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유다의 땅(수15;1-5) 1903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3. 25. 07:49
2019-03-24 15:41:28조회 : 28         
   유다의 땅 19032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유다의 땅(여호수아 15: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CXqtwg4Kwo, Hit:3
 이근호19-03-24 15:52 
유다의 땅 

2019년 3월 24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5:1-5 

(15:1)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은 에돔 지경에 이르고 또 남으로 신 광야까지라 

(15:2) 그 남편 경계는 염해의 극단 곧 남향한 해만에서부터 

(15:3) 아그랍빔 비탈 남편으로 지나 신에 이르고 가데스 바네아 남편으로 올라가서 헤스론을 지나며 아달로 올라가서 돌이켜 갈가에 이르고 

(15:4) 거기서 아스몬에 이르고 애굽 시내에 미치며 바다에 이르러 경계의 끝이 되나니 이것이 너희 남편 경계가 되리라 

(15:5) 그 동편 경계는 염해니 요단 끝까지요 그 북편 경계는 요단 끝에 당한 해만에서부터 

전쟁이 끝난 후, 제일 먼저 유다지파가 땅을 제공받습니다. 이러한 순서가 중요한 것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보이게 되는 역사가, 야곱 언약의 본질의 맥을 중심적으로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즉 유다가 차지하게 되는 그 땅에서 약속의 핵심과 관련된 일들이 중심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땅이 그냥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어야 하고, 이스라엘에 속한 인물들이 그냥 인물들이 아니라 약속된 인물들이어야 합니다. 땅+인물+약속=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여기서

‘약속’이 땅과 인물을 덮치게 되면 기존의 땅과 인물과는 전혀 다른 차별화된 땅과 인물이 됩니다.
즉 약속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땅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약속이 구현됩니다. 


유다지파가 유난히도 약속의 핵심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옵니다.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마 1:2) 유다가 12지파에 중심에 올라선다는 것은 맏이 자리의 변동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49:3에 보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에 의한 축복나열에서 유다지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창 49:9) 즉 사자새끼라는 역할을 약속 차원에서 수행하는 지파라는 말입니다. 

사자 새끼같은 기능은 기존의 것을 빼앗는 기능입니다. 미가 5:8-9에 보면, 장차 이스라엘의 남은자들의 기능이 이 기능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네 손이 네 대적 위에 들려서 네 모든 원수를 진멸하기를 바라노라” 

저돌적이고 주저하지 않고 적을 공격하여 빼앗아버리는 그 성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남은자로서 보존되는 겁니다. 이는 ‘싸우는 민족’,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부합되는 본질을 보여줍니다. 기존에 과거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땅과 인원수를 챙긴다고 해서 계속 이스라엘이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먼 미래로부터 끌어 당기는 식으로 하늘나라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육의 의식은 과거의 것을 추려서 가장 온전하고 진리성에 있는 것만 모아서 미래를 나아가는 추진력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누가 미리 끌어당겨주는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본인의 실력과 재주와 지혜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도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편 78:67-68에 보면,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택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이 손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취지에 ‘선택’이라는 용어에 담겨있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재주는 아담에게서 전수받은 겁니다. 하지만 선택은 기존의 아담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에게서 주어진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기존의 아담의 요소가 강력하게 훼방하고 나서는 겁니다. 따라서 장자의 자리 변동을 필수적입니다. 처음부터 세상적인 안목에서 다 정해놓은 것처럼 보여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이삭의 아들 가운데 분명 누가 봐도 먼저 태어났기에 장자라고 여겨지는 것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입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즉 인간들이 어쩔 수없는 한계를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시켜버립니다. 

약속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들에게 있어 원주민 안내인처럼 출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3명의 천사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미지의 세계의 존재가 찾아오므로서 이 지상에서 수정이 일어납니다. 인간들이 기대치와는 달리 도리어 기대치를 무산시키시는 의도로 사건이 우발적으로 주어집니다. 

특히 유다가 차지하게 되는 땅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만나는 거처가 담겨 있습니다. 스가랴 2:12-13에 보면,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바로 제가 인용해드린 그런 예언적인 사실을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사회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있으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기거하고 있는 현 주거지를 약속의 땅이라고 여기시고 메시야가 왕림하신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다윗의 자손’은 다윗지파에 의해서 배격 당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들이 ‘약속’을 ‘역사’로 바꾼 겁니다. ‘약속’을 ‘역사’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해도에 의해서 ‘선택’을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인간의 한계요 아담의 한계였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혈육적인 다윗의 후손들에게 당하신 겁니다. 

이로서 유다지파는 한계를 돌파하는 극복점을 가진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미래로부터 출발해야 했던 그들은 비로소 역사의 중심을 얻은 겁니다. 비록 그들은 가해자의 처지이지만 자신이 생각한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수용해야 하는 겁니다. 자기 파괴의 현장에 자신들이 기꺼이 인정하고 동참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스가랴가 예언한 ‘예루살렘 되기’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예루살셈에 사는 영적 유다자손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약속이란 인간의 지혜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로 인해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내민 시도를 도로 거두어들여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선택의 결과입니다. 이 안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도 나올 수가 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근호19-03-24 21:00 
229강-여호수아 15장 1~5절(유다의 땅)201903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5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341페이지입니다. 

“또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남쪽으로는 에돔 경계에 이르고 또 남쪽 끝은 신 광야까지라, 또 그들의 남쪽 경계는 염해의 끝 곧 남향한 해만에서부터, 아그랍빔 비탈 남쪽으로 지나 신에 이르고 가데스 바네아 남쪽으로 올라가서 헤스론을 지나며 아달로 올라가서 돌이켜 갈가에 이르고, 거기서 아스몬에 이르러 애굽 시내로 나아가 바다에 이르러 경계의 끝이 되나니 이것이 너희 남쪽 경계가 되리라, 그 동쪽 경계는 염해이니 요단 끝까지요 그 북쪽 경계는 요단 끝에 있는 해만에서부터” 

처음으로 유다 자손이 모든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땅을 분배받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이야기는 여호수아 14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땅 할당받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제일 먼저 유다 지파가 여기 등장합니다. 유다 지파가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순서가 먼저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하는데 지파가 총 13 지파입니다. 

각 지파에 파견근무하고 있는 레위 지파를 빼면 12 지파가 되는데, 12 지파에서 어느 지파가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핵심이 어느 지파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가를 파악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 하면 유다 지파는 그냥 보통 인간이라고 보지 말고 유다 지파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언약적 본질과 성질이 그 지파로 하여금 이 땅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유다 지파를 생각할 때 유다의 아버지가 있죠.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가 이삭이고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대해 처음으로 구체적인 언급을 한 것은 바로 아브라함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네 자손이 번성하고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어요. 

약속이 뭐냐? 세상에 나와서 실체가 되는 그 구체적인 약속이 뭐냐 하면 땅과 인물의 만남입니다. 약속의 땅과 약속된 인물의 만남. 땅과 인물이 만남에서 기존의 있던 인물과 기존에 있던 땅의 결합을 의미하느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물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된 자의 인물이고 여기서 땅이라 하는 것은 약속된 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을 풀이하면 땅과 인물과 그리고 약속. 약속이 땅과 인물의 어떤 본질을 규정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땅과 인물은 이 땅에 눈에 띄고 보이는 것이고 약속은 뭐냐 하면 미지의 것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에서 약속을 가지고오신 분은 세 명의 천사였습니다. 천사라 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살고있는 사람이에요. 인간이 알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그 미지의 세계가 보이지 않으면 인간은 그냥 그 나라를 없는 나라로 간주해요. 왜냐 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경험주의자이기 때문에 경험되지 않으면 없는 거예요. 없는데 불쑥 그 천사들이 등장하면서 단순히 천사만 등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천사가 속해있는 세상이 분명히 있음을 알리면서 찾아오는 거예요. 천사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그쪽 세계에 있고 미지의 세계에 있는 겁니다. 

보통 19세기 중후반에 영국이나 미국에서 지구상에 남아 있는 대륙들 가운데 미지의 땅을 탐험하기 위해서 탐험가들을 굉장히 많이 보냈어요. 땅을 탐사하고 지도 만들고 지도 만들어서 거기에다가 어떤 농산물을 재배할 때 식민지 경제가 활성화 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자국의 경제적 부를 증가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부를 증가해야 군대와 국력이 강해지고 다른 나라까지 잡아먹을 수 있기때문에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랬습니다. 그 탐험가들이 지도에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도를 만들어야 하는데 만들려면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냐면 그 미지의 세계 출신자들, 현지인을 안내자로 고용을 해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약속의 세계라는 것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땅과 그리고 같은 인간 그것이 전부예요. 여기에 뭔가 보태는 것은 이건 사기꾼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로부터 사기꾼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을 무서워해서는 안 돼요. 세상 것이 잘 되기 위해서 성도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성도라는 거, 약속의 인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없다는 말이 뭐냐 하면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지요. 육에 속한 거예요. 육에 속해있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더해 버리면 그 육에 속하는 것에 뭐가 흐르느냐 하면 미지의 세계에 내용물이 약속된 땅과 인물 내에서 계속 세상 끝날 때까지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그것을 발췌해 내야 하고 그걸 뽑아낼 줄 알아야 해요. 야곱의 아들 12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언약의 핵심을 12 지파 가운데서 어느 지파를 중심 지파로 삼아서 거기에 그것을 전부 다 집어넣었겠는가? 그게 유다 지파입니다. 최종 결승전에서 유다 지파냐 요셉 지파냐를 하면서 최종 결승점에 올라갔는데 하나님께서는 요셉 지파를 꺽어 버리고 유다 지파를 올려 세웠습니다. 

그 이야기가 시편 78편 67절에 나옵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에브라임은 요셉의 아들이죠. 요셉의 장막이랑 같은 이야기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둘이 경쟁 붙여서 누가 누가 훌륭한가를 비교한 것이 아니에요. 택했다는 겁니다. 택했다는 말은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본질을 인간의 허락도 없이 인간 속에 집어넣는걸 ‘택했다, 예정했다, 또는 선택했다’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구원은 강제 구원이에요. 본인의 의사에 따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쑥 들어온 거예요. 쑥 들어와서 구원했는데 이걸 누가 제일 싫어하느냐 하면 쑥 들어옴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이 아주 발작을 일으켜서 강렬하게 여기에다 항의합니다. 모태신앙이 어떠니, 주일학교 봉사부터 해서 50년 교회 다녔다는 둥, 개척교회를 열두 군데를 했다는 둥, 3대째 목사 집안이라는 둥, 신학 박사 학위가 몇 개나 된다는 둥 이런 식으로 따지는데 그런 박사 학위나 목사 자격증이나 교회 봉사한 것은 그건 전혀 구원에 보탬이 안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체험학습 한 거죠. 

십일조 하는 거나 헌금 하는 것은 전혀 내 구원에 보탬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나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가려왔다는 것을 자백해 내기 위한 자백 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용지물. 소용없는 거죠. 여기서 우리가 그러한 헛짓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왜냐 하면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서 헛짓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기때문에. 오히려 헛짓만 하는 것이 자연인이고 헛짓 안 하고 주께서 쑥 들어왔다는 것이 우리가 현지인 같아요. 마치 원주민 같은 안내장 역할을 맡은 겁니다. 

세상의 원리는 딱 네 자로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각자도생. 너무 고급스러운 문자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각자도생.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각자 살기로 결심하는 겁니다. 식구가 다섯이 있다면 어릴 때는 식구가 모여 살았지요. 어릴 때는 늘 모여 살며 “엄마 아빠 너무 좋아요”라고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사십쯤 되면 각자도생해야 해요. 

광산 김씨처럼 매일우유 선전 나와서 같이 어울리고 그러지 말고 각자도생해야 해요. 나중에는 부모가 육체 건강하니까 돌봐주고 손자라도 봐주고 하지 힘들면 귀찮고 귀찮고 귀찮고 귀찮으니 모든 것이 귀찮으니라. 전도서 1장. 모든 것이 귀찮아요. 심지어 내 몸도 귀찮아요. 빨리 데려갔으면 싶고. 이게 인물입니다. 이게 무슨 약속이고 무슨 천국을 뚫어내겠다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 거예요. 쓸데없는. 

그러면 유다 지파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가. 있지요. 유다 지파는 장차 나타날 약속과 육과 만나는 지점이 유다 지파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을 장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느냐 하면 신약에 최종적으로 주께서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을 때 최종적으로 왔을 때 신약성경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두 개의 족보가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의 족보는 다윗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아담 쪽으로 흘러가는 족보예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잠시 보겠습니다. 교회 처음 나오는 사람이 성경 처음 볼 때 제일 먼저 접하는 것이 지루한 족보 이야기부터 하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뜻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어요. 

신약의 특징은 뭐냐 하면 미래를 중심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의 생각은 과거 중심, 과거에서 순차 적으로 내려온다고 보는데 신약은 원래 하나님의 모든 약속 진리가 드러나게 되면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끌어당기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구원은 주께서 끌어당기는 것이지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이 어디냐고 찾지 마세요. 우리가 찾는 좁은 길은 넓은 길입니다. 길은 없어요. 왜냐 하면 돌발사태라는 것은 사건이 주어질 때만 열리고 그 후에는 그 현장에서 떠나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요설교 때 말씀드린 것처럼 천사가 오더라도 그 천사는 한 번 야곱과 만나지 그다음부터는 그 현장에 아무리 수사대 보내서 탐사해도 없습니다. 

엘리야의 시체도 백날 찾아봐야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체 백날 찾아도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의 빈 무덤은 어디 있느냐. 지금 여러분들이 빈 무덤이에요. 예수님의 빈 무덤이라고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안치하고 있는 관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약속된 약속과 우리 같은 인물, 육체인 인물과 그리고 하나의 미지의 땅의 만남 결합이라는 거죠. 이게 아브라함의 약속이죠. 

여기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형제들을 낳는다고 하지 않고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라고 하죠. 유다와 그 밴드. 이거는 여담입니다만 안 들어도 그만인데 밴드 중에 ‘장미여관’이라는 밴드가 있어요. 그 장미여관 밴드는 밴드 리더 혼자 돈 다 벌어와요. 돈은 혼자 다 벌어 오는 데 자기가 말을 무심코 했어요. “돈은 내가 벌어도 항상 똑같이 갈라 먹자”라고 처음엔 그렇게 약속했는데 인간의 약속은 미완성 아닙니까? 결국에 돈은 자기가 버는데 남이랑 같이 나누다가 좀 그랬는지 밴드가 해체되는 거예요. 

꼭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지파와 그 밴드, 유다 지파와 그 형제들이에요. 원래 유다 지파는 장자가 아닙니다. 창세기 49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자를 육의 관점에서 장자를 누구로 보느냐 하면 르우벤으로 본 거예요. 왜냐 하면 제일 먼저 태어났으니까. 제가 아까 한 말을 다시 이야기하면 인간 세계에서는 순서가 과거 것이 우선이 되는 거예요. 먼저 태어난 것이. 야곱과 에서 중에 누가 장자냐 하면 처음에 태어난 에서를 장자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이게 순서가 미래에서 밀려오게 되면 끌어당기는 식이 되면, 에서가 나중이고 야곱이 먼저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긴다는 것이 이미 그 약속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단 말이죠. 제일 마지막이 가장 정답이에요. 제일 마지막 아담이 누구시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앞에 있는 모든 아담을 아담이 아니라고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그건 인간도 아니란 말이죠. 흙이란 말이죠.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마지막 이름으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마지막은 시작은 내가 아담으로 시작했지만 예수님께 골인될 것을 믿는 것이 신자잖아요.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바뀌고 교체되는 과정입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몸은 허접하더라도 내 안에 예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예수님이 아무리 내가 몸이 천식 걸려서 약 8가지 먹고 해도 주님의 몸의 허약함은 나보다 더 심했다는 말이죠. 우리는 늙어 죽지만 주님은 찔려 죽었잖아요. 억울하게 죽었잖아요. 우리는 별로 억울한 것도 없어요. 창세기 49장에 보면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르우벤은 나의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그다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기력의 시작이다” 

야곱이 갖고 있던 힘의 제일 첫 열매가 바로 르우벤이라고 했어요. 그 첫 열매를 가지고 맏물이라고 해요. 맏물. 또는 맏이. 대표자가 되는 겁니다. 그 안에 아버지의 모든 정보는 맏이에게 몰빵 되어 있어요.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제가 지난 시간 이야기했지만, 자식 여러 명 있어도 부모는 맏이만 최고라고요. 

“혹시 목사님 가정에 얽힌 사연이나 상처받은 거 있습니까?”라고 언급하시는데 맞습니다. 아멘.(^^) 맏이는 그렇게 애를 먹여도 계속 맏이예요. 르우벤이 바뀝니다. 르우벤 및 형제가 아니고 유다및 형제로. 그러면 유다는 이렇게 바뀌는 조짐이 창세기 49장에 축복 가운데서 나오고 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라”라고 하면서 정복하는 최고 정예의 사람이다. 

따라서 가나안땅을 약속의 땅으로, 일반 땅을 약속의 땅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약속의 땅의 성격과 가까운 사람, 그래서 정복을 먼저 할 수 있는 사람은 르우벤 지파가 아니고 바로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에게 땅이 제일 먼저 분배되는 것은 정당하죠. 사자라 하는 것은 전쟁할 때 삼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미가 5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야곱의 남은 여러 나라 가운데와 많은 백성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 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라고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 정복하는 장차 기존의 땅을 약속의 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싸움꾼, 사자같이 용맹스러운 싸움꾼으로서 정복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약 마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에요. 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비 약속이지만 내 안에 있는 것은 약속이라서, 약속이 작동하는 순간 비 약속은 이길수가 없게 되어있어요. 그건 이유가 있어요. 인간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그냥 인간은 맹탕이 아니고 거기에 무슨 바이러스가 들어 있어요. 

악마가 따먹으라고 했던 인간 속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이 들어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선악 논리인데 악마가 주특기로 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는 선과 악을 가지고 지적하는 거, 그거 잘하거든요. 욥에 대해서도 지적했잖아요. 욥이 잘 먹고 잘사니까 하나님 믿는 거라고 계속해서 흠집 내고 지적하는 거, 그게 사탄의 주특기입니다. 자꾸 십자가마을에서 그런 사람 찾지 마세요. 그게 악마가 하는 짓이니까.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유다 안에 뭘 넣었느냐 하면 백신을 집어넣어서 바이러스에 백신을 가동시키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못 낫다. 어쩔래?”라고 나오는 거예요. 백신의 속성이 아주 멋있습니다. 지적질 하면 “그래 나 못 낫어.” “너는 복음도 몰라” “그래 나 복음도 몰라” 이게 성도잖아요. “너 예수 안 믿어?” “그래 나 예수 안 믿어” 

세상에 예수 안 믿는 것만큼 위대한 신앙이 어디 있어요? 최고입니다. 이건 뭐 성령의 역사니까 흉내도 못 내요. 아주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 예수 믿어서 구원 못 받아. 왜냐, 주님이 나를 알기 때문에” 주님 앞에 다가가다가 자기 손을 거두는 겁니다. 이 부질없는 손을 거두는 겁니다. 이런 짓 안 해도 구원받는데 내가 왜 예수 믿는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여,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라는 이런 자신감 없어요? 이런 당당함. 이런 당당함 없으면 종교인들에게 당합니다. 교회에 당하고 목사 장로에게 당합니다. 같은 교인들끼리 당합니다. 후달립니다. 그건 곧 그들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잘난 내가 못난 나를 계속 핍박하는 식이에요. 

남 욕하지 말고 내가 그동안 나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가를 생각해 봐야 해요. 스가랴 2장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여기 약속이 유다 지파의 본질에 있다는데, 말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유다 땅에 특수한 장소가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의미 있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요.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이에요. 스가랴 2장에 예언된 겁니다. 하나님의 예언된 것은 취소되거나 취하하거나 이런 거 없어요. 필이 이루어집니다. 그 유다 지파의 예루살렘에 있어서 우리는 그야말로 남은 자, 모든 지파가 다 잘려도 유다 지파 살아 있으면 희망이 있다고 믿었던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고 철벽 수비 들어간 겁니다. 

어느 누구라도 신학박사들 나와라. 우리에게는 예루살렘이 있다. 지금 우리가 독도를 실효적으로 점령하잖아요. 현재 예루살렘을 정치적으로는 구분했지만 실효적으로 유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실효적으로 접수하고 있어요. 수상이 가서 이스라엘지역인 황금돔에 가서 내가 구경하겠다고 비키라고 하고 구경하고 내려오고 해요. 

왜냐 하면 암시를 하는 겁니다. 너희들 백날 있어도 이 황금돔사원도 여기 땅도 다 이스라엘 부동산이라고 이미 결정해 버린 겁니다.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서 6일 전쟁부터 해서 얼마나 많은 전쟁을 합니까.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니까.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 중심으로 흘러가게 했고 유다 지파를 통해서 누가 오느냐 하면 메시아가 온다는 철석같은 유대 신학입니다.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유다 자손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했어요. 유다 자손으로 왔는데 유다 사회가 유다 자손의 메시아를 죽였으니까 이거 큰일 난 거예요. 그들은 육이 아니라고 하면서 육을 쥔 겁니다. 계속해서 과거에서부터 흘러와서 미래를 모르고 과거로부터 아주 정확한 자료와 자료를 모아서 미래를 예측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예측. 합리적 인식을 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누가복음 3장에 보면 거기는 누가복음 나름의 족보가 또 나옵니다. 그 족보는 지금부터 아담까지 차고 올라오는 족보지요. 거기 34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야곱이고 그 이상은 이삭이고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라고 되어있거든요. 근데 33절에 보면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유다로부터 그다음이 야곱으로 통하고 그 이상은 이삭이고 아브라함이고 결국 아담까지 통하는 겁니다. 

다른 노선은 가라는 말이죠. 대표 노선이 유다 노선이라는 겁니다. 유다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거기에 유다 지파와 대조되는 지파가 존재합니다. 그 지파는 바로 레위 지파예요. 레위 지파는 율법의 중심 지파. 율법이 가동되도록 거기에 전념하는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다른 지파는 그 거룩한 제사 기구를 만지지를 못해요. 만지면 죽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겁니다. 마치 일당 독재처럼 레위 지파 독재 체제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복음적으로 봐서는 미래에서 봐서는 그 레위 지파들이 그런 중심으로 하는 것은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가치 있는 일을 하려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한계를 넘지 않으면 기존 가치는 소용없다는 겁니다.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려면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그게 모험가들이 나올 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돼. 가치 있는 일은, 이 세상에서 예상도 못 한 일은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라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겁니다. 

율법대로 살고 십일조하고 온갖 것하고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고 다 하는데, 그 한계는 한계에 머물면 안 되고 극복하는 것은 약속이 찾아 들어야 해요. 그 약속은 내가 한계에 머물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는 백신이 없고 내가 하는 일로 구원받는 다는 바이러스만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 준거예요. 

그래서 유다 지파는 유다 지파 자체가 한계였습니다. 유다 지파를 찢고 나오는 유다 지파, 유다 지파가 기다리는 메시아 노선이 아닌 다른 영적인 노선과 마주쳐야 해요. 유다 자손이면서 유다 자손으로부터 유다 자손이 할 일은 유다 자손인 메시아를 죽이는 역할을 유다 자손이 함으로써 비로소 유다 자손은 육적인 한계의 값을 다 치른 거예요. 

자기 티를 다 낸 겁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세요. 말하는 투가 좀 수상하죠. 열심히 하세요. 열심히 하시고 나쁜 길로 안 가도록 조심하고 악은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하세요. 그러나 그것이 마귀 보기에 칭찬스럽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너의 그런 짓마저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한계가 진짜 유다 자손,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이제는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루살렘 들어있고, 성전 들어있고, 주님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가 애써 숨기고자 했습니다. 그 대신 남들 앞에 내 자랑했습니다. 주여, 이 자랑 할 수밖에 없음 자체를 놔두고 그것이 죄가 나온 것으로 이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