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하나님과의 동행(수2;9-11) 1907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31. 18:54

하나님과의 동행(여호수아 23: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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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07-28 15:35 
하나님 사랑 

2019년 7월 28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3:9-11 

(23:9) 대저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날까지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23: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이 벌리시는 방식이 이미 인간들이 ‘믿을만 해서 믿는다’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 요긴 한 것이라고 간주되어서 그것을 끌어 모아 자신의 가치를 보다 향상시키려는 모든 인간들의 시도를 주님이 미리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벌리시는 일은 인간들로 하여금 감히 엄두도 나지 않는 일들입니다. 

그래놓고서는 “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인간들의 사랑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이 훼손되지 않는 조건 하에 벌어지는 사랑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요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기 선택, 자기 판단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또 다시 믿을 것이 생기더라도 자기 실력으로 발휘되어 기대한 성과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일이라든지 사랑하는 일이라든지 어쨌거나 자신의 올바른 판단이 개입되기를 인간들은 원합니다. 인간의 본성상, 자신의 관여가 배제된다면 화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의도적으로 여호수아에게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일을 진행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지금껏 하나님께서 대단한 일을 벌려왔다는 사실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더욱 받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혜택을 입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로부터 예상밖의 혜택을 받게 되면 고마워할 수는 있습니다. 

감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누군가 너무 근접해서 다가서게 되면 사랑은커녕 도리어 공포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밀어내게 됩니다. 두 사람이 서로 강하게 만나게 둘 다 폭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주에서 행성과 행성이 부딪히면 둘 다 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대인관계에 있어 거리를 두게 됩니다. 거리를 두어야, “당신은 당신, 나는 나”로 구분되어서 각자의 선택과 판단이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이게 살아있어야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존재로 사는 즐거움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방적으로 너무 근접당하면, 그 사람은 숨 막히게 되고 그 사람의 종이나 노예로 전락됩니다. 내가 나로서 살맛을 상실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렇게 버티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세상 운영표요 설계도요 계획표입니다. 이 대로 하나님께서 진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의하면 인간은 ‘문둥병자’가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14장에, 문둥병자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제사장으로부터 특별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제사장이 이 문둥병자의 병을 고쳐준다는 것이 아니라 ‘관찰’합니다. 병이 악화되었는지 아니면 호전되었는지를 살피는 겁니다. 

왜 고쳐주지도 못하고 살피는 겁니까? 그 문둥병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 사람에게 특별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주목받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문둥병자입니다. 문둥병자들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분명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저 사람은 분명 집안이나 본인의 죄가 많아서 저런 무서운 벌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잘못된 판단을 도출해내어서 전반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심도 있게 살펴보시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강대국들이 나가떨어져야 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인간들의 잘못된 해석을 유도해 내시는 겁니다. 아무리 숱한 기적들을 이스라엘에게 제공해주어도 이스라엘은 늘 잘못된 해석만 내놓게 됩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데리고서 ‘표적’이라는 것을 세 번씩으로 보여주십니다. 첫 번 째 표적은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의 실체를 땅에 던져 보게 하십니다.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그것이 곧 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모세는 이 땅에서 뱀하고 동행했던 겁니다. 

성령 받지 못하고, 복음도 모르는 사람과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오로지 뱀이 하는 이야기, 악마가 하는 이야기는 거부감없이 귀에 쏙쏙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납득이 아니될 수 없습니다.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가 무슨 취지로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옵니다. 

그만큼 숱한 세월동안 친근하게 지내온 겁니다. ‘강대국이 너희에게 떨어져 나가고, 한 명이 나가도 1000명이 도망간다’는 이야기는 무슨 소리인지 의구심만 높아질 뿐입니다. 이런 상태가 바로 뱀과 한 통속이 된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바로 모세가 예상도 못한 자기 환경이었습니다. 

두 번째 표적인, 조금 전까지 지팡이를 쥐었던 그 손을 네 품속에 넣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끄집어내어 보라고 하십니다. 꺼내 봤더니 하얗게 문둥병자의 손이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 자신이, 혹은 모세가 속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아 합당한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동안 뱀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왔으니 그럴만도 한 겁니다. 

세 번째 표적은 강물을 떠서 땅에 뿌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강물은 핏물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런 온통 악마의 천지를 그냥 묵과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악마의 세상으로 비취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성의 정당성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늘과 땅의 연락책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때에, 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던 겁니다. 내가 하나님 관점에서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기적이요 행운이요 축복입니다. 자신의 저주됨과 쓸모없음을 인식한다면 오로지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합니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악마와 한통속으로 살아와서 자신이 괜찮은 존재로 인식하는 자들은 온갖 하늘과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여 자신을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갱신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들인 자아가 폭발당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은 이처럼 우리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마땅히 저주받을 자임을 일깨어주면서 진행하십니다. 오직 주님만으로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듬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께서 밝혀주시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07-30 15:00 

245강-여호수아 23장 9~11절(하나님과의 동행)201907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3장 9~11절입니다. 구약성경 356페이지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성경에 나와 있는 바로 이런 내용을 사람들은 실제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왜 확인하고 싶어 하느냐 하면 믿을 만하면 믿겠다는 그다음 조치가 가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눈에 ‘야, 정말 하나님 살아계시는구나. 주께서 정말 일을 말씀대로 하시는구나’라는 것이 확인될 때 그런 하나님이라면 내 인생을 기꺼이 주님을 위해서 바치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이러한 순서를 밟아요. 믿을 만해서 믿는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믿을지 안 믿을지 긴가민가했는데 이 정도까지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주셨다면, 이제 내가 그냥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고 예의상 하나님을 믿어주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서기 마련이에요. 

문제는 이게 믿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엉터리라는 겁니다. 왜냐면 그런 과정에서 본인이 전혀 깨어지질 않았어요. 천문학에서도 이야기하지만 혹성과 혹성끼리 충돌하면 둘 다 폭발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만날 때 너무 가까이 사귀는 것을 결국은 반말하게 되어있어요. “여기까지 오세요. 좀 더 제가 양보해 드릴게요. 좀 더 오세요. 그러나 더이상은 내가 안 됩니다” 그건 협박으로 또는 위험으로 간주 되는 겁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띄워야 하는데, 거리가 띄워져야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것이 분명히 주체가 규정이 되거든요. 그런데 너무 가까이 와버리면 내가 숨이 막혀서 내 것이 없잖아요. 내 것이 없으면 내 결정과 내 선택이 이게 다 날아가 버리거든요. 내 선택과 내 결정이 없으면 우리는 왜 삽니까? 사는 이유가 없어져 버려요. 내가 기계야? 내가 너의 시다바리야? 나는 내 주체성이 날아가 버리면 사는 보람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렇단 말이죠. 

그래서 부부가 결혼해도 3년 동안은 상당히 친하게 지냅니다. 그래도 3년 지나고 아이 낳고 그러면 구역정리가 들어가요. 당신은 여기까지만 침범하고 여기부터는 내 주머니니까 넘보지 말라고 자기 것 정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옛날에는 부부가 철이 없어서 처음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결혼하기 전부터 자기 것 내 것 가르고 들어가는 거죠. 이게 무슨 결혼입니까? 동업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여호수아 말씀을 아무리 봐도 우리는 말씀에 대해서 믿음으로 간주 되지를 못합니다. 그냥 ‘믿으려고 애쓸게요. 노력을 해보겠습니다’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용지물이 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신 이유가 우리가 얼마나 내 것 챙기는 데 급급하다는 것을 발각시키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거든요. 

오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강대한 나라가 너희에게 다 당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와도 천명이 쫓겨나간다. 따라서 너희는 이렇게 해라. 하나님이 친히 너희와 싸우시기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이 말씀이 정말 믿기 힘든 말씀이에요. 옛날에 같은 일이 반복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개입이냐 하면 하나님의 개입으로 계속 이겨 나간 거예요. 

그런데 백번을 천 번을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개입할지 안 할지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는 겁니다. 항상 하는 일에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더 확실한 보증 같은 게 있어 줘야 하는데 그 보증은 과거를 가지고는 되지를 않아요. 그럼 약속을 하면 되지 않느냐. 약속해도 소용없어요. 왜? 약속한들 하나님 쪽에서 깨버리면 나만 바보 등신 돼버리기 때문에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너는 나에게 도대체 뭘 원하느냐?”라고 하면 “그냥 나 하던 대로 살겠습니다” 교회를 10년, 20년 백날 다녀도 항상 남는 것은 내가 하던 대로 그냥 하고 다만 주님께서 나의 뜻을 도와주시고 후원해 주시면 그걸로 좋은 관계 유지했다고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네가 나쁜 길로 안 갔다고 칭찬 정도만 해 주시는 관계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호수아의 이 말은 24장에 넘어가게 되면 여호수아가 그들의 심보를 잘 압니다. 심보를 잘 알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희들이 아무리 날 섬긴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어있다”라고. 그걸 듣고 백성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쁜지 “아니옵니다. 아니 되옵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몇 번씩이나 다짐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시죠. 이런 이야기는 신명기 마지막에서도 이야기했죠. “너희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게 되어있어. 그게 너희의 본성에 부합되는 거야”라고 신명기 마지막에 보면 모세가 자기 백성을 향해 저주하는 겁니다. 성경을 한 대목만 보지 마시고 전체를 보세요.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인간은 인간의 길을 가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길을 가고 둘이 만나는 지점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해요. 이건 분명한 겁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말씀이 인간은 인간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따로 일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 인간이 그런 인간인지를 알면서 뭘 요구하느냐. 

그걸 오늘 본문에서 길게 이야기하면 어려우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문둥병 환자인 것을, 그걸 발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뭔 뜻이냐 하면 문둥병 환자는 제사장이 돌봐야 해요. 성경 율법 레위기 14장에 나옵니다. 14장에 보면 제사장이 하는 일 중에서 중요한 일이 문둥병 환자 곁에서 늘 살피는 일을 해요. 

고쳐주는 일을 하지는 않아요. 살피는 일을 합니다. 고친다고 하는 것은 “너는 문둥병 환자니까 내가 알아서 고쳐줄게”라고 하는 것은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하는 거죠. 문둥병 환자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보고하는 거예요. “하나님, 지금 문둥병 환자 병세가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호전되었습니다”라고 생중계로 하나님 앞에 알려주는 거예요. 

왜냐 하면 문둥병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제사장 본인 담당이 아니에요. 하나님 담당이에요. 그 이유는 문둥병 환자 되게 하신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들 이스라엘 중에서 문둥병 환자를 문둥병 환자 되게 하신 겁니다. 멀쩡한 사람을 문둥병 환자 되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걸 가지고 재수 없다고 하는데 이 세상에 재수 없는 사람은 없어요. 

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관점에서 재주 있다 없다를 그렇게 구분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재주 있다 없다를 말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조치에 우리가 거기에 토를 다는 것은 우리의 권한을 벗어나는 겁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 돼요. 

이성적으로 이야기하면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 눈앞에 보이는 몇 가지의 가능성 중에서 하나가 내 앞에 당도한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두고 내가 그중에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주어진 환경이 나를 선택한 겁니다. 주어진 환경이. 부모 때문에, 친구 때문에, IMF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손댈 수 없는 변수,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나를 찾아오는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나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 나에게 덮쳐지는 거예요. 세상 이방 민족은 왜 그런지를 몰라요. 기껏해야 그저 악바리처럼 열심을 다 해서 노력하자는 대책 외에는 대책이 없어요. ‘운명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는 이런 식의 말뿐이죠. 

인생이 너를 속일지라도 너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이 러시아 시인 푸쉬킨이 한 말이 아닙니까? 고등학교 때 많이들 외우잖아요. 교양있는 척하려고 낙엽 하나 주워서 책갈피로 사용하면서. 그런데 왜 인생이 이렇게 수동적으로 몰아세움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거죠.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내력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예요. 하나님의 자기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운영하는 계획서입니다. 계획서이고 설계도가 이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전체를 아는 거죠. 성경을 모르면서 인생을 살겠다는 것은 전체를 내팽개치고 내 것만 챙기겠다고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 돼요. 어리석은 자죠. 

이 시간 세상 전체에 대해서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내셨거든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모세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의미가 있어요. 모세가 왜 있느냐. 하나님께 뭘 받으라고 모세로하여금 애굽에 태어나 왕자가 되고 그렇게 긴긴 인생을 살게 한 겁니다. 하나님 것을 받아서 아래 땅에 있는 백성에게 전달하는 그런 중재자 역할을 하라고 모세가 있는 겁니다. 

그걸 여호와의 선지자 또는 여호와의 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모세가 들고 온 것이 율법이거든요. 그 율법의 내용은 세상의 모든 것이 율법대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율법대로. 따로 ‘나는 왜 이래요?’라고 하지 마세요. 율법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러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어떤 인간이든 그 자체가 마땅함이에요.당연함이엥요. 

이의제기하지 말고 토를 달지 마세요. 뭐 인생 잘못 살았다고요? 잘못 산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어쩔 수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이런 인생 다시 안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그런 여자 그런 남자 안 만날 거라고 하는 거 다 필요 없어요.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가도 변수가 몇 가지 안 되는 변수에서 자기는 최선의 선택을 강요당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 율법 책에서 그게 복잡하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는 겁니다. 조금 어렵죠. 좀 더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주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풀어서 해석하게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줄 때 모세가 율법 판을 깬 것은 이 해석은 혼자 해석하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너희 자체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율법을 줘 놓고 율법 옆에다가 깨진 돌판과 더불어서 안 깨진 돌판을 같이 겸할 때 돌판의 율법이 해석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거예요. 율법 깨지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지만, 모세가 율법 깨고 난 뒤에는 친히 하나님께서 동행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신다는 것과 같은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천사를 보내겠다”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둘 다 천사가 안 보이니까 문제가 되는데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겠다” 요즘 같으면 “성령을 보내서 너와 동행하겠다”라고 하시면 성령은 뭐냐 성령은 말씀대로 율법대로 모든 것을 시행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 관계가 뭐냐 하면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문둥병자를 성령께서 관찰하시는 거예요. 성령은 관찰 정도가 아니고 문둥병자를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으로 만들어주는 일까지 성령님이 하시는 겁니다. 

우리 옆에 우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를 우리는 몰라요. 왜? 정답은 주님이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알고 있는 정답을 가지고 우리 뜻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뜻대로 계속해서 우리를 관찰하시고 이걸 하나님께서 새 백성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따라서 우리의 뜻은 그때그때 마다 좌절당해야 합니다. 

동행하심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뜻이 늘 좌절당한다는 겁니다. 왜 좌절시키는가,뭘 끄집어내야 배설물이 되죠. 끄집어내서 “이거 아니야”라고 치워버리고 끄집어내서 “이거 아니야”라고 치워버린다는 거죠. 그러면 끄집어낼 때 어떻게 끄집어내느냐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아는 것 중에서 내가 사는 데 유리하다고 여기는 최선의 것을 생각해서 “주여 이래야 됩니다”라고 나오는 순간 그건 치워버려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남는 건 뭡니까? 남는 건 이거예요. 네가 말씀대로 요령껏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으로 충분하고 예수님만 쳐다보고 살라는 겁니다. 네가 네 나름대로 꾸역꾸역 네 인생 꾸미지 말고 네 인생 따로 조립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 어떻게 하고 주의 영광되는 좋은 거 다 집어넣고 내 인생 이렇게 꾸며 보겠다는 것은 소꿉놀이예요. 그러면 이게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변수가 오게 되면 우리는 바들바들 떨어요. 우리 인생을 살면서 늘 걱정되고 벌벌 떠는 이유가 주님을 안 바라봐서 그래요. 주님만 바라봐야 하는데 주님 한 분으로 족하면 모든 게 해결이 되는데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주세요”라고 한다고요. 좋은 아이디어가 왜 필요한데요? 자식 한번 잘 키워 본다고요? 이건 아니거든요. 

자식 잘 키우려고 하지 마세요. 자식 못 키우면 안 된다고요? 왜 안되는데요? 왜 자식을 못 키우면 안 되죠? 그리고 잘 키운다 못 키운다는 기준이 뭡니까? 어느 자식이 표준이 되는 거예요? 출애굽기 4장에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먼저 동행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모세에게 동행하는 표시로 지팡이를 보여줘요. 지팡이를 보여줄 때 “네 손으로 지팡이를 던져라”라고 했습니다. 던지니까 뱀이 되었어요. 다시 말해서 “너는 지금까지 뱀과 살았다. 지금껏 너는 뱀과 살았어” “그래요?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내가 너에게 알게 해 주는 거야”라는 이걸 표적, 기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기적이에요. 뭘 가지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더 풍성한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내가 누구냐를 아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주님의 계획도 우리가 차질없이 동의가 돼요. 그게 수긍이 된다고요. ‘아, 맞습니다. 주님 한 분으로 걱정 없군요’ 

찬송가에 나오죠. 주의 뜻대로 하시라고. ‘내주여 뜻대로~’ 노래는 되게 잘하지요. 내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은 ‘그 뜻을 알겠습니다’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주의 뜻을 알 필요도 없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 없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동행하기 싫더라도 주께서 억지로 동행시키기 때문에. 

그러니까 손에 든 것이 뭐냐? 지팡이가 뱀이다. 뱀이랑 동행한 거죠. “지팡이를 잡았던 그 손을 너의 품 안에 넣어봐라” 품 안에 넣었지요. “뭐가 있다고 넣으라고 하십니까?” “손 한번 빼볼래?” 빼보니 문둥병 되었어요. 뱀과 같이 있으니까 이건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뱀과 단짝이 되는 겁니다. 

뱀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어요. 뱀이 하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친구 만날 때 조금도 거리낌이 없고 술술 대화가 잘 풀립니다. 세상 친구들과. 뉴스에 나오는 한국당 민주당 이야기 들으면 무슨 무슨 내용인지 너무 잘 알아요. 모르는 게 없어요.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왜? 뱀 이야기거든요. 뱀 이야기를 그렇게 잘 들어요. 뱀 이야기를. 

내가 사는 이야기, 내가 잘되는 이야기, 내가 성공하는 이야기, 어찌 그렇게 납득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4장에서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 표적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모세야, 네가 나쁘다가 아니라 네가 살고있는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뱀의 세상이고 문둥병 세계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구 이웃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문둥병자와 문둥병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 섞지 마세요. 왜냐 하면 이야기해도 결국 의사소통 안 되는 이야기만 주고받을 뿐이에요. 자기 커피값만 나가지. 

세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 하면서 “너의 강물을 조금 취해서 육지에 부어라. 그것이 육지에서 피가 될 것이다. 내가 기어이 심판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서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이 아니면 세상을 볼 때 이렇게 못 봐요. 

노인정에서 아무나 말 섞지 마세요. 괜한 화투 치자는 말만 하니까. 복음을 모르고 성령을 안 받은 사람과는 말이 안 통하게 되어있어요. 안 통하는데 억지로 통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이 악마의 세계에서, 이 뱀의 세계에서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해석 했는 지까지 알아야 하거든요. 

우리가 진짜 성령으로 아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아느냐를 알려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성경을 해석 했는 가를 보는 건데, 그중의 하나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치는 두 가지 시나리오’ 이런 거. 이스라엘이 이란을 치는 두 가지 시나리오는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마지막 제3차 전쟁, 아마겟돈 전쟁이 있어요. 

그 전쟁이 요한계시록에 나오거든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잖아요. 한 번 일어나면 내가 믿을지 안 믿을지 한 번 확인해보고 자기가 믿을 만하면 믿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이 하나님의 계획서니까 역사적으로 한번 풀어서 실제로 이스라엘이 이란을 치게 되면 이건 요한계시록의 실정을 반증해 주는 거니까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령 받지 못한 인간들이고 악마가 해석할 때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 세상이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이는 증거를 찾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이 이란을 칠 때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하면 폭격기를 가지고 이란을 직접 날아가서 치는 이런 방법의 시나리오와 두 번째는 이 폭격기가 운행하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이라는 이란 북쪽에 공공기지를 돈 주고 빌렸답니다. 

빌려서 이스라엘이 그쪽에서 이란을 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뭐냐 하면 드디어 아마겟돈 전쟁은 실제로 성경대로 모든 게 돌아간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란이 엘람이거든요. 엘람 지역에 이스라엘에서 폭격을 가하게 되면 드디어 3차 전쟁 일어나고 이스라엘은 제3 성전이 지어지게 되면 ‘메노라’라는 큰 등대가 현재 이스라엘에 있는 황금 돔 안에 설치가 되면 그때는 이 세상에 마지막 때가 오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는 거예요. 너나 차리세요. 너나.

자기가 문둥병 환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성령을 받기 전에는 어떤 역사적인 증거물을 가지고 믿겠다는 그것이 내가 나를 볼 때 멀쩡하고 괜찮은 존재로 착각하는 악마적인 모습인 거예요. 뱀에게 그런 식으로 양육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건 때려 죽여도 주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으로 돌아가서 다시 봅시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많은 강대국이 나에게 쫓겨났다. 너 한 사람 때문에 천명이 쫓겨났다. 너 잘 봤지?” “봤습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사랑해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 그건 옛날에는 그랬는데 또다시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 복음을 보는 사람마다 뭐냐 하면 우리나 납득가는 방식을 사용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믿지 말라고 해도 믿겠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방식이 항상 우리를 바보 취급하고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로 만들어 놓고 구원을 이루었다고 하니까 그다음에는 또 그런 일이 있을지 없을지 우리가 장담을 못 하거든요. 

그래서 여호수아 말이 맞아요. “너희가 백날 이야기해도 너희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출발점이 뭐냐 하면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마귀와 한패고 우리는 문둥병자이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멀쩡하게 천국 갈 수 없다’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자기 자리입니다

비로소 사랑이 오게 되고 두 혹성이 마주치면 둘 중 하나는 폭발해야 하는데 십자가 앞에 끌려갔을 때 주님도 폭발하고 우리도 폭발했어요. 주님도 죽고 그 앞에 나도 죽고, 주님도 아버지에게 죽고 나도 덩달아 주님 아버지 앞에 죽임을 당하고. 이미 나는 죽은 자고 다시 성령이 와서 죽은 자라고 통보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이 나를 고쳤구나’라고 하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실상을 다 보여주고 옆에 성령께서 인도하사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 한 분으로 족해요’라고 하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있습니까? 여러분 사랑을 해 봤습니까? ‘그 사람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라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입니까? 너무 큰 자유 아닙니까? 

사랑이 오게 되면 주님 한 분으로 족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저는 아직도 그렇지 못한데요”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더 깨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도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뜻대로 되면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자꾸만 착각하게 됩니다.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 인하여 만족하는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께서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