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증인
2019년 9월 22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4:19-22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4: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24: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24: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백성들과 여호수아가 동행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과연 동행하실까요? 인간과 인간이 함께 있는 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의식은 예수님의 12제자가 겪었던 실수요 한계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예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요구조건을 자신들이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인간 본인이 만들어서 넣은 내용이었습니다. 인간의 최선은 최악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증인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던 겁니다. ‘나’라는 덩치, 그리고 그 덩어리를 스스로 치울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덩치와 인간이라는 덩치가 나란히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무지를 문제삼아 내쳤든가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스승을 배반하고 도망친 그 사항을 담아 ‘예수님의 증인’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증인이 되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각오하는 것과 같은 노선에서 들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타인을 원하지 결코 주인님을 스스로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결단과 선택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인간은 타인을 구합니다. 그 타인이 배우자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선배일 수도 있고 후배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흔히 대화상대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나를 무시하지 않는 조건 하에 수립된 인간관계입니다. 나의 선택을 존중해 줄 사람을 주위에 배치하게 됩니다.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주변 정리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뽑혀서 나의 주변에 놓여져 있는 대상 중에 예수도 있고 하나님도 있고 삼위일체도 있습니다. 그런 신들은 다 나를 위함입니다. 제발 나를 다치거나 망가뜨리지 말라고 성의를 다해서 모셔놓은 인형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지금 주님과 동행중이라”고. “나는 지금과 늘 함께 하는 사이다”고.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백성들아, 너희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모른다. 따라서 너희들은 여호와를 섬길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과 증인되는 것과 차이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기 자신이 망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본색이 여호와의 의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타인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직접 나 믿음 없음을 노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기쁨입니다.
마치 여자가 아기를 낳고 기뻐한 것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해 아기 안고서는 다 잊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 16:21)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의 차이점은 이 ‘증인되기’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됩니다. 이방민족은 이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민족입니다. 신을 믿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 지상에서 자신의 뿌리가 든든해지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없던’ 민족입니다. 뿌리가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언약의 시작은 하늘로부터이니까요.
없던 데서 생겨난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 ‘없음’의 요소가 이스라엘의 본질이 됩니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룻기 1:16-17에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성에 있어 남성은 자기 존재의 뿌리입니다. 남편이 죽었다는 것은 곧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상실되었다는 뜻입니다. 여성은 홀로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남성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남성 옆에 붙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어버리면 여성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겁니다.
따라서 시어머니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불러다가 당부합니다. “새로운 남자를 찾아서 떠나라. 나의 남편은 죽었노라” 그러나 룻은 말합니다. 우리 가정을 이 지경으로 만드신 바로 그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다고 말입니다. 그게 바로 시어머니 나오미가 믿었던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고 말입니다.
이방민족들이 하는 것처럼 지상의 것을 계속 붙드는 것을 보장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반대로 지상의 토대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시는 하나님이 참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인간들 쪽에서 붙들만한 가치가 있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인간의 실상을 노출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결코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확연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이 ‘섬기지 못함’이 요소가 되어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는 곧 여호와 하나님을 인간쪽에서 섬길 이유가 생기지 않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신 겁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원합니다. 인간들이 고르는 타인들은 그 사람의 사진첩에 꽂힐 대상들입니다. 이미지란 일종의 사진으로서 광자가 표면에 닿는 면적만큼 형상을 드러내는 겁니다. 타인이 나의 이미지란 말은, 내가 고르는 타인에게 내가 그동안 해주었고 친절을 베풀고 배려를 한 나의 공적이 빛의 입자로서 박힌 증거물을 뜻합니다.
즉 나는 나의 수고함을 도로 감상하는 의도로 타인을 곁에 두게 됩니다. 내가 있음도 타인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정를 쏟고 베풀어도 결국 타인의 나의 잘남의 작품이 되어 버리기에 어디까지나 ‘나의 잘남의 증거용’이지 그 사람의 증거용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인 앞에서 우리는 ‘뿌리 없는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명령과 지시에 따라 쏜살같이 움직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망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이 구성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을 아시기에 우리의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됨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9-09-23 10:41:15 | 조회 : 23 | 253강-여호수아 24장 19~22절(하나님의 증인) 20190922-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21.154.249.203) | | 253강-여호수아 24장 19~22절(하나님의 증인) 201909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19~22절입니다. 구약성경 357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너희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게 되어 있다는 요소가 그 증인 안에 품어져 있어야 합니다. 완벽하게 한 번도 실수한 적 없다고 한다면 누구의 증인입니까? 뭐 증인이라 할 것도 없죠. 자기 잘남의 증인이 되죠. 따라서 여호수아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려면 반드시 경유 하고 경과 돼야 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여호와는 섬기지 못할 신인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여호와만을 섬기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오해했어요. 자신들이 결심만 하면 섬긴다고 하는데 결심하고자 하는 너 자신을 네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도대체 너희들이 결심하고 우리는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그 의도가 진짜 여호와의 의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호와의 의도는 너희들은 증인이 되라는 건데 백성들의 의도는 뭐냐 하면 실수 한번 없이 제대로 섬기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증인이 되어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실수 한번 안 하고 백성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무슨 고집이 이런 고집이 다 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이 증인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뭔가를 경과 한 거예요.
뭘 경유 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잘 몰랐다는 그 과정을 경과 한 거예요. 그들이 예수님을 몰랐던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안다고 여겼기 때문에 몰랐던 거예요. 3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했으니까 이쯤 하면 예수님을 알 거라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버리게 된 이유입니다. “네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을 나 예수가 긍정적으로 봐 줄게”라고 말하는 예수님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안 갑니다. 차라리 “우리 합세해서 같이 잘해보자”라고 나오시죠.
인간의 모든 승리를 축하하는 축배 안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어요. 예수님의 수모와 핍박과 희생이 들어있고 예수님의 아픔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것을 여성들은 눈치챈다고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나오죠. 여성들이 눈치채는 것이 뭐냐 하면 해산을 할 때 안다는 겁니다. ‘나는 죽고 자식은 살아라’ 자식 하나 낳는 것이 그냥 순풍순풍 낳는 것이 아니고 너 하나 존재하기 위해서 이 엄마가 죽을 판인 그러한 교체되는 지점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요. 엄마는.
그것을 제대로 교체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 누구냐 하면 바로 베냐민의 엄마 라헬이었잖아요. 자식 낳고 난 뒤에 자신이 자식 낳는 과정에서 죽어야 자식이라는 새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을 여성은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성은 해산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죠. 구원에 대한 그 원리를 몸으로 체득하는 자가 남성이 아니고 여성이라는 거죠.
그렇게 해서 자식을 이렇게 낳게 되면 거기서 여성들은 뭐냐 하면 ‘너 하나 낳기 위해서 힘들었다’라는 그 사실을 막상 아기를 낳고 보면 새 생명이 주는 그 기쁨 때문에 내가 아팠다는 그런 기억들이 다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왜 언급을 하는 겁니까? 바로 “열두제자 너희들을 내가 이런 식으로는 사도로 인정 못 하겠다. 내가 뭔가 겪어야 한다. 이 예수님이 겪은 일에 대해서 너희들은 가차 없이 다 말려들어야 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겪은 일이 뭐냐 하면 이러한 본색을 드러내 주는 일로 가담되어야 해요.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고 내빼고 도망치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은 것은 나 잘 먹고 내 몸 하나 편하기 위함이라는 그 본색을 그대로 노출했잖아요. 그것도 공개적으로. 그게 성경책 안에 그대로 나와요. 팔린 성경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베스트셀러가 없잖아요.
온 세대에 온 천지에 우사란 우사는 다 당해버린 거예요. 열두제자가.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열한 제자들이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걸 “내 본색이 안 드러났으면 큰일 날뻔했다”라는 식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요. 왜냐 하면 내 안에 예수님의 찢어진 살과 그리고 피를 나는 매일 먹고 마시는 식으로 매일같이 동행한다는 그 자체가 제대로 된 하나님의 증인의 삶이 되는 거예요. 제대로 된.
주님이 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주님을 버릴 정도로 우리 안에 수상한 괴물이 들어있었다는 거예요. 그런 괴물 껴안은 채 우리는 건방지게 교회 나왔다고 천당 가려고 설쳐댔거든요. 교회를 원하되 교회를 원하는 대신 우리는 주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에요. 교회는 왜 버리지 않느냐면 자기가 돈을 냈기 때문이죠. 내가 돈 낸 것을 버릴 리가 있습니까? 그 아름다운 공동체는 원하되 주님은 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19절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라고 나와 있어요. 도대체 지도자라는 사람이 격려를 해줘야 마땅할 이 지도자가 아예 초를 쳐버리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겨? 아이고, 개가 웃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너희들 하는 마음가짐으로 여호와를 섬길 수 있을 것 같아? 그 마음가짐으로는 여호와 섬기는 것을 너희들이 원치 않을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아마 그 이야기를 들었던 많은 백성이 여호수아께 원망해 댈 거예요.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를 섬길 겁니다”라고 하겠죠. 뭐 여호와를 제대로 알고 나 섬깁니까?
여호와라 하는 것은 자기의 내부에 허점을 건드려주는 그분이 여호와예요. 그냥 여호와가 아닙니다. 그냥 걸치고 있는 여호와가 아니에요. 나에게 와서 나의 부실함과 나의 믿음 없음을 완전히 들추어 내줄 때, 친히 그 손으로 우리 내부를 후벼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줄 때 그런 여호와예요. 그냥 추상적인 여호와 말고.
그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못 섬긴다고 장담 장담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여호수아가 사람에 대해서 알아요. 왜냐 하면 동행하고 있는 백성들이 옛날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간다고 장담했던 그들의 자손들이거든요. 그러니 뻔한 뻔 자고 본색을 벌써 다 알거든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믿는 신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잘났다고 증명해 줄 어떤 타인을 원해요.
인간이 원하는 타인은 나 좋아라고 나 유리하라고 채택하는 타인이에요. 그럴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믿습니다, 섬깁니다. 나는 좋아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단어들을 거기에 가져다 붙이는 거예요. 실제로는 자기 위하면서. ‘나 좋게 해 준다면 내가 무슨 단어를 못 붙일까, 뭔들 못 섬길까’라는 식이란 말이죠. 이방인들이 굉장히 신을 많이 섬기잖아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방인들은 자기라는 뿌리가 있어요. 이건 도저히 포기 못 할 뭔가 덩어리가 있다고요. 덩어리. 덩치. 그런데 이스라엘은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위에 있다고요. 뿌리가 위에 있고 이스라엘은 위에 계신 분의 이미지거든요. 이미지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사진인데, 사진이라 하는 것은 그 사진의 표면에 광자가, 어떻게 광자가, 빛의 입자가 쏘아대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사진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미지이고 사진이에요. 빛이 와서 쏘아대면서 남겨진 흔적 같은 것이 이미지란 말이죠. 그런데 인간이 타인과 어떤 친구 또는 애인이나 남편감이나 아내감을 구할 때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사진발이 되라는 말입니다. 네가 나에게 준 거 말고 내가 너에게 잘 해줬던 건만 너라는 그 표면 육체에다가 광선처럼 쏴서 그걸 계속 내 앞에 들춰 보이라는 겁니다.
“당신은 훌륭한 남편이 되어서 이렇게 못난 나에게 이렇게 사랑해 주었어요. 이렇게 밥을 해주고 여러 가지로 나를 위로해 주었어요. 고마워요~~”라고 계속 그런 식으로 붙어 있으란 말이죠. 뭐 표정들이 이미 이혼했어요? 내가 용납하는 내가 있기를 용납하는 타인은 항상 내 필요로 존재 타인입니다. 안 그러면 헤어지죠. 갈라서죠.
그게 나의 사진첩이라는 거예요. 너는 내 일생에 하나의 앨범이 되어라. 너라는 인간은 내 사진첩에 꽂혀 있으라는 말이죠. 사마리아 여인은 그 사진첩에 다섯 명의 사진이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사진이 꽂히는 겁니다.
여호수아는 그 점을 너무 잘 알아요. 그들은 타인을 원하지 절대 주님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인간이 주님을 원해요. 나의 모든 가치와 의미를 말살시키는 그 주님 말입니까? 현재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에서 이제껏 내가 근사하게 살았다는 이 땅의 뿌리를 아주 잘라 버리는, 도끼로 잘라버리는 그런 주인을 원하다고요?
그러면 나의 존재에 의미가 없잖아요.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보람이 없잖아요. 모든 나 하는 일은 나에게 다가와서 나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어야 하죠. 내가 꽃이라고 불러주면 꽃은 쪼르륵 쫓아와서 “꽃이라고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이 말은 내가 영원한 나의 주인이어야 하고 내 곁에 배치되어있는 나의 가족이나 친구들은 나를 추앙하기 위해 존재하는 타인이고 내가 원해서 불러낸 그러한 나를 쳐다보고 사는 꽃 같은 존재,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존재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내가 준 것 가지고 대화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화라는 것은 아예 나의 발목을 뿌리를 잘라버리는데 그런 주님과 대화가 되겠습니까? 기피 하겠죠.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이방 민족과 동일해서 이방 민족은 자기 존재 뿌리를 포기 못 한 인간이니까, 너희는 이방 민족과 같이 진짜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여호와는 초월했기 때문에,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섬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섬기지 못한다면 여호수아가 떠나야 할 텐데 섬기지 못한다고 못 한다고 하면서 자꾸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포기를 안 하고 뭔가 기대를 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너희는 섬기지 못한다”라고 하면 저쪽에서 “아닙니다. 섬기겠습니다”하고 “섬기지 못한다”라고 하면 “섬깁니다”라고 몇 번 주고받다가 “그래 너희들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다는 거예요. 왜 여호수아는 섬기지 못한다고 하고 관계를 끊고 가지 않고 뭔가 낌새를 남깁니까? 섬기지 못하면 섬기지 못하는데 섬기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의 과정으로 투입되면서 뭔가 남겨진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여호와의 증인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된다는데 증인 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어떤 대립적인 행동이 된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너무 잘 알아서 섬기지는 못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모든 것은 다 안다는 거예요. 이걸 어렵게 말하면 초월이라는 것은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는 것을 초월이라고 해요. 모든 것이 연결 되어 있는 것. 그들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친히 다 아는 것.
그 초월 된 것이 주님만 초월 된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서는 뭐도 초월 된 초월자냐 하면 악마도 초월자입니다. 악은 언제나 부지런해요. 악은. 인간이 잠잘 때도 악은 놀지를 않습니다. 쉬지도 않고 놀지도 않습니다. 악마는. 그래서 여호수아는 생각합니다. ‘나의 슬픈 예언은 틀린 적이 없다’라고. 항상 뭔가 낌새가 있어요. ‘안 되는데. 이 사람들이 내가 있어도 섬기는 척이나 했지 섬기는 것이 아니었는데’라는 거죠.
전에 이야기했지만, 약속의 땅은 천사들이 다 알아서 했거든요. 하나님의 사자들이 승리했는데 사람들이 얻어먹고 난 뒤 자기들이 했다고 우기는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안 되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기어이 이들이 섬기지는 않겠지만 증인 되게는 할거라는 기대와 희망 같은 것을 여호수아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여호수아가 어떤 낌새, 미래에 대해서 예측한 것이 과연 어떤 식으로 증인 되는지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벌어진 일입니다. 룻기 1장 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게 룻이라는 이방 여인인데 나오미 가정에 와서 며느리가 된 사람이에요. 며느리였다면 아들이 2명 있었다는 이야기고 아버지도 있었는데 그 집에 남자란 남자는 다 죽여요. 하나님께서 다 죽여버립니다. 남아 있는 것은 여자만 남아 있어요. 뿌리가 없는 거죠. 아까 이야기했죠. 이스라엘은 뿌리가 없다고.
이스라엘은 증인 되기 위해서 그냥 뿌리가 없는 것이 아니고 뿌리 없음을 증거 하는 증거들을 증거가 이스라엘의 토대가 되는 방식으로 뿌리가 있다는 이방 민족과 전쟁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남성이 없다는 것은 곧 힘이 없다는 거예요. 힘이 없으니까 힘이 없는 여자는 남성에게 기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자동적으로 여성이라는 것이 홀로 서지를 못 하고 남성에게 빌어먹는 존재가 여성이 되는 겁니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구약에서는 특히 그렇죠.
그래서 여성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없는 존재라고 해요. 없는 존재. 남성은 있는 존재라고 해요. 그래서 나오미도 그걸 알고 “야, 남편 없잖아. 네 뿌리 없잖아. 네 힘의 원천 없잖아. 그러니 너희들도 팔자 고쳐야지. 봐 우리 집안 날아갔어. 거덜 났어. 네 시아버지도 죽었어. 나는 시어머니야. 난 여자야. 없는 존재. 나에게는 뭔가 들어올 것이 없잖아. 가거라”라고 하는데 두 며느리 가운데 룻기 1장 14절에 보면 오르바라는 사람이 있는데 오르바는 작별 인사를 했어요. “어머니,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하겠습니다”라고 하고 갔어요.
그런데 룻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겠나이다. 시어머니와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해요. 왜냐 하면 시어머니 집안, 내 집안, 그러니까 내 남편의 집안에서 남자라는 남자는 다 씨를 말린 그 하나님이, 그분이 하나님의 진정한 본 모습인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어머니를 작살 낸 하나님이 진정 내가 발견한 진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뿌리가 없어요. 뿌리가. 이스라엘다움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스라엘 구성원들이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 구성원이 아닌 이방 민족의 여인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 섬김의 시범케이스를 바깥층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바깥층의 노선에서 태어난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이에요. 룻의 4대 후손이 바로 다윗 아닙니까. 다윗.
그 다윗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그 원리원칙 그 질서의 원리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이 땅에 새로운 이스라엘을 하시기 위해서 다윗의 자손, 다윗이 보여주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에 준해서 새롭게 만드는 이스라엘이 오늘날 성도들이죠. 성도들이에요. 이 지상에 어떤 뿌리가 없습니다.
섬기겠다는 그런 본성은 박살 나고 잘려 버리고 내 본성이 아니고 추가로 주어진, 사람들에게 밀려버린, 뿌리 있는 인간에게 매몰차게 미움받은 그분의 본성이 나의 본성으로 채워지면서 우리는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우리는 뿌리가 없는 존재예요. 뿌리가 없으니까 자기주장이라든지 자기 요구사항도 이건 소용없는 거죠. 설교 다시 하겠어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는 덩어리가 있기 때문에, 나를 필요로 하는, 나에게 잘해줄, 나를 이뻐해 주고 나를 칭찬해줄 주위 사람들을 포진시키고 배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배치되어있는 부르는 타인 가운데 누가 같이 내 손에 잡혀 있느냐 하면 예수, 삼위일체, 여호와, 하여튼 좋다는 것은 다 내 손에 잡혀 왔어요.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 섬깁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용어를 거기에 가져다 붙인 거예요. 그래서 그 결과는 뭐냐 하면 나는 잘나서 나는 현명한 선택을 해서 이처럼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거예요. ‘저 어때요? 저 훌륭하죠?’라고 하는 거죠. 그 사람이 마시는 축배 안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초월하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알아요. 모든 걸 다 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병들었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 뿌리가 수상하고 옳은 것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크신 분이 작은 것 안에 집약되어 들어있는 거예요. 큰 것을 작은 것에 집어넣는 거예요.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예가 있으니 고추 튀김입니다. 고추 안에 씨앗을 다 빼고 그 안에 고기 다진 것을 꼬깃꼬깃 다 집어넣지요.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이럴 때 뭐가 되느냐 하면 겉은 고추인데 안에는 돼지고기 다진 것이 되지요. 그러면 고추 튀김은 돼지고기 튀김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증거가 되는 겁니다. 나 실패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오히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거죠. 주일학교 낮에 설교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옆에 있는 어떤 강도가 자기가 분명히 죄인인 걸 알지만 예수님의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 아버지가 있는 나라, 예수님 가고자 하는 그 아버지 나라에 자기도 넣어달라고 요청하죠.
이 무슨 뻔뻔함이 이런 뻔뻔함이 있습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이게 모든 것이 연결되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의미에서 초월하신 분이거든요. “내가 강도짓 하는 것까지 다 아시는 그분이 당신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당신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거. 그렇다면 나에게 꼬깃꼬깃 주어진 것은 내 계획이 아니고 누구냐 하면 옆에 계신 주님의 계획이 내 안에 꽉 차도록 들어와서 지금 주님과 함께 결에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타인이 아니고 나의 주인님이에요. 나의 주인님. 가라 하면 가야 하고 오라 하면 와야 하는 나의 주인님. 이게 증인이거든요. 설교 다시 합니다. 룻기를 보면 룻이라는 여자 며느리가 시집올 때 팔자 고치려고 왔어요. 고생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남편 하나 제대로 만나가지고,
남편이 나를 늘 사랑해 주고 내 곁에 포진한 남편은 나의 훌륭한 이웃이고 영원한 친구고 말동무이고 소통이 되면서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내 제대로 된 선택자가 남편이라고 여겼죠. 그 남편 죽어버렸는데요? 괜히 또 오늘 가서 부부 싸움하고 남편 죽이고 그러지 말고요. 그 남편 죽어버렸는데요? 물으세요. 남편에게 또는 아내에게. “당신은 왜 있나? 왜 내 앞에 등장하지?”
이 이야기 하니까 부산강의 생각나는데 “당신은 왜 내 앞에 등장해?”라고 아내가 물으면 남편이 대답합니다. “너는 뭔데 건방지게 나를 관찰하느냐?”라고. 둘 다 똑같아요. 둘 다 똑같아. 여호수아는 압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자기를 포기했거든요. 하나님의 계획에 떠밀려 온 거예요. 떠밀려서. 그러나 이 백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라는 이 덩어리, 덩치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보다 능력있는 신을 찾아서 내가 할 도리 다 해 주고 받을 거 다 받아 챙기겠다는 수작으로 교회 온 거고 하나님 믿겠다고 교회 온 겁니다. 그 믿음 간직하시고 깨어지시기 바랍니다. 아까 기도한 것처럼 주님은 그 믿음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거, 하나님 믿어도 내 소원대로 안 되는 것을 철저하게 느끼도록 우리를 매일같이 시험에 빠뜨립니다. 우리는 시험에 안 빠지려고 발버둥을 치죠.
안양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시험에 안 빠지는 것도 시험이라고 했어요. 계속 발을 뺍니다. 그러나 빼면 뺄수록 우리는 더 큰 교만이라는 시험에 우리가 빠져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험이라고 하지 말고 주께서 내 중심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발견하는 하나의 좋은 증거로써 매일 같이 내 것을 박살 내는 현장에 우리가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해요. 다행스럽게.
내 옆에 주님이 십자가 달려 계시고 나도 같이 십자가 달려 있으면 내 안에 주님의 독배가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의 살과 피가 있다고 생각해 볼 때 주어진 모든 상황은 바로 내가 나 잘나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줘서 주님의 주인 되심을 드러내는 용도로써, 앨범에 꽂혀 있는 주님의 이미지로써 옆에 있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주님만 존재한다는 사도바울의 그 고백, 나는 죽고 내 안에 주님만 존재한다는 그 고백이 하나의 책 속에 있는 그저 낱말의 연속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내 이익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말씀이 말씀 되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시험 들게 하고 또 그로 인하여 증인 되게 하는 과정 속에 놓여 있음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죽지도 않았지만 살아있으면서 오히려 주인님만 높이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천국 생활을 벌써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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