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율법의 백성(수23;6-8) 19072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7. 22. 07:48
2019-07-21 14:58:35조회 : 25         
   율법의 백성 19072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율법의 백성 (여호수아 23:6-8)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_25tOVTIB0M, Hit:0
 이근호19-07-21 15:47 

율법의 백성  

2019년 7월 21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3:6-8 

(23: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23:7)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23:8)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하나님께서는 땅과 율법을 연계하십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는 땅은 거기에 사는 인간과 연계합니다. 즉 내가 얼마나 살기 좋은 땅이냐가 땅을 고르는 우선 조건입니다. 이웃과는 얼마나 정겹게 잘 지낼 것인가 하는 것도 고려 대상입니다. 단체로 놀려 갈 때, 자기 즐거움이 다가 아니지요. 

같이 가는 자들의 질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수준 낮은 사람하고 같이 여행가게 되면 벌써 걱정부터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할 땅이 이웃 사람들이라든지 토지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과 관련 있습니다. 율법대로 살면 이 땅에 계속 거주할 수 있겠지만 율법을 위반하면 이 땅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위반하게 될 때에, 율법도 자체적으로 소멸되느냐 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마저 자기 백성이 제대로 못 살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도 무산되는가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자기 백성의 위반으로 인해 도리어 율법이 성취되느냐 하는 겁니다.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상관없습니다. “이 땅이 누구를 위한 땅인가? 백성을 위한 땅인가 아니면 약속을 위한 땅인가?” 말입니다. 이 점은 이 땅에서 율법과 마주한 이스라엘 역사의 추이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을 위한 백성이라면, 그리고 백성들의 배반으로 율법이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너희들은 결코 율법대로 살지 못할 것이며, 너희들은 이웃 나라의 우상을 섬길 것이며, 결국 너희들은 이 땅에서 추방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율법적 차원에서 내려지는 조치이다. 너희의 구원보다 율법의 살아있음이 우선되는 곳에 지금 너희는 들어와 있다. 자, 이제 너희의 실상을 보일 때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은 전에 ‘출애굽 사건’을 담은 집단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 준수와 출애굽 정신과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출애굽의 의의를 빠트린다면 그것은 결코 율법을 지켰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이는 애굽 사람과 다른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관점’이란 기존의 관점을 병행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가 들어가려면 다른 하나는 자리를 비워주어야 합니다. 기존의 애굽에서 인간의 관점이 어떠한가에 관한 예를 하나 든다면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 앞에서 보여준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는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그들이 자부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에게 아무 문제도 없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가족이 예수님에게 대접을 하고 친절을 베푼 것에 대해서 자기들 마음이나 예수님 마음이 같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매들이 믿고 의지하는 오빠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자매는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전갈을 보내어 빨리 자기 집에 와서 오빠를 낫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얼른 올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 일부러 늦장을 부리는듯한 인상을 그녀들은 받았습니다. 

그리고 난 뒤, 정말로 오빠가 운명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 자매는 그때까지 자신의 마음가짐에 문제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 합당한 믿음에서 도출되는 일련의 행위가 자기 가족에 비극을 안겨 주었다면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벌어진 겁니까? 뒤늦게 도착한 예수님 붙들고 두 자매는 자신의 섭섭함을 지우지 않습니다. 

즉 우리 가족은 정당한데 주님의 조치에 문제가 있어 이런 사단이 났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고 말입니다.(요 11:25) 즉 ‘우리 오빠는 죽지 않아야 한다’라는 그 마음가짐과 관점으로 인해 너희들이 나 예수를 오해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마음에 문제있음을 모릅니다. 

그럴 때 주님은, 그 인간에게 가장 소중이 여기는 것에 손을 대십니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에게 충성과 믿음을 다하고 순종한다고 할지라도 천국에 합당하지 않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것을 교체하거나 치워버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즉 마르다, 마리아는 평소에 ‘부활이 아니고 생명이 아닌 것’을 그들 마음의 주인으로 삼아 담아두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 관점에서는 ‘죽어야 마땅함’으로 인간들이 중무장되어 있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발췌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당부하신 겁니다. 절대로 이웃나라의 신을 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웃 나라의 우상은 출애굽 정신이 없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근본 관점을 바꿀 필요가 없이 섬김이 가능한 신이다 는 뜻입니다. 

처녀 때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했던 여자가 불도가 심한 집에 시집을 갔습니다. 그런데 언른 아이가 들어서지를 않습니다. 불교심이 강한 시어머니가 어디서 용한 점장이 한테 받아왔다는 부적을 교회 가는 며느리에게 들이대면서, “밤 12시를 넘기지 말고 베개 밑에 넣어 놓아라”라고 당부합니다. 

과연 정면에서 거절할 수 있을까요? 이미 이 여자의 마음 속에서 ‘부활이요 생명보다’ 내 아이 하나 가져서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바로 이런 마음자세요 아가씨 때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한 겁니다. 시집가서 아기를 못났게 되면 자신 속에 비-복음적인 것으로 무장되어 있음이 폭로되는 겁니다. 

부활이고 생명이 아닌 것들로 꽉꽉 채우면서 중량감을 가지고 인생을 무난히 살려고 시도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지 아니하면 이 사람들은 천국에서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도 결국 율법을 위배하고 우상을 섬겨서 바벨론 나라로 최종 포로잡혀 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구원의 주님이 그 포로 잡혀 가는 공동체 속에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경찰들이 범인 잡으면서 위급할 때 쓰라고 소지하는 총이 있습니다. ‘테이저 건’입니다. 일반 권총은 총알이 상대에게 날아가지만 이 총은 총과 범인의 몸통 사이에 두 가닥의 전선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늘 본문 용어대로 라면 ‘친근함’입니다. 친히 율법 자체가 되는 그 주님의 몸에 자기 백성들을 꽁꽁 묶어 함께 율법 완성의 나라로 데려 가시려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백성의 죄는 상호 연결된 테이저 건의 선에 따라 부활과 생명이 성도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 자체가 근본적으로 죄된 곳임이 폭로시킵니다. 난데없는 사태로 인하여 가만있는 있는 나의 복수심이 발로 되면서, ‘더 이상 복수나 보복이 없는 천국 가는 것’은 나의 시도로 되어지지 않음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위주로 똘똘 뭉쳐있는 내가 죄인인음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07-21 21:03 
244강-여호수아 23장 6~8절(율법의 백성)201907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3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356페이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 

이 말씀은 결과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결국은 지키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나라들에게 그들의 신을 부를 것이며 맹세할 것이며 그들의 우상을 섬길 것이며 그리고 너희들은 나 하나님을 버릴 것이다”라는 예언의 말씀으로 이것이 적용됩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너희들이 어떤 짓거리를 하든 관계없이 내가 남긴 이 말씀에 대해서 양보 없이 사수하겠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어떤 짓을 하든 간에 상관없이 이 말씀은 늘 유효하게 너희에게 작용할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뭐냐 하면 그들이 잘해서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말씀 안에 들어있는 그 은혜로, 말씀의 실행력으로 인하여 너희들이 구원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뭐가 들어와야 하냐면 전에는 ‘내가 행하겠습니다’가 들어있던 것이 교체돼요. 말씀의 위력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나는 뭘 행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했습니다’라는 것은 내 속에서 없어지고 그것이 사라지는 그런 경우를 당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말씀만 남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식으로 골라서 ‘천국 갈래. 말씀 지킬래’가 되면 뭐가 빠지냐 하면 내 것을 끄집어내는 그런 기회가 없어져 버려요. 

내 안에 무슨 더러운 것이 들어있다는 그런 생각은 안 하고 무조건 끌어모으고 좋은 것은 다 집어넣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천국 가려면 내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바깥으로 나와 줘야 하는데, 그 나오는 것은 바로 말씀과 대비해 볼 때 말씀에 위배 되는 요소가 내 안에 이미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되도록 일하실 거예요. 

우리가 하지 않더라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의 하루하루도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이 이런 것이라고 전개 시켜주실 겁니다. 우리는 그냥 감사할 뿐이죠.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평소에 얼마나 존경하고 섬겼습니까?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 숙식 제공하면서 자기는 그것이 나쁜 짓이라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지금 하는 일이 하나님도 흡족하고 예수님도 흡족하고 이 마음은 하나님께 바른 마음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게 더러운 마음이라는 것을 결코 생각 못 했죠. 그런데 오빠가 갑자기 덜컥 죽습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팠어요. 화들짝 놀란 두 자매는 예수님을 급히 소환시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오빠가 죽어가니까 빨리 와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급할 것이 없었습니다. 안 갑니다. 언제까지? 오빠가 죽을 때까지. 오빠가 죽었을 때 비로소 그 자매들은 자기 마음속에 주님이 원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발각당한 겁니다. 오빠를 죽였을 때. 오빠가 죽고 난 그 뒤에 예수님이 들이닥치니까 예수님을 붙들고 할 소리 못 할 소리 해대는 겁니다. 

“끝난 마당에 왜 오셨습니까? 내 희망과 내 사는 보람이 끝난 마당에 뒤늦게 와서 뭐 하려고 하십니까? 왜 오셨습니까?”라는 식으로 마구 대들었어요. 그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여러분 들어본 적 있습니까? KBS 9시 뉴스에 그게 나오던가요? 여기서 KBS 9시 뉴스 틀면 일본 수출규제 나오지 ‘부활이고 생명이다’라는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사람이 얼마나 자기가 부활과 생명과 무관한 똥 같은 그런 것들, 배설물을 아까워서 꼭 쥐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뭔지를 몰라요. 그것이 주님께 대치된다는 것을 나를 구원 못 시키는 요소가 내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어요. 구원받으려고 싸대긴 하지만 무게가 너무 나가요. 배설물의 무게가 너무 나가서 다른 것을 들을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래서 마르다 마리아는 실컷 꾸중 듣고 예수님께서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심으로써 “네가 하는 그 모든 행세는 평소에 네가 아무리 나를 대접해도 너는 너 자신을 몰랐던 그 이유때문에 이 예수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라는 거예요. 안다고 여겼지만 실은 바꿔치기할 것이 안 바뀌는 한 예수님을 더 섬기고 잡채 해 주고 백날 해 봤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걸 언제 알았느냐 하면 오빠 죽을 때입니다. 오라버니 죽을 때 그때 알았지요. 그때 동생 마리아가 향수를 예수님 발 앞에 전부 깨뜨려 버립니다. 아까 짓 샤넬 향수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죠. 어차피 부활 될 거니까. 부활이 주는 넉넉함과 자유. 오빠 잃고 부활 얻고 오빠 잃고 생명 얻고. 그리고 그 오빠는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건 하나의 가상인데요, 오빠가 또 아팠다고 봅시다. 주님을 이제는 안 부를 겁니다. 이제 마르다 마리아 마음속에는 오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꿔치기로 들어온 겁니다. 예수님이 들어있었던 거예요. 이게 얼마나 주님의 성실함입니까? 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교회 다니면서 시집가려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들어오는 혼처마다 불도가 심한 곳에서 혼처가 들어 온단 말이죠. 

자기는 교회 다니는 총각과 결혼하고 싶은데 교회 오빠는 다른 여자가 낚아채 가버리고 찌끄레기 남자만 있고. 교회 다니다 보면 찌끄레기같은 남자들 있잖아요. 좀 실례되는 이야기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큰일 나죠. 그러니까 아가씨들이 맘속에 자기 것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현재 이만하면 이정도 남자는 만나야 한다는 우기면서 결혼을 했단 말이죠. 

불도가 심하지만 내 믿음 내가 지키고 또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성령께서 친히 지키시니까 결혼생활 잘할 거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과연 불도가 심한데, 보란 듯이 복을 받고 싶었는데, 아기가 안 생기네요. 아이가 안 생기니까 그 불도 심한 집안 시어머니가 취하는 조치는 아주 간단합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에게 가서 부적을 받아서 며느리에게 조용히 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야야, 오늘 12시 되기 전에 이거 베개 밑에 넣어라. 나중에 내가 베개 검사한다”라고 하면 안 넣겠습니까? 넣지요. “안 됩니다. 어머니.”라고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보다 자기 가정의 화평과 자기 행복이 우선이기 때문에요. 예수님은 나중이고 내 인생, 내 행복이 우선이기 때문에 엉터리인 줄 알지만, 혹시나 용하다고 하니까 혹시나 싶어 받아들이는 겁니다. 

부적 써주는 점쟁이 마음이나 예수 믿는 내 마음이나 이게 틀린 점이 차이점이 하나도 없고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 집에 아이를 낳게 해 줄까요? 아니요. 아이를 안 생기게 하는 하나님의 이유가 뭐냐 하면 내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들춰내는 하나의 기회로 삼는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 내용이 뭡니까? “네가 떠나지 아니하면...네가 어떻게 하지 아니하면...네가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면...네가 나를 따르면 네가 이 땅에서 오래 산다”라는 이야기거든요. 그 이야기인데 제가 이야기했죠. 이스라엘이 살 땅은 이 약속의 땅에는 전무 합니다. 없습니다. 네가 치우치지 않으면 이 땅에 산다고 하지만 그 말씀 때문에 그들은 그 땅에서 살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갔다 와야 해요. 어디를 갔다 온다는 것을 학자들은 ‘제2의 출애굽’이라 합니다. 그들이 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것은 일단 어디를 거쳤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그들이 쫓겨난 겁니다. 그러면 땅이 없지요. 땅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땅을 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땅을 줄 때 그 땅은 그들이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시는 땅이에요. 

하나님이 사시는 땅, 천국이 원래 그런 곳이거든요. 하나님이 사시는 땅에 우리가 가담하는 형식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마음과 우리 마음이 일치될 때 들어갈 수 있어요. 마음이 틀어지면 같이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과 합치되도록 바꾸려고 하는 거예요. 마음이 합치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의 관점에서 나를 다시 보기를 할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령이 주어지는 겁니다. 

내가 주님 보는 거 말고 주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는 거. ‘저 이쁘지요. 이거 착하지요.’라고 하는 거 말고 주님이 보는 관점에서 나를 다시 볼 수 있는 관점과 시선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겁니다. 경찰관들이 가지고 있는 총이 있지요. ‘테이저건’이라는 것이 있어요. 테이저건과 기존의 총의 다른 점은 총은 쏘면 총알이 박히고 총을 쏜 사람과 총을 맞은 사람이 연결이 안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나 테이저건은 제가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만 드라마 같은데 보면 쏘니까 전선이 두 개가 나와서 그 사람에게 꽂혀서 총 쏜 사람과 총 맞은 사람이 연결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테이저건을 쏘아 버린 겁니다. 우리는 졸도하죠.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 황당한 상황은 무슨 상황입니까? 제가 이러려고 교회 다녔습니까?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라는 이런 거요. 

아까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 죽었을 때처럼 예수님께서는 두 연결된 선을 통해서 “내 부활이 네 부활이고 내 생명이 네 생명으로 전달 되는데 그래도 안 되겠니?”라고 나오시겠죠.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총을 쏘시는 겁니다. 율법을 가지고 총을 쏠 때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다시 이 땅에서 쫓겨나게 하시는 거예요. 이 땅에서 잠시 살고 쫓겨나고 테이저건처럼 잠시 살고 처음 올 때는 주의 율법 갖고 왔지만, 다시 그 약속의 땅에 갈 때는 테이저건을 사용하셔서 집어넣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나와요. 어디 나오느냐 하면 8절에 나옵니다. 

“오직 너희 하나님이 친근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라고 했는데 ‘친근’이 뭐냐 하면 따라오라는 겁니다. ‘Follow me~나를 따라오너라’라는 뜻입니다. 너 혼자 나대지 말고 항상 나를 따라오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쉽게 이야기하면 ‘너는 나와 테이저건으로 연결되어있다’라는 겁니다. “네가 아프다고? 너만 아프냐? 나도 아프다. 우리는 연결 되어있으니까”라고 하시는 겁니다. 

“지금 네가 아픈 것은 네가 너를 보는 관점을 포기를 못 했기 때문에 아픈 건데 그 관점을 테이저건을 통해서 주님 내가 보는 관점으로 너의 아픈 곳을 다시 한번 평가해 봐라. 그게 과연 아플 일인가를. 네 발상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한번 바꿔봐라”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고방식을. 

이건 너를 증명하기 위한 땅이 아니거든요. 완전히 사고방식이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른 사람을 예로 한번 들겠습니다. 이름이 ‘안 중생’이라는 사람이에요. 안 거듭난 사람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름이 중생입니다. 누구의 아들인데 유명한 사람 아들이에요. 안중근 아들이에요. 

안중근 아들인데 안 중생이 한국 조선 땅에 살 때 일본 경찰이 아주 괴롭혔습니다. “네 아버지는 살인자다. 테러범이다. 너 때문에 이토히로부미 죽었다. 우리도 너희들 다 죽일 거야”라고 일본 쪽에서 이러는 반면에 저쪽에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안중근 아들 안중생아, 너는 아버지의 조국 사랑하는 얼을 본받아서 너도 장렬하게 항일투쟁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 하고, 다이소 가지 말고, 너는 장렬하게 순교해서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어라”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라는 말을 들으란 말이죠. 이렇게 양쪽에 끼어서 어쩔 줄을 모를 때 이 안중생이 선택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도쿄에 가서 이토히로부미 아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테러범이고 당신 아버지를 죽여서 가족에게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하고 미국으로 가서 잘 먹고 잘살았답니다. 

그리고 해방되고 난 뒤, 한국에서는 “네가 인간이냐? 양심도 없냐? 네 아버지를 이렇게 욕보이게 하냐?”라고 비난을 하자 안중생이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내 아버지는 조국의 영웅이지만 나는 내 가족의 영웅이었습니다”라는 사고 발상의 전환. 완전한 전환입니다. 내 살 곳은 남들이 뭐라 말해도 내 본성대로 갈 겁니다. 내 본성대로. 

매국노 된 거죠. 안중근 아들이 나라 팔아먹은 거죠. 그래서 이름이 중생인가? 거듭남.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해요.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모두 ‘예’라 할 때 혼자 ‘아니오’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안면치레하느라 그렇게 못합니다. 주께서 이 더러운 배설물을 끄집어내는 시점에서 하게 하실 거예요. 

‘나는 이 땅에 어디에도 살 곳은 없다’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이 세상에 살 곳이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출애굽을 해야 하니까. 지금 내 위주로 살아가는 이것은 주께서는 천국에 넣어주질 않습니다. 따라서 다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종노릇하고 거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말씀의 완성에 의해서, 주님의 관점에 의해서 끄집어내질 때 우리는 천국에 합류가 됩니다. 

그 합류될 때 그 마음이 뭐냐고 저한테 물으신다면 천국은 뭐 하는 곳인지 물으신다면 ‘천국은 더 이상 복수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곳, 더 이상 보복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곳, 천국은 한 맺힘이 용납되지 않는 곳’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더러운 네가 뭐 잘 났다고 한이 맺혀? 사람이 한이 맺히고 복수할 게 있으면 자기 원수가 천당 가는 것을 용납 못 합니다. 

자기 원수가 천국 가면 자신은 차라리 지옥 간다고 설치죠. 자신은 저 인간하고 못 산다는 겁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인간 안에 들어있는 더러움이란 것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내 중심으로 봤기 때문에 나에게 조금이라도 뭔가 문제 있고 아프고 일이 벌어지면 그걸 복수하려고 한을 풀려고 주님이고 하나님이고 멱살 쥐고 흔들려는 악마의 마음이 이미 우리에게 장착되어 있어요. 

이게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 못 갑니다. 근데 무슨 수로 이걸 바꿔치기합니까? 주님의 한, 우리의 복수심, 내 인생 괴롭고 힘들다는 그 모든 아픔을 주님과 함께 동거하면서 주님도 같이 포로 생활하시면서, 이건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주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버려질 때 같이 버려지셔서 자기 백성과 같이 바벨론에 포로 생활 한 겁니다. 다니엘과 함께 있었어요. 

그리고 남은 자를 주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데려옵니다. 남은 자. 그 남은 자 중에 남은 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내가 아버지의 마음이고 내가 하나님이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다. 내 마음은 뭐냐 하면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수하지 말라. 나에게 대접하고자 하는 것처럼 남에게 대접하는 그것이 모든 선지자고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이다” 

사랑하려면 복수하지 말라. 복수가 안 되려면 내가 주님 앞에 얼마나 나쁜 인간인 것을 본인이 자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나쁜 인간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주님 십자가 앞에 소환시킵니다. ‘너 때문에 나 망했잖아. 이래도 복수 할래? 이래도 네 인생 버렸다고 멱살 쥘래?’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예요. 같은 원수 주제에 뭐 잘났다고 그렇게 기를 쓰느냔 말이죠. 뭐 잘났다고. 

과거의 누구를 원망하지 마세요. 남편은 아내 원망하지 마시고 아내는 남편 원망하지 마세요. 아직도 원망이 나온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주께서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원망하고 복수하는 마음을 그걸 바깥으로 배출시키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남편 만나고 그런 아내 만나고 그런 자식 만나는 거예요. 원치 않는 일이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르다 마리아와 똑같은 절차를 밟아 가는 겁니다. 

뭐 주님 섬겼다고요? 주님 앞에 헌금했다고요? 막상 오빠 죽으니까 예수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는데요. 내 오빠 살려내라는데. 내 오빠 살려내. 그런 오빠 같은 존재 우리 안에 하나씩 다 들어있습니다. 오빠가 생명입니까? 오빠가 부활이에요? 아니잖아요? 오빠는 나의 자존심이잖아요.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를 율법 앞에서 오른팔을 자르라고 해요. 우리는 주춤합니다. “오른눈을 빼버려라”라고 하면 “미쳤어요”라고 합니다. 막 커버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너의 구원은 바로 십자가 피로, 대신 죽으심으로 되지 너의 방어하고 뽐내는 너의 것은 일체 받지않습니다. 왜? 더러우니까.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태풍 불지요. 태풍 불 때 여러분 사거리 한번 나가보세요. 태풍은 신호등을 지키지 않습니다. 자기 맘대로 다녀요. 자기 맘대로. 태풍은 사거리인지 골목인지 관계없어요. 그냥 불어버려요. 성령은 우리가 딱 체계를 잡고 신앙생활 잘할 때 성령이 오는 게 아니에요. 

성령은 예측 못 한대로 우리가 원치 않는 대로 그냥 와서 우리의 한이 서리고 보복심으로 가득한 우리를 꼴 사납다고 책망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시면서 “그러지 마라. 그 무게가 너를 지옥으로 잡아당긴다. 그 힘의 중력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주님의 간증, 죄인인데 봐주셨다는 거, 죄인인데 나의 죄를 주의 꺾으신 뼈로 용서했다는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주께서 “너 대신 내가 꺾어질 테니 너는 이제 편안해라. 그리고 태풍처럼 자유로워라”라고 하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활개 치게 하옵소서. 주저 없게 하옵소서. 구속받지 않게 하옵소서. 남의 눈총에 시달리지 않게 하옵소서. 맘대로 살라고 주신 성령인데 우리가 몸 사리지 않게 해 주시고 마음껏 주님을 찬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