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수련회 소감 170803 송민선

아빠와 함께 2018. 1. 16. 10:02
2017-08-03 10:44:33조회 : 501         
수련회 소감이름 : 송민선 (IP:116.46.87.22)
살기위해, 남들보다 더 잘 살기위해 에너지를 축적한다. 팽창과정에서 피 터지는 경쟁과 싸움이 유발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리는 피는 아픔이라기보다 희열에 가깝다. 그 싸움과정에서 아무도 눈치체지 못하는 괴이한 사건이 발생한다. 십자가 안에 존재하는 고유한 시간과 공간의 분출 - 종말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인간들의 존재의 의미를 와르르 무너뜨리고, 뻥!뻥! 사정없이 구멍을 내는 십자가 효과가 분출된다.

진짜완료가 찾아와 가짜완료(본인완료)를 난타하기 시작할 때, 오히려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새로운 욕구가 생긴다. ‘저는 절대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버릴 수 없다. 내 자신을 나에게서 지울 수 없듯이...내 자신을 스스로 부인할 수 없듯이. 그래서 지옥으로 직행한다.

서로 대치되는 두 개념이 연결사 ‘and' 로 나열된다. 그리고 뒤에 온 개념에 의해 앞의 개념이 뭉개지고 새로운 의미가 등장한다.
남자 와 여자 -> 여자의 등장으로 남자는 인간(생명의 세계)이 아닌 흙이라는 물질(죽음의 세계)이 되고
유다 와 이스라엘 - 이스라엘과 유다의 충돌에서 죄다 한통속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국가로 등장하고
선지자 와 국가 - 국가의 횡포에 의해 선지자가 품은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가 흘러나오면서 눈에 보지지 않는 은밀한 나라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주님의 주되심, 언약의 성취를 위해, 도리어 하나님은 대립적 요소를 유발시키시고 인간들의 의미탐구를 유도하신다. 스스로 찾아 낼 수 있다는 헛된 욕망에 더~더~라고 동조하시며, 맞춰주신다. 주님의 주되심의 재료로 잘 무르익기를 유도하셔서 눈에 보이는 두 구조를 신발 끈 조이듯 잡아당겨 양쪽이 다 무너지게 하신다. 이런 멸망의 과정만이 늘 십자가가 종착점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없음으로 인도되는 길. 우리가 복음을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죽어 마땅함을 알리는 길. 이미 죽었는데 살아있다 착각하고 있었음을 폭로 당하는 길이 된다.
망상으로 조작된 상상의 천국을 꿈꾸며,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 속에서 나름 보람차게 살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고 있는지. 이 삶에 보탬이 되고자 각종 정보를 끌어 모으고, 성경이든, 십자가든, 예수든, 도움이 된다면 다 수집하기를 멈출 수가 없다. 아무 요청 없이 들이닥쳐 우리에게 아무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십자가 효과로 이 적폐가 무너짐을 당하지 않고는 잠시도 ‘뭔가 이상하다‘, ’뭔가 잘 못됐다‘를 그리고 종말을 느낄 수가 없다.

백성이라는 토대가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생기는 왕이 아닌, 모든 것이 마감된 상태에서 없음이라는 공백에서 진짜 왕이 등장하고, 그 왕에 의해 백성이 만들어진다. 그 백성 안에는 자신들을 파괴하는 줄도 모르고 미친 듯이 사랑하는 요소들이 들어있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 창기의 아기와 같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요소들. 그런데 예수님의 백성 발굴 작업은 이 소중한 것들을 죽이고, 두 동강으로 쪼개며 죄다 없음으로 만드시니, 그 현장은 아픔이고, 분노이고, 결국 주님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주님만 성공하시는 장소가 된다. 
마치 자신들이 요청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자기 욕망대로 살고 있는 ‘말하는 자’가 ‘경험하는 자’로 바뀌는, 
원래부터 자신의 것은 없었던 것을 깨닫는, 
우리가 우리에게 손댈 수 없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리고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토해내는 장소이다.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주님의 뜻과 함께 우리의 막사는 삶이 등장해 줘야 비로소 진짜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 주님이 죄인을 건지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되심에 죄인이 재료로 필요하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언약 적 다윗을 위해 육적인 다윗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독보적 자리를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 판명되어야 한다.
내가 살아 있다 착각하는 순간이 가장 더러움을 유발 시키는 순간이다. 그렇게 안하고 싶어도 자동으로 무의미를 의미로 만드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숨 쉬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본능인 것처럼 눈에 보인다 하는 것들은 다 끌어당겨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과 피땀 어린 노력으로 가치 있는 의미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경배하기 위한 모든 의미를 압축시켜 고이고이 모셔놓은 성전을 헐어버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타를 유발하기에, 죽음을 부르기에 충분하다. 그 살해의 현장이자 피흘림의 현장을 거쳐 지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마감을 알리며 들이닥쳐 기억의 다발들을 모조리 동강내서 쓰레기 소각작업을 시작한다. 내 존재 자체가 죄였음을 똑똑히 확인시키시며, 존재의 의미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 탈탈 털어내 주신다. 주님이 애초에 원하셨던 것은 깨끗하게 비워진 공간, 우리의 더러운 의미로 가려져 있던 공백이다. 주님의 성전 네트워크에 연결된 도구로 재구성 되면서, 이제는 오로지 주님이 하시는 일만 증거 되는 성도로 쓰인다. 보이지 않는 나라를 증거 하기 위해 보이는 나라가 사용되는 것처럼, 홀로 살아 역사하시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 성도를 쓰신다. 부자로, 거지로, 강도로, 살인자로, 무엇으로든 쓰실 수 있다. 

성도는 엄마 없이 만들어진 존재다. 그리고 엄마 없는 사람은 오직 엄마 없이 태어난 존재의 선택에 의해서 발생한다. 불임여성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엄마 없이 태어나게 되고, 이삭을 통해서 사라와 아브라함이 새롭게 발생한다. 
기존의 혈과 육의 개념이 아닌 다른 토대가 삽입되면서. 바람이 부는 것이 보이지 않고, 그 때와 방향도 임의적이 듯, 자신들의 의지와 예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꾸준히 재편된다. 
그저 주님의 일방적 믿음이 성도를 채우고, 성도는 그 믿음에 의해 조종당한다.

엘리야를 통해 보여준 이벤트 역시 엘리야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로 전개된다. 오히려 물을 뿌려 인간의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완전 차단시켜, 하나님의 언약의 살아있음만을 드러내신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단순한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그 자연을 이용해서 우상숭배로 더럽혀진 인간을 향한 여호와의 저주와 심판임을 증명하신다.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마른 땅을 적셔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기에 앞서, 선인과 악인에게 차별치 않고 비를 내리시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핑계치 못할 자들이 되게 하심을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특심을 은근 챙기며 스스로 죽기를 청하는 엘리야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오직 피동적 존재로 선택된 남은 자 칠천을 말씀하시며, 개인구원이 아닌 집단구원을 위해 주님이 원하실 때까지 엘리야에게 주어 질 역할을 다 하게 하신다.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고...’ 라는 의미는 말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온 몸으로 발산된다. 한 번도 남과 똑같다는 말을 듣고 싶은 적이 없었다. 한 발짝이라도 더 앞에 서고 싶고, 더 착하고 싶고, 더 의롭고 싶은 단독적 본질을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 악마의 힘에 압도되어 그 질서체계에 한 몸이 되어 있는 데, 무슨 수로 버리고 빠져나온단 말인가. 악마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외부의 존재가 찾아오셔서 스스로 구타 유발자가 되어주시는 방법밖에 없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악마의 질서세계에서 착하디 착하게 예의바르게 살아온 우리에게 이런 끔찍한 일들을 시키시면 누가 자진해서 그 일을 하겠는가. 우리가 마귀 하수인인 것을 아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 
무엇을 건들어야 양의 탈을 벗고 괴물로 변해서 주님을 사정없이 구타하게 될 줄을 너무 도 잘 아신다. 우리의 단독적 자리를 흠집 내고, 구멍 내고, 박살내실 때, 구타 뿐 아니라 주님을 죽일 수도 있는 악마이고 괴수임이 들통 난다. 
더 이상 무슨 말 하리요. 그저 안개가 되고, 먼지가 되게 하셔서 주님 앞에서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해 주시면 하는 바람만 남게 하신다. 
우리의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 복음 중에 복음이다. 도대체 어디 이쁜 구석 하나 없는데, 이렇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수련회도 참석하게 하셨는지, 이해가 안가서 그냥 감사만 하게된다.
 우인숙 (IP:59.♡.42.44)17-08-03 19:25 
나 왜?? 우리 민선씨 글 읽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지~~~누가 아는사람 좀 갈쳐줘유?
 공은주 (IP:218.♡.196.72)17-08-03 21:2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너라는 것이 있는 이유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너라는 것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야 된다. 

소감문도 눈물도 주님의 기능이시고,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입을 막고 죄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의 눈물이 나옵니다.

 이상규 (IP:42.♡.33.69)17-08-04 08:08 
우집사님... 
나이가 드시면 안구 건조증 등의 영향으로 바람을 맞으면 눈물이 줄~줄~ 흐릅니다.. 

이번에 눈물을 흘리게한 바람의 좋류는 성령의 바람입니다..^^

'송민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련회 소감 190802 송민선  (0) 2019.08.03
수련회소감 180803  (0) 2018.08.21
수련회 소감 170112 송민선  (0) 2018.01.16
수련회 소감 160805 송민선  (0) 2018.01.16
재조정 160316 송민선  (0) 2018.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