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요소
2019년 8월 18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4:1-5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 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24:3)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24: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으며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24: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
여호수아가 언급한 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인데 사람들은 이 내용은 그냥 역사로 읽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데 도무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신앙이 대단하다고 여기면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작용하시는 대로 우리는 그냥 당하기만 했다’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무런 하자가 없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덮치고 이끌어주셔서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되었다’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의사표시는 할 수 있으니 여전히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게 됩니다.
인간들의 사고방식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에 초점에 모아져 있습니다. 모든 몸짓과 생각과 말과 태도, 어느 것 하나 “내가 어떻게 살아남지?”와 무관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런 민족이 아닙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와 관련된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의 싸움은, 세상 인간들의 동질성과의 싸움입니다. 즉 이스라엘만큼은 이질적입니다. ‘이질성’이라는 말은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만이 산다고 여기는 도시에 외계인이 타고 온 비확인물체(UFO)가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문명에 버젓이 존재하는 형국같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겜이라는 곳에 모이게 했습니다. 세겜은 ‘언약궤’가 있는 곳입니다. 이 ‘언약궤’가 UFO와 같은 물체입니다. 이질적인 기능이 작용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동질적이든 이질적이든 존재한 것은 쉽게 믿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가 않습니다. 지난 이스라엘민족이 이곳까지 오면서 사람들이 ‘과거 역사’라고 여긴 것 때문에 빠져 있는 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혜택은 혜택대로 받으면서도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만 동행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겁니다.
즉 기적적인 것도 고맙고 동행하셔서 적들을 물리치시는 것도 좋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인간들이 이해하시는 방식으로서 이스라엘을 이끌지 않으시냐는 겁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관심사가 자기 건사하고 자기 지키는 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정상이다”를 기본 전제로 해서, 자신들의 세상에 대한 욕구를 키워나갔던 겁니다.
하나님은 으레 자신들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이 마땅히 하실 일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들은 자신들이 할 일에만 몰두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할 마음 자세는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왜 저희들에게 그리 관심두십니까? 내팽개쳐도 되는데 말입니다.”라는 질문을 할 줄을 몰랐던 겁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구원인가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 관심 없는 것을 관심 갖게 하는 것이 바로 ‘장애요소’입니다. 이 장애요소에 기초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해 오셨습니다. 이점을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주님이 주신다’가 아니라 ‘내가 곧 주님이 얻고 싶은 것이다’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벌리신 모든 일은 동질성 대 이질성과의 대결이었고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질성에 대해서 철없는 이스라엘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는 동질성’일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를 들면, 홍해를 건너올 때에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쫓아오고, 앞에서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일이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이때 그들은 다른 질문을 내놓아야 합니다. 즉 본인들 자체가 하나님이 벌리시는 ‘동질성-이질성’ 전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꼭 이런 궁지 상황이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증거하는 상태가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밤이 중요합니까? 대부분은 사람은 ‘별’이 중요하고 주인공이라고 여깁니다. 홍해 건너는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홍해를 열어주셨다”고 좋아 들 할 게 아니라, “왜 막힌 바다 앞에 서야하고 그 막혔던 바닷길이 열려져야 합니까?. 이 방식 외에는 왜 없는 겁니까?”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기에 답변은 바로 인간 자체의 장애적 요소와 결부되는 식으로 답변이 됩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형편을 꾸려나가는 있어 원인적 행위로 개입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시작할 때니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가 생기도록 조치해주세요”라고 나옵니다. 바로 이런 동질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가 됩니다.
‘원수’라는 말은 출애굽기 15:6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하나님의 오른손 권능이 나타나는 현장에 하나님의 원수도 같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왼쪽/오른쪽의 차이는 하나님의 원수가 도저히 더 이상 자기 정체를 숨지지 못하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남태평양을 지나고 있다고 봅시다. 비행사가 다음과 같이 농담을 합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오른쪽 태평양이요, 왼쪽에 보이는 것은 왼쪽 태평양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승객들은 아재 개그에 피씩 웃고 치우지요. 왜냐하면 같은 태평양에서 왼쪽, 오른쪽 두 개의 바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농담인 이유는, 헬리콥터가 바다 위에 떠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오른쪽에는 구원이요 나의 왼쪽은 지옥이다”고 하신다면(마 25: 33)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인간들은 이미 한 동질성으로 묶여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동질성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질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 자신을 못 알아보고, 못 알아듣는 이 인간들에게 ‘장애요소’가 있음이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각자 자기 살 생각과 자기 권리만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 통속입니다. 그들은 ‘자기로부터 시작한 구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에 이방신을 섬겼던 데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의해서 통렬한 이질성적인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버지 손으로 잡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동질성 속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럴 경우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장애요소를 발견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내쪽으로 뭘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하나님의 이질성이 우리 안의 이질성으로 심어지는 거군요”라고 말입니다. 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수놓은 밤’이라는 환경을 위해 별이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부터 시작한 일 속에서, 더 이상 나의 성과를 내세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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