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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의 돌(수24;25-28) 1910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0. 8. 07:05
2019-10-06 14:54:17조회 : 31         
   증거의 돌 191006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증거의 돌(여호수아 24:25-28)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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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10-06 15:59 
증거의 돌

2019년 10월 6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4:25-28

(24:25)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24: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24: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24:28)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돌이 듣는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여호수아가 과장되게 이야기할 것일까요? 여호수아가 무리하게 이야기한 겁니까? 아니면 실제로 돌이 하나님의 언약일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여기는 동시에 적어도 돌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말씀을 내리는 그 현장에 돌과 인간들이 나란히 있다고 봅니다.

돌이 우리들 곁에 있는 이유는 감시자 역할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보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발언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분명히 성경에서는 인간을 흙으로 봅니다. 흙들과 돌들이 나란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여기에 또 추가되는 사물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요셉의 해골입니다. 모두 세겜이라는 자리에 집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수 24:32)

말씀이 스스로 자기 성취를 이루어냄을 이스라엘보다 믿으라고 여호수아는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그냥 숫자 하나 더 채우라는 식의 동행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바탕의 질서로서 움직이는 데 이것이 하나의 집결로 보여줍니다.

그것이 ‘중보자’입니다. 신약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중보자’의 본질이 ‘말씀이 육신됨’입니다. 즉 ‘말씀’의 이 지상에서 성취가 되면 비로소 나타나시는 분이 중보자라는 겁니다. 따라서 말씀이나 언약이나 율법은 이 중보자가 구체적인 인물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고 계속 출현하게 됩니다.

일단 여호수아 시대에서는 죽은 ‘요셉의 뼈’로 나타나 있습니다. ‘요셉의 뼈’란 요셉이 살아 있을 때를 말해주는 증거물이 아니라 요셉이 죽고 난 뒤에 생겨나는 사물입니다. 이는 곧 ‘죽은 자가 산 사람들 속에 들어와 중보자적 기능을 하게 될 때만 그들은 제대로 산 자가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산 사람들은 그들의 활동력을 더 신뢰합니다. 살아 있는 본인에게서 나오는 힘이 자신들을 더욱 살게 한다고 믿습니다. 문제는 ‘산다는 것’과 ‘말씀이 말씀대로 되는 것’과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반대의 성격을 나타나게 됩니다. 말씀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버리고 싶어합니다.

자기 힘으로 매사가 잘 되고 있는 상황에서 구태여 말씀대로 살 이유가 없다고 보게 됩니다. 말씀의 자리에 자신의 상식과 기분이 개입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언약을 주시고 굳이 요셉으로 하여금 요셉으로 내려가서 살게 하신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마지막 언약 체결이 마태복음 26:26-28에 나옵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대목에는 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는 산 사람이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최종 언약체결 상황입니다. 즉 말씀에 대해서 인간들은 배제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이런 배제결과를 낳기까지 구약에서 그 이유가 드러나야 하겠지요.

인간은 중보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유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본인들 각자 중보자로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작용해야만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자신이 세상의 균형되는 지점에 놓여 있다고 자부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7에 보면,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인간들은 누구나 자기 소득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 이유는, 만사형통하다는 포상을 얻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본인들이 말씀을 지키는 중심인물로 들어서게 된다는 점입니다. 즉 말씀을 잘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를 가름하는 기준이 본인들이 성과에 달릴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나타난 최종적 언약체결은 앞서 살아온 인간들의 모든 시도나 기대를 무산시킵니다. 과연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진행되는 걸까요? 중보자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식당에서 새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식탁에 진 비닐을 깝니다. 그러나 손님들이 뱉아 낸 각가지 음식 쓰레기가 그 비닐에 그대로 비닐 위에 쌓이게 됩니다.

나중에 손님이 가고 난 뒤에, 주인은 손님들의 음식 쓰레기 내놓음에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닐 채 그대로 묶어서 갖다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중보자는 인간 탓을 새삼스럽게 하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이익 위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과거 요셉에 주어졌던 그 약속과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주신 그 약속이 합치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스스로 자발적으로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 원리가 마지막 언약성취인 십자가까지 이어집니다. 누구의 협조나 도움이 필요치 않고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의도로 새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적용에 대해서도 인간으로부터 조건을 따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속 질책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중보자만이 하실 일을 외면하는 경우입니다.

잠언 27:5에 보면,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로 책망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중보자의 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항상 십자가 앞에서 믿음 없음으로 들통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10-06 19:59 
255강-여호수아 24장 25~28절(증거의 돌) 201910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25~28절입니다. 구약성경 358페이지입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백성을 보내어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였더라”

여호수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돌이 사람 말을 듣는다고 이렇게 과장을 하려고 한 것인지 아니면 진짜 돌이 사람 말을 들었는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외치면서 하는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 앞에 오니까 “너희들이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라고 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여기지 말고 돌로 다시 돌리자는 말이죠. 인간은 흙이니까 하나님은 흙과 상대하신 거예요. 우리 주민등록에 내 사진 나오면 흙 사진 찍혀 있는 겁니다. 흙입니다. 흙은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여기겠지요. 흙은 사람의 말씀을 순종 못 한다고 여기겠지요. 흙이 사람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이건 불가능하다고 여기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고자 우리로 하여금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겁니다.

세겜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모아놓고 돌무더기를 만들었는데 이건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이와 같이 묻는 거예요. “너희들이 인간이야? 아니면 돌이 이스라엘이야? 둘 중의 하나를 해라. 이 돌과 같이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있는데 너희들은 배신할 거야. 하지만 배신하면 멸망한다는 이 이야기는 너희들과 이 자리에서 같이 들었던 돌이 증거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물론 돌이 하나의 개체로서 활동하고 그런 것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결국 돌이고 흙이니까. 돌보다 낫고 흙보다 낫다고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너희들의 가치 너희들의 체면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이 너희들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다 풀같이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라는 이 원칙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빈손으로 하나님께 되돌아오는 법은 없어요. 아라비안나이트에 보면 나는 양탄자 있지요. 양탄자가 있을 때 아랍사람들이 그 양탄자가 아이들 동화 같지만, 사실은 인간의 마음에 날고 실은 충동 같은 것을 그대로 동화에 잘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양탄자만 날아다니면 그것은 별로 우리에게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양탄자 위에 내가 같이 앉아서 휙휙 날아다녀야 그게 좀 멋있어 보이죠. 하나님의 말씀만 날아다니지 않고 하나님의 그 말씀에 그 말씀을 담을 존재가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나르는 양탄자 위에 싣게 되면 나는 양탄자가 자기 주인을 알아보고 비로소 날아다니는 그 의미가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뭐냐 하면 이 모든 말씀이 어디를 겨냥하느냐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중보자입니다. 중보자. 모든 언약과 모든 말씀과 율법은 한 인물을 향하여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언어가 단어가 하나의 인물로 구체와 된다고 할 때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는 그게 수긍이 안 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혀로 만들어진 소리의 음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인간이 자기의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써 끝납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단어 그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육신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이건 상상도 못 한 겁니다. 어떻게 말씀인데 단어가 육신이 될까요? 한국말이 육신이 되고 영어가 육신이 된다면 이게 믿어집니까? 말씀이 육신이 될 때 그건 참 신기하지만 그거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왜 구태여 말씀을 우리 인간들이 지키면 될텐데 왜 구태여 율법이 말씀으로 어떤 특정 인물로서 이 땅에 나타나야 하는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가 더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 인간들은 내 말을 못 지켰다는 거죠. 율법에 따르면 못 지키면 마땅히 뭐 하는가 하면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여기 여호수아께서는 너희들은 말씀을 지키지를 못한다. 그 못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돌로 증거되게 한다. 그런데 그 자리가 뭐냐 하면 바로 세겜이라는 자리에 집결한 거예요. 그 세겜이라는 자리가 왜 중요하냐 하면 여호수아 24장 32절에 보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라고 되어있어요.

이미 오래전에 죽었던 그 조상 뼈를 그 흉측한 뼈, 인간의 해골을 그 죽은 장소에 그냥 놔두면 될 것을 가지고 그것을 기어이 가지고 나와서 이 약속의 땅 정중앙에 있는 세겜 땅에 묻겠다고 한 이것은 여호수아가 그렇게 고집스럽게 묻겠다고 하고 또 요셉의 유언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한 그 취지가 뭐냐 하면 내가 너희를 보는 게 아니고 너희들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요셉의 뼈의 이동 경로와 그가 멈추는 곳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겠다는 그것이 완료된다고 알려주는 지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뭘 보느냐 하면 만약 여러분들 한 무리가 어두운 곳에 가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손전등을 하나 들고 간다고 칩시다. 그리고 깜빡이는 점멸등을 들고 간다면 공중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면 뭔가 시커먼 무리는 안 보여도 깜빡깜빡하는 점멸등 또는 손전등은 보이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드론 띄워서 보게 되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목해서 보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요셉의 뼈에 주목하는 거예요. 요셉의 뼈가 뭐 그리 중요한데 산 사람보다 중요하냐고 물으면 여기서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산사람보다 죽은 분이 더 중요해요. 삼강오륜은 죽은 분보다 살아있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만, 이 성경은 산 사람보다 죽은 분이 더 중요해요. 죽은 사람의 뼈가 담기지 아니하면 우리는 깜빡깜빡하는 점멸기가 없는 부류가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천국 가는 길을 잃어버립니다.

갈 수가 없어요. 우리 안에 이미 죽은 분이 있어야 해요. 우리 안에 주님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어야 해요. 주님이 인도하는 겁니다. 죽은 분이 살아있고 그 살았다가 우리는 예수님의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임시로 살아있는 겁니다. 가마꾼이 중요합니까? 그 안에 탄 양갓집 규수인 딸이 중요합니까? 그 공주가 중요한 거예요. 귀한 집 자제분이 중요하지 가마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산적이 나타나고 적이 나타나서 양갓집 규수를 공격한다면 어쩔 수 없이 가마꾼도 산적 칼에 죽임을 당해야 하죠. 그러나 그것을 주인집 딸을 지켰다는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가마꾼이에요. 중요한 것은 중보자가 중요한 겁니다. 중보자가 모시고 있는 관계성.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백성 이도록 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호수아가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이스라엘아, 이스라엘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 너희를 움직이게 만들고 너희를 일정한 방향으로 가게 만들고 스톱시키고 정지하고 가고 정지하고 가게 하는 그 주인공은 너희들 속에 따로 존재한다”라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언약이 매치가 되어야 해요. 뭐가 매치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 말씀과 일찍 주신 그 언약, 요셉에게 준 그 언약의 약속과 지금 여호수아 안의 약속이 한 장소에서 만날 때 비로소 그 만남이 언약이 실질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움직이고 일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지금 세겜에 돌이 있다고 했지요. 세겜에 돌이 있는데 마태복음 26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돌이 아니고 예수님은 내 살과 내 피로 언약을 세우신다고 했거든요. 여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돌 앞에서 뭐냐 하면 25절에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라고 되어 있고 마태복음 26장 26절 27절에 보면 예수님의 살과 피로 언약을 세운다는 겁니다.

차이가 뭐냐 하면 여호수아에는 그 돌이 있어요. 그러나 마태복음에는 돌이고 뭐고 완전히 다 날아가 버립니다. 없어요. 그렇다면 구약에 있는 여호수아 말씀이 무효가 되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세겜 땅에서 전에 주었던 약속과 지금 여호수아에 있는 약속이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만남이 이루어져서 그 증거를 세겜의 돌이 증거 한다고 한다면 이건 상당히 구약 적인 무대 셋팅에 합당한 거예요.

구약 적인 무대 셋팅은 쉽게 말하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으면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에 축구를 하게 되면 공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죠.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이 운동장이 기울어졌구나. 공사해라”라고 해서 반듯하게 했는데 또 공사가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반대쪽으로 기울어져서 또 그쪽으로 공이 자꾸 가는 거예요. 비가 와도 한쪽으로 쏠리고.

그러면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정중앙에 중보자 같은 무언가가 있어야 하겠지요. 중심을 맞추는. 그래서 평평하게 되게, 축구공을 놓으면 그 자리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딱 그 장소에 있어야 하겠지요. 여러분들 여호수아 1장을 보면서 기억나는 구절 있습니까? 여호수아 1장에서 여호수아에게 당부하기를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너에게 복을 준다”라고 이야기했죠.

제가 그 대목을 설명하면서 기존 교회에서 설명한 것을 덧붙였습니다. 군에 입대하는 집사님 아들에게 목사가 신방 해서 말하는 것이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후방으로 빼주신다”라는 말씀으로 해석된다고 이야기했죠? 그리고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가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오랫동안 번창할 겁니다”라고 했지요?

여기서 우리가 싸워야 해요. 과연 내가 중심되는 축구공입니까? 내가 기념 돌입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는 거예요. 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계속해서 어떤 위험성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중심으로 계속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게 되면 중심자리를 내줘야죠. “죄송합니다. 제자리 아닌데 건방지게 제가 자리 차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내놓아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이 오든 하나님이 오든 나 잘되게 해달라고 악을 쓰면서 기도하면서 자기중심을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중보자가 아닙니다. 중보자의 특징은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살과 피를 내놓아야 해요.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식당에 가게 되면 옛날에는 식탁을 행주로 닦고 새 음식을 내놓지만 전라도에 가면 한 상을 차려주는 데가 있어요. 반찬 50가지 하는 그런 곳. 거기에서는 반찬거리 오기 전에 먼저 밑에 비닐을 쫙 깔아줍니다. 비닐을 깔고 회 오기 전에 츠끼다시라고 해서 먼저 나오고 회오고 할 때 고기 가시 같은 것은 그냥 뱉어도 돼요. 어차피 치울 때는 행주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니고 깔아놓은 비닐을 몽땅 싸서 몽땅 치워버리면 되기 때문입니다.

중보자가 뭐냐 하면 우리가 아는 내가 아는 나 중심의 현실 밑에다가 중보자의 비닐을 깔아버려요. 예수님의 살고 피를 깔아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하고 어떤 잘못을 하고 어떤 우수한 일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몽땅 묶어서 몽땅 다 천국으로 보내버려요. 이게 중보자입니다. 중심보다 더 중심. 내가 중심이라고 여기는 그 밑에 나보다 더 큰 중심, 이것이 중보자예요.

중보자 앞에서 “아이고, 내가 가시를 4개나 해놓았네. 간장게장은 먹지도 않고 다 내놓았네. 간장게장 속이 다 엎질러졌네”라고 말하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비닐 위에 문제니까. 밑에 깔리고 또 깔린 중보자가 이미 감당하고 담당할 수 있는 것이 밑에 깔려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내가 감당 못 한다고 내가 지옥 간다고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악마에게.

요셉의 뼈를 왜 자꾸 중심으로 이동하게 하느냐 하면 요셉의 뼈가 하나님의 야곱 언약을 증명해 주고 있거든요. 야곱 언약은 야곱이 거짓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은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중보자적 입장에서 우리에게 책망하고 지적할 때는 그 지적과 책망은 행동 똑바로 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준 사랑을 네가 왜 못 믿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 보면 자기는 온갖 성경 구절 다 외우고 온갖 말씀 다 지키고 그것 가지고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사람 보면 참 답답해요. 그 사람에게는 중보자가 없어요. 자기가 중보자예요. 남 욕할 것까지도 없고 우리 평소에 푹 쑤시면 툭 나오는 반응들이 그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행동 잘못하면 벌 받고 징계받는다는 것들이 자꾸 나오지 않아요? 그걸 책망하는 거예요.

“네가 아직도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겠다는 그런 행세 자꾸 나올래?”라는 책망이죠. 교회 유아실에 전기 바꿔야 하는데 “전기 바꿨습니까?” 그러면 전기 안 바꾸면 지옥 갑니까? 만약에 내일 전기 바꾸려고 하는데 오늘 죽으면 지옥 갑니까? 상관없지요. 전기 바꿀 때 되거든 감사함으로 바꾸면 돼요. 잠언서 27장 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이렇게 복음으로 나무라는 것, 그것도 전면적으로 나무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겁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옛날 1300년대 서양 역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때 직업은 생필품을 제공하는 자를 직업이 있다고 본 거예요. 그럼 어떤 사람이 직업이 없는 사람이냐 하면 솔로몬 대학교 교수가 직업이 없어요. 왜냐 하면 말로 먹고살기 때문에 직업이 없는 거예요. 감자나 콩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직업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베네치아 곤돌라 사공도 직업이 없는 사람이에요. 무직.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성직자들이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쌀과 고기 같은 것을 직접 만들지 않기 때문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구약 때 방식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구약 때 방식은 사람들이 직접 나에게 와닿지 않으면 사람들은 레벨이 너무 낮아서 직접 돌로 증거 한다고 하거나 직접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뭘 보여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이해가 안 돼요. 그걸 줘도 이해가 안 되지만.

요셉의 뼈를 가지고 “가져왔다”라고 하면서 그 뼈를 보여주고 “요셉의 뼈가 이렇게 있지만, 약속대로 하면 요셉은 결국 부활의 날이 있고 부활의 장소가 지금 바로 이 요셉의 뼈가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데 드디어 세겜에서 최종 도착지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죽었던 자는 요셉의 뼈와 같이 요셉과 더불어 야곱과 더불어 이삭과 더불어 그 조상 아브라함과 더불어 부활 됩니다. 영생 얻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약속입니다”라고 요셉의 뼈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수준이. 그때 그 당시의 수준이 그랬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때 그 수준으로 계속 그들이 제대로 이스라엘답게 되었느냐는 겁니다. 그 보는 수준 가지고는 인간을 덮어씌운 악마의 권세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어요. 악마의 권세를, 죄의 권세를, 보는 것으로는 이겨낼 재간이 없었어요. 지난 울산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교회에서 자꾸 뭘 반복적으로 해봤자, 이건 이미테이션(Imitation)이고 모방밖에 안 된다고 했어요.

모방으로 구원되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 뭔가 한 것을 했다는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꾸 반복적인 행위를 해요. 교회 나오기, 성만찬 하기, 기도하기, 성경 몇 장 읽기 하며 반복적으로 하는데 제가 울산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페어퍼로즈(Paper Roses)라고 했어요. 1960년대 나왔던 노래 페어퍼로즈. 종이 장미라는 거죠.

남자가 자꾸 장미를 가져다주는데 여자는 뭐냐 하면 당신의 진심과 비교할 때는 이 장미는 종이 장미이고 가짜 장미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은 이런 차이가 나요. 그럼 신약은 뭐냐 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이 마태복음 26장에서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만찬을 해버리는 거예요.

성만찬 했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어디서 문제냐는 겁니다. 어디서 문제. 그만큼 우리 자신이 가면 갈수록 우리 자신이 중보자 대체자로서 자꾸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식으로 그런 본성이 자꾸 드러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쪽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겁니다.

이제 기억납니다만 지난 추석 특집에 ‘안녕하세요’라는 KBS2에서 하는 방송이 있어요. TV 거의 안 보는데 우연히 보니까 나와요. 그 프로 보니까 어떤 60대 아주머니가 치킨집을 하는데 전에는 계란 도매상 해서 남편 말로는 10억 날렸다는데 여자 말로는 1억 날렸다고 해요. 그 60대 아주머니가. 그 남편이 자기 고민거리를 방송국에 신청했는데 “제발 남편하고 좀 살자. 놀러도 가고. 제발 일만 하지 말고. 남편이 옆에 있으니까 같이 이야기도 하고, 놀러도 가고, 이제 60 넘었으니 베트남도 가자”라고 이야기해요. 너무 여자가 한 곳에 빠져 있어요. 여자가 어디에 빠져 있느냐 하면 ‘카 더 가든’이라는 가수에 빠져 있어요.

여러분 ‘카 더 가든’이라는 가수 압니까? 우리 말로 하면 ‘차 정원’이라고 이름이 굉장히 오묘해요. 카 더 가든. 암튼 되게 촌스럽게 지어놓았는데 그 사람 나이가 30세예요. 30되는 젊은 가수가 콘서트 열고 노래하면 거기에 다 빠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남편은 10억 날리고 여자는 1억 날렸다 하니까 중보자적으로 중간 5억 날렸다 합시다. 그 여자는 5억 날린 아픔을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카 더가든’이라는 그 남자 가수의 노래만 들으면 그게 다 해소되는 거예요. 그게 다 해소돼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여호수아를 말씀드리고 마태복음을 말씀드리고 예수의 피, 중보자를 이야기해도 인간은 기분 따라 살게 되어있습니다. 자기 기분을 극복할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이 편하면 하나님 믿든지 예수 믿든지 부처 믿든지 나는 내 마음 좋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인간 사회가 다 그래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백날 돌이 증거한다 하고, 여호수아가 당부하고, 여호와를 믿으라고 해도 결국 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미처 몰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기분 따라서 살지 주의 말씀 따라 기분 따라 진리 따라 사는 존재가 아닌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그 몰랐던 기간이 구약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약에 대면 우리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웬 은혜인지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개과천선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기분 따라 산다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중보자 자리에 있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과 중보자는 따로 계셔야 한다는 것, 요셉의 뼈가 나의 중보자라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지 나를 그냥 방치해 버리면 나는 내 마음대로 살다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구약은 전체가 율법으로 우리에게 지적해 주는 겁니다.

전에 방송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제가 TV를 잘 안 보는데 얼른 보니까 엄용수라는 사람이 나와요. 엄용수라는 사람이 이혼을 2번인가 3번인가 한 개그맨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엄용수 만나려고 많은 여자들이 결혼해 달라고 기다리고 있어요. 이혼을 2번이나 한 사람인데 왜 그렇게 결혼을 하려고 할까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여자들이 자기의 빚을 갚기 위해서 결혼해 달라는 거예요. 나는 여자들이 그렇게 악한 줄을 70세 다 돼가면서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못 돼 먹은 줄을.

남자의 순정을 자기 빚을 갚기 위해서 뭉개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혼자 사는 여자보다 더 무서운 건 집 없는 여자다’라는 말. 이 세상이 예수를 믿든 권사가 되든 집사가 되든 아무 상관없이 자기밖에 모르는구나. 이게 바로 여호수아가 이걸 미리 내다본 것 같아요. 너희들은 결국 안 믿고 이 돌이 너희들은 결코 하나님 믿는 사람 아니라고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믿는 자가 아니고 믿음 없는 자로서 주님의 믿음과 바꾸고 교체하면 돼요. 믿음이 있어 버리면 주의 믿음이 있을 자리가 없어요. 나는 내 기분 따라 살아가고 나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것밖에 안 되는 믿음 안 되는 사람인데 주님의 믿음과 바꾸기 위한 사전 조치로 내가 강도처럼 주와 함께 십자가 달렸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에는 돌이 증거했지만 지금은 십자가가 뻔히 알고 있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리고 믿음 없음으로 들통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