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강-여호수아 24장 11~13절(왕벌) 201909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11~13절입니다. 구약성경 357페이지입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일을 굉장히 복잡하게 하시는 것 같지요. 그냥 “나 하나님 있다. 기도해라. 응답해 줄게”라고 하면 간단하잖아요. “나에게 정성을 다하여 빌어라. 복 줄게” 너무나 간편합니다. 성경도 필요 없고 신학도 필요 없고 교회 나올 필요도 없고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면 복 받는다고 하면 굉장히 간편한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하시는지 그 일을 알려주는 내용이 성경 한 권에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다 볼 수는 없고요, 제가 전도서 7장 29절을 말씀드리면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시스템 자체가 불완전한 거예요. 설교 다시 할게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정화수 떠놓고 빌면 복 받는다는 이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 시스템이. 이게 범죄 하지 않았으면 그럴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기도하고 응답받고. 뭐 딴 거 필요치 않잖아요. 아쉬울 때 빌고 복 받고 또 넉넉하게 살다가 또 아쉬우면 빌고 복 받고.
그러나 여기서 전도서 7장 29절에 보면 꾀를 냈다는 거예요. 꾀를 냈다는 말은 그렇게 하늘에 계시고 기도할 테니까 복 달라는 그 인간 자체가 꾀가 가득 들어있는 문제성이 있는 존재라는 겁니다. 꼭 여러분들처럼 교회 안 나와도 일반인들 교회 가고 절에 가는 거 몰라도 일반인들도 뭔가 자기 일이 잘 안 풀리면 종교와 상관없이 간절하게 뭔가 빌게 되어 있어요.
아쉬울 때 빌게 되어 있고 어려울 때 빌게 되어 있어요. 답답하니까 절대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빌어야죠. 그게 꾀를 내는 일이 된다는 거예요. 꾀를 내는 일. 그게 아니라면 구지 이스라엘 아니라도 다른 민족들이 얼마든지 해왔던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누구와 전쟁하느냐면 그처럼 신에게 빌면 복 받는다는 꾀를 내는 민족과 꾀가 꾀됨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동승하고 있는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게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그러면 우리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가? 우리가 일단 이방인 쪽에 서야 해요. 우리는 이스라엘이 아니니 이방인 쪽에 섭니다. 우리는 복잡한 거 싫고 간단하게 가자 합니다. ‘주여, 빌 테니 복 주세요’라는 간단한 그쪽에 섭시다. 그쪽에 서고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방 쪽이 아니고 이스라엘 쪽으로 이동이 되는 겁니다.
이동되면서 우리가 이방 민족에 있을 때는 개인적인 문제예요. 모든 아픔이라든지 인생은 내 인생이고 그걸 ‘셀프스토리’라고 했잖아요. 내 역사. 우리는 나의 역사만 신경 쓰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쪽으로 오게 되면 내 개인적인 문제는 날아가 버리고 전면적인 문제,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문제, 하나님이 이 세상 전체를 통합적으로 어떻게 보시느냐의 시선과 동일한 시선을 갖게 될 겁니다.
사람이 개인적인 아픔이 있으면 그냥 개인적인 소원만 풀면 그만이죠. 그러나 그러면 세상을 보는 눈을 넓게 하지를 못 해요. 하나님의 시선이 되지를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떼쓸 때 기가 차죠. 자기 사탕 사달라는 것밖에 모르죠. 집안에 부도난 것도 모르고 자기 사탕 사 먹고 아이스크림만 먹으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런 개인적인 것이 나중에 진짜 어른이 되면, ‘아, 그때 아버지가 내가 좋아하는 사탕을 안 사준 이유를 알겠다’라고 생각하며 넓게 알게 되죠.
세상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자기 국가밖에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평소에 세상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그런 시선을 아울러 공유하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동원 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꾀가 없는 거죠. 시스템이 온전한 거예요. 시스템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온전한 시스템 속에서 가동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시스템이 가동되게 될 때 그렇게 되는 과정속에서 오늘 본문이 나와요. 본문을 이렇게 읽어 보면서 머리 좋으신 분들은 여기서 뭔가 특이성을 발견할 겁니다. 그 특이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방 민족과 싸운다고 해 놓고 반드시 전제를 여러 번 반복해서 하는 것이 있어요.
24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 이스라엘을 ‘너희’라고 부르고 그다음 이스라엘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지 아니한 것, 사지 아니한 것, 수고하지 아니한 것” 그다음 말이 뭐냐 하면 “너희가 건축하지 아니한 것” 그다음 13절 마지막에 보면 “너희가 심지 아니한 것”이라고 나와 있어요.
이방 민족에서 진짜 천국 가고 싶습니까? 구원받고 싶으세요? 그러면 이걸 우리 인생에 삽입해 버리세요. “내가 심지 아니한 것, 내가 노동하지 않은 것, 내가 수고하지 않은 것, 내가 건축하지 아니한 것”이라는 말을 전에 ‘꾀’라는 말이 있던 그 자리에다 이걸 바꿔치기해보세요. 그러면 반대로 ‘내가 수고한 것, 내가 건축한 것, 내가 씨를 심은 것’이라는 말이 어디에 해당하느냐 하면 이게 잔꾀에 해당 되는 겁니다. 잔꾀에.
왜냐 하면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공로를 내가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꾀부리는 것으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지 않았다. 내가 뭐 하지 않았다’라는 경우를 제가 쉽게 말씀드리자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바닷물에 가든지 강물에 갔을 때 구명조끼를 입고 가잖아요.
구명조끼를 입게 되면 구명조끼가 내 몸체보다 삐져나와 크게 되어 있어요. 큰 것 안에 꽉 조인 상태로 내 몸체가 놓이게 되면 물에 빠졌을 때 큰 구명조끼 안에 있는 공기압으로 우리는 물에 안 빠지고 우리는 둥둥 뜨게 되어 있죠.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이 강물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습니까?”라고 물으면 “제가 한 헤엄치거든요”라고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단 말이죠.
그게 다 누구 덕이냐 하면 구명조끼 덕이잖아요. 구명조끼라는 그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를 물에 빠뜨리십니다. 그러면 구명조끼를 입지도 않으면서 교회 한 50년, 60년 다니고 입은 척을 하는 사람들은, 수학 정석 같은 공식은 잘 외우는데, 결국은 실제 응용문제 들어가서 다 구명조끼 없음을 완전히 들통나게 되는 겁니다.
한 예를 들게 되면 목사들의 관심은 교회밖에 없잖아요. “나는 복음으로만 외치고 진짜 진리만 외치고 한국 교회 썩었다고 외치고, 우리 교회만은 진짜 천국 가는 참된 교회 만들기로 합시다”라고 외쳤더니 교인 한 300명 모였다고 칩시다. 그런데 목사가 늙어빠져가지고 67세 넘어서 나올 것도 없고 슬슬 눈치 보고 있는데
“나올 것도 없는데 왜 강단에 섭니까? 과거에 수고한 것은 아는데 우리는 말씀 좀 더 들어야 하니까 젊은 사람 좀 쓸랍니다. 좀 나가 주세요”라고 한다면 평소에 그 목사님이 복음만 전했고 “한국 교회 다 썩었어. 썩었어. 다 이단이야. 우리 교회만 진리다”라고 했던 그 목사가 구명조끼가 없네. “내가 이 교회 설교했고 내가 이 교회에서 몇 명 불렸고 내가 여러분을 위해서 앞앞에 기도했고”라고 하다가 갑자기 구명조끼 없다는 것이 들통나 버렸어요.
결국은 장로님들이 “얼마면 돼?” 결국은 돈 문제예요. “얼마 주면 나가겠어?” “큰 거 두 장!!” “200만 원?” “미쳤나?” “2000만 원?” “뭐 껌 값하라고?” “그럼 2억?” “한 번 생각해 보지. 두 장 더 써서 4억!” 하면서 결국 돈 문제로 끝나는 거예요. 밖에 나가면 아파트 하나는 있어야 한다면서 결국 돈 문제로 끝나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 교인들은 그 목사에게는 물론 속았겠지만, 그 목사가 전한 내용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성령께서 역사할 수 있기때문에 그 목사에게 속았다고 하지 말고 구명조끼 있든 없든 그 목사 개인 문제니까 철저하게 이용했다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설교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어디로 집어넣는가? 이거는 성경에 보면 시편 38편 4절에 보면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도대체 이 시편에 나오는 이 고백을 다윗은 도대체 어떠한 상황에 집어넣었기에 그 속에서 자기 죄가 강물에 빠질 듯 넘쳐서 무겁다고 했겠어요? 제가 질문하는 그 취지를 잘 아셔야 해요.
보통사람 같으면 “하나님이여 우리 집에 부채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병든 노무가 치매 걸려서 나도 같이 치매 걸리겠습니다. 어떻게 좀 빨리 돌아가시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빨리 죽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자기 죄 때문에 무거운 것이 아니고 주변 상황이 나를 정상적인 삶을 못 하게 하는데 어떻게 좀 하나님께서 조치 취해 달라는 기도를 보통 하잖아요. 너무 힘들다고 하면서.
그런데 다윗은 그게 아니고 내 죄로 인하여 이렇게 내 죄가 이렇게 무거울 줄 몰랐습니다. 내가 가진 윤리와 도덕과 지금껏 쌓은 모든 선악적 의를 다 동원해도 자기가 뜨지를 않네요. 만약 다윗이 그동안 착하게 한 거 바르게 한 거 가지고 구명조끼 없이 스스로 뜬다면 다윗은 제2의 제3의 밧세바 사건을 또 만들 거예요. 가라앉게 만들고 눌러 버려야 해요. “들어가!”
절대로 내가 심지 아니하고 내가 건축하지 아니하고 내가 노동하지 않은 거, 나의 노동을 취소시키는 주님의 노동이거든요. 내가 일한 것이 아니고 내가 노동할 때 주님도 같이 노동했어요. 그 노동은 내 노동을 겨냥해서 내 노동을 무효화시키고 삭제하는 노동을 해 오신 거예요. 내 힘으로 구명조끼 없이 구원되고자 하는 그 시도. 그 시도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김성수 목사 자살한 것을 가지고 제가 언급을 하니까 “네가 뭔데 시비냐?”라고 시비를 걸어요. 자살을 재미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본인에게는 심각해서 자살했잖아요. 심각해서. 집에 돈 들어오고 집에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으면 안그러죠. 인간이 잘 되면 교만하고 오만해집니다. 사람이 인간을 알아야 해요. 나를 알아야 해요. 나는 누군지 모르지만 잘 되면 교만하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잘 되면 오만하게 돼 있습니다. 뭐 잘 된 사람이 없으니 여기서는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시편 42편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 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이 인도하는데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낙망이 생기고 불안이 유발되는 쪽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구명조끼 있느냐?”라고 물으시면 “주여 제가 열심히 믿었습니다. 제가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헌금했고 충성했습니다”라고 한다면 “아니야. 그거 구명조끼 아니야”라고 하시죠. 그거는 오늘 본문 여호수아 24장과 원리가 다르고 원칙이 다르다고요.
설교 다시 합니다. 인간은 자기도 본의 아니게 꾀가 있는데 그 꾀는 뭐냐 하면 나의 노동을 집어넣어서 내가 떠오르게 하는 꾀입니다. 이 시스템은 원초적인 게 아니에요.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 아니에요.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것으로 온전히 돌아가려면 우리로 하여금 나의 이 꾀가 어떤 구원의 혜택도 주지 말았어야 해요. 교회 다녀도 소용없고, 헌금해도 소용없고, 십일조 해도 소용없고, 전도해도 소용없고, 모든 것이 소용없는 쪽으로 주께서 몰아세우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을 몰아세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들에게 아모리족속, 기르가스족속, 브리스족속들, 한결같이 이스라엘보다 병력이 월등한 쪽으로 가게 해요. 그러면 그렇게 가게 되면 인간인 이상, 꾀가 있는 이상, 시편 42편 11절 말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 고” 불안하죠.
지금 집에서 와서 가스 불 끄고 왔는지 모든 게 불안해요. 우리는 내 것 내가 알아서 지킨다는 것이 우리의 꾀인데 우리의 꾀가 계속 죽을 때까지 작동하니까 아무리 잘해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명조끼에 관심이 없어요. 제가 아침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또 이야기하고 싶어요. 에베소서 4장 21절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또 묻습니다. 무엇을 배웠습니까? 아예 배울 마음이 없죠. 딱히 뭐 우리는 주님에게 배울 마음조차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우리의 행동 보지 않고 구명조끼에 치중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그러면 구명조끼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하면 말씀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일대일로 이야기할 때 자기 행함이 들어가지 말고 말씀이 교류되어야 하지요. 그 말씀의 교류인데 그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납득이 안됩니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하나님은 집어넣는다. 왜 집어넣느냐 하면 구명조끼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면 구명조끼 입으면 어떻게 하게 됩니까?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번 승리는 제가 이긴 것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이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윗에게는 뭐냐 하면 그냥 인생이 힘든 것이 아니고 “내 죄가 이렇게 무거운 줄을 몰랐습니다”라고 해요. 다윗 이전에는 “저 적들이 저렇게 무서운 줄 몰랐습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심하게 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남 탓만 하다가 다윗 때에 오게 되면 “내가 나에게 이렇게 무게 나가는 줄 몰랐습니다. 내 자존감이 내 자존심이 나로하여금 이렇게 힘들게 할 줄 몰랐습니다”
내가 등신 되면 되는데 기어이 등신이 안 되려고 하는 거예요. 그놈의 법무부 장관 포기하면 안 됩니까? 뭐 제사 지내니 알 리가 있나. 자기 자신이 꾀를 쓰고 있어요. 꾀를. 뭐 누구 탓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꾸 내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자존감. 왜? 편하니까. 사람이 일이 잘 풀릴 때는 교만한 줄 모르고 교만하고 오만한 줄 모르고 오만해요. 한번 당해 봐야 해요.
그리고 처음엔 남 탓해요. 가만 보니까 내가 욕심이 과했어. 내가 감사할 줄 몰랐어요. 평소에 고마워할 줄 모르고 그냥 자꾸 주님에게 달라고만 했어요. 그럼 오늘 본문에 보면 뭐가 이해가 안 되느냐 하면 12절에 보면 저는 이 12절을 보면서 이걸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참 신기하다 싶어요. 뭐냐 하면 “내가 왕벌을 보냈다”라는 말씀.
가을철인가요? 애프킬러 가지고 죽이면 안 됩니까? 왕벌? 왜 갑자기 사람 등장하는데 왕벌이 왜 등장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단어 선정에서 이렇게 비약이 있습니까? 좀 쉽게 말하면 안 돼요? “내가 왕벌을 보냈다”라고 하시면 하나님 쪽에서는 쉬운데 우리 쪽에서는 인간들 전쟁하는데 왕벌이 왜 낍니까? 곤충이 왜 끼는 거예요? 파리채 가지고 잡으면 그만일 텐데.
이건 초월성을 이야기합니다. 초월성. 아까 처음 이야기했던 전면성. 하나님 시선으로 보면 사람 앞에 잡히지 않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불가피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불가피성. 주의 말씀 안에 교류로 들어가면 주의 말씀의 세계는 뭐가 담겨있느냐 하면 불가피성이 있어요.
내가 지옥 가고 싶어도 천국 가는 것이 주님의 시선으로 보면 어쩔 수 없이 가야 해요. 천국으로. 불가피성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내 뜻 아니에요. 이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목사님 나이도 많은데 나올 것도 없고 목소리도 그렇고 나가주세요”라고 하면 그 목사가 평소에 복음 전하면 뭐라고 합니까? “성도님, 이게 불가피성입니다. 나가드릴게요”라고 해야죠.
“두 장 더 써야지”라는 거 하지 말고 “그동안 복음 전하게 하신 것도 내 능력도 아니고 내가 심은 것도 아니고 내가 설교한 것도 아니고 내가 강의한 것도 아니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저는 구명조끼만 있으면 됐어요” 왜냐 하면 내 죄가 강의하면서 설교하면서 내 죄가 너무 무거운 것을 내가 아니까. 이 강의하고 설교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닌 것을 내가 아니까.
불가피성. 불가피성은 어디 있다. 말씀의 교류, 말씀 안에만 들어있어요. 그 불가피성을 찾는 즐거움이 얼마나 좋습니까? 자기 자랑 말고 자기 노력 말고 내가 어쩔 수 없이 구원되게 되었네. 내가 주님을 오라 한 것이 아니었는데 주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아나, 이게 내 살이다. 이게 내 피다. 어린양의 피다. 흔들리지 말아라. 어떤 경우에라도 어린양의 피로 넘어가니 흔들리지 마라”라는 말씀이 내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의 불가피성입니다.
‘왕벌’ 내가 손댈 수 없는 주님의 행하신 불가피성. 그 왕벌을 윙~하고 보내신 거예요. 하나님은 얼마나 재미나신 분입니까. 꼭 웹툰 같아요. 만화 같기도 하고. 만화책에 왕벌 그려놓고 손이 닿을 수 없는 불가피성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게 구명조끼예요. 그 구명조끼 안을 뜯어 보면 예수님의 희생, 우리 대신 죽으신 분이 그 안에 들어있다고요.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죠. 진도에 가면 이런 마을 이름이 있는데 앵무리 마을이 있다는 거예요. 앵무리 마을. 이름은 참 참한데 왜 앵무리 마을인가? 알아보니 앵무새를 닮아서 앵무리 마을이라는 거예요. 전에는 진도에 앵무리 마을이 있다는 걸 몰랐죠. 몰랐는데 왜 이렇게 알려졌냐면 송가인 때문에. 노인들의 BTS(방탄소년단) 송가인 때문에 송가인 사는 마을 근처 앵무리 마을이 알려진 거죠. 그 앵무리 마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알 수가 없었죠. 왕벌. 그 왕벌이 지금도 윙~하고 돌아다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알 수 없었던 그 왕벌이 우리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그 불가피성으로 구원되었사오니 주께서 어떤 지경에 집어넣더라도 남 탓하지 말고 우리 죄가 이만큼 무겁다는 어쩔 수 없이 주께서 희생했다는 사실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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