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정복자 의식(수17;11-12) 1904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4. 16. 22:11
2019-04-14 14:57:45조회 : 48         
   정복자 의식 19041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정복자 의식(여호수아 17:11-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e08K4rakc_o, Hit:6
 이근호19-04-14 15:34 

정복자 의식  

2019년 4월 14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7:12-13 

(17: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 

(17:13)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수아는 ‘전쟁’에 관한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본성상 전쟁을 원치 않습니다. 평온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평온하게 사는 것은 곧 놀아도 생존에 지장이 없는 상태를 말할 겁니다. 힘들게 노동하지 않더라도 생활에 쪼달림이 없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모델을 찾게 됩니다. 

혹시 그런 사람을 주변에서 발견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여깁니다. 요즈음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창 10:9) 사냥을 잘한 니므롯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영웅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다들 여기는 분위기인 겁니다. 내게 없는데 다른 특이한 자에게 있다면 사람들은 그를 신과 연관시킵니다. 즉 ‘신의 능력을 부여받은 특별한 사람’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바로 인간 세상에 있어 소유된 능력 여부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계기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모든 시대에도 공히 적용되는 풍조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점이 보입니다. 므낫세 자손은 마땅히 이방토착민들을 추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추방하지 않습니다. 힘이 강성할 때를 기다려서 그 토착민들을 종으로 부렸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히 이스라엘이 더 힘이 세다를 사실을 각인시켜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이러한 의식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잘못된 처신’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못’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부합되지 않는 조치였다는 겁니다. 그러나 므낫세 입장에서, 자신들이 강함을 충분히 반영한 조치라고 여깁니다. 그만하면 충분히 강자로서의 면모와 실질적 지배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여깁니다. 

바로 이런 의식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이스라엘의 본질’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것은 이방민족들이 마땅히 가질 ‘정복자 의식’입니다. 즉 자신의 강함으로 획득한 것은 마땅히 영웅같은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식입니다. 소위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반적인 생활의 원리가 이 의식의 바탕 위에서 진행됩니다.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는 것은 ‘나 편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곧 나의 전쟁의 명분은 ‘나 편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인간도 이런 여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긴다는 것’, 이것은 힘들게 살아가는 존재의 보람이요 이유요 최종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지려고, 깨지기 위해 사는 게 인생의 가치가 아닐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고집이 문제입니다. 이 당연함으로 버티는 것이 곧 이방민족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치고 정복해야 하는 이유는, 곧 자신을 향한 자기 정복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을 자기의 최후의 적으로 간주해야 하는 겁니다. 이 땅 정복에서 이스라엘은 결코 ‘정복자’로서 행세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도 주님에 의해서 정복당한 대상임을 자인해야 비로소 그 약속의 땅에서 실질적 주인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살 자격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본인들에게 남을 이기고 남을 여유분을 소지하지 않은 처지인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겁니다. 자기 힘으로 정복했으면 마땅히 그 땅은 자기 소유가 될 겁니다. 

하지만 똑같은 사고방식과 의식을 가진 이방인을 어떻게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정복할 수 있습니까? 다른 본질로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그 자체로 전리품으로 발생된 겁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승자는 오직 ‘주의 이름’ 뿐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전쟁에 가담되게 된 이스라엘은 그 약속의 땅을 거저 얻은 겁니다. 

이 ‘거저’와 자신의 존재 의미와 줄곧 싸워야 합니다. 인간이 행동에 나설 때는 필히 ‘자기 가능성’에 기대를 품고 나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 규정과 맞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6:13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맹세하고 자신의 힘으로 그 맹세를 이루어나가십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존재는 실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맹세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이 나타난 인물입니다. 원래 ‘아브람’이라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이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자기 맹세가 덮쳐지니까 ‘아브라함’이 된 겁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주님 자신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도 전혀 못한 일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기존 세상과 싸우시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싸움의 주체가 이스라엘민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다니시는 ‘주의 이름’에 있습니다. 주의 이름은 ‘자기 맹세’만 사수하십니다. 

따라서 그 누구라도 이 ‘주님의 맹세’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적이 되는 그런 전쟁을 수행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에 계속 기거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는 곧 이 약속의  땅에서 ‘이방민족의 요소’ 곧 ‘정복자의 의식’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신앙생활조차도 남을 이기겠다는 정복의식으로 진행되며, 자기 자신에게도 계속 강요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는 겁니다. 용기를 부여합니다. 이는 인간이, 자기가 자기에게 맹세하고 그 성취를 위해 자신의 가능성을 그 속에 투입하는 행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성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바를 경험하고, 바로 그 모든 것이 천국나라의 위배적 요소인 것을 자각하는 일이 됩니다. 남을 섬기고, 봉사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겸손히 낮추고 또 낮추고, 예수님을 믿고 하는 등등의 모든 일로 인하여 결코 악마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심’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얻어내거나 받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인간과 악마를 상대로 벌리신 그 일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내놓을 수 있는 태도는 주님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 드리고 높이는 일입니다. 그래야 계속해서 전쟁의 주체자가 주님임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잘남에 빠져 들지도 말게 하시고 자기 못남에도 빠져 들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4-14 22:52 
232강-여호수아 17장 12~13절(정복자 의식)201904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7장 12~13절입니다. 구약성경 346페이지입니다.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 므낫세 자손들이 잘못 처신했다는 것을 여기서 미리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잘못되었다”라는 것에 기준이 뭐냐 하면 너를 정복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정복자라 하는 뜻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되면 이게 소유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내 것이 되는 겁니다. 그 땅의 주인행세 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주인이 아니고 종이라면, 종의 원칙 같은 것은 일절 생각하지 말고 우리 주인님이 이 땅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그 점만 관심을 둬야 하겠지요.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써 지금껏 인류 문명이 이렇게 되어있다고 서점에 가득 차 있는 모든 것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믿을 것은 사람밖에 없다는 거죠. 

“너희들이 지혜를 짜내 봐라. 너희들의 창의성이 인류를 살린다. 지구가 환경이 나쁘거든 화성으로 이사 가자. 달이든 화성이든 목성이든 가면 될게 아니냐. 힘을 모아서 살 궁리 찾아야지” 그런 식으로 그런 말을 내뱉고 그런 말에 희망을 갖는 자체가 이 세상에 믿을 것은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 확인해 주는 거예요. 

믿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사람을 믿지요. 믿음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고 믿긴 믿는데 사람을 믿어요. 그걸 달리 표현해서 창세기 11장 식으로 한다면 영웅을 믿습니다. 우리보다 더 지혜롭고 우리보다 더 재주를 가진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을 사람들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이 합한 사람이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해석을 해버렸어요. 

능력 있는 자를 신이 합한 사람으로 신이 도와주는 사람으로 해석을 해버리니까 막상 초라하게 맥없이 무너져 버린 예수님에 대해서는 결단코 장담하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던 겁니다. 이걸 우리 인생에 집어넣어 보세요. 우리는 영웅적인 것을 원했습니까? 아니면 맥없이 무너지는 사람을 원했습니까? 우리 자신이 바로 힘없는 자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얼마나 핍박을 해왔습니까? 

이 의식 속에는 내 인생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나 외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아주 확답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내 인생은 어디까지나 내 것이다. 갑자기 내 인생이 나의 것이 되어버렸어요. 내가 주인공이에요. 갑자기 그것 가지고 으스대고 말할 것이 있기때문에, “나 이렇게 살아왔어”라고 말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여호수아에 땅을 차지했다는 말을 보게 되면 우리는 아주 신이 나요. ‘하나님, 여호수아는 도와주고 왜 우리는 안 도와줍니까?’라는 식으로 나설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에서 쭉 보면서 여러분이 정리해야 할 것이 있어요. 딱 하나만 정리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전쟁 없이는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전쟁. 

전쟁이라는 말은 피곤한 말입니다. 전쟁을 요즘 현대어로 고치면 경쟁이죠. 경쟁. 가게를 하든지 교회를 하든지 학교에 입학만 해도 경쟁이에요. 심지어 유치원 어린이집에도 경쟁이에요. 모든 게 경쟁입니다. 따라가지 않고 낙오자 되면 그건 사람 취급 못 받는 것이 보편화 된 세상이어서 우리 몸에 습득되는 그 습관이라는 것은 경쟁에 살아남는 것이 승리자라는 의식이 가득 찼어요. 

그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교회 왔기 때문에 교회 와서 구원도 자기 소유화시키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나타내시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네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면 전쟁이라는 것이 어떤 누구와의 전쟁이냐 하면 오늘 여호수아 17장에 보면 이런 말이 있죠.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성읍에 거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우리 보기에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뒤에 보면 그 땅에 있는 사람을 나중에 사역을 시키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토착민들 있는 것이 뭐 대수로운 일이 아니에요. 어차피 그들은 힘이 약하니까 그들을 일만 시키면 된다고 이렇게 가볍게 생각하는데 주님은 절대로 그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들에게 사역을 시키고 힘이 아직도 이스라엘에게 있고 가나안 사람에게는 없다고 여길 때, 그때 조심했어야 하는 겁니다. 뭐냐면 우리가 그들보다 힘이 더 세다는 의식 자체가 우리 자신을 망하게 하는 거예요. 자기를 우쭐댈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매사가 그렇습니다. ‘힘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라는 생각이 우리 삶에 하나의 원치처럼 작용하고 있어요. ‘힘만 있으면 살 텐데. 돈만 있으면 해결 잘 될 텐데. 몸만 건강하면 해결 잘 될 텐데.’라는 원칙. 그러나 돈 있고 몸 건강할 때 했던 짓이 뭡니까? 자기 잘났다는 교만한 짓 외에는 없잖아요.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쟁은 자기보다 약함을 통해서 자기가 강함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전쟁을 사람들은 선호하고 있어요. 그 전쟁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고 길들여 있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쏙 빼고 정복자 입장에서 그 땅을 차지한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다만 정복자로 거기에 들어간 거예요. 

저쪽 서울 북쪽에 이북이 있잖아요. 조선 인민주의 공화국. 그쪽을 이방인으로 한번 취급해 봅시다. 그쪽을 이방인으로 취급한다면 미군의 도움으로 우리가 강력한 신무기를 장착해서 북한 김정은과 회담하지 말고 그냥 간단하게 밀어붙이면 안 돼요? 태극기 흔들면서 그냥 밀어붙이면 되잖아요. 

경제력도 10분의 1밖에 차이 안 나니까 장기적으로 끌면 이건 해보나 마나 패배할 거고 미국의 최신식 무기인 전자무기까지 동원하면 사람들 많이 죽는 일도 없이 이라크 전쟁처럼 한 번에 밀어버리고 전쟁의 명분은 인권보장으로 해서 불쌍한 조선 인민주의 공화국 인민들 공산 독재 치하에서 해방시키자는 좋은 명분도 있잖아요. 

공산 사회주의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 인민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의 소원인 이밥에 소고기국밥, 7천 원만 주면 사 먹는, 그거 먹여주고 명분 좋잖아요. 밀어붙이고 북진통일 하면 안 됩니까? 이 의식이 뭐냐 하면 우리가 정복자이고 강자라는 의식인 거예요. 그래서 정치라는 것이 묘해서 정치의 명분은 반드시 내가 내 힘으로 내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서 나보다 항상 질적으로든 윤리 도덕적으로 못한 존재가 있을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살 맛이 나는 거, 이것이 정치 게임이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면 이건 보통 잘못된 문제가 아닌 거예요. ‘절에 가는 사람 지옥 가거라. 나는 천당 가게’라는 이것도 정복자 의식이거든요. 우리 동네에 아미사라는 절이 있는데 4층 건물 잘 지어놨거든요. 그거 요새는 누전도 없는지, 불도 안 나고. 악담에 저주를 하고 싶은 거예요. 아래층에서 담배 피워서 냄새가 위로 올라올 때 제발 그 집에 아이 돌연사하든지, 남편이 음주운전 해서 누구 좀 치고 교도소 가든지 그것에 대한 합당한 천벌을 내려 주기를 원하는 거죠. 왜? 담배를 피웠으니까. 이런 명분들이 있단 말이죠. 

결국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조용할 새가 없어요. 우리는 항상 나를 승자로 모시기 위한 부단한 망상과 망상의 연속된 인생입니다. 나를 건들면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작살을 낼 거라는 겁니다. 이게 힘든 인생을 견디게 해줘요. 그런데 만약에 자기 뜻대로 승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가 역전되어서 패자가 된다면 거기에 대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살. 번개탄. 

이게, 이 의식이 바로 여호수아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의 몸에 밴 습성입니다. 가나안 민족.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해요. 이게 이스라엘이 그들과 똑같다면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줄 취지나 의의가 없어요. 주께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할 때 지금 이 몸 가지고, 안 그래도 승자가 되고 싶은 의식만 가득한 이 몸 가지고 천당 간다면 그건 천당 아닙니다.

그거는 가짜예요. 그건 길 잘못 든 거예요. 만약에 이 땅에서 삼성 라이온즈 야구팀을 응원한다면 나중에 천국 가서 삼성 라이온즈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살래요? 이 땅에서 어떤 게임이나 누구를 응원한다는 말은 그 팀이 좋아서가 아니라 반대급부로 내가 승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개기들이 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소기업 하는 사람이나 남자들이 왜 자꾸 바다 이야기나 신종 도박이나 게임에 몰두하는 이유가 사회에서 패배하던 패배의식을 한꺼번에 그런 식으로 보상 받고 싶어하는 거예요. 자비로운 신, 공평한 신이면 나의 어떤 아픔이나 고통을 보상해 달라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게 점점 한이 맺히는 거예요. 어떤 교회는 금요일에 철야 기도회를 하고 어떤 교회는 목요일에 하는 곳도 있어요. 

철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스스로 자기를 부추기고 싶은데 그런 시간과 장소를 누가 제공을 안 하니까 장소 깔아주는 거예요. 아래 자리하나 깔아주는 거예요. 마음대로 한풀이 많이 하라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하면서 당신은 결코 영원한 패자가 아니라는,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결국 승자라는 그것을 계속 세뇌하는 거예요. 

그래서 남는 것이 뭡니까? 내 인생은 나의 것.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악마적 본성을 합리화하고 그걸 긍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결국 교회라는 이름의 장사는 대한 예수회 장로교라는 이 프랜차이즈는 결국 사람의 종교적인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번창한 겁니다. 다 가짜라고 보시면 돼요. 성경해석도 물론 잘못될 거고요. 

그러면 이 전쟁은 뭐와 뭐의 전쟁이냐 변할 가능성이 없는 나를, 완전히 가능성도 없었는데 다른 인간으로 바꿨다는 데서 오는 그 갈등과 전쟁이었습니다. 어렵지요. 이방인을 만나보라. 그러면 이방인 모습과 현재 너의 모습이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주님께서는 그쪽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저쪽을 저주하고,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왜 우리를 축복했느냐는 말입니다. 

서로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동일한데 어째서 동일한 인간에게 한쪽은 축복 한쪽은 저주인지, 그리고 복 받은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땅 받고 부동산 받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 쉽게 말해서 거져 주신 은혜의 조치, 이 거져 주신 땅에서 그다음에 어떤 업무가 있는데 그 업무가 뭐냐 하면 저는 이 땅에 올 연유가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에 의해서 제가 이 천국의 사람이 되었는지를 찾아봐야 할 그러한 임무가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해답을 미리 말씀드리면 해답은 간단해요. “너의 잘남도 아니고 너의 의로움도 아니고 그건 나의 맹세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에 나온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라고 되어있어요. 히브리서 사도도 참말을 어렵게 해요. 

왜냐 하면 말을 사람에게 해놓고는 사람을 말의 대상자에서 빼버리니까 이게 얼마나 어려운 거예요. 뭔가 하나님께서 말하니까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하셨는지 물으면 하나님께서 “너는 몰라도 되고”라는 이 말이거든요. 사람에게 뭔가 “십계명 지켜라,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해 놓고 “하나님 저에게 뭐라고 했어요?”라고 하면 “아니, 너보고 안 했어”라고 하면서 “네 속에 나”라고 대답하신단 말이죠. 

하나님이 하나님보고 맹세한 거예요. 너는 빠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 뭘 못하느냐 하면 ‘나 빼기’를 못해요. 나 빼기. 왜냐 하면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누구의 것이라는 어떤 아무런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이 몸이 내 몸이지 그럼 누구의 몸이라는 말입니까. 내가 책임져야 할 몸이거든요.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인생이죠. 내가 결심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할 내 몸이란 말이죠. 

그게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말이거든요. 일반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복을 못 받는 것은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면 기도를 안 해서 그렇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데 네가 너무 게을러서 기도를 안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에게 기도를 독촉하기 위해서 너에게 현재 너의 뜻대로 안 되게 했다. 따라서 네가 너의 잘못을 알고 제가 기도에 게으른 죄를 범했다는 회개를 한다면 너는 너의 원하는 뜻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리를 계속해서 교인들에게 심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이, 교인들이 이방인인데, 자신들을 하나님이 상대할 대상으로 간주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기도하죠. 그러면 목사는 가만두지 않고 “기도할 때 어떻게 이기주의적 기도를 하십니까? 교회를 위해서는 기도해야죠”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까짓것 어렵지 않죠. 그러면 교인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교회 다니고 주의 백성이라고 해놓고 그렇게 이기주의입니까? 남을 위해서 기도해야죠.”라고 하면 ‘남을 위해 기도하면 더 자비롭기 때문에 복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라고 생각하면서 한단 말이죠. 

그러면 목사가 “남을 위해서 한다고 남만 하지 말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죠”라고 한단 말이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게 뭐가 어려워요. 또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죠. 그러면 목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만 하면 돼요? 실천에 옮겨야지”라고 하거든요. 결국 뭐냐 하면 돌고 돌고 비비 꼬아서 한 말을 풀어보면 돈 내라는 이야기예요. 그게. 교회 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집구석만 먹고 살고 교회는 나 몰라라 하면 나중에 교회 망하면 어쩌려고”라고 하면 재정 보는 집사들 가슴 덜렁 내려앉죠. 어떻게 자기 집구석만 생각하고 교회 운영은 생각도 안 하느냔 말이죠. “이게 목사 내 교회입니까? 여러분 교회 아닙니까?”라고 한단 말이죠. 그러면 나이 많이 들고 오래된 교인들은 “전에 목돈 냈잖아요. 신참들이 푼돈내서 그렇지” 그다음부터 이야기가 돈 문제로 돌아가요. 

‘싸가지없는 사람들이 푼돈만 내고 목돈 안내고, 나는 옛날에 냈는데 또 내라는 말인가?’라는 식으로 생각이 돌아가죠. 돈 내고 장로 됐는데. 이런 의식에서 여호수아와 비교해서 뭐가 안 됐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거, 그 모든 것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헌금이든 전도든 남을 위해 기도하든 교회를 위해서 충성 봉사하든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할 수 있는 가능성, 이 모든 것을 찾아가야 해요. 뭘 찾아가야 하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극한까지 찾아가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거. 내 목숨을 주를 위해서 포기하는 거.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출 수 있는 거. 주고 주고 내 목숨까지 다 바치는 거. 그게 바로 놀랍게도 이방인의 요소예요. 내 목숨을 위해서 주님께 목숨 바치는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바로 지옥 갈 성품이었던 거예요. 나를 끝까지, 나의 잘남을 우길 수 있는 마지막 건덕지였던 겁니다. 

그러면 전쟁은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계속해서 끄집어내면서 “이거 아니죠, 주님. 이것도 아니죠. 내가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이게 결코 주의 일이 아니죠, 주님”이라는 싸움, 바로 그 싸움을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받은 천국은 내가 아무 행한 것 없이 예수님에 의해서 거져 받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주의 이름만 거하시는 땅 그 장소, 바로 우리가 가게 된 천국입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어떤 노력도 시도도 일체 받아주지 않는 천국. 

처음 들을 때는 신이 났습니다. 왜? 공짜로 얻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쟁의 시발점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죠. 평생 살아가면서 내가 결코 내 힘으로 이스라엘로 전환될 수 없는 그런 요소로 가득 차 있다는 거예요. 굉장히 성품이 어질고 뭐든지 베풀 줄 알았죠. 2분 안에 분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2분 안에. 

아직도 분노할 여지는 우리가 목숨 끊어질 때까지 계속 생성시켜주시는 주님. 이 전쟁은 너 빼고 다시 말해서 저 인간, 자기밖에 모르는 저 인간을 천국 넣어 줄 건가 말 건가는 주님이 악마와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너의 행함과는 상관없이 합격시켰다는 통보를 계속 주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행했던 그것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냥 주시는 주님 자신의 피로 희생으로 주시는 그 천국과 내 힘이 가미된 천국과의 싸움을 어디서 벌이느냐 하면 교회에서 벌이는 거예요. 

교회 성장에 미쳐있는 목사와 싸워야 해요. 그리고 목사라고 언급했지만 사실 우리 자신은 안 그렇습니까?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는 열심인데 왜 저 사람은 열심히 안 하느냐 그거. 히브리서 6장에 나오는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 땅에 아브라함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므낫세 사람 인간은 없어요. 

이 땅은 므낫세 사람이 차지하는 땅이 아니고 므낫세 되게 하시는 주님이 차지할 땅이에요. 천국은 내가 차지할 땅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전환 시킨 주의 이름이 영원히 거할 땅인데, 주의 이름으로 칭한 사람이 144,000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거기의 주의 이름의 작용으로만 거기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 살면서 우리는 이름 바꿔야 하지요. 

내 이름의 명예, 내 가치, 내 자존심, 내가 이 만큼 인생 열심히 잘 살았다, 겸손했다, 그 자기 이름과 결부된 모든 것은 죄였다는 식으로 주의 이름으로 완성된 십자가 앞에서 그걸 고백해야죠. 그게 바뀌어야죠. 어떻게 바뀝니까? 가만히 있어 보세요. 주께서 여러분을 화나고 분노할 사건으로 계속 내모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했다는 말은 아브람은 없어요. 아브라함이 있었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할 때는 이건 하나님의 이름이 아브라함이라는 인간에게 찾아온 거예요. 찾아온 것을 두 자로 뭐냐 하면 맹세가 찾아왔다고 했어요. 맹세는 이전까지 언약이 와닿지 맹세는 와닿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최근 제가 맹세라는 말이 와닿았어요. 

‘용두산 엘레지’라는 노래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용두산아~’라고 부른 노래를 보면 194단계를 한 발 올리고 맹세하고 두 발 올리고 언약 맺고, 거기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와요. 용두산 엘레지 나중에 한 번 들어보세요. 요새 자주 나옵니다. 사람과 맹세했으니까 나중에 다짐했지만 헤어졌다는 슬픔 노래 거든요. 

왜 사람과 맹세했습니까? 그건 이방인들의 맹세죠. 주님은 우리와 맹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 맹세해서 우리는 들러리죠. 주님의 일에 그냥 말려든 거예요. 일방적으로. 아예 일방적으로 차압당한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주의 소유예요. 

따라서 주의 소유가 주의 소유 되려면 주께서 우리를 싸우게 만들죠. ‘아닙니다. 내 인생 내 것입니다’라는 그 고집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유지하시고 매일같이 ‘아~내가 알아서 천당 가는 거 아니고 주께서 이미 확정시켰구나’라는 그 깨어짐을 통한 기쁨과 감사가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인 줄 몰랐습니다. 내가 나설 육의 전쟁이 아니라 저희 같은 못난 자를 앞장세워서 주의 십자가 피만 승리할 주의 이름만 높여질 전쟁에 참여시켜 주셔서 저희 들이 이스라엘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 주님의 증거가 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