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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요소(수24;1-5) 19081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8. 19. 07:32
2019-08-18 15:03:31조회 : 27         
   장애요소 19081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장애요소(여호수아 24: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kmtqcZTdfA, Hit:1
 이근호19-08-18 15:52 
장애 요소     

2019년 8월 18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4:1-5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24: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24: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24: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호수아가 언급한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인데 사람들은 이 내용은 그냥 역사로 읽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데 도무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신앙이 대단하다고 여기면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작용하시는 대로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했다’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덮치고 이끌어주셔서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되었다’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사표시는 할 수 있으니 여전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됩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에 초점에 모아져 있습니다. 모든 몸짓과 생각과 말과 태도, 어느 것 하나 “내가 어떻게 살아남지?”와 무관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민족이 아닙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와 관련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싸움은, 세상 인간들의 동질성과의 싸움입니다. 즉 이스라엘만큼은 이질적입니다. ‘이질성’이라는 말은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만이 산다고 여기는 도시에 외계인이 타고 온 비확인물체(UFO)가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문명에 버젓이 존재하는 형국같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겜이라는 곳에 모이게 했습니다. 세겜은 ‘언약궤’가 있는 곳입니다. 이 ‘언약궤’가 UFO와 같은 물체입니다. 이질적인 기능이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동질적이든 이질적이든 존재한 것은 쉽게 믿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지난 이스라엘민족이 이곳까지 오면서 사람들이 ‘과거 역사’라고 여긴 것 때문에 빠져 있는 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혜택은 혜택대로 받으면서도 “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만 동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즉 기적적인 것도 고맙고 동행하셔서 적들을 물리치시는 것도 좋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인간들이 이해하시는 방식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끌지 않으시냐는 겁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관심사가 자기 건사하고 자기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정상이다”를 기본 전제로 해서, 자신들의 세상에 대한 욕구를 키워나갔던 겁니다. 

하나님은 으레 자신들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마땅히 하실 일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들은 자신들이 할 일에만 몰두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마음 자세는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왜 저희들에게 그리 관심두십니까? 내팽개쳐도 되는데 말입니다.”라는 질문을 할 줄을 몰랐던 겁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구원인가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 관심 없는 것을 관심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장애요소’입니다. 이 장애요소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해 오셨습니다. 이점을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주님이 주신다’가 아니라 ‘내가 곧 주님이 얻고 싶은 것이다’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벌리신 모든 일은 동질성 대 이질성과의 대결이었고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질성에 대해서 철없는 이스라엘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는 동질성’일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를 들면, 홍해를 건너올 때에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쫓아오고, 앞에서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이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때 그들은 다른 질문을 내놓아야 합니다. 즉 본인들 자체가 하나님이 벌리시는 ‘동질성-이질성’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꼭 이런 궁지 상황이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증거하는 상태가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밤이 중요합니까? 대부분은 사람은 ‘별’이 중요하고 주인공이라고 여깁니다. 홍해 건너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홍해를 열어주셨다”고 좋아 들 할 게 아니라, “왜 막힌 바다 앞에 서야하고 그 막혔던 바닷길이 열려져야 합니까?. 이 방식 외에는 왜 없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기에 답변은 바로 인간 자체의 장애적 요소와 결부되는 식으로 답변이 됩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형편을 꾸려나가는 있어 원인적 행위로 개입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시작할 때니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가 생기도록 조치해주세요”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런 동질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가 됩니다. 

‘원수’라는 말은 출애굽기 15:6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하나님의 오른손 권능이 나타나는 현장에 하나님의 원수도 같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왼쪽/오른쪽의 차이는 하나님의 원수가 도저히 더 이상 자기 정체를 숨지지 못하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남태평양을 지나고 있다고 봅시다. 비행사가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합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오른쪽 태평양이요, 왼쪽에 보이는 것은 왼쪽 태평양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승객들은 아재 개그에 피씩 웃고 치우지요. 왜냐하면 같은 태평양에서 왼쪽, 오른쪽 두 개의 바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농담인 이유는, 헬리콥터가 바다 위에 떠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오른쪽에는 구원이요 나의 왼쪽은 지옥이다”고 하신다면(마 25: 
33)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인간들은 이미 한 동질성으로 묶여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질성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질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 자신을 못 알아보고, 못 알아듣는 이 인간들에게 ‘장애요소’가 있음이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살 생각과 자기 권리만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 통속입니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시작한 구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에 이방신을 섬겼던 데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해서 통렬한 이질성적인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버지 손으로 잡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동질성 속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럴 경우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애요소를 발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내쪽으로 뭘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이질성이 우리 안의 이질성으로 심어지는 거군요”라고 말입니다. 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수놓은 밤’이라는 환경을 위해 별이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일 속에서, 더 이상 나의 성과를 내세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08-19 02:48 
248강-여호수아 24장 1~5절(장애 요소) 201908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356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모인지라,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으는 장소가 세겜이라는 곳입니다. 세겜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거기에 두었습니다. 언약궤라 하는 것은 어디에서 만들었느냐 하면 하늘에서 만들었어요. 하늘에서 만든 것이 세겜이라는 땅에 이렇게 놓여 있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 하면 외계인이 자신의 우주선을 미국 NASA 쯤에 이렇게 설치해 놓았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인간들은 같은 인간이니까 동질성을 주장하겠지요. 너나 나나 다 인간이라고. 그러나 그 동질성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성질이 다른 이질성이 이렇게 강제로 개입이 된 겁니다. 그러면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에 협상이나 타협은 없어요. 이것은 싸움만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다른 나라는 그냥 살기만 하면 돼요. 씨족끼리 부족끼리 종족끼리 그냥 살면 되는데 이스라엘은 나라 자체가 싸워야 할 운명을 지닌 나라예요. 싸워라. 각종 신들과 더불어 싸워라. 인간들과 더불어 싸워라. 이렇게 싸워야 할 그런 운명을 지닌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 뭘 명분으로 싸워야 할까요? 

바로 그 인간들의 동질성 속에 이질적인 요소를 지닌 이스라엘민족이 동질성과 이질성 사이에서 싸우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일반 사람들, 이방인들은 어떻게 사느냐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늘 관심사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관심사입니다. 싸운다는 것은 보통 싸우면 어떤 업적과 실적 같은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스라엘은 어떤 업적과 실적 같은 것이 아예 없습니다. 

이거 싸우면 이거 얻는다든지 이거 이기게 되면 이걸 차지한다는 그런 게 아예 없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그 본인들 자체가 이미 전쟁의 업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의 실적이에요. 싸움이 없을 때는 이만큼 있는데 싸우고 난 뒤에 이것의 두 배나 얻었다면 싸울 마음이 들어요. 어디서 그러느냐 하면 동질적인 인간들끼리는 그게 이해가 되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온 겁니다. 

열심히 싸웠고 애썼으면 이 만큼 전리품 얻었으면 이건 우리 것이라는 식이 되는데 이스라엘의 싸움은 그게 아니고 싸우면 싸울수록 내가 진정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어떤 신분에 속해 있는지를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싸울 때는 동질성으로 싸우다가 나중에 싸움하면 할수록 내가 적과 이질적인 신분자이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이 감이 올 때 그 자체가 싸움의 결과이고 싸움의 업적입니다. 

이 싸움의 결과의 극한적인 모습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자꾸만 주장합니다. “나는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하늘에서 태어났다. 너희는 땅에 속하고 나는 하늘에 속했다.”라고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에서 태어나고 너희는 땅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너희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라는 이것이 이질성이에요. 

이질성 자체를 부각시키는 전쟁입니다. 그게 요한일서 5장에 보면 뭐냐 하면 이건 예수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하늘에 속했고 너희 말고 나머지는 땅에 속했다”라고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 전쟁의 마감이고 그 결과입니다.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여러분 또 질문하고 싶으실 거예요. “하늘에 속한 건 좋은데 우리 어떻게 살까요?”라고 나올 거예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하늘에서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살지 가 아니라 무엇과 싸울지를 물어야 한다고. 우리의 적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그 싸움은 우리 인생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릴 때까지 싸운다”라고 했어요. 그게 어떤 싸움이냐 하면 선한 면류관을 놓고 싸우는 싸움이에요. 

천국이 있음을 알리는 싸움이었습니다. 자기의 영달이나 자기의 생계나 자기의 수명을 늘리는 싸움을 하지 않았어요. 물론 사도바울도 그 당시에 국민연금이라든지 보험이 있었으면 아마 들었을 겁니다. 그런 것까지 마다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 육적인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보험들 것 다 들고 아마 사도바울이 차가 있었으면 기본 보험은 다 들었을 거예요. 

그런 시시한 것을 가지고 이질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모르는데 이질적인 거, 전혀 차이나지 않는데 하는 그 지향성이 차이 날 때 그런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제가 말을 하면서도 참 어려운 말을 했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네요. 그런데 제가 어려운 말을 일부러 지어내면 나쁜 놈이지만 성경 자체가 그렇게 그냥그냥 넘어갈 수 없는 책이에요. 

출애굽기 15장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이야기했는데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창세기로 출애굽기로 민수기로 다 돌아가서 대조해 봐야 해요. 그래야 여호수아가 어떤 취지로 이야기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여호수아가 과거에 창세기 12장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출애굽기 이야기해 놓고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그래서 언약궤다. 언약궤가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15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저는 어렵게 느껴졌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시는지 들어보세요.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나이다” 여기서 제가 어렵다는 말은 ‘주의 오른손’이에요. 주의 오른손. 이게 무슨 뜻일까요? 주의 오른손에서 능력이 나온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왜 주님의 왼손은 안되고 주님의 어퍼컷은 왜 안 되고 주님의 오른발은 왜 안 되고 주님의 오른 다리의 킥은 왜 안 되는 겁니까? 왜 주님의 오른손입니까? 주의 오른손이 등장함으로써 같이 병행해서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원수가 등장해요. 그러니 이건 이렇게 되면 정말 난해하다는 말도 모자랄 판이에요. 더욱더 난해하게 들어가 버려요. 

제가 아침에 설교했던 것처럼 교인들이 교회 올 때는 하나님께 얻어 챙기려고 교회 온 거예요. 그러나 막상 성경을 보게 되면 얻어 챙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계속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 버립니다. 언제 얻어 챙기려 하는 나 자신도 사라져버립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버리면.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어내 버리면 계속 내 자의식이 남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 속에 끌려가 버리면 내가 뭐 챙겨서 얻겠다는 결과나 실적 같은 것은 날아가 버리고 나 자신이 전에 내가 교회 올 때와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뭔가 시도해서 얻어 챙겨서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들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말씀이 들어가 버리면 내가 원치 않는 다른 자리가 내 자리가 되어버리는 이질성을 내가 느끼게 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곳까지 왔지? 그럼 나 챙기는 것은? 그 챙기는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거죠. 주께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내가 되니까. 지금 여호수아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버티고 살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라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하고있는 겁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야기하면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묻는 거예요. “여러분이 애써서 여러분들이 이만큼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작품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정답을 익히 아는 척을 하면서 하는 말이 “그거야 당연히 주님의 작품이지요. 믿습니다”라고 이렇게 우기는데 그러면 “그렇게 될 때까지 도중에 변화된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변화된 것이 항상 교회 올 때는 하나님 것을 얻어가지고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왔는데 어느새 가다 보니까 달라졌다면 어느 대목에서 달라졌고 어떤 식으로 노선 변경이 일어났느냐는 겁니다. 

제가 한 질문을 할 테니 여러분들이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별이 중요합니까? 밤이 중요합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중요해요? 밤이 중요해요? 누가 들어도 여기서는 밤보다 별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밤이 별을 빛나게 만들었다고. 환경이 어떤 인간을 다른 인간으로 바꿉니다. 

그러면 새로운 낯선 이질적인 환경이 우리를 덮쳐야 되죠. 만약에 내가 내 자아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밤의 중요성을 모르고 내 별이 별답게 되려고 고집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전혀 노선 변경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 10년 다녔다. 20년 다녔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이만큼 얻었다. 나 잘 믿죠?’라고 되어버려요. 

그런 변화된 것이 아니에요. 그건 변화된 것이 아니에요. 내가 노리고 있는 바를 내가 획득했을 뿐이죠. 그거는 그 자체가 주님의 하나님의 원수예요.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 홍해가 갈라졌다”라고 할 때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던가요?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했을 때 하나님의 어디서 나온 힘이 홍해를 갈라지게 했을까?’라는 것에 관심을 둬야 하는데. 

별이 빛나는 밤에서 밤이 어떤 효과를 주었기 때문에 별이 빛난 것일까는 생각 안 하고 ‘그들 히브리인들은 뒤에 애굽 군사들이 쫓아오는데도 갈라진 바다 가운데를 용감하게 믿음으로 통과했습니다’라는 거예요. 믿음으로 통과했다는 거예요. 그게 뭐가 힘든 겁니까? 갈라진 바다 땅 딛고 가면 되죠. 미역 다시마 쳐다보면서 그냥 가면 되지 그게 뭐가 힘들어요? 

우리가 질문한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우리가 매일 인생이 수월하게 진행되는군요’라는 이런 이야기하게 되면 그건 동질성이에요. 이전에도 그랬던 동질성. ‘주님 왜 저를 이렇게 몰아넣습니까?’라고 질문 자체가 바뀔 때 그 인간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질문 자체가. 내가 하나님 믿고 무슨 이익을 얻느냐는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제는 끝나야 해요. 

왜 주어진 환경이 내가 원치 않는 환경이어야 합니까? 여기 본문에 홍해 이야기가 나오니까 홍해 이야기합니다. “애굽 땅에서 건져 내었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다시 홍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홍해를 건너가면서 두 발이 있으니 건너갈 수 있어요. 아마 휠체어 탄 사람은 휠체어 굴리면서 막 통과했을 거예요. 문제는 왜 이런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야만 하냐는 겁니다. 

왜냐면 조금 전까지는 뒤에 애굽 군사가 따라오고 앞에는 물이 있어서 우리 다 죽었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그들의 본색이 다 드러났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서 어떤 입장이냐 하면 원망 외에는 나올 게 없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원망하든지 하나님 앞에 불평할 때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걸 하나님의 장애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떤 일이 장애가 일어나면 그 일 중심으로 모든 일이 스톱이 되고 모든 관심은 장애가 왜 일어났는가에 쏠리게 되어있어요. 

내가 하는 일이 막혔을 때 지금껏 내가 신경 쓰던 것이 중지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어있어요. 그 방법을 누가 사용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떤 유대인이 성경을 보다가 감동 받아서 “제가 하나님 믿겠습니다. 여호와도 믿지만, 이제부터 삼위일체도 믿고 예수도 믿겠습니다”라고 할 때 그 순간 예수 믿는 그 말 고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장애 요소가 되는 겁니다. 

“오실 메시아가 예수인 줄 저는 인정하고 믿겠습니다”라고 하며 자기 딴에 큰 건수 건진 거라고 이해하죠. ‘야, 내가 예수를 몰랐으면 지옥 갈 뻔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내가 천당 가게 되었구나. 나는 살았다’라고 생각하면 정말 교회 오고 복음들은 보람 같은 걸 느끼거든요. 그건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해답을 준 것이 되기 때문에 어떤 노선 변경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채워 줬으니까 이 사이에 어떤 장애 요소가 없어요. 지금 저만 알아듣는 이야기 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는데. 잠시 논리를 멈추고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라서. 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들 위에서 뛰는 트렘폴린이라는 기구 있잖아요. 그걸 뛰고 있더란 말이죠. 뛰고 있으니까 아래층에 있던 아저씨가 참다 참다 올라갑니다. “아이가 위층에서 너무 쿵쿵거리니까 아이들 좀 조용히 하도록 해주세요”라고 아이들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이건 장애 요소가 아닙니다. 

이건 약간의 이성이 있고 지성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장애 요소냐 하면 쿵쿵거리니까 올라갑니다. 올라가니까 아이도 있고 부모도 있고 한데 아래층에서 화가 난 그 사람이 올라가서 부모에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쿵쿵 뛰고 있는 아이를 부모 보는 데서 때렸다면 이건 상식을 넘어서는 짐승만도 못한 일이 되지요. 

아이를 때려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자기 눈앞에서 자기 아이가 다른 어른에게 얻어맞았을 때 물론 쿵쿵거리는 장본인은 아이가 맞지만 그래도 부모가 있는데 코앞에서 아이를 때린다는 것은 인간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지금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여호수아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끄집어낼 때 그때 이방 신을 섬겼단 말이죠. 

신을 섬기는 것은 인간으로서 신에게 제사 드리고 신에게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것은 자연스럽고 신을 믿는 이상 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이건 아무 장애 요소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때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이삭을 때려버리면 그것도 남이 때린 것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가 스스로 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제물을 잡아 죽인다면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이성과 상식과 모든 통념을 뛰어넘는 장애 요소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너는 하나님 못 믿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믿을 수 있는 재주는 다 퍼내 봤자 네가 이걸 넘어설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차라리 때려도 나를 때리지 왜 내 아이를 잡습니까? 왜 내 아이를 죽입니까?”라는 말과 “시끄러우면 나에게 이야기해야지 왜 하나밖에 없는 내 귀한 아들을 왜 때립니까?”라는 말이 똑같은 거예요. 

이건 충격입니다. 바로 이게 하나님께서 앞에 홍해 바다를 놔두고 뒤에서 애굽 군사가 쫓아오게 해서 완전 진퇴양난의 상태가 되게 하니까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공동묘지가 없어서 죽게 하는구나”라고 할 정도로 그들에게 다급한 상황을 만들어내시고 바닷물을 갑자기 갈라지게 하신 것은 이건 우리 보기에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하지만 이건 기적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문제 삼는 거예요. 

네가 지금 문제 있다는 거예요. 너는 너 아는 거, 상식, 신에게 할 도리, 착하게 사는 거, 바르게 사는 거, 기껏 그것 붙들고 살아가는데 그게 바로 너를 지옥가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그걸 뛰어넘을 능력이 없으니까.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해야죠. “하나님 어떻게 홍해를 건너갔습니까?”라고 하지 말고 “왜 홍해 물이 갈라졌습니까?”라고 질문을 이렇게 해야죠. 

그 질문을 한번 바꿔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왜 우리에게 언약궤를 주셨습니까?” 제가 이렇게 설명 안 하고 그냥 언약궤를 주었다고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기 백성과 함께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제사라는 제도를 생각해 주시고 모세를 대표로 보내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보았던 양식대로 그대로 이 지상에 성막 세우고 언약궤 해서 언약궤에 일 년에 한 번씩 그리고 매 안식일마다 제사 드리되 특별히 7월 10일에 일 년에 한 번씩 소의 피를 언약궤 위에 바르면 그동안 알든 모르든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모든 죄는 일거에 용서해 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끈다’라는 이 생각이 맞는 겁니까? 

이게 맞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땡잡았다는 그런 이야기예요? 거기서 무슨 장애 요소가 나옵니까? 거기서 우리가 문제가 있고 극복할 수 없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 어디서 드러납니까? 안 드러나요. ‘언약궤 준비해서 용서하고 하는 거는 그럴 수 있겠다. 아이디어 괜찮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안수해 가지고 이 죄를 양을 잡아서 대신 옮겨 가면 우리는 죄가 없어지는 것이 납득이 되네’라고 생각되지 그게 무슨 장애 요소입니까? 

이게 나 자신을 내가 문제 삼을 이야기냐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문제 있다는 것은 모르고 그냥 정보, 구원받을 모든 정보를 성경을 통해서 소위 전문가라는 목사를 통해서 그거 주워 모으기 급급했죠. 그래서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23장에 16절에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면”이라는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지금 동의하기는 “믿습니다. 잘하겠습니다. 여호수아님이 돌아가셔도 우리는 당신이 가르쳐준 교훈과 훈계를 철저하게 지킬 겁니다”라고 백날 이야기해도 너희들은 너희가 누구인지를 너희가 모른다는 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누군지를 모르고 결국은 너희들은 배신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고 신명기 마지막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마지막 유언이 그거예요. “너희들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것이다. 그것이 본질이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그 문제 해결해야겠지요. 왜 주의 오른손이고 홍해가 어디서 나온 힘으로 갈라졌는지. 그건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다른 데서 온 거예요. 주의 오른손에서 나왔단 말이죠. 그러면 주의 오른손이라는 말이 왜 등장하느냐 하면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출애굽기 15장 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거 안 풀고 그냥 후딱 넘어갈 생각하지 마세요. 

홍해는 주의 오른손의 힘으로 갈라졌다. 왜 오른손이냐 하는 문제. 여호수아 23장 6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여기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 나오죠? 여호수아 1장에도 그대로 나와요.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여기 좌측과 우측이 나와요. 좌측과 우측이 나오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좌측과 우측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하필 오른손으로 구원을 하느냐는 이 말은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남태평양에 가서 헬리콥터로 여행을 한다고 칩시다. 농담으로 헬리콥터 운전사가 이렇게 말한다고 칩시다. “자, 손님 여러분, 우측에 있는 것은 우측 태평양이고 좌측에 보이는 것은 좌측 태평양입니다”라고 하면 손님들이 그 아재 개그를 듣고 웃을 거예요. 

왜냐 하면 헬리콥터가 지면에 있을 것 같으면 좌측 우측이 성립되는데 헬리콥터가 지금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입장에서 좌측 우측이 의미가 없어요. 분리되기 때문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전부 자기 다리 밑에 있기 때문에 동일한 거예요. 동일함. 

예수님이 와버릴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본 거예요. 예수님이 주님이 오른쪽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주님의 두 발이 이 지상에서 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그리고 지상에 있는 인간은 아무리 접하려고 손을 뻗어도 떠 있는 주님의 세계에 도달될 수 없는 그러한 장애 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는 것은 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가 이 말씀 하는 거 또는 출애굽기에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것은 결코 이질성과 동일성이 합체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밤이 별을 별 되게 해주는 거예요. 낮에는 별이 있어요? 있지만 별이 별답지 못해요. 빛나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밤을 줌으로써 별이 빛나는 밤이 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너희들을 구원했다는 그런 밤이 되게 하는 겁니다.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천국은 주님만이 수놓는 곳입니다. 주님의 공로만 높여지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악마의 속성이 있어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노력으로 하나의 별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스타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고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는 자기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환경은 다 지우고 자기 애쓰고 노력한 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 인생을 수놓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너희들은 절대로 너희 잘못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하나님 말씀 근처도 못 간다”라고. 

우리는 우리에게 덮쳐진 환경이 확인되면 “주여 어떻게 하면 구원됩니까?”라는 질문 하지 마세요. “주여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왜 저에게 깨닫게 하신 겁니까? 네가 기도해도 안 되고 믿어도 안 되고 소망도 사랑도 안되고 오직 주님의 오른손으로만 구원되었음을 왜 저에게 알려주십니까?”라고 물어야 해요. 

“네가 사나 죽으나 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원래 이스라엘이야.” 아무것도 없는데 주께서 혼자 일하셔서 하나님께서 아무도 뛰어넘을 수 없는 우리의 장애 요소를 주님이 뛰어넘으셨어요. 아무도 할 수 없어요.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죽입니까? 그러나 그것마저 나는 죽어 마땅함을 이제 구원받고 난 뒤에는 깨달아서 이제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 되게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어렵고 어려운 주의 일을 하나님의 언약궤로 나은 능력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는데 그들은 안다고 우겼습니다. 나중에 가서 하나도 몰랐습니다. 주여 이제는 저희들이 먼저 알고 시작하게 하여 주시고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 주의 은혜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