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여호수아의 신(수24;14-15) 1909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9. 17. 09:44
2019-09-15 14:59:09조회 : 39         
   여호수아의 신 190915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여호수아의 신(여호수아 24:14-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hfYxh3CHInA, Hit:4

 이근호 19-09-15 15:34 
여호수아의 신


2019년 9월 15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4:14-15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향하여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라는 말을 할까요? 동일한 고생과 경험을 한 게 아닌가요? 주어진 환경이 동일하면 동일한 고백과 체험이 나온다는 것은 오산입니다. 여호수아는 결코 경험에서 나온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동일한 환경이 동일한 고백이 나온다고 한다면, 같이 아파한 사람은 모두 주님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생을 한다고 신앙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 관한 이 특수성을 여호수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경험 이전에 무슨 마음이 있었던 겁니까?

출애굽기 23:23에 보면,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5:13-14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천사가 이 땅을 모두 평정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원칙 앞에서 모든 인간은 균등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무조건이 아니라 조건이 있는데 그 조건이란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게 구원을 요청할 처지에 있지 않다는 조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조건이 또 나옵니다. 출애굽기 15:26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그들이 애굽인들보다 더 나은 게 있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굽인들이 10가지 재앙을 받을 때, 그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재앙은 유보된 겁니다. 취소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조건적인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구원을 달라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조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다시니고 함께 하신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세상 보다 더 큰 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큰 것이라는 것은 곧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사시킨 약속입니다. 그 약속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23-25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념하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기념하는 방식이 뭘까요? 이 방식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먼저 정립해야 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크냐 아니면 세상이 크냐 하는 겁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만들어 있니 마땅히 성경, 곧 말씀이 세상보다 큽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증거해야 하는 인간이 크냐 아니면 세상이 클까요?

당연이 세상이 크지요. 왜냐하면 인간도 세상 중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안에 계신 분이 클까요 세상이 클까요? 성령님은 세상보다 더 큽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성도는 세상에 속할까요 아니면 성령 안에 속하는 겁니까?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존재방식이 정립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는 것은 형식을 반복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큼’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무시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오직 인간이 못났으면 예수님께서 피와 살을 제공해야만 했을까요. 따라서 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는 현장 내내 인간은 철저하게 인간 대우를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그 예가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0:9-10에 보면,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증인인 두 선지자가 천사의 같은 위상을 갖습니다. 머리 부분은 하늘에 속하고 아래 몸통 부분은 땅에 속합니다. 한 몸이 하늘과 땅, 상반되는 환경에 다 걸치고 있는 겁니다. 입으로 들어갈 때는 말씀이 무척 달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땅에 속한 곳으로 말씀이 이동하니 복통을 유발합니다.

이는 곧 죽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두 증인이 보여준 ‘증인의 삶’은 이러합니다. 요한계시록 11:8에 보면,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원통한 일이요 억울한 일입니다.

왜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다녀가시면서 겪었던 그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이 때 성도는 자신을 변호하거나 변명해서 남들에게 옳음을 알리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차라리 세상을 보면서 그들이 여전히 죄를 그냥 지니고 살고 있는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눈빛을 가지고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억울하거나 원통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 현장은 어떤 지명인가와 상관없이 소돔과 고모라요 애굽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못박힌 곳이 됩니다. 즉 성도를 통해서 세상을 재편하고 이 작업과 관련 있는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과 좌파와 우파가 갈라져서 서로 싸웁니다.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고 하면서 멸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런 자들을 대할 때, 마치 죄수 면회 접견하는 심정이어야 합니다. 인력으로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귀한 언약을 주님께서 되찾기 위해 성도를 이 작업에 휘말리게 하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성도의 나타남으로 그 장소가 멸망의 장소로 등장되도록 주님이 살아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 19-09-16 06:28 
252강-여호수아 24장 14~15절(여호수아의 신) 2019091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14~15절입니다. 구약성경 357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가 비꼬는 이야기를 합니다. 왜 비꼴 수밖에 없느냐 하면 여호수아 보기에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알아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들은 절대로 여호와를 섬길 위인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되면 우리는 세상보다도 하나님 나라 그리고 사람보다도 예수님을 더 좋아할 위인들이 아니에요.

살면 살수록 신앙이 깊으면 깊을수록 점점 더 이것이 강하고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세리와 창기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확실하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되는지 쪽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시고 이렇게 못난 우리가 주님 나라에 어떤 쓸모가 있는지 쪽으로 생각을 해줘야 해요.

구원을 사람들은 신약을 통해서 무조건적인 구원이라고 하죠. 무조건적인 구원은 없어요. 일단 하나님께서 조건을 균등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 있어요. 전제가 ‘모든 인간은 구원되지 못한다’라는 조건하에 구원되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구원은 없어요. 이러한 조건이 출애굽기 15장 26절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야기하기를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그전에 열 가지 재앙을 애굽 사람에게 내렸습니다. 내릴 때 아침에도 언급했지만, 다섯 번째 재앙부터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오직 애굽사람 사는 곳에 집중해서 거기에 재앙을 내렸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마치 우리가 훌륭한 사람인 줄 착오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단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냅니다. 구원해 놓고 너희들이 구원받을 이유나 조건이 너희 자체에는 너희 행함에는 아예 없다는 겁니다. 구원될 이유가 없는데, 구원될 사람들이 아닌데 하나님께서 구원한다는 것은 일단은 전제가 애굽 사람이나 히브리사람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될 요소를 하나님 쪽에서 쏙 집어넣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버려둘 수 없는 그들을 내칠 수 없는 어떤 다른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것들이 이미 그들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 귀한 어린양의 피부터 해서 하나님의 계명.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말씀이 들어있는 그 말씀이 귀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못 버리고 안 버리고 계속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러한 조건이 구성될 때 예수님과 오늘날 성도의 조건도 구성되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께 질문을 던져볼 테니 여러분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세상 안에 있는 성경’입니까? ‘성경 속에 있는 세상’입니까? 세상 안에 성경이 있습니까? 아니면 성경 안에 세상이 들어있는 겁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들은 도사들이니까 대번에 이야기해요. 그거야 세상보다 성경이 우선되지요. 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으니까.

부분보다 전체라면 세상은 부분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기 때문에.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놓치고 있고 그 놓친 것을 성경을 다 내포하고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보다 성경이 더 큽니다. 그거는 쉽게 답변이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 인간은 세상보다 큰지 작은지를 물으면 사람들이 이야기해요. “그거야 우리는 세상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세상보다 작습니다”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면 또 질문합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은 세상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이제 좀 어려워지는 거죠. ‘어떻게 되는 거지?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하나님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이야기인데, 하나님과 우리 성령과의 계약으로 구원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크신 분이 어떻게 작은 것 속에 들어올 수 있는가?’라는 그런 모순과 딜레마가 생겨버려요.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있다면 그러면 작은 것은 큰 것 앞에서 어떤 자세이고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조건들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여호수아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분명히 다른 신을 섬긴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내가 다른 신을 언급조차도 안 한다. 하지만 너희들이 다른 신을 섬길지라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라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도 여호수아 집안처럼 따라갈래요”라는 말이 절로 나올 거예요. 그것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가 “우리는 여호와만 섬기겠다”라고 한 것은 여호수아와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와 현재 너희들과 하나님의 관계가 그렇게 같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여호수아는 뭘 알고 있었느냐 하면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약속의 관계가 정립된 것이 아니고 문제는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에요.

뭔가 챙겨주니까 고맙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전혀 챙겨 준 것도 없는데 고맙다고 하는 것은 이건 여호수아나 갈렙이 본인을 위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와 갈렙 그 두 집안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어요.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말씀이 세상보다 큰 거예요. 말씀이 세상보다 크니까 성도의 할 일은 간단해요. 뭐가 간단하냐 하면 나, 내 집안, 내 나라가 아니라 뭐라 뭐라 해도 말씀보다는 아무것도 아니고, 다 무너지고 멸망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영광은 풀의 꽃같이 다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말씀이 더 큰 거라는 그 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안 중요해요. 나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뭐가 중요해요. 말씀이 중요하지”라는 것을 매일같이 쏟아내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쏟아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인간적인 지식이나 아이디어 같으면 누구나 흉내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역시 나부터 챙겨야지, 하나님 예수님은 나중이고 나부터 챙겨야지’라는 다급한 사태들이 계속해서 성도 주변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 여호수아 갈렙 빼놓고 다른 사람은 다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거는 선언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여호수아 24장 32절을 한번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요셉의 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죽은 뼈가 왜 그렇게 필요한가. 여호수아는 뭘 알았느냐 하면 이 약속의 땅을 정복한 당사자는 바로 이스라엘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보다 앞서 보낸 하나님의 천사가 모든 것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가 못난 이스라엘과 더불어서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 땅으로 등기이전 한 거예요. 넘겨 준거예요. 보이지 않는 겁니다. 천사는 보이지 않아요.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여호수아는 보이지 않는 자신보다 더 가깝게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앞장세우는가? 이제 무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앞장세우고 우리에게 다가 오느냐. 그 조건을 발견하면 성도고 그 조건을 발견 못 하면 성도 아니죠. 그 조건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 전서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는가 보란 말이죠.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지금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이 세상보다 더 크신 분이 자기보다 작은 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크다는 것을 드러내느냐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초점이 뭐냐 하면 “기념 하라”입니다.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예수인 내가 살아 있다는 그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너는 살아 있다는 겁니다. 너를 기념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계속 성만찬을 기념해요. 성만찬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예수님 내가 살아 있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세상을 평가할 때 큰 것을 가지고 작은 것을 평가하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거든요. 성령이 자기보다 크다고 한다면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땅히 “성령이 하셨습니다”라고 해야 하고 자기는 한 것이 없다고 해야 논리가 맞거든요. 맞는데 성령이 했다고 하고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한 거니까 정당하다”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건 앞뒤가 틀린 말이에요.

성령이 하셨다는 말은 나를 완전히 개무시하고 일을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개로써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말을 하든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든 나를 아주 개무시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야죠. 그래야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크신 분이 하셨다는 것이 되잖아요.

독일 아현 한인교회에서 성만찬을 하는데 거기는 한 달에 한 번씩 한답니다. 뭐 심심하니 보여줄 거 없으니 그거라도 보여주는가 봅니다. 거기서 우리 사위가 성만찬을 하는데 우리 손녀가 와서 “아빠 나도 먹자”라고 했다고요. 성만찬 비스킷같은 그거요. 그러니까 사위가 다 보는 앞에서 똑 떼어서 아이에게 줬어요. 주니까 순간 거기서 목사부터 주변 사람들이 기겁한 거예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게 얼마나 귀하고 고귀한 의미가 담겨있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현장에서 대놓고 말은 못 하고, 왜냐 하면 교인 하나가 아쉬운데 욕하다 삐지고 안 나올 수가 있으니까, 뒷담으로 들은 것이 “저거는 성만찬의 의미도 모른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제 사위가 안에서 안 주고 밖에 나가서 줬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을 기념하는 행위가 주님을 가리는 행위이고 이것을 일반 교회들이 계속 해왔던 거예요. 이것을 받아먹으나 이것을 떼서 주나 개무시 당해야 하고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기때문에 사도바울은 하라는 거예요. 그걸 확장 시키면 우리가 사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몇 년 더 살아도, 몇 년 일찍 죽어도 의미가 없는데 이건 뭐 예수님 이용해서 더 살았다 뭐했다 하고있는 거예요. 의미 없어요.

의미라는 것은 작은 데서 찾으면 안 되고 나보다 크신 데서 의미를 찾아야 하거든요. 크신 데서. 그러면 “인간들끼리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뭘 해야 할까요? 성만찬 하지 말까요?”라고 하는데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은 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그만그만한 겁니다. ‘가위 바위 보’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가위 바위 보의 철학적 의미는 결정적인 한방은 가위도 보도 바위도 아니고 세 가지 경우 속에서 어떤 것도 그 세 개를 초월하는 결정적인 것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주먹을 쥐면 보자기 싸이고 보자기는 가위에게 지고 이처럼 서로 얽히고설킨 사이가 인간 사회예요. 그리고 어떤 조건이냐 하면 이렇게 돼요. 우리는 절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위인들이 아니라는 조건을 달아야 해요. 우리는 ‘가위’이고 ‘가위’에서 직업 바꿔 봐야 ‘보’밖에 안되고 치킨집하고 뭐 해봐야 ‘주먹’밖에 안되고 이렇게 직업을 바꾸고 어떤 수단을 써봐도 우리는 거기서 거기예요.

여호수아가 자부심을 갖고 큰 것을 내세우는 것은 이게 바로 이런 조건 자체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조건 없는 무조건 구원이 아니고 차라리 조건 안에 우리가 갇혀있어 버리는 거예요. 그걸 돈으로 환산하게 되면 그걸 액면가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께서 제가 드리는 예를 연결해보시면 이해가 잘 되실텐데요.

우리 손녀가 보는데 아빠가 돈을 받으니까 자기도 아빠 옆에 서서 돈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돈을 달라고 하니까 아빠가 “너는 안돼. 세 살 먹은 아이가 무슨 돈이냐”라고 하니까 손녀가 옆에 가위를 가리키면서 저 가위로 돈 한 모퉁이를 잘라내면 되지 않느냐고 떼를 쓴 거예요. 돈을 액면가로 보지 않고 돈을 면적으로 본 거예요. 돈이라는 것은 잘라내면 그 액면가가 다 날아가잖아요. 그래서 제 딸이 종이를 잘라서 ‘30유로’라고 적어서 주니까 아주 대만족을 하는 거예요. 그 순진함이 몇 년을 갈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성도라고 하는 것은 액면가예요. 주님을 기념하는 용도로써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그 용도라는 것이 조건이 뭐냐 하면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이에요. 잡히시던 날 밤에 예수님께서 살을 주고 피를 준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 자신의 것을 너에게 분배한다는 거예요. 나눠준다는 겁니다. 정말 이건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요.

왜냐 하면 산사람이 물건을 주면 주고받을 수 있는데 죽으신 분이 우리에게 뭔가를 준다는 것이 그럴싸해 보이죠. 그러니 이것이 실재적으로 우리 몸에 우리가 그것을 느끼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자체가 굉장히 난해합니다. 난해하니 저도 할수없이 난해하게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겔 3장과 또 같은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10장 9절에 있는데 이렇습니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내 입에서는 달아도 배에서는 복통을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단 것도 몰랐는데 말씀이 들어오니까 굉장히 달았어요. 그런데 단 것 자체가 우리 몸에서는 이게 복통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어느 설교에서 반신욕 이야기를 했는데 머리는 천국에 와있는데 몸통 전체는 어디에 눌려있느냐 하면 미세먼지 많고 황사 많은 이 세상에 눌려 있단 말이죠. 여기에다 위에서 말씀을 줘버려요. 말씀이 통과합니다. 몸이 주님에게 있을 때는 말씀이 그렇게 달아요. ‘고맙습니다. 주의 살과 피로 구원받게 하시다니 고맙습니다’라고 하다가 이게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그 말씀이 어떤 작용을 하게 되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았을 때의 그 고통, 그 억울함 같은 것을 몸소 체험하도록 작용하는 말씀으로 우리 속에 와버리니까 들어온 말씀 때문에 우리가 극도의 복통을 일으키는 겁니다. 힘들어요.

그래서 저를 만난 많은 사람이 이야기해요. “말씀은 좋은데 왜 내 인생은 이 모양 이꼬라지 입니까?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라고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 제가 한마디로 이야기합니다. 그건 주님의 억울함에 동참하는 거라고. 그 말이 별로 위로가 되지도 않아요. 이사야 40장 27절에 보면 나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라고 하는데 원통한 거예요.

억울하다가 원통하다는 말이거든요. 아무 이유도 없이 복음 때문에 복음을 증거 하는 용도로 이 땅에 태어나다 보니까 매사가 원통 절통한 것만 계속해서 느껴지는 겁니다. 분하고 원통하고. 그렇다면 이 원통하다는 것이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요한계시록 10장이거든요.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말씀을 먹고 가는데 하는 역할이 뭐냐 하면 죽는 역할이에요.

죽는 역할인데 죽으면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 8절에 보니까 두 사람이 다 죽었어요.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세상에 지명들이 있고 구들에서 나오는 위치들, 인간들이 정해놓은 위치니까 다 무시하고요.

주님이 정해야 해요. 주님이 정해버리면 인간이 속해있는 미국이든, 캐나다든, 호주든, 어디든 간에 그게 전부다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고 그게 주께서 십자가에 달린 현장이에요. 그게 바로 지체가 가진 공간성이라고 제가 아침에 언급했지요. 지체가 가진 공간성은 우리가 살면서 그게 어디에 살든 간에 그게 전부다 애굽 이여야 하고 소돔과 고모라 이여야 하고, 그것이 미국이 됐든 뭐가 됐든 그것은 주께서 십자가 못 박힌 장소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나 때문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말씀과 대비되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말씀의 목 부위는 그렇게 기쁜데요.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그 세상이 어떻게 작살나는 지를 봐야 하죠. 그것이 요한계시록 9장에 보면 나오는데 요한계시록 설명하면 힘드니까 간단히 말해서 요한계시록 9장 1절에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나팔이라 하는 것은 어느 강의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미 승리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붑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승리하신 주님, 주님의 현존성, 주님이 여기 임재해 있다는 임재성입니다. ‘주님이 지금 안 보이면 나팔소리를 들어라. 주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라는 그런 뜻에서 나팔을 붑니다. 불 때 그냥 계신 것이 아니고 작살을 내시죠. 내시는데 “별 하나가 떨어졌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라고 나오는데 쉽게 말씀드리면 악마에 의해서 악마의 세계가 서로 쥐어뜯고 싸워서 와장창 무너지게 하는 작전을 주께서 벌이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방법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가담할 필요 없습니다. 한국이든지 미국이든지, 사촌이든 오촌이든, 좌빨이든 우빨이든 관계없어요. 스스로 그런 식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면 성도가 할 일이 뭐냐 하면 면회 가면 돼요. 성도가 어떤 전도를 한다는 것은 면회 접견입니다. ‘죄수 2426번 만나러 왔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저쪽은 모르죠. 잘 나가고 있으니까.

그 잘 나가는 옷이 우리에게는 죄수복으로 보이는 거죠. 이런 말이 있잖아요.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라고. 알고 보면. 말씀이 오고 억울하고 원통함이 있으면 세상에 잘사는 사람, 출세한 사람 있다고 하는데 잘사는 사람 없어요. 이 세상 전부가 애굽이고 소돔과 고모라고 전부 다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전도하라고 사람을 만나는 건데, 전도가 뭐냐 하면 면회 접견하는 것이 전도예요. “한번 볼까요. 당신이 걸치고 있는 것이 전부 다 죄수복이고 당신이 추구하는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당신이 이유도 모르고 사는 목적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라고 하는 거.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너는?”이라고 나오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여호와를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죠. 그러나 내 안에 계신 것 말씀이 이미 이 세상보다 더 큽니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하면 십자가가 뭐냐고 물어보겠죠.

십자가는 모든 것을 다 갖춘 단 하나.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어떤 것도 십자가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지어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모든 것도 십자가를 함축하라고 있는 거예요. 그게 지금 우리 몸 안에 있어서 이거는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 다루고 있는 겁니다. 이게 성도의 사는 이유고 목적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끝으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 보기에 약속의 땅은 뭐냐 하면 여호수아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다 천사가 그 일을 다 한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증거 하라고 이 세상을 살았고 증거 하라고 아직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큰 것을 생각하면 우리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다는 이 사실만 생각한다면 이 세상 살면서 그렇게 얼굴 찡그릴 이유는 없지요.

날마다 우리는 성만찬 한가운데 놓여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이 없고 그냥 이 복음 듣고 문만 열고 나가면 우리는 거울 속에 갇혀있다고 봐야 해요. 거울 속에 갇힌 똑같은 내 모습을 그냥 피곤하게 매일 만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용쟁호투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용쟁호투. 마지막에 이소룡이 거울속에 들어가 주먹 쥐고 포즈 하는데 전부 다 자기 모습이에요. 똑

 같은 것의 복제물이에요. 전부 다 똑같은 인간들. 너나 나나 똑같아. 똑같은 것의 복제물.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멀리해버리면, 이렇게 복음 듣고 다시 말씀 버려버리면, 우리는 다시 ‘어떻게 사나, 지금 살아 뭐하나’라고 또 자기 생각해요. 그럴 거면 수덕사 여승 되든지. 또 ‘저 사람은 잘사는데 나는 왜 못 사나’라는 식이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여호와 말씀 많이 들었다, 이제 지겹다, 많이 먹었다, 그만 할란다, 이제 나 혼자 살란다’라는 식으로 다시 말씀과 멀어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제는 여호수아처럼 이러한 성경 속의 세상이 있고 성경의 완성한 것이 우리 속에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남들 만날 때는 거울 속에서 만나지 마시고 이미 죄에서 해방된, 죄수복을 벗어버린 그러한 자유인으로서 죄수복 입은 사람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알고 보면 그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돈 가졌다고 자랑하고 넓은 집 있다고 자랑하고 좋은 차 있다고 자랑하지만 우리는 원통하고 억울한 일만 당합니다. 그게 말씀대로 되어지는 정상적인 사실인 것을 우리가 부인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