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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의 딸(수15;16-19) 19033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31. 18:12
2019-03-31 14:59:54조회 : 12         
   갈렙의 딸 190331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갈렙의 딸(여호수아 15:16-1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9sLfTpg5ws, Hit:1

 이근호19-03-31 15:45 
갈렙의 딸 

2019년 3월 31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5:16-19 

(15: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5:17)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5:1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15:19)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역사의 겉모습 속에서 자주 감추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역사를 계속 뻗어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겉으로 나타난 모든 역사의 모습은 남성들의 활약상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은 그 남성들의 활동상에 종속되어 자신의 인생은 남성의 업적에 기대를 갖게 됩니다. 

따라서 역사의 주도권에서 여성을 배제되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7에 보면,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진행시키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강한 자인 남성 위주로 설명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강한 남성은 약한 여성을 돌보게 되어 있습니다. 즉 돌봄을 받는 것이 여성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냉혹한 이 세상에서 남성은 여성에 대해서 조건부로 돌봐주겠다는 나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남편이 밖에 나가 생활비 벌기 위해 모진 수고를 다했음의 가치를 알아주는 조건 하에 여성을 돌봐주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것은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2급 인간으로 간주하려는 본성에서 나온 겁니다. 즉 약하기에 무조건적으로 남편을 하늘같이 섬겨야 한다는 것을 조건부로 돌봐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인간들의 탐욕으로 인하여 그 취지가 사라지게 된 겁니다. 마땅히 여성을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을 마치 남성들의 위력적인 권리 행사로 사용하는 겁니다. 이처럼 역사가 남성위주로 그대로 흘러간다면 이는 파멸이 이르고 구원과 상관없는 역사가 됩니다. 

하지만 역사의 내부에서는 이런 강한 남성위주의 세계와는 다른 흐름이 흐르고 있습니다. 가끔씩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냅니다. 이것은 기존의 역사 속에 마치 TV 모니터가 새겨져 있는 효과와 같습니다. 남성들이 여유만만할 때는 여성의 존재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성 세계의 질을 바꾸기 위해 ‘무시당하는 여성’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는 마치 꺼놓은 TV모니터를 다시 켜놓은 바가 됩니다. 즉 사람들이 여성을 무시하던말던 하늘나라 방송국에서 계속 방송정보를 송출하고 있었던 겁니다. 남자들이 잘난 척하고 건방진 태도로 인하여 여상의 입지의 중요성을 훼손해 온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갈렙이라는 사람이 보여준 ‘믿음의 특이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믿음을 수 없는 믿음을 보여줍니다. 이 특이한 믿음이 일반적인 믿음과 차이남을 새겨주기 위해 갈렙이 차지한 유다지파 땅 내부에 특이성 있는 땅의 등장이 필요했던 겁니다. 즉 모든 땅이 남자의 명의로, 남자에 의해서 차지했다면 여기에 여성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특이성을 가진 땅’이 나옵니다. 그것은 여성인 딸이 아버지로부터, 남편이 얻은 땅과는 별도로 땅을 상속받게 되는 경우가 나옵니다. 여성 고유의 땅이 유다지파가 상속 받은 땅 속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 안에 들어가 살 수 없다는 원칙에 가장 부합되는 요소로서 악사의 땅이 등장하게 됩니다. 

결코 남성의 땅으로 편입될 수 없는 독특한 땅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성을 오히려 살리는 것은 여성임이 부각되는 겁니다. 유다 지파 내의 족보에도 이러한 특이한 성질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 3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말’이라는 여자는 이방여인입니다. 이방여인이 아니었다면 이 족보에 여인네의 이름이 직접 거론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성들이 발휘하는 힘으로 현 이스라엘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스라엘을 천국과 연결시키는 일은 여성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여자의 아들’로 출몰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 메시야의 족보를 따라 올라가면 남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특이성입니다. 남성없이 그 여성이 임신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이 세상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이러한 여성의 활약은 늘 단발성으로 끝납니다. 특이성이 따로 역사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역사 속에서 특이한 사건으로 끼어들면 그만입니다.
따라서 여성이라고 해서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성들이 선망하는 모델은 이미 남성위주의 직위들입니다. 약함을 강함을 지향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이 가진 것을 선망하면서 종속당하는 겁니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수고 없이 못산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여성들도 부러워하면서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 계시의 특이성은 이런 주도권을 뒤엎되 여성에게 주도권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에게 모든 주도권이 있음을 약한 여성을 통해 알리시는 겁니다. 

갈렙이 보여주었던 특이성 있는 믿음은, 곧 인간들의 믿음에 대한 고발입니다. 사람들은 외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거리를 자신이 간직하고 있기를 원합니다. 소위 ‘믿음’이라는 것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나를 구원하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어떤 특이성을 못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 특이성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바가 됩니다. 갈렙이 보여주었던 특이성은 자기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는 특이성입니다. 갈렙의 집안에서 최초의 사사가 나옵니다. 그 사람이 바로 갈렙 딸의 남편인 옷니엘입니다. 옷니엘은 그 이후의 사사의 성격과 특징을 보여줍니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되 단발성이라는 겁니다. 본인 지배하에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사사의 특이한 단발성은 여전히 모든 주도권은 오직 주님에게만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믿음마저 부인하는 참된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내 것이라고 우길 것이 아니라 늘 주님이 쓰시는 대로 쓰임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9-03-31 21:12:05조회 : 1         
230강-여호수아 15장 16~19절(갈렙의 딸)20190331-이 근호 목사이름 : 송민선 (IP:116.46.79.235)
230강-여호수아 15장 16~19절(갈렙의 딸)201903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5장 16~19절입니다. 구약성경 342페이지입니다.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이 여러 층으로 복합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에 그걸 뽑아내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이 말은 성경이 세상을 함축하고 있고, 함축 정도가 아니고 그 함축된 원리에 의해서 세상이 전개되는 겁니다. 세상이 전개되고 있고 그 내용을 성경이 함축해서 정답을 뽑아내는 것이 성경이 아니고 성경이 먼저 있고 그 성경에 준해서 세상이 뻗어 나가고 펼쳐진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있고 나를 어떻게 구원하느냐가 아니고 나 있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고 그 약속에 준해서 구원받는 사람을 이 땅에 나중에 언약에 포함된 존재자로 성도를 만드시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생산된 자가 성도인 겁니다.

그래서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으면 안 됩니다. 항상 시작은 주님에게 있기때문에 주도권이 주님에게 전환되고 바뀌어야 해요 그 주도권 전환이 바로 거듭남이라는 겁니다. 죽든지 살든지 사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주님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써 우리를 이 땅에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기본으로 해서 주님에게 주도권 있고 주 예수님에 대해 모든 성경은 기록된 것이라는 걸 전제로 해서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것은 인간 대 인간의 다툼이라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기에 딸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성경에서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나올 때, “방금 목사님은 주님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해놓고 여기서는 여성이 주도권이 있다고 이야기합니까?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라고 하지만 아들을 제치고 딸이 등장한 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드러낼 때, 기본에 인간 세상에서 이미 수립되고 정립된 그 체제를 특이성 있게 이탈하는 방법으로 주님의 주도권이 나오는 거예요.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주님은 보이지 않아요. 다만 작용만 있을 뿐이거든요. 그 작용이 뭔가 우리가 예상했던 것에서 벗어나 특이성 있게 드러나게 되면 주님이 손댔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 예시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분명히 구원의 대상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백성을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지 이방인에게 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면서도 제자들 없는 사이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와서 일방적으로 강제적으로 그 여인에게 구원을 베풀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물가의 여인’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헛되고 헛된 것들을 취했다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우물가의 여인을 앞장세워서 기존에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그 앞에서 쳐버리는 거예요. 그 쳐버린다는 것은 ‘이 여자가 너보다 낫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 세상의 어떤 인간들보다 너희들이 예상 못 하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아무리 봐도 주님을 몰라요. 다만 주님의 특이한 작용만 있을 뿐인데 그 특이한 작용이 사람들이 예상하고있는 어떤 것에 변화를 일으켜버리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데요, 오늘이 3월 31일이잖아요. 그러면 3월 30일까지의 내가 이것은 원리이고 분명히 진리라고 여겼던 그것을 3월 31일 오늘이 되면 그걸 털어버리게 해요.

그래야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거든요. ‘나는 복음을 안다. 예수 믿는다’가 돼버리면 어느새 주도권이 나의 소지가 되어버려요. 갑자기 자기가 모든 것을 안 사람이 되어버려요. 내가 가지고 있는 복음 가지고 내가 활용할 생각을 합니다. 그건 연속적인 자기 부인이라는 것과는 다른 거예요. 

계속 자기 부인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진리를 알려 주셨더라도 내일 되면 또 그 진리를 부수는 특이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돌아서면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면 신약이든 구약이든 하나님은 보이지 않아요. 다만 특이한 작용만 계속 나타납니다.

그러면 뭐가 보이느냐면 인간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 인간들 보이는데 인간들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하면 남성 위주의 세계입니다. 이거는 성경 전체가 남성 위주의 세계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전부 다 남성 위주의 세계죠. 그런데 오늘 여기 본문에 특이하게 딸 악사에 대해서 나오거든요. 

악사에 대해서 나오는데 이게 딸에 대해서 특이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유다 땅에 있어서 유다 땅을 접수하고 유다 땅에서 살 수 있는 그러한 근거는 유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갈렙에게 있다는 겁니다. 갈렙 집안에 유다의 다른 여타의 사람들이 땅을 차지할 수 있는 여건을 갈렙이라는 이 특이한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이성을 대대로 거기에 사건을 발생시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발언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여기 여호수아 15장에 남성들의 세계에서 여성이 등장한 거예요. 돌발적인 거죠.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보면 여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약한 자라고 되어있어요.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보면 ‘연약한 그릇’이라고 되어있어요. 연약한 그릇을 남성들은 편하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무능한 자라고 여겨 버려요. 조건이 있어요. 내가 당신을 연약한 자로 여겨서 보호해 줄 테니까 너는 무엇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냐 하면 너는 살림 만 할 줄 안다를 인정하고, 살림만 안다는 것은 사회에 나가서 아무 역할도 못 하고 돈 벌어 오는 데 전혀 유능하지 않은 무능한 자로 간주한다는 조건하에 나라는 남편은 당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을 대부분의 남성들은 갖고 있을 걸요?(지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못 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힘들게 한 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해준 만큼 너는 나에게 뭐 해줄 건지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어요. 내가 가장이 돼서 피땀 흘리며 돈 벌어 줬으면 집안 식구들은 나를 가장으로 어른으로 대우 해줘야 밖에 나가 일하는 보람이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이게 은연중에 남자들이 갖는 생각일 걸요...(뒤에 자꾸 흐려집니다.) 바로 우리 세대 50~60세 이후 세대는 남자는 허세든 허풍이든 관계없이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인식이 있고 그런 인식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요새 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여자가 돈 벌어 오면 자진해서 살림하겠다는 남자들이 많은 거 같아요. 

어쨌든 간에 양쪽 다 돈 벌면 유능한 자, 돈 못 벌면 무능한 자로 사회가 그렇게 편 가름을 자리매김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자를 가지고 연약한 그릇이라고 해서 연약한 그릇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의미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여자 자체를 연약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남자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돌보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는 그 모습을 가정 내에서 실시해야 할 책임이 남성에게 있다는 거예요. 남자가 밖에서 힘들게 돈 벌어오는 것은 당연한 거지 그걸로 유세 떨 일은 아닌 겁니다. 그리고 여자가 밖에서 돈 벌어주면 남자가 고맙게 여겨야지 그걸 “나 같은 남자니까 너 같은 여자와 결혼해줬지, 내가 인물 좀 되니까 너는 내 인물 뜯어 먹고 돈 벌어와라. 나처럼 성격이 자비롭고 온화하니까 너 같은 여자랑 살아준다”라고 이런 식으로 되지도 않는 정당성을 부여하면 안 돼요.

어쨌든 간에 여자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약한 자, 소수자 취급을 받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그것이 굳어졌기 때문에 유다 사회, 이스라엘 사회에서 여자가 발언권을 가지고 말을 한다는 것은 완전히 남자를 쪼다 만드는 의식 아니면 그럴 수는 없다고 남성들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요인이 돼요. 고린도전서 보면 그런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입 다물고 있어라. 정확히 말하면 주둥이 다물라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장로회에서 회의한 것이 다음 주 되면 다 바뀌어 있습니다. 교회에서 입 다물고 있다가 집에서 바가지 긁으면 다 바뀌게 되어있어요. 남자를 가르치고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네가 남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라고 하는데 남편이 뭐 아는 게 있어야 가르치죠.

뭐 존경할 만한 것이 있어야 뭘 배우죠. 성경을 자기보다 더 모르는데. 돈 번다고 바빠서 성경을 언제 봅니까? 여자는 할 일 없으니 맨날 성경만 보고요. 여자 쪽이 성경을 더 많이 아는데 가르칠 수가 없죠. 여호수아 남성 위주의 세계에서 이처럼 모든 것이 남자 쪽에서 계속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여자는 묻혀들어가는 거예요. 

남자가 이룬 결실에 대해서 여자가 덩달아 같이 혜택 입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기존의 겉은 이렇게 남성 위주가 되어있지만 속은 남성에 의해서 억울함을 당하고 남성이 잘한다고 으스대면서 맨날 실패할 때 오히려 연약한 쪽에서의 희생이 그 거대한 남성의 세계를 옳은 곳으로 인도하는 요소로써 여성들이 개입합니다.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으로 온다는 그 비밀이 거기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어떤 동영상에 보면 스톱워치로 동영상을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동영상이냐 하면 과일 바나나가 있으면 바나나를 1센티 잘라요. 끄트머리 자르고 난 뒤에 스톱워치로 스톱시켜 놓고 카메라로 찍고 그다음에 또 1센티 자르고 또 스톱시켜 놓고 카메라 찍고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연속적으로 쭉 연결해서 보여주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바나나 속만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게 돼요. 바나나 속만.

성경은 인간의 겉에 있는 남성 위주의 세계도 이야기하지만, 그 속을 그대로 다 보여주는 그런 동영상 같은 것이 이 성경입니다. 위세 떨고 힘으로 큰소리치는 남성 세계에서 소리소문없이 희생당하면서 꾸준하게 이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그런 여성의 이야기도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담겨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그 특이성이기 때문에 이게 반복해서 여성이 등장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이 성경의 층이 어려워요. 여성이 해놔도 그것을 남성이 다 가져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드보라 같은 경우입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여자 사사 드보라. 그런 경우 남성은 한번 불쑥 튀어나오고 바락 장군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성 앞에.

치맛자락 붙들고 “나는 용기 없으니 여자인 당신이 해주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하기 무서우니까 권사님보고 설교하라고 하고 교회 부흥되니까 그 권사는 나가라고 하고 목사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식이란 말이죠. 여자는 일회성으로 소모용으로 해버려요. 그리고 영광은 남자가 다 받아요. 그다음 차례 되면 여성 하나 등장해서 또 그런 남성의 허풍을 부끄럽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가 바로 사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갈렙 이야기가 뭐와 연결이 되느냐 하면 사사기와 연결되어요. 여기에 갈렙의 조카가 나오는데 갈렙의 동생의 아들, 그러니까 동생 그나스의 아들이 옷니엘이에요. 사사기에 최초로 등장하는 사사가 옷니엘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사사라 하는 것은 정규직이 아닙니다.

사사라 하는 것은 일회용이지 내가 승리했기 때문에 나를 왕으로 삼는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아요. 중요한 대목이라 다시 설명합니다. 3월 30일에 알았던 그 복음으로 3월 31일에 써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항상 스톱워치처럼 하루짜리 하루살이예요. 계속 잘리면서 그 날에 필요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믿음이지 그 한 것을 가지고 다음 날 써먹을 수가 없어요.

길 가다 보면 도를 아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요. 구원파. 그 사람들은 언제 구원받았는지 어떤 체험을 했는지 물어보는데 믿음을 소지하고 싶은 거예요. 소지해서 잘난 척하고 싶은 겁니다. 이미 주도권이 주님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넘기고 싶은 그런 본능이 있어요. 

갈렙과 옷니엘과 그 부인되는 악사, 이 사람들은 마치 이 시대에 약속의 땅에 있는 티브이 모니터 같은 겁니다. 켜면 나오지만 켜지 않으면 영원히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존재들. 하지만 계속해서 그 티브이에서는 켜든 안 켜든 하늘나라 방송국처럼 계속 송출하는 거예요. 남자가 잘나서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는 거.

메시아의 끈을 쫓아가면 여성이 나오지 남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 너희들이 시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고 무시하고 연약한 것이라고 2급 인간 취급했던 그 여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시는 그 원리가 갈렙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갈렙은 어느 지파냐 하면 유다 지파예요. 

그래서 왜 유다 지파가 레위 지파를 제치고 요셉 지파를 제치고 르우벤 지파를 제치고 메시아가 등장하는 핵심 중심 지파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유다 지파안에 여성의 역할이 대단하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말씀드리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1장에 보면 그 유다는 누구와 결혼했느냐 하면 이방 여인 다말과 결혼했고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가 나오는데 이게 바나나 속이에요.

바나나 속에 정통 아브라함 혈통이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적인 요소, 아브라함 혈통이라고 우겼던 그것에 무시당할만한 외부적 요소가 오히려 자칭 거룩한 백성이라고 여기는 자를 부끄럽게 만들면서 구원해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도 그 유다 자손이고요. 외부적 요소. 아까 그것을 특이성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특이한 외부적인 요소. 

주도권을 내 쪽으로 가지고 있다가 부끄러움을 당해야 해요. 우리는. ‘나 믿음 있다’라고 하다가 믿음 없다고 추궁하시는 어떤 분을 다시 만나야 해요. 그래야 주도권이 나에게서 주님에게로 바뀌는 겁니다.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자랑할 것은 우리의 못난 것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요. 

이런 예시가 요나에 나옵니다. 요나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하게 하기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이방 민족인 니느웨를 이용하십니다. 니느웨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거기에 집어넣어 버려요.

“너희들이 그렇게 개무시하는 니느웨도 회개했잖아. 너희들은 뭐 하고 있느냐”라는 말이죠. 뭐 하나님 믿는다고 하나님 백성이라고 우리에게 선지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냔 말이죠. 선지가 도망치고 있는데 그딴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한 번 우리가 백성이기 때문에 혈통적으로 백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먹어 줄 것이라는 이것은 자만입니다. 

십자가 한번 믿었으니까 그다음은 부활의 영이라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매일같이 십자가예요. 매일같이 자기 부인 되려면 십자가예요. 십자가 해서 교회 되니까 이제는 십자가 갖다 버리고 교회 붙들고 있다는 거죠. “내 교회입니다”라고 하는데 세상에 자기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교회가 복음을 가로막는 가장 주된 요인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5년에 그린 그림이 생각나요. 그 그림에 보면 그냥 평범한 길 있고 기와집 몇 채 있고, 그 그림이 자꾸 생각나는데 어제도 꿈속에 등장했어요. 그 그림을 보게 되면 그 그림에는 정적만 흘러요. 고요함. 거기에는 사건도 없어요. 길 있고 기와집 있고. 국민학교 5학년 때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이에요. 크레파스로.

이 그림은 정적과 고요함만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 그 그린 현장에 가보세요. 지금도 바빠요. 거기가면 아마 미세먼지 날릴 거예요. 현장에 가면 굉장히 미묘한 움직임이 있는데 그림속에 들어가면 그게 전부 다 없어지고 고요함만 있어요. 인간의 자아가 만든 망상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봐요.

이것 치우고, 이것 제거하고, 이것 떼 내고 하면서 우리는 자꾸 고요하고 괜찮은 존재로 정립하려는 그런 잘못이 있어요. 실제는 분주한데 우리는 분주한 것을 떼 내고 고요하고 괜찮은 이미지만 달랑 남기고 그걸 나라고 우기고 있어요. 따라서 그 정적인 것을 동적으로 바꾸는 사건, 이것이 바로 주님의 낯선 특이성의 사건을 개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딸 악사가 어떤 특이성을 보이느냐 하면 18절에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갈렙이 유다 땅을 믿음으로 차지하면서 이 땅을 차지한 사람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하니까 조카가 그걸 차지해서 딸을 얻게 되었어요. 그런데 18절에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그 다음에 뭐라 하느냐 하면 샘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집간 딸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둑년이라고 하지요. 오늘 왜 이렇게 상스러운 말이 나와서 평소 속성이 노출되는지 모르겠는데...이건 제 경험상에도 잘 아는 사실이에요. 우리 고모들이 있는데 젊은 고모들이 시집가고 난 뒤에 자꾸 친정에 와서 두리번거리며 살펴요. 혼수 다 가져갔잖아요. 

그런데 뒤에 와서 뭘 가져가느냐 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남긴 옛날 유물들이 있어요. 좀 값이 나가는. 그걸 중간 고모가 다 가져갔어요. 작은고모는 그걸 못 가져가서 무릎을 치면서 아쉬워해요. 자기가 다 가져가야 하는데 그때 자기는 시집을 안 갈 때라서. 시집 간 사람은 집에 와서 괜찮은 거 보면 다 가져가요. 아들들은 그런데 관심 하나도 없어요.

딸들은 살림을 살기 때문에 이거는 내 후손을 위해서 돈 될 듯싶은 것은 다 가져가요. KBS 진품명품이라도 나와서 얼마 나오면 돈 되니까. 끝까지 자식은 아버지 것을 약탈해 가는 존재고 부모는 또 그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악사라는 딸이 아버지에게 주제넘게 자기가 얻었던 것보다 더 요구해요. 약속은 남편에게 주기로 한 것만 주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추가적인 것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남편과 다른 통장을 갖는 거예요. 이건 지줌, 자기 주머니를 차는 거예요. 악사가 특이성을 계속 속의 원리로써 밀어붙이는 겁니다. 세상 끝날까지.

이것은 내 남편이 얻고 나는 연약한 그릇이니까 그냥 혜택만 입는 것이 아니고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자기만의 재산을 최초로 자기 등기로 해서 재산을 따로 갖는 이것이 뭐냐 하면 갈렙이 열두 정탐꾼을 보낼 때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정말 특이한 믿음을 가진 거예요. 정말 이 믿음은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인간의 믿음은 아니에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믿음이 그 안에 담겨서 그래요. 특이한 믿음이에요.

믿을만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약속 앞에서 그 약속을 포기한, 내가 믿음 없음을 인정한 믿음이에요. “나 믿음 없습니다. 있든 없든 간에 주님이 주신 것만 있으면 되지 내 믿음 굳이 가질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여기면서 나오는 결과적인 믿음, 주도권을 나에게 주지 않는 그 믿음, 그 믿음의 결실이 뭐냐 하면 악사라는 딸에게 이 약속의 땅 일부가 등기로 이전돼요.

그러면 악사라는 딸이 늙어 죽더라도 그 땅은 뭐냐 하면 남편 소유의 땅이 아니고 악사라는 딸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면서 이 약속의 땅은 믿음의 특이성이 지배하지 결코 인간의 행함이 주도권을 쥐지 않는 땅, 그게 바로 천국이고 약속의 땅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믿음,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되는 이 간단한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인지를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