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배제 1812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2. 08:11
2018-12-10 16:54:00조회 : 388         
배제 181210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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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25.♡.150.1)18-12-12 14:11 
20181210a 부산강의 : [시편]16(9편)-배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9편입니다. 1절에 보면,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주께서 일하신 것을 기사라 하지요. 시편 9편을 대하면서 먼저 생각할 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 중에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계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특이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만든 건 맞아요. 맞는데 자신의 비밀과 자신의 계시는 이스라엘에게만 준 거예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대해서 굉장히 불편합니다.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남들에게 소개하려면 저쪽에선 안 받아주는 게 너무나 당연하거든요. 만약에 받아준다면 무슨 원리에 위배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택했다는 그 원리에 위배되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오직 이스라엘 나라를 제사장 나라로 만들었거든요. 출애굽기 19장에서. 그러면 구원은 누구 받는 거예요? 이스라엘만 받아요. 

그러면 이스라엘 외에는 구원받으면 돼요, 안 돼요? 안 되는 겁니다. 그 원칙을 하나님께서 계속 유지시켜 나가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오해를 해요. 이스라엘을 택해서 다른 민족도 구원시킨다, 라는 이스라엘을 전쟁기계로 사용해서 그들에게 전파하게 되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얻게 하려고 먼저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줬고 그들의 전도하게 되면 이방인들도 구원받는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라면 처음부터 이스라엘만 선택했다는 사실을 무효화시켜야 돼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시는 이유는, 내 아들이거든요.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 되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아버지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아브라함언약 가운데서 아버지가 돼요.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자식이 발생돼야 아브라함은 아버지 값을 해요. 아브라함에 생산된 이삭에게 육적인 아버진 맞는데 하나님의 자기 표상, 그러니까 나는 택한 백성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아들이 된다는 그 표상, 그 내용은 아브라함언약에서 이삭이 등장해야 되지 이삭이 빠지면 나타낼 수 없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아들 된다는 것은 아버지 값을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에 아버지가 누가 있어요? 권사님, 아버지 살아 계십니까? 아버지 계시니까 권사님이 태어났잖아요. 기존에 아버지가 있단 말이죠. 기존에 아버지란 인상, 이미지 다 있지요. 

아버지의 이미지란 아버지가 있을 때 난 없었다는 게 이미지거든요. 아버지 있음에 자식이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은 나중에 있는 거예요. 이게 아버지와 아들의 이미지 관계에요. 우리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먼저 계셔서 나를 만들어준 분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잖아요. 

따라서 이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이 아버지로 등장할 때만 하나님의 아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언약관계라 하는 거예요. 주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하지요. 보통 교회 교인들이(신자라 할 수 없지만) 기도할 때 뭐라 합니까? 아버쥐~ 아들 값을 해야 아버지지. 아들 값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아버지에요. 

기존에 집안에 같이 살던 아버지의 이미지를 그대로 하나님 세계에 덮어버린 거예요.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무턱대고 덮는 거예요. 보통 가정에서 아버지라 하면 아버지가 마음 넓어서 어지간한 것은 다 용납이 되고 용서가 되고 도와주잖아요. 그 이미지를 그대로 교회로 가져와서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와 같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냥 아버지라고 부른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 티를 낼 때만 그 현장이 아들이 생기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은 아버지 아니에요. 누구한테만 아버지겠어요? 아들에게만 아버지인데 그 아들이라는 것이 언약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는 발생되지 않습니다. 언약은 창세전에 나와요. 창세전에 이미 확정됐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에게만 줬고 이스라엘의 이름은 아들이에요. 그런데 이 말은 아들로서 구원의 범주는 확정돼버렸어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 안 하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신)이 만들었으니까 알아서 구원하겠지.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만 구원해요.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아는가? 이스라엘에 준 계시에 의해 알아요. 그 계시가 뭔데? 언약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놨는가? 아들 된 자와 아들 아닌 자를 구분 짓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 언약으로 구분하지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아들이고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죠. 그럼 아들이 아닌 자는 어떻게 되는가? 천국에서 약속에서 배제되잖아요. 이 땅에서 언약에서 배제되지요. 그 속성이 그대로 이 세상이 끝나도 똑같이 돼요. 천국에서 배제된 자 지옥 가요. 

천국에서 배제됐다면 흔히 말하는 선교나 전도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돼야 됩니까? 언약 증거하고 방금 제가 이야기한대로 언약은 무슨 용도입니까? 배제하기 위한 용도에요. 전도 참 쉽지요. “너 아니야.” 이게 전도에요. “너 교회 오면 안 돼.” 이게 전도라니까요. 교회 오세요, 하는 게 전도가 아니고.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서 뭐라고 고백하기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했죠. 사도행전 전체가 누가 봐도 선교하는 전도하는 책이잖아요. 전도의 진수가 마지막에 나옵니다. 네가 나한테 많이 들었잖아. 들었지만 무슨 용도로 들은 거예요? 깨닫지 못하는 용도로 들은 거예요. 

왜 깨닫지 못하느냐 하면, 구약의 선지자, 문서를 남기는 선지를 문서선지자라 합니다. 문서선지자의 시초가 이사야거든요. 이사야 6장에 보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나오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유대 나라, 주변 나라에 전도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에 너희들이 십분의 일이 남아도 그것마저 작살나버린다. 

그리고 예레미야에도 그런 말씀 나와요. 너희들 중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의를 안다면 내가 이 도성을 멸망하지 않겠다. 이거는 소돔과 고모라에만 나오는(창세기 18장) 게 아니고 예레미야에도 나와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넒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예레미야도 문서선지자거든요. 

계시는 누구한테 줬다? 이스라엘. 계시의 내용은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으로 이스라엘은 아들이 됐지요. 아들이 될 경우에만 비로소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아들이 발생될 때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아들이 없으면 그냥 하나님이에요. 일반 신이에요. 아들과 아버지는 언약의 두 내용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내용이 아버지와 아들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 세계로 복음을 전한다는 데 그런 취지는 없어요. 그런 내용을 이스라엘에게 준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아들을 더욱 더 아들답게 하는 그것이 목적 끝이에요. 그러면 언약을 선교한다, 전도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 전도하는 게 아니고 아들인 자와 아들 아닌 자를 구분 짓기 위해서 전도하는 거예요. 

구분하는 방식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오직 아들에게만 계시 주었다는 그 사실. 아들 아니라면 안 믿어져야 되고 못 알아들어야 마땅한 하나님의 일관된 조치가 된다는 겁니다. 세상은 아들중심, 언약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자기중심이란 말을 했지만 사실은 자기중심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중심이에요. 

악마의 지배를 벗어난 그런 인간은 없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이미 악마의 마음을 접수한 순간부터 아담의 자식 모든 후손들은 계속해서 악마의 통치 하에 있습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 죄가 왕 노릇한다는 거예요. 그 증거를 대라. 그 증거가 죽는 거잖아요. 

목사님, 장기 둘 줄 알아요? 장기를 재미있게 두는데 사모님이 와서 이건 일도 안 하고 맨날 장기만 두나? 신경 바짝 쓰면서 장기를 두고 있는데 위에서 엎어버렸다. 그러면 장기 두었다는 사실을 없어졌지만 그래도 장기판과 알은 남아 있잖아요. 인생을 보세요. 인간이 한평생 신경 써서 살아왔는데 죽어버리면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바둑, 장기는 판이라도 남지 인간은 죽었다는 그 순간부터 이미 없어진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몽땅 없어지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없어질 걸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진솔한 이야기, 이거는 진지한 이야기고 당연한 이야기에요.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애써 거역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워요. 

방금 이야기를 적으면, 살다 죽으면 안 산 것이 된다. 맞지요. 그리고 안 태어날 수 없는 거고 살지 않으면 죽음도 없고 죽게 되면 사는 것도 없어지고. 결국 남는 것은 죽음만 남지요. 이 죽음을 죽음답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겁니다.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러한 원칙은 우리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고 바로 이 땅에 이스라엘 또는 예수님도 그 원칙을 준수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존재로 태어나서 없어지고 무 존재로 끝나지만 똑같은 현상을 겪어도 이스라엘은 그냥 존재로 와서 무 존재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또는 계시에 의해서 태어났거든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태어났다가 세상 사람은 그냥 죽지만 이스라엘은 언약을 드러내면서 죽어요. 언약의 내용을 구체화시키면서 그걸 표현하는 용도로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살 때는 언약을 드러내는 용도로 살아가는 겁니다. 

언약의 내용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요.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 진정한 아들이다. 그러니까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게 없으면 아들이 아닌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천국 갈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똑같은 현상들이 반복됩니다. 

그러면 성도가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요? 죽어도 다시 살아야 되는 것이 나의 책무지요. 나의 의무고. 왜? 내가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은 이방인들이지만 아들 되는 사람은 아들답게 되는 그것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거든요. 왜 아들 돼야 될까요? 내가 아들답게 되는 그것은 무슨 조건에 부합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된다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없는 아들을 만드신 거예요. 그리고 아들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 것도 하나의 전진이고 행진이 되는 거예요. 기쁨 행진. 다른 사람은 죽음이 슬픈 날이지만 우리는 아들 됨의 기능을 아주 충실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필히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체의 죽음이 그걸 말하는 겁니까? 신체의 죽음이 아니고 오늘 시편 9편이 시작되는 거예요. 시편 9편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기사, 하나님의 모든 일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죽음과 부활을 미리 거기다 심었고 담아내는 기능을 적어놓은 거예요. 잘 이해되시죠. 

다시 한 번 걱정 돼서 이야기합니다만 이스라엘 택해서 다른 사람 구원하란 게 아니고 아들과 아들 아닌 자를 명확하게 구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쓰신 거예요. 그래서 신약에서 구원된 사람을 온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 아들, 내 전부. 아들 아닌 자는 일체 한 명도 이 안에 들어오도록 내가 허용하지 않은 것에 성공했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그런 성공을 진자교회는 잘하고 계시죠? 너 같은 인간은 오지 마.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되고, 이유를 설명하려면 설교에서 언약으로 십자가 복음으로 나와야 돼요. 당신 오지 말라고 사적으로 이야기할 순 없거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 모르니까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천국은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람, 이게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배제한다는 뜻입니다. 포섭은 간첩들이나 하는 짓이죠. 포섭하면 안 돼요. 목사가 한 명 전도하나 못하나 구원받기는 마찬가지인데 하나님께서 맡기지 않는 일을 너무 오버해서 지가 큰 목회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대지 마세요. 정신상태가 잘못된 됩니다. 주신 사람이나 잘해. 이래야지요. 

지금까지 한 걸 이야기하게 되면, 신자란 성도는 무엇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안 믿는 사람이지요. 왜? 배제해버리니까. 무엇을 안 믿겠어요? 세상적인 것, 아들 아닌 것을 안 믿는 사람. 그걸 아주 우습게보고 가벼이 여기는 사람, 그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하찮은 일이란 말이죠. 이걸 쉬운 말로 시시한 일. 뭐가요? 내가 사는 게. 

죽어서 부활되는 게 아들의 역할이라면 살려고 하는 그 모든 노력과 역량은 전부 다 시시한 일이고 하찮은 일이고 신경 안 써도 되는 일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리 나는 살아야 됨을 안 믿는 사람이 성도가 돼야 돼요. 죽고 사는 것은 우리 손에 달린 게 아니니까.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하나님이 계셨지만 이 땅에 아들이 없었다 해봅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버지가 안 돼요. 이 땅에 없는 겁니다. 없는데 아들이 등장했어요. 사람이 등장한 게 아닙니다. 사람은 많아요. 아들이 등장한 거예요.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 그런 인간들 많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언약의 조건에 맞는 생성 조건에 맞는 아들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이 있다면, 단순히 있어야 될 걸 있다고 붙들 이유는 없어요. 왜냐하면 없는 데서 있게 한 언약적인 요청과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면 생겨난 내 몸이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은 언약에 비해서는 시시한 일이고 하찮은 일이고 그건 하나님의 추진 방향과 반대 방향이에요. 역행하는 거예요. 

술 먹고 운전 잘못해서 역주행하면 난리 나잖아요. 살아야 되겠다는 건 역주행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 가신 길과 비교해보면 돼요. 예수님이 가신 길은 살고자 하는 길이 아니고 요한복음 10장에 나는 스스로 죽고자 한다 했어요.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는데 십자가가 어디 놀이기구입니까? 십자가가 우방랜드, 에버랜드 놀이기구에요? 곗돈 타는 날이 십자가입니까? 축하하고 승진하고 크리스마스에요, 십자가가? 생일 축합니다, 노래 부르는 게 십자가에요? 아니잖아요. 아까 장기판 이야기하면서 죽는 이야기했지요. 

언약적 사명만 남기고 나는 과감히 사라지는 날이 십자가거거든요. 그런데 내가 살고자 하면 언약적 사명은 없고 달랑 살아야 되겠다는 고집스러운 내 몸만 신체만 쭈그럭쭈그럭 늙어가는 내 몸만 붙들고 있는 겁니다. 이건 무리수입니다. 이건 억지에요. 요새 세상 사람들 전부 다 억지입니다. 뭐 헬 조선이 어떻고 그런 소리하는 그게 전부 다 억지거든요. 

결국 이건 횡포와 광란으로 이어집니다. 방탄소년단 노래부터 해서 요새 젊은 애들 랩 보세요. 광란입니다. 횡포에요. 어떤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분노에요. 내 몸 하나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데 왜 안 도와주느냐? 그런 태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런 태도를 교회에서는 노골적으로 분노하진 않지만 교회 안 나오지요. 성경 안 보지요. 하나님에 대해선 아예 듣지도 않고 다 차단시켜버리죠. 이게 소극적인 반발이고 분노를 표시하는 겁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시편 119편에 나오는 말씀 있잖아요.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산다. 그 이야기조차도 듣기 싫어요. 세상을 향한 분노, 광란과 횡포부리는 그것만 그냥 도출할 뿐이에요. 뭐 노란조끼 시위? 프랑스에서 멀쩡한 고급상점가를 털고 있다는 거예요. 그 분노가. 미국의 흑인들 폭동 보세요. 멕시칸들 폭동 보세요. 하루하루 삶이 분노를 어떻게 하나 그것 티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70 넘은 노인들의 특징은 악으로 살아간다고. 왜냐하면 자기는 잘 나갔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대우가 시원찮거든요. 옛날 잘 나갔을 때 품위 유지해달라고 뭔가 거시기(something)가 있어야 되는데 거시기 없는 거예요. 노인장님 뭐가 불만입니까? 거시기라니까. 거시기가 뭔데? 몰라. 

몸은 아프지요. 위로를 받아야 되는데 다 바쁘다고 위로해 줄 사람 아무도 없지요. 억눌린 욕망을 풀어야 되는데 이건 뭐 케이블티비 보고 풀고 김제동 욕하고 그런 식으로 푸는 거예요. 이게 한순간의 생각이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누적된 습관 됐어요. 자기의 정신구조가 돼버렸습니다. 악마의 역사입니다. 여기 1절의 하나님의 기사라 했는데 악마의 기사에 우리가 억압돼있어요. 

분노 이외에는 아무 표정이 없는 것, 이게 어린아이에게까지 파급돼요. 어린아이들 유튜브에서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 보지요. 그 애들이 학원에 오지요. 학원에서 말 곱게 안 해요. 욕을 못 섞어서 환장했어. 이건 섞으면 안 된다는 조심하는 것도 없어. 친구들끼리 욕을 섞으면서 하고. 

선생이 영어를 가르치는데 인성교육까지 해야 되는지 주저하게 만들어요. 애들을 조져야 되는지 영어만 가르치고 보내야 되는지 어른으로서 갈등을 일으킨다니까요. 장래를 생각해보면. 그 애들을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집에서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집에선 좀 자체할 거예요. 집에선 자체된 스프링이 또래 만나면 폭발해버려요. 그러면 바깥에서 하는 게 습성화돼요. 사회 전체가 분노의 사회에요. 잘 먹고 잘 산다고요? 분노인데요? 분노가 행복합니까? 

여기 9편 2절에,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존재하시는 주님이 아니에요. 아까 1절에서 봤지요. 일하시는 기사, 뭔가 열심히 일하잖아요. 일함을 통해서 주의 주되심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거예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이 땅에서 무슨 일을 주의 이름으로 했기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3절 봅시다. 내 원수들이 물러갔다는 겁니다. 원수가 등장하죠. 방금 제가 서론적으로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은 이 땅에 아들 남기는 작업을 하신다. 아들이 그 일을 못해요.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아들이 하는 겁니다. 언약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다르다고 했지요. 아브람은 자식이 없어요. 이스마엘은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비로소 아버지가 돼요. 누구 때문에? 없는 자식이 새로 생길 때 아버지가 되는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 숨어있던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언약 속에 담아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고 그 아브라함 자손의 이름이 네 자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만 제시한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 언약의 백업이라 보면 되는 겁니다. 정보를 다 따로 간직해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usb에요. 

따라서 아까 제목을 배제라 했잖아요. 배제가 되려면 하나님과 아들 관계를 수립하려 할 때에 곱게 용납하는 세상인지 묻는 거예요. 이 세상은 곱게 용납을 안 해요. 그러면 하나님과 아들 관계에 죽어라고 달려들어서 그 관계를 끊고자 하는 세력이 있겠지요. 

시편 2편 2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사로 꾀하여 여호와의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보세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스라엘에게 준 시편 2편이라는 계시 외에는 정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인슈타인, 호킹 박사, 물리학, 정치학, 인문학, 철학 어떤 것도 시편 2편 2절, 3절을 대신할 수 없어요. 철학을 아무리 연구해보세요. 하나님의 아들을 끊고자 하는 이것이 그 철학 속에 담겨져 있습니까? 안 담기지요. 언약 외에는 없지요. 

시편 2편 7절을 읽어보세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케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일관되게 하십니다. 뭘 이 땅에 남긴다? 아들을 남기죠. 그럼 아들을 남긴다면 이 세상이 곱게 받아줄 나라가 아니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크리스마스 때 했잖아요. 누가복음 2장에 많이 하지요. 

아기 예수 태어날 때 예루살렘이 조용했습니까? 소동했지요. 동방박사와 아기 예수님 가족만 조용했고 나머지 주변은 난리도 아니에요. 무슨 난리입니까? 왜 그래요. 아기 하나 낳은 게 그렇게 싫은 거예요? 그 아들이 보통 옆집에 태어났으면 축하하고 떡 주고 그러면 그만이에요.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게 일반인 육적인 죽을 아기라면 되는데 이 아들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적 아들이라면 반 언약적 기질을 갖고 있는 악마가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알아차려서 아기 예수 죽이려고 헤롯을 추동해서 베들레헴의 두 살 밑에 아기들 다 죽여 버렸잖아요. 베들레헴 가 보세요. 지금도 죽은 도시에요. 베들레헴 가서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거기에 반영해보란 말이죠. 이 동네에서 두 살 밑에 애들 다 죽었단 말이죠. 그리고 그게 팩트에요. 

지금 우리는 팩트를 다루고 있는 겁니다. 위로 삼아 하는 교훈집을 다루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여기 숨 쉬고 있는 것이 사실이듯이 우린 팩트를 다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일하고 하나님 아들 되는 작업은 내가 직장 생활하고 돈 버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팩트에요. 

우리는 내가 하는 일에 돈을 획득한다는 그 구조밖에 모르죠. 그러나 지금 주님은 노시지 않습니다. 일하십니다. 그래봤자 너는 아들이냐? 그게 아들의 다냐? 돈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들로서 보여줄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아들다움이냐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3절에 원수들이 물러간다 했지요. 원수들의 물러가는 것이 우리의 능력입니까? 1절에 주님께서 일하시는 역량의 결과로 원수들이 물러가죠. 원수가 나오죠. 원수의 실체를 다른 민족은 몰라도 이스라엘만큼은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 적을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알 수 있어요. 내 돈 사기 처먹은 사람이 내 적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내 적은 뭐냐? 나를 살리려 하는 것이 나의 적이에요. 주님 가신 방향이 141번 버스라면 우리가 가는 것은 560번 버스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타라고 자꾸 독려하는 것 그게 하나님의 원수고 우리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쪼그라들게 만드는 그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세력, 그게 바로 악마가 하는 짓이죠. 

하나님이 아버지로 등장해야 되는데 그냥 하나님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등장할 때 그게 바로 악마가 하는 짓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아버지로 등장하게 되면 우린 어느 길로 가야 돼요? 아버지가 딱 나오면 맞은편에 뭐가 등장해야 돼요?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로 작용한다면 아버지가 아버지답게 되는 것은 뭔가? 하나님이 아버지답기 위해서 우릴 아들답게 만들고 아들의 원형과 모델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신 그분이거든요. 나는 나로 인하여 존재하면 안 돼요. 덧씌워진 어떤 임무가 있어야 되고 역할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 가신 길은 장렬하게 죽는 길이거든요. 그런데 반 언약, 악마의 가는 길은 뭐냐 하면, 예수님 시험받을 했잖아요. 말씀보다는 뭐? 떡, 인기 없음보다는 뭐? 인기 있음. 기적 행해서 유명해지는 것보다도 그냥 조용하게 사는 것, 그 다음에 세상 권력을 다 쥐겠다는 욕망을 긍정하는 것보다도 세상 권력에 대해서 그것을 시시하게 보는 시답지 않는 것으로 보는 그것. 

색깔이 완전히 다른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세력 사이를 두 종류의 세계가 이미 시작되었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릴 아들로 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으로 인하여 실제적인 정신적인 핍박과 고난을 늘 당할 수밖에 없어요.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그 말씀이 있어요. 제가 한 때 좋아했던 구절이에요. 신학교 때 너무 이 구절이 좋아서 제가 생각했던 십자가의 의미를 너무 함축적으로 이야기해줘서 기뻤던 구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제가 신학교 때 이 본문을 왜 그렇게 좋아했느냐 하면, 교회에서 설교를 해보니까 예수의 피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자기 생활 근거지는 따로 장만해놓고 하나님은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다만 교회 나와서 내 천당 갈 수 있는 필수요건 있잖아요. 예수 십자가를 믿어줄게, 예수님의 고난을 인정해줄게, 라고 선악과 따먹듯이 따먹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어요.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구원을 챙겨서 도망치듯이 교회를 빠져나가버린 거예요.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게 한 교회가 아니고 어느 교회 가도 전도사 되도. 봉화제일교회, 영주에, 기장에, 안동성광교회, 대덕교회 하여튼 가는 곳마다 특징이 뭐냐 하면, 교인들이 전부 다 그런 식이에요. 문화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오페라 구경 간다, 어디 놀러간다 할 때 그게 본업이 아니잖아요. 자기 본업 있고 스트레스 받으니까 오페라 구경에, 영화구경 가잖아요. 똑같이 교회 오는 게 본업은 따로 있고 이건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평생에 일궈놨기 때문에. 교회 와서 시시덕거리는 거예요. 문화 활동, 여가 활동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아닌데 하고 보니까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가신 길을 같이 나그네 길로 동행하게 하신 거예요. 이게 주의 일입니다.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은 내가 정신 차려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동행하심으로 아들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아들의 원형은 예수님이니까. 

친구를 사귀어도 아들이 되신 분과 사귀어야지 아들 될 수도 없는 사람과 친구로 사귀면 무엇이 자기 인생에 모델이 되고 그 분위기에 흡수되겠어요? 시답지 않은 것, 하찮은 것, 시시한 것을 반대로 절체절명으로 고귀하다고 우기는 그들과 한 통속이 될 게 아니냐 말이죠. 

여러분 교회가 중요합니까, 예수님 피가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 피가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교회 가면 뭐가 더 중요해요? 예수님의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건물 부동산, 땅, 터, 조직체 그게 더 중요한 거예요. 

오늘 시편 9편 본문은 주님의 일에 관심을 두자는 거죠. 관심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신의 폭력이에요. 어디 나오느냐? 그 뒤에 6절을 볼게요.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방금 시편 9편 6절 말씀을 저도 봤지만 여러분도 봤지요. 지금 주님의 행태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요? 깡패 아닙니까. 세상을 좀 조용하게 살면 안 돼요? 점잖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점잖음. 그런데 우리가 아는 이스라엘은 점잖은 이미지입니까? 폭력도 그런 폭력이 없어요. 그게 신의 폭력이거든요. 

벤야민이란 사람의 표현인데 신의 폭력, 이건 정의의 폭력이에요. 국가의 권력행사와 신의 폭력에 차이가 있어요. 국가의 권력행사, 경찰이 음주 단속하는 것 있잖아요. 그리고 사형시키고 감옥에 집어넣는 것. 국가의 권력행사는 목적이 있어요. 질서유지죠. 다른 말로 법의 가치를 계속해서 붙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시위하는 건 좋은데 합법적으로 하란 말이 그 뜻이에요. 

민주주의사회는 시민들이 모여서 결정한 겁니다. 그래서 삼권분립이 국회, 행정, 법이죠. 없는 법을 새로 만드는 데가 어딥니까? 입법기관, 국회라 하는 거예요. 국회 우선이에요. 민주주의 시작은 입헌군주제거든요. 개인의 의사로 통치되지 않고 건전한 양식으로 시민의식을 가진 다수가 결정한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가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입니다. 진짜에요.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하늘나라입니까? 아니죠. 마귀에 속한 인간들 백날 해봐야 민주주의 최고의 진리로 그냥 행세하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뭐냐? 점잖아 보이는 마귀의 최종적인 정치형태에요.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뭐냐 하면, 법으로 시작해서 법으로 말미암아 법으로 마감되는 겁니다. 법치주의 국가가 민주주의의 기본이에요. 

그럼 법은 늘어나겠어요, 줄어들겠어요? 계속해서 늘어나요. 라텍스 침대에서 라돈 방사능이 얼마나 나오는지 그것까지 다 나와요. 계속 세칙 만들고 규칙 만들고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이제는 변호사도 필요 없어요. 인공지능으로 돌려야 돼요. 나중에는 법원도 필요 없어요. 법을 어겼습니다. 어떤 법입니까? 인공지능아 이 사람이 무슨 법을 어겼지? 이런 법을 어겼습니다. 인공지능아 몇 년? 3년. 이러면 끝. 법이란 문자적이거든요. 문자적은 정보거든요. 정보를 인공지능에 집어넣어서 자동적으로 모든 것에 처벌규정이 다 나오게 돼있어요. 

국가에서 하는 두 가지 일은 세금 거두는 것과 치안문제에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크리스마스 때 목자들이 있지요. 그때가 나오거든요.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호적을 왜 하느냐 하면, 하나는 세금 거두고 또 하나는 치안 확보에요. 외부적으론 국가를 방비하는 목적도 있지만. 

이게 법으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법으로 하면 일반인들이 납득이 될까요, 안 될까요? 납득이 되지요. 그러면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이 외친 보이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이건 납득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잖아요. 보세요. 이 세상에 법의 한계가 그거에요. 이해가 되는 식으로 한다는 게 한계에요. 

그러나 이 땅에 심어준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해되는 쪽과 안 되는 쪽을 계속해서 배제하고 구분 짓지요. 천국이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이 임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에요.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도란 배제입니다. 삐질라 하면 오지 마. 이 복음에 문제 있거든 오지 마. 전도 잘하신 거예요, 그거. 정말 잘하신 거예요. 전도할 수 있는 용기, 성령의 용기입니다. 

그러면 저쪽에서 뭐라 합니까? 그래서 밥이나 빌어먹고 살겠나, 교회 되겠나? 진자교회 언제 문 닫는지 보자. 진자교회가 문 닫아야 교회가 떠요. 진자교회가 죽음이거든요. 진자교회가 교회로 한 몸으로 부활되고. 우리교회 죽고 하나밖에 없는 교회로 부활되고. 다른 교회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참혹해서 생각만 해도 끔직해서. 

이것 하고 십분 쉽시다. 지금 시편 9편에서 원수를 하나님의 아들 입장에서 언약 입장에서 하느냐 하면, 이겁니다. 과연 니들 보기에 하나님 벌이신 것이 전쟁인가, 아니면 재판인가? 미리 하는 재판인가, 아니면 전쟁으로 보이느냐? 다른 이방민족에서 이스라엘 전쟁은 뭐로 보입니까? 이스라엘 자기 민족을 확장시켜 키우기 위한 전쟁으로 보이지요.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재판으로 보는 거예요. 하나의 선교고 전도가 되는 거예요. 그 기준은 언약입니다. 

언약에서 잘 이해가 안 되거든 방주에서 잣나무 막을 생각하면 제일 좋아요. 방주 만들 때 잣나무로 만들었잖아요. 두께 있을 것 아닙니까. 두께 바깥은 물이죠. 안쪽에는 동물들 있지요. 그 경계선, 안에 들어가면 살고 밖에 나가면 죽는 것, 그게 언약이에요. 그 잣나무가 그들 보기에 전쟁을 통해서 계속해서 발생시키는 겁니다. 생성요건이 언약이에요. 

그런데 그들은 전쟁으로 보지만 주님께서 의로운 재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의를 통과한 거예요. 의를 통과해서 방주 안에 있는 것처럼 언약 안에 있는 겁니다. 무엇을 통과했다? 그 무섭다는 하나님의 의를 통과한 겁니다.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 (IP:125.♡.150.1)18-12-12 14:12 
20181210b 부산강의 : [시편]16(9편)-배제 
(강의:이근호 목사) 


복음을 아는 순간부터 자꾸 외톨이가 되고 외로워지지요. 그럴 때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내가 잘못 됐나, 라는 생각, 내가 뭔가 안 가야 될 길을 가고 아니해야 될 말을 하고 상대방에서 잘못 상대하고 죄악 된 길을 했기 때문에 보편적인 그들의 생각에 위배된 요소가 나한테 생겼는지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는 자체가 주의 일에 오작동이 아니고 제대로 지금 작동되고 있는 중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의 일부거든요. 이 세상은 순수하면 안 돼요. 항상 섞여줘야 되고 같이 투쟁이 일어나야 돼요. 이 땅에서 평안을 얻겠다든지 평온을 얻겠다는 것은 그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겁니다. 이 세상이란 공간의 성격을 몰라서 그래요. 

좀 쉬고 싶거든 돌아가서 쉬세요. 안식의 때는 이 동네 아닙니다. 해운대 고층아파트가 안식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 아파트 값 내려간다고 난리야. 안식의 때 아니에요. 죽고 난 뒤에 쉬세요. 죽고 난 뒤에 안식이 되려면 벌써 내 속에서 죽고 난 뒤의 안식이 이미 내 안에서 시작이 돼야 돼요. 작동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기뻐해야 되고 무엇으로 감사해야 되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상 자체가 시시하고 시답지 않다는 것을 절감해야 돼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아파트 주님이 날 욕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게 다 그들의 심심해서 하는 거거든요. 할 짓이 없어서 하는 거라고요. 자기 애 아파 보세요. 그 생각 없어지지. 좀 여유 있다 이 말이죠. 뭐 어디 긁을 거리 없나, 재미난 오락거리 없나 하고 씹기 위해서 또 하나 정치적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세상이 그렇게 요동치는 거예요. 

9편 1절 다시 보겠습니다. 내가 주께 전심으로 감사하지요. 언제 우리가 감사하냐 하면, 나에 대한 의식이 중지될 때 감사가 나옵니다.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면 감사가 멈춰요.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애쓰지도 않았는데 주어졌을 때 감사되잖아요. 이건 내 의식의 중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질 때 비로소 감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만 시시한 게 아니고 나 자신도 정말 시시합니다. 왜냐? 곧 죽게 되니까. 없어질 만해서 주께서 없애주잖아요. 그러니 나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면 감사가 날아가고 나를 놔버리면 감사가 본격적으로 개시가 돼요. 

그런데 이런 감사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내 몸이 아플 때는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픔이 내 마음대로 아픈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성도에게 두 가지를 줍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성도에게 아픔을 줍니다. 

왜 아프냐? 우리가 갖고 있는 아담의 몸 때문에 아파요. 아무리 건전한 사고, 바른 태도, 바른 행동해도 이빨이 아프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감기몸살 걸리면 짜증 외에는 나올 게 없지요. 그런데 짜증이란 짜증난 요소 난 없어지면 해소될 문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는 시편 9편에서 원수라 하는 것은 짜증을 내는 정도가 아니고 근원적인 분노에요. 분노와 격분을 문제 삼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 작업만 곱게 하시는 게 아니고 그걸 극렬하게 반대하는 악마의 자태도 같이 들춰지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를 복잡하게 했는데 아까 식대로 해봅시다. 신의 폭력과 국가가 벌이는 폭력이 있다고 했지요. 거기까지 이야기했지요. 국가의 폭력은 무엇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까? 법치국가. 법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어서 기존 교회에 성화론이 있잖아요. 점점 더 거룩해야 된다고 할 때에 어제 오후에도 그런 설교했는데 거룩하기 위해서 거룩을 올리기 위해서 기존 교회에서 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법과 규칙의 세밀화입니다. 그러니까 더 힘든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에베레스트에 산소통 메고 올라가는 것보다 안 메고 올라가는 것이 법적으로 더 거룩한 거예요. 

성화라는 것이 오락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즐거워하거든요. 제가 아까 두 번째 할 때 무엇이 되면 감사가 없다고 했어요? 자기한테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점점 더 감사가 없어지는 이유는, 바로 어떤 수준이 돼버리면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비로소 알게 되는 수준이 또 있어요. 이걸로 배고픈 거예요. 그래서 히딩크가 4강이 배고픈 거예요. 적어도 준우승, 우승까지 해야 배불러요. 

성화론에서 사람들이 뭘 지키려하느냐 하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자기 내의 법치적 제도지요. 이걸 지키기 위해서 보다 더 난코스로 지키고 어렵게 어려운 사정을 동원해서 요소를 집어넣어서 더 자기를 아프게 해서 하겠다는 그 욕망 이게 감사겠습니까, 자기 자아 극대화겠어요? 자기 극대화지요. 자기 요소를 더 크게 가져가는 거예요. 스스로 만든. 

결국 목적이 있어요. 뭐냐? 나는 법대로 지켰다는 것. 이것 선배들이 누구지요? 바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할 때 등장하는 그 바리새인. 그 바리새인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성화론이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겁니다. 

폭력은 목적이 있는 게 폭력이에요. 국가적 폭력, 자기 성화론. 그러나 신의 폭력에는 목적이 없어요. 그 대표적인 발언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시편 22편을 인용하면서 하신 말씀 있지요. 시편 22편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목적이 없어요. 그냥 버리는 거예요. 신의 폭력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세상의 죄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이 격분하고 계시기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저주받아 지신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것도 나무에 달려 돌아가신 그것이 이 세상에 뭔가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가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은 거예요. 그것이 신의 폭력이거든요. 신의 폭력에 목적이 없다는 말은 사실은 정답은 아니고 목적이 감춰져있는 겁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인간이 스스로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신의 폭력은 터무니없는 징벌로서 많이 감지됩니다. 

예를 들면 늘 복음만 사랑하고 늘 주님만 사랑하는데 몸이 아프고 나을 기색도 안 보이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고 그럼에도 자식이라도 잘 되면 편하겠는데 자식은 갈수록 골칫거리고 주변에 자기에게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렇게 세상에 버려진 존재가 될 때에 원인과 결과를 자꾸 사람들은 연결시켜보거든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벌 받으면 납득이 되지만 나쁜 짓한 기억은 없는데 징벌은 오히려 더 가중될 때 이게 난감하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욥이잖아요. 내가 고난 받아야 될 목적이 없어요. 이유도 없어요. 그냥 신의 분노를 자기 홀몸으로 다 받아내고 있는 겁니다. 이럴 때 세상은 그 사람을 낯선 사람으로 보겠지요.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그 본문이었습니다. 주의할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 사함을 얻어요. 아시겠어요? 내가 예수의 피를 믿음으로 죄 사함 받는 게 아닙니다. 그 차이가 천국과 지옥 차이에요.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겁니다. 

내가 예수 피를 믿음으로 하면 누가 건재해야 돼요? 내가 아직 있어야 돼요. 기존에 내가 예수 피 이용해서 천당 가는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할 때는 옛날 나는 사라져야 돼요. 내가 생각해놓은 나는, 내 구원은 내가 없어지는 동시에 없어져야 돼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 결정 소관이에요? 예정된 기쁘신 뜻대로 구원될 자가 구원되지요. 그건 내가 관여할 입장이 아니지요. 그래서 내가 설교 초반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미쳤다는 말로도 모라자고 결국 이상한 사람이에요. 

사도바울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이 땅에 있는 흔한 사람 말고 이런 사람은 없을 거야,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피로 말미암아 피가 피 되는 합당한 인간을 새로 창조해내니까. 피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거기에 부합되는 인간을 새로 제조해요. 새로 만들어낸다고요. 

교인수 필요 없어요. 쓰레기니까. 교회 아무 의미 없어요. 사도바울은 교회하려고 전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해야 교회답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누구 소관이냐? 말씀이 먼저고 말씀이 알아서 택한 백성, 하나님 아들 만들어낼 겁니다.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된 사람도 예수님 못지않게 이 땅에 핍박을 많이 받는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 우리가 저쪽을 배제했는데 이 땅의 모습은 오히려 성도가 배제된 자에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세상을 버렸는데 세상 입장에서는 우리를 세상에 넣어주질 않아요. 

아까 복음 알면 외롭다하지요. 배제된 자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배제된 자와 동일시됨으로서 무엇이 점점 더 구체화되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원수가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이 노골적으로 분명하게 되고 이것이 팩트로서 실제로 이 세상을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배제된 자의 출몰로 인하여 이쪽이 정치적 세력화돼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똘똘 뭉쳐 단결된 거예요. 

그럼 여기서 신의 폭력이 작용합니다. 신의 폭력이 어디로 작용합니까? 신의 폭력이 정당화되려면 배제된 자를 주님께서 미끼로 던져요. 그러면 그들이 철저하게 배제하겠지요. 니 우리와 대화가 안 된다. 배제하겠지요. 주님께서 만드신 새로운 피조물을 집어넣고 그 피조물에 대한 학대와 미움과 멸시와 모멸을 유인하게 하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나머지 세계를 신의 폭력으로 할 때에 그 다음 중요합니다. 

그들은 신이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못 살게 군 이유를 납득이 돼요, 안 돼요? 그들이 아는 율법적 해석과 복음적 해석에선 도저히 신의 폭력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 대목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지금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마귀와 싸우지요. 옛 뱀, 용. 그런데 이들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울산강의에서도 했지만 성경은 비-현실적이에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걸 현실로 국한했을 때 성경은 눈에 보이는 걸 피해버립니다. 왜냐하면 과학시대는 눈에 보이는 것만 인정하거든요. 

망원경에 보이는 것까지가 과학의 한계에요.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과학이란 증명해야 되니까. 증명한다는 말은 눈으로 확인될 때만 진리로 흡수하니까. 크로마뇽인이 있었다. 지구역사는 46억, 우주역사는 137억이다. 뭐로 이야기해요? 화석 보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화석은 눈에 보이죠. 

눈에 보이는 것 따로 해석은 누가 합니까? 인간들이 해석하는 거예요. 해석할 때 순수합니까? 감정이 들어가 있어요. 어떤 감정? 바로 기존의 세계를 정치적 질서, 인간들이 보이는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해석에 가미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십자가에 대해서 제대로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아주 신나게 이야기하죠. 어리석음으로 공략해라.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똑똑함에 대해서 성도가 싸울 것은 십자가 피를 믿는 그 어리석음 외에는 없다. 자진해서 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되라. 어리석은 자가 구원되리라. 신학에 대해서 어리석은 자가 돼야 돼요. 

그게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어떤 주체적인 개입을 배제하는 겁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을 배제해야 돼요. 왜? 자기 자신을 붙들지 않아도 구원됐기 때문에. 이런 자유가 어디 있어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한 여인 나왔지요. 간음한 여인이 구원받았지요. 그 여인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내가 간음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그러면 간음의 구원의 근거가 돼버려요. 일체 구원의 근거는 인간 쪽에선 나와선 안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구원받았습니다. 왜 구원받았습니까? 사도바울은 이거에요. 주께서 먼저 나를 예정하사 찾아왔기 때문에. 이게 정답이에요. 내가 핍박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돼요. 내가 핍박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에요. 

여기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앞뒤가 잘 안 맞는 이야기지요. 증거했는데,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뭘 이겼다는 거예요? 내 생명에 대해서 미련을 버리는 일에 그들이 승리한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그리고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돼있어요. 그리고 땅에 있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아까 강의대로 하면 신의 폭력이 있다. 무엇을 즐거워하라 했습니까?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했잖아요. 내가 사는 쪽으로 내가 말려들지 않게 된 것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말을 인하여 이기었으니 그들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다. 내 생명을 아끼지 않게 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내 목숨을 귀하게 여기기 않게 된 것을 감사하는 겁니다. 이걸 아까 이야기한대로 한다면, 내 목숨을 하찮고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볼 수 있는 안목, 그건 우리 속에 신의 폭력을 먼저 담아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내치고 작살내도 그것은 주께서 목적을 가지고 하신 일이기 때문에 수긍해야 되고 인정해줘야 돼요. 

그걸 아까 이야기하다 말았지요. 성도에게는 몸의 아픔이 있다고 했지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것만 있으면 성도 아닙니다. 또 하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어제 오후 설교하면서 했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다. 생각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죽이겠습니까. 미워하니까 죽였을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를 죽이지 않는다는 이 말은, 이 땅에 밥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끝까지 부활까지 책임을 지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 땅에서 부부로 마감돼야 합니까, 아니면 부활시키지 못하는 남편으로 마감돼야 되겠어요, 아니면 영원한 남편, 부활까지 책임지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공감해야 돼요? 어느 것이 귀합니까? 넘어서야 되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마저도 넘어서 그분을 사랑할 때 모든 게 사랑이죠. 

이번에 아가 하면서 사랑을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요. 제가 생각한 건 이겁니다. 사랑이 있으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할 말이 있어야 되겠지요. 적어봤어요. 사랑 앞에서. 다른 말로 하면 피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사랑 앞에서 특징은 뭐냐? 아무것도 속일 필요가 없어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속이잖아요. 

집 계약할 때 사랑합니까? 사랑하지 않지요. 계약서도 사랑하지 않지요. 무슨 사랑에 계약서가 필요합니까? 계약서라는 것은 서로가 위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계약서 있잖아요. 사랑 앞에서, 결혼할 때 사랑의 맹세하잖아요. 그게 말이 안 돼요. 사랑인데 무슨 맹세가 필요합니까? 

사랑 앞에서 속일 필요 없다는 같은 말은 뭐냐 하면, 사랑은 우리의 본색을 다 드러내는 거예요. 왜? 우리의 본색이 속이는 주특기를 갖고 있어요. 인간은 이미 남들 앞에 속이는 본성이 가동된 상태로 대한다는 그 사실조차 본인이 몰라요. 그런데 그걸 언제 아느냐 하면, 속여도 소용없는 사람을 만날 때 그게 드러나요. 

속여도 소용없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네 살 이하 아이 앞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어린아이가 되지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속일 생각이 없는 게 어린아이에요. 있는 그대로 보여줘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잖아요. 네가 어린아이와 되지 아니하면 천국을 못 가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앞에서 서보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어른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속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속여야 내 존재가 건사된다는 그것이 논리가 아니고 습관화됐어요. 특히 어릴 때 사랑을 받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은 혼자 살아야 되잖아요. 혼자 살려면 끊임없이 속여야 되지요. 

편의점에서 애들이 물건 훔치는 것, 이게 무슨 스트레스입니까? 스트레스가 다 어디서 오는 거예요. 나 아닌 나를 내가 억지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겁니다. 성질 같으면 회사에 사표 던지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서 참고 있잖아요. 참는다는 말이 속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속일 때는 속임이죠. 자꾸 속여보세요. 나중에 자기 몸에 일부가 됐어요. 

사랑 앞에 서면 어린애처럼 되어 본인이 속일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잖아요. 백종원 나오는 예능프로 <골목식당>있지요. 거기에 되게 말 안 듣는 사람 등장했어요. 홍탁집하는 사람인데 중국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아마 짐작하기는 창녀를 대는 포주 역할 그런 일이 아닌가. 왜냐하면 쫓겨났으니까. 그런 설이 있어요. 하여튼 말을 되게 안 들어요. 엄마가 속이 썩는 거예요. 

백종원이 사비 30만원 투자해서 닭 열 마리나 자르라 해도 그 말도 안 들어요. 하여튼 시키는 대로 안 해요. 온 천하에 불효자에요. 국민 말썽꾸러기. 요새 시청률이 높거든요. 모든 말썽꾸러기의 대변자가 된 거예요. 엄마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고. 닭곰탕 만들어서 웃음을 회복했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적폐 요소가 인간에게 다 들어있는 겁니다. 사랑을 한 번도 서본 적이 없어요. 교회도 물론 안 다녔을 거고. 십자가 거저 주신 사랑 앞에 안 섰기 때문에 지독하게 자기 집착하니까 자기 속이는 것밖에 없어요. 그 속임의 극치가 악마인데 그 악마의 극치가 이겁니다. 부처에요. 

지금 천주교가 부처 못 돼서 난리 났어요. 천주교, 불교 서로 통합니다. 고객들이 원하는 것은 나를 부처되게 해달라는 거예요. 전부 다 부처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요구하는 건데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으로 정당화시켜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뭐 안에 있다? 알 수 없는 분노를 유발하는 거예요. 젊은 애들 나이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칠 십 넘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사랑 앞에서 어린애가 되니까 아무것도 속일 필요가 없어요. 사랑 앞에서 위장이 필요가 없지요. 김종환이 불렀지요. <사랑을 위하여> 사랑 앞에서 옷을 벗어버리죠. 창세기 2장 이야기입니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예요. 수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바쁘지요. 지 부끄러움 가리기에 바쁘잖아요. 몸이 변조됐어요. 몸이 이미 저주받을 몸이 된 거예요. 

부끄러움을 내내 품고 있다는 것은 지금 사랑 앞에 서지 않고 단독적 삶을 실존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르트르처럼, 니체처럼. 내 몸으로 부처처럼 되겠다는 거예요. 절대자가 돼 보겠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교회 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옷을 벗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이 선악과 알기 때문에 자기를 위장하는데 위장하는 기술이 선과 악에 대한 윤리 도덕입니다. 윤리 도덕이 되면 끝까지 고수해야 될 것이 자아개념, 나라를 것을 끝까지 고수해야 돼요. 점잖은 사람 있지요. 건드려보세요. 그 점잖음이 다 날아가요. 한 순간에. 

신학교수들의 이게 강렬해요. 자아가. 신학도 죄라는 사실을 몰라요. 헌금이 죄고, 신학 하는 것도 죄고, 예배드리는 것도 죄라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건전한 것만 남기려고 해요. 자꾸 건전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만 따로 챙기려고 해요. 그것 드리면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영광은 뭐냐 하면, 옷을 벗을 때 영광이에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 그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임이 발각될 때 그게 최고의 영광이에요. 영광 돌리는 방법은 굉장히 간단한 문제입니다. 아무것도 위장 안 하면 돼요. 위장술을 부리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안 가리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다시 시편 9편으로 돌아옵시다. 시편 9편에 신의 폭력이 있거든요.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향하셨음이여” 

방금 여러분 다 보셨지요. 오늘 강의 안 들었다고 칩시다. 시편 9편 14~16절 그것만 봤다고 칩시다. 딱 와 닿는 우리의 느낌이 뭐냐? 이거에요. 주님이 너무 나댄다는 느낌 안 듭니까? 세상 좀 조용하게 가게 하면 안 되겠어요? 왜 이런 분탕질, 이런 요란스러운 일을, 폭력을 왜 행사하느냐? 좀 의아한 느낌 들지 않습니까? 

안 들었다 치고, 모른다 치고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왠지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마음이 들 것 같은데요. 우린 조용한 게 좋아요.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평화로운 게 좋아요. 이렇게 시편 9편 14절, 15절, 16절 너무 요란스럽고 과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과도하게 몰아세우는 이유가, 17절 봅시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하리로다” 지옥에다 모든 악인을 열방을 보내는 거기에 대해서 평소에 우리의 관심사가 이런 데 꽂혀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우리의 관심사가 뭐예요? 지금 시편 9편과 관계있다, 없다? 관계없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물든 거예요. 뭔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아까 사랑처럼 사랑 오면 사랑까지 덥석 안으려고 생각해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아이고, 사랑 좋지. 사랑해주니까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러나 신의 폭력이 빠졌지요. 

십자가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신의 폭력을 정면으로 받았던 그분의 요소우리에게 누락된 거예요. 빠져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편 보게 되면 주님께서 너무 나댄다는 느낌 들고 괜히 조용한 세상, 좋은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주께서 분탕질한다는 불만을 터뜨린 거예요. 

여러분들이 평소에 눈물 흘리고 감격할 때 꼭 기독교 신자에게만 감격스럽습니까, 아니면 신자, 불신자 종교적인 이유 다 때려치우고 정말 마음 끌릴 때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싶을 때 없었습니까? 그런 경우 많지요. 종교, 교회 다니고 그런 것 빼고. 같이 울어주고 싶고 같이 얼싸안고 그런 경우 많지요. 

월드컵 4강 올라갈 때 기독교 신자냐고 안 물어보지요. 혹시 여호와증인이냐고 저리 밀고 이런 것 아니죠. 동성애자냐고 안 묻잖아요. 그냥 4강에 꽂혀서 얼싸안고 난리 나잖아요. 그런 입장에서 볼 때 시편 9편 14절은 의아해보이고 주님 하는 일이 늘 상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잖아요. 그만큼 주님의 진짜 사랑과 우리는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 물들었어요. 독자적으로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깊숙이 들어가 있는 우리는 어떻게 시편 9편의 마당으로 끄집어냅니까? 이건 신의 폭력이에요. 신의 폭력의 특징이 이유가 없어요. 욥과 똑같은 거예요. 목적도 없어요. 

그냥 치는 거예요. 죽으라고 치는 거예요. 우리를. 정신 차리라고 치는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돼요. 우리는 그걸 아픔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시편 9편과 성경 전체에선 그걸 아픔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랑으로 말합니다. 그게 사랑이다. 그게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랑이에요. 십자가에 죽으라고 내버린 게 사랑이었어요. 

우린 챙기는 걸 사랑으로 보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지를 때 비로소 우리는 버림받아 마땅함을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마땅한 것이 아니고 뭔가 내가 이 땅에 있다는 자체가 낯설어져야 돼요. 미쳤어. 내가 왜 여기 있지? 진즉 사라져야 되는데 장기판, 바둑판 엎듯이 사라져야 되는데. 지난 번 해운대 벤츠에 내가 받쳐 죽어도 상관없는 일이거든요. 미친놈한테. 

시편 9편에 동의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시편 9편을 주신 이유입니다. 율법은 시편 9편은 같은 말이에요. 인간을 더욱 더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건방 떨면서 시편 9편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상하게 평소에 내 의식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가 여기 적혀있습니다. 

에이, 두 번 다시 안 볼래. 그래서 성경 안 보는 거예요. 노출되기 싫어요. 조용하게 사는 이걸 건사하고 싶어서. 유지하고 싶어서. 그냥 살던 대로 살지 내가 신학박사도 아니고 알아서 뭐하느냐. 이런 식이에요. 그런 식으로 가보세요. 원망하지 말고. 속으로 알 수 없는 공포 느끼지 말고, 두려움 느끼지 말고, 격분하지 말고, 세상 탓하지 말고. 

이유를 이야기하면 안 들으려 하고 알 수 없는 격분은 솟아오르고. 남편 하는 꼬라지, 아내 하는 꼬라지, 자식 하는 꼬라지,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 문재인 정치하는 꼬라지, 박근혜 꼬라지 뭔가 알 수 없는 분노는 느끼면서 이유도 모르면서 성경은 안 보고.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이제 이야기합니다. 이게 전쟁일까요, 재판일까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제목 바꿔야 되겠다. 전쟁과 재판. 주님께서 미리 심판/재판한다는 걸 아셔야 돼요. 보이지 않는 법이 있어요. 그게 십자가란 법입니다. 하나님이 법을 내리신 분, 그건 염라대왕이고 하나님이 직접 죽었다는 거예요. 염라대왕은 안 죽었어요. 부처는 안 죽습니다. 안 죽는 존재가 부처에요. 

퀸이라는 밴드가 있는데 이 사람이 양성애자에요. 동성애고 양성애고 정신병자입니다. 왜 이런 정신병이 생기느냐 하면, 아까 내 논리에 의하면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어요. 이런 분노가 폭발하게 되면 이런 양성애, 동성애, 정신병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과도한 것에 피난하기 때문에 마음을 둬요. 

현재 마음으로 감당이 안 될 때는 과도한 행동으로 만들어놓고 거기를 도피처로 삼아요. 이걸 사람들은 일탈이라고 합니다. 젊은 애들이 학업에 시달리고 공부하란 소리 들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 공부할 테니까 드럼 사 달라, 오토바이 사 달라고 하지요. 빠라빠라빠라바~ 이것 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왜 해야 되는데요? 그게 일탈이에요. 공부 잘하는 애가 방탄소년단에 잠시 빠져있다. 일탈입니다. 뭔가 도피처를 마련하는 거예요. 거기에 빠지는 것이 억눌린 본성과 합치돼요. 이건 논리로 설명 안 돼요. 기분이 저절로 끌려가요. 방탄소년단 그 노래에 10억의 청소년들이, 10억이 뭡니까? 20억이 넘는다. 어른들까지 합세해서 거기에 다 빠져들어요. 

전에 이야기했지요. 랩은 본인이 직접 작사해야 랩이 돼요. 남이 한 랩은 랩이 아니에요. 본인이 가사를 쓰고 발표한다는 말은 자기가 자기한테 해소하는 방법이 그 음악 장르가 되는 겁니다. 가락도 귀찮아. 도레미솔 신경 쓰는 것도 귀찮아. 그냥 내뱉어지는 대로 분출이죠. 그걸 저는 아까 횡포와 광란. 그런 자식을 부모세대가 어떻게 싸잡을 수 있습니까? 미치고 싶은 것이 본성인데요. 

신이 폭력을 치게 되면 이게 쫓기거든요. 쫓겨서 광란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신의 폭력이 노리는 것은 네가 자아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음을 겨냥해서 치는데 자아가 깨지는 게 아니고 그놈의 자아를 가지고 피난 가는 거예요. 새로운 일탈로. 아무리 해도 이 자아가 당구공 같아서 안 깨집니다. 

하나님, 네가 뭔데? 예수, 네가 뭔데? 내 인생 내가 응원해요. 내가 격려해주고 내가 관리하고 있어요. 신약에선 이걸 성령을 안 받아서 그렇다. 십자가 영을 안 받으니까 옷을 벗을 수가 없어요. 옷을 껴입어야 돼요. 세 겹, 네 겹 계속해서 들키기 전에 내 분노를 내가 스스로 감추기 위해서 옷 입고 내가 자제하기 위해서 점잖은 옷을 입어야 되고. 

옷을 하나둘 벗는 게 아니고 계속 껴입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힘드니까 힘든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고 암 걸리고. 암 안 걸리기 위해서 노래방에 가든지 빠라빠라바 하든지 분출해야 되고. 

18절 봅시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배제된 자를 여기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아들을 가난한 자로 보고 궁핍한 자로 보는 거예요. 시편에서 가난한 자, 궁핍한 자는 하나님 언약 때문에 사회에서 소요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사회에서 내쫓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까 요한계시록 봤지요. 그들의 하소연과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의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과 저주를 유발시키지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분노, 모든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분노입니다. 신의 폭력이에요. 신의 폭력을 땅에 쏟아버려요. 

인간은 자아를 갖고 있으니까 신의 알 수 없는 폭력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자아가 안 깨지려고 더욱 더 대항하겠지요. 악순환이 계속 되는 세계, 이게 불 심판을 받아 마땅한 세계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언약이 없는 사람은 전부 다 신의 폭력 앞에 물 앞에 다 수몰당하잖아요. 

지금 강의하고 있는 이것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팩트입니다. 시편 9편대로 하나님이 일하실 거예요. 시편 9편 외에 다른 일은 안 하십니다. 시편 9편대로 그대로 일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가난한 자가 누구냐고 물을 거예요. 가난한 자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가난한 자를 생산할 거예요. 없는 가난한 자, 없는 궁핍한 자 생산될 거예요. 

이 사람들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옷을 벗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시시하고 시답지 않는 걸로 보고 심지어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간음한 자가 예수님한테 들켰지요. 공개했지요. 간음한 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단하게 보겠습니까, 시시하게 보겠습니까? 간음했던 시시함으로 보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으로 죄의식을 주느냐 하면, 제발 네 자신에 대해서 손을 놔버려라. 쥐고 있다고 소중한 보물 되는 것 아니다. 내가 쥐고 있을 때는 의인 되지만 니가 쥐고 있을 땐 주님의 심판만 촉발될 뿐이에요. 아주 매를 벌어. 

19절 봅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민주주의와 완전히 대척이죠. 민주주의는 인간의 승리를 구가하잖아요. 인간의 가치, 인간의 인륜성, 인간의 인간다운 것, 인간이 개나 소 짐승이 아니고 인간다워야 한다. 인간의 인륜성이라 하는데 헤겔에서는. 

인륜성은 객관적인 자연적 사실과 주관적인 느낌이 합치될 때 보장된다. 내가 저 과일을 먹고 싶다. 과일 있어야 돼, 객관적. 먹고 싶다는 내 주관성, 이것이 만족할 때 인간답다는 겁니다. 나는 행복해야 된다. 주관성이죠. 행복할 조건들, 돈 있고 몸 건강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안정될 때 그게 객관성이죠. 행복하고 싶다는 나의 주관성과 그걸 보장해주는 객관적 상황이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륜성이란 뭡니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거죠. 이건 다른 말로 인간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9편 19절에 보면 그 인간의 승리를 주께서 용납해요? 일체 용납 안 하죠. 이게 주의 기사, 1절을 봅시다.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자, 성도하는 일은 뭡니까? 그걸 작살내는 일을 주께서 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 일을 맡겨준 것에 감사하는 거예요. 인간 승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 끝났어. 신의 폭력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의 폭력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된 작업뿐입니다. 언약적인 작업 그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인간 승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 발 뺀다고요. 사람이 자랑스러워할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이 결과를 남한테 내세웠을 때 남들이 박수 치는 그게 인간 승리에요. 우리 애 이번에 사법고시 됐다. 그게 인간 승리라니까. 왜? 그걸 못한 사람들은 부러워하니까. 내가 갑이 되잖아요. 

이제부터 스스로 을이 되길 원하십시다. 을이 되는 기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는 서로가 을이 돼야 돼요. 왜? 주님보다 더 을다운 분이 없었기 때문에, 죽기까지 복종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20절 마저 합시다.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자기는 인생뿐이다. 세상이 하는 이야기를 성경이 대표로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 너희는 니 인생뿐이지 자아뿐이지 이젠 죽었어. 지옥이야. 이렇게 하는 거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저희들 엉뚱한 세상, 엉뚱한 속성, 습관화된 우리의 자질 이것이 주의 일을 방해한 죄인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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