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8b 부산강의 : [시편]20(13편)-신앙의 증거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구원받았는지 어디서 확정할 수 있는지. 인간적인 확정은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건 안 돼요. 눈에 보이지 않는 확정이라면, 나는 어떤 경우에 구원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벌 받는 세상 속에 살게 하신 그것이 증거가 돼요. 떠나야 될 세상을 이 땅에 평생을 살게 만드는 게 증거가 되는 겁니다. 시편 13편이죠.
왜냐하면 벌 또는 심판, 저주를 면하게 한 그 방식 안에 벌이 오게 된 이유와 내력이 담겨있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 받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것 믿을래, 그것 믿을래. 좋은 소식이다.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피 터지게 하잖아요.
하지만 이걸 믿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었다고 하면, 벌과 저주를 예수님의 피로 면하게 해줬다 제거해줬다는 걸 믿으려면, 벌이 주어진 이유와 내력이 한껏 들어있는 이 세상에 푹 젖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증거거든요.
구원받은 증거는 뭐냐? 내가 벌 받을 세상에서 평생 지내야 된다는 그 당위성, 마땅함 그게 바로 구원받은 증거에요. 두 개의 안목을 가지고 봐요. 이 세상은 이래서 벌 받아 마땅해, 라는 것을 세상도 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살아가는 겁니다. “나는 진작 죽어도 괜찮아.” 자기 자신을 볼 때 두 개의 안목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시편 13편에서 1절부터 4절까지는 비탄입니다. 비탄의 시라 하는데 슬픔, 비애, 비탄. 5절에 보면 기쁨이 돼요. 그러면 진정한 기쁨은 뭐 안에 있어야 기쁨이 나오지요? 바로 슬픔 속에 있어야 돼요. 슬픔은 희망이 끊어지지요. 좌절될 때 희망 자체가 아예 없을 때 절망스러울 때 슬퍼요.
그러면 그 슬픔이 기쁨으로 극복된다면 그 기쁨이 5절 끝에 나옵니다.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어디에 잠겨있을 때나 터져 나올 솔직함이냐 말이죠. 절망에 잠겨있을 때에. 거지 나사로가 지옥에 갈 사람과 앞집에 살아요. 낙원에 갈 사람이 매일같이 코앞에 마주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지옥에 갈 사람과 마주치고 그 집 개와 마주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의미겠습니까? 비록 거지지만 다른 기쁨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니 꼬라지 볼 때마다 기뻐. 부자 됐다는 소리 들을 때마다 기쁘기 한량없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넓은 길로 가는 사람 앞집에 살면 돼요. 그 넓은 길은 찾는 사람이 많아. 넓은 길은 계속 도로공사해도 모자라. 차가 미어터졌어. 다들 그 길로 가. 이쪽 길은 가는 사람이 없어요. 복음의 길은 거의 안 찾아요.
진정한 소수자는 좁은 길로 사람이 소주자에요. 동성애한다고 퀴어축제한다고 소수자가 아니고. 정말 말빨조차 이 세상에서 일체 알아주지 않는, 교회 가서 언급해도 다른 교인들이 개무시해버리는, 사회 나가서 무시당하는 것. 분명히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옳은데 옳다는 이유 때문에 밀침 당할 때. 분명히 임금님은 벌거벗었는데 신하들이 전부 다 김정은, 김정은 하면서 받들어주는 거예요.
내가 아는 김정은 서른여섯 먹은 철딱서니 없는 아거든요. 내가 아는 재벌2세에요. 교육도 그렇게 받았고. 지도자라고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김정은과 회담할 때는 서른여섯 살짜리 보내야 돼요. 나이 많은 문재인 나오지 말고 같은 또래를 보내야 돼요. 까부는 재벌2세, 3세 많잖아요. 마약하고 하는 애들과 맞아요. 노는 가락이 비슷할 건데, 뭐. 룸살롱에 여자 부르고 할 건데. 뻔한 건데.
왜 세상을 진실한 그대로 볼 줄 모르느냐 그 말이죠. 보고 그걸 그대로 발설해야 돼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압박을 받을 때 그렇게 발설이 저절로 누르니까 터져 나오는 거예요. 치약 누르면 치약이 터져 나오지요. 이런 사실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시편 13편의 인물은 누구냐?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사람,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 받는 자, 이게 정답이에요. 그게 누구냐? 다윗입니다. 다윗의 시니까.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자, 이게 복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복 리스트 나오지요. 제일 마지막 복이 뭐였던가요?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도리어 뭐하라? 즐거워하고 기뻐하라.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기뻐하였느니라. 너희 상이 큼이라. 상은 이 땅에서 주는 상이 아니고 하늘에서 주는 상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상은 바로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자, 내가 과연 구원받았을까, 영생 얻었을까, 정말 내가 죽으면 천국 갈까? 상 받으면 돼요. 그 상은 뭐냐? 이 땅에서 받는 상은, 내가 아는 누가 뭐래도 그게 아니고 이게 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앎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욕당하는 그게 바로 내가 신자인 증거에요.
우리 입을 너무 다물어서 문제지요. 입 벌리면 돈 나갈까 싶어, 입 다물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입을 다물어서 문제에요. 그러나 치약이 누르면 나오듯이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도저히 못 참겠다고 터져 나올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의 악이, 하나님의 원수가 더 심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이 악마를 보내서 시키는 일이라고 보시면 돼요. 나를 복음 때문에 그렇게 미워한다면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입 다물지 말고 터져 나가란 말이죠. 복음을 외치라 이 말이죠.
그럴 내 마음은 여기 5절에 보면,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게 하박국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있잖아요.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지라도. 이것은 포로 잡히기 전에 약속의 땅에 있었던 율법적인 복과 내용이 완전히 배치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에요.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고 포도가 많이 열릴 때 그걸 사람들은 신앙생활 잘하는 증거로 삼았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땅을 떠나면서 증거가 180도로 확 바뀝니다. 이제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풍성한 것, 요즘으로는 돈이 많이 들어오는 게 복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걸 맞는 복은 따로 있는 거예요. 천국에 들어갈 인물들, 그 인격을 따로 있는 겁니다. 이 땅에 적합한 인물은 이 땅과 함께 망하도록 돼있어요.
잠시 요엘 찾아봅시다. 이걸 봐야 나머지 본문 시편 13편이 이해가 돼요. 구약 1271페이지 요엘 2장 3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누구든지 하나님 주신 심판에서 면제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돼있어요.
요엘 선지서 자체가 메뚜기가 덮여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특히 요엘 1장 16절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돼있어요.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이 대목이 굉장히 깊이가 있어요.
뭔 뜻이냐 하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서 곡식이 안 되면 거주민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전에 바칠 제물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바칠 제물이 없어지는 걸 하나님이 감수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재앙에 하나님이 거기에 동참해서 그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고생 같이 할게. 내가 만든 재앙에 나도 참여할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그 이야기가 시편 13편 이야기에요. 여호와여 어찌 잊으시나이까, 할 때 여기 있는 다윗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다윗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결부된 사람이거든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율법이 생생하게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율법과 관련된 인물을 이 땅에 하나님께서 다윗이란 이름으로 미리 보낸 거예요.
그럼 다윗 주변에 일어나는 일은 율법 안에 감추어진 내용이 죽죽 펼쳐지는 거예요. 요구르트 병이 엎어져서 쏟아질 때 안에 있는 요구르트가 지면에 퍼져나가듯이 다윗 통해서 율법 안의 내용이 퍼져나가는 거예요. 사람은 하나님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창으로 찔러도 너무 높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자, 율법이 와서 같이 있는 자를 이 땅에 살게 되면 하나님이 보낸 자를 찌르는 것이 곧 누굴 찌르는 겁니다. 하나님을 찌르는 거예요.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사울아 사우라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게 에베소서 1장 같으면 예수님은 머리가 되고 교회는 몸이라 했잖아요. 머리 되는 하늘과 몸 되는 땅이 완전히 연결됐어요. 그래서 땅의 것을 건드리면 누가 화내느냐 하면, 머리 되신 하나님이 화내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위한 인생이 아니고 주님을 보여주기 위한 인생, 성령 받아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뭐냐고 물으면, 이 세상은 예수님이 포기한, 예수님이 포기했고 이 세상도 예수님을 죽여서 포기한 속성이 작용하는 세상이란 것을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절감하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느끼는 겁니다.
이 세상은 빈 공간 아니에요. 혼자 있을 땐 상상하면 신앙 좋지만 막상 움직여서 누굴 만나 보세요. 그들이 나한테 내뱉는 소리와 내가 그들에게 내뱉는 소리들이 어울려서 두 영역을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지양하는 바가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는 차이성을 그 현장에 다 녹아내려져요. 그럴 때 여러분은 시편 13편을 외우고 있는 중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이 땅에서 힘들어서 더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2절 봅시다.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이 땅에서 승자가 누굽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에요, 안 믿는 사람이에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승자지요.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자기가 이겼다는 거예요. 너는 패배자고 나는 승자다. 너는 루저란 말이죠. 너는 졌고 나는 이겼다.
3절에 보세요.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누구의 눈이냐? 여기는 다윗의 눈이죠. 다윗이란 인물 주변에 엮여져 있는 환경요소를 제가 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왕이죠. 무슨 왕? 이스라엘 왕이죠. 이스라엘 왕으로 책임을 다 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냐? 시온입니다.
세 번째는 왕의 자식 또는 왕의 자손에서 누가 오느냐 하면, 바로 이 세상을 완전히 해야 될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메시아 앞에서 한시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자세가 이래야 돼요. 우리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나의 고유됨을 유지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예수한테 모든 걸 일임해야 돼요.
내 고유함이 아니고 주님의 고유함,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내가 있습니다. 이래야지 주님 끊어버리고 나의 나됨, 자존심 그것 유지해서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나의 절대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대로 절대성이 아니에요. 절대성을 생각도 말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꾸 어려움을 주는 것은 뭘 포기하라는 거예요. 나의 절대성, 나의 나됨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사람이 부부싸움이라든지 뭔가 다툴 때는 서로의 고유함을 끄집어낸 거예요. 저기서 창 내면 나도 창 내고 저기서 칼 내면 칼 내는 거예요. 나한테도 이런 것 있어. 너 키 크다고 날 무시해? 난 깡다구 있어.
미국 사람 같은 경우에는 자기의 절대성과 고유함을 지키기 위해서 뭘 사용하느냐 하면, 총기를 사용해요. 총. 총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총이 자기 일부에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총을 두고 있어요. 미국 잠깐 갔다 왔지만 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맞지요. 법이 아니고 내 총이 나를 지켜주는 겁니다.
그럼 한국 사람은 뭐로 지키느냐? 글자로 한 자인데. 총 대신 술입니다. 자기 도피적이죠. 아이고, 더러워라. 한 잔하는 거예요. 술 안에서 자기 고유함과 절대성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우기려고 하는 거예요. 상사한테 꾸중 듣고 여자들 모여서 술 먹고 집에 들어가고. 요새 젊은 여자들도. 술.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임창정의 <소주 한 잔> 들어보세요. 할 말을 못해 소주 한 잔 먹고 자기 할 말하잖아요.
얼마나 평소에 우리 몸이 내 것만 지키면 인생 살았다, 할만하다. 이것뿐이에요. 돈은 미국이고 한국이고 간에 공통적인 거고. 돈을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 하면, 돈은 10억 있어도 20억에 밀려서 짜증나서 또 술 먹어요. 돈은 인간의 욕망은 한정도 없기 때문에 최종적인 것은 아니고 최종적인 몸을 갖고 있는 총이고 한국 사람한텐 술이에요. 러시아나 한국 사람은 술로 때우는 거죠.
술로 때우는 개인을 국가는 애국주의로 바꾸는 겁니다. 나라가 네 술보다 낫고 총보다 내가 지켜줄게. 그러면 애국주의가 없는 중국이 문제고 중국이야 북한이 문제고. 영국은 뭘 지켜주느냐? 축구입니다. 손흥민이. 한 골 넣으면 토트넘 경기장에 손 노래 나오고 전광판에 골인~ 손흥민 이름 나오고요. 손흥민 가치는 1500억, 우리나라 중소기업, 현대자동차 몇 대 팔아야 돼? 그래서 어제 아이들한테 물어봤어요? 너, 앞으로 뭐 될래? 축구선수요. 그렇게 말씀을 가르쳐도, 축구선수요. 공기가 그래요. 우리는 그런 공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잘 묘사하는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우리에게 뭘 요구하느냐 하면, 우리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3절 끝에,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잡을 잘까 하오며” 세상의 공격은 죽음으로 느낍니다.
다윗이 다윗언약을 통해서 죽음+그 이후가 다윗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계시로 주어지는 겁니다. 여기 다윗 행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사람이 두 사람 있지요. 하나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 죽지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다윗의 죽음을 대신한 죽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밧세바와 동침해서 낳은 자기 자식이 죽어요. 이 죽음이 결합된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은 빠져버려요.
죽음과 죽음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언약이 구성이 안 됩니다. 한쪽은 죄로 인한 죽음이고 한쪽은 죄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야 될 죽음, 억울한 죽음과 마땅한 죽음의 결합이에요. 이게 다윗언약입니다. 시편 51편에 나오거든요. 억울한 죽음이 억울하게 안 되려면 나는 마땅한 죽음으로 내 인생을 수용해야 된다. 내가 죽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게 세리고 강도고 창기거든요. 이 땅에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 한 대목 말씀드리게 되면,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귀신들린 자 소경된 자 절뚝발이를 낫게 하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남의 이야기로 여겼다고요. 그러면 내가 찾아가야 될 본래의 자리를 주님께서 콕콕 찔러줬어요. 죄악으로 덮여있으니까 눈이 다 감겨있는 거예요.
그래서 콕콕 찔러준 게 뭐냐?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나갔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귀신들려 있다는 것을 콕콕 집어주는 거예요. 소경된 자가 이미 우리가 소경이란 뜻이에요. 내 자리는 소경이고 내 자리를 절뚝발이에요.
마태복음 11장 봅시다. 세례요한이 오실 분이 당신이냐고 자꾸 의심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한테 이야기해라. 4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죽은 자가 살아나며” 이건 바로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살아났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자리는 뭡니까? 죽어있는 거예요. 심장이 뛰어도 산 게 아니에요. 죽어있는 거예요. 주님이 우릴 살려내지 아니하면 우리 몸은 죽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껍데기를 품고 살아가는 거예요. 제가 껍데기라 했지만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뭐냐? 겉 사람은 버리고 속사람은 뽑아내는 거예요.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옷을 벗는 거예요. 육체를 벗는 겁니다. 육체를 벗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게 소망이에요. 물론 그때까지는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봉사 일을 해야 되지만. 늙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그날이 가깝다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은 새치기해서 젊은데 죽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죽음도 복음으로 죽어야지 헝가리 놀러가서 죽지 말고.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적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면 성도라고 할 수 없음이죠. 다른 말로 하면 지하철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란 말이 아니고 우리 주변 환경 자체가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사람 되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주님이 그걸 용납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말 더러워서 못 살아요.
일가친척 주변 사람들이 맨날 하는 이야기가 그거에요. 너, 그러면 죽는데. 그들은 벌벌 떨고 있어요. 악마한테 매여서 내부적으로 자기 떠니까 나도 떠는 줄 알고 있어요. 너 아프냐? 나도 아프냐? 같이 떨고 있어요. 죽는 게 무서워서. 그럼 사는 방법은 뭐냐? 돈이죠. 그럼 얼마나 벌어야 돼? 그건 몰라요. 돈 있어봤자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제 뉴스 보니까 문신한 한국 남자가 베트남 여자를 팼지요. 죽으라고 팬 거예요. 한두 번 팼겠어요. 남자는 구속당했는데 베트남 여자가 한국에 왜 왔어요? 돈 벌려고 왔지요. 그들은 돈만 벌 수 있다면 조폭이라도 괜찮다. 그걸 감수하고 온 거예요.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우린 아낌없이 악마한테 고개 숙일 만반의 준비가 다 돼있습니다. 그게 원자적인 개인이 취할 수 있는 한계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허약한 유대입니다. 아주 허약해요. 거미줄보다 더 약해요. 언제 끊어질지 모릅니다. 자, 베트남 여자가 얻어맞아서 남편 구속되고 지는 갈 데 없어서 베트남으로 왔다 칩시다. 친정부모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더러운 것 잘 됐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등짝 때리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란 말이죠. 어디 가도 돈 없으면 사람대우 못 받습니다.
실패한 것 위로하는 것도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그것도 더는 위로 안 됩니다. 인생 실패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천덕꾸러기가 되는 거예요. 카프카의 [변신]이란 소설에서 평생을 가장 노릇했는데 하루아침에 벌레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돌보는 양 하지만 나중에는 온 가족이 다 떠나버리는 거예요. 그 유대관계가 돈으로 엮여진 관계에요. 네가 뭔데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그겁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잖아요. 엄마가 아플 때 자식은 도리 합니다. 허나 마음속으론 뭐예요? 아버지, 지금까지 돈도 못 모으고 치료비도 없이 왜 나한테 덤터기를 씌웁니까? 내 청춘 있고 내 인생 즐길 권리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프면 내 남은 인생 보상할 겁니까? 돈을 아들한테 다 주고 딸이라고 무슨 이런 죄가 다 있나. 또 요양병원 가라니까 말 안 듣네. 환경이 다르다고 버티는 거예요.
안 가면 어떻게 할 건데, 안 가면. 난 정신 우울증 걸릴 판인데. 무슨 고집도 그런 고집이 다 있습니까. 왜 안 갑니까? 나의 고유함과 나의 나됨을 나의 절대성을 자식이 죽든 말든 지키겠다는 거 아니에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도 나이 들면 그럴 것 아니냔 말이죠. 너 키운다고 5억 들었다. 이렇게 나올 것 아니냔 말이죠.
따라서 구원 찾지 말고요,
하나님 나부터 조져주세요. 마귀를 보내든지 누굴 보내든지 나로 하여금 살 가치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 달라. 이게 복이에요. 전부 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나로 인한 내가 살고자하는 것에서 튀어나온 거예요. 그걸 다윗이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번제고 제사, 그런 변명거리가 아니고 교회행사하고 참석하는 게 아니라 상한 심령이다.
얼마나 다윗의 마음이 상했는지 몰라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우리야 죽기 전에 지가 죽는 게 나아요. 범죄 하고 난 뒤에 살래, 죽을래? 범죄 한 게 부끄러워서 죽는 게 나아요. 안 죽입니다. 왜? 상한 심령으로 살아야 되기에. 너 때문에 예수님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으면서 증거하라 이 말이죠.
하나님은 다윗언약 그 틀 안에 주님 계시고 우리를 그 안에 집어넣었어요. 다윗만 경험하는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도 같이 경험하라고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새 언약이에요. 우리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남편 죽이지 않았습니다. 웃기지 마. 마음속으로 나에게 무시하고 모욕감 줬다고 저 인간 죽어도 마땅하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살인죄고, 그리고 어떤 여자가 아름답다는 생각만 들어도 어떤 남자가 멋있다고 들어도 이미 간음죄에요.
방탄소년단 다 죽어야 돼요. 세계의 소녀들 마음을 멍들게 만들었어. <겨울연가> 일본 아줌마들 좋아하는 배용준이 욘사마 죽어야 돼. 진짜 일본 남자들이 항의했잖아요. 욘사마 때문에 이혼하게 생겼다고.
세상 자체 속에 다윗언약을 집어넣는 거예요. 율법은 하늘에 있어요. 허나 율법에 따라서 어떤 인물이 등장하게 되면 환경이 전부고 동일한 현실이라고 여겼는데 낯선 현실이 뿜어져 나올 때 그 낯선 현실 중에 그중에 한 사람이 우리라면 우리는 이미 영생 얻고 구원 얻고 천국 간 사람입니다.
요엘 다시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재앙과 심판에서 마땅히 멸망당해야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누가 구원받을 자냐? 여기서 요엘 선지서의 전개는 이렇게 돼요. 벽에 부딪쳐버려라. 아까 요엘서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황충이 다 갉아먹지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잡혀갑니다. 그 황폐한 땅을 떠나요.
27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하나님께서 함께 있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뭘 포기하고 뭘 감사하라? 젖과 꿀, 외양간의 소 이런 걸 포기하고 무엇으로 기뻐하라?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 하나님 존재의 언약적 기능으로 참여된 것을 기뻐하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남은 자가 되고, 그 남은 자에게 뭘 주느냐? 28절에 보면,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돼있어요.
그렇다면 여기서 세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우리한테 세 가지를 집어넣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가 생명을 얻어요. 생명은 율법 지켜서 오는 게 아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갈라디아서 3장 2절에 나오지요. 네가 의롭게 된 것은 율법을 행함이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돼요. 영생은 성령으로 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영생 주시는 분이에요. 영생 받겠다고 성령에게 손들지 마세요. 손든다고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성령이 오게 되면 영생이 주어져요.
두 번째 성령은 뭐냐 하면, 이 땅의 고난을 견디는 힘을 주십니다. 고난을 없애주는 게 아니에요. 고난을 없애주면 우린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 되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에요. 고난을 없애주는 게 아니고 고난 속에 일부러 집어넣고 그 고난조차도 우리의 성령의 힘을 이기지 못함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건 어디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4장 7절, 신약성경 289페이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항상 내가 아니란 것이 그냥 습관처럼 저절로 튀어나와요.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지난번에 보쌈집에 갔잖아요. 우겨 쌈을 당하여도, 환경입니다. 환경이 나로 하여금 이질적 존재라는 것을 환경이 말해줘요. 우겨 쌈을 당하여도 어떻게 합니까? “싸이지 아니하며” 그걸 부러워하지 아니하며 거기에 대해서 겁내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참 이런 표현이 어려워요. 설명하기도 어려워요. 왜냐하면 일단 답답한 일이기 때문에 답답합니까, 답답하지 않습니까? 일단 답답하지요. 그런데 답답하지 않데. 무슨 이런 기적이 다 있어요. 답답하라고 주신 환경인데 안 답답하데. 이것은 자기를 시체로 간주할 때나 가능합니다.
성경은 이거에요. 가시는 길 곱게 하시옵소서. 보람상조에요. 가시는 길 곱게 보내주는 거예요. 그냥 살았다고 여기지 말고 이왕 죽었다 치고 가는 거예요. 그들 말에 고개 숙이고, 죽은 자가 무슨 고갤 숙입니까, 죽었는데. 뭘 더 얻겠다고. 죽은 자는 죽음만 얻으면 되지 더 이상 플러스알파 얻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얻어봤자 허무가 또 찾아옵니다. 꼴랑 이것 얻으려고 그 더러운 짓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행 갈 때 짐 쌀 때 제일 기뻐요. 비행기 탈 때 기분 좋지요. 그때부터 기분 끝났습니다. 가자마자 열세 시간, 허리 아프고 앞에 애가 울지요. 내려서 기분 좀 내려고 하는데 세 번, 네 번씩 짐 꾸리고 테러 때문에 한국 사람입니까, 짐 풀어보세요, 하면 또 다 풀어야 돼. 벌써 지쳤지요. 나오면서 소매치기 방지한다고 가방 앞으로 돌리고 지갑 단단히 챙기고. 짐 관리해야지 건물 봐야 되지, 정신이 없어. 또 가이드가 빨리 가자하고. 나이 육십 넘어서 갈 일이 아니죠. 나중에 여행 갔다 와서 주일날 교회도 못 갑니다. 퍼져서 시차 때문에 잔다고요.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혼자 사는 게 아니지요. 예수님의 새 언약 속에 십자가 안에 있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서 하나에 참새가 되고 들풀이 되면 돼요. 왜? 직접 살려주니까. 들풀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걱정할 권한은 없어요. 아궁이에 들어가면 주께서 들어가게 하면 목 잘려서 들어가는 거고, 참새가 굶어죽으면 참새가 그걸로 다 된 거예요. 그저 가시던 길, 주님과 동행해서 가면 되는 겁니다.
이게 성령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래요. 성령 안에서는 이미 그 자체로 의기 때문에 율법 지키고 안 지키고 평가하지 마세요. 자기가 스스로 자길 심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살았으면 심사하세요. 이미 죄로 죽었거든요. 죽은 놈 만져봐야 소용없잖아요. 죄로 인해 죽었는데 뭘 거기서 흔들어서 기도하라고 왜 깨우느냐 말이죠. 죽었는데. 무슨 낙을 보겠다고, 이 땅에서.
네가 가난한 것은 기도 안 해서 가난했다. 목사가 맨날 교회에서 하는 보이스피싱이 그거잖아요. 기도 안 해서 가난하다는 거예요. 애 성적 떨어진 것이 말씀 안 지켜서 그렇다는 거예요. 말씀대로 안 살아서 그런 게 아니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그럴 필요도 없는데 헛짓한 거예요. 내 욕심 때문에. 기도해서 이익보겠다고 그 자체가 마귀한테 꼬임당한 짓거리한 거예요.
기도는 안 하는 게 아니고 하게 하셔요. 치약 배 터지도록 누르는데 아예 안 할 수가 있어요? 주여, 이것 너무 심합니다. 안 할 수가 있겠어요? 그게 기도에요. 기도는 반드시 옳은 기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 목숨을 이 내용과 바꿨습니다, 라고 해야만 기도에요. 더는 안 살겠다는 내용과 바꿔치기 해주세요, 할 때나 기도지, 이것 이뤄지면 더 살겠다는 것은 가식이죠.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자주 되는 게 아니에요. 나의 계획이 좌초될 때 나의 모든 의도한 것이 다 망가졌을 때 깨지는 거죠.
다시 오늘 본문 13편 봅시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아까 다윗 앞에서 했던 것을 다시 해봅시다. 다윗의 환경들. 첫째는 왕, 두 번째는 시온이라 했지요. 세 번째는 뭐라 했습니까? 죽음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시온 봅시다. 시온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도시에요. 천사의 도시, 신의 도시. 그걸 다윗한테는 시온이란 이름으로 주신 겁니다. 시온은 언약궤가 안치되는 곳이에요. 언약의 최종 도착지점이에요. 시온에서 지옥도 나오고 천국도 나오는 겁니다. 성전이 없는 곳 언약궤가 없는 곳이 지옥이고 언약궤 있는 곳이 천국이 돼요.
전에 여러 번 봤는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오거든요. 11장 19절에 보면,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이래서 성경은 언약궤의 만들어짐과 이동경로, 그게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부활승천하신 경로, 그게 성경의 중심이에요. 예수님이 언약궤니까, 예수님이 어린양이고. 그래서 언약노선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비현실적 사람입니다. 망상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남은 자에게만 성령이 오는 데 남은 자들의 어디 모이느냐 하면, 시온 산에 집결해요. 시온은 다윗 궁전이 있는 도성이죠. 다윗은 사실은 껍데기는 다윗이지만 속에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예수님이 시온의 왕으로 오시고 시온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13편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곧 시온에 그 정체가 높은 산처럼 우뚝 솟은 그 순간이에요. 그게 요엘에 나옵니다. 요엘에 보면 성령이 남녀노소 관계없이 남은 자에게만 오게 되고 성령이 온 사람은 나중에 시온에서 기뻐해요. 어디서 기뻐하느냐? 시온에 모여서 기뻐해요. 최종 도착지점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이게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 도착지점이 시온이에요.
그러면 나머지 도성들은 어떻게 되느냐? 시온 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모든 민족들은 다 멸망해야 돼요. 그래서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에 보면 이방민족의 멸망이 예언돼있어요. 이스라엘 예언자가 자기 것만 하면 되지 남의 민족 멸망까지 왜 하느냐? 이게 숨겨져 있는 시온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낮춰야 돼요. 다 없애버려야 돼요. 이 땅에서.
그렇다면 이 땅이 단순히 나쁘다, 악하다가 아니라 이 땅을 두 종류로 구획, 두 영토로 나누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되지요. 이 땅은 좋다고 그게 지옥인지 천국인지 구분도 못하면서 그냥 이 땅에서 있어야 돼요. 그런데 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언약에 속한 다윗은 특이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 특이성을 오늘 본문대로 설명하게 되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죠. 그 원수는 새로운 환경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믿는 언약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돼있습니다. 핍박하는 모습이죠.
그러면 그 시온이 오늘날 교회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베드로전서 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시작된다.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 자체가 이스라엘 아니었다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거든요. 손에 만져지잖아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이란 부동산을 갖고 있어요.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소유다, 내 터다, 라고 있는 그것은 항상 쪼개져야 돼요. 쪼개지고 그 안에서 감추어진 내용이 솟구쳐 올라와야 돼요. 시온 성이.
그렇다면 우리 몸이 눈에 보이죠. 거울 보면 우리 몸이 있잖아요. 잘 봐놓으세요. 죽고 나면 더 이상 못 봅니다. 물론 늙어서는 거울도 잘 안 보려 하지요. 아무리 발라도 안 예뻐지니까. 내가 안 예뻐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안 예쁘면 그동안 나한테 나의 고유성과 나의 나됨을 칭찬해주던 그런 사람들이 꼴 보기 싫다고 하나둘씩 연결고리가 헐거워져서 떠나 버릴까봐 그게 걱정이 되는 겁니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건 여자가 똥배 나와서 그렇다는데 똥배 안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예뻐 봐야 인생 고락을 같이 했는데 뭐가 예쁘겠어요. 그땐 같이 바람피우면 되지, 뭐. 능력이 안 되는데? 능력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해야지.
하여튼 법을 찢어버려야 돼. 법은 뭐냐? 변명입니다. 모든 법은 변명이에요. 법대로 해라. 자기 잘났다는 변명이에요.법은 필요 없어요.
영생은 뭐로 온다? 성령이 와서 법이고 나발이고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그 안목이 증거인데 법을 지켜서 영생은 없습니다. 그거는 악마의 속임수가 교회가 그렇게 속이고 목사가 그렇게 속이는 거예요.
이제 마지막 마치겠습니다. 세상 멸망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터무니없이 너무 거리가 있어 보이죠. 이렇게 괜찮은 세상에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진다? 말이 안 된다. 난 못 믿겠다. 그건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고발하기 때문에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기어이 자기 잘남을 이야기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변명대고 내가 어떻고 하지만 자긴 알아요. 또 죽은 놈이 이 땅에서 떠나기 전에 잘난 척해봤구나. 주여, 용서하옵소서.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 다시 한 번 말씀의 세계로 되돌아올 수 있는 그러한 능력, 그게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받았기에 이 세상을 부러워하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이 작용함을 저희들이 느끼게 하여 주시옵소서.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을 제발 부러워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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