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강-여호수아 23장 12~13절(올무) 201908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3장 12~13절입니다. 구약성경 356페이지입니다.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면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섬기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니까 인정하라 너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이 너희를 만들었다”라는 정도의 이야기 같으면 이 세상에 안 믿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교회 나오기 전에 우리 마음속에 ‘저 하늘에 어떤 전능하신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보호해주면 좋겠다. 그분이 내 인생을 편안하게 펼쳐주면 좋겠다’라는 욕구는 신과 종교와 상관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여호수아를 보게 되면 그리고 진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게 되면 상당히 구체적이에요. 어느 정도로 구체적이냐 하면 “현재 너희 민족 말고 다른 민족이 너희와 더불어 맞대고 있다”라는 말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역사적입니다. 그다음에 “그들과 왕래하면 너희는 망한다”라는 얼마나 구체적인 말씀입니까. “너희들이 만약에 그들과 친하게 지내면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면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망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려서 너희들이 다른 민족과 사귀면 백전백패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의식과 사고방식을 너희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거죠. 여호와를 모르는 민족들의 평소 사고방식이 오히려 너희들의 사고방식보다 월등히 강하게 너희의 유혹이 될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그 유혹 앞에 어쩔 줄을 모르고 굴복하게 되어있고 너희들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이질적이거든요. 우리의 죄된 바탕에서는 상당히 낯설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약속을 우리 인간에게 의논해서 만들어 냈으면 전혀 우리에게 이질적이지 않아요.
만약에 우리 집사님들끼리 모여서 “행사가 있는데 간식이나 식사는 뭐로 할까요”라고 하면 “더운데 그냥 비빔밥으로 합시다”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소고기 불고기로 배 한번 채웁시다”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오리고기로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라고 이런 식으로 하면 많은 사람이 대다수 동의할 겁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할까요?”라고 했을 때 “굼벵이 가지고 구워 먹어 볼까요?”라고 하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거는 약속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과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그건 거부당하죠. 바로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 그렇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익히 너희들이 아는 식대로 여호와를 섬기려면 너희들은 이방 민족에게 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방 민족이 우리 옆에 있는 것은 우리가 늘 끌릴 수밖에 없는 우리 내면의 모습이 이미 그쪽에 준비되어있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들에게 신은 어떤 것이고 인간 내면에 있는 신은 뭐냐 하면 내가 처분이 가능한 신, 내가 나 편리한 대로 버릴 수도 있는 신, 그리고 내가 안을 수도 있는 신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라는 것은 나 하기 나름의 내가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 신을 이방 민족이 믿고 있는 겁니다. ‘내가 싫으면 안 믿는 거지 뭐 신이 별거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아무리 우리가 신에게 기도하고 빌고 해봤자 주님께서는 묵묵부답입니다. 아무 응답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이냐 하면 무능한 짝이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진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은 무능하거든요. ‘에이, 그런 신 같으면 나는 안 섬기지’라고 생각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무능한 신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오기라는 것이 있는데 그 오기를 어떤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절대로 누구처럼 그렇게 살지 않겠다’라는 그런 오기가 있어요. 여기에서 이게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여기에 ‘산다’라는 말을 제가 의도적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나는 누구처럼 그렇게 살지 않겠다’라고. 가끔가다 그런 아들이 있어요. “아드님, 앞으로 어떻게 살 거예요?”라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잘 모르겠고요, 나는 우리 아버지처럼은 절대 안 살 거예요”라고 말해요. 어릴 때 많이 맞고 자란 모양이죠.
“여하튼 우리 아버지처럼은 절대 안 살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 기대를 잔뜩 했다가 크게 실망을 한 모양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있는 그 영역에 나는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다고 하는 거고, 나는 내 나름대로 살겠다는 그런 고집 같은 것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현재 알고 있는 이 식대로 줄곧 가겠다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여호수아는 너희들이 너희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민족들을 붙여놓은 이유가 진짜 너의 모습을 네가 장담하고 오기 부리는 그런 데서 찾지 말고 네 옆에 있는 민족을 보면서 그들이 왜 망했고 그들이 어떤 식으로 결단 났는가를 그들을 통해서 분명히 보라는 거죠.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가? 구약 말고 신약을 잠깐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1절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읽어보면 여러분 다 들어봤던 이야기예요. “이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크리스마스 때 자주 들리는 대목입니다, “이때 로마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러 갔으니, 모든 사람이 호적 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이 세상의 권력자에게 누가 감히 대들 거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 같으면 이스라엘 바로 옆에 다른 민족이 같이 살아요. 같은 지역이 아니고 이스라엘 있고 그 옆에 살아요. 일단은 섞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2장에서는 이스라엘 옆에 이방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방 민족 안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누가 버티겠어요? 버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일본 수출 규제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져서 회사 운영이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오래 다닌 직원들부터 그냥 명예퇴직시킨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자기 회사 30년 동안 아주 충실하게 근무하다가 이제와서 쫓겨났다면 그 탓을 누구에게 합니까? 일본이 수출규제해서 그 여파로 회사 어려워서 자기가 쫓겨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본에 죽창 들고 가서 아베 심장에 꽂으러 갈까요? 대책이 없지요. 할 도리가 없는 겁니다. 너 때문에 살기 힘들단 말이죠. 너 때문에. 그런데 만약에 그런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탓을 누구 탓으로 할 것이냐는 거죠. ‘하나님 뭐 하십니까? 일본 아베 콱 죽이시든지 조지시든지 하셔야지’라고 나올 거예요? 아니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렇게 이끄시는지 자기를 다시 한번 돌아볼 기회로 삼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진짜 복음을 안다면 그동안 제쳐두었던 잊어버렸던 예수님께서 어릴 때의 그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당했는가를 다시 한번 공통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겁니다. 공통경험을. 다시 말씀드리면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 하라고 할 때 예수님 가족인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 데리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사렛 동네에서 유다 베들레헴으로 옵니다. 100킬로가 넘어요. 저희들은 이상현 목사님 차 타고 신나게 내려왔습니다만.
그들이 쭉 내려왔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그것을 보면서 뭘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까짓 것 로마 군병이 어디 감히 나 사는 동네를 옮기라고 하다니. 건방지게.’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로마 황제 꿈에 나타나서 명령 내린 거 철회하라고 시키고 호적 하러 가지 않아도 되고 자기 동네 살도록 할 수 있는 여력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물에 실려 내려가듯이 세상 권세에 쫙쫙 씻겨나가듯이 그냥 실려서 베들레헴에 오게 하셨어요. 그렇게 되어야, 이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아야, 거기서 동방박사와 매치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이 뭐겠어요? 바로 내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은 항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막상 상황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우리는 아직도 내 뜻이 주의 뜻이 냥 고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가족이 베들레헴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일에 아무 차질 없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뭐 이렇게 데모하고 못 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거 없어요. 자연스럽게 이거저거 시키는 대로 다 해요.
아베가 수출 규제를 하든 내가 쫓겨나든 ‘주여, 이것조차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라고 그냥 순순히 사표 내고 나가는 겁니다. 이런 태도가 너무나 이질적이에요. 우리가 생각했던 세상살이와 너무 다릅니다. 물 흐르는 대로 가봤자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가봤자. 아무리 사람이 어떤 일을 해도 겁을 내는 이유는 실패를 두려워해서 거든요.
그런데 이미 영생을 가진 거라면 영생을 가진 입장에서는 그 어떤 실패도 영생을 건드리지 않으면 그건 실패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영생 얻음의 성공을 축하하는 거죠. 제가 말을 너무 심하게 했습니까? 이미 천국에 갔고 영생을 얻었으면 한 번 견주어보라는 거예요. 영생 얻은 것과 실패한 것과 한번 견주어보라는 겁니다. 어느 것이 더 고귀한지.
평소에 우리는 영생 얻은 것을 시답지 않게 여깁니다. ‘그런 거 뭐 얻었겠지’라고. 그 영생 귀한지 모르고 내 쪽에서 내가 귀하다고 여기는 것에만 매진하다 보니까 주님 보시기에 그게 탐탁하지 않은 거예요. ‘아, 제는 인간 안 되겠다. 잘라야겠다. 구조조정 한번 해야겠는데’라고 하시며 악마를 통해서, 이방 민족을 통해서 내 원대로 안 되도록 함으로써 귀한 것이 비로소 귀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처녀 때는 예뻤어도 점점 매혹 거리가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전부 옛날 이뻤던 것을 자랑할 때 어떤 사람이 나이 60세 가까이 되는 사람에게 “아무개 아주머니는 옛날에 어느 정도 이뻤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니까 그 사람이 “내가 처녀 때는 우리 집 앞에 감나무를 안 심었다”라고 대답했어요. 이게 무슨 말인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됐죠.
그래서 물었어요. “왜 감나무를 안 심었습니까?” “남자들이 나 보기를 원하다가 못 보고 자기 신세 한탄하면서 감나무에 목맬까 싶어서 우리 집에는 감나무를 안 심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만기 부인이 이야기했어요. 모두 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성도들을 이스라엘 백성을 처리하는데 이렇게 하십니다. 이걸 그냥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제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땅과 백성들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를 보여주는데 이 약속의 땅에는 하나의 원칙이 오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어떤 변화의 추이나 세월의 흐름이라도 약속의 땅이 추구할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뭐냐. 전부 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내가 이 정도로 잘났다는 이런 식으로 살아가요. 그러면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금도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옛날 농협이나 은행에 가게 되면 아이들이 저금통에 동전 가득 모아오잖아요. 아이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은행 가서 직원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은행 아줌마, 아저씨들 보세요. 내가 이렇게 알뜰하게 착하게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이렇게 모아왔어요”라고 하면서 돼지 저금통 통째로 가져온다고요. 그러나 직원들은 짜증 나 죽는 거예요. 왜냐 하면 직원들은 그 돈 몇 푼 안 되는 동전을 다 세야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동전을 뜰 수 있는 나무판이 있어요. 동전 계산기.
그게 상당히 수동적이지만 그 동전을 판판하게 해서 동그랗게 동그랗게 홈을 쭉 해놓고 딱 동전 높이만큼 홈을 파서 그것으로 동전을 푹 쑤셔서 뜹니다. 떠서 툭툭 털어버리면 거기 홈에 박힌 동전만 있고 나머지는 다 떨어지겠죠. 그걸 그대로 엎어버리면 그 칸수로 계산을 해서 얼마인지 파악을 한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땅을 동전 판으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리고 모든 인간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그 동전 판에 있는 인간은 자기가 아무리 잘나고 무슨 대단한 대학 나오고 해도 그 판에 맞춤, 맞춤 인간일 뿐이에요. 그 판에 맞춤 인간. 그런데 그 판은 특징이 뭐냐 하면 시간이 정지되어 있어요.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네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든 간에 나는 입 다물고 안 물을게. 그리고 앞으로 네가 얼마나 잘 나가는 인간인 것도 내가 묻지 않을 게”라고 하시는 거예요. 다만 중요한 것은 시간이 정지된 이 판, 언약 판, 언약 판에서 네가 여기에 소속이 된다면 그 자체로 몽땅 천국 가서 다 몰아넣는 거예요. “합격”이라고 하면서.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뭘 버리고 뭘 쥐어야 하냐면 자기 자신 중심으로 출발하면 안 되고 나는 하나님이 만든 그 언약 판 안에 내가 놓여 있음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보다도. 그러면 “어떤 것보다도”라고 할 때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절대로 여호와를 안 버립니다”라고 아주 장담 장담을 해요.
소용없어요. 장담해도 소용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뭐냐 하면 머리로는 알기 때문에 “제가 예수를 버릴 리가 있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안 버립니다. 제가 바빠서 교회는 못 나오지만 그래도 예수 버릴 리가 있습니까?”라고 하는데 정말 개가 웃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곱게 곱게 교회로 오게 하지를 않아요.
한주 내내 교회 오지 못할 일들을 계속해서 천둥 번개 치듯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쏟아붓습니다. 그러면 한두 번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하면서 자기도 사탄이면서 ‘내가 교회 빠질 리가 없다’라고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이 몇 개월 가겠습니까? 몇주 가겠습니까? 오래 못갑니다. 다시 말해서 오고 싶어도 못 옵니다. 오고 싶어도 못 와요.
결국은 “아파서 못 왔습니다. 바빠서 못 왔습니다”라고 하다가 한주, 두 주, 세 주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 교회가 나에게 안 맞는 거 같습니다”라고 하죠. 비로소 내가 내 인생 알아서 조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굳어져 버렸어요. 벌써 동전 판 다 잊어버렸죠. 어떤 판이 있는데 나는 그냥 거기에 소속되는 것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해야 할 텐데 그게 아니고, 그게 가슴에 와닿지 않고 ‘그게 전부야? 이것뿐이야?’라는 식이 되어서 내가 알아서 내가 천국 보내고 또 다른 조치를 찾게 돼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결국은 그동안 교회 왔어도 자기밖에 모르죠. 자기만 아는 거예요. 보통 가이드가 안내를 잘할 때 현지 가이드라고 하죠. 현지. 앞에 현지라는 말이 붙어요. 내가 만약 독일에 간다면 독일을 잘 모르면 한국 가이드 말고 현지에 독일에 살고 있는 가이드가 좋지요. 문제는 여호수아나 갈렙은 그 약속의 땅에 맞는 현지 가이드예요.
현지 가이드라고 하면 현지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말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형편이 된다면’이라는 생각이 붙습니다. ‘제가 갈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가겠습니다’라고 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우리 집사님이 어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새벽 4시 되니까 늘 매미가 울더라는 이야기.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매미가 시계를 보고 우는가?”라고. 매미는 시계를 안 보죠. 그런데 왜 우리는 시계를 봅니까? 그거는 우리가 영원히 속할 곳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내 인생을 챙기다 보니까 늘 일상과 스케줄을 내가 짜야해요.
이게 얼마나 불안정한 인생입니까? 매미 날개에다 시계하나 달아주면 매미는 내버려버리죠. “내가 알아서 울게. 새벽 4시 안되더라도”라고 하면서. 우리는 지금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교회를 오고 안오고, 밥을 먹고 안먹고, 반찬을 뭐 하고를 누구 지시받고 합니까? 우리는 버릇대로 내가 나한테 그냥 임의로 지시하죠. 그건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관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음식과 반찬을 하겠다는 그러한 동전판에 속해있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러면 무슨 수로 그런 자세가 되느냐. 수련회 갖다와도 소용없는데 그럼 무슨 자세로 하느냐? 여기에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은 바로 이사야 40장 31절, 여러분 보시면 아마 잘 아실거예요. 하도 기존 교회에서 많이 했기 때문에.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라고 나오죠. 신앙을 하나님을 앙망하면 새힘을 얻고 독수리가 날개침같이 올라간다고 하죠. 무슨 수로 우리가 내가 나를 처분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것을 매미가 시계 안 보고 우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 인생을 다듬고 살지 않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것은 올라가면 됩니다.
위에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세상을 뭐로 보냐 하면 위에서 봐요. 오늘 아침에 배양배지 이야기했죠. 위에서 본다고요. 태어남과 죽음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위까지. 그걸 일제 강점기에 작가인 이상이라는 작가는 ‘오감도’라는 글을 써서 그걸 이야기 하거든요. 오감도. 사실 오감도라는 말은 없어요. 조감도인데 자기가 말을 만들어 냈어요.
오감도라고해서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세상을, 시간의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보는 방법. 그러면 내 뜻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짤리든 취직을 하든 무슨 뜻이든 간에, 교회를 나오든 안 나오든 간에 다 주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바로 약속의 땅이란 벌써부터 그것을 실습시키는 거예요.
이 땅이 광야라면 이 광야에서 주님이 성도를 우리로 하여금 이방 민족이 자기 스케줄을 따라 자기만 챙기려는 그 민족을 여호수아는 옆에 두었고 지금은 우리 위에 그냥 우리를 덮쳐버려요. 모든 것이 네 인생 네가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너를 챙길 사람 없다는 것을 주눅들도록 계속 우리에게 가르쳐왔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게 전부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신앙이 독수리처럼 올라가게 되면 그것조차도 위에서 보게되면 그다지 뭐 거부하거나 반항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물 흘러가듯이 흘러가면 되죠. 회사에서 교회 2년 동안 가지 마라고 하면 안 가면 돼요. 안 가면 되지. 누가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이 말은 교회 안 나와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매일 나올 수있고 매일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주의 높으신 뜻이었다는 것을 내 선택과 결정과 오기가 아니라 주께서 인도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동전판에 들었던 사람만이 언약판이 나보다 더 넓고 확정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아무 염려없이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괜한 걱정했습니다. 내 인생 엉망진창 될까봐 내 인생 망쳐질까봐 쓸데없는 걱정했는데 그것이 이방민족이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이제는 위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다시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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