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강-여호수아 24장 8~10절(발람) 201909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357페이지입니다.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편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 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여호수아가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부하는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 죽고 난 뒤에 남게 되는 이스라엘에게 유언을 하는 데 이 유언의 내용이 뭐냐 하면 지도자가 있어서 너희들을 인도했던 그 시절은 이제 끝났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보고서 신앙생활을 저 사람처럼 해야겠다는 그런 시기도 이제 끝났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껏 모세와 여호수아가 있다는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인도한다는 데 있어서 필요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이 이스라엘을 인도한다는 그런 생각은 이방적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너희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로 살아남을 수 있고 따라서 나는 여기서 은퇴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벗어난 것.
지도자 없이 나라가 되도록 한번 해봐라. 그러면 “지도자가 빠진 자리에 아무것도 없으면 안 되잖아요”라고 할 때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잖아. 그 율법대로 살면 너희들은 계속 이 약속의 땅에서 버틸 수 있고 살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의 조항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 많은 율법의 조항을 어느 세월에 다 지키냐고 할 때 율법 조항은 딱 하나라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와 함께 있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 율법의 최종 결론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우리와 함께 있음입니다. 함께 있기 때문에 내 쪽에서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함께 있음이 지금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제도 무슨 일을 계속 벌여오고 있는가를 지금 여호수아는 유언으로 쫙 펼쳐온 겁니다.
옛날 아브라함 시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보이지 않는 분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자꾸 눈에 보이는 인간에게 잘 보이고 그 사람 말만 들으면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스라엘은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전부지만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분이 일을 하기 때문에 도리어 보이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서 어떤 방해가 되었다는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보이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중의 하나의 예가 바로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온 거예요. 그렇게 모세 모세 하다가 그 모세도 못 들어오잖아요. 못 들어왔지만 결국은 들어 왔잖아요. 목사 없이는 못 들어간다? 하지만 목사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셔서. 저도 있을 때가 다 되었나 봅니다. 그만해야 할 땐가.
성령이 친히 인도하는 데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사실은 그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요. 인간은 사람을 의지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사람을 눈치 보고 그 사람은 이용할 대상이지 의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지 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용의 대상이죠. 이용의 대상.
율법을 줌으로써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율법 지킨 나를 아주 멋있게 다시 구축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중의 하나의 예가 인천에 동성애 축제 반대. 세계에서 동성애 축제 가장 크게 벌이는 나라는 이스라엘이에요. 전 세계의 동성애는 거기 다 모여있습니다. 두 번째가 네덜란드, 벨기에 이쪽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안 믿는 나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안 믿는다니까 이상하죠, 25%만 하나님을 인정하고 나머지 75%는 안 믿어요.
그 나라에 동성애가 들어온 겁니다. 인천 축제도 마찬가지예요. 동성애 하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표가 있어야 권력을 잡으니까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보니까 평등을 좋아하고 인권을 주장한단 말이죠. 그러면 내가 현재 이 지방자치단체장이 어느 정도로 인간 편에 서 있는가를 동성애 축제를 허용함으로써 이 정도로 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서 어렵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표를 내가 얻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동성애 축제를 여는 겁니다.
성 소수자를 위한다는 거예요. 갑자기 숫자 적은 소수자라는 말에 ‘성’자를 붙이는 것은 옳지 않거든요. 그냥 동성애자예요. 성 소수자가 아니고. 숫자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숫자 적은 편에 섰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 소수자 말고 음주운전 소수자는 왜 안 되죠? 깡패 소수자는 왜 안 됩니까? 기독교단체에서 맞불 집회를 열어서 성 소수자 반대한다는 데 기독교 집회자도 마찬가지예요.
동성애 안 하면 구원받습니까? 동성애 반대하면 진짜 신자 돼요? 성경에 그것밖에 없던가요? “동성애 하지 마라”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사랑하지 말라는 말만 있던가요? 다른 거는 없던가요? “오른 눈 빼버리고 오른손 잘라라”라는 말은 왜 안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주어라”는 왜 모르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줘라”라는 말은 왜 안 합니까? 특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라는 말은 왜 쏙 빼놓는 거예요.
정치적으로 적폐가 있을 때 자기가 정당화되거든요. 공격하는 대상을 찾아서 공격할 때 마구마구 할 때 자기는 갑자기 정당한 부류에 속한 것처럼 그렇게 인식이 되는 겁니다. 누구 하나 적을 두고 공격하게 되면. 그렇게 적이 없으면 자기 정당화가 안 되니까 적을 만들어야 해요. 이런 사실을 여호수아가 염려하는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이 어떤 세계 속으로 들어가느냐 하면 방금 이야기한 자기 잘남, 정당성으로 버티는 그런 세계 한복판에다가 이스라엘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떤 위치냐 하면 충돌 테스트 마네킹 같은 역할입니다. 자동차테스트 할 때 마네킹 가지고 하잖아요. 그처럼 그들에게는 자기 모든 어떤 신을 믿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용해먹겠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의 집단 속으로 이스라엘이 들어가는 겁니다. 충돌 테스트 마네킹으로 깨지고 깨지고 부서지라는 말이죠. 그래야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확연히 드러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실험도구로 이 세상에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가 선택해서 천당 가기로 해서 천당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성령 오라고 해서 온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성령 주었고 일방적으로 예수 믿게 하셔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충돌 테스트 마네킹처럼 사용하시는 거예요. 옛날 구약의 입장이나 오늘날 성도의 입장이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내세울 것은요 그들처럼 나 정당하다는 것을 내세우면 안 돼요. ‘그래, 잘났다. 너희들’라는 것을 내세워야 해요. 그들은 적을 통해서 자기 정당함을 뽑아내려고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적인 것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적인데 구원해요. 희한하죠. 하나님의 원수가 분명한데 율법대로 못 지키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못 지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인 게 분명한데 구원받아요. 이거 횡재 아닙니까? 횡재?
횡재를 너무 많이 받아서 영~ 감이 떨어지신 겁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요? 이걸 감사할 줄 모르고 좋아할 줄 모른다는 말은 아직도 주님이 주신 하나님의 의보다 내가 구축한 내 의를 포기를 못 해서 그래요. 내 잘난 맛에 내가 살고 싶다는 이런 본성을 못 버려서 그래요. 오늘 본문은 그걸 이야기합니다. 여기 24장 9절에 보면 모압 왕이 나오죠.
왜 하나님께서 모압 왕을 이스라엘에 갖다 붙이시느냐 하면 모압 왕이 오늘날 우리가 속한 이 세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 모압 왕은 모든 행동이 합리적이고 우리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건 뭐냐 하면 어떤 시도를 하게 되면 반드시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사람들은 미신이라고 규정해버려요.
제가 예를 하나 드릴 테니까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가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혼자 살 때 나오는 머리카락은 다 내 것이다’ 실감하죠. 혼자 살 때 나오는 머리카락이 다 내 것이라고 하면 이건 뭐 반박의 여지가 없죠. 이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에요. ‘내가 예수 믿어줬으니까 예수는 나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것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까?
그래서 이게 지옥가는 거예요. 그래서. 모압 왕의 이름이 발락이에요. 발락. 여자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중계방송 보는 남자들은 이 발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미하엘 발락이라고 유명한 독일의 축구선수 수비수예요. 그런데 이 발락이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불러 가지고 여기 민수기 23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1절에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준비하소서”라고 했어요.
얼마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입니까. 하나님도, 쉽게 말해서 남에게도 뭔가 도움을 얻으려면 내놓아야 하듯이 하나님도 받아먹는 게 있어야 복을 준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입니까. 지금 고함지르면 안 되지만 고함지르고 싶어요.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발람적이고 모합적이고 이방 민족적이에요.
사람들이 아무도 상상을 못 해요. 이게 얼마나 이성적인지. 다시 말해서 인간은, 교회 온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고 해요. 자기 자신을. 이건 가인도 아니고. 가인이 그 짓을 했거든요.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면, 받아 챙긴 것이 있으면, 얻어 챙긴 것이 있으면, 이 정도 바쳤으면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서 천당 보낼 것이라는 생각. 인간이 내세울 것은 오직 이성적인 것밖에 없어요. 합리적인 것밖에 없어요.
농땡이를 주께서 건지셨다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에요. 꼭 미신 같아. “나는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내 맘대로 살려고 하는데 그냥 찾아오셔서 구원하셨다”라는 이런 일은 없을 거라고 우겨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장에 목자가 양을 칠 때 갑자기 천사가 와서 “나는 너를 기뻐한다. 구원받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빨리 가서 구원받은 근거를 보라고 했거든요.
제가 거기를 가봤거든요. 1.5 Km인가 되거든요. 거기 목자의 들판에서 베들레헴까지 달려오니까 거기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아기 예수가 있더란 말이죠. 아기 예수를 근거해서 네가 구원받은 거예요. 이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 아니에요. 이건 아기 예수를 믿는 믿음이거든요. 믿음. 이건 논리가 아니고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모압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압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바쳐야 복을 받는다는 것을 내세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으려고 하는데 믿으려고 하는 것은 계속 무한으로 퇴행한다는 말이죠.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지? 얼마나 믿어야 하지? 말씀은 어디까지 지켜야 하지? 성경 말씀 어디를 외워야 하지? 헌금 얼마나 해야 하지? 십일조를 더해야 하는지 뭘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계속 이만큼 했다 하면 또 어느새 물러서 더 큰 것을 요구하거든요. 악마가. 교회에서 악마가 요구한다는 말이죠.
새벽기도도 나와야 하는지, 새벽기도 나오면 성경을 아주 써야 하는지, 금요 철야까지 나와야 하는지, 주일날 두 번 빠지면 벌 받는 것인지, 6개월 동안 교회 안 나오면 정말 집안 거덜 나는 것인지, 몇 개는 거덜 나고 몇 개는 거덜 안 나고 하는 경계선이 뭔지, 헌금 5천원하고 만 원하는 복을 받는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계속해서 합리적 이성적인 요구를 교회에 계속 요구하게 되는 거예요.
특히 언제까지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해야 하고 얼마나 해야 하고 목사는 교인들에게 “이것까지 하면 복 받습니다. 고3입니까? 이것까지는 해야죠”라고 계속해서 해야될 행함의 요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있다는 자체가 여러분 신앙에 방해된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생각 해보신 적이 있어요. 목사가 방해된다는 거. 목사가 하는 일이 나의 옛사람이 하는 이야기라고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내 속에 들어있는 나의 괴물이 목사라는 구체적인 인물로서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 해본적 있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주님을 원한 게 아닙니다. 참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원한 게 아니고 복 주는 사람을 원합니다. 그냥 복 받으려니까 미안하니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고받음이 어떤 질서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게 우리 마음이 편해요. 공짜로 얻는 것보다.
좀바치고 복 주면 그쪽에서 십 분의 일 떼는 것이 우리 합리성에 훨씬 부합돼요. 덜 미안하고. 그런데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죽자는 거예요. ‘죽자’가 복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을까요? 주님이 이야기하죠. “어떻게 죽긴 어떻게 죽어. 가만히 있어. 내가 죽여 줄게. 늙게 해서”라고. 팔십 되면 눈 못 뜨게 해주고 구십 되면 친구들 산에 자는데 자기 혼자 방에서 자는 어려움 겪다가 진짜 친구들처럼 산에 가서 자도록 만들어 줍니다.
가만히 있어도 해줘요. 하여튼 식당에 가서 “빨리 주세요”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어도 짬뽕 나오고 짜장면 나옵니다. 때가 되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죽을 때 있습니다. 제가 장담해요. 죽을 때 없으면 제가 손에 장을 지지죠. 걱정하지 말고 쪼금만 기다리세요. 죽습니다. 죽여 줍니다. 주가 죽여주시면 그때는 이성이고 합리고 다 버리고 ‘아, 이거구나. 주께서 알아서 구원하셨구나. 십자가 안에서 이미 다 긍휼 주기로 약속이 되어있구나’라고 다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언급하는 이 발람과 모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 발람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모압과 이스라엘이 대치되거든요. 그 순간에 발람을 보낼 때 발람에게 어떤 수정요소를 집어넣어요. 그 수정요소가 뭐냐 하면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수정요소가 민수기 22장에 보면 나옵니다. 발람이 평소에 자기가 타는 자가용 나귀 타고 갔습니다. 갔는데 나귀가 이상하게 길을 떠나서 옆길로 새서 밭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발람이 ‘요것 봐라. 내 자가용이 내 말을 안 듣네. 어디 한번 맞아볼래?’라고 생각하며 팼습니다.
그런데 자꾸 포도원 사이에 좁은 길로 가면 담이 있어요. 담으로 가니까 발람이 발이 껴서 다리가 부서질 판이에요. 조각이 날 판이에요. 그래서 발람이 더 심하게 채찍으로 안 되니까 몽둥이로 팹니다. 몽둥이로 팰 때는 어떤 것도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이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발람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28절에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라고 당나귀가 말을 합니다.
발람은 철저하게 돈 받고 점 쳐주는 점쟁이예요. 돈 받고 복 주는. 쉽게 말해서 오늘날 목사라고 보면 돼요. 목사가 발람입니다. 교인들 자체가 무당 찾아서 교회 나왔고 목사는 무당짓 잘하면 돼요. 긍정적 사고방식과 적극적 사고방식. “잘 될 겁니다. 복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있어 잘 될 겁니다”라고. 그래서는 장사가 안되니까 이제 트릭을 써요. “주님처럼 고난을 받읍시다. 그래서 고난받으면 잘 될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시면 잘 될 겁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놓고 계속 자기가 살아있어요.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는 이야기예요. 자기를 부인한다고 해놓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가면 여러분 소원대로 잘 될 것입니다”라고 하는 게 뭐예요? 이게. 무슨 트릭이 이런 트릭이 다 있어요. “한국교회 썩었다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당신의 주장은 뭐냐?” “우리는 낮춰서 주님처럼 낮은 삶을 산다” 낮춰서 살면 뭐 되는데? “잘 될 겁니다”
어떻게 이런 사기꾼이 있습니까? 우리는 잘 되면 안 돼요. 죽어야 해요. 잘되면 안 됩니다. 잘 되면 안 죽으려고 해요. 그게 문제예요. 아침에 말한 것처럼 버텨서 자기 수치감 가릴려고요? 발람으로 하여금 비합리적이고 비인성적인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모압 선지자인 발람이 이스라엘 쪽에 오게 되면 무엇을 듬뿍 담았느냐 하면 이 비이성적이고 놀라운 인간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나귀가 말을 했다는 그것을 담아서 갑니다.
나귀가 말은 나귀가 했지만 속은 누가냐 하면 여호와의 사자인 천사가 언급을 한 거예요. 천사가 해가지고 “지금껏 내가 주인님 섬겼는데 반항한 적 있습니까?”라고. 반항한 적 없죠. 그런데 내가 지금 반항하는 이유를 주인님은 알아야 합니다. 발람이 채찍으로나 몽둥이로도 안 되니까 자기가 칼이 있으면 너를 죽여버린다고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나귀가 하는 말이 “만약에 내가 이쪽으로 안 갔으면 당신이 칼에 죽습니다”라고 하고 발람이 눈을 뜨니까 천사가 발람을 죽이려고 한 거예요. 그러면 발람을 죽여버리면 모압에서 이스라엘 저주하기 위해서 발람이라는 무당 불러서 저주하려고 하는데 발람을 죽여버리면 우리 생각에는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오지 않게 되니까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죽이려고 했지 죽이지는 않았어요.
왜냐 하면 발람을 죽을 뻔하게 만들어서 살게 함으로써 저쪽의 저주가 이쪽에 뭐가 되느냐 하면 복이 되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어도 복 받은 거예요. 참 희한하죠. 하나님이 일하실 때. 그것은 뭐냐 하면 여호수아가 이제는 죽어도 하나님께서 동행하실 것이고 그 동행하시는 질서와 원칙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의 원래 자리를 네가 잊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의 자리가 뭐냐 하면 남들로부터 얼마든지 공격받아서 저주를 덤핑으로 받아야 할 그런 가련한 위치에 이스라엘이 있어요. 왜? 다른 곳은 힘이 있고 지도자가 있지만 이스라엘은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남들에게 무시 받을 수밖에 없어요. ‘무시당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그들로부터 압제당한다’라고 되면 이건 이성적이 되고 합리적이 되어버려요.
그런데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랑 같이 계신 분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면 그들이 주는 저주가 경계선 넘자마자 저주로 날아온 것이 전부 다 뭐로 바뀌느냐 하면 복으로 바뀌어요. 복으로.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원래 자리에 있다는 그 이유때문에 복으로 다 바뀝니다. 어렵지요? 그러면 쉬운 거 이야기할게요. 방주 이야기할게요.
노아가 방주에 있을 때 방주는 그 시대상의 모든 것을 다 방주 안에 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방주의 주인공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전부 다 노아라고 이야기합니다. 노아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방주는 노아가 노를 저어서 운행하는 배가 아니기 때문에. 노를 저은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엔지 모터 가동시킨 것이 아닙니다. 무슨 모터보트같이 윙~~하고 가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맡기는 거예요.
맡기게 된다는 것은 주인공으로 노아가 캐스팅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주인공이 뭐냐 하면 주인공이 어떤 존재냐 하면 홍수 끝나고 방주 밖으로 나올 때 땅이 마를 때의 땅과 방주 안의 주인공과 연관성이 있을 때 주인공이에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을 때 땅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땅이 어떤 땅이냐 하면 정결한 짐승의 피의 희생을 기념하는 땅이 새롭게 주어진 땅입니다.
창세기 8장에 보면 “내가 다시는 이 땅을 홍수로 멸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너희가 드린 희생제물, 7쌍 넣은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받고 그 정결한 짐승의 제물을 받고 내가 이 땅을 물로써는 멸망치 않겠다고 했어요. 왜냐 하면 그 주인공 말고 너희들은 전부 다 날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하기 때문에. 그러면 방주는 그 시대를 전부 다 응축해서 담아놨는데 악한 세상에서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분인데 그분이 이 땅에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희생되어야 할 정결한 짐승과 같은 기능, 그런 기능을 하는 분이 주인공이고 그 주인공을 캐스팅해서 방주 안에 함께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노아 패밀리는 뭐냐 하면 보조 엑스트라 같은 거예요. 조연들. 우리는 주인공 아니에요. 주인공은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보이지 않는 분이 주인공이고 그 주인공이 우리와 함께 동행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기능만 하면 됩니다. 어떤 기능이냐 하면 내 힘으로는 절대 구원될 수 없다는 거.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될 수 없고 내가 헌금한다고 복 받는 게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이 자체가 악한 역할에 해당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해요. 우리가 우리 본성은 예수님을 생각하는 위인들이 아닙니다. 내 생각뿐이에요. 아침에 눈만 뜨면 내 생각뿐이에요. ‘주여 행운이 있기를, 내 자식 잘되게 해주기를, 내가 좀 고생하더라도 주께서 지켜주시고, 비행기 타든 배타든 주께서 친히 지켜 주시옵시고, 외국에 나가더라도 국내에 있더라도 어디 가든지 오가는 길 발걸음을 지켜 주시옵시고’라고 하면 주께서 “지켜줘서 뭐 하는데?”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요. 갑자기 할 말이 없어져요.
지켜줬다고 하면, 고3인데 지켜줘서 좋은 대학 갔다고 하면 그래서 뭐요? 뭐 의대 전문대 가려고요? 논문 일순위 해서? 지켜줘서 뭐 하는데요? 누가 주인공이냐? 누가 주인공. 인간은 자꾸 내가 주인공이 되는 세상 속에 섞여 있습니다. 그게 모압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드린 인간의 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착한 일이 아니고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선으로 이미 확정을 해놓고 이 발람 선지자 보러 “내가 돈 줄 테니, 내가 제물 바칠 테니, 그 제물 받고 저쪽 이스라엘을 저주해라”라고 모압이 했던 이야기를 지금 여호수아가 끄집어내 거든요.
그런데 이게 과연 남의 이야기에 국한되느냐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이야기는 아니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어 나는 잘되고 저쪽은 다 망하게 해달라는 그런 복수심이 우리는 없을까요? 눈만 뜨면 복수하고 싶은데, 눈만 뜨면. 그러니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와 어떤 분이 동승 했는가를, 이렇게 되바라지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과 같이 어린양이 동승을 했으니까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아, 이제는 네가 주인공이 아님을 네가 증거 할 수 있느냐?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에요. 하지만 내가 여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내가 내 육체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우리가 살 수 없다는 거,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여러분도 그 질문에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노동한다는 것이 다음 중 1,2,3번 중에 어느 것을 뜻합니까? 1. 주님과 함께 일한다. 2. 주님을 위해서 노동한다. 3. 주님에 의해서 실시된 노동한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답입니까?”라고 물어보셔서 저는 무엇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무엇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와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를 위해서 노동하겠다고 하면서도 주님께서 실시한 것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실시된 채로 주님을 위해 노동한 겁니다” 질문보다 답변이 더 어렵죠? 1번은 함께하는 것은 아니고요, 2번과 3번은 맞는 것이 아니고, 3번에서 시작해서 2번으로 와야 해요.
주께서 시켜서 주를 위한 것이 나와 줘야 이것이 그 일을 하는 내가 그 가운데서 주님의 공로에 끼어들 여지가 사라져 버려요. 시작을 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그 들판에 있는 목자에게 예수님 나신 곳에 가보라고 한 것은 주께서 실시하고 천사가 지킨 것이지 ‘이쯤 되어서 아기 예수 태어날 때 되었는데’라고 생각한 것 아니거든요.
주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주에게 영광 돌렸다는 그러한 합리적인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건 잘못이에요. 우리는 주를 위한 위인들이 아닙니다. 주께서 하게 하셔서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나만 챙기는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할 때 그것보다 더 주께 영광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분과 지금 동행하고 있는 줄을 여러분들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수아가 은퇴한답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사라진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주여 저희들도 당황하지 않게 해주시고 날마다 주님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방법으로 주님의 십자가만 드러내는 이 거룩한 천국 가는 길에 우리가 감사로만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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