. 왕 다윗이 오기 전까지.
사사기 13장 20절에 보면 거기에 마노아 가정이 나오는데 마노아 가정이 보통 가정이 아니고 20절에 보면 “불꽃이 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단 불꽃 가운데로 좇아 올라간지라 마노아와 그 아내가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와 그 아내에게 다시 나타나지 아니하니”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영적인 존재 영적인 세계가 직접 인간에게 나타났을 때 인간은 그야말로 죽은 존재에 불과하죠. 그래서 그 마노아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22절에 “마노아가 이에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나 철난 아내가 하는 만일 죽일 것 같으면 진작 죽였지 우리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 것이고 일을 맡겼다는 말은 우리는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일을 하라고 전하려고 왔다고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없고 매일같이 사는 데 급급해요. ‘그냥 내 본성대로 살기만 하면 나중에 죽으면 좋은 데 가겠지’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오고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사는 것은 뒷전으로 밀리고 사명이 사명답게 살아나는데 필요한 우리의 시간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명이 사명답게.
그러니까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내 사명이 먼저예요. 문제는 우리가 그 사명에 대해서 미리 아는 바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었으면 사명을 하면 되는데 그 사명 속에서 진짜 사명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고 그 진짜 사명은 그 속에서 우리가 죽어 마땅함이 드러나는 그것이 본래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취지입니다.
이 마노아 가정에서 삼손이 태어나죠. 삼손이 태어날 때 삼손은 자기가 사명을 감당한다는 자긍심에서 아주 객기를 부립니다. ‘아, 나는 구별된 나실인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으니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계속 안 죽고 살아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나중에 삼손 인생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마쳐요. 바로 내가 죽어 마땅함을 내가 아는 것이 내가 보여줄 사명인 거예요.
뼈다귀 가지고 사람 때려죽이는 것이 사명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죽임으로써 이처럼 장차 오실 이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죽어야 할 분인 것을 알리는 그 사명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같이 공감하면서 자기도 죽어가는 겁니다. 이게 사명이에요. 사사기 14장에 보면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는데 그 수수께끼가 남을 혼내기 위해서 남을 괴롭히고 남을 갖고 놀기 위해서 수수께끼를 냈지만, 그 수수께끼의 정답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치는 하나님의 수수께끼인 것을 나중엔 알죠.
무슨 수수께끼냐 하면 14장 14절에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라고 할 때 자기는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을 놀리고 혼내기 위해서 빌미를 잡으려고 수수께끼를 본인이 던졌지만, 이것은 본인이 블레셋에 던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삼손인 나에게 던지는 수수께끼인 것은 나중에 알게 돼요.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온다”라는 것은 강한 삼손에게서 복음이라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확한 정답이 죽어야 나오는 거예요. 살면 안 나와요. 왜?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의 치명적인 약점이 뭐냐 하면 악마는 계속 존재하기만 하고 죽지 않는다고 되어있어요. 악마의 치명적인 약점은 악마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는 거예요.
제대로 죽을 수 있는 분은 이 땅에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은 악마예요. 악마. 그러나 죽었던 신은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욥기 1장 1절에서 5절까지만 보게 되면 하나님 살아있고 나 살아있고 살아있는 분에게 내 성의를 다하고 열심을 더하면 좋은 관계 유지된다는 겁니다. 1~5절까지만 그래요.
먼저 그것을 깔아놓는 이유가 뭡니까? “욥아 바꾸자. 이제 하나님 바꾸자. 너의 힘으로 안 되지? 내가 알아서 바꿔줄게. 너의 고통, 너의 아픈 것, 너의 벅벅 긁는 것, 아내가 너를 욕하는 것, 재산 날아가고 자식 열 명 다 죽는 것, 그게 다 너의 사명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사명이 되는 거죠.
이건 자리싸움이에요. 욥의 자리는 따로 있었던 겁니다. 욥의 현재 있는 자리는 자기의 영원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에 가려면 욥이 죽어야 하고, 죽고 나서 하나님의 다시 살려내심을 당할 때 욥의 영원한 자리는 그렇게 마련되는 겁니다. 지금 방금 제가 사사기 이야기했는데 삼손이 설쳐대 봐야 나중에 이스라엘은 구원되지 않습니다.
사사기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룻기예요. 이 룻기가 사사 시대거든요. 룻기 1장에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이 아닌 외부에 있는 요소를 여기에 가져옵니다. 모압 이방 여인 룻을 이스라엘로 침투시켜요. 침투시킬 때 이 룻이 알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제대로 죽이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마음을 갖고 여기 등장하게 됩니다.
룻기 1장 16절에 보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하는 그때 어머니는 뭐냐 하면 남편 죽고, 자식 둘 다 죽고, 죽고, 죽고, 오직 자기 몸뚱이만 남아 있는 그 어머니, 어머니를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이야말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룻기 마지막 4장 18절부터 보면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드디어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가 끝나고 왕이 제대로 세워지는 시대가 되는데 그 왕은 어떤 왕이냐 하면 하나님이 죽는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기 위한 왕으로서 다윗이 박히게 됩니다. 그러면 다윗은 훌륭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1절에 보면 “우리아가 다윗에게 고하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나이다”라고 우리아 장군이 다윗에게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이야기하느냐면 “지금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중인데 제가 어떻게 사적인 일을 하겠습니까?”라고 해요. 그렇게 이야기한 우리아를 다윗이 죽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이스라엘 왕은 누구냐는 겁니다. 다윗이 왕은 맞는데 그 다윗은 죽으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명인데 다윗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왕이니까 자기가 살아있어야 제대로 하나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자기를 부정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사전에 생각 못 했던 겁니다. 욥과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하나님의 사명 자이고 자기가 있으니까 남이 죽어도 자기는 잘못이 없고 자기는 정당하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아를 보내서 다윗을 제대로 된 다윗이 되도록 한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 한 겁니다. 다윗 손에 우리아가 죽습니다.
그래서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마태복음 1장 6절에서 솔로몬이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우리아의 자손으로 나오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라고 남성이 둘 나옵니다. 다윗 나오고 우리아 나옵니다. 둘 다 남성이에요. 둘 다 남성인데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는다”라고 되어있어요. 아버지가 없는데, 없는 데서 솔로몬이 나오죠. 하나님의 사랑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가 인간이라고 우기는 이상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없애버리는 그일, 없애버리고 다시 만드는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실시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욥기가 왜 1장 1~5절로 멈춰있지 않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은혜받는데 충분한 데요. 왜 6절부터 사탄이 개입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내가 안 죽으려고 하고 나는 건사해야 하고 나는 뭔가 대단해야 한다는 이미 뭔가 오만한 잘못된 우리를 하나님 쪽에서 주어지는 사명이 아니면 우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죽고 더불어 같이 살 때만 우리는 이 땅을 관장하시는 참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이 빠져버린 살아있는 하나님과 살아있는 나와 거래했던 우리의 신앙이 이게 바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인간이 아닌 것을 저희들 이제는 정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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