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8a 부산강의 : [시편]18(11편)-다윗 없는 다윗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11편 할 차례지요. 다윗의 시라고 돼있습니다. 시편에서 해석의 관건은 어떻게 우리가 성도 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느냐와 관련돼있어요. 우리가 천국 갈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지옥에 왔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 오시지 아니하면 내가 살던 고향 이 동네가 지옥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게 돼요. 지옥에 살던 사람은 이미 천국과 결별된 상태기 때문에 담이 막혀 있어요. 경계선이 쳐져 막혀 있는 상태에요.
그 막혀 있는 상태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22절에 나오지요. 요샌 성경구절이 아슬아슬해요. 맞는 게 이상할 정도로. 23,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부부를 쫓아버렸다. 우리가 굉장히 유념해야 돼요. 함께 못 살겠다는 것, 나가라. get out 꺼지란 말이죠. 나가라. 너는 나와 함께 기거할 수 있는 그런 본질을 갖고 있지 않는 것.
그러면 여기서 결별이죠. 하나님 계시는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이 결별된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지 얼마나 강한지요, 천사들을 통해서 오늘 길목을 강력하게 차단했습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이란 불붙은 천사들이 못 오도록 지키는 거예요. 이 경계선이 고정돼있는 것이 아니고 극단적으로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경계선 자체가 움직여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등장한다는 말은 이 차이성, 경계성, 차단성을 끝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흔히 제가 그런 예를 드는데 젊은 남녀가 사귈 때 사귀는 장소가 축대 있는 골목길이어야 돼요. 개 오줌 누는 전봇대 있고, 그리고 분위기는 70년대고 아가씨 집은 옛날 동네쯤에 있어야 돼요. 아가씨는 남자가 싫다는데 자꾸 남자가 집적대면서 사귀자고 옵니다. 여자가 기어이 싫다고 하니까, 싫다는 말이 뭡니까? 네 영역과 내 영역은 철저하게 차단돼있다. 너와 관계를 틀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니까 남자 쪽에서 화가 나서 여자를 밀어붙이는데 축대가 왜 필요하냐 하면 축대까지 밀어붙여요. 마치 뽀뽀라도 할 기세로 막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는 물러설 때가 없으니까 완전히 궁지에 몰리겠지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창세기 3장 23, 24절에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뜻의 등장입니다. 네가 신을 찾는다는 자체가 반칙이라는 거예요. 신은 이미 차단했는데 인간 쪽에서는 이 차단을 자기 현실로 집어넣지 않고 탁 트인 것처럼 그러한 망상 속에 있는 거예요.
망상은 주로 누가 많이 하지요? 치매, 보편적으로 정신병자지요.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에요. 망상이 끊이지 않으니까. 아침에 눈만 뜨면 망상이에요. 그 망상을 고상한 말로 희망이라 하죠. 희망이 뭐냐? 망상이에요. Just look don’t think 보기만 하라. 생각하지 마라. 인간은 그냥 보는 대로 살 뿐이지 생각은 망상에 속할 뿐입니다. 어떤 생각이든. 내일 해는 내일 돼야 떠요. 그렇잖아요. 내일 뜨는 해를 오늘 당겨서 걱정할 이유가 없단 말이죠.
인간에게 확실한 것은 눈에 보이는 그게 전부입니다 아침에 거울 보면 보이는 내 모습 그게 전부에요. 그래서 죽음이라든지 신이라든지 천국이라든지 인간의 망상에 속하는 겁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뭘 대비하자. 지옥을 피하기 위해서 뭘 해야 된다. 이게 전부 다 망상입니다. 정신병자 같은 짓이에요.
이것은 어떤 뜻이냐 하면, 하나님 거기 계세요. 내가 찾아갈 테니까. 이런 뜻이라고요. 창세기 3장 22절, 23절에 계속해서 밀어붙이는 사실을 모르고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이라 할 때는 나쁘게 생각하겠어요, 좋게 생각하겠어요? 하나님 자체를 좋은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도 우리한테 사랑 못해줘서 환장하신 분 있잖아요. 마치 어미가 자식을 못 보태줘서 환장한 것처럼 하나님이란 사랑을 못해줘서 더더더 뭐해줄까, 이런 식으로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준비된 신으로 여기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과 강한 대척 관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밀어붙일 때 경계선, 차단성을 갖고 올 때 차단성이 벽이나 담이라면 그 두께가 있다면 그 두께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나는 너희를 쫓아내었다는 내용물이 그 담 안에 같이 응축돼있겠지요.
남자가 여자를 축대 밑으로 몰아넣을 때에 솜사탕으로 몰아넣습니까? 노래 부르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합니까? 강하게 어깨로 하잖아요. 네가 싫다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너를 포기 안 할 거야, 하는 폭력성을 갖고 있단 말이죠. 큰 폭력은 아니지만 밀어붙일 때 자칫하면 나중에 엎어져서 발작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살짝 밀어붙였는데 정신적 충격 받을 수 있지요. 위협적이란 말이죠.
주님께서 밀어붙이는 그 담에는 창세기 3장 23절, 24절을 절대로 포기한 게 아니고 그걸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 차단성을.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하나님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세.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관계에요. 이게 망상인 줄 상상도 못하는 거죠. 하나님이 우릴 추방했다는 사실을 애써 안 들은 걸로 여기는 겁니다.
말썽꾸러기 시집간 딸을 친정아버지가 이제는 니가 네 남편과 같이 굶어죽든지 나는 모르겠다. 너 같은 말썽꾸러기는 처음 본다 하고 쫓아냈는데 아이 셋 데리고 살랑살랑 웃으면서 아버지, 하면서 찾아오게 되면 아버지는 안 받아주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날 받아줄 거라는 그건 망상입니다. 아버지는 어질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웃도 잘 돌보기 때문에 친 딸인 나를 그냥 배척하진 않을 거야. 지 혼자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어제 낮 설교에 했지만 정신병자 네 자를 두 자로 줄이면 아담입니다. 옛 아담입니다. 흙으로 만든 아담은 안 받아줍니다.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새로운 아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는 동시에 사람은 딱 두 종류가 돼버리죠. 아담에 속한 인간은 창세기 5장에 죽으리라, 죽으리라, 죽어야 되고 새로운 아담은 그 죽음을 극복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고 다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거예요.
문제는 이게 종교교리냐, 신학에 불과하냐 아니면 현실이냐 이게 문제에요. 이게 하나의 이론이고 우리가 살 궁리를 트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안이고 아이디어라면 이건 또 망상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가 망상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사이좋은 관계라는 그것과 완벽하게 대 충돌이 일어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황이 믿음이에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였다는 것이 완전히 구겨지고 부셔져야 돼요. 나는 내 입장에서 하나님 쳐다봤는데 이제 그 입장 자체가 나를 정신병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진짜는 뭐냐? 하나님 쪽에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 이게 망상 때문에 몰랐던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이 다가오는 거예요.
사람들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교회입니다. 교회가 망상이에요. 주일 좋다고 돼지고기 사 먹는데. 내가 댓글 올려놨습니다. 나중에 천국 가면 주일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살라고. 주일에 교회 가는 재미 말고 천국 가는 재미로. (부러우면 부럽다 하세요.^^) 왜 부럽지 않은 이유는 우린 더 맛있게 먹기 때문에. 우린 맛있는 걸 못 찍어 올려요. 왜? 남들이 시험 들까 싶어서.
좋다는 것은 무엇을 유발하느냐 하면, 네가 나쁘다는 것을 조건 해서 좋은 거예요. 좋다는 소식이 복음이죠. 기쁘다는 것은 너는 그동안 슬픈 인생을 살았다는 겁니다. 비극의 창출자는 너다. 네가 비극의 창출자 되는 겁니다. 왜냐? 아담의 모든 요소가 부분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우리 안에 그대로 다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자 콘에 아이스크림 담잖아요. 우리는 콘이라면 거기다 아담의 모든 죄가 아이스크림으로 그것도 넘치도록 소복이 담기는 거예요. 이것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죄를 담는 그릇에 불과했다. 그걸 로마서 5장과 6장에서는 죄의 종이라고 해요. 죄의 노예라고 돼있는데 그걸 약간 틀어보겠습니다. 죄를 담는 종지기.
성경 찾아봅시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종지기죠.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면 우리가 매일같이 내뱉어야 될 고백이 모델로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모든 능력은 나한테 있다, 없다? 나한테는 없다. 그걸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으로 자각한다는 것은 큰 능력이 함께 있는 결과입니다. 이건 단순한 겸손이 아니에요. 불교 중들이 도 닦는 게 아닙니다. 신나는 이야기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더 보탤 수 없는 상관없는 일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기도하고 전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쌈 싸먹고 그 모든 일이 내 구원과 전혀 무관한 일이었음을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구원과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해도 구원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독한 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구원에 지장이 없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그 내용물이 좋은 것을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좋은 것 자체가 없어요. 다만 전에는 망상으로 가득 찬 자리가 게워내고 그 망상이 있고 죄가 있던 자리에 주님이 차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게 아니고 죄인이 되신 거예요.
내가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내가 죄 진다고 죄를 아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죄 짓게 되면 죄를 아는 게 아니고 변명만 늘어나게 돼있어요. 변명은 곧 나는 의롭다는 뜻이에요. 이상한 모순이죠. 죄는 지으면 지을수록 자기가 점점 더 의로워지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인간은 고집이 세요.
죄라는 것은 내가 지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게 네 자리라고 지적한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에 가게 되면 우리는 평생 착한 일하고 희생적인 일을 해도 그것이 죄 자체였다는 것, 남을 돌보고 희생하고 남을 사랑하는 자체가 죄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아는 자리를 주께서는 죄인이 되심으로서 알려준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어려운 말로 범주라 합니다. 범주는 일시적으로 칸막이 친 거예요. 일군의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여기까지는 그냥 특정 인간이라고 하고 모이면 교회라 하는 거예요. 교회란 자체가 사실은 바깥에 범주 자체기 때문에 범주 벗겨버리면 질적으로 똑같아요. 교회 밖이나 안이나 똑같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라는 범주를 의미를 두는 이유는 구원받지 못해서 그래요. 아직까지 지옥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위로 삼아 교회로 삼아 테두리 치는 거예요. 빨간 벽돌로 고딕 쳐서 그걸 교회라고 우기는 것은 전혀 내가 믿을만한 것이 없기에 내 쪽에서 믿을만한 것을 만들어내겠다는 종교적 열심이 유발된 게 교회라는 겁니다.
교회는 흐름이에요. 쉬운 예로 전류의 흐름이죠.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데 이 경로를 이미 한 차례 다녀가신 분이 게십니다. 예수님께서 없는 길을 텄어요. 길을 길답게 하기 위해서 기다란 파이프에 성령을 흘렸단 말이죠. 예수님께서 요단 강 세례 받을 때 남들은 물만 뒤집어썼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뒤집어썼지요. 예수님 자신이 성령의 흐름 따라 가는 첫 번째 모범자로 등장한 겁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무사히 모든 과업을 성취하시고 이제는 그 성령의 업무를 자기로부터 자기 백성에게 인수인계하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께 성령을 보냈다면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 주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게 되면 자기 백성은 뭐가 돼요? 죄인이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그런 놀라움이 벌어집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죄인인데 길을 잘 텄어. 길은 아까 이야기한 차단성입니다. 철저하게 다른 사람은 외부적인 인간의 힘으로 여기 끼어들 수 없는 강력한 파이프에요. 벽이 두꺼워서.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차단성 안에는 무슨 내용이 응축돼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너희를 추방한다. 아담의 부부를 쫓아낸 거예요. 강력한 의지. 그 다음에 두 번 다시 오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인간이냐? 오지 마라, 이거에요. 내게 오게 한 것은 인간이 아니고 새 인간이죠. 인간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인간이냐, 그러면 글렀다. 끝났어.
그래서 아담 이름 자체로 주님께서 아재 개그를 해요. 원래 아담 이름이 인간인데 아재 개그로 흙이 돼요. 흙이니까 어디로 돌아간다? 무효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만한 권한은 있다는 거예요. 네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흔히 그걸 죽음이라 하는데 흙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죽어서 죽음이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는 죽음의 힘이 거기서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죽음을 색깔로 본다면, 분홍색, 알록달록 필요 없습니다. 죽음의 색깔은 무채색이에요. 검은색으로 깔아버리면 아무리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도 나중에는 주님 보시기에는 검게 보이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속에 있는 검은 색을 표면으로 끄집어냅니다. 남들 보기에 굉장히 주의 일에 열심을 냈지만 너희들이 모르는 내 내면이 있다. 내면의 색깔은 죄인의 색깔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하지요.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줄 때 위장이 용납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거죠.
내가 나를 조작하거나 꾸미거나 나를 연출한다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그렇게 보면 우리 하루하루 삶이란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끊임없이 자기를 연출하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나라는 재료로 대외적으로 나는 어떻게 보일까, 치밀한 계획하에 꾸미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11편에서 다윗의 시라 하는데 제가 잠시 수용하겠습니다. 다윗 없는 다윗의 시. 다윗을 거덜 내는 다윗. 앞에 있는 다윗은 그 당시 남자 다윗이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있죠. 뒤에 다윗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다윗이에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을 게워낸다. 다 긁어낸다, 소멸시킨다, 없애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 속에 오실 다윗 자손의 영이 이미 침투한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성령이 이미 선지자 속에 들어왔다고 이야기하고 구약에서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 속에 장착돼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언약이 먼저고 다윗은 나중이라는 거예요.
신자란 주님이 늘 자아를 이기는 존재, 이게 신자입니다. 신자는 내 고집, 내 자아가 이기는 게 아니고 내 속의 주님이 늘 나보다 더 센 거예요. 하나님 나는 지난주 너무 나쁜 짓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쁘다고 하니까 너는 엉터리야. 그건 내가 시킨 일이야. 나쁘다고 하지 마. 지난주에 너무 착한 일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죄야. 그래야 내가 없어지거든요.
주님은 완전히 청개구리에요. 내가 동으로 가면 서로 가고 서로 가면 동으로 가거든요. 내가 무엇을 하게 되면 그것을 반대로 바꿔버려요. 그래야 그것이 십자가의 의거든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의 기존 생각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정반대되는 코스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난 주의 뜻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두 개의 주의 뜻을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하나는 너희들의 율법 해석이 맞나, 아니면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 맞는지를 항상 대비시키는 스파크가 일어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에요.
진정한 교회란 흐름이라 했지요. 흐름이란 전류입니다. 전류에는 저항하는 게 있어요. 인덕턴스inductance라는 게 있어요. 컴퓨터 끌 때 그냥 끄면 고장 나요. 잔여 전류가 남아있도록 하는 것, 유도 저항이죠. 인덕턴스라고 전기공학에 나와요.
우리가 너무 기분이 업되면 안 돼요.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간 자빠집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너무 경망스럽지도 않고 너무 침울하지도 않고. 나 죄 지었어. 지옥 가야 돼. 침울이 너무 심해지면 누구처럼 자살해요. 자살이 뭡니까? 내 인생 내가 관리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누가 이겼어요? 하나님이 이긴 게 아니고 자기가 이긴 거예요. 자기결정이에요. 우발적이고 충동적이 아니고 계획적인 자살 같은 거예요.
충돌적일 수 있어요. 에이, 콱 죽어버릴까? 그런 건 충동적이고. 계획적인 것, 섬세하게 계획 잡아서 죽는 날짜에 시간까지 상황 봐서 하는 것, 이걸 성령의 일이라고 간주하기에는 곤란해요. 충동적으로 죽는 것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그러나 계획적으로 죽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계획적인 자살을 했지요.
세상 사람들은 자살을 심각하게 생각할 자격은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도 그들은 매일같이 죽음으로 가기 때문에 스스로 죽는 연습을 무덤을 파고 있기 때문에 일종에 지연된 자살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 인생 자체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관할 게 없고 항상 살든지 죽든지 뭘 남겨야 하느냐 하면, 주님한테 졌다는 패배의식이 우리가 감사로 이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감사, 가장 큰 감사는 언제 나오느냐? 내가 죄인인 것을 인식할 때 터져 나오는 감사가 가장 큰 감사에요. 죄인이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거든요.
나 같이 이렇게 배운 인간이 뭘 그런 걸 해. 이러면 아직 자기 잘났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내가 죄인이라면 뭐 대기업 임원출신이라도 경비원 만나면, 예예. 아파트 경비원이 요새 10:1이 넘는데 얼마나 센데.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우쭐대거나 너무 붕 뜨게 하는 그것을 인덕턴스를 통해서 갈아 앉히는 거예요. 매일같이 다시 바닥부터 새로 시작, 항상 바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하거든요. 제가 늘 옛날 살던 우리 집 화장실에 빗자루가 생각나요. 그 빗자루를 지금 같으면 어른들이 교체하면 되는데 몽당 빗자루가 얼마나 썼는지 손잡이는 쥘만한데 밑에는 너덜너덜 다 떨어졌어요. 인간이 이 땅에서 성공이라고 쥐는 것은 몽당 빗자루 같아. 전부 다.
땅 사놓으면 땅 값 오릅니다. 땅 값 오르면 지가 사지. 부동산 사기에 걸려들어서 뭔가 잡았는데 보면 손잡이만 잡았어. 알맹이는 하나도 없어요. 포장만 근사하고. 인생 자체가 투자 아닙니까. 시작은 거창하고 나중은 미약하게. 아무것도 없어요. 세 살, 네 살 때 천재 아닌 자식이 없어요. 우리 손자 천재다. 천잰데 왜 고등학교 가서 랩하고 아이돌 한다고 난리입니까.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요.
지금 강의 주제가 뭐냐 하면, 인간이 신이 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시편의 내용은 예수님이 죄인이 되셨나? 그 경로가 다윗의 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보고 천당 가고 복 받을 생각 마세요. 자신의 복과 복 받아야 될 자기 욕망 싸우지 아니하면 그건 신자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신앙의 장애물이 있다면 복을 추구한다는 거예요. 내가 복 받을 자기 되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이게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고 그 다음에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뭘 준비했는가? 걸림돌을 준비하죠. 자빠지라고. 뭔가 추구하는 자는 여기서 다 자빠지고. 불의한 청지기는 통과, 세리 창기는 통관데 뭔가 으스대면 다 자빠지게 하는 그것,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 할 때는 그 사람만이 통과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정말 이것은 영구불변한 공식입니다.
그러나 공식만 알았지 그 방정식 속의 하나의 요소로서 변수로서, y=ax+b 그 공식 x자리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물론 성령께서는 들어갈 생각이 있든 없든 무조건 잡아당겨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차단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죠.
구원이란 말을 했는데 쉽게 말해서 끄집어내주는 거예요. 제가 문제를 낼 테니 맞춰보세요. 꽉 막힌 병 안에 파리가 들어있습니다. 자, 거기서 파리가 빠져나올 방법은? (뚜껑을 연다. 병을 깨버린다.) <만다라>란 영화에 보면 그런 경우인데 불교에서 해결책은 간단해요. 문제 자체가 성립 안 된다. 이게 해결책이에요. 다시 말해서 망상이란 것.
불교에선 망상이라 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경에선 그걸 현실로 봐요. 죽음에 갇혀있으니까. 인간은 몸부림 만부림 쳐도 죽음에서 못 벗어나요.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모르니까 주께서 계속 하나님 뜻을 율법을 투입해줘요. 그러면 조금씩 그 내막이 밝혀져요. 죽음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죄에서 못 벗어나는 것으로 번역해줘요. 의미를 더 추가해서 줍니다. 약간 더 추가하게 되면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야기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네 욕심에서 못 벗어난다.
이러면 기독교나 불교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욕심이란 본인의 선악적인 의식으로 판단되는 욕심은 욕심이 아닙니다. 욕심은 누구와 대비가 돼야 돼요. 하늘에서 오신 새로운 아담,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나타난 차이가 욕심이 되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욕심도 몰라요. 죄도 모르고 욕심도 모르고 아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밥 먹고 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냥 주님을 모르면 그야말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아는 게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행한다, 아니 행한다. 이 차이 뿐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지녔다, 아니 지녔다. 내가 소유했다와 소유 안 했다, 그 차이가 찾아옵니다. 성령을 가졌다와 없다고요, 성령이 없을 때는 내가 오늘 집에서 놀까, 일하러 나갈까? 맨날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를 놀고 있다, 일하고 있다, 자기의 행위만 주목하는 거예요. 야, 공부해. 너 지금 게임하고 있잖아. 게임한다, 공부한다. 공부한다, 게임한다.
네가 움직이지 않으면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 자체에 내장돼있어요. 하나님께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인간 자체에 내장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으로 보지 말고 흙으로 보라 했잖아요. 흙으로 와서 흙으로. 그게 이름이라는 거예요. 이름 안에 이름에 부합되는 존재가 만들어져요. 이름이 먼저고 그 뒤에 그 이름의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우리 신체란 존재가 만들어진 겁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흙에다 생령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뭐가 됩니까? 사람이 되지요. 아담이 되는 겁니다. 인간에게 뭔가 들어왔는데 인간은 그게 뭔 내용인지 몰라요. 그 뒤에 창세기 2장에서 선과 악은 알아서는 안 된다는 악마와 하나님과의 경계선을 집어넣는 거예요.
악마는 알아챘지요. 인간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계선을 내 쪽에서 삼켜버리면 된다는 거예요. 있는 것을 삼켜버리면 더 이상 나한테 잔소리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죄악 된 인간의 본심은 뭐냐 하면, 복음과 하나님 말씀 소식에 대해서 아예 안 들은 걸로 자기가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는 겁니다. 더 이상 주님한테 잔소리 들을 필요 없다고 자존하고 자위하는 거예요.
불교의 목적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에요. 내가 부처고 내가 신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간섭도 들을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이방민족은 그래요. 그런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만 이스라엘 속에 누가 동행하고 있잖아요. 이게 차이점이라고 제가 어제 낮에 설교했잖아요. 이쪽은 1로 살고 저쪽은 2로 사는 거예요. 이쪽은 혼자 살고 늘 지적받고 간섭받고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시작된 부부니까 신랑, 신부 관계니까 늘 신랑 되시는 분으로부터 공급받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보다 상대를 경유해서 자기를 보는 겁니다. 성도가. 주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경유해서 보게 하는 거예요. 나에게 걸림돌을 설치한 주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를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것으로 볼 때 저는 오늘도 어디에 쓸모 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뭘 해 드릴 거예요, 가 아니라 오늘 뭘 시킬 거예요? 단 조건이 있어요. 이 쓸모없는 인간을. 찬송가에 나오지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정말 쓸데없어요. 주의 일에 쓸데없는 데 쓸데없는 조건 하에 쓰게 돼요. 내가 쓸모 있다고 생각하면 주께서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차단성의 내용이 안 나오기 때문에 쓸데없다는 조건에 쓰시는 거예요.
늘 인간은 자기가 가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인덕턴스로 해서 우리를 처음 자리로 돌려보내서 내가 죄인인 걸 알고 그 죄인임을 알 때 갑자기 여기서 뭐가 터져 나오지요? 감사가 나오지요. 못할 게 없으니까. 못 견딜 게 없어요. 가난해도 견뎌요. 왜냐하면 원래 가난했어야 했으니까 쓸데없이 거기서 더 생각하면 욕심이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죄인이니까.
그런 상태에서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뭐든지 해도 감사와 뭐든지 해도 고마움과 기쁨이 나오니까. 몸 아파도 우리 동네 뒷산 산불 나도 그저 좋은 구경했네. 이것을 아까 했지요. 내가 없는 나, 다윗 없는 다윗 되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인생이란 예수가 없고 임마누엘이 되는 인생을 사신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에 이름 지을 때 예수라고 성령에 의해서 지었잖아요. 그 다음에 마태복음에 이사야 예언을 했지요. 이사야 예언은 임마누엘이죠. 그런데 이걸 이루었다고 돼있거든요. 겉으로 보면 예수, 평범한 이름이에요. 하지만 속에는 평범하지 않아요, 임마누엘.
하나님이 감히 죄인의 자리에 들어온다는 이것은 인간으론 상상도 못했어요. 거룩한 분은 거룩한 분의 동네에 살아야지 더러운 곳에 올 이유가 없잖아요. 율법에 보면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과 접촉하면 같이 부정 탄다는 내용이 구약에 줄곧 이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제사들은 부정 탄 것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집중돼있어요. 계속해서 구별돼야 되기 때문에 차별화돼야 하거든요. 그걸 두 자로 거룩이라 합니다.
너는 기존의 인간과 달라. 차별화돼야 돼. 기존의 인간들이 좋다는 것은 좋은 게 아니고 나쁘다고 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야. 성도는 주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면 좋은 것이고 주의 모습이 아니라 악마의 모습이 나오면 그건 나쁜 것이고. 항상 주님 쪽에서 생각해야 되지요.
그래서 성도가 보여주는 선과 악이란 것은 다윗 없는 다윗이니까 다윗이 등장하게 되면 악한 일이 되고 다윗 없는 다윗이 등장하게 되면 좋은 일이 돼요. 다윗이 등장하면 나쁜 일이고 다윗의 후손이 등장하면 좋은 일이 되는 겁니다. 후손이 다윗이란 죄인, 다윗이 죄인이라는 것이 사도행전 2장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다윗은 죽었지만 무덤에 그대로 있잖아, 라고 이야기해요. 죽을 만해서 죽었다는 거예요. 죽는 것이 당연했고 합당했고 마땅했다는 겁니다. 죽음 외에 다른 대가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너는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라는 거예요.
사도들이 설교할 때 어떻게 설교했는지 생각해보세요. 사도의 설교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뿐이에요. 교회부흥 이야기 없습니다. 바른 가정, 행복한 가정 그런 내용이 없어요. 어떻게 취직하고 어떻게 결혼하느냐 그런 내용은 사도의 설교에 없습니다. 오늘날 목사의 설교에도 그게 포함되면 안 돼요. 광고시간에나 하지만 설교시간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어요.
이미 죽은 인간 보고 죽었다고 여기고 주께서 일하시는 데 우리는 안 죽었다고 버티고 있으니까 이걸 때려죽여야 되는 거예요. 그냥 신체 죽는 거야 늙으면 죽겠지만 살아 있는 우리 마음을 쓸모없는 자로 만들어내시는 작업을 성령께서 계속 해내시는 겁니다.
그러면 가만히 도서관에서 공부하면 됩니까? 아니지요. 계속 가정에 우환, 환란, 건강의 문제 등으로 주변에서 벌처럼 쏘아대는 거예요. 어떤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깜짝깜짝 놀라고 경기 나게 만들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럴 순 없습니다. 주여 왜 저를 이렇게, 온갖 것 해대면서 이렇게 나오시면 정말 주님 못 믿습니다. 협박 공갈 나오고.
그러면 주님이 하는 말이, 그 정도로 네가 의롭다고 우기니까 문제잖아. 의롭지 않은데 의로우니까 나만 존재해야 된다는 자격을 자꾸 자기한테 강변하는 겁니다. 변호사가 왜 필요합니까? 세상 변호사는 이 피고는 그다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그것 변호하기 위해 있잖아요. 그런데 성령의 변호는 뭐냐 하면, 이놈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주여. 이렇게 변호하는 거예요.
우리 내부에서 계속 육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 악마적인 생각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나와 줘야 경계선 되는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릴 구원하려고 주께서 오신 게 아닙니다. 이건 내가 수천 번 이야기해도 모자란데.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구원이 안 되는데 어떻게 구원이 되었어, 라는 그 경계선에 개입했던 주님이 하신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그걸 주의 증인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 십자가마을 만들어놓고 갈라질 때 싸움이 그 싸움이었어요. 전에 십자가는 뭐냐?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려 왔다는 거예요. 왜? 그게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사적 구원은 그것도 욕심이다.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누군지 증거 하기 위함이다. 그게 십자가마을 갈라질 때 주장이 너무 대조적으로 달랐어요.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수적으로 건지는 것이다. 그게 주의 증인 되는 것이다. 만약에 내 구원받기 위해 오게 되면 이건 주의 증인이 아니고 나의 증인 되거든요. 나 사랑받을 만해서 사랑받았다고 우긴다 말이죠.
백날해도 성령을 안 받으니 알 수가 없어요.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그게 뭐냐? 개혁주의신학이에요. 앞에 하나 더 붙였네. 정통개혁주의신학이라고. 인간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인간 구원하려면 아예 내좇지를 말든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아예 선악과를 확 뽑든지. 미안하다. 내가 위험한 물건을 갖다놨구나, 하고 아예 심지를 말든지.
이미 심어놓은 게 꼴 보기 싫은 형상이 아니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해요. 나무가 아름답단 말이죠. 나무가 아름다우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모르는 그야말로 미에 대해서 치매 현상을 일으키고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만들든지 그게 아니고 너무 끌리게 만들고 따먹었다고 닦달내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전기 철조망을 쳐놓든지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표지라도 붙여놓든지. 그것도 안 보이는 저 구석이 아니라 동산 한 가운데 집어놓고요. 너희는 따먹게 될 거야, 하는 이야기밖에 안 되잖아요. 기어이 따먹게 될 거야. 너희는 죽게 될 거야.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너는 죽어야 돼.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거기서 인간이 어딜 끼어듭니까?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이 눈에 안 보이지만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성도를 통해서 자기가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근원적으로 죄인인 것을 안다는 것은 이미 성도가 언약의 운반체로서 새롭게 새 사람 됐다는 것이 결과물로 나와 있잖아요. 인간의 지혜로서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없어요.
별짓도 안 했는데 파출소 서너 번밖에 안 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거예요. 부모가 나를 죄에서 태어나게 했다. 이게 자기를 의인으로 보는 게 아니에요. 죄인으로 본단 말이죠. 더 살 자격도 없고 뭔가 요구할 거리도 없고 기도할 입장도 안 된다는 것, 용서받을 쨉도 못 된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다는 것이 놀라운 피조물이거든요.
누가 그렇게 손질한 거예요? 주님이 손질하신 거예요. 욥은 자기를 멀쩡하다고 여겼어요. 멀쩡한 욥이 자식 열 명 다 죽이고 재산 다 날아갔습니다. 욥은 자식 열 명과 재산 있는 걸 멀쩡하게 본 거예요. 한 번도 욥은 멀쩡한 자기 모습을 찾은 적이 없어요. 극렬하게 반박합니다. 멀쩡한 나를 왜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나중에 주님의 해답은 뭐냐? 황무지에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는 식으로 황무지도 내가 사용하는데 똑같이 내가 너를 좀 사용했다고 해서 사용당한 자가 그렇게 길길이 뛰면 되냐? 이게 해답이에요. 고난주겠다면 고난 받으면 되지 왜 저에게 고난 옵니까? 다른 사람 나쁜 사람한테 가지 않고. 왜 그런 생각하느냐 말이죠. 너니까 가는 거야. 너니까 고난 가는 거예요.
이 모습을 베드로전서에선 욥 안에 누가 들어있다? 주님의 영이 들어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에 의해서 쓰일 대로 빡빡 다 쓰인 거예요. 심지어 죽기까지 다 쓰인 거예요. 주께 호소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침묵이었고 응답을 거부했습니다. 건지지 않았어요. 그냥 버렸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 지나가게 해달라는 건 뭔 뜻이에요? 죽는 척은 하겠지만 아예 죽이지는 마옵소서. 그런 뜻이거든요.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되지 않음이 기도의 응답이었어요. 그게 겟세마네 기도의 마지막 응답은 응답이 없구나. 그게 기도입니다. 그러면 포기하지요. 내 뜻은 철회하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곳까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가야 될 곳을 인간이 가지 않아요. 자기가 가야 될 본래의 자리에 인간은 갈 수도 없고 가지도 못하고 악마가 그걸 말려서 가지도 않아요. 그런데 주님 혼자 인간이 아무도 모르는 본래의 자리에 가셨으니 그게 빌립보서 2장 8절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