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0a 부산강의 : [시편]19(12편)-중첩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2편입니다. 시편 12편은 성경의 중앙에 있다는 것, 구약에도 중심에 있는 글입니다. 앞에 뭔가 있었었고 뒤에 또 뭔가 있겠지요. 신약이 있겠지요. 중간이니까. 시편의 내용을 알려면 앞에 뭐가 있었는가, 뒤에 뭐가 올 것인가? 그 양쪽을 다 뽑아내야 돼요.
학교 운동회 알 때 사람 위에 올라가고 사람 위에 올라가는 피라미드 쌓기 있지요. 그럴 때는 제일 위에 돋보이는 한 사람을 높이기 위해서 양쪽에서 받쳐줘야 되듯이 시편에 담긴 내용을 알려면 현대인인 우리가 직접 들어가선 안 되고 양쪽에 걸쳐있는 것을 타고 올라가야 돼요. 그림으로 그리면 피라미드 있잖아요. 밑에 사람들이 있고 제일 위에 한 사람이 올라갔듯이 밑받침이 없으면 위에 있는 사람이 돋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시편 12편 하는데 여기 창세기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예수님 있다면, 시편은 중간에 있거든요. 시편 12편의 내용을 우뚝 솟아나게 알려면 이쪽 내용과 이쪽 내용을 거쳐서 올라와야 이 내용이 뽑혀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이야기를 이 시간에 다 할 순 없고 시편 12편에 나오는 내용이 악이에요. 선이 아닌 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악의 이야기를 하려면 창세기 3장에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치마를 벗기고 가죽옷을 만들어줬지요.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 중에서 오늘 이것과 악을 연관시킵니다. 가죽옷을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하나님의 개입의 흔적이죠. 가죽옷을 만들었다 칩시다. 여기 하나님이 개입한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인간을, 아담이 하와를, 하와가 아담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발생됩니다. 내 영향력을 타인에게 직접 가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그러질 못합니다. 그럴 수 없어요. 이미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개입하려면 가죽옷을 강제로 벗기고 개입해야 돼요. 그러나 가죽옷을 강제로 벗길 입장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집어넣었기 때문에.
가죽옷은 뭘 대체하느냐 하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인간이 수치스러움이 없다고 해서 옷을 만든 그걸 대체해서 하나님이 개입했단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 나왔지요. 하나님의 개입은 반드시 뭘 겨냥한다? 인간의 수치스러움, 인간의 약점을 겨냥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과 결합한다는 것은 장점과 결합하지 않고 대단한 강점과 결합하지 않고 뭐와 결합하겠어요? 인간이 숨겨놓고 싶은 은밀하게 감추고 싶은 것과 하나님은 개입하는 거예요. 약점이 구원하는 거예요. 나의 약점이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교회처럼 장점 내세우지 말고, 기도 자랑, 헌금 자랑하지 마시고. 약점과 결부돼있는 겁니다.
그러면 시편에 오기까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개입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은 약점이 있음을 뭐로 티를 내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장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자기 약점은 뒤에 꽁꽁 숨겨놨다는 것을 티를 내는 겁니다. 영웅주의지요. 바벨탑도 그중에 하나고. 대단한 것.
이 가죽옷의 원리가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에 대해서 자식들이 두 패로 나눠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노아는 영웅이다, 아니다. 이 싸움이죠. 노아가 술을 먹고 하체를 드러냈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개입이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그걸 덮어주는 식이죠.
첫 번째 단계, 수치를 노출시키고 그것을 덮어줌으로써 네가 하나님이 없이는 네가 의인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쪽입니다. 셈과 야벳을 그 일을 했어요. 자식이 두 패로 나눠집니다. 그 반면에 함과 그의 아들 가나안은 그것에 대해 얼레리꼴레리 한 거예요. 상대적으로 아버지는 나보다 못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셈과 야벳은 인간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나 사이에 집어넣을 게 있는 거예요. 똑같은 죄인이지만 주께서 덮어주는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의미다. 그래서 야벳과 셈은 그 정신을 계속해서 확장시킨다고 해서 축복을 하는 거예요. 축복의 의미는 동일한 질의 확장입니다.
이게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루하루 만들면서 축복하시매 새들이 늘어났고 축복하시매 짐승들이 늘어났다고 돼있지요. 축복이란 확장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꾸 번식하고 커지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아기를 못 낳으면 저주받았다고 보는 거예요. 아기가 있으면 하늘의 별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확장됐다고 보는 겁니다. 질적으로 인정받는 질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그것의 확장이죠. 아무나 확장되면 안 되고요.
셈과 야벳을 복을 받았는데 반면에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받았어요. 저주를 받는 것도 똑같습니다. 너 같은 성질의 것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종착점에 이르게 되면 지옥 되지요. 축복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격과 성질을 조성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환경이 결정하지 본인의 행함이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어느 소속이냐, 로 구원되지 네가 얼마나 개인적으로 잘났느냐, 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제가 울산강의하고 ‘하나님의 호주머니’라고 제목을 붙인 적이 있습니다. 좀 친근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의 호주머니. 할아버지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전 몇 개.
그처럼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호주머니 안에서 달랑달랑 소리 나면서 그 안에 들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의인되고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겁니다. 엘리베이터가 우리를 고층 건물로 올려주듯이 예수님이 엘리베이터가 되고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을 뿐이죠. 예수 안에서. 예수 안이라는 그 내용이 조금씩, 조금씩 이 땅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그냥 하늘에서 밧줄을 내려서 잡아당기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그 구원해주시는 구원의 구조는 하늘에서 성사되는 게 아니에요. 하늘나라는 죄가 없기 때문에 성사되지 않아요. 원래 하늘나라가 악마가 있었는데 전투에서 져서 악마가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내려왔어요. 땅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악마를 붙들고 싸우지 아니하면 악마에서의 구원도 무의미하기 때문에 악마 따라서 주님도 오신 거예요.
하늘에서 밧줄로 뜰채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 과연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장점이 아니고 약점이에요. 잃어버린 그리고 좁은 길, 자기 부인, 이렇게 되는 거예요. 위대하고 성공하고 크고 승리하는 이런 게 아니고 정반대로 가거든요. 크고 위대하고 잘난 것 같으면 예수님을 누군들 안 믿겠어요. 다 믿지요.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는 다 떠났다는 사실. 기껏 옆에 강도 하나 붙어있고 열두 제자마저 다 떠난 거죠. 외롭죠. 나를 이해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이게 십자가입니다. 아무도 없었다 말은 누구도 내 구원의 일은 보탬 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이 성사되는 데 도움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이게 십자가에요.
마치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돌 판을 깨는 것과 똑같아요. 산에 올라가서 만나야 될 하나님을 아는 산 밑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가져온 황소 금신상을 금가락지 팔아서 형상화시켜놓은 거예요. 금가락지 던졌더니만 나오는 것은 바로 금소였어요.
금소를 오늘날 말로 하면 교회지요. 그들이 재산 바치고 시간 바쳐서 나오는 것은 멀쩡한 고딕 식 건물의 교회였던 거예요. 그게 우상이 돼버린 거예요. 이 교횐 우상 될 요소가, 뭘 바쳐야 수리가 되지. 목사님 전략은 이렇습니다. 믿을 걸 믿어야지, 이런 전략이에요. 믿지 말자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계약이 깨져요. 돌 판이 깨졌다는 말은 계약이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보세요. 계약이 성사될 수 없다. 인간 쪽에서 성사될 생각은 아예 없다. 그러니까 깨어진 돌 판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은 아무리 돌 판에 십계명이 있더라도 산 밑의 너희들은 지킬 수 없는 조항이란 뜻이에요. 지켜서 계약이 성사되는 법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사례는 천국에서 아예 없는 거예요.
예수님 변화산에 있을 때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대표로 천국이 어떤지 구경하러 갔지요. 그때 모세 엘리야 갑자기 등장했고요. 베드로가 속내를 그대로 보여줬어요. 여기가 좋다는 겁니다. 초막 셋을 지어 분양해드리고 우리는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해도 그걸로 족합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천국이란 것을 베드로가 엄청나게 오해한 겁니다.
그 엘리야 모세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하신 일을 마저 해야 했어야 해요. 뭐냐 하면, 해같이 빛난 얼굴의 신분 자가 산 밑을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어야 돼요. 그걸 누가 기다리느냐 하면, 엘리야 모세가 기다린다고요. 엘리야 모세가 함께 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엘리야 모세는 예수님의 일이 마저 이뤄져야 엘리야 모세가 영원히 살 수 있어요.
그것은 엘리야 모세가 함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게 되고 그들의 죄를 다 해결해주는 조건 하에 그들은 함께 있은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은 그것도 모르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엘리야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한 내용이 나와요. 누가복음 9장에 보면. 그게 뭐냐 하면, 주님 빨리 죽으셔야 됩니다. 밑에 베드로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세분 사이에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죽으셔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라 예수님 죽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해야 돼요. 이미 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기 전에 주께서 먼저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뜻이에요. 아무도 주님의 구원에 관여한 바가 없다.
그처럼 가죽옷이란 의미가 언약 속에 들어가서 언약이 가면 같이 타고 계속해서 이동하고,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동하면서 우리는 시편 12편에 도달돼있어요. 여기서 악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1,2절)
이 세상이 별로 좋은 세상이 아니라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걸 보고 오해하기를, 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처처에, 곳곳에 있다고 돼있어요.
우리가 시편 12편을 보고 오해하는 것은, 이 성경대로 세상에 악들이 참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악이 없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이 악을 없앴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악의 보편성 또는 악의 평범성이라 합니다.
유대인을 육백만 학살했을 때 지시는 히틀러가 했지만 그 일의 수행은 밑에 있는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다 했어요. 그 사람이 전범재판을 받을 때 뉴욕타임스 기자로 참석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한나 아렌트인데 그 유대인 여기자가 그 재판을 참관하면서 뭐라고 썼느냐 하면, 악은 없었다는 겁니다.
아주 제대로 봤어요. 왜냐하면 육백만을 죽이든 팔백만을 죽이든 그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가정에 충실했고 공무원으로써 아주 착실한 사람이에요. 개인적으로 보면 굉장히 평범해요. 우리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그 자리에 갔을 때 우리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나 우리나 다를 게 없이 똑같은 거예요.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전체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범죄자는 있지만 그건 처벌하면 되니까. 다는 범죄자가 아니잖아요. 간혹 남편 죽이는 그런 여잔 있지만. 간혹 있어요. 남편이 아내 죽인 사례가 많아요, 아내가 남편 죽인 사례가 많습니까? 남편이 아내 죽인 사례가 많고, 그리고 그것도 전체 범죄에서 얼마 안 돼요. 치안이 잘 된 나라에서는 그 숫자가 점점 줄지요. cctv가 우리나라가 제일 많은데 그만큼 치안이 잘 돼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세상에는 악이 어쩌다가 생기지 보통 사람들은 악을 싫어하고 악을 저지르기 원하지 않고 선하기를 원하며 남에게 좋은 인상 받기를 원하고 훌륭한 이웃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정답이에요.
그걸 악의 보편성이라 하는데 악을 괄호에 집어넣어봅시다. 집어넣으면 세상은 그냥 보편적이고 평범해요. 따라서 세상은 선하기 때문에 악이 있다면 대번 두드러지기 때문에 뉴스에 나와요. 이게 정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선한 것인데 연약한 인간인 이상 가끔씩 악을 저지르고 범죄가 생긴다. 이게 보통 사람의 생각이란 말이죠.
성경은 ‘세상=악’이거든요. 세상 자체가 악이에요. 어느 게 이상해요? 성경 내용이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악이 처처에 올라온다는 말은, 유황온천에 가면 쉴 새 없이 뽀글뽀글 올라오잖아요. 그러니까 쉴 새 없이 악이 뽀글거린단 말은, 온천 자체가 가만있는 성질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 말은 전체가 항상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악으로 덮어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어느 쪽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느냐 하면 세상 쪽 이론이 와 닿아요.
평생 살면서 파출소 한 번 안 간 사람들 많아요. 그게 더 많을 걸요. 물론 전과자 아니면 국회의원 안 되는 이 시대에 너무 평범하게 살았다면 출세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출소나 경찰서 한 번 안 가봤고. 그러나 몇 다리 건너서 일가친척 중에서 그런 사람이 많지요. 큰 죄를 진 건 아니지만 예비군 훈련 빠졌다든지 해서 잠시 경찰서에 불려가서 벌금 내는 경우는 여러 번 되잖아요.
사람들이 선하기 때문에 세상을 떠날 생각을 안 해. 세상에서 희망을 봅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맨날 사고 치면 인연 끊고 싶지요. 그러나 얘가 가끔씩 한다면 그 얘를 포기를 못하고 계속 희망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상해요. 그래놓고 우리는 시편 12편을 해석하려고 덤벼듭니다.
처처에 악이 있다는 말은 도저히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린 구원받을 수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성경 내용 족족 우리는 못 믿어요. 우리는 이미 다른 환경에 걸쳐 있기 때문에 그 환경의 일부로 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평가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는 한 통속이에요. 세상이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친근합니다. 친밀해요. 영어로 relative, 일가친척이에요. 그들과 우리를 따로 둘 수가 없어요. 감정이입이 곧잘 돼요. 성경 내용이 거기 낄 틈이 없어요. 주님께서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납득이 안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착한데 하나님을 버릴까, 이러고 있어요.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다니 그럴 리 없다. 아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몰라서 그랬겠지. 그러니까 지식이 충분치 못해서 구원 못 받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구원 못 받는다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성경공부 더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단절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힌 것은 하나님의 개입 없이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다. 그걸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하나님의 주신 상처 같은 것. 그 상처는 어떤 상처냐? 애초부터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돼있다. 아담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돼있다는 그 증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에서 뭘 자랑하느냐 하면, 단절된 걸 자랑하죠. 내 안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 단절되었음을 자랑하고 그 단절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십자가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던 그 세상은 나와 단절돼있고 나는 그 세상과 단절돼있다.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환경 속의 인간이라 했지요. 그런데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사도 바울은 그 환경 속의 인간이 아니고 환경 밖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순 한국말로 이렇게 표현돼요. 외떨어진 상태. 무엇과? 내가 속해 있는 세상과 외떨어져있는 거예요. 완전히 따로 떨어져있단 말이죠. 외롭게 떨어져있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이 이래도 믿을 만한 책이에요? 어려워도 어려운 정도가 아니에요. 불가능한 책이에요. 우리가 세상의 일부면서 세상 좋기 때문에 세상 포기 못하는 이런 마음으로 감히 겁 없이 성경을 보고 믿고자 한다는 그 태도 자체가 뭔가 잘못돼있어요.
성경에서 세상 자체가 악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블록 공사하고 마감을 보드라운 모래에 시멘트 발라서 흙손으로 미장하잖아요. 매끈하게 되도록. 악으로 공사를 해버린 거예요. 마감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마감된 그 안에 있는 것은, 자기한테 도움 되면 자기의 본성과 일치되면 선이 되고, 그렇지 않고 나를 해코지하면 악으로 규정해버린 상태에요.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해서 그럼 믿지, 하고 들여다봐야 전부 다 왜곡된 해석밖에 안 나와요. 해석 자체가 잘못돼있습니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은 외떨어져있어요. 예수님은 따로 떨어져있어요. 그런데 열두 제자를 왜 붙여줬느냐 하면, 우리가 주님한테 오해하는 그 오해를 유감없이 삼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제자들을 대변자로 세워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적인 악의 보편성 안에, 그러니까 악이 나쁜 생각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는 어떤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가,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는가를 열두 제자가 다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주님과 제자들, 스승과 제자로 붙어 다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나라가 곧 나의 나라라고 오해한 사람이 누구였지요? 베드로였지요.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 위치가 수제자로 제자들 마음을 대표한 거죠.
차라리 솔직하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어서 우리는 삼년 동안 헛짓했다고 노골적으로 드러낸 제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 이름은 가룟 유다에요. 수익계산에 남는 장사가 아니에요. 돈 삼십 냥이나마 건지려고 팔아먹은 거죠. 분하면 무슨 짓은 못해요. 속았다는 느낌 들면 무슨 짓인들 못합니까? 죽여 버리죠.
얼마 전에 전남편을 죽인 여자에게 왜 죽였느냐고 하니까 자기를 성폭행하려고 해서 죽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시체를 갈아서 쓰레기봉투에 담아 제주도 바다에 버리고 지 마음대로 했는데. 욕할 게 아니라 여러분, 성질나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성질 is 뭔들. 성질나는 뭔들 못하겠어요. 화나는데.
그 여자 말대로 성폭행을 시도했다면 그 전남편도 진짜 무지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자를 여자로 본 게 문제에요. 여자는 여자가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남자, 여자는 외양이고 속에 들어가면 사람이에요. 사람으로 보지 않고 여자로 본 게 문제가 된 거예요. 꼴에 남자라고.
남자, 여자가 결혼한 게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이 결혼한 거예요. 처음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한 것처럼 보이지요. 아이 하나 낳아 보세요. 우리 두 사람 모여서 결혼했구나. 두 사람이에요. 남자, 여자 없어요. 결혼해놓고 여자는 어디 있느냐? 자기 부인 바깥에 여자가 있지요. 자기 안에 이미 여자가 없어요. 가족끼리 와이카노, 이럽니다. 아내는 사람이지 남자, 여자가 아니라니까요.
남자, 여자는 짝짓기를 위한 매혹이에요. 미혹거리에요. 그 상세한 내용은 이번 수련회에 나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그 대목을 설명할 거예요. 아가의 주제는 아름다움이에요. 아가 내용을 보셨지요. 제가 놀란 것은 어떻게 솔로몬의 아내, 솔로몬의 여자가 늙을 것을 왜 솔로몬은 생각을 못하고 있느냐? 그게 빠져있다고요.
그러니까 이것은 일반적인 사랑이야기가 아니에요. 아름답다고 극찬하고 있는데 그 아름다움은 시간을 이기지 못해요. 그런데 아가에 나오는 아름다움은 시간을 이겨요. 시간을 무시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인간 자체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스스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게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악마처럼 되는데 악마가 끊임없이 자기를 스스로의 재료로 날마다 재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가짜지요.
어떻게 그 악마에 그 인간들이라. 인간들은 매일같이 거울 보면서 매일같이 직장에 나가면서 매일같이 하는 것은 새로운 사건과 사태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새로운 재료를 투입해서 진짜 자기 자신을 이상화하면서 구상을 다시 만들어가고 또 수정하고 조립하고 만들고, 만들고 매일 그 일하고 있어요. 자기 다듬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규정, 너는 악이라는 말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죠. 성경에서 믿을 게 있느냐? 없어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 말씀 믿고 성경 믿으려고 보니까 믿을 것도 있지만 못 믿을 것도 있더라, 하는데 그건 애초부터, 믿음이란 전부 다 한꺼번에 믿게 돼있는 믿음을 선물로 받지 일부는 놓치고 일부는 안 받고 이런 것은 지가 구성하면서 자기 잘남을 위해서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만든 보조적인 믿음이지 선물로 받은 믿음은 아니에요.
선물로 받은 믿음은 내가 구성하는 것은 주여 망쳐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요. 내가 내 구성을 스톱시킬 순 없어요. 하루일과가 그거니까. 삶의 목적이 그거니까. 매일같이 그것이 무의미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옵소서, 라는 그런 식으로 주님과 관계돼있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구성하면 그게 나한테 장점이 되기 때문에. 주님과 약점으로 만나야 되는데 우리는 자꾸 약점이 아니고 잘난 것으로 만나기 때문에 성사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 했지요. 악의 보편성과 악의 평범한 것. 평범한 사람도 누구나 얼마든지 악이니 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는데 그것과 처처에 악이 횡행하는 말씀과 연결 지으면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어요. 악은 이 세상에 없다. 통계적으로. 약간은 있겠지만 그것은 체포하고 가두면 되니까.
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악은 어디 있느냐? 나타난 주님에게만 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으로, 선지자나 아벨이나 가인에게 주어진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 악은 새삼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해요. 저게 악이었었어? 우리가 아는 악은 뭐냐 하면, 상대적으로 나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보다 못한 것을 주변에 깔아두기 위한 하나의 장치, 배경으로서의 악 이에요. 악한 놈이 있어야 내가 상대적으로 잘났잖아요.
꼭 MT나 청년들 미팅이나 소개팅할 때 못난 친구 데려와서 상대적으로 자기가 얼마나 예쁜가를 보이는 작전을 꾸민다고 남자들이 그렇게 착각들 하고 있다는. 그런데 착각인지 진짠지 그건 안 물어봐서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해서 일이 성사돼야 되는지. 못난 친구 데려가서 자기를 돋보이기 만들어서 남자로부터 간택 받고자하는 의도, 동물의 짝짓기 본능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도 20대 이야기지 30대는 백날 그런 작전도 안 됩니다. 30대부터는 현실적으로 돈 얼마 버느냐, 이게 되지, 상대적으로 미묘한 차이 미인, 그건 뜯어고치면 되는 문제기 때문에 별로 중요한 문제 아니에요.
방금 제가 뭐 썼지요. 이 세상에 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 악을 생각하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돋보이고 싶을 때 내가 인간 제대로 사는 거야, 하는데 남편 죽인 여자? 아아 나는 괜찮은 쪽에 속하는구나. 확인하고 싶을 때 하는 거예요.
그런 영화가 있거든요. 내가 쫓기는 살인자인데 타이어 펑크 났는데 목사도 예배 바쁘다고 빨리 가버리고 집사도 빨리 가버리고 불교신자 또는 여호와증인이 와서 도와준다고 할 때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이에요? 이단이 선한 사마리아인이죠. 인간은 자기에게 도움을 줄 때 그걸 선으로 보는 겁니다. 남들이 욕해도 나는 너를 욕할 수 없는 사태일 때, 왜? 그 정도로 나는 귀하니까.
나에게 예를 다하세요. 예를 갖추세요. 이게 인간의 본성이거든요. 낙원에서 쫓겨난 입장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추방된 입장에서 갑자기 자기를 중전마마로 생각하는 거예요. 나에게 예~를 갖추세요. 인간의 존엄성이라 하지요. 예를 다하라는 거예요. 누가 세 살 먹은 아들이, 두 살 먹은 아이가. 기저귀 갈아주고 했는데 좀 컸다고 지가 알아서 소변본다고 아빠, 엄마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나오더란 말이죠. 아이고, 참.
아빠, 엄마란 이유 때문에 내 영역에 함부로 노크도 없이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자아의식이라 해요. 그걸 상상적 자, 이상 자아라 하거든요. 이상화된 내 모습을 누구한테 배우느냐? 아빠한테 기껏 배우는 것이 뭐냐? 아빠는 독립적이고 엄마도 독립적이고. 그러면 내가 배울 것은 나도 독립적이고. 인간이 배운 것은 그것밖에 안 배운 거예요. 나는 최고라는 것, 그걸 배운 거예요.
그런 인간이 어딜 가요? 천국을 가요? 어떻게 하면 우리 얘가 복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는데 복음은 단절된 상태에서 주님 쪽에서 십자가를 성령을 통해서 앞장세울 때만 구원이 돼요. 성령이 왔을 때 우리가 성령이 왔다는 말은 맞지만 성령이 왔다고 하지 말고 주님의 환경이 왔다고 보면 돼요. 성령이 덮치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이 세상 전체가 악이라는 안목이 발생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경험했던 그 경험담과 환경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그대로 덮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이 뭐냐 하면, 분야가 깨어집니다.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저도 이번에 독일에 가서 아헨한인교회 갔습니다만 그 교회 왜 갔느냐고 누가 묻기에 집사 체험하러 갔습니다. 오랜만에 목사 말고 강단에 선 사람 말고 집사, 평신도로서 교회 참석할 때는 어떤 태도가 될까, 경험하러 갔다고 했는데.
아헨교회라고 원래 예배당이 있는 게 아니고 시간당 돈 주고 빌려서 하는 거예요. 참석을 해보니까 그때 어린이주일이라 해서 11시부터 12시 반까지 했어요. 아이들 율동하는 것하고 카메라로 다 찍어왔습니다. 역시 사진보다는 동영상이 훨씬 나아요. 왜냐하면 소리라든지 다 들어오기 때문에. 사진은 소리가 없잖아요. 그 체험이 살아나지 않아요.
자, 집사, 평신도 체험이 뭐냐? 이 시간만큼은 하나님한테 할애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부터는 내 시간입니다. 이렇게 되더란 말이죠. 이게 분야가 돼요. 교회 가는 교회 분야와 내 나름대로의 직업 분야가 칸막이처럼 서랍처럼 구분이 되는 거예요. 이게 평신도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교회만 주님이 있고 자기 일엔 주님이 없어요.
좋은 체험했어요. 그렇다면 설교할 때 그 집구석을 잡아야 되겠구나. 이제는 교회 문 열고 나가도 복음이 따라가서 그 집구석에도 복음이 미치도록 해야 되겠구나. 그럼 덮치도록 하려면 집에서도 천주교 신자들 마리아 형상 모시듯이 매일 성경책 펴놓고 해야 되는가? 그렇지 않고 반대로 나가는 거예요. 교회 왔을 때 난 아무것도 거룩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체험을 교회에서 누리게 하는 거예요.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분 안 되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럼에도 복음이라면 집구석에 가서도 똑같이 복음이 되는 거예요. 교회 와서 사랑하지 마세요, 함으로써 집에 가서도 가족끼리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조차 주 안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일종의 전략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 말이 맞아요.
왜? 구분 자체, 칸막이 자체를 없애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은혜가 십자가 복음이 무슨 칸을 두려워합니까? 칸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리죠. 그러면 반대로 악은 뭐냐? 악은 나의 절대성, 나의 장점과 숨겨놓은 것을 꽁꽁 숨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칸막이를 짓는 거예요. 나에게 유리한 환경으로 조성해나가는 겁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때그때마다 칸막이 지어서 마치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나서는 거예요. 저 사람 만났을 때 내 행동과 태도, 또 저 사람 만났을 때 내 행동과 태도 그걸 끊임없이 우리는 변신을 시도합니다.
이게 바로 악이에요. 악은 전부 다 통합되지 않고 자기 편리대로 계속 구분짓는 거예요.
목사님 심방 왔을 때 나의 태도, 청소. 친구 왔을 때 어지러운 그 모습. 목사가 심방해도 예고 없이 전화 한 통 없이 갑자기 쳐들어갈 수밖에 없는…. 만약에 평소에 그 교인이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목사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 집 개가 알아요. 그래서 목사가 갑자기 왔을 때 개가 왕왕 짖으면 그것은 주인의 마음을 그대로 묘사했다고 보면 돼요. 얼마나 싫어했으면, 그 강아지에 그 주인이거든요.
그런데 목사가 왔는데 개가 가만있으면 이 가정은 나에 대해서 그다지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는구나, 라고 평가해도 좋습니다. 강아지가 없다면 그 집 자식을 통해서 알 수 있겠지요. 분야별, 칸막이 짓는 것, 이것이 인간들이 평소에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버릇이에요. 이 세상에요. 목사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별로 안 좋으면 직접 싫다고 안 해요. 그렇게 목사에 대해서 광신도라 해도 막상 목사를 만나면 표를 안 내려한다고. 그게 벌써 칸막이 지은 거예요.
그러면 칸막이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이 칸막이로 둘러쳐 있는 사람을 세 자로 ‘정신병’, 네 자로는 ‘정신병자’입니다.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전부 다 편집증 환자에요. 자기를 지키기 위한 집착으로써 동창회나 어디를 가더라도 그것으로 골라서 멘트하게 돼있어요. 인간의 언어란 숨길 건 숨기고 드러낼 건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개념들을 찾아내는 작업이 대화에요.
그래서 어떤 정신치료에서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욕을 하라고 해요. 욕은 꼬깃꼬깃 감춰놓았던 본성인데 이걸 너무 감추다보니까 불화가 일어나서 자기 몸이 아픈 거예요. 자기 정신이 자기 몸을 감당을 못해서. 차라리 실컷 욕을 하든지 삼만 원만 주면 입구에 몽둥이와 작업복을 줍니다. 타이어, 마네킹, tv브라운관, 고물들 마음대로 치고 속이 다 시원해서 삼만 원 가치 충분히 할 거예요. 그게 너무 과격하다면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든지. 그게 안 풀리면 있는 접시는 다 깨기 마련이고 옆에 있던 강아지는 괜히 차이게 마련이에요.
따라서 이 세상은 악입니다. 구원은 안 됩니다. 쫀득쫀득한 악을 잡아당겨봐야 색깔이 시커멓습니다. 시커먼 것을 늘여봐야 시커멓습니다. 하얗게 된 법이 없어요. 아무리 구원하려 노력해도 자기의 시커먼 색깔만 노출시킬 뿐이에요. 구원은 안 됩니다. 구원될 수 없어요. 그래도 구원받았다 하면, 또 정신병자구나. 구원은 안 되고 구원이 없는데 무슨 구원이라는 게 있어요.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알리고자 한 것은 그거였어요. 구원은 없는 거예요. 기다려라. 내 줄게. 하지만 없다. 열두 제자 보고 모여라. 모여서 기도하는 건 좋은데 일단 없어. 하지만 모여 있으면 성령을 보내준다는 말은, 내가 다시 갈게, 란 말과 똑같은 거예요. 내 영이 오게 되면 세상에서 알아듣지 못한 희한한 소릴 할 것이다. 그게 바로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고,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니까 특이한 거예요. 악밖에 없는 세상에서 특이성을 드러내요.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나의 행위와 결과를 연결시킬 수 없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내 행동과 특이성을 내가 예측하거나 기대할 내용들이 아니에요. 내가 예상 못한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따라서 정말 구원받은 사람은 이렇게 해야 돼요.
“주님이여,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주님은 잘못된 행동을 하신 거예요.” 내가 예상한 구원과 다른 구원이 왔기 때문에 이 구원이 나한테는 구원을 유지한다든지 소유하기에는 벅찹니다. 차라리 내가 아는 구원 있잖아요.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그게 더 자연스럽지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감당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그 구원이 없고 있을 수 없고 구원이 성사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구원이 되려면 하나님이 살아 있고 인간이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건지려낼 때 구원이 돼야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모든 문화에서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었어요. 그러나 우리 눈앞에 등장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죽었어요. 이제 네 차례다. 이게 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어요? 모든 신은 나를 위한 신이에요. 왜? 내가 신보다 더 우선되기 때문에. 신이든 예수든 날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감출 수 없는 본성입니다.
나 좋으라고 천당 있고 나 싫어하기 때문에 지옥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날 위한 신이라면 날 위한 예수라면 우린 못할 게 없어. 뭔들 다 할 수 있어요. 우린 주님에게 같이 삽시다. 주님은? 나는 먼저 죽는다. 너는 나 따라 죽을 수 있느냐?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오케이. 다 도망가라. 도망가면 단절이죠.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간다고 했을 때 너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널 위한 처소는 없다. 오지 못한다. 없는 곳이에요.
주께서 우릴 집어넣을 곳은 우리가 생각도 못한 곳이고, 우리가 여기서 상상하는 천국은 살아 있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이고. 핀트가 안 맞는단 말이죠.
구원은 없고 우리가 가고자하는 것은 망상이에요, 전부 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온 모습은,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죽는 하나님, 죽을 수 있는 하나님, 살아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살아 있으면 구원하겠는데 죽을 수 있다는 하나님. 십자가 옆의 강도가 그걸 알게 된 거예요. 주님 죽으셔야 되는 천국에 저를 생각해 달라. 주님이 죽는 것은 이상하지만 내가 강도로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주님 죽을 때 저를 기억해 달라. 오늘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단절된 세계에 강도가 거기에 함께 있게 된 거예요.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