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0b 부산강의 : [시편]16(9편)-배제 (강의:이근호 목사)
복음을 아는 순간부터 자꾸 외톨이가 되고 외로워지지요. 그럴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내가 잘못 됐나, 라는 생각, 내가 뭔가 안 가야 될 길을 가고 아니해야 될 말을 하고 상대방에서 잘못 상대하고 죄악 된 길을 했기 때문에 보편적인 그들의 생각에 위배된 요소가 나한테 생겼는지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는 자체가 주의 일에 오작동이 아니고 제대로 지금 작동되고 있는 중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의 일부거든요. 이 세상은 순수하면 안 돼요. 항상 섞여줘야 되고 같이 투쟁이 일어나야 돼요. 이 땅에서 평안을 얻겠다든지 평온을 얻겠다는 것은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겁니다. 이 세상이란 공간의 성격을 몰라서 그래요.
좀 쉬고 싶거든 돌아가서 쉬세요. 안식의 때는 이 동네 아닙니다. 해운대 고층아파트가 안식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 아파트 값 내려간다고 난리야. 안식의 때 아니에요. 죽고 난 뒤에 쉬세요. 죽고 난 뒤에 안식이 되려면 벌써 내 속에서 죽고 난 뒤의 안식이 이미 내 안에서 시작이 돼야 돼요. 작동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기뻐해야 되고 무엇으로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상 자체가 시시하고 시답지 않다는 것을 절감해야 돼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파트 주님이 날 욕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게 다 그들의 심심해서 하는 거거든요. 할 짓이 없어서 하는 거라고요. 자기 애 아파 보세요. 그 생각 없어지지. 좀 여유 있다 이 말이죠. 뭐 어디 긁을 거리 없나, 재미난 오락거리 없나 하고 씹기 위해서 또 하나 정치적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요동치는 거예요.
9편 1절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주께 전심으로 감사하지요. 언제 우리가 감사하냐 하면, 나에 대한 의식이 중지될 때 감사가 나옵니다.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면 감사가 멈춰요.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애쓰지도 않았는데 주어졌을 때 감사되잖아요. 이건 내 의식의 중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감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만 시시한 게 아니고 나 자신도 정말 시시합니다. 왜냐? 곧 죽게 되니까. 없어질 만해서 주께서 없애주잖아요. 그러니 나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면 감사가 날아가고 나를 놔버리면 감사가 본격적으로 개시가 돼요.
그런데 이런 감사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내 몸이 아플 때는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픔이 내 마음대로 아픈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성도에게 두 가지를 줍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아픔을 줍니다.
왜 아프냐? 우리가 갖고 있는 아담의 몸 때문에 아파요. 아무리 건전한 사고, 바른 태도, 바른 행동해도 이빨이 아프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감기몸살 걸리면 짜증 외에는 나올 게 없지요. 그런데 짜증이란 짜증난 요소 난 없어지면 해소될 문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는 시편 9편에서 원수라 하는 것은 짜증을 내는 정도가 아니고 근원적인 분노에요. 분노와 격분을 문제 삼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작업만 곱게 하시는 게 아니고 그걸 극렬하게 반대하는 악마의 자태도 같이 들춰지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를 복잡하게 했는데 아까 식대로 해봅시다. 신의 폭력과 국가가 벌이는 폭력이 있다고 했지요. 거기까지 이야기했지요. 국가의 폭력은 무엇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까? 법치국가. 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어서 기존 교회에 성화론이 있잖아요. 점점 더 거룩해야 된다고 할 때에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는데 거룩하기 위해서 거룩을 올리기 위해서 기존 교회에서 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법과 규칙의 세밀화입니다. 그러니까 더 힘든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에베레스트에 산소통 메고 올라가는 것보다 안 메고 올라가는 것이 법적으로 더 거룩한 거예요.
성화라는 것이 오락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즐거워하거든요. 제가 아까 두 번째 할 때 무엇이 되면 감사가 없다고 했어요? 자기한테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점점 더 감사가 없어지는 이유는, 바로 어떤 수준이 돼버리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수준이 또 있어요. 이걸로 배고픈 거예요. 그래서 히딩크가 4강이 배고픈 거예요. 적어도 준우승, 우승까지 해야 배불러요.
성화론에서 사람들이 뭘 지키려하느냐 하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자기 내의 법치적 제도지요. 이걸 지키기 위해서 보다 더 난코스로 지키고 어렵게 어려운 사정을 동원해서 요소를 집어넣어서 더 자기를 아프게 해서 하겠다는 그 욕망 이게 감사겠습니까, 자기 자아 극대화겠어요? 자기 극대화지요. 자기 요소를 더 크게 가져가는 거예요. 스스로 만든.
결국 목적이 있어요. 뭐냐? 나는 법대로 지켰다는 것. 이것 선배들이 누구지요? 바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할 때 등장하는 그 바리새인. 그 바리새인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성화론이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겁니다.
폭력은 목적이 있는 게 폭력이에요. 국가적 폭력, 자기 성화론. 그러나 신의 폭력에는 목적이 없어요. 그 대표적인 발언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시편 22편을 인용하면서 하신 말씀 있지요. 시편 22편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목적이 없어요. 그냥 버리는 거예요. 신의 폭력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세상의 죄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이 격분하고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저주받아 지신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것도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그것이 이 세상에 뭔가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가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은 거예요. 그것이 신의 폭력이거든요. 신의 폭력에 목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은 정답은 아니고 목적이 감춰져있는 겁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인간이 스스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신의 폭력은 터무니없는 징벌로서 많이 감지됩니다.
예를 들면 늘 복음만 사랑하고 늘 주님만 사랑하는데 몸이 아프고 나을 기색도 안 보이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고 그럼에도 자식이라도 잘 되면 편하겠는데 자식은 갈수록 골칫거리고 주변에 자기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렇게 세상에 버려진 존재가 될 때에 원인과 결과를 자꾸 사람들은 연결시켜보거든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으면 납득이 되지만 나쁜 짓한 기억은 없는데 징벌은 오히려 더 가중될 때 이게 난감하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잖아요. 내가 고난 받아야 될 목적이 없어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신의 분노를 자기 홀몸으로 다 받아내고 있는 겁니다. 이럴 때 세상은 그 사람을 낯선 사람으로 보겠지요.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그 본문이었습니다. 주의할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얻어요. 아시겠어요? 내가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게 아닙니다. 그 차이가 천국과 지옥 차이에요.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하면 누가 건재해야 돼요? 내가 아직 있어야 돼요. 기존에 내가 예수 피 이용해서 천당 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할 때는 옛날 나는 사라져야 돼요. 내가 생각해놓은 나는, 내 구원은 내가 없어지는 동시에 없어져야 돼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 결정 소관이에요? 예정된 기쁘신 뜻대로 구원될 자가 구원되지요. 그건 내가 관여할 입장이 아니지요. 그래서 내가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미쳤다는 말로도 모라자고 결국 이상한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 있는 흔한 사람 말고 이런 사람은 없을 거야,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피로 말미암아 피가 피 되는 합당한 인간을 새로 창조해내니까. 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거기에 부합되는 인간을 새로 제조해요. 새로 만들어낸다고요.
교인수 필요 없어요. 쓰레기니까. 교회 아무 의미 없어요. 사도바울은 교회하려고 전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교회답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누구 소관이냐? 말씀이 먼저고 말씀이 알아서 택한 백성, 하나님 아들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된 사람도 예수님 못지않게 이 땅에 핍박을 많이 받는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우리가 저쪽을 배제했는데 이 땅의 모습은 오히려 성도가 배제된 자에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세상을 버렸는데 세상 입장에서는 우리를 세상에 넣어주질 않아요.
아까 복음 알면 외롭다하지요. 배제된 자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배제된 자와 동일시됨으로서 무엇이 점점 더 구체화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분명하게 되고 이것이 팩트로서 실제로 이 세상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배제된 자의 출몰로 인하여 이쪽이 정치적 세력화돼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똘똘 뭉쳐 단결된 거예요.
그럼 여기서 신의 폭력이 작용합니다. 신의 폭력이 어디로 작용합니까? 신의 폭력이 정당화되려면 배제된 자를 주님께서 미끼로 던져요. 그러면 그들이 철저하게 배제하겠지요. 니 우리와 대화가 안 된다. 배제하겠지요. 주님께서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을 집어넣고 그 피조물에 대한 학대와 미움과 멸시와 모멸을 유인하게 하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나머지 세계를 신의 폭력으로 할 때에 그 다음 중요합니다.
그들은 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군 이유를 납득이 돼요, 안 돼요? 그들이 아는 율법적 해석과 복음적 해석에선 도저히 신의 폭력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 대목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지금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마귀와 싸우지요. 옛 뱀, 용. 그런데 이들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울산강의에서도 했지만 성경은 비-현실적이에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걸 현실로 국한했을 때 성경은 눈에 보이는 걸 피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과학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거든요.
망원경에 보이는 것까지가 과학의 한계에요.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과학이란 증명해야 되니까. 증명한다는 말은 눈으로 확인될 때만 진리로 흡수하니까. 크로마뇽인이 있었다. 지구역사는 46억, 우주역사는 137억이다. 뭐로 이야기해요? 화석 보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화석은 눈에 보이죠.
눈에 보이는 것 따로 해석은 누가 합니까? 인간들이 해석하는 거예요. 해석할 때 순수합니까? 감정이 들어가 있어요. 어떤 감정? 바로 기존의 세계를 정치적 질서, 인간들이 보이는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해석에 가미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아주 신나게 이야기하죠. 어리석음으로 공략해라.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똑똑함에 대해서 성도가 싸울 것은 십자가 피를 믿는 그 어리석음 외에는 없다. 자진해서 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구원되리라. 신학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가 돼야 돼요.
그게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어떤 주체적인 개입을 배제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배제해야 돼요. 왜? 자기 자신을 붙들지 않아도 구원됐기 때문에. 이런 자유가 어디 있어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 나왔지요. 간음한 여인이 구원받았지요. 그 여인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내가 간음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그러면 간음의 구원의 근거가 돼버려요. 일체 구원의 근거는 인간 쪽에선 나와선 안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구원받았습니다. 왜 구원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은 이거에요. 주께서 먼저 나를 예정하사 찾아왔기 때문에. 이게 정답이에요. 내가 핍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가 핍박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여기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앞뒤가 잘 안 맞는 이야기지요. 증거했는데,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뭘 이겼다는 거예요? 내 생명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는 일에 그들이 승리한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그리고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돼있어요. 그리고 땅에 있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아까 강의대로 하면 신의 폭력이 있다. 무엇을 즐거워하라 했습니까?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했잖아요. 내가 사는 쪽으로 내가 말려들지 않게 된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말을 인하여 이기었으니 그들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다. 내 생명을 아끼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내 목숨을 귀하게 여기기 않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겁니다. 이걸 아까 이야기한대로 한다면, 내 목숨을 하찮고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는 안목, 그건 우리 속에 신의 폭력을 먼저 담아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내치고 작살내도 그것은 주께서 목적을 가지고 하신 일이기 때문에 수긍해야 되고 인정해줘야 돼요.
그걸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지요. 성도에게는 몸의 아픔이 있다고 했지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성도 아닙니다. 또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어제 오후 설교하면서 했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다. 생각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미워하니까 죽였을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다는 이 말은, 이 땅에 밥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끝까지 부활까지 책임을 지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땅에서 부부로 마감돼야 합니까, 아니면 부활시키지 못하는 남편으로 마감돼야 되겠어요, 아니면 영원한 남편, 부활까지 책임지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공감해야 돼요? 어느 것이 귀합니까? 넘어서야 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마저도 넘어서 그분을 사랑할 때 모든 게 사랑이죠.
이번에 아가 하면서 사랑을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한 건 이겁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할 말이 있어야 되겠지요. 적어봤어요. 사랑 앞에서. 다른 말로 하면 피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사랑 앞에서 특징은 뭐냐? 아무것도 속일 필요가 없어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속이잖아요.
집 계약할 때 사랑합니까? 사랑하지 않지요. 계약서도 사랑하지 않지요. 무슨 사랑에 계약서가 필요합니까? 계약서라는 것은 서로가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계약서 있잖아요. 사랑 앞에서, 결혼할 때 사랑의 맹세하잖아요. 그게 말이 안 돼요. 사랑인데 무슨 맹세가 필요합니까?
사랑 앞에서 속일 필요 없다는 같은 말은 뭐냐 하면, 사랑은 우리의 본색을 다 드러내는 거예요. 왜? 우리의 본색이 속이는 주특기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이미 남들 앞에 속이는 본성이 가동된 상태로 대한다는 그 사실조차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그걸 언제 아느냐 하면, 속여도 소용없는 사람을 만날 때 그게 드러나요.
속여도 소용없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네 살 이하 아이 앞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지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속일 생각이 없는 게 어린아이에요. 있는 그대로 보여줘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네가 어린아이와 되지 아니하면 천국을 못 가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앞에서 서보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어른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속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속여야 내 존재가 건사된다는 그것이 논리가 아니고 습관화됐어요. 특히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혼자 살아야 되잖아요. 혼자 살려면 끊임없이 속여야 되지요.
편의점에서 애들이 물건 훔치는 것, 이게 무슨 스트레스입니까? 스트레스가 다 어디서 오는 거예요. 나 아닌 나를 내가 억지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겁니다. 성질 같으면 회사에 사표 던지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서 참고 있잖아요. 참는다는 말이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속일 때는 속임이죠. 자꾸 속여보세요. 나중에 자기 몸에 일부가 됐어요.
사랑 앞에 서면 어린애처럼 되어 본인이 속일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잖아요. 백종원 나오는 예능프로 <골목식당>있지요. 거기에 되게 말 안 듣는 사람 등장했어요. 홍탁집하는 사람인데 중국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짐작하기는 창녀를 대는 포주 역할 그런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쫓겨났으니까. 그런 설이 있어요. 하여튼 말을 되게 안 들어요. 엄마가 속이 썩는 거예요.
백종원이 사비 30만원 투자해서 닭 열 마리나 자르라 해도 그 말도 안 들어요. 하여튼 시키는 대로 안 해요. 온 천하에 불효자에요. 국민 말썽꾸러기. 요새 시청률이 높거든요. 모든 말썽꾸러기의 대변자가 된 거예요. 엄마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고. 닭곰탕 만들어서 웃음을 회복했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적폐 요소가 인간에게 다 들어있는 겁니다. 사랑을 한 번도 서본 적이 없어요. 교회도 물론 안 다녔을 거고. 십자가 거저 주신 사랑 앞에 안 섰기 때문에 지독하게 자기 집착하니까 자기 속이는 것밖에 없어요. 그 속임의 극치가 악마인데 그 악마의 극치가 이겁니다. 부처에요.
지금 천주교가 부처 못 돼서 난리 났어요. 천주교, 불교 서로 통합니다.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나를 부처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전부 다 부처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요구하는 건데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으로 정당화시켜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뭐 안에 있다? 알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젊은 애들 나이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칠 십 넘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사랑 앞에서 어린애가 되니까 아무것도 속일 필요가 없어요. 사랑 앞에서 위장이 필요가 없지요. 김종환이 불렀지요. <사랑을 위하여> 사랑 앞에서 옷을 벗어버리죠. 창세기 2장 이야기입니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예요. 수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바쁘지요. 지 부끄러움 가리기에 바쁘잖아요. 몸이 변조됐어요. 몸이 이미 저주받을 몸이 된 거예요.
부끄러움을 내내 품고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랑 앞에 서지 않고 단독적 삶을 실존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르트르처럼, 니체처럼. 내 몸으로 부처처럼 되겠다는 거예요. 절대자가 돼 보겠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교회 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옷을 벗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 알기 때문에 자기를 위장하는데 위장하는 기술이 선과 악에 대한 윤리 도덕입니다. 윤리 도덕이 되면 끝까지 고수해야 될 것이 자아개념, 나라를 것을 끝까지 고수해야 돼요. 점잖은 사람 있지요. 건드려보세요. 그 점잖음이 다 날아가요. 한 순간에.
신학교수들의 이게 강렬해요. 자아가. 신학도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헌금이 죄고, 신학 하는 것도 죄고, 예배드리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건전한 것만 남기려고 해요. 자꾸 건전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만 따로 챙기려고 해요. 그것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영광은 뭐냐 하면, 옷을 벗을 때 영광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임이 발각될 때 그게 최고의 영광이에요. 영광 돌리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위장 안 하면 돼요. 위장술을 부리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안 가리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다시 시편 9편으로 돌아옵시다. 시편 9편에 신의 폭력이 있거든요.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향하셨음이여”
방금 여러분 다 보셨지요. 오늘 강의 안 들었다고 칩시다. 시편 9편 14~16절 그것만 봤다고 칩시다. 딱 와 닿는 우리의 느낌이 뭐냐? 이거에요. 주님이 너무 나댄다는 느낌 안 듭니까? 세상 좀 조용하게 가게 하면 안 되겠어요? 왜 이런 분탕질, 이런 요란스러운 일을, 폭력을 왜 행사하느냐? 좀 의아한 느낌 들지 않습니까?
안 들었다 치고, 모른다 치고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왠지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마음이 들 것 같은데요. 우린 조용한 게 좋아요.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평화로운 게 좋아요. 이렇게 시편 9편 14절, 15절, 16절 너무 요란스럽고 과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과도하게 몰아세우는 이유가, 17절 봅시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지옥에다 모든 악인을 열방을 보내는 거기에 대해서 평소에 우리의 관심사가 이런 데 꽂혀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우리의 관심사가 뭐예요? 지금 시편 9편과 관계있다, 없다? 관계없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물든 거예요. 뭔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아까 사랑처럼 사랑 오면 사랑까지 덥석 안으려고 생각해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이고, 사랑 좋지. 사랑해주니까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나 신의 폭력이 빠졌지요.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신의 폭력을 정면으로 받았던 그분의 요소가 우리에게 누락된 거예요. 빠져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편 보게 되면 주님께서 너무 나댄다는 느낌 들고 괜히 조용한 세상,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주께서 분탕질한다는 불만을 터뜨린 거예요.
여러분들이 평소에 눈물 흘리고 감격할 때 꼭 기독교 신자에게만 감격스럽습니까, 아니면 신자, 불신자 종교적인 이유 다 때려치우고 정말 마음 끌릴 때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싶을 때 없었습니까? 그런 경우 많지요. 종교, 교회 다니고 그런 것 빼고. 같이 울어주고 싶고 같이 얼싸안고 그런 경우 많지요.
월드컵 4강 올라갈 때 기독교 신자냐고 안 물어보지요. 혹시 여호와증인이냐고 저리 밀고 이런 것 아니죠. 동성애자냐고 안 묻잖아요. 그냥 4강에 꽂혀서 얼싸안고 난리 나잖아요.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시편 9편 14절은 의아해보이고 주님 하는 일이 늘 상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잖아요. 그만큼 주님의 진짜 사랑과 우리는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 물들었어요. 독자적으로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깊숙이 들어가 있는 우리는 어떻게 시편 9편의 마당으로 끄집어냅니까? 이건 신의 폭력이에요. 신의 폭력의 특징이 이유가 없어요. 욥과 똑같은 거예요. 목적도 없어요.
그냥 치는 거예요. 죽으라고 치는 거예요. 우리를. 정신 차리라고 치는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돼요. 우리는 그걸 아픔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편 9편과 성경 전체에선 그걸 아픔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으로 말합니다. 그게 사랑이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랑이에요. 십자가에 죽으라고 내버린 게 사랑이었어요.
우린 챙기는 걸 사랑으로 보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지를 때 비로소 우리는 버림받아 마땅함을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고 뭔가 내가 이 땅에 있다는 자체가 낯설어져야 돼요. 미쳤어. 내가 왜 여기 있지? 진즉 사라져야 되는데 장기판, 바둑판 엎듯이 사라져야 되는데. 지난 번 해운대 벤츠에 내가 받쳐 죽어도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미친놈한테.
시편 9편에 동의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시편 9편을 주신 이유입니다. 율법은 시편 9편은 같은 말이에요. 인간을 더욱 더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건방 떨면서 시편 9편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상하게 평소에 내 의식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가 여기 적혀있습니다.
에이, 두 번 다시 안 볼래. 그래서 성경 안 보는 거예요. 노출되기 싫어요. 조용하게 사는 이걸 건사하고 싶어서. 유지하고 싶어서. 그냥 살던 대로 살지 내가 신학박사도 아니고 알아서 뭐하느냐. 이런 식이에요. 그런 식으로 가보세요. 원망하지 말고. 속으로 알 수 없는 공포 느끼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격분하지 말고, 세상 탓하지 말고.
이유를 이야기하면 안 들으려 하고 알 수 없는 격분은 솟아오르고. 남편 하는 꼬라지, 아내 하는 꼬라지, 자식 하는 꼬라지,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문재인 정치하는 꼬라지, 박근혜 꼬라지 뭔가 알 수 없는 분노는 느끼면서 이유도 모르면서 성경은 안 보고.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제 이야기합니다. 이게 전쟁일까요, 재판일까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제목 바꿔야 되겠다. 전쟁과 재판. 주님께서 미리 심판/재판한다는 걸 아셔야 돼요. 보이지 않는 법이 있어요. 그게 십자가란 법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내리신 분, 그건 염라대왕이고 하나님이 직접 죽었다는 거예요. 염라대왕은 안 죽었어요. 부처는 안 죽습니다. 안 죽는 존재가 부처에요.
퀸이라는 밴드가 있는데 이 사람이 양성애자에요. 동성애고 양성애고 정신병자입니다. 왜 이런 정신병이 생기느냐 하면, 아까 내 논리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어요. 이런 분노가 폭발하게 되면 이런 양성애, 동성애, 정신병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과도한 것에 피난하기 때문에 마음을 둬요.
현재 마음으로 감당이 안 될 때는 과도한 행동으로 만들어놓고 거기를 도피처로 삼아요. 이걸 사람들은 일탈이라고 합니다. 젊은 애들이 학업에 시달리고 공부하란 소리 들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 공부할 테니까 드럼 사 달라, 오토바이 사 달라고 하지요. 빠라빠라빠라바~ 이것 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왜 해야 되는데요? 그게 일탈이에요. 공부 잘하는 애가 방탄소년단에 잠시 빠져있다. 일탈입니다. 뭔가 도피처를 마련하는 거예요. 거기에 빠지는 것이 억눌린 본성과 합치돼요. 이건 논리로 설명 안 돼요. 기분이 저절로 끌려가요. 방탄소년단 그 노래에 10억의 청소년들이, 10억이 뭡니까? 20억이 넘는다. 어른들까지 합세해서 거기에 다 빠져들어요.
전에 이야기했지요. 랩은 본인이 직접 작사해야 랩이 돼요. 남이 한 랩은 랩이 아니에요. 본인이 가사를 쓰고 발표한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한테 해소하는 방법이 그 음악 장르가 되는 겁니다. 가락도 귀찮아. 도레미솔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아. 그냥 내뱉어지는 대로 분출이죠. 그걸 저는 아까 횡포와 광란. 그런 자식을 부모세대가 어떻게 싸잡을 수 있습니까? 미치고 싶은 것이 본성인데요.
신이 폭력을 치게 되면 이게 쫓기거든요. 쫓겨서 광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신의 폭력이 노리는 것은 네가 자아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음을 겨냥해서 치는데 자아가 깨지는 게 아니고 그놈의 자아를 가지고 피난 가는 거예요. 새로운 일탈로. 아무리 해도 이 자아가 당구공 같아서 안 깨집니다.
하나님, 네가 뭔데? 예수, 네가 뭔데? 내 인생 내가 응원해요. 내가 격려해주고 내가 관리하고 있어요. 신약에선 이걸 성령을 안 받아서 그렇다. 십자가 영을 안 받으니까 옷을 벗을 수가 없어요. 옷을 껴입어야 돼요. 세 겹, 네 겹 계속해서 들키기 전에 내 분노를 내가 스스로 감추기 위해서 옷 입고 내가 자제하기 위해서 점잖은 옷을 입어야 되고.
옷을 하나둘 벗는 게 아니고 계속 껴입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힘드니까 힘든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고 암 걸리고. 암 안 걸리기 위해서 노래방에 가든지 빠라빠라바 하든지 분출해야 되고.
18절 봅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배제된 자를 여기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아들을 가난한 자로 보고 궁핍한 자로 보는 거예요. 시편에서 가난한 자, 궁핍한 자는 하나님 언약 때문에 사회에서 소요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사회에서 내쫓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까 요한계시록 봤지요. 그들의 하소연과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과 저주를 유발시키지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분노, 모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분노입니다. 신의 폭력이에요. 신의 폭력을 땅에 쏟아버려요.
인간은 자아를 갖고 있으니까 신의 알 수 없는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자아가 안 깨지려고 더욱 더 대항하겠지요. 악순환이 계속 되는 세계, 이게 불 심판을 받아 마땅한 세계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언약이 없는 사람은 전부 다 신의 폭력 앞에 물 앞에 다 수몰당하잖아요.
지금 강의하고 있는 이것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팩트입니다. 시편 9편대로 하나님이 일하실 거예요. 시편 9편 외에 다른 일은 안 하십니다. 시편 9편대로 그대로 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가난한 자가 누구냐고 물을 거예요. 가난한 자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가난한 자를 생산할 거예요. 없는 가난한 자, 없는 궁핍한 자 생산될 거예요.
이 사람들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옷을 벗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시시하고 시답지 않는 걸로 보고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간음한 자가 예수님한테 들켰지요. 공개했지요. 간음한 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단하게 보겠습니까, 시시하게 보겠습니까? 간음했던 시시함으로 보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으로 죄의식을 주느냐 하면, 제발 네 자신에 대해서 손을 놔버려라. 쥐고 있다고 소중한 보물 되는 것 아니다. 내가 쥐고 있을 때는 의인 되지만 니가 쥐고 있을 땐 주님의 심판만 촉발될 뿐이에요. 아주 매를 벌어.
19절 봅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민주주의와 완전히 대척이죠. 민주주의는 인간의 승리를 구가하잖아요. 인간의 가치, 인간의 인륜성, 인간의 인간다운 것, 인간이 개나 소 짐승이 아니고 인간다워야 한다. 인간의 인륜성이라 하는데 헤겔에서는.
인륜성은 객관적인 자연적 사실과 주관적인 느낌이 합치될 때 보장된다. 내가 저 과일을 먹고 싶다. 과일 있어야 돼, 객관적. 먹고 싶다는 내 주관성, 이것이 만족할 때 인간답다는 겁니다. 나는 행복해야 된다. 주관성이죠. 행복할 조건들, 돈 있고 몸 건강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안정될 때 그게 객관성이죠. 행복하고 싶다는 나의 주관성과 그걸 보장해주는 객관적 상황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륜성이란 뭡니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거죠. 이건 다른 말로 인간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9편 19절에 보면 그 인간의 승리를 주께서 용납해요? 일체 용납 안 하죠. 이게 주의 기사, 1절을 봅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자, 성도하는 일은 뭡니까? 그걸 작살내는 일을 주께서 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 일을 맡겨준 것에 감사하는 거예요. 인간 승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 끝났어. 신의 폭력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의 폭력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된 작업뿐입니다. 언약적인 작업 그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인간 승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 발 뺀다고요. 사람이 자랑스러워할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이 결과를 남한테 내세웠을 때 남들이 박수 치는 그게 인간 승리에요. 우리 애 이번에 사법고시 됐다. 그게 인간 승리라니까. 왜? 그걸 못한 사람들은 부러워하니까. 내가 갑이 되잖아요.
이제부터 스스로 을이 되길 원하십시다. 을이 되는 기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는 서로가 을이 돼야 돼요. 왜? 주님보다 더 을다운 분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까지 복종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20절 마저 합시다.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자기는 인생뿐이다.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성경이 대표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 너희는 니 인생뿐이지 자아뿐이지 이젠 죽었어. 지옥이야. 이렇게 하는 거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저희들 엉뚱한 세상, 엉뚱한 속성, 습관화된 우리의 자질 이것이 주의 일을 방해한 죄인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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