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요한복음 21장 19절(해독제)190903b-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초심이 어디까지 초심이라고 하느냐. 그런데 그 초심을 이끄시는데 있어서 주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 인간들, 사람들을 통해서 그건 초심이 아니야 아 그것도 초심이 아니야 더 더 가야해 아니야 아니야 결국 초심을 제대로 초심으로 보여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제대로 된 선지자 없고 제대로 된 메시아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구약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에 선지자가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요. 그 아무도 없다면 그 해독제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결국은 멸망당하는 것이 처음부터 악마의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저주받는 것은 그냥 코스에요 코스.
그냥 코스대로 갈 뿐이지 뭐 안달부리고 뭐 재롱부리고 앙탈 부린다고 코스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흔히 인생 살면서 주여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하는데. 시험, 다른말로 하면 유혹이죠. 시험을 이기는 것은요 이것만 있으면 다 이겨요. 영원한 것. 영원한 것에 복속이 되고 거기에 속해버리면 영원한 것만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시험은 시험거리가 없지요.
아 죽겠다는데 다른 조건 필요 없다는데 무슨 시험들 여지가 없지요. 영원한거니까. 자꾸 일시적인 해결책을 달라고 하면 안돼요. 그거는 그 다음은 또 유혹이 들어오면 이길 수가 없어요. 자, 그렇다면 그동안에 영원한게 없었다는 뜻입니다. 누가 메시아 될만한 그런 자들이 없었다. 그러면 목사님 구약을 잊읍시다. 아니요 구약을 잊으면 안돼요.
그들이 뭐 때문에 진짜 그들은 제대로 된 선지자 예수님처럼 되지를 못했는가를 찾아내야 돼요. 왜냐하면 그들이 했던 그 어설픔이 그대로 지금 베드로 요한에게 주어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이 몸이 떠날 때까지 이 근본 몸이 우리의 후패한 몸이 떠날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 이야기, 우리 이야기로 계속해서 채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한번 대목을 볼께요. 열왕기상 13장 한번 봅시다.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거기에 이름 모를 선지자 나오죠. 이름 모를 선지자. 그 이름 모를 선지자는 무슨 선지자냐 하면 사자한테 lion한테 물려죽은 선지자에요. 그 선지자.
자, 이것이 오늘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고 구약에 제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적어볼께요. 무엇이 유혹이냐 무엇이 시험이냐. 시험을 이기지 못했거든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조건을 달게 되면 자기 정당성에 신경 쓴다. 조건을 달게 되면 자기 정당성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어요. 나 건드리지 마라. 나 선지자야 이거 있잖아요. 조건을 달게 되면 자기 정당함 나 선지자 맞아 라고 신경을 쓰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신경을 쓰게 되면 나의 나 선지자 됨을 요새 말로 나 신자 됨을 지키기 위해서 아까 이야기한 마지노선을 항상 자기가 제작해요. 시험을 외부에서 시험한 것도 맞지만 내부가 우리의 이미 옛 몸 아담의 몸이 자기 정당성을 사수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떤 법칙과 규칙을 자기가 제정을 해가지고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요한계시록에 있어서에 악마의 나라가 왜 허물어진다고 했어요? 자기가 자기끼리 싸움하지요. 싸움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매일같이 내가 지정한 법칙과 내가 그걸 따라잡아야 될 내 욕구와 맨날 그 싸움한다고 앵그리버드가 돼. 화난얼굴을 하고 다니고 돌아다닌다고.
“미쳤어 미쳤어 내가 왜 그랬지.” “뭐?!! 왜 네가 네 몸을 치고 난린데. 네 몸 아니고 주의 몸 네가 왜 치는데.” 아~~초심을 유지해야 되는데 초심불망. 초심을 유지하면 망하지 않는다. 초심해서 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초심 지켜가지고. 일방적 초심이에요. 지가 지 맘대로 초심이에요.
그 초심이 뭡니까? 마지노선을 가지고 있는 초심이기 때문에 그 초심을 가지고 자기 정당성 이라고 하고 자기 의라고 합니다. ‘자기 의’. 쓰잘데기 없는걸로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이건 유혹이야. 유혹이라니. 네가 네 맘대로 유혹해? 지가 유혹이라고 자기가 규제해놓고 마치
그 저 세르반테스가 쓴 소설 돈키호테. 돈키호테 있잖아요. 돈키호테가 자기가 미쳐가지고 네덜란드의 풍차 있잖아요. 풍차보고 이 사탄아 물러가라. 자기가 무사 되가지고 싸워도 아주 용감하게 싸우데요. 미친 자에요 전부다. 마귀가 갖고 온 바이러스 퍼져가지고 미쳤어 전부. 미쳐가지고 자기 정당성 싸움하지요.
기자들 다 불러놓고 8시간 동안 두 시간 쉬어가면서 돈키호테 놀음하고 있어요. 나는 관대하다. 이거는 영화 300에 나오는 이야기. 나는 정당하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관대하다. 평소에 그 사람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평소에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악마가 집어넣어준 병균체의 증상입니다. 병균의 증상이 그런 증상이에요.
열왕기상 13장에 보면 이 마지노선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한번 보세요. 하나님의 사자 이름도 없어요. 해가지고 그 남쪽인데 북쪽 가가지고 하나님의 예조, 예언을 들으라 징조를 들으라 해가지고 재가 쏟아지고 거기서 북쪽 왕이 여로보암 왕이 저놈 잡아라 하니까 손이 다시 뭡니까? 뻣뻣해졌어요. 놀라운 기적 아닙니까.
뻣뻣해지니까 이것도 펴주세요 해가지고 또 간절히 부르짖어 가지고 6절에 또 하니까 또 펴졌다 이 말이죠. 펴주니까 8절에 뭐라고 제시하느냐 하면은 한 의리 하는 사람이거든요. 왕쯤 되면 의리 좀 하잖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께서 왕의 집 절반을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 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아니하니라”
지금 전반적으로 좀 괜찮았지요? 야 이거 대단한데 메시아 아니야 이 사람? 대단하네. 야 이 사람 초심을 유지했네. 초심불망인데. 정말 이건 안 망하겠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게 악마가 나도 같은 계시 받은 선지자다 이 말에 그만 다 넘어가버린거에요.
그러니까 사자한테 물려 죽은 이 선지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추가적인 다른 변수를 생각 못한거에요. 자기 나름대로의 초심이 자기가 과거에 살아온 것 중에서 괜찮은 것 전부다 끄집어내가지고 이정도면 지키면 나도 한 선지자 하잖아 라고 버티는 거에요. 이정도 하면.
그리면 이거는 뭡니까? 이 포괄적인 이 전 세계가 다 악마의 병이 들었다는 그런 포괄적인 인식을 못하고 자기는 선지자라는 그 자기의 자존감, 나는 선지자니까 주의 말씀 들으면 벌 당한다 안 당한다? 남이야 죽던 말던 나만 벌 안 받으면 되지 그런거.
또는 다른 말로 해서 주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말씀대로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탓해도 저 탓하면 안돼요. 이게 저의 자존심의 마지노선입니다. 이러고 있다가 주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다른 선지자가 “아이고 나도 계시 받았습니다.” 그 한마디 하고 갔어. 나도 계시 받았다. 내용에 보면 나오지요.
열왕기상 13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어떻게 자료가요 역사 고증학적 자료가 똑같은 자료인데 자료가 두 개가 나왔어요.
자,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이 말했어요. 모든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어요. 내가 옳다면 무조건 옳다. 내가 아니라면 무조건 아니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옳다 그르다의 최종적인 판단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인간은 자기 정당함을 유지하는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십자가를 증거하는 해석을 하는게 아니고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 누가 뭐래도 나 구원받았어. 너만 구원받나? 나도 구원받았어 라는 그런 심보로서 성경을 보게 되어 있어요. 그 신앙을 무슨 신앙이라고 하냐면 여러분 똑바로 한번 보세요. 그 신앙을 무슨 신앙이라고 하는가. 좀 길어요.
이게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에요.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결국은 무슨 신학인가. 악마가 집어넣은 신학이에요. 문제는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이성으로서 이 신학 말고 다른 신학이 없다는 거에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신학의 마지막이에요. 정통 개혁주의 신학.
옳고 그름은 역사가 알아서 재단해줄거다. 한꺼번에 옳다고 할 수 없지만 계속 주어지는 사태를 통해서 잘라낼 것을 잘라내고 수정할 것을 수정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걸 진리라고 보는 거에요. 그러면 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선배가 있어요. 선배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탈무드. 유대신앙이에요 유대신앙.
아브람부터 모세가 준 계시를 가지고 역사를 통해서 수용할거 수용하고 고칠거 고치고 보탤거 보태서 가장 이거는 누가 봐도 천사가 봐도 하나님 봐도 이거는 이것만큼은 하자 없이 옳다는 것만 엑기스를 골라서 골라서 계속해서 하는 그 일을 랍비라는 자들이 거기 전문가라서 고이 그 전승들 귀한 진리의 전승들을 간직해온겁니다.
그 간직한 사람이 그 관여한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 말씀대로 성전 관리한 사람이 사두개인이고 그 말씀을 직접 이렇게 모집하고 하는 하부기관이 서기관들이고 세트 아닙니까?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그 세트가 무슨 세트지요? 예수님 죽이는 세트지요. 그 세트가 보탰어요. 정통 개혁주의 신학 보탰어요.
자, 정통 개혁주의 신학 복습합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 시작은 뭐다? 말씀을 대할 때 전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고 그걸 증명하려고 성경을 보는 거에요. 그러면 그런 경우에 본인은 그렇게 말 안하고 이렇게 합니다.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 성경 본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초심인지 도대체.
에베소서 2장 요한계시록 2장에 뭡니까? 네가 첫사랑을 버렸노라 되어 있지요? 그 첫사랑이 어떤 첫사랑? 뭐 12살 때 첫사랑? 16살 때 첫사랑? 그게 어느 첫사랑인데. 나이 60 되서 첫사랑도 있을테고. 뭐 어떤 첫사랑?
주님 만날 때. 주님 7살 때 만날 때하고 그 주님하고 17살 때 주님하고 어떤 주님? 24살 때 만난 주님 어떤 주님인데? 주님이 한두가지여야지요. 그 보니까 그거 생각난다.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라는거 있지요. 마지막 방에 가면 거울이 쫙 있거든요. 용쟁호투에서 싸움을 하는데 적이 거울에 비치니까 적들이 한 50명 돼 50명. 거울 때리고 있어. 거울이 온 사방에 다 비추는 거울인데.
그걸 환상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인간이 환상이 없으면 본인이 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환상이 없으면 인간이 주체를 정할 수가 없어요. 환상과 환상을 연결시켜야 내가 ‘나’라는 상징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환상을 실제로 보는걸 가지고 정신분열증이라고 이야기 하고요 아예 환상이 없는걸 가지고 신경증세라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말하는 정상적인 사람은 적당한 비전과 적당한 꿈으로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정상으로 보는거에요. 나는 꿈도 없다 하면 나가 죽으라 해요. 적당한 환상 속에 있어야 그걸 꿰어가지고 되든 안되든 관계없어 그걸 해줘야 내가 살맛이 나. 지금 내가 살 보람을 느껴요.
아이고 자식 앞에 놓고 나는 너 때문에 산다. 본인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아버지 엄마가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자식이 아버지 엄마의 환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환상. 그런데 진짜 애가 아프다고 해서 애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 바친다면 이거는 정신분열증 환자에요. 환상이 실제인줄 알고 있어요.
엄마와 딸이 있다. 엄마와 딸이 “엄마 나 사랑해?” “사랑해.” “그럼 엄마 나를 위해서 모든 재산 바칠 수 있어?” “바칠 수 있어.” “에이고 엄마 구라치기는.” 다음날 되니까 엄마가 쫓겨났어. 집 팔고 딸한테 다 넘겨가지고. 그거는 그 딸이 엄마를 좋아하겠습니까? 정신병자로 보겠어요? 정신병자죠.
농담으로 한걸 진담으로 여겼어. 나는 나폴레옹이다 이거 미친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내뱉는 것은 전부다 환상이에요. 우리가 농담 아닌게 없어요 인간은. 솔직하게 하는 것이 농담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자기 솔직히 어느 정도 솔직인지 몰라요. 자기 솔직도 모르는데 자기 솔직이 무슨 솔직인지.
취중진담? 술집에서 앉아서 노래부른다? 술을 먹었어도 뭘 먹었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데 무슨 솔직한걸 알아요 몰라요? 퍼도 퍼도 나오는게 솔직. 솔직을 한두번 해야지. 뭐 이건 양치는 소년도 아니고 늑대다!!늑대다!! 거짓말하고.
이 이름 모를 선지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선지자 노릇에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진짜 선지자 안하겠다는 것도 아니에요. 하겠다지만 인간이 지식 외의 것을 추가적으로 어떤 변수나 내가 모르는 사항이 주어져버리면 그것까지 버텨낼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인간의 초심은 악마를 이길 수 없었다를 증명해주는 거에요.
인간의 어떤 윤리도덕 어떤 낮아짐도 하나님의 원하는 천국의 조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부합되지 않으면 자기 딴에 초심이라고 우기면서 말할 때는 필히 그 결과가 뭐로 나옵니까. 자기 정당성으로 나오지요. ‘자기 정당성’. 결국은 이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핑계대서 나의 의를 이렇게 고취시켜서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시키는 거에요. 이런 것이 바로 유대사회였습니다. 선배니까. 유대사회죠.
그 유대사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봅시다.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3절.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요”. 이 대목이 어려워요. 아까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한다고 합니까. 보통 사람들은. 나 구원받은거 맞다. 나의 구원받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본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그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보는 거에요. 나 천당가는거 맞지요?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칩시다. 우리 보고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갑자기 어디서 귀인됩니까? 예수님이 갑자기 귀인되었다가 예수님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뭐다? 예수님 영접하지요.
그러니까 사람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봐 나한테 잘하란 말이야. 나를 영접하는 것이 주를 영접하는거야 라고 하는 거에요. 이 목사한테 새 차 사주고 목사 사택 잘해주고 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하는 것이다? 주님한테 하는거에요 주님한테. 그러면 나를 험담하면 뭘 받아요? 저주 받지요. 뒤에서라도 험담하지 말란 말이죠. 나를 돈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꽃으로 때리는 정도가 아니고.
선지자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고 의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고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인에게 냉수 한그릇을 준 것이 내게 한 것이죠. 자, 이 말씀을 십자가 전입니까? 십자가 후입니까? 십자가 전이죠. 십자가 전에 이야기 할 때에 이걸 누구 듣느냐 하면 제자들이 듣고 있지요.
그 제자들이 들을 때 신이 났어 신이 났어. 왜? 왜냐하면 자기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제자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이 나 제자들에게 잘해주는 것은 누구한테 잘해주는 것이다? 주님한테 잘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제자들은 현재 그 수준에서 십자가 전 수준에서 예수님하고 자기하고 한패인줄 한통속이라고 자부하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들 구원받았다고 자부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죠.
원어를 따지고 뭐 백날 따져 봐도 원어 따지고 번역 따져봐야 별 다른 추가적 내용 나올 이유 없지요. 딱 보면 모릅니까? 나한테 대접하는 것이 누구한테 한다? 주님께 대접한다. 거기 무슨 이의를 걸 수 있어요? 히브리어 헬라어 백날 갖다 대도 거기서 거기에요. 뭐 다른 큰 의미의 차이 못 느끼죠.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말씀은 제자들에게 전부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은 다 떠나고 말았지요.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3절 무효가 되어 버린 거에요. 왜? 한패가 아니고 따로 노니까 그 무효가 된거에요. 나를 대접한게 주를 대접한게 아닌게 되어 버려요. 왜? 내가 예수님을 떠났으니까.
그러면 그들이 뭐냐하면 뭐 없는 예수였습니까. 십자가 빠진 예수님이죠. 십자가 빠진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성경 모든 말씀을 어디서 이루느냐. 십자가에서 이루지요. 그러면 성경 해석은 내가 구원받은거 맞다고 해석하면 안되고 십자가를 가지고 도로 찾아오는 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봐야 돼요.
십자가 도로 찾아오게 되면 도망간 제자 누굽니까? 바로 내가 도망간 제자예요. 내 속에 내 아담의 본성을 일찌감치 알아서 미리 시범적으로 보여준 자들이 제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이고 사두개인들이고 서기관들이에요.
왜냐하면 메시아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십자가에서 겟세마네 기도에 마지막 기도가 뭐였지요? 겟세마네 기도에. 이럴땐 참 여러분 이스라엘 한번 가야되는데. 같이 한번 갈까요? 겟세마네 동산이 있어요.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참 그 기도가 이게 말만 흉내낼 수는 있지만 삶 전체가 그런 삶이 될 수가 있을까요? 안되지요. 안되니까 십자가 피를 흘리신거에요. 안되니까. 우리가 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십자가를 드러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사명은 구원이 아니고 십자가가 내 안에 박혀 해독제가 내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다가 드러나게 되면 그게 성령의 일이에요. 해독제가 살과 피가 이 정도야. 더는 다른거 필요 없어. 예수님의 살과 피만 있으면 돼. 왜? 워낙 우리가 개판이니까.
워낙 우리가 사자한테 물린 선지자 아이고 그 정도 우리는 사자한테 물린 선지자 그 정도도 안가요. 나라의 반을 줄까? 예~~~혹시 뒷말할까 싶어서 예예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랬을거에요. 폼내가지고 안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 뭐 사모펀드? 사모펀드 그거 다 헌납할테니까 법무부 장관이나 시켜주세요. 나라에 반납할테니까.
항상 이렇게 자기의 주고받음 실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런 의도. 이거 뭐 남 욕할거 없지요. 우리가 평소에 이익 없이 실제 이익 없이 주고받는 무슨 그런 식으로 삽니까. 그런 식으로 안살지요. 다 우리 그러면서 살자나요.
자, 그다음에 선지자 제자들은 선지자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탈락했어요. 십자가 헤어질 때 끝났습니다. 진짜 선지자는 진짜 초심은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꾸역꾸역 이제 제자들이 원하지 않는 것을 집어넣는거에요. 아시겠지요?
그 다음 진도 나가봅시다. 중요한 문제. 베드로가 수제자입니다. 수제자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수제자라면 베드로가 원치 않는 죽음을 주님으로부터 시범적으로 목자다움을 묻는다면 이건 뭐냐 하면 기존에 있던 제자들을 관계가 베드로를 통해서 재수입되는 거에요. 재정립되는 겁니다.
그걸 위하여 요한복음 21장 오늘 본문한번 다시 봅시다. 돌아가서. 제가 아까 삑사리난다 했지요. 베드로가 오해한다고 했지요. 베드로가 지금 요한보고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물었다고 했지요. 아직까지 지금 사도 요한과 베드로 사이에는 예수님의 사명이 게재된 상태에서 이게 연결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저 사람은 어떻다 하는 것은 너의 공간과 나의 공간은 나는 따로 놀고 싶다 이 말이죠. 나 너하고 나하고 엮이기 싫어. 그런 뜻이거든요.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 너 구원받는거 신경쓰기 싫어. 이러면 수제자라는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제자들이 어떻게 되야 되느냐? 하나가 되야 돼요. 하나가.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사명받는 그 현장에서도 하나입니까 하나 아닙니까? 안하지요. 나는 이렇게 처참하게 죽는다는데 처참하게 네가 원치 않는 띠 띄고 죽는다는데 그럼 사도 요한은 질투나네 정말. 쟤는 나처럼 안되니까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거에요. 이건 경쟁자에요. 라이벌 관계라고 라이벌 관계. 이러면 이거는 따로따로 노는 거에요.
그럼 주님께서 이미 베드로에게 순차적으로 했다면 그럼 베드로가 어떤 입장에 있습니까? 베드로에게 주어진 그 주의 일이 그동안 멀어졌던 소원했던 제자들의 관계도 하나로 모이게 되겠지요. 하나로 모이죠? 그 모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
여기 오늘 본문 21장 20절 봅시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그 사랑하시는 그 제자”.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 요한 보고 이야기잖아요. 사랑하는 제자. 그냥 제자 아니고 사랑하는 제자에요? 그럼 이렇게 보면 목사님 사도 요한만 사랑받았네요. 아니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사도 요한만 사랑받은게 아니고 사랑은 누가 받았다 하면 안돼요. 단체가 받은거에요. 내 사랑 따로 쓰면 안됩니다. 공동이름으로 받은건데 난 주님께 사랑받았다하고 거기에다 나를 집어넣어버리면 너하고 나하고 따로 노는게 되요. 그러면 한 몸이 안돼요 한 몸이.
여러분 지체라는 것은요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지체는 뭐냐면 머무는 지체는 지체가 아닙니다. 지체는 반드시 뭐를 지향하게 되어 있어요? 바로 한 몸을 지향, 몸을 필요로 하는 지체가 되지 지체를 위한 지체는 필요 없어요. 성도가 됐으면 남의 인생 부러워하지 마세요. 남의 인생. 그것도 같은 성도라면 그건 그 사람이 할 역할이고 나는 내 역할 따로 있는 거에요.
자, 예를 한번 우습게 한 예이지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거는 우스개 이야기이니까요. 새우하고 고래하고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비긴다? 둘 다 진다? 한쪽이 이긴다? 어떻게 되겠어요? 누가 이기겠어요? 새우가 이겨요. 왜냐하면 새우는 깡으로 버티고 고래는 밥으로 밥이기 때문에. 아 아재개그인데. 심한 아재개그. 깡이 밥이니까 맨날 지는 밥이니까 깡이 이기죠. 그런데 실제로 이건 우스개 소리고 실제로 한번 봅시다. 실제로.
이런걸 예상문제로 내면 참 재미있거든요. 제가 예상문제 한번 내 볼게요. 베드로와 인도 금융시장과의 관계를 써라. 베드로와 인도 금융시장의 관계는? 이거 강도사 시험에 이거 내고 싶어요. 여러분 이거 관계 없는겁니까? 인도 금융시장 상황을 알려면 트럼프의 행정부터 해가지고 영국의 주가부터 다 따져야 되겠지요.
그 상황과 그걸 왜 따집니까? 우리가 사는 세계 이 세계잖아요. 만약에 브라질 펀드에 넣어놓은게 있다. 내가 직접 넣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우리 은행을 통해서 펀드 했는데 그 펀드가 나도 모르게 브라질 거기에다 펀드 집어넣었는데 브라질 펀드가 브라질 경제가 떨어지니까 펀드 전화 오잖아요. 마이너스 20% 났습니다. 그거하기 전에 은행 가가지고 손해나도 감당하겠습니까? 다 쓰고 한다고요.
그러면 아무리 성도가 교회 50년 다녀도 현실은 뭐에요? 자본주의 사회 아닙니까? 그러면 성경이 이 성경이 이게 해독제가 되려면 병든 사회의 생리와 구성에 대해서 우리가 몰라라 할 수 있어요? 알아야 되잖아요. 베드로와 금융시장의 관계는? 이쪽은 뭐가 돼요? 이쪽은 죽음의 병동이고 이쪽은 뭡니까? 해독제. 해답 들으니까 참 쉽죠 잉. 참 쉽죠?
평소에 성경공부 할 때만 복음이 아니에요. 평소에 우리가 몸 담고 있는 모든 현장이 복음의 현장인겁니다. 그들이 무슨 수로 어떤 정신 어떤 병균 바이러스 들린 심정으로 나한테 지시를 내리고 나한테 명령을 내리고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제는 성도됐으면 감을 잡아야지요. 무슨 수로 한다고? 어떤 취지로 그런 결정을 하는건지.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무엇을 무서워하는지. 그들은 일단 무서워해요. 뭐든 다 무서워해. 벌벌 떨어요. 아닌척하면서 밤중에 회사에 가서 술먹는 이유가 뭡니까? 무섭다. 한 아이가 무섭다 그래요. 두 아이가 무섭다 그래요. 무서우면 무서운대로 술 먹고 마약 먹듯이 술먹고 하는 거에요. 실제 이 세상의 현실 특히 도시 같은거. 도시의 현실 속에서 오늘의 복음이 이 양과 목자 이 복음이 적용이 되야 되는 겁니다.
인력사무소에 두 사람이 찾아왔어요. 두 사람이. 찾아왔는데 둘 다 이제 약간 30분 일찍 온사람과 30분 늦게 온 사람이 있어요. 30분 일찍 온 사람이 자기가 인력사무소에 소장 행세하면서 “당신 어디에 취직할려고?” “예 어디에 취직할려고요.” “그래? 복장 그래서 안돼.” 이러거든요.
하자마자 진짜 관리소장 와가지고 자!자! 하면서 진짜가 나타나니까 뒤에 온 사람이 속았어. “어?! 당신도 노는 사람?” 어쨌든간에 뭐냐 엑스트라였어요 엑스트라. 실제로 있는 이야기에요. 엑스트라. 엑스트라인데 한사람 뽑습니다. 한 사람. 뭐냐하면 매 맞는 역입니다. 매 맞는 역.
“매 맞는 역인데 자! 4만원!” 이렇게 나왔다고요. 그러니까 어느 사람이 “아! 4만원에 매 맞겠습니다. 회초리는 맞지요?” “회초리로 맞는게 아니고 몽둥이로 맞습니다.” “아 그러면 6만원 받아야 겠습니다. 6만원. 6만원 받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요? 6만원 됐습니다.” “때리는 사람이 누굽니까?” “때리는 사람이 자식이 늙은 아버지를 때리는 장면입니다.” “아~~이거는 안되는데. 이거는 천륜을 어기기 때문에 8만원 올립시다.”
그럼 벌써 4만원에서 8만원 됐지요? 8만원 됐는데 그 다음에 “자, 때릴 때 어떻게 때립니까?” “그 사람이 야구선수가 되가지고 심하게 방망이로 때립니다.” “아 야구선수 같으면 때리는 스윙폼이 있기 때문에 10만원 더 올려야됩니다.” 그렇게 됐는데 8만원에서 10만원 됐는데 그 사람이 “그 야구선수가 메이저입니까? 국내입니까?” “메이저입니다.”
메이저 같으면 강도가 쎄기 때문에 20만원 받아야 된다는 거에요. 옆에 그걸 듣고 있던 사람이 내가 메이저든 몽둥이든 4만원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4만원에. 20만원 불렀잖아요. 늦게 온 사람이 4만원 불렀어요.
자, 한번 보세요. 어느 것이 초심입니까? 지금 제가 현실문제 이야기하는 거에요 현실문제. 현실문제를 이야기 하는 거에요. 어느게 초심이겠어요? 그 3만원 받고자 하는 사람은 지금 자기 애한테 3만원 받아서 뽀로로 사줄려고 3만원 받아야 돼요. 뽀로로가 초심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망가지던 메이저리그 나온 사람한테 망가지든 말든 관계없이 자기는 무조건 자기는 3만원 줘도 하겠다는 거에요. 3만원 이상만 주면.
자, 이 현상을 한번 봅시다. 이 현상이 뭐냐 하면 변화지요 변화. 제가 무슨 이야기 했느냐 하면은 인간은 초심을 간직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늘 이렇게 유동해져. 매일같이 달라지는데 나는 내가 상상합니다. 엑스트라에 매 맞는거 나는 할 수 있다. 일당 4만원이면 한다. 이거는 그쪽에서 그 관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듣기 전에 일방적으로 내가 정한거에요.
이게 오늘날 우리 사명입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내일 이런 일이 있더라도 저는 감수하겠습니다. 이게 되도 않는 엑스트라 인력 사무소에 온 백수 상태에요.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터져버리면 내가 이런 맘을 가졌어? 자기도 이정도 까지는 몰랐는데. 뭔가 요구조건이 계속 나오는 거에요. 요구조건이.
자, 묻습니다. 그 요구조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그 요구조건 어디서 나온거죠? 자기의 병이 어느 정도로 심한지는 본인은 몰라요. 나는 천국가도 뒷자리 앉을 정도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지옥 갈 정도까지 내가 막 되먹은 존재는 아닐 것이다. 왜? 선하니까. 성품이 착하니까.
도와줄 사람 도와주고 나쁜 짓은 내가 아예 가담을 안 하니까 지옥 간다는 것은 너무 심하고 천국 가서 욕심내서 앞자리 앉겠다 그건 베드로보고 차지하라고 하고 나는 천국 가서 뒷자리만 있어도 고맙겠습니다 이정도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새로운 변수가 주어질 때는 자기가 어느 정도 변할지 자기는 몰랐던 거에요.
지금 여기에 지금 여기 변수가 오기 전까지 지금 이 사람 인력사무소에 온 사람은 강도짓한 사람이에요? 살인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직업으로서 온 사람이에요. 착해요. 노는 것보다 자기 직업 찾아서 일 하는게 얼마나 착하고 대견합니까? 하지만 막상 새로운 사태가 주어지니까 20만원 받고 하겠다든지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소리하는거 봐서 누구한테 미쳤습니까? 3만원한테 미쳤지요.
그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 방금 이 이야기가 두 군데 나옵니다. 한 군데는 마태복음 20장 그건 제가 설명 길게 안 할께요. 다 아는 이야기라서 여러분 지겨울거에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비유 나오지요? 지금 포도원 비유를 제가 성경에서만 이야기하는게 아니고 실제로 제가 실제 인력사무소의 풍경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자, 미장이 이거 7만원이다 아니 5만원이다. 아 2만원 쓰라고 하세요 뒤에서. “2만원 좋습니다.” 나온단 말이죠. “2만원 좋습니다.” “아~2만원 받고 할 걸 괜히 뻐기다가. 뒤에 미장이 있는지 몰랐지.” 아 그런 경우가 한두갭니까 한두개.
누가복음 18장인가 거기 나오지요. 여러분 18장에 성전에서 두 사람이 나오지요. 하나는 바리새인 나오고 하나는 세리 나왔잖아요. 바리새인 뭐라고 제시합니까? 나는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구제했다 했잖아요. 자, 하나님 콜?! 이런 거에요. 콜?!! 여러분 바리새인이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바리새인 얼마나 욕합니까?
그런데 그 바리새인을 욕하지만 왜 그 바리새인을 등장시켜놨겠어요? 이게 누구 이야기란 말입니까? 낮춰놨다고 낮춘다는 우리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고개를 못 들었어요. 고개를 못 들고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온 거에요. 살려만 주신다면 어떤 것도 어떤 인생도 저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살려준다면 어떤 인생이라도 저는 손해볼 거 없어 이런 식이에요. 그런 사람을 누가 당합니까? 누가 당해요.
왜 주님께서는 세리를 구원할 수 있는데 왜 바리새인과 대비시키죠? 오늘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풀어야할 내용입니다. 왜 그 사람을 구원하면 되는데 왜 대비를 시키느냐? 왜 이렇게 나란히 대비를 시키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제자들이 12제자 있잖아요. 1제다 날라가고 12제자. 하나 새로 뽑았고. 이 제자들을 묶을 때 협상과 타협으로 이게 묶어질까요? 이게 안 묶어질까요? 묶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럼 안 묶어지면 따로 놀면 되지 않느냐? 따로 놀면 이게 몸이 아니에요. 뭐가 되느냐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두 사람이 모여서 그 과정을 통해서 생산된 거거든요. 혼자 사랑해도 소용없어요. 혼자 사랑하면 짝사랑이지 뭐. 소용없는 거에요. 둘이 있어야 돼요. 둘이 사랑해야 돼요.
둘이 사랑한다면 나에게는 ‘나’가 되고 저 사람에게는 ‘나’가 되겠지요. 이 두 개의 ‘나’가 아무리 해도 절대로 새로운 ‘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 없다고 장담을 하느냐? 성경에 나온 제자들부터 구약에 나온 모든 사람이 이게 안돼요. 되지를 않는다니까 되지를. 될 수가 없어요.
자, 오늘 본문 20장 24절 봅시다. 20장 24절 말고요 요한복음 15장 내가 지금 얼른 찾으려고 하니 안 찾아지네요. 16장입니다. 미안합니다 15장은 좀 있다가 찾고요 16장 봅시다. 자, 좀 어렵습니다 16장 20절입니다.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너희가 곡하고 애통한다는데 자 곡하다 애통한다 할 때에 개인적으로 아파서 곡합니까? 뭔가 자기 말고 다른 분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곡하고 애통합니까? 다른 분이 자기 죽음도 아닌데 자기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다른 분이 죽었지요? 그렇다면 우리한테 적용시켜 봅시다.
내 죽음이 나한테 아픔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세상을 몰라 주는게 아픕니까? 라고 제가 물을 때에 나는 예수님이 세상을 몰라주는게 해독제 있는 분도 몰라주는게 아파요 하면 당신이 아파요? 그럼 나도 아파요. 너도 아파요? 나도 아파요 이러면 그건 자연스럽게 뭐가 형성 돼요? 한 몸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한 몸이 되기 위해서 다른 외부적인 이미 1로 완성된 1이 쪼개지지 않고 1이 그대로 살아있는 채 각 사람마다 전부다 부여해야 되는 거에요. 그게 뭐냐? 오순절 성령강림이란 말이죠. 오순절 성령강림. 하나로 와서 갈라지잖아요. 하나로 와서.
너 어제 받고 오늘 받고 이게 아니고 하나로 와서 그게 상당히 상징적이다. 시사적이다. 시사적이다. 표준적이다. 표준적이다 이 말이죠. 앞으로 어제 너 받고 오늘 나 받더라고 그것은 뭐다? 시공간을 떠나서 동시에 한번 받은거고 한 장소에서 한번 받은거고 따라서 우리는 한 몸이란 것을 알라 이 말입니다.
이걸 뭐냐 하면 ‘단회의 반복성’이라고 합니다. 참 말이 다른 적당한 말이 없어요. 한번 일어난 것이 반복된다는 거에요. 반복되는 것. 한번을 유지하면서 1을 유지하면서 단번에를 유지하면서 반복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말 자체가 모순됐죠. 단번은 한번이고 끝나는거고 반복은 되풀이 되는 것이 반복인데 한번 끝난 것이 끝남이, 끝남이 반복되니까 너 잘났다 나 잘났다 마지노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없어요. 없다고요. 그러니까 집안식구가 자식이 자식이 아니에요. 새롭게 잉태치 못하는 자식이 그렇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11장 20절 보세요. 애통했지요. 곡하지요. 너희는 근심하였으나 근심은 기쁨이 되는데 그 기쁨은 무슨 기쁨이냐? 22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해산한 여자를 누굴 보고 해산한 여자라고 합니까? 바로 너희들이 각자 해산한 여자가 아니고 너희들이 하나라는 조건하에 오직 하나의 해산하는 여인이 되는 겁니다.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은 한 몸으로 보는 거에요. 여럿이 보는게 아니고. 한 몸이기 때문에 한 몸 될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지요. 한 몸 될 필요 없지요.
형제를 사랑하자. 사랑하자 아니고 사랑을 사랑해야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버리면 이거는 내 의로움이 되니까. 이미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잖아요. 이게 에베소서 4장에 나온다고요. 이미 하나된 것을 확인하는 차원이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고 이미 사랑인데 이미 주어지는 거에요.
이걸 제가 옛날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없어서 옛날식 화장실 수세식 화장실을 예를 들은겁니다. 옛날식. 뒤에 물 누르는거 말고 물통있고 볼일보는데 뭔가 줄이 있지요? 잡아당기면 이미 고였던 물이 내려오잖아요. 그런데 이거는 시설 안 좋은 화장실 가게되면요 잡아당기면 물이 저쪽으로 나와야 되는데 물이 위로 나올 수가 있어요.
화장실 갔다가 완전 샤워하고 나온 사람. 아 그런거 있어요. 물통에 물이 넘쳐가지고 쭉쭉 떨어지는 거 있어요. 어쨌든간에 한 기쁨 한 소망.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새롭게 태어난 기쁨. 사랑으로 인하여 사랑이 내가 누굴 사랑한게 아니고 사랑이 나를 다루지요. 사랑이 나를 새로운 인간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기쁨.
그 기쁨이 이게 나의 사랑이 아니잖아요. 한 몸의 사랑이라면 그 사랑으로 어떻게 되느냐 다른 사람들 다른 제자들 수제자니까 다른 제자들과 드디어 12제자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 구원하려고 예수님 오신게 아니에요. 사도 요한 구원하려고 온게 아니고 전부다 하나의 사랑으로 묶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게 주께서 예언한거에요.
요한복음 15장 18절 봅시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뭡니까? 1인칭으로 하지 말라 1인칭으로 하려면 누구한테 해라? 예수님 1인칭 해야지 너 1인칭으로 가져오면 안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너는 네 몸이 아니고 너는 지체이니까. 네가 왜 1을 너한테 적용시키냐 이 말입니다. 주님한테 1을 적용시켜야지. 우리는 뭐냐? we에요. 너희 중에 하나일 뿐이지. 진짜 하나는 예수님만 하나지.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했어요.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최종적인 죽음이 있다. 그 죽음은 뭐다? 해독제를 갖고 있는 사람의 위상입니다. 해독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해독제를 갖고 있는 내가 갖고 있는게 아니지요. 우리가 갖고 있는 거죠. 그 해독제를 중심으로 해서 사랑 안 할 수밖에 없어요.
“너도 그 살과 피를 마셨어?” “마셨어.” “나도 마셨어.” 그 이야기할 때 살과 피를 제공하지 않는 너와 나는 거기서 빠지게 되는 겁니다. 내가 너한테 사랑했잖아. 제공했잖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의 살과 피는 소용없습니다. 주의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굴 만날 때 그 사람이 내 소유물인가 생각하지 마세요. 물론 우리가 성도니까 그럴 리 없겠지만 세상 사람과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력사무소라든가 현실에 가게 되면 상대를 나 위주로 나 필요한 위주로 소유의식을 갖고 있는데 우리는 형제를 대할 때는 저 사람이 뭘 바라보게 해요? 해독제.
살과 피를 바라보는 쪽으로 하게 되면 누가 흐뭇해야 되고 누가 감사해야 돼요? 내가 기뻐해야 되죠. “아이고 저 사람 기적 받았네.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가 모든 근원적인 문제를 다 해결해버리느냐. 야 진짜 주님이 저 사람을 되게 사랑하네.” 그럼 저 사람이 “너도 만만치 않아. 주님이 당신도 사랑했잖아.” 이게 바로 성도와 성도의 교류입니다. 하나됨을 계속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됨을. 우리는 의인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자, 요한복음이 서서히 어떻게 끝나는지를 아시겠지요? 왜 베드로에게 했습니까? 베드로가 수제자이기 때문에 그렇고 그 베드로 중심으로 제자가 뭐 된다? 아까 요한복음 15장 16장처럼 하나 되기 위해서. 그것을 두자로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아까 21장에 주님이 베드로 보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거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거기서 베드로가 내가 사랑한다 하지 않지요. 바톤을 누구한테 넘깁니까? 주님한테 넘겨버려요. 주님이 저희들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주님께서 오신 이유입니다. 자, 한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합니까? 사람 상대 안 하는거 맞지요? 하나님 상대하지요. 그렇죠?
진짜 우리는 시시한 사람 상대 안하고 하나님을 상대하기에 성령 받았잖아요. 하나님을 상대한다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 입장에서 주님을 생각하세요. 뭐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거 해주세요 이거 하지마세요. 저거 해주세요 하지마세요. 건방지게 주님을 사랑하는데 죽어도 좋아요. 죽어 마땅하고. 그저 주님 주신 살과 해독제만 있다면 그게 우리의 보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치 사람 상대하듯이 주님 사랑했습니다. 이용할라 했습니다. 나한테 이익을 얻으려고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까? 주여 이 어리석음이 정신병인 것을 악마의 병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주님이 주신 살과 피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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