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강-여호수아 17장 14~18절(땅을 더 요구함)201904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7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346페이지입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요셉 지파가 지난 시간에도 잘못하고 이번 시간에도 또 잘못을 범합니다. 그것은 땅을 더 달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땅을 더 달라고 하는 이유가 자신들은 다른 지파와 달리 복을 받았기 때문에 복 받은 티를 내야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면 인정받은 증거가 재물로든 뭐든 확실하게 누가 봐도 ‘아 복 받은 거 맞네’라고 남보다 더 차별되게 남보다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셉 지파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세상 사람들 같으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욕을 얻어먹어야 진실이 나타나요. 사람은 패배하면서 배운다고 사람이 자꾸 이기기만 하면 아무것도 배울 게 없어요. 자꾸 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서 뭐가 깨어지느냐 하면 ‘나’라고 하는 나는 이 정도 되어야 한다는 형식이 깨어집니다.
‘나’라는 형식이 갖춰져 버리면 그 형식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어버려요. 나는 이 정도 되어야 나답다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족쇄같은 걸로 작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이런 잘못을 범하죠. 옆에 지파에게 “야, 네 지파 얼만큼이야? 어디서 어디까지야? 와~ 넓다. 우리 지파는 복을 받아야 하는데 너랑 똑같아. 성질나서 가만히 못 있겠다. 여호수아에게 따져야 겠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요구가 ‘이건 잘못된 것이다. 옳지 않다’라고 그렇게 우리가 생각을 하려면 우리가 요셉 지파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 때만 그게 보이는 겁니다. 원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렵게 말해서, 땅 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땅을 거론하면서 땅의 운명은 그 위에 누가 사는가에 따라서 땅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땅 +사람’이에요.
어느 인간이 사느냐에 따라서 땅의 가치가 살아나느냐 그렇지않느냐가 판가름 나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창세기 6장에 나와 있는데 여호수아가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는 열두 지파가 그냥 토착민처럼 우리도 사람이니까 먹고 살 땅 달라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땅을 줄 이유가 없죠. 그들에게는 구현해야 할 게 있어요.
그 땅을 차지하면서 이 땅은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 위한 땅이라는 어떤 취지 같은 것이 드러나야 하는데 요셉 지파는 자꾸 나머지 지파와 비교하면서 땅을 더 달라고 했으니까 이미 그 취지가 죽은 거죠. 그래서 땅을 더 주질 않습니다. 안 주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획인데요,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라고 되어있어요.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니까 그때 땅을 달라고 하는 요셉 지파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16절에 보면 “땅을 차지하고 싶은데 그들에게는 철 병거가 있나이다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땅을 스스로 개척하기 곤란합니다”라고 하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철 병거들을 다 물러가게 해 주시고 빈 공터가 무주공산이라고 주인 없는 땅이 되게 해 주시고 그다음에 자기들이 여유만만하게 들어가 살겠다는 겁니다. 왜? 자기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왜? 자기들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요셉 지파는 복이라는 개념도 몰라요. 그래서 18절에 여호수아가 양보 없이 이야기합니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들을 쫓아내리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요새 말로 쉽게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말과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왜 너보다 강하고 센 그런 민족을 맞닥뜨리게 했는지를 놓치면 땅을 가졌더라도 그 땅에 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본심이 시편 44편 3절에 보면 그 본심이 이렇게 잘 요약돼 나옵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나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아니요”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무엇이 아니냐 하면 저쪽에서 철 병거를 가졌다 합시다. 예를 들어 탱크를 가졌다면 우리는 적어도 미사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이러한 발상은 무엇을 누락시키고 무엇을 배제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을 배제하는 샘이 되어버려요. 인간 대 인간이 해결하겠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그냥 무시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왜 하나님께서 말끔하게 요셉 지파의 땅에서 적들을 전부 다 물러가고 항복하도록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 이유는 이 구약을 봐서는 안 나와요. 신약에 보면 마태복은 12장 20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대목이 무척 어려운 대목인데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라 또한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대목이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사야 선지자가 한 이야기거든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라”
이 말이 무슨 뜻이냐. 굉장히 어려운 뜻이에요. 어려운 뜻인데 이상하게 큰 교회 장로님들이 기도 대목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어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 이 대목을 들으면 벌써 교인들 가운데 집안이 어렵다든지 힘들다든지 우한이 있는 사람들 오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자기 집안이 까딱까딱하고 있어요. 심지가 곧 꺼질 것 같아요. 그런데 장로님이 대표 기도하기를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라고 하면 ‘주여,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 주시는군요’라고 이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에요. 낙관적이고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교인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은혜롭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반대로 이해한 거예요. 반대로. 적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적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리 집안을 일으키고 우리 집안이 폭삭 망하면 안 된다고 하나님이 저를 위로해 주시고 낙관적인 희망을 제시하옵소서’라고 하는 그 생각 자체가 우리가 제거되어야 할 내 안에 있는 나를 망하게 하는 사고방식인 것을 우리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자기는 망하면 안 된다는 겁니까? 주님은 폭삭 망했는데 왜 자기는 망하면 안 되죠? 선지자들은 입을 거 먹을 거밖에 없었는데 왜 우리는 망하면 안 되죠? 왜 버티죠? 버틸만한 권리라는 것이 있습니까? 자기 주제를 몰라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는 이유는 네 자신이 상한 갈대인 것을 자각하지 않고 있기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꺾여도 진작 꺾여야 하는 존재인 것을 왜 너는 모르느냐는 겁니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기어이 내가 너는 상한 갈대인 것을 알려주겠다는 뜻으로 이사야를 통해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누구보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스라엘은 자기가 하나님 편이고 이방 민족은 적이라고 본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을 손대지 않고 오히려 이방 민족인 앗수르, 바벨론, 바사, 이런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되려 공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어떤 점을 누락시켰고 하나님의 본심보다는 내 욕망, 내 욕심, 세상 적인 탐욕, 떵떵거리면 살고 싶은 본능을 포기 못 하면서 신에게 아부해서 복이라도 따내려고 그런 시도를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미 이방화 되었단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너희들만 모르고 있단 말이죠. 하늘의 천사도 알고 있는데.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그러니 성도 맞지요?’라고 생각하지만, 성도라면 적어도 요셉 같은 사고는 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살림살이 나아지게 해달라는 그런 것 가지고 주 앞에 쪼르륵 나온다는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의 대상이에요. 멸망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뭘 놓쳤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빛과 오른손과 팔을 완전히 놓쳐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불가능한 한계까지 밀어붙이십니다. 원래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한계를 느끼기 위해서 육이라는 것이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육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구약이라 성령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이건 말씀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힘 또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의 한계, 그 당시 백성들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세상 살면서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합니다. 어느새 우리는 그것을 닮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말씀을 모르는데도 교회를 안 다니는데도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살 때 되게 부럽죠. 결과만 보고.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잘 사는 것은 바로 성도를 위함입니다. 심판 때까지 간수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부럽다는 말은 네가 평소에 주님 자체를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말씀 자체를 고마워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네 모습이라는 겁니다. 전부를 주었는데 쓰레기를 좋아하고 있더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줬거든요. 전부를 다 줬단 말이죠.
천사들이 성도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천사들 자체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천사들이 성도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심부름 열심히 했던 우리 천사보다도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상속자,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모든 영광을 천하의 죄인들에게 몽땅 다 공유하고 신부라는 이름으로 안겨주니까 이건 천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월등하게 더 많은 것을 받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천사가 주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누구까지 섬기느냐 하면 성도까지 섬기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천사들이. 천사들이 성도의 시다바리죠. 이러한 것에 우리가 눈을 못 뜨고 있습니다. 세상이 분량적으로 양적으로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우기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육의 세상적인 세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항상 진실이라는 것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요셉 지파와 여호수아의 차이를 여기서 발견해야 해요. 그 발견하는 방법은 이 땅이라는 것을 여호수아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성경에서도 언급해 놓았어요.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뭐냐고 성경에서 언급한 대목이 있어요.
그게 바로 멜기세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게 어렵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어렵다고 판정하고 단정 짓는 이유가 있어요. 그만큼 인간은 땅에서 모든 것을 승부 걸고 땅에서 성공하려는 그런 사고방식을 못 버리기 때문에 멜기세덱이 갖는 위상을 별로 중요치 않게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 창세기 14장부터 나오는 원래 땅의 의미는요, 원래 땅의 의미라 하는 것은 땅과 접속되고 연결되는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땅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 위해 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살다 보면 이 땅에 누가 오느냐 하면 땅에 속하지 않는 족보에 속한 분이 이 땅을 방문하는 체험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등장한 땅에 속하면서도 땅에 속하지 않는 초월적 초재적 존재가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늘의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의 제사장이라고 표현하는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나오는데 그건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제사장들은 그냥 변하고 소실되고 소멸되는 겁니다. 영원한 것을 붙잡으려면 멜기세덱의 반열, 족보를 따라오신 분을 붙잡는데 그분이 어디까지 내려오냐 하면 인간들이 그렇게도 못 떠나는 땅에까지 내려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논리가 있느냐 하면 멜기세덱이 매개인처럼 하늘에 있는 분이 땅에 박히게 되면 멜기세덱이 박혀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뭐가 확대되느냐 하면 그 안에 내려온 내용이 멈추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 퍼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밖으로 퍼져 나와요. 퍼져 나오고 모집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백성을 거기에 모집하는 겁니다.
자신이 늘 변하고 늘 우유부단하고 종잡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다 오라는 겁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여기에 박혀있다는 겁니다. 멜기세덱이 거주하는 땅이름대로 다윗이 수도를 정하는데 그 도성 이름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왜냐 하면 멜기세덱이 누구냐 하면 살렘왕 멜기세덱입니다.
이 약속의 땅이 왜 있느냐. 거기서 예루살렘을 거기에다 수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이 열두 지파 땅 중에서 어디에 세워지는가? 놀랍게도 요셉 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의 땅에 예루살렘이 있게 돼요. 하나님이 어디에 거하느냐에 따라서 주도권이 그쪽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주도권이. 아직 제가 설명 안 한 것이 있어요.
시편 44편 3절을 설명 안 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나니”라는 이 대목을 지금 설명을 안 하고 있어요. 유다 자손이 있는 그 예루살렘에서 멜기세덱의 반열을 쫓아가는, 시편 110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오게 되어있어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본성상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예루살렘이 땅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땅에서 철수.
나무꾼과 선녀라는 옛날 동화에서 옷을 훔치잖아요. 그런데 그 동화에서 부인이 3년 살다가 옷 찾고 난 뒤에는 어디로 올라갑니까? 다시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 버리죠. ‘난 너하고 안 논다’라는 말이죠. 옷 괜히 줘서 그 옷 입고 올라가 버리잖아요.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실 때 일을 마무리 짓고 올라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제거되어야 하냐면 그 멜기세덱에 반열에 속한 족보 말고 다른 족보는 다 제거되어야 해요. 그 다른 족보가 뭐냐 하면 바로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육에 속한 족보입니다. 유다, 열두 지파, 전부 다 육에 속한 족보입니다. 육에 속한 족보는 전부 다 제거가 되고 오직 멜기세덱 족보만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땅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땅이 왜 그 작업을 해야 하느냐 하면 창세기 6장에 보면 거기에 땅이 뭐가 문제인지가 나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딸들이 나니 하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니 이는 그들에게 육체가 됨이라”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땅이라는 것을 땅에서 자기 백성 만들기 전에 먼저 하늘에 있는 천사들 이 존재들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인하여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먼저 알려줘요. 그래서 자식들이 태어났는데 그 자식들이 네피림이에요. 그들이 한때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신의 시대에서 영웅의 시대로 넘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신의 시대에서 영웅의 시대.
그리고 창세기 10장에 보면 함의 자손 가운데서 10장 8절에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라고 해서 사냥을 잘하므로 사람들에게 우대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고 봤는데 그의 고향이 어디냐면 바벨이에요. 바벨탑을 세운 이유가 다 내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에게 올라갈 것인지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세상에 대한 엉망진창 때문에 창세기 6장 5절부터 보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해 버려요. 물로써 심판할 때에 거기 6절에 보면 “땅위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땅에 기는 것과 공중에 새까지 그러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잘못했으면 사람만 처벌하면 되는데 사람만 처벌한 것이 아니고 “육축과 땅에 기는 것과 공중에 새까지 그러하리라”라는 이것은 바로 땅의 세계가 중심점이 뭐냐에 대해서 세상은 멸망할 것인가 존속할 것인가가 인간이 거기에 하나님이 심어준 사람에 의해서 결정 난다는 거예요. 인간이.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금 굉장히 바빠요. 뭐가 바쁘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호수아 같은 또는 갈렙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거기에 심어놓고 그다음에 그 사람은 하늘의 멜기세덱, 시편 110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팔과 오른손으로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증거 하고 고백할 사람을 예루살렘에다 예루살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심어놓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 이건 초월적인 거죠. 그럼 땅에는 뭐냐. 영웅들이에요. 철 병거, 발달된 무기, 요새 같으면 핵폭탄 수소폭탄 같은 거, 게임이 안 되죠. 상대도 안 돼요. 그런데 요셉 지파에게 네가 그걸 물리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요셉 지파는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깁니까? 못 이기죠. 인간의 힘으로 안 되잖아요. 시편 44편 3절에 보면.
사람의 힘으로 안 되고 칼로 안 되고 “저희가 자기 칼로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라고 되어있다고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설교를 좀 길게 복잡하게 했는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육으로 구원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자기 육으로.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 육의 한계를 들춰내게 하시는 겁니다.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하고 하는 그런 게 소용없어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족보가 아담의 족보예요. 될 수가 없어요.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 소풍갈 때 난감한 일이 있었어요. 형이 소풍 가는데 국민학교 학생도 아니면서 유치원이나 들어갈 나이인데 형이 소풍가니까 자기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딱 보니까 엄마가 형 소풍 간다고 가방에 김밥 넣고 삶은 고구마, 달걀, 말표 사이다 넣고 하니까 어린 애도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똑같이 해요. 소풍에다가. 뭐가 필요한지.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내가 흉내 내고 기도할 때 기도하고 헌금할 때 헌금하고 교회 다니고 장로 목사 다 되고 권사 되고 다 해요. 그런데 뭘 몰라요? 자기 한계를 몰라요. 자기는 유치원생이라는 거. 이 소풍의 대상자가 아니라는 거. 요셉 지파가 땅을 차지하는 자기 능력으로 하는 거, 이거는 실패해야 합니다.
결국 실패해요. 다 쫓아내지 못합니다. 실패해야 합니다. 실패해야 하는데 그게 우리의 남은 인생이에요. 제발 실패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믿음에 성공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믿음 내가 성공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이 아프면 교회 못 나오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릅니다. 하고 싶어요. 바르게 살고 싶고 착하게 살고 싶고 믿음대로 살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의 능과 우리의 힘과 우리의 요령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저는 여기까지네요’라는 고백.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여기까지입니다. 복음 찾아왔는데 여기까지. 복음 찾았다고 거듭난 거 아니거든요. 여기까지. 복음하고 공부하고 백날 해도 그것은 내 한계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촉구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자체도 실패의 일종에 불과한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정신의 무게는 정말 가벼워요. 왜? 그동안 쓸데없이 조마조마하고 마음졸이면서 살아왔잖아요. 성경 3장 봐야 하는데 바빠서 못 보면 그다음 날 한 장 더 해서 4장 읽으면서 ‘헉헉, 주여 급하게 4장까지 읽었습니다. 오늘은 숙제 마감했습니다’라는 이런 식으로 아침에 30분 해야 하는데 29분 50초 했다고 10초는 다음날 연장해서 30분 10초하고 자기 규약과 자기 법칙은 아무짝도 쓸모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하게 하세요. 왜? 그런 식으로 우리의 끝을 보게 하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잘나고 네가 얼마나 믿음 좋고 대단한 존재인지 그거는 네가 아직도 심판받아야 할 대상인 것을 느끼게 하기위해서 줄곧 주께서는 죽을 때까지 백세 되어서 부를 때까지 계속 그 일을 반복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요셉에게도 고마워해야 해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땅 더 다오. 나는 복 받아야 하겠다’라는 이 외침이 아직도 우리 안에 여호수아로서 쓸 편지로 살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수상한 땅, 물로 멸망한 땅, 나중에는 불로써 멸망할 땅인데 그 땅에서 자기가 기꺼이 승리자로 이겨냈다고 자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땅과 더불어 우리도 실패자요 한계자 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33강-여호수아 17장 14~18절(땅을 더 요구함)201904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7장 14~18절입니다. 구약성경 346페이지입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 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요셉 지파가 지난 시간에도 잘못하고 이번 시간에도 또 잘못을 범합니다. 그것은 땅을 더 달라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땅을 더 달라고 하는 이유가 자신들은 다른 지파와 달리 복을 받았기 때문에 복 받은 티를 내야지 않겠는가 하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면 인정받은 증거가 재물로든 뭐든 확실하게 누가 봐도 ‘아 복 받은 거 맞네’라고 남보다 더 차별되게 남보다 더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요셉 지파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세상 사람들 같으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진실이라는 것은 욕을 얻어먹어야 진실이 나타나요. 사람은 패배하면서 배운다고 사람이 자꾸 이기기만 하면 아무것도 배울 게 없어요. 자꾸 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서 뭐가 깨어지느냐 하면 ‘나’라고 하는 나는 이 정도 되어야 한다는 형식이 깨어집니다.
‘나’라는 형식이 갖춰져 버리면 그 형식이 우리에게 우상이 되어버려요. 나는 이 정도 되어야 나답다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족쇄같은 걸로 작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도 똑같이 이런 잘못을 범하죠. 옆에 지파에게 “야, 네 지파 얼만큼이야? 어디서 어디까지야? 와~ 넓다. 우리 지파는 복을 받아야 하는데 너랑 똑같아. 성질나서 가만히 못 있겠다. 여호수아에게 따져야 겠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요구가 ‘이건 잘못된 것이다. 옳지 않다’라고 그렇게 우리가 생각을 하려면 우리가 요셉 지파와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 때만 그게 보이는 겁니다. 원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렵게 말해서, 땅 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땅을 거론하면서 땅의 운명은 그 위에 누가 사는가에 따라서 땅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땅 +사람’이에요.
어느 인간이 사느냐에 따라서 땅의 가치가 살아나느냐 그렇지않느냐가 판가름 나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창세기 6장에 나와 있는데 여호수아가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는 열두 지파가 그냥 토착민처럼 우리도 사람이니까 먹고 살 땅 달라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땅을 줄 이유가 없죠. 그들에게는 구현해야 할 게 있어요.
그 땅을 차지하면서 이 땅은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의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 위한 땅이라는 어떤 취지 같은 것이 드러나야 하는데 요셉 지파는 자꾸 나머지 지파와 비교하면서 땅을 더 달라고 했으니까 이미 그 취지가 죽은 거죠. 그래서 땅을 더 주질 않습니다. 안 주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획인데요, “네가 스스로 개척하라”라고 되어있어요.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니까 그때 땅을 달라고 하는 요셉 지파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16절에 보면 “땅을 차지하고 싶은데 그들에게는 철 병거가 있나이다 막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땅을 스스로 개척하기 곤란합니다”라고 하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철 병거들을 다 물러가게 해 주시고 빈 공터가 무주공산이라고 주인 없는 땅이 되게 해 주시고 그다음에 자기들이 여유만만하게 들어가 살겠다는 겁니다. 왜? 자기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왜? 자기들은 복을 받았기 때문에.
요셉 지파는 복이라는 개념도 몰라요. 그래서 18절에 여호수아가 양보 없이 이야기합니다.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들을 쫓아내리라”라고 이야기를 해요. 요새 말로 쉽게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말과 똑같아요. 하나님께서 왜 너보다 강하고 센 그런 민족을 맞닥뜨리게 했는지를 놓치면 땅을 가졌더라도 그 땅에 살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여호수아의 이러한 본심이 시편 44편 3절에 보면 그 본심이 이렇게 잘 요약돼 나옵니다. “저희가 자기 칼로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나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라고 되어있어요. “아니요”라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무엇이 아니냐 하면 저쪽에서 철 병거를 가졌다 합시다. 예를 들어 탱크를 가졌다면 우리는 적어도 미사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이러한 발상은 무엇을 누락시키고 무엇을 배제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을 배제하는 샘이 되어버려요. 인간 대 인간이 해결하겠다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그냥 무시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왜 하나님께서 말끔하게 요셉 지파의 땅에서 적들을 전부 다 물러가고 항복하도록 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예요. 그 이유는 이 구약을 봐서는 안 나와요. 신약에 보면 마태복은 12장 20절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대목이 무척 어려운 대목인데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라 또한 이방인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대목이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사야 선지자가 한 이야기거든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라”
이 말이 무슨 뜻이냐. 굉장히 어려운 뜻이에요. 어려운 뜻인데 이상하게 큰 교회 장로님들이 기도 대목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어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면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한다” 이 대목을 들으면 벌써 교인들 가운데 집안이 어렵다든지 힘들다든지 우한이 있는 사람들 오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금 자기 집안이 까딱까딱하고 있어요. 심지가 곧 꺼질 것 같아요. 그런데 장로님이 대표 기도하기를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라고 하면 ‘주여,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 주시는군요’라고 이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에요. 낙관적이고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으로 기도를 하게 되면 교인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은혜롭게 들리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반대로 이해한 거예요. 반대로. 적을 심판하지 않는 것은 적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우리 집안을 일으키고 우리 집안이 폭삭 망하면 안 된다고 하나님이 저를 위로해 주시고 낙관적인 희망을 제시하옵소서’라고 하는 그 생각 자체가 우리가 제거되어야 할 내 안에 있는 나를 망하게 하는 사고방식인 것을 우리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자기는 망하면 안 된다는 겁니까? 주님은 폭삭 망했는데 왜 자기는 망하면 안 되죠? 선지자들은 입을 거 먹을 거밖에 없었는데 왜 우리는 망하면 안 되죠? 왜 버티죠? 버틸만한 권리라는 것이 있습니까? 자기 주제를 몰라요.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는 이유는 네 자신이 상한 갈대인 것을 자각하지 않고 있기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꺾여도 진작 꺾여야 하는 존재인 것을 왜 너는 모르느냐는 겁니다. 시간을 질질 끌면서 기어이 내가 너는 상한 갈대인 것을 알려주겠다는 뜻으로 이사야를 통해서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누구보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이스라엘은 자기가 하나님 편이고 이방 민족은 적이라고 본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 민족을 손대지 않고 오히려 이방 민족인 앗수르, 바벨론, 바사, 이런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되려 공격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정신을 못 차려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서 어떤 점을 누락시켰고 하나님의 본심보다는 내 욕망, 내 욕심, 세상 적인 탐욕, 떵떵거리면 살고 싶은 본능을 포기 못 하면서 신에게 아부해서 복이라도 따내려고 그런 시도를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미 이방화 되었단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너희들만 모르고 있단 말이죠. 하늘의 천사도 알고 있는데.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그러니 성도 맞지요?’라고 생각하지만, 성도라면 적어도 요셉 같은 사고는 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살림살이 나아지게 해달라는 그런 것 가지고 주 앞에 쪼르륵 나온다는 그 자체가 바로 심판의 대상이에요. 멸망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뭘 놓쳤느냐 하면 하나님의 얼굴빛과 오른손과 팔을 완전히 놓쳐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불가능한 한계까지 밀어붙이십니다. 원래 인간의 육이라는 것은 한계를 느끼기 위해서 육이라는 것이 있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육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구약이라 성령이 오기 전이기 때문에 이건 말씀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힘 또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의 한계, 그 당시 백성들의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우리가 세상 살면서 여러분들이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말씀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합니다. 어느새 우리는 그것을 닮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되어버렸어요. 말씀을 모르는데도 교회를 안 다니는데도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살 때 되게 부럽죠. 결과만 보고.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잘 사는 것은 바로 성도를 위함입니다. 심판 때까지 간수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부럽다는 말은 네가 평소에 주님 자체를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말씀 자체를 고마워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네 모습이라는 겁니다. 전부를 주었는데 쓰레기를 좋아하고 있더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줬거든요. 전부를 다 줬단 말이죠.
천사들이 성도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천사들 자체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천사들이 성도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심부름 열심히 했던 우리 천사보다도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상속자, 천국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모든 영광을 천하의 죄인들에게 몽땅 다 공유하고 신부라는 이름으로 안겨주니까 이건 천사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월등하게 더 많은 것을 받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천사가 주님을 섬기다가 이제는 누구까지 섬기느냐 하면 성도까지 섬기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천사들이. 천사들이 성도의 시다바리죠. 이러한 것에 우리가 눈을 못 뜨고 있습니다. 세상이 분량적으로 양적으로 더 가져야 행복하다고 우기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육의 세상적인 세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항상 진실이라는 것은 차이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요셉 지파와 여호수아의 차이를 여기서 발견해야 해요. 그 발견하는 방법은 이 땅이라는 것을 여호수아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성경에서도 언급해 놓았어요.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뭐냐고 성경에서 언급한 대목이 있어요.
그게 바로 멜기세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게 어렵다고 성경에 나와 있는데 어렵다고 판정하고 단정 짓는 이유가 있어요. 그만큼 인간은 땅에서 모든 것을 승부 걸고 땅에서 성공하려는 그런 사고방식을 못 버리기 때문에 멜기세덱이 갖는 위상을 별로 중요치 않게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 창세기 14장부터 나오는 원래 땅의 의미는요, 원래 땅의 의미라 하는 것은 땅과 접속되고 연결되는 그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땅이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기 위해 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살다 보면 이 땅에 누가 오느냐 하면 땅에 속하지 않는 족보에 속한 분이 이 땅을 방문하는 체험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등장한 땅에 속하면서도 땅에 속하지 않는 초월적 초재적 존재가 멜기세덱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늘의 제사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의 제사장이라고 표현하는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나오는데 그건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제사장들은 그냥 변하고 소실되고 소멸되는 겁니다. 영원한 것을 붙잡으려면 멜기세덱의 반열, 족보를 따라오신 분을 붙잡는데 그분이 어디까지 내려오냐 하면 인간들이 그렇게도 못 떠나는 땅에까지 내려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는 어떤 논리가 있느냐 하면 멜기세덱이 매개인처럼 하늘에 있는 분이 땅에 박히게 되면 멜기세덱이 박혀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뭐가 확대되느냐 하면 그 안에 내려온 내용이 멈추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 퍼져 나오게 되는 겁니다. 밖으로 퍼져 나와요. 퍼져 나오고 모집하게 되어있어요. 자기 백성을 거기에 모집하는 겁니다.
자신이 늘 변하고 늘 우유부단하고 종잡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다 오라는 겁니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여기에 박혀있다는 겁니다. 멜기세덱이 거주하는 땅이름대로 다윗이 수도를 정하는데 그 도성 이름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왜냐 하면 멜기세덱이 누구냐 하면 살렘왕 멜기세덱입니다.
이 약속의 땅이 왜 있느냐. 거기서 예루살렘을 거기에다 수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그 예루살렘이 열두 지파 땅 중에서 어디에 세워지는가? 놀랍게도 요셉 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의 땅에 예루살렘이 있게 돼요. 하나님이 어디에 거하느냐에 따라서 주도권이 그쪽으로 넘어가 버립니다. 주도권이. 아직 제가 설명 안 한 것이 있어요.
시편 44편 3절을 설명 안 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나니”라는 이 대목을 지금 설명을 안 하고 있어요. 유다 자손이 있는 그 예루살렘에서 멜기세덱의 반열을 쫓아가는, 시편 110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오게 되어있어요.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본성상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예루살렘이 땅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땅에서 철수.
나무꾼과 선녀라는 옛날 동화에서 옷을 훔치잖아요. 그런데 그 동화에서 부인이 3년 살다가 옷 찾고 난 뒤에는 어디로 올라갑니까? 다시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 버리죠. ‘난 너하고 안 논다’라는 말이죠. 옷 괜히 줘서 그 옷 입고 올라가 버리잖아요. 내려오셨다가 올라가실 때 일을 마무리 짓고 올라가시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제거되어야 하냐면 그 멜기세덱에 반열에 속한 족보 말고 다른 족보는 다 제거되어야 해요. 그 다른 족보가 뭐냐 하면 바로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육에 속한 족보입니다. 유다, 열두 지파, 전부 다 육에 속한 족보입니다. 육에 속한 족보는 전부 다 제거가 되고 오직 멜기세덱 족보만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땅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땅이 왜 그 작업을 해야 하느냐 하면 창세기 6장에 보면 거기에 땅이 뭐가 문제인지가 나옵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딸들이 나니 하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니 이는 그들에게 육체가 됨이라”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땅이라는 것을 땅에서 자기 백성 만들기 전에 먼저 하늘에 있는 천사들 이 존재들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인하여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먼저 알려줘요. 그래서 자식들이 태어났는데 그 자식들이 네피림이에요. 그들이 한때 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신의 시대에서 영웅의 시대로 넘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신의 시대에서 영웅의 시대.
그리고 창세기 10장에 보면 함의 자손 가운데서 10장 8절에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라”라고 해서 사냥을 잘하므로 사람들에게 우대를 받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고 봤는데 그의 고향이 어디냐면 바벨이에요. 바벨탑을 세운 이유가 다 내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신에게 올라갈 것인지를 생각하는 거예요. 이러한 세상에 대한 엉망진창 때문에 창세기 6장 5절부터 보면 세상을 물로써 심판해 버려요. 물로써 심판할 때에 거기 6절에 보면 “땅위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땅에 기는 것과 공중에 새까지 그러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이 잘못했으면 사람만 처벌하면 되는데 사람만 처벌한 것이 아니고 “육축과 땅에 기는 것과 공중에 새까지 그러하리라”라는 이것은 바로 땅의 세계가 중심점이 뭐냐에 대해서 세상은 멸망할 것인가 존속할 것인가가 인간이 거기에 하나님이 심어준 사람에 의해서 결정 난다는 거예요. 인간이.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금 굉장히 바빠요. 뭐가 바쁘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여호수아 같은 또는 갈렙 같은 믿음이 있는 사람을 거기에 심어놓고 그다음에 그 사람은 하늘의 멜기세덱, 시편 110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오른팔과 오른손으로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증거 하고 고백할 사람을 예루살렘에다 예루살렘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심어놓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니 이건 초월적인 거죠. 그럼 땅에는 뭐냐. 영웅들이에요. 철 병거, 발달된 무기, 요새 같으면 핵폭탄 수소폭탄 같은 거, 게임이 안 되죠. 상대도 안 돼요. 그런데 요셉 지파에게 네가 그걸 물리칠 수 있다고 본 거예요. 요셉 지파는 대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깁니까? 못 이기죠. 인간의 힘으로 안 되잖아요. 시편 44편 3절에 보면.
사람의 힘으로 안 되고 칼로 안 되고 “저희가 자기 칼로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라고 되어있다고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설교를 좀 길게 복잡하게 했는데요,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육으로 구원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자기 육으로.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 육의 한계를 들춰내게 하시는 겁니다.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하고 하는 그런 게 소용없어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족보가 아담의 족보예요. 될 수가 없어요.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 소풍갈 때 난감한 일이 있었어요. 형이 소풍 가는데 국민학교 학생도 아니면서 유치원이나 들어갈 나이인데 형이 소풍가니까 자기도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딱 보니까 엄마가 형 소풍 간다고 가방에 김밥 넣고 삶은 고구마, 달걀, 말표 사이다 넣고 하니까 어린 애도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똑같이 해요. 소풍에다가. 뭐가 필요한지. 사람의 힘으로 능으로 내가 흉내 내고 기도할 때 기도하고 헌금할 때 헌금하고 교회 다니고 장로 목사 다 되고 권사 되고 다 해요. 그런데 뭘 몰라요? 자기 한계를 몰라요. 자기는 유치원생이라는 거. 이 소풍의 대상자가 아니라는 거. 요셉 지파가 땅을 차지하는 자기 능력으로 하는 거, 이거는 실패해야 합니다.
결국 실패해요. 다 쫓아내지 못합니다. 실패해야 합니다. 실패해야 하는데 그게 우리의 남은 인생이에요. 제발 실패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믿음에 성공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믿음 내가 성공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이 아프면 교회 못 나오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릅니다. 하고 싶어요. 바르게 살고 싶고 착하게 살고 싶고 믿음대로 살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의 능과 우리의 힘과 우리의 요령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저는 여기까지네요’라는 고백.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여기까지입니다. 복음 찾아왔는데 여기까지. 복음 찾았다고 거듭난 거 아니거든요. 여기까지. 복음하고 공부하고 백날 해도 그것은 내 한계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을 촉구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자체도 실패의 일종에 불과한 겁니다.
그럴 때 우리의 정신의 무게는 정말 가벼워요. 왜? 그동안 쓸데없이 조마조마하고 마음졸이면서 살아왔잖아요. 성경 3장 봐야 하는데 바빠서 못 보면 그다음 날 한 장 더 해서 4장 읽으면서 ‘헉헉, 주여 급하게 4장까지 읽었습니다. 오늘은 숙제 마감했습니다’라는 이런 식으로 아침에 30분 해야 하는데 29분 50초 했다고 10초는 다음날 연장해서 30분 10초하고 자기 규약과 자기 법칙은 아무짝도 쓸모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하게 하세요. 왜? 그런 식으로 우리의 끝을 보게 하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잘나고 네가 얼마나 믿음 좋고 대단한 존재인지 그거는 네가 아직도 심판받아야 할 대상인 것을 느끼게 하기위해서 줄곧 주께서는 죽을 때까지 백세 되어서 부를 때까지 계속 그 일을 반복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요셉에게도 고마워해야 해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땅 더 다오. 나는 복 받아야 하겠다’라는 이 외침이 아직도 우리 안에 여호수아로서 쓸 편지로 살아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수상한 땅, 물로 멸망한 땅, 나중에는 불로써 멸망할 땅인데 그 땅에서 자기가 기꺼이 승리자로 이겨냈다고 자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땅과 더불어 우리도 실패자요 한계자 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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