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강-여호수아 18장 3~6절(나머지 땅 분배)201904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8장 3~6절입니다. 구약성경 346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 자기 지역에 있고 요셉의 족속은 북쪽에 있는 그들의 지역에 있으니,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
땅이 어떤 땅이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살수있는 땅입니다. 땅에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오늘날 신약 입장에서 참 이해되기가 어렵습니다. 옛날의 땅은 특정 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그 땅을 차지 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흘러가는 강물에다가 자기 자리를 표시해 보세요. 불가능하지요? 이 물에서 저 물까지가 내 자리라고 하면 강물이 흘러가면서 나도 같이 흘러가는데 어디가 내 물이라는 것이 내 영토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미 구약 지나서 신약에 오게 되면 땅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땅에 기거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안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땅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흘러가는 강물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걸 흐름이라고 하는데 흐름에 있는 모든 속한 것들은 다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그런 말이 있죠.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춰버렸는데 우리 세월은 왜 고장도 안 나고 안 멈추느냐는 겁니다. 사실은 이미 멈춰졌어요.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내 땅이라는 자체가 성립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꾸 땅에서 자기 거처나 자기 영토를 얻고자 하는 것으로 봐서 이건 분명히 구약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구약을 통해서 신약에 와야 하거든요.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땅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신약에 있는 것은 이미 우리는 땅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 두 차이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사시다가 약속의 땅을 포기하신 경우가있어요.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이 땅에 계시다가 더러워서 안 살겠다고 떠나버리셨어요.
그 점을 우리가 구약에서 찾으면서 땅이 이 땅 말고 영원히 거할 땅은 흐름이 아닌 진짜 영원히 고정된 영원한 삶을 위한 다른 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주지가 변한 것처럼 같이 변해야 해요. 우선 하나님의 거주지가 변했다는 말은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만 쉽게 한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거주하는가? 성전에 거주합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거주한다는 것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거죠.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몽땅 하늘로 올라간다면 거기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하나님도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이동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생각할 거예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늘에 사시지 않았습니까?’라고 생각하는데 처음부터 하나님이 하늘에 사신 것이 아니에요. 땅에 거처를 마련하러 오신 겁니다. 그 거처가 뭐냐 하면 다윗 언약, 성전 언약이라고 보시면 돼요. 하나님은 이 땅에 언약대로 성취하셔서 그 성취된 지점을 자기 영원한 거처로 잡아 버린 겁니다.
확보하시고 그 확보한 것에다가 자기 백성들을 주변에 둘러치는데 자기 백성들을 놓을 때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 뭐냐 하면 열두 지파이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자기 백성들을 둘러치는 겁니다. 여러분이 요한 계시록에 144,000 생각하시면 간단하죠. 144,000. 열두 지파가 12000명씩 해서 하나님의 예루살렘을 구성한다는 거예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예루살렘을 도시형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전문용어로 도시형 예루살렘이 뭐냐 하면 천국은 도시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요한 계시록에 21장에 보면 예루살렘 성이 나오는데 보석으로 만들어졌어요. 12개의 문이 있고 12개의 문이 하나의 도시로 되어 있어요. 지난 수련회에 아가를 했는데 아가를 보면 거기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그 도시에서 사랑하는 솔로몬과 사랑받는 술람미 여인이 밀고 당기고 쫓아다니는 밀땅이 있어요. 내 사랑하는 여인은 어디로 갔느냐고 하면서.
그래서 광야에서 자연에 있던 사람이 도시에 왔을 때는 그만큼 도시가 위태롭다고 되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동네가 하나님 살만한 동네가 못되어요. 인간들 자체가 위태롭기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살려고 하다가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들과 같이하면 할수록 인간들의 범죄와 인간의 죄가 너무 깊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으면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인간들은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될 수가 없어요. 인간의 힘으로.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제가 한가지 예를 들게 되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우리나라에 박수근 씨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어요.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 작품가로 돈을 제일 많이 받는 화가입니다. 그 사람은 옛날에 이미 죽었고 그 사람이 화가들에게 주는 상이 있어요. ‘박수근 상’이라고.
올해의 수상자가 수상소감이 이렇습니다. 아주 재미있어서 기억하는데 그 여자 화가이자 조각가인데 그 사람이 5년 전에 자동차가 반파되는 큰 사고를 당했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고 난 뒤에 자기가 어떤 심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가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예의나 미안함은 필요치 않다는 것을 느꼈답니다. 남에게 예의 차리거나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정리하게 되면 이미 죽은 자가 아니면 천국에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거처인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땅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갖는 아담이 갖는 잠재적인 죄는 죄다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죄다 끄집어내 줘야 해요. 그 약속의 땅에서.
오늘 제목이 나머지 땅 분배인데 제목이 굉장히 수상하잖아요. 원래 계획은 열두 지파가 모세가 지도그려 놓고 다 분배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나머지 땅의 분배, 그것도 오늘 본문처럼 일곱 지파만 들어가느냔 말이죠. 이게 므낫세와 갓 반지파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않고 목초지를 보고 난 후에 갑자기 ‘나 살고 싶다’라는 욕심이 발동해 버린 거예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시는 땅이에요. 그러면 그 곁에서 우리가 살면 되는데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죄가 없으신 분이에요. 죄가 없으신 분과 같이 살려면 백성들도 죄가 없어야 해요. 죄가 없이 하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한 것이 뭐냐 하면 제사법이라는 겁니다.
제사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미흡하고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 못 하니까 날마다 제사 드려서 함께 살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것이 모세의 제사법이었는데 그 모세의 제사법을 그들이 성전 짓기 전부터 제사법을 드렸는데 이게 자꾸 하다 보니까 식상해져서 상투적이 되고 말았어요. 마음과 진정으로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오늘이 안식일이니 또 가게 문 닫아야지’라는 식으로 식상하고 상투적이 되고 말았어요.
인간이 행동할 때마다 감사하고 진정으로 회개가 되어야 할 텐데 똑같은 행동을 반복으로 하다 보니까 이건 뭐 건성 건성으로 그냥 넘어간 거예요. 그만큼 인간에게는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이야기가 히브리서에 나오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제사장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처음엔 정신 바짝 차리고 드리죠. 나중에는 소주 한잔 먹고 제사 드리다가 두 제사장도 죽어버리고 또 그만큼 제사장이 연약하다고 되어 있어요. 연약.
인간의 힘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저력은 전혀 없는 겁니다. 이런저런 방법도 없고. 그런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구약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라는 그 지평 위에서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 보면 모형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모형은 땅도 모형이지만 거기 있는 제사장도 모형이고 거기 있는 양도 모형이고 성전도 모형이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모형이에요.
모형이라는 말은 그냥 연기하고 연극 하는 거예요. 드라마 연기하고 연출하는 겁니다. 그쪽에서 나쁜 짓 한다고 실제로 나쁜 사람 아니에요. 우리가 구약에서 사울 왕은 지옥 간다고 그렇게 단정 짓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나쁜 역할을 한 거예요. 이러면 안 된다는 그런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쁜 짓 한다고 지옥 가고 착한 짓 한다고 천당 가는 그런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그냥 우리 주어진 환경 따라 던져진 존재로서 역할만 했을 뿐이에요. 그러면 천국 구원은 어떻게 되느냐. 그건 성령이 와야 해요. 내가 어떻게 몸부림치고 내가 노력한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면 뭘 알 수 있느냐 하면 ‘아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역할에 불과했구나’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역할이 아니고 그 전부터 역할이었어요. 이게 디모데전서에서도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는 포행자요, 살인자이지만 그것조차도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사 그 일을 하게 하셔서 때가 되어 다메섹 내려가는 길에 만나게 하신 거예요. 전부 다 소급하는 거예요. 소급해서 보면 우리는 전부 다 모델이고 모형이라니까요.
아담 자체가 모형이듯이 우리도 같은 모형 속에 있는 모형들이에요. 그래서 여호수아에서 나머지 땅을 분배한다는 말은 르우벤이나 갓 지파 이런 사람들은 전쟁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는 생각 안 하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거예요. ‘야, 여기 목초지 괜찮다. 우리의 가축과 양 여기 있으면 좋겠다.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를 우리땅으로 주세요’라고 그렇게 탐을 낸 거죠.
그러니까 그 지파 빼고 그다음 요셉 지파 정했으니까 빼고, 유다 지파 정했으니까 빼고, 레위 지파 정했으니까 빼버리니까 나머지 일곱 지파 남은 겁니다. 나머지 일곱 지파에서는 원래는 땅을 본인들이 정복한 땅을 자신들이 차지하게 되어 있는데 이미 오늘 본문쯤에 와서는 그들은 정복할 마음도 없고 그들은 전쟁하는 것도 지겹고 남하고 싸우는 것도 싫고 힘든 일은 하기도 싫은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 쫓아내지도 않았어요. 대충 여호수아가 불러모아 가지고 얼추 정복된 땅을 일곱 지파가 나눠버린 겁니다. 그것도 제비뽑기로 나눠버린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네가 역량 것 점령한 땅이 네 땅이 된다고 하다가 이제는 제비뽑기에 들어가 버려요. 끝 무렵에 파장되니까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구약의 모형이니까 구약 이야기이고 그럼 신약에서는 이 천국이라는 것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하느냐. 그러면 우리도 제비뽑아서 하느냐. 요한 일서 5장 18절에 보면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게 그냥 얼른 들으면 기분 좋은 말이기도 하지만 기분 좋다는 것은 내가 그것이 실감나야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난자마다 범죄 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으니까 ‘아, 나는 어제도 죄 안 짓고 오늘도 죄 안 짓고 죄가 뭐예요? 나 죄를 안 지어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시면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실제로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욕심내잖아요. 시도 때도 없이. 왜? 세상 자체가 광야이고 세상 자체가 유혹이기 때문에.
신상 보세요. 신상. 백화점에 신상 나오면 탐욕 안 나오겠어요? 100만 원짜리 계획하고 백화점 가보세요. 간 것이 잘못이었어요. 바로 옆에 350만 원짜리 있는데 ‘아, 내 인생이 100만원 짜리 밖에 안 되나...저걸 대출해서라도 사든지 해야지’라는 욕심이 갑자기 생긴다니까요. 젊을 때 같으면 비키니 옷장에다 그냥 버너만 갖추고 살림살이해보세요. 그것도 감지덕지 감사하며 살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도 결혼 그렇게 시작하는 줄 알았죠. 그런데 광주 가서 김을수 집사님 말 들어보니까 TV가 최소가 65인치짜리라는 거예요. 그게 돈이 얼마나 비싸겠어요. 아파트도 허름한 아파트 사서 둘이 오순도순 살면 될 텐데, 젊은 신혼치고 새 아파트만 선호하니 옛날 구닥다리 아파트가 팔릴 리가 있습니까? 정말 욕심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혹이구나.
한 번 어지간한 유혹 받아 봤다 해서 유혹 안 받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유혹을 받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욕심은 끊임없이 생기는 겁니다. ‘이 정도 하면 되었지’라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취미생활 하다가도 나중에 그 취미생활이 재미 하나도 없으면 나중에 또 찾아다닙니다. 기왕이면 돈 좀 더 드는 취미생활. 본래 돈이 들어가면 좀 더 짜릿한 취미가 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난 자마다 범죄 치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알아요.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누가복음 23장 34절이 있는데요. 그 말씀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짓을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라는 대목이에요.
인간들은 유혹에만 정신이 빠져있어요. 자기가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숨만 쉬는 것도 얼마나 고마워해야 하는 줄 모르고 그저 새로운 유혹 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인기 가수가 되었으면 그저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서 겸손하게 살면 되는데 버닝썬인지 뭔지 마약 한다고 돌아다니고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해요? 돈 좀 있다는 거죠. 감당을 못해요. 감당을. 돈이 있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인간의 유혹과 새로운 자극에 대해서는 인간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뭐냐, 소위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물리쳐야 할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 민족들로 하여금 관심사를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고 우리가 산다는 생각으로 바뀐 거예요. 이 땅은 주님이 활동하는 영역이라는 건 생각을 못 하고 내가 살아야 할 내 장소라고 우기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 범죄 아닌 곳이 하나도 없이 다 범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왜 요한 일서에서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느냐면 그것은 에스겔 47장을 통해서 보게 되면 이해됩니다. 에스겔 47장에 새 언약이 오게 되면 어떤 혜택이 있느냐 하면 1절부터 보면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무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서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허리까지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니까 이제는 건너지 못할 물이 되었더라”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성전에서 나왔단 말이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 생각하면 딱 맞아요. 끊임없는 생수가 나와서, 어디서? 성전에서, 성전이 누구신데? 예수님,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끊임없이 생명수가 흘러 나와서 나중에는 우리가 알아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 물에 오히려 완전히 잠겨 버립니다.
그래서 요한 일서 5장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 치 아니한단 말이죠. 죄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죄 안 짓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네가 범죄 치 아니하도록 주님이 친히 지키신다는 말이고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신다는 거예요. 요한 일서 5장 18절에 계속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지는 게 아닙니다. 이미 성령이 오게 되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생수가 터져 나오는데 이 생수는 터져 나올 때마다 우리 역량으로 우리 힘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영생을 얻을 자격이 못 된다는 것을 늘 깨닫게 될 때 무엇에 감사하느냐 하면 범죄 치 아니하는 사람으로 늘 지켜준 그 점이 굉장히 감사하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죄지으면 같이 못 있어요. 천국에는 죄 있는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완벽한 거룩함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사전에 하나님의 조치가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해요. 우리가 사는 곳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에서 이 지상으로 성령을 보냈으면 이미 우리 자신이 성령의 전이 되고 우리 안에서 나 죄 되게 짓고 생각하는 것이 다 유혹이고 세상 적인데 죄가 없다고 하니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것을 안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정말 알 사람이 없어요. 찬송가 가사처럼 우리 받은 이 큰 사랑은 목숨 줘도 얻을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았어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일요일 아닙니까? 이제 문 열고 나가면 시작되는데 이 큰 사랑을 놓칠까, 잊어버릴까, 이 사랑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서 염려되지 않을 수 없죠. 제가 걱정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이 사랑을 잊어버려 놓고 뭐 몸이 아프다고, 돈이 없다고, 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뭐가 어찌어찌 하다고 짜증을 내니, 도대체 하나님과 같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데 말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두신 이유가 아직도 모형임을 계속 들추어내어서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음을 깨닫도록 그러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가 이 땅에 몸을 두고 살아가시게 하신 줄로 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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