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욥기 1장 1~3절(욥의 주제) 201910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제 욥을 시작하는데 욥의 핵심 주제부터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이해하는데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핵심주제는 뭐냐 하면 없는 자리 만들기, 있지 않은 자리 새로 생기기가 욥의 주제입니다. 욥이 뽑혀 나간 그 자리가 주님이 오실 자리입니다. 이러한 욥의 주제는 지난번 했던 여호수아의 주제와 많은 관련성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마지막 설교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죠.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이 남겼던 약속이 그 뒤에 현실적으로 계속 진척이 되고 진행이 된다고 했습니다. 죽고 난 뒤에. 그러면 죽었다는 말은 현존하지 않죠. 없는 사람이에요.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이 세상은 있는 자들의 세계이니까, 살아있다고 여기는 자들의 세계이니까 없는 자는 여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가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한다면 이게 바로 신앙이고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안 믿는 사람과 백번 이야기해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몰라요. 꾸준히 살았던 자기의 습관화 된 것이 뭐냐면 살아있는 사람이 일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게 상식이고 그것만이 옳다는 거예요.
여기 예배실 형광등 가는 것을 죽은 예수님께 부탁할까요? 살아있는 사람이 손대야 할 것이 아닙니까? 살아있는 사람이. 일을 벌여도 살아있는 사람이 하고 계획을 해도 살아있는 사람이 하고 뭘 해도 살아있는 사람이 하고 과연 그 살아있는 사람이 일을 벌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살아있는 사람 중에 동방 최고가 누구냐 하면 욥입니다.
방금 읽었잖아요. 엄청나죠. 자식도 어찌나 많은지 아들이 일곱이고 딸이 셋이에요. 열 명쯤 된다면 자식 많다고 할 수 있고 든든하다고 할 수 있죠. 그다음 재산은 뭐냐 하면 재산도 역시 있습니다. 소가 천만리고 암나귀가 오백이고 종도 많았습니다. 한 겨리는 두 마리입니다. 그다음 양이 칠천이고 약대가 삼천이이라고 했는데 농경 목축 시대에 이 정도 있으면 부자라 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최고라는 겁니다.
있음의 최고예요. 있음의 최고인데 그 당시 사람들, 욥 당시의 사람들은 이렇게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만큼 축복이라는 그러한 명목으로 네가 이만한 소유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서 줬다는 겁니다. 그게 1절에 나오죠.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나와요. 악에서 떠난 자라고.
적어도 이 정도의 내부적 실력이 갖춰졌으니까 이정도 착하니까 거기에 걸맞는 제대로 부합이 되는 재산을 누린 거죠. 이것이 욥기의 시작이고 욥기의 내용은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자, 욥을 이렇게 시작하면서 그 욥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지금 욥은 착해서 복 받았다는 것에 대해 너희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는 겁니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았다는 이 점에 대해서 아니라고 고개 가로저으며 나올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오라는 거예요. 복 받을 만해서 복이 되었다는 식으로 될 경우에 인간에게는 ‘있음’, 내가 있다는 것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어떤 새로운 희망을 부여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비록 지금은 없더라도 맘씨 하나 곱게 먹으면 얼마든지 만회가 되고 회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는 겁니다.
마음씨를 나쁘게 써서 망해버린 이 집안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착하게 살면 옛날처럼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부여하게 되죠. 그런데 욥이 뽑혔다는 말은 그러한 사고방식 조차도 철저하게 다 뽑아냈다는 뜻이거든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취지를 여러분들은 잘 모르실 거예요. 욥에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뜻은 뭐냐 하면 무신론자라는 것이 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무신론자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독립해서 자존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따로 우리 따로 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땅에서는 땅에 인간의 원칙을 허락해 줬는데, 그 원칙이 뭐냐 하면 ‘착하면 복 받는다’라는 원칙을 허락했다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을 줄지 말지는 하나님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얼마나 착하냐에 따라서 하나님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야, 네가 그 정도 착한데 그냥 다 받아라. 내가 그냥 재산 불어나게 해줄게. 네가 그렇게 착한데 가난하고 비리비리하게 산다면 이건 하나님답지가 않지. 하나님의 원칙에 어긋나는 거야. 그러니까 착한 만큼 복 받고 너는 나쁜 짓 한 만큼 벌 받아라”라고 하시며 이것이 평화롭게 유지가 된다고 여기는 것이 무신론자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입만 떼면 하나님이에요. 입만 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도 개코도 모르면서 입만 떼면 하나님으로 랩 감듯이 둘둘 감았어요. 온 천지가 하나님이에요. 누가? 그 당시에 이스라엘을 모르는 이방 민족에게는. 요즘에 이것을 번역하면 오늘날 교회로 번역하면 하나님도 모르면서 입만 떼면 “쭈여~~(주여)”예요. 입만 떼면.
어디 미끄러져도 믿음 좋은 사람은 “주여” 믿음 없는 사람은 “엄마야” 계단에서 넘어져도 “주여” 모든 게 “주여”예요. 노인들 앞에서 새벽기도 할 때 기도 하려면 시동을 걸어줘야 하는데 시동 거는 변변찮은 용어가 없으니까 ‘주여~~~주여~~’라고 시작하는 거예요. 발동 걸리면 “랄랄랄랄~주여~”하고.
특히 오늘 본문 1장 1절에서 3절을 가지고 욥기에서 이렇게 한 것은 토 달고 싶은 사람 어디 달아보라는 거죠. 어디 흠잡을 게 있으면 도전장에 제시해 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현재 인간들아, 너희들이 하나님을 모르지? 모르니까 모르는 그 수준이 어디까지 인지를 보라고 하면서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하기에 거기에 걸맞는 합당한 부자가 되었다는 이 원리 원칙에 대해서 토 달수 있으면 달아보라는 거예요. 못 달지?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여호수아는 역사라는 것이 있어요. 죽고 난 뒤에 그 약속대로 되는데 이스라엘에게 역사라는 것은 약속이 지나간 자국을 역사라고 합니다. 인간이 행한 것이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이 스치고 긁히고 지나간 자국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는 거죠. 그런데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어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욥이 고생했지만 나중에는 복 받아서 딸 셋이 다 이뻤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욥에서는 시간을 끄집어내면 안 됩니다. 제자리 뛰기 하고있는 겁니다. 제자리 뛰기. 시간이 흐르게 되면 시간을 의식하는 어떤 인간이 등장해야 해요. 그 인간이 등장해야 하고 그 인간이 성장하면서 시간도 함께 흘러가고 있는데 그 하나밖에 없는 인간을 확 뽑아 버린다면 ‘0’이 되죠. 인간이 ‘제로’가 되면 시간도 같이 뽑히는 거예요.
‘1’이 뽑힌 그 자리에 ‘0’이 등장하고 그 ‘0’의 자리는 시간이 없는 자리, 없는 분이 거기에서 솟구쳐 올라옵니다. 그게 지금 욥기 1장을 하면서 제가 이렇게 단정 짓는 이유는 이렇게 욥기 내용이 너무 깊기 때문에 일단 전체적인 요약을 먼저 해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욥에서 ‘1’이라고 했는데 이게 또 욥의 특징입니다. 이게 잠언서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의 특징은 전부 다 시작을 하나님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1’이고 그 상대자가 ‘1’이에요. 일 대 일로 상대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이 세상에서의 모든 것은 나 있고 너 있으니까 ‘1’이 있으면 ‘2’ 그리고 ‘2’가 있으면 ‘3’이 있어야 해요. 이 세상에서는. 그건 역사가 되겠죠. 그러나 잠언서에는 한 사람밖에 없어요. 한 사람밖에 없고 ‘1’되는 인간을 꼽아 놓고 ‘1’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게 되면 그게 바로 역사서가 아니라 지혜 문서가 되는 겁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가 다 그런 겁니다.
쉽게 말해서 독백이죠. 독백입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요. “너 지금 뭔 소리 하고 있는 거야?”라고 하면 “넌 몰라도 돼. 너는 가만히 있어. 나는 지금 주님과 주고받을 테니 너는 가만히 있어. 그냥 결과만 봐”라고 되는 겁니다. 독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점에서 바로 이 욥기는 뭐와 통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바로 통해버립니다. 십자가로 통해버리죠.
욥기를 흔히 말해서 희생이라고 말하는데 희생이라는 말을 제가 바꾸고 싶습니다. 희생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어요. 희생은 어떤 억울함을 갖고 있으며 정말 그렇게 당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당했고 욥은 주위로부터 친구로부터 너무 억울함을 당해서 그건 희생이다. 그리고 그건 예수님의 희생과 통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 별 내용이 없어요. 그냥 욥은 있다가 없어졌다는 그것이 더 적당해요.
사람이 있는데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멋있어 보입니까 아니면 있는 내가 아예 뽑혀서 없는 게 더 희생적입니까? 만약에 사람이 안 뽑히고 그냥 있으면서 희생을 당해버리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나는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을 남을 위해서 멋지게 살고 있다는 자화자찬의 생각이 자꾸 자기에게 몰려들기 마련이에요. 나 아니면 일 안 된다는 거, 내가 남보다 고생 더했다는 거, 내가 주의 일 혼자 다 했다는 그런 것이 자꾸 밀려든단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1’을 ‘0’로 만드는 주의 일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돼요.
그렇다면 그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서 ‘아, 아예 욥의 자리를 뽑아 버리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뽑을 때 그냥 뽑지 말고 뽑을 만한 이유를 찾아서 뽑아 버리는 구나를 생각해야 해요. 욥의 자리를. 쉽게 말해서 ‘욥아, 너는 지금 예수님을 깔고 앉아 있다’라고 보면 돼요. 잘난 욥이 남에게 희생하는 욥이 누가 봐도 그건 흠잡을 데 없는 욥이 무거운 엉덩이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꽉 눌러버리고 있는 거예요. 깡통을 누르듯이, 불도저가 누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그 무거운 엉덩이를 그 잘난 엉덩이를 치워버려야 거기서 뾰로록 하고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게 희생일까요? 차라리 뽑아 버리는 것이 낫지. 이건 희생이 아니고 뽑아 버리는 거예요. 희생은 누가 했느냐면 그동안 무거운 엉덩이에 깔려있는 주님이 희생했지요. 욥의 희생에서 예수님의 희생으로 넘겨 가려면 철저하게 욥에 대해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다 점검대상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욥을 보게 되면 사실 불신자들에게는 정말 납득이 안될 이야기가 돼요.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라고 되어있어요. 끝났네요. 이렇게 완벽한데 이렇게 완벽했으면 그래서 2~3절에 복 많이 받아서 부자 되었다면 뭐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어 보이죠. 그렇게 할 이야기가 없어 보인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인간들 편에서 평가가 그렇게 나오도록 욥을 통해서 유도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순전하고 정직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면 그 점은 마태복음 16장 26절에 오게 되면 그 점이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25절부터 보게 되면 “그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에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곧 어른들이죠, 그리고 모든 사람은 어른들처럼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을 목표로 해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서 통용되는 원리를 찾아서 또다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고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자들에게 갑자기 예수님이 무엇을 거기에 박아버리냐면 이걸 숨긴다고 되어있어요.
잘났고 똑똑하고 슬기롭고 완벽하고, 오늘 본문대로 하면,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 욥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인데 그러하기에 욥이 모르는 구석이 있더란 겁니다. 그러하기에. 그러면 이걸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욥이 지향하고 있는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쪽과 다른 방향으로 가야 하나님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한 암시를 우리에게 허락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되어있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항상 이러하다고 되어있어요. 그 아이들 그다음 장에 다 죽었는데요. 아들 일곱 딸 셋이 다 죽었는데요. 붙들고 뭐 죄를 지었느냐 할 것도 없어요.
제가 한 오지랖 하거든요. 길을 가면서 그냥 가지 않고 누가 담배 피우면서 가는가, 침 뱉고 가는가, 휴지 버리면서 가는가, 이런 것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니고 혹시 있는가 간섭 질을 하려고 찾아다니는데 제가 참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같지요? 악에서 떠난 사람 같고. 암튼 그때 마침 걸려들었어요. 차림새가 공사하는 사람들 같아요.
그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를 쓰레기통이 아닌데 눈 올 때 미끄럼 방지하려고 둔 모래더미에다 담배를 버리는 거예요. 보도블럭에 침을 뱉기도 하고. 주께서 오늘도 할 일을 주시는구나 싶어서 “거기 사람 다니는 곳에 침 뱉고 휴지 버리면 안 되잖아요”라고 하니까 “예~”라고 고분고분해서 다행스러웠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이 뭐 하는 사람이냐 하면 보도블럭을 완전히 뒤집는 사람이에요. 침 뱉어도 괜찮아요.
보도블럭 자체를 뒤집어 버리는 사람. 그러니까 여기 순전하다고 하는 것은 보도블럭 위에 바르게 사는데 보도블럭 자체를 주께서는 완전히 뒤집어 버리려고 하시는 거예요. 다 대대로 보수공사를 해버리는 겁니다. 이 인간 토대 자체를. 그런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 복 받았다고 해놓고 ‘무엇에 복 받았지? 나도 착하면 복 받겠지’라는 기존의 보도블럭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 겁니다.
바로 욥은 그것을 뒤엎어 버리는 거예요. 왜 뒤엎어 버려야 하냐면 예수님을 보세요. 예수님은 안 순전했어요? 예수님은 정직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경외한 분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수치스럽게 살았죠. 유튜브 동영상에 ‘영광과 수치’라는 대목 나오는데 주님은 수치스럽게 살았고 어느 정도로 수치스러우냐 하면 아무도 그분 곁에 있으려고 하지 않았고 얼굴을 돌리고 싫어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믿는 거예요. 예수 믿고 잘된 사람을 믿는 거예요? 아니면 직접 예수를 믿는 거예요? 둘 중에 하나만 합시다.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 하지 말고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처럼 지금도 외면당하는 예수를 믿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직접 다이렉트로 예수를 믿으려면 예수님이 거꾸로 서면 우리도 거꾸로 서야 하는 거예요.
물구나무서야 하는 거예요. 주머니에 동전 미리 다 내놓고. 우리도 세상을 거꾸로 봐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죠. ‘아니 멀쩡하던 사람이 왜 저렇게 되었어?’ 욥이 말합니다. “나도 미치겠다 정말”이라고. 내가 나를 믿지를 못한다니까요. 언젠가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우리가 신앙인인 것 같으면 본인의 변화에 대해서 본인이 믿기지 않아야 해요. 이거 미친것도 아니고 내가 왜 이리 살아.
왜 남들처럼 그렇게 살지 못하고 왜 주님께서 나를 엉뚱한 존재로 만들어내느냐는 어떤 억울함 같은 거 낯섦 같은 느껴줘야 그게 신앙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안 믿는 사람과 대화가 안 되어야 해요. 안 믿는 사람과. 그들과 우리는 가는 목적이 다르잖아요. 주께서 시켜서 한쪽과 자신의 계산에 의해서 이익이 오는 쪽으로 모든 행동을 하고 말을 하는 쪽이 있단 말이죠. 세상을 내 것으로 쓸어 담기 위해서.
그게 세상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슬기롭고 지혜롭다고 하는 거예요. 슬기롭고 지혜롭다. 그러나 그것은 무신론자입니다. 신으로 둘둘 감고 ‘주여, 주여’ 백날 해도 무신론자예요. 주님처럼 거꾸로 서 있지 않고 주님처럼 거꾸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에. 이제 욥은 저 제일 밑바닥으로 내려갑니다. 욥의 친구는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욥의 친구가 뭘 의존하는지 잠언서 3장 16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이런 건 좀 줄을 쳐놓으세요. 이런 걸 기독교 관련 상점에 가면 액자로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안 즐거울 수가 있습니까? 지혜가 있는 사람은 이런 삶을 산다는 거예요.
이것이 문자로 한글로 딱 번역되어 나오죠. 번역되어 나와서 좋은 시력으로 보잖아요. 여기서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가 전혀 없지요. 예수님이 지혜이고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우리는 건강하고 오래 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부자가 되고 부유하게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믿자는데 여기서 토 달고 이의 제기할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지혜인데 어떻게 사셨어요? 서른세 살에 돌아가신 분이 몇 분 안 돼요. 김광석이랑 몇몇 가수들이 서른 몇 살에 죽었는데 몇 명 안돼요. 물론 그 전에 죽은 사람도 있지요. 유관순도 그렇고.
그리고 주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520만 원도 없었어요. 머리 둘 곳도 없다니까요.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집이 없다는 거예요. 집도 없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제자 되고 싶어도 주께서 강제로 제자를 만들었으니까 따라가지 맨정신으로는 주님을 못 따라가요. 거쳐 할 집도 없는데.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해요. ‘나는 왜 이리 사나? 정말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왜 주님께서는 내 인생을 이렇게 조져놓으셨지?’라고.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3의 요소가 있었어요. 그건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탄과의 계약이 욥의 행복보다 우선되는 겁니다. 욥이 얼마나 정직하고 얼마나 착하고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하는 욥의 실존은 하나님과 악마의 거래 앞에서는 그건 아무짝도 쓸모없는 겁니다. 소용없는 겁니다. 왜? ‘1’은 ‘0’가 되어야 하니까.
‘1’이 장착하고 있는 슬기롭고 지혜롭고 정직하다는 그 ‘1’ 자체를 무 뽑듯이 뽑아 버리면 그 뽑힌 것 가운데 정직과 슬기와 경외도 다 같이 날아가 버려요.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소멸돼요. 우리는 소멸되어야 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악마에 의해서 성도는 소멸되는 중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늙어 죽는 거예요. 그냥 뽑히는 거예요.
그냥 가지 마시고 나의 행했던 거, 기도했던 거, 헌금했던 거, 그거 다 없어져요. 같이 다 날아가 버리고 그 빈자리에 어떤 새순이 쑥쑥 올라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쏙쏙 올라오면서 우리의 안마의자처럼 계속 밑바닥을 받쳐가면서 올라가고 있어요. 나는 쪼다 되고 주님은 올라오고 있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기마전 하듯이 우리를 목에 태워서 세상에 비치는 것은 우리이고 안쪽에 있는 예수님이 우리를 등에 태워서 세상에 올려버려요. 그게 욥이에요. 욥은 지금 어질어질해요. 왜 이러십니까?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자꾸 질문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에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이렇게 만드십니까?’라고 계속 내뱉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욥은 뭐냐 하면 이렇게 내뱉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뭔가 나에게 의미가 있겠지요? 그 의미를 알려달라니까요?’라고 자꾸 묻죠. 주께서는 계속 침묵하고 하나님의 침묵 자리를 대신해서 옆에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 와서 힐책하고 지적을 해 댑니다. 네가 무슨 문제가 있고 어쩌고 하면서 자꾸 지적하는데, 제가 아침에 이야기했습니다. 성도는 누구로부터 지적받을 필요가 없어요. 그것 하나는 꼭 아셔야 해요. 지적받으면 마귀에게 지는 겁니다.
지적받을 필요 없어요. 왜냐? 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이니까. 이제 욥을 보면서 우리 평소의 삶과 어느 점에서 틀어지는지 아니면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점에서 일치되는지 이것을 우리에게 수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아,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것이 아니구나. 이 코스가 욥의 코스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통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미 욥의 길에 접어들었구나. 따라서 악마의 활동과 주님의 악마에 대한 지시에 따른 그 결과로 인하여 성도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리가 욥을 통해서 이제는 살펴볼 마음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미래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잘 될 거라고 여겼습니다. 뿌리째 뽑힐 것을 몰랐습니다. 나 혼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주와 함께 동행하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동행의 의미가 뭐며 그 동행의 실재화가 우리 삶을 통해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표현되는지 저희들이 그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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