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의 유언
2019년 8월 11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3:14-16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23:15)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23:16)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가능성을 타진한 것 같습니다. 잘 될 가능성도 있지만 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인간의 가능성의 한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구약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멸망의 시기도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능성을 겨냥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반면에 신약에 오게 되면 인간이 모든 가능성의 한계를 일괄해서 알려줍니다. 즉 ‘인간의 모든 가능성마저 죽을 죄에서 못 벗어난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이 세상 산다는 것은 병원에 입원해서 사는 식입니다.
가끔 보면, 병원생활이 답답해서 깁스한 채로 길로 나아가 환자복 입은 채로 담배 피우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치료 도중에 참지 못해서 마실 나온 겁니다. 즉 자신의 가능성을 보게 되면 ‘나는 계속 병원에서 묵힐 자가 아니라 언젠가는 밖에서 활보해야 될 자’라는 티를 내는 겁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이 옳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여호수아의 유언에 담아 전합니다. 이방신을 믿을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이 아름다운 땅에 추방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예언은 하나님의 일방적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망함’에 대해서 그 어떤 경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를 보사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아담과 하와는 그때까지 죽음이라는 것을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 대상을 향하여 죽음을 벌칙으로 선언하는 것이 상대방의 행위를 저지하는데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 겁니다. 즉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 중 그 어느 하나 지킬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 가능성을 신봉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여호수아 유언은 백성들이 느끼고 체험한 그 가능성을 넘어섭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자신의 미래의 운명에 대해서 끝까지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 됩니다. 자신의 미래를 정하는데 그들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인다면 이는 100% 구원에 탈락입니다.
오늘 본문이 신약에 있지 않고 구약에 놓여 있음을 감안합시다. 여전히 인간들이 자신이 구원을 얻을 만큼 선할 수 있다고 자신할 때에, 하나님의 예언은 인간의 자신감을 타 넘어버립니다. 신약에 오면 상황이 구약과 다릅니다. 히브리서 9:17에 보면,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언은 그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있다’는 겁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도리어 정반대입니다. 살아 있을 때 아무리 자식 붙들고 간절히 부탁해도 막상 연로한 어르신네가 돌아가시는 순간, 그 유언은 자식 손으로 넘어가 유동적이게 됩니다.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큰 권한을 현실 속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산 자들의 집결입니다. 가능성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처합니다. 그들이 가능성을 발휘하고 싶은 이유는, 가능성의 끝을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면 인간의 가능성을 이미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한 죽음’입니다. 따라서 이미 죽은 자의 유언이 효력이 있다는 말은 곧 ‘자신의 끝’을 예수님의 죽음에서 비로소 찾았다는 사람에게나 해당됩니다.
구약에 보면, 도중에 자신의 죄됨을 알지 못하고 나댄 사람이 등장합니다. 역대상 21;1에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사단’ 곧 ‘악마’가 등장합니다. 이 악마는 살아 있는 다윗의 가능성을 스스로 점검하게 합니다.
즉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왕이냐? 이 정도라면 제대로 왕노릇했다고 자랑할 만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마음을 격동시킨 겁니다. 다윗 왕은 많은 백성의 수에 흐뭇해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역대상 21:14에 보면,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아까운 숫자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가능성의 끝을 못봤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다가,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입원해서 새 사람 되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치료 도중에 병원을 뛰쳐나온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자랑질 하고 싶었던 그 많은 수의 백성은 사흘 동안에 7만 명이나 나가떨어졌습니다.
다윗은 신약에서 말씀하신 바, 즉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을, 전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그 장소에 서게 합니다.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번제가 차려집니다. 그것이 모리아 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원칙을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신다는 보여주시는 겁니다.
모든 살아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가능성은 이미 죽으신 단 한 분의 유언의 위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 구원이란, 예수님의 유언에 의해서 판가름납니다. 그 유언에 의할 것 같으면, 이미 모든 인간은 어떻게 되었든 죽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병원이 있는 이유는 ‘치료 도중에 멀쩡하게 잘 될 수도 있다’가 아니라 아예 ‘모든 인간은 이 병원을 통해 다 죽어야 한다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유언을 유언답게 하기 위한 병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미 결론이 났으면 그 결론을 군말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잘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어떤 짓도 소용없다’기 되는 겁니다. “살려 주세요”가 아니라 “왜 살려주십니까?”입니다. 참으로 죽은 자의 유언이 효력이 있는 현상은, 죽지 않더라도 일직감치 자신의 죽음과 그 이유를 그 죽은 분을 통해서 아는 자들이 등장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신약시대의 새 이스라엘입니다.
여호수아의 유언은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을 일괄적으로 묶어서 예수님 오시는 쪽으로 흘러 보내게 됩니다. 무엇이 우상숭배인지 무엇이 약속의 땅에 쫓겨남이지 이제 나의 유언,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을 넘어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죽으나 주의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9-08-11 21:01:15 | 조회 : 29 | 247강-여호수아 23장 14~16절(여호수아의 유언) 20190811-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21.154.249.203) | | 247강-여호수아 23장 14~16절(여호수아의 유언) 201908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3장 14~16절입니다. 구약성경 356페이지입니다.
“보라 나는 오늘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은 마음과 뜻으로 아는 바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아멘 아무도 지금 안 하셨지요? 인간 속에서는 내가 원하는 가능성이 있는 반면에 주님이 따로 보고계시는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본문이 구약에 나오는데 이 본문을 딱 오려서 신약에 집어넣으면, 신약에 만약 이런 내용이 있다고 치면, 신약의 어느 성경책에 이게 마지막에 있다고 치면 아무리 10년, 20년, 30년 교회나오고 믿는다고 해도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예언대로 그대로 내가 내놓는 가능성은 밑천이 바닥났거든요. 할도리 다 한거예요. 교회나오고, 성경공부도 하고, 할도리 다 해봤는데 이게 기껏 내가 아는 가능성이에요. 내가 이 정도일 거라고 아는 가능성이에요. 하지만 그 가능성은 필히 나는 천당간다로 결론이 나는 가능성에 불과해요.
그렇다면 나는 내가 열심히 해서 천국간다는 것이 맞다고 한다면 주님도 “그래, 맞다”라고 해주면 걱정 근심없겠는데 그게 아니고 ‘그래, 나는 천국가’라고 생각했는데 성경말씀에 “너는 망하고 불길하고 결국에 너는 내쳐질 것이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만약에 우리 귀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면 나는 또 무엇을 더 추가적으로 챙겨야 하냐는 부담을 갖게 됩니다.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것은 오늘 본문이 구약이 아니고 신약에 있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아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다행스러운 건지 이 본문이 신약이 아니고 구약에 있습니다. 구약에 있다면 이 구약에 나오는 이 불길한 일, 망하게 하는 일, 다른 신이라는 이 정체는 신약에 가서 몽땅 다 밝혀 집니다. 신약에서 밝혀 지거든요.
그럼 신약에 가면 어떤 대목에서 밝혀 지느냐 하면 좀 어렵습니다만 참아 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본문이 14절에 보면 “내가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고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가 지금 죽음이 임박해서 유언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우리 예수님과 비교해보세요. 여호수아는 그냥 자기 인생을 살다가 그냥 자기 인생끝나고 죽을 뿐이에요.
남에게 어떤 효과를 주지 못합니다. 어떤 혜택을 주지를 못해요. 나 하나 죽는다고 해서 나덕분에 다른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는 아마 없을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죽는다면 여러분 죄값으로 죽는 것이고 여러분 죽는다고 대신 남이 살아나는 경우는 없어요. 그래서 여호수아의 이 말씀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본인 가는 길은 본인으로서 죽으면 마감이 되는 그런 대상자를 향하여 계속 주는 거예요. 그런 대상자를 향하여.
“우리 살다가 죽으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끝이죠”라고 대답하고 “당신 죽었다고 다른 사람이 어떤 영생 얻는 것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없지요”라고 대답하는 이게 오늘날 우리 입장이나 여호수아 당시의 입장이나 똑같은 거예요. 이게 지금 구약에 나와있습니다. 신약이 아닙니다. 지금 구약에 나와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대로 믿으면 참 이해하기가 쉬워요. 그래, 살다가 여호수아가 나이많아 죽어가면서 남은 백성을 걱정하며 당부하는 구나. 나도 나중에 할아버지 되어서 손자 손녀 자식들 모아놓고 “얘들아, 평생 예수 잘 믿어야 한다. 신앙 생활 잘 해야해”라고 하면 자식들이 “혹시 아버지 죽어도 우리가 천당가는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물어보면 “야야, 나 나는 메시아가 아니야. 나는 그냥 내 갈길로 갈 뿐이지 내 갈길 간다고 해서 너희들이 천국가고 그럴 일은 없어”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오늘날 일반적인 현상 이해하는 거나 오늘 본문 이해하는 거나 별다른 어려움이 없습니다. 뭐가 신약에서 어려우냐 하면 ‘그분이 죽었는데 내가 산다’라는 건데, 이건 미치지 않고서야 이걸 믿을 수 없습니다. 위장적인 고백은 소용없어요. 고백을 위장하는 건 소용없다고요.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어떤 사람이 늙어 죽는 건 내가 믿겠는데 그 사람이 죽어서 아무것도 안 한 내가 영생을 얻는다든지 천국간다든지 내가 그분을 믿지도 않았는데 그분이 나를 내가 믿기도 전에 구원하려고 선택해서 천국보내기로 작정했다는 이 사실을 내가 무슨 수로 믿느냐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니까 참 쉽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위장된 고백일 가능성이 많아요. 위장된 고백.
성경이 그렇게 윽박지르니까 믿어 주자는 식이죠. 실제로 그런 윽박 안 지르고 실제로 어떤 분이 어제 밤에 늙어 죽었는데 나에게는 아무 영향없다는 것이 정상이거든요. 우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는데 내가 산다는 것이 과연 이것이 기쁨으로 과연 이것이 무릎을 치면서 ‘바보같이 왜 진작 그것을 몰랐을까?’라고 무릎을 치면서 그렇게 감동을 받습니까?
제가 받느냐고 물으면 “예. 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라고 하신다면 그게 몇시간 가던가요?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가던가요? 아무일 없으면 그게 몇시간 가요. 그런데 집안에 우환이 생기면 갑자기 그것이 다 날아가버려요. 그러면 안되죠. 그러면 상식 수준이죠. 우리는 지금 상식 수준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유언을 보면서 이 백성들을 대하면서 제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제발 중간에 도중에 뛰쳐나오지 말라는 겁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깁스하고 앉아 있으면 그냥 곱게 입원실에 앉아서 깁스하고 의사 시킨대로 하게되면 빨리 퇴원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병원에 가보면 꼭 다리하나 깁스하고 나와서 입원복 입고 담배피우는 사람 있어요. 벌써 담배 피우면서 친구도 사귀었어요. 어떤 아주머니는 병원복 입고 옆에 식당에 가서 밥먹고 있어요. 중간에 뛰쳐 나와 버려요. 답답해서.
우리가 뛰쳐나올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의 이 유언이 별 의미가 없는 가? 의미가 있어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 촌에 나이 많은 농민들 보면 모자 하나씩 썼을 거예요. 모자를 썼는데 그 모자에 공통적으로 명칭이 하나씩 있어요. 모벤토라는 이름이 하나씩 써있어요. 모벤토. 저 깊은 촌에 가보면 모자도 하나 살 여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모자에 다 똑같이 모벤토라고 써있길래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봤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그게 농약회사에서 준 모자랍니다. 어디를 가도 전부 그 모자를 썼어요. 이쪽 마을에 가도 모벤토 저쪽 마을에 가도 모벤토예요. 지금 여호수아는 “잘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부다 모벤토라는 모자를 하나씩 썼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가 쓴 모자가 말씀인데 그 모자가 너희들로 하여금 필히 내가 예언한 대로 필히 너희들을 그렇게 몰고 가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좀 어렵게 말하면 “너희가 다른 신을 섬긴다”라고 하는데 왜 이 말이 어려우냐 하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걸 먹는 날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할 때 아담은 죽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의미가 없다니까요. 뭔가 죽어 본적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걸 먹는 날에 죽는다”라고 하면 ‘아이고, 먹으면 안되겠다. 죽으니까’라고 하는데 아담은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킨다는 인간을 안 받아 줍니다. 내가 그 말씀을 제대로 알고 지키겠다는 말을 신빙성이 없는 걸로 쳐버려요. “기다려 봐. 내가 말씀에 신빙성이 있도록 이제부터 시작할게. 네가 말씀을 알아? 웃기고 있네. 넌 말씀을 몰라. 말씀의 징벌과 말씀의 축복을 둘 다 경험하도록 내가 너를 사용하겠어”라는 것이 여호수아의 구약적 의미입니다. 구약적 의미.
구약에서는 이들이 말씀 지킨다고 천국, 말씀 어긴다고 지옥으로 바로 들이대는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들은 말씀이 가지고 있는 저주성과 축복성을 체험하는 시범 조교로써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원칙은 오늘날 까지도 지속되는 가? 안 믿는 사람에게는 지속이 돼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왜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이스라엘이 온 천지에 흩어졌거든요. 그걸 이스르엘이라고 해요. 수요 설교에서 했는데 이스르엘의 뜻이 뭐냐 하면 ‘흩어진다, 뿌린다’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파괴해서 모든 사람에게 다 뿌리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이 뭐냐 하면 까불다가 망했다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어서 우리가 메시아를 죽였기 때문에 우리가 망했다는 사실을 품고 그들이 온 천지에 흩어지게 되면 이스라엘에 주어진 징벌이 이제는 모압, 블레셋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전부다 다 확정되는 겁니다. 이사야 수련회 강의 할 때 그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모든 이방민족은 전부다 이제는 여호와에 의해서 멸망당한 이유는 복음이 땅끝까지 퍼졌기 때문이라고. 퍼지도록 조치를 취하신 거예요.
그러면 관건은 뭐냐 하면 유언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비로소 효과를 보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어떤 어르신들, 내가 아는 어떤 어르신도 그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가 죽거든 절대로 화장하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왜냐 하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 문을 열었는데 화장해 버리면 주께서 내 시체 찾는다고 수고가 많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절대로 화장하지 말라는 거죠. 그냥 무덤에 넣으면 주께서 재림하셨을 때 무덤 쫙 갈라지면 그대로 건진다는 옛날 이집트 종교같이 미이라 하듯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처럼 인간의 유언은 백날 그렇게 해도 그분 돌아가시고 볼 것도 없이 화장해버렸어요. 유언이 안 먹힌 거예요.
여호수아 유언이 아까전에 이야기한 모벤토 모자거든요. 모벤토 모자이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여호수아 말 안들어요.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하지만 여호수아의 말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필히 너희가 우상을 섬길 것이고 필히 너희가 이 땅에서 망할 것이라는 것은 그 모벤토 모자처럼 각자 모자를 다 썼으니까 그 모자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이 남긴 유언은 그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실시가 된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가 뭐냐는 겁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죽었는데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이게 가당하냐는 거죠. 이순신장군이 죽었는데 우리 후손이 일본에게 압제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거죠. 요새 보니 압제 당하는 거 같은데.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9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라고 히브리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는 신약입니다. 아까 전에는 구약이고요. “유언은 유언한 자가 되나니”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여러분 예수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물으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잘해주고 어쩌고 주저리 주저리 말하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죽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분이라는 겁니다. 지난 낮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죽으신 분의 귀신이 빙의 되어야 한다고, 죽은 자의 영이 들어와야 한다고, 그래야 성령받은 성도라고요. 이미 죽었던 분, 누가 봐도 죽었던 분이에요. 누가 봐도 죽었던 분인데 그 죽은 분의 영이 오게 되면 죽었던 분이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도중에 병원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고 최종적인 마감을 만끽하고 있는 그러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하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되어있거든요. 죽은 예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안 죽어도 죽은 자가 되어버려요. 죽은 자가 되었다는 말은 넉넉하게 죽은 자가 되어도 되는 이유는 우리는 그 죽은 자의 그 여력과 혜택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이 땅에 더 살 이유는 없습니다. 오메가3는 잊어주세요. 구태여 살 필요는 없어요.
이게 바로 사도바울의 신약적 효과예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넘겨짐은 내 안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건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우리는 여호수아의 유언대로 우상 섬기는 자 맞고요, 우리는 망해야 할 자 맞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유언은 아니지만 여호수아가 유언한 그 모자대로 예언한 그 예수님의 유언이 내 안에 살아 있으려면 나는 죄를 지어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순간 신앙생활하는 그 부담에서 다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잘났다는 그 부담에서 악마의 유혹에서 우리가 부담느끼지 마세요. 주님의 죽으심만 그것만 쳐다보면 됩니다. 유언이 유언답게 효과를 보이려면 우리는 죽어 마땅함과 예수님의 죽음과 매치가 되어야 한다고요. 모든 살아가는 그 모습이. 사람들이 이걸 몰라요. 이걸 모른다고요.
자꾸 주께서 이 세상이라는 병원에 집어넣었는데 깁스한 채로 자꾸 튀어나오려는 거예요. 아직 병 다 안 나았다는데. 이 지옥같은 지옥 병원에 집어넣을 때는 그 만큼 다리 부러져도 마땅하고 괴로워도 마땅하거든요. 그런데도 병원에 입원한 것이 감사한 것은 뭐냐 하면 병원에서 나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필히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내 병으로 내 죄로 필히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죽는데 그 죽음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아직 도중에 죽지 않더라도 미리 죽음을 체험하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 유언에 참여한다는 거예요. 내가 더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죽음에 일찌감치 거기에 합류하게 해주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효과입니다. 그 효과이기 때문에 내가 죄 짓고 안 짓고에 구애받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죠.
만약에 우리가 그것에 구애받는다면 우리는 이단입니다. 그건 그동안 조작적 고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조작적. 뭔가 예수님 믿으면 내 일이 잘 풀릴거라는, 남아 있는 인생이 잘 풀리고 복 받을 거라는 통밥을 굴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빼빼로를 양쪽에서 뜯어먹어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그런 경험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빼빼로 먹을 때 자기 딴에 열심히 먹는데 항상 빼빼로가 약간씩 남아요. 남으면 그 남은 걸 어떻게 처리합니까? 또 열심히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위해 제가 뭘 제시하느냐 하면 입원하다가 도중에 답답해서 튀어나온 사람이 있어요. 구약에. 그 사람의 예를 들어 보면서 그 사람이 어떻게 호되게 당했는지 들어보세요.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이 답답해서 밖으로 튀어 나오니까 주님이 병원에 도로 집어넣은 사건이 있어요. 역대상 21장에 나옵니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계하니라” 쪽수 계산한 겁니다. 우리교회 교인 몇 명인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거예요.
인구조사를 왜 하느냐 하면 ‘이만하면 제가 왕으로써 얼추 왕노릇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그걸 자랑스러워 했는데 역대상 21장 1절에 보면 그걸 누가 그렇게 하게 했느냐 하면 사탄 악마가 격동해서 인구조사를 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인구가 많다면 나는 깁스할 필요 없고 멀쩡한 존재라고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내가 이 정도 살았으면 내가 주님 앞에서나 누구 앞에서 큰소리칠 만 하잖아. 이 정도라면’이라고 생각한 거죠.
제 귀에 자꾸 들리는 소리가 뭐냐 하면 “왜 목사님은 자꾸 죄인이라고 합니까?”라는 그런 이야기를 제가 수백번 들었어요. 우리 교인들 말고 있다가 나가는 사람들 말이죠. “왜 자꾸 죄인이라고 합니까? 뭐 다른 거 없습니까?”라고 맨날 다른 거 찾고 있다고요. 병원 생활이 답답한 모양이죠. 병원은 치료하는 게 아니고요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병원은.
이 교회라는 병원은 죽을 때 제대로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자꾸 치료받아서 자기 잘난체 하고 밖에 나가서 잘난 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 증인 되잖아요. 주님 증인 아니고. 주님의 유언을 그렇게 무효화시키면 되겠어요? 그건 마귀가 하는 짓이죠. 그래서 사탄이 격동해서 마귀 짓을 한거예요. 누가? 다윗이.
그렇게 인구조사를 했거든요. 인구조사를 했는데 역대상 21장 14절에 보니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사(전염병을 퍼뜨리사)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7만 명이라” 며칠만에? 사흘만에. 사흘만에 칠만 명 죽었습니다. 그걸 실감나게 이야기하자면 3주동안에 교인 50명 중에서 40명 나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 교인들은 얼굴에 아무 감정이 없어요. 그러나 개척교회 목사는 완전히 미쳐버립니다. 15년해서 50명 모아놨는데 40명 나가보세요.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퇴직하기 전까지 열심히 일해서 돈 모아서 5억 모았는데 다방 마담 잘 못 만나서 4억 나갔다면. 특히 교장 선생님들 주의해야 하는데. 4억 떼였다면 이건 죽고 싶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사탄을 통해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하게 하느냐면 이스라엘이 망해야 될 죄를 다윗왕이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아무리 꼬깃꼬깃 숨겨놔도 네 죄는 네가 해결 못해. 사탄이 도와줘야 네 죄가 나와. 결국 너는 네 자랑 외에 다른 재밋거리가 없잖아”라는 걸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입원한 겁니다.
지금 내가 모르는 병세 때문에 입원한 거예요. 다윗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틈만 나면 내 자랑하는 거예요. 7만명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오르난 타작 마당에 다윗을 세웁니다. 타작 마당에. 거기는 하나님께 재물을 바치는 죽음의 자리죠. 그 자리가 옛날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 자리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아브라함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관된 원칙을 다윗은 놓쳐버리고 잊어버린 거예요.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모르는 속에 있는 자기 죄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튜브를 발로 밟아버리니까 안에 있는 죄가 평생토록 튜브를 통해서 케첩처럼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나옮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칙, 모든 인간은 벌써 죽었다는 거, 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죽음이 농담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실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살까라고 묻지 마세요. 왜 아직 안 죽었느냐고 물으세요. 질문은 그렇게 해야 해요. 아직 튜브에서 나올 남아있는 죄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자식 사랑, 며느리 아프면 보약해서 먹이고...왜 며느리가 아프면 안 됩니까? 며느리가 건강해야 우리 집안 이 정도라는 내 자랑거리가 생기니까요. 이거 터지면 이거 막고 저거 터지면 저거 막고 우리는 평생을 막느라고 시간 다 보냅니다. 손자 낳으면 손자 수발든다고 또 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나’라는 바운더리는 이렇게 멋있고 이렇게 남에게 내세울만 한 자랑거리라는 것을 의식해서 그렇게 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하세요. 그게 우리 할 일이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 땅이라는 병원에서 아주 유감없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구약이에요. 구약을 거쳐서 드디어 신약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착한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얼마나 나쁘냐는 전혀 묻지 않고 꼭 한 분의 유언이 효력을 발휘했는데 그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랬어야 했다는 거, 그걸 주의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나의 삶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 이걸 관련성을 지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가 예언한 진짜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중복된 이스라엘의 하나를 제침으로 말미암아 진짜 숨어 있는 이스라엘,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얻는 그것만이 진정한 마지막 때 이스라엘로 드러나기 위해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그 당시 사람들을 향해서 그렇게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맥락의 유언을 남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전체를 보게하여 주옵소서. 부분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살면서 얼마나 우리가 나 위주인 것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기쁘고 또 기뻐하는 그런 생활이 연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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