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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땅(수16;1-4) 19040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4. 8. 09:37
2019-04-07 14:53:59조회 : 28         
   요셉의 땅 190407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요셉의 땅(여호수아 16: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kL0WzRzamQ, Hit:3
 이근호19-04-07 15:34 

요셉 자손의 땅 

2019년 4월 7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6:1-4 

(16:1)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곁 요단 곧 여리고 물 동편 광야에서부터 나아가 여리고로 말미암아 올라가서 산지를 지나 벧엘에 이르고 

(16:2)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사람의 경계로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16:3) 서편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사람의 경계에 이르러 아래 벧 호론 곧 게셀에 미치고 그 끝은 바다라 

(16:4)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 

안일하게 본문을 보게 되면 요셉지파는 정복전쟁에 승리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분배받은 것으로 여겨질 겁니다. 그러나 부동산을 접수했다고 해서 그 땅이 품고 있는 약속의 취지를 온전하게 한꺼번에 다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12지파마다 각자 분배받은 땅이 서로 다를 때에, 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땅의 크기나 질을 놓고 비교해 나서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견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부분으로 찾아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덮여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 일부를 건드리는 것은 곧 전체를 건드리는 겁니다. 마치 울타리에 쳐놓은 방울을 하는 건드리는 것은 집 전체에 비상벨이 울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전에서 이스라엘이 12지파로 나뉘어졌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를 비교할 수없는 처지입니다. 어느 지파는 좋은 땅을 넓게 가졌다고 해서 우쭐댈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어느 지파가 좁은 지역의 땅을 가졌다고 해서 하위 등급의 지파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땅이 ‘약속’을 구현해야 하는 땅이라는 겁니다. 개별 지파로 땅을 소지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을 보고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 연관 지으면 이러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을 소지했다고 자부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인간을 천국에 자기 몫의 지분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천국 전체가 다 주어져 있는 겁니다. 다만 그 질의 드러나는 방식이 다른 겁니다. 도시에 각 사람이 사는 집의 형태나 부엌의 형태는 다 다르지만 그 상수도 파이프를 통하는 수돗물의 질은 한결같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실을 약속은 인간이 소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다루어지는 입장에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정착지로 삼은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갈 바를 알지 못한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종 판단 내려 선택하신 결과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중간 선택이 자기 구원에 결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 지파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것이 아니요 정복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 가나안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승리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지파가 땅을 가진 것은, 유일한 승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그저 받은 겁니다. 

‘거저 받음’이 은혜입니다. ‘혜택’이라고 해봅시다. 이 ‘혜택’이 ‘혜택답게’ 되기 위해서는 인간쪽의 결정이나 선택은 무용지물이 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없는 일만을 할 뿐입니다. ‘평생 아무 것도 안 했다’가 아니라 무얼해도 ‘상관없는 일’을 해온 겁니다. 

열심히 주를 위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선택에 영향을 입히는 것도 아니요 평생 농땡이 치듯이 살아도 주님이 주신 혜택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최종 선택권은 하나님에게 있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매일같이 옳은(?) 결정을 하기 위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옳은 결정’ 자체가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주님 홀로 하셔서 친히 만드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부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함축해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옵니다. 요셉지파가 땅을 가졌다고는 하나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은, 12지파의 아버지인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자식들에게 예언한 내용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은 곧 요셉의 점령한 그 땅에 있는 기존 거주민들의 정신들과 앞으로 계속 투쟁해야 될 일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땅의 정복, 그것으로 언약이 마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지파가 가나안 거주민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다고 자인할 수 있지만 날이 갈수록 그들의 삶의 방식에 편승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차지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솜씨이기 때문이요 그 결과를 혜택으로 입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들이 받은 약속이 그 어떤 세상적 보다도 좋고 귀하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점차 이스라엘은 내부적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외곽에 있는 적들의 힘이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약속에 대해 식상한 게 문제입니다. 

신명기 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셔서 당부에 당부를 모세를 통해서 전달합니다. “절대로 이방신을 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4) 

이스라엘은 그 가나안 땅에 먼저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자신들의 마음가짐과 동화될 여지가 항상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는 있지만 실제 이스라엘 마음을 통해서 터져 나오는 것은 너무나도 가나안 족속을 닮았습니다. 곧 인간의 자기 선택과 자기 결심의 가치를 그들은 포기할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 앞에서 ‘실패자이었음’을 인정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기 싫었던 겁니다. 혜택이 혜택답고, 은혜가 은혜답기 위해서 요셉 및 여타의 지파들은 그 약속의 땅을 분배받은 겁니다. 이는 곧 약속을 분배받은 바가 됩니다. 그 약속이 약속답게 되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고 가리는지 실체험을 하게 됩니다. 

즉 나는 나 스스로의 결정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인 천국에 갈 인물이 아님을 자인해야 하는 겁니다. 이 자인은 곧 내가 하는 모든 선택과 행위와 결정이 나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음을 감사하면서 고마워하면서 인정하는 겁니다. 이게 곧 항상 나와도 전체적으로 텨져나올 약속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결정을 믿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04-07 23:09 
231강-여호수아 16장 1~4절(요셉의 땅)201904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6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342페이지입니다.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샘 동쪽 곧 여리고 곁 요단으로부터 광야로 들어가 여리고로부터 벧엘 산지로 올라가고,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족속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서쪽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족속의 경계와 아래 벧호론과 게셀에까지 이르고 그 끝은 바다라,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우리가 옛날에 이런 민족이 있었겠다는 옛날 일로 자꾸 넘겨버리려는 버릇이 있는데, 이스라엘의 상황을 모른다면 현재 성도 된 우리의 상황을 모른다는 것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이렇게 계시로 사용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스라엘 속에서 모든 변화를 주님이 주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키가 얼마나 크신지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손대심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그 변화들이 고스란히 이 이스라엘이라는 그림책에 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그중에 하나로써 요셉 자손이 약속의 땅을 할당받은 내용입니다. 분배받은 거죠. 

그런데 여기서 이런 땅을 할당받았다면 인간적인 생각에 요셉 땅은 어디서 어디까지이며, 유다 땅은 어디서 어디까지고, 베냐민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자꾸 옆에 지파를 곁눈질하기 마련이에요. 왜냐 하면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파악하기 마련이거든요. 

남이 아무도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어있어요. 실제로 지구와 달 사이에 우주를 유영하는 사람들, 우주복 입고 줄로 연결된 상태에서 밖에서 유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는 뭐가 정지되어 있으며 실제로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요. 바뀌는 변화가 없으면 자기가 여기에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셉 지파가 땅을 얻었다고 하면 다른 지파를 견주려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오류이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고 율법은 우리에게 전체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야고보서 2장에서도 나올 뿐만 아니라 율법은 부분이 아니고 전체로 다가와요. 

예수님의 일부가 우리에게 들어온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전체가 다 우리에게 들어온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분이나 일부가 우리에게 들어왔다면 내가 내 것 가진 것과 너의 것 가진 것을 자꾸 비교하게 되죠. 세 사람에게 피자를 가장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을 전에 말씀드렸는데 잊어버렸죠. 

가장 공평한 방법은 맨 나중에 피자를 분배받는 사람이 그것을 구분 짓는 거예요. 맨 나중에 분배받는 사람. 세 사람이라면 세 번째 사람에게 피자를 나누게 하면 그게 제일 공평해요. 조금이라도 크게 나누게 되면 제일 먼저 나누는 사람이 제일 큰 것을 가져가기 때문에 자기는 그만큼 작은 것을 얻게 되니, 첫째 사람과 둘째 사람이 가져가고 맨 나중에 자기가 가져갔을 때 먼저 가져간 사람의 피자와 조금도 차이나지 않을 만큼 균등하게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점이 상당히 중요한데요. 이스라엘 사람이 땅을 차지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 말이 잘못된 말이에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말은 사실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로 평생을 다 보냈다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에 있어서 내가 평생에 아무 상관도 없는 짓들만 해 온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천국 갈래? 지옥 갈래?’라는 마지막 피자 조각을 내가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이 최종적으로 선택할 자격이 있는 분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이 있는 곳, 마지막으로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가장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무것도 한 것 없고, 한 것 없는 정도가 아니고 평소에 남자만 알고 다섯 명이나 사귀고 또 여섯 번째 사귀고 있는 그 여자를 하나님께서 천국에 보낸다면 그만큼 공평한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평생을 주의 일하고, 복음 전하고, 선교했는데, 그 사람을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국 보낸다면 그것도 역시 공평한 일이에요. 그러면 두 사람을 나란히 비교해 봅시다. 평생을 자기 몸을 탐닉과 자기 몸을 쾌락의 즐기는 것으로 평생을 다 보냈고 강도나 살인자, 창기도 마찬가지고, 다른 한쪽은 평생을 어릴 때부터 모태 신앙으로써 목사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을 주를 위해 일했는데도 주께서 둘을 천국 보냈을 때는 두 사람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평생 주의 복음 전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주의 복음에 대해서 이 만큼도 보탬 되는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쳐주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런 것이 성립되려면 그 중간에 나의 선택이라는 것은 빠져야 해요. 내가 선택한다는 것은 지옥 갈 사람에게 맡기세요. 맡기시고 성도는 선택할 그런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예정. 침례교 쪽에는 그런 일이 없는데 장로교 쪽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예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론이 있어요. ‘론’자 하나 더 붙어서 하나님의 예정론이 있습니다. 그 예정론 귀신 떨쳐 보내는데 정말 오랜 세월 보냈어요. 

성경에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는데 신학에는 예정론이 있어요. 그 예정론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사적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 예정론 믿으니까 천당 갈래’라는 식으로 자기 개인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정론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거는 자기 선택이죠. 자기 선택은 지옥 갈 사람이나 하라고 하세요. 

최종 선택자는 우리 자신이 선택해서 천당 가는 거 아닙니다. 주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 거 그게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예정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맨날 주님의 선택결과만 자꾸 나와요. 주님 선택의 결과. 그러나 지옥 가는 사람은 맨날 자기가 선택했다고 해요. 맨날 내가 선택. 너 같은 여자 만난 것도 내 선택이고 너 같은 남자 만난 것도 내 선택인데 그렇게 선택한 꼬라지가 참...기껏 선택한 것이 그거냐는 말이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전체로 주어져요. 부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 주어지는 겁니다. 남의 피자나 남의 땅 면적 가지고 자꾸 곁눈질하지 마세요. 작아도 주님의 전체고, 많아도 넓어도 주님의 전체예요. 응축되어 있고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주님의 일부를 받은 것이 아니고 주님의 전부가 우리의 작은 일부를 통해서 발산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다 할 수는 없어요. 일부이지만 질적으로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 거죠. 수도관이 수도 파이프가 어느 가정에나 있더라도 나오는 물은 다 똑같은 수돗물이에요. 상수도관이 똑같으니까. 그리스도가 나오기 때문에 내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마치 결정을 잘못한 것처럼 자기 인생을 탓하게 되면 이것은 바로 주님의 주신 은혜를 탓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 상관도 없는(아무것도 안 했다가 아니라) 짓을 했을 때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혜택이라고 해요. 혜택. 우리가 흔히 통하는 용어는 은혜라고 하죠. 그런데 은혜라는 말이 너무 남발되어서 은혜라는 말을 이 시간에 잠시 바꿔서 혜택을 입었다고 하겠습니다. 혜택. 

혜택을 입었다는 것은 혜택을 입은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볼 때는 자기 딴에 뭔가 했는데, 정말 주님의 일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을 꾸준히 해 온 거예요. 그런데 우리 몸은 자꾸 내 공로로 돌리고 나도 뭔가 좀 했다는 기여도를 가지고 자꾸 하는 거예요. ‘주님 고생하라고 해서 고생했습니다. 이 고생만큼은 인정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는가 하면 ‘혜택’이 값을 잃어버리고 빛을 잃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요셉에게 준 땅, 유다에게 준 땅, 각자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안에서, 주님 주신 혜택 안에서 뭐냐 하면 우리를 패배자로 만들어요. 이게 오늘 본문에 굉장히 어려운 점입니다. 

요셉 자손이 땅을 차지했다고 하면 이건 누가 봐도 요셉, 이스라엘이 승리했다고 보죠. 맞아요. 이스라엘은 승리해요. 전체적으로 승리했는데 이제는 그 승리를 승리로 유지 시키기 위해서는 부분, 나만의 땅이라고 우겼던 그것은 실패, 실패의 반복이어야 하는 겁니다. 혜택을, 주님의 은혜를, 또는 혜택을 혜택답게 높이려면 우리는 매일같이 실패한 인생, 실패한 세월을 보내야 해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실패뿐입니다. 라면을 끓여도 실패, 파 다듬어도 실패, 우리는 매일 아이를 키워도 실패, 뭐 약 안 먹이고 자연치료 해도 실패, 과자 먹여서 얼굴 뻘겋게 올라와도 역시 실패, 거기에 조치 취해서 원상태로 돌아와도 실패, 우리는 모든 것이 실패하는 즐거움, 인생의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이것은 바로 혜택을 입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축복입니다. 정말 이건 그야말로 다행스러운 거죠. 너무너무 다행스러운 거죠. 

자기를 실패자로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과도하게 너무 가치 있게 보지 않도록 우리에게 주의 주시는 거예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매일같이 실패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눈이 번쩍 뜨이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나는 주님에게 도움이 안 되는 존재잖아.’라는 것을 계속 각인시키고 새겨주는 거예요. 

공부 1등 해도 별 의미 없고, 아들 의사 되어도 별 의미 없고, 아들 백수 되어도 별 의미 없고, 고3인데도 시험준비 하지도 않고 농땡이부리고 재수한다고 버티고 나오고, 학교 다니다가 학과가 안 맞는다고 나와서 공무원시험 준비한다고 맨날 놀기만 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나의 실패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자식들을 붙여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세상의 철학자들은 전부다 바보등신같아요. 과학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래도 내가 인정해 줄 것은 인정해 주는데, 아담스미스라는 경제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연구를 해보니까 경제란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줘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이익에 철저하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겁니다. 국부론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치과 의사가 열심히 남에게 봉사해서 치과치료비용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돈벌이하기에 바빠서 치과 건강이 날로 좋아진다는 거예요. 서로 경쟁이 되어서. 의사 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서로 경쟁해서 봉사하니까 맨날 건강 검진 문자 보내서 ‘고객님 건강 검진 날짜 되었습니다’라고 언제부터 고객이 되었는지 관리하고, 보험회사는 또 얼마나 친절한지 그들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아니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사는데 세상은 돌아가더란 말이죠. 물론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우리가 오늘 요셉 지파의 땅을 통해서 무엇과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처음 선택하실 자격이 있는 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도록 뭐라고 예언했는가를 우리가 봐야 합니다. 창세기 49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창세기 49장 이 대목은 야곱이 마지막 유언으로 유산 남기듯이 복을 남긴 대목입니다. 열두 지파에 골고루 전부 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서가 전달돼요. 이거는 ‘너는 얼마나 많이 얻었냐?’라는 곁눈질할 이유가 없어요. 각 지파마다 그리스도의 다양한 기능들이 거기에 발산되고 쏟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 집에 있는 수도관 파이프에 동일한 수돗물이 쏟아지는데 남의 수돗물이 더 맛있고 달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어느 집은 맥주 나오고 어느 집은 사이다 나오고 그런 것 없습니다. 그냥 전부 다 맹물 나와요. 하나님의 혜택은 한꺼번에 전부 다 혜택 적으로 은혜를 받은 거예요. 남의 은혜가 더 좋은 은혜고 나는 질 떨어지는 은혜이고 그런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이 없어요. 

남은 덜 고생하고 나는 더 고생한다고 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고생은 마음하기 나름이죠. 마음이 교만하게 되면 아무리 재벌 집이라도 마음고생은 심합니다. 독해요. 손녀가 아들이 마약 하고 나이트클럽 다니죠. 연예인 되려고 수천수만 명이 돈 몇천씩 써가면서 되려고 하지만 막상 유명 연예인은 나이트클럽 운영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자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옆집은 갑자기 호호하하 웃으니까 그 집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맞긴 해요. 맞는데 자기 선택권리가 계속 자기에게 있다고 우기는 사람에게 아무리 퍼부어 줘도 자기는 불행한 존재라고 느껴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복음을 알고 한 사람은 복음을 모른다면 한쪽은 울고 있고 한쪽은 울고 있어요. 

같은 가정인데도 불구하고 그래요. 하나는 주안에 있고 하나는 주 밖에 있으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을 것은 요셉이 얼마나 땅을 차지했느냐가 아니라 요셉이란 파이프를 통해서 주님은 어떤 주님으로 작용하고 그 기능이 나왔느냐를 찾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49장에 나옵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요셉이 땅을 차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요셉 땅이 되지 않고 거기서 대적해서 싸워야 할 내부적인 싸움이 요셉 땅에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 내부적인 싸움이 바로 가나안 땅 족속들의 우상 섬기기입니다. 

땅을 차지했다. 땅만 차지했겠지요. 그 사람의 마음을 지배했다. 처음에는 지배했겠지요. 하지만 지배하는 자가 지배받는 자의 그 우상에 대해서 점차 닮아가고 있는데요. 성경에도 그런 씨뿌리는 비유에 그런 비유가 나옵니다. 처음에 복음 들을 때는 천하에 복음 알고 천국 백성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인생 살면서 솔솔 우상 적인 것, 지옥 가는 요소가 솔솔 나의 내부를 통해서 계속 확산되고 번져 나오고 주변에 있는 인생을 통해서 부딪치게 될 때 세상과 접속이 될 때,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벌써 복음의 기쁨이고 뭐고 그거는 뭐 옛날에 내가 뭐 믿었었나 할 정도로 되어버리는 겁니다. 

왜냐 하면 선택지가 없이 구원되어 놓고 그다음부터는 복음 자체가 내가 선택 안 해도 되는데 물에서 건져놓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예수는 믿고 천국은 보장되었으니까 이제 남아 있는 내 인생은 내 뜻대로 해보려는 식으로 다시 세속적인 세상 적인 불 신앙적인 요소를 발휘하다 보니까 주님께서는 그걸 긁어내는 작업으로 인하여 스스로 화를 자초하신 거예요. 

모든 되어진 것이 주의 은혜로 되어졌는데 뭐가 가동되느냐 하면 ‘내가 율법의 어느 대목을 잘 지키니까 복이 오더라, 어느 대목을 어기니까 저주받더라’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은 전체로 오는 데 전체를 잊어버렸어요. 한꺼번에 전체가 오는 데 잊어버리고 내 이익을 위해서 어떤 말씀에 충실하게 되면 그게 내 이익으로 보너스로 성과급으로 주어지게 된다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고 교회 목사들이 교인들을 그렇게 세뇌를 시킨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 맞습니다만 여러분 교인들이 못사는 것은 여러분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기도를 안 하니까 헌금을 안 하니까 복을 못 받습니다”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수작을 부린 거예요. 그거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을 줬는데 땅을 간수할 능력이 없어요. 이게 빈말이 아닙니다. 신명기 7장에 나온 말인데 길어서 다 읽지는 않겠습니다. 

신명기 7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하기를 너희들이 땅만 차지하고 앉았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땅은 차지했지만, 언약이 발산 안 된다. 따라서 언약을 언약대로 발산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너희들을 죄인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너희들은 고생 좀 할 거야. 힘들 거야. 그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유가 지배해야 할 세상의 정신에 어느새 너희들이 그것에 지배당하고 말았다. 

신명기 7장에서 주께서 제일 당부하는 것은 “너희가 가서 곡식이 번성하고 잘 될 때 이것이 네가 수고해서 얻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너는 이미 그 지역의 신에게 잡아 먹힌 거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가나안 땅의 신은 어떤 신인지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에는 몰랐죠. 막상 같이 정복해서 너는 내 밑에 정복당했고 자기는 정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정복한 그 가짜 신, 우상의 정신에 완전히 물들고 말았어요. 

마치 한국 사람의 도우미로서 연변사람을 고용했는데 그 여자가 뭘 알까 하고 고용해서 일을 시켰는데 연변사람의 행동이 집주인을 전부 변화시켜놨어요. 나쁜 쪽으로. 완전히 그런 꼴 난 거죠. 점잖은 체하고 믿음 좋다고 했는데 예수 안 믿는다고 무시한 연변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도리어 자기가 다 말려든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을 이중첩자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인데 속으로는 첩자인데 어떤 첩자냐면 하나님을 괴롭히는 역할을 하는 그런 지옥 나라 스파이같은 행세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럴 때 고마운 점은 이 창세기 49장에 대한 예언이 안 죽었다는 거예요. 일괄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의 일괄 혜택이 인간의 온갖 부질없고 지저분한 나 자신의 짓거리와 관심사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틴다는 겁니다. 

오늘 낮에 기도하신 분의 기도 내용을 들어보세요. 환란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주님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게 우리의 용기나 결심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이 아니에요. 이건 주님의 예정이죠. 예정론이 아니에요. 

주님의 선택이 나를 강권하는 겁니다. 누가 더 세냐는 거죠. 내가 하는 일이 나에게 보탬이 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나에게 복을 준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내가 복 받고 내가 생존하고 내가 구원받는 것에 아무런 상관없는 짓거리만 하고 그게 우리의 주특기예요. 우리는 실패하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성공은 아예 엄두도 내지 마세요. 

내가 응원하는 프로팀 지기 마련이고, 하여튼 내가 손대면 다 실패예요. 희한해요. 내가 청소하면 먼지만 더 생길 뿐이고.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게 낫지. 내가 설거지하면 두 번 해야 해요. 제가 매일 듣는 잔소리인데. 전문가가 왜 있습니까? 내가 내 머리 손질하면 안 돼요. 전문가가 왜 있어요? 주님이 전문가잖아요. 

하늘나라 전문가는 시작도 끝도 중간도 다 전문가예요. 우리는 뭐냐? 과정입니다. 과정에 있는 사람은 자기 기억에 시달리지 마세요. 이제는 잊기만 하세요. 자꾸 잊어버리세요. 내 실패도 잊어버리고 내 성공도 잊어버리고 나의 선택과 결심도 잊어버려요. 차가 막혀서 예배 참석 못 한 것도 잊어버리세요. 

주께서 그렇게 은혜로 차 막히게 하신 거예요. 앞으로는 마라톤 기억해야 해요. 모든 것으로 하여금 우리는 실패 외에는 할 재주가 없다는 것을, 이런 실패자를 이미 일괄 최종 선택지가 너는 성공자라고 하는 그 이야기만 그 혜택과 은혜의 이야기만 계속 우리 안에 남아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요셉이 예언을 받았지만, 그것은 전쟁하는 과정의 모습을 예언을 통해서 알려 준 줄로 압니다. 저희들도 이미 구원받았지만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로를 밟아야 할지 그 예언이 우리 인생을 지배한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