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1a 부산강의 : [시편]17(10편)-악인의 발생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10편 할 차례입니다. 시편 9편, 10편, 시편을 보게 되면 악인들이 자꾸 나오지요. 악인들이 나온다는 것은, 이 세상이 처음에 하나님이 만드신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세상과 틀어졌다는 겁니다. 달라진 거죠. 처음 만드신 세상이 아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원래 만드신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폐기처분해야 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어떠하십니까, 를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생각하면 돼요.
시작 자체가 좋게 보는 게 아니고 이건 아니라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되면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봐야 되죠? 하나님의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보시면 되는 거예요. 이건 아니야. 뭔가 하나님의 조치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조치는 무엇이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도의 특징은 하나님과 상대한다는 겁니다. 보통 학원 강사는 학생들과 상대하지요. 그리고 가게 주인은 손님과 상대하잖아요. 하루 종일. 그리고 주부는 손자나 남편이나 아들이나 그런 사람들과 상대하지요. 목사는 교인들 상대하고. 주로 상대하는 게 누구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는 거예요.
사람 상대하는 것과 하나님 상대하는 것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사람과 상대하게 되면 자기 마음을 늘 숨길 수밖에 없어요.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상대하지요. 자식이 애 먹이면 패고 싶지만 나중에 엄마가 폭력적인 엄마로 낙인찍히면 안 되니까 참는 거죠.
이렇게 숨기는 거예요, 인간은. 서로가 서로의 본심을 내놓지 않고 인간을 상대할 때는 숨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을 상대할 때는 절대적 악이란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나쁜 짓할 때도 다 그만한 이유가 때문에 그래요.
시편 10에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데로 하나님을 상대하는 거죠. 하나님을 상대한다는 것은, 인간은 무능력하다는 것, 인간한테 기댈 것 없다는 것, 집안 식구한테 난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들의 모든 약속과 모든 사랑과 애정과 그리고 열심이라 하는 것은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지금 다윗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치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왜? 이 세상 자체의 근본적인 표준을 악인은 없어야 되는 세상을 표준으로 했을 때 이 세상은 뭔가 잘못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계를 표준으로 하지 말고 인간 대 인간이 만들어놓고 저질러놓은 그러한 세상이라면 우리는 좀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이 다 그렇지 뭐,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것이고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내가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식으로 그저 내 것만 잘 챙기고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렇지요? 구태여 하나님이 어찌하여, 라는 호소를 할 필요 없잖아요. 나만 편하면 되니까. 악인이 와서 내 것을 도적질하면 경찰에 신고하면 그만이고요. 잡아서 보상받으면 그만이고. 세상에 대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내 앞가림하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세상 일하겠어요?
목사님, 수면부족인데 하나님 어찌하여 수면부족입니까, 하나님께 호소합니까? 그저 잠만 푹 잘 수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겠습니다. 이런 것. 내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지 뭐 다윗처럼 인생을 거창하게 보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신자는 하는 일이 있어요. 신자의 특징을 해볼게요. 불신자가 아닙니다.
신자의 특징은 첫째, 자꾸 없는 분으로부터 공급받는다. 불신자는 인간을 상대하잖아요. 내가 주고 반대로 저가 나한테 주고, 나는 줄 것 주고받을 것 챙기고.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에. 이게 성경에선 불신자인데 사람들은 그냥 인간이라 하죠. 성경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왕 한 것 다시 해볼까요? 첫째로 인간은 범죄자로 태어났다. 범죄자의 속성, 범죄자의 본성, 범죄자의 본질로 태어났다. 두 번째가 죄가 뭐냐 하면, 그것을 감춘다는 것.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상대하고 인간들과 상대하고. 그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4절 봅시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하나님을 없다 하는 것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거예요.
그러면 집에 가만있는 게 아니고 누굴 상대했단 말이에요? 사람을 상대한 거예요. 목회를 해도 사람을 상대한 거예요. 장사를 해도 손님만 상대한 거예요. 교사 돼서 학생만 상대한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해버리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신자, 불신자란 기준도 소용없지요. 사람 상대하는 데 신자, 불신자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시편 자체가 다윗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호소하기 보다는 그것도 귀찮아. 그냥 내 앞가림만 그만이라는 것. 앞가림만 한다는 것은 사람만 상대하면 그만이다. 귀찮게 하지 않는 한 나도 귀찮게 안 하면 그만이고. 자기 몸 편한 게 최고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호소한단 말이죠. 호소하는 이유를 뭐라 했습니까? 처음에 이 세상은 이러지 않았잖아요? 하나님께서 처음에 세상을 이렇게 만들지 않았잖아요, 라고 아주 거창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대단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해서 다윗은 여기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원 창조를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조하실 때 없는 데서 있게 하셨잖아요. 있다는 말은, 창조가 만들어진 거니까 결과물이 있음이죠. 있음 안에 창조의 원리를 품고 있다는 본 겁니다. 창조의 원리를 있음이 품고 있을 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다는 거예요. 심히 좋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 동시에 다윗의 생각이고 다윗의 삶의 기준이 돼요. 기준점이 된단 말이죠.
자기가 이런 기준점을 가지고 이런 기준으로 세상을 보니까 세상은 지금 있음이 뭘 누락시킨 거예요? 창조의 원리를 누락하고 공격하고 있지요. 그래서 시편 10편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라고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지요.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뭐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고, 불신자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도 되고,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뭐만 의식하며 산다? 사람만 의식하고 산다. 목사는 교인들 의식하면 그만이죠. 부부는 서로만 의식하면 그만이고. 시장사람들은 오는 손님만 의식하면 그만이에요. 국민들은 대통령만 의식하면 그만이고.
사람만 의식하면 그만이에요. 그게 너무나 익숙해졌으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돼버렸어요. 그러니까 시편 10편도 우리한텐 낯설어. 왜냐하면 사람만 상대하니까 자기 몸 편하고 몸 건강하고 자기인생 만족하면 더 이상 신경 쓸 게 뭐가 있느냐는 식이죠.
그래서 신자의 특징은 첫째는 자꾸 없는 데서 공급한다는 거예요. 신자의 특징 두 번째는, 두 번째가 더 중요한데, 첫 번째는 자꾸 누구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고, 두 번째는 바로 그것을 증거 한다는 거예요. 신자의 특징은 하늘로부터 뭔가 계속 주어진다는 것을 증거 하는 용도로 자기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럴 때 있음 안에 창조의 원리가 같이 살아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증거 한다는 말은 무엇을 증거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나를 증거 하지 않겠다. 나 자신을 증거 하지 않겠다.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이 보기에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닌 거예요. 처음에 하나님이 보기에 좋았는데 시편 10편에 보면 왜 악한 자들이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조치를 해주시라는 거예요. 이런 태도 자체도 신자 태도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사람을 상대하게 되면 나한테 불편한 것은 조치를 누가 알아서 해요? 내가 알아서 하면 돼요.
하수구가 막혔다. 그러면 내가 뚫으면 되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잘 흐르네. 누가 뚫었어요? 내가 뚫었어요. 내가 뚫었다는 말은 결국 누굴 증거 한다는 말입니까? 나 자신을 증거 하는 게 돼요. 다윗은 말하기를 그게 창조의 원리냐고 우리한테 묻고 있는 겁니다. 나는 존재할 가치 있습니다, 라고 우기는데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 맞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윗은 이 세상에서 범죄자를 찾아냈는데 범죄자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봤지요. 첫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다. 그로 인하여 더 나쁜 범죄가 뭐냐 하면, 그것을 감춘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증거 한다는 것은 뭘 까발리느냐 하면, 인간이 감추고 있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지니고 태어났던 창조 원리에 위배되고 배치되는 그 사항을 까발리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래야 하나님이 천지 창조한 기준은 생생하게 유효하게 견지되고 살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의 관심사가 내가 편하게 사는 게 아니죠. 창조의 원리가 생생하게 그대로 온 우주에 발휘되고 나타나고 증거 되기를 바라는 것 이게 바로 다윗의 자세입니다.
아까 제가 얘기한 첫 번째 신자의 특징은 뭐라 했습니까? 나는 한 게 없는데 자꾸 누가 줘. 하루에 잠을 세 시간이나 주시네. 잠자라고 세 시간이나 허락하시네. 자꾸 뭔가 공급해요. 그런데 세상에서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만큼 해서 이만큼 얻었다는 얘기를 계속해서 늘어놓는 거예요.
다윗이 신자가 아니고 보통 인간이라면 고개 끄덕이면서 너도 그렇게 사나? 나도 그렇게 산다고 할 수 있는데 자기 입장에선 분명히 하나님이 주셔서 사는데 저쪽은 자기 힘으로 산다고 버티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다윗은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그래 너한텐 하나님이 없어. 아니 하나님이 없기를 원하고 있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편 10편을 통해서 신자, 불신자를 나눴는데 신약에 와선 결정적으로 나누죠. 신자는 누굴 증거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 되려면 반드시 조건이 필요해요. 혼자선 안 돼요. 모든 인간은 범죄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필히 자기 자신의 잘남과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평생을. 그걸 제가 두 번째로 자기 죄를 감춘다고 이야기했죠. 감추는데 그걸 건드리면 화를 내요. 반발하죠. 그 반발의 여파가 외부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겁니다.
시편 10편 12절 누가 읽어볼까요.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여기 갑자기 가난한 자가 등장해요. 가난한 자와 동급으로 등장하는 것이 14절에 보면,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고아가 등장하고.
고아와 가난한 자가 등장한다는 말은 어떤 뉘앙스를 주느냐 하면, 처음부터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심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난할 이유가 없는 사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가 생겼다는 것은 누가 이 가난한 자의 재산을 탈취했다고 보는 거예요. 여기 굉장히 많지요. 7절, 8절에 그 이야기가. 은밀한 곳에서 엎드려 있다가 그들을 공격한다고 쭉 나오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를 더 전개시켜봅시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할 때는 아주 큰 범위로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기에 심히 아름다웠다. 그게 다윗이 보는 기준이라 했지요. 그런데 좀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아름답게 만드셨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 왜? 이스라엘 그 국가에서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런 기준으로 이스라엘을 보는 거예요. 택한 민족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봤을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는데 창조의 원리라고 제가 모호하게 이야기했는데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인 객관적인 국가가 등장하면서 창조의 원리가 용어가 바뀌어야 되겠지요. 이게 바로 언약으로 바뀌어야 되겠죠. 다윗 시대기 때문에 무슨 언약이겠습니까? 당연히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만 언약이 아니고 그전에 언약이 있었지요. 무슨 언약이었습니까? 모세언약이었죠. 모세언약 이전에 최초 언약이 뭡니까?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언약인 노아언약이죠. 노아언약을 구체화시킨 것이 모세언약이고 모세언약을 구체화시킨 것이 다윗언약이란 말이죠.
노아언약은 창세기 8장에서 방주 안에 있던 정결한 짐승의 피, 희생을 받아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희생, 제물의 희생, 죽음이죠. 죽음 안에서 은혜가 나온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는 복을 주신다는 그 내용이 노아언약입니다. 정결한 짐승 덕분에 더러운 노아가족도 물의 심판에서 무사히 벗어났다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8장 마지막에 나오지요.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오지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무엇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어디 안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정결한 짐승 안에 죽음 안에 내가 들어있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믿는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을 상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나란 개체 있고 너란 개체 있는데 나와 너 친하게 지내자, 잘해보자는 것은 각자 독립적인 개체에요.
그러나 성경에선 독립적인 개체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완전히 포함돼있어야 돼요. 노아가 방주에서 노를 저었습니까? 노아가 방주 위에 앉았습니까, 방주 안에 앉았습니까? 노아가 방주 안에 있지요. 방주라는 언약 안에 산단 말이죠. 그 상태에서 이 범죄한 세계에 살아가는 것은 뭔가 안에 들어가는 거예요. 독립적이지 않단 말이죠.
오늘날 현대인들은 본인이 독립적이에요. 남도 독립적이에요. 독립적인 것이 어떻게 계속 버틸 수 있느냐? 버티기에 나서는 겁니다. 현대인의 인생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을 매질하는 인생, 자학하는 인생이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하란 말이야. 그래야 밥 먹고 살아. 이것은 내가 자기한테 매질해요. 이게 교회 가서도 마찬가지고요. 기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열심히 하란 말이야. 성경 열심히 봐야지. 이건 자기가 자기를 매질하는 거예요.
어디 안에 있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내가 다가가겠다는 거예요. 주님 계세요. 제가 주님을 내 주로 영접하겠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시동을 자기가 거는 거예요. 엔진을 자기가 거는 거예요. 마치 뭐와 같으냐? 방주 안에서 노아가 발동기, 엔진 돌리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안 해도 되는 짓을 하고 있다고. 평생을.
이게 선악과 따먹어서 그런데 선악과 따먹으면 인간이 자기를 질 좋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계속 자기한테 매질하게 돼있어요. 매질 열 번 했다가 너무 매질하면 기죽으니까 한 번은 해외 놀러가서 기분 풀고 또 돌아와서 정신 바짝 차리고 매질하고. 군에 가서 고생 많이 하고 휴가 나와서 기분 풀고 다시 군에 가서 열심히 살고. 어떤 텀을 주는 거예요. 계속해서.
늘 자기 채점표가 있어요. 내가 어느 정도 괜찮은 존재고 어느 정도 위상이 달라졌는지 늘 자기가 자길 점검해요. 결국 뭐냐? 자기가 혼자 사는 재미로 살아요. 요새 현대인들은 자취를 너무 많이 해요. 혼밥, 혼술 해서 혼자 살아. 결혼해도 혼자 살아요. 그리고 타인에 대해선 항상 변명조로 일관하고. 왜? 그걸 제가 불신자의 특징은 뭐냐? 자기의 허점을 본인이 알고 있으면서 두 번째는 그걸 쉴 새 없이 계속 감추고 있는 겁니다.
광안대교에 왜 박았느냐? 술 먹었지? 아니요. 박아놓고 기분 나빠서 술 한 잔 먹었다고 해요. 러시아 선장. 전부 모든 게 변명조에요. 그리고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당신은 화물선으로 광안대교 왜 박았느냐? 이렇게 하면 그 선장이 신자라면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왜? 자긴 주 안에 있었으니까. 이런 무책임한 것, 징역 십년. 그러면 선장이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주께서 허락하셨으니 감수하겠습니다, 징역살이를. 이렇게 나와야지.
그게 바로 신자의 특징 일 번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꾸 누구한테 공급받는 거예요. 이번엔 감옥살이하라고 감옥살이를 공급해주시는 거예요. 매사가 내 것은 없고 주위에서 주신 거예요. 마치 방주 안에서 노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방주가 가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하는 것처럼.
그게 언약의 원칙이고 아까 제가 이야기한 창조의 원리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있음 안에는 이러한 수동적인 창조의 원리가 피조물로서 피조물 값을 한다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 안에 원리가 담겨져 있어야 되는 거예요.
보통 바쁘다 하죠. 왜 바쁘십니까? 살아야지요. 이러거든요.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내가 숨 쉬고 사는 걸 산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일 번 신자에 의하면 주님이 살아 있으면 내가 죽어도 그게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식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주님이 살았다는 그런 원리가 공급되고 제공되는 조건 하에만 사는 거예요.
이게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언약관계에요.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언약과 더불어 알 때에 성도는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 잘했다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증거 하느냐? 신약에 오게 되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어떻게 된다고요?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누구의 증인이 됩니까? 예수의 증인 되잖아요.
제가 이 대목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조의 원리라고 모호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구체적이란 말이죠. 이제는 이스라엘 속에 살아 계신 주님을 증거 하는 것, 다윗이 해야 될 일 그것이 다윗언약을 증거 하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님이란 날아간 거예요. 하나님, 신이 너무 모호하니까. 하나님 자신이 구체적인 증거를 공급했으면 이제는 성도도 모호하게 따지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공된 하나님의 언약에 관해서 증거 해야 돼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 언약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약의 성령 받은 성도는 뭘 증거 해야 돼요? 하나님 증거 해야 돼요? 어떻게 됩니까? 아니지요. 구체적인 것,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겁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에 의해서 계시가 종합하게 되면 뭘 증거 하느냐? 바로 사건, 십자가를 증거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이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아니고 존재하신 주님의 지금 계속해서 반복해서 기능으로 움직이고 있는 앞장세우고 있는 그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죽음을 증거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사는 데 필요한 것들에 눈이 꽂히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주워 모으고 끌어 모으고 축적하려고 시도하는 모든 것들은 살기 위한 것들이란 말이죠. 그렇잖아요. 오늘도 성경공부해서 죽어야지. 이런 사람 없다니까. 성경공부 참석도 살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에요.
왜 살아야 됩니까? 내가 살아야지요. 내가 사는 게 실익이 있다, 이익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나를 증거 하는 용도로 내가 있기 때문에, 라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요. 아차, 이건 교회 오래 다닌 사람으로 할 발언이 아닌데. 이미 쏟아놓은 입장에선 소용없어요. 무심코 튀어나와 버렸어요. 하나님 믿는 것도 나 살기 위해서. 무심코 튀어나왔어요.
덜렁덜렁 교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건들거리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왔을 때 그 마음가짐은 뭐냐 하면, 오늘도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온 거예요. 죽으려고 온다는 것은 비장한 마음이 돼야 돼요. 비장한 각오가 돼있어야 되는데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 전능하시니까 살려주시겠지. 이런 마음으로 왔다 이 말이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살리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표준이니까 죽이는 거예요. 우린 자꾸 안 죽으려고 하니까 지렁이처럼 버티잖아요. 버티니까 못 버티게 밟아주는 그 힘을 주께서는 공급해주십니다. 감사가 나와야 돼요. 왜? 그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고 이건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신약성경에 나오거든요.
나를 위함이 아니고 복음을 위함이다. 성경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바로 복음으로 못 들어가요. 이런 경로가 없어요. 반드시 뭘 거치느냐 하면, 나란 인간을 둘 다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에 ~는 아니요, ~는 O라는 둘 다 있어야 십자가가 돼요. 십자가는 박해하고 핍박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래요. 핍박했는데 살아난 사건이거든요.
그래서 이게 언약이거든요. 방주란 말이죠. 은혜를 알려면 현재 내가 사는 나를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이 언약 속에 집어넣으면 반드시 경로를 거쳐야 돼요. 바로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러지 말고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와야 비로소 복음만 증거 되는 사람이 나오죠.
성질도 급해. 바로 교회 가서 복음 증거 하겠다고 써대는 것은 뭐냐 하면, 살려 주옵소서, 라는 우회적인 고백이거든요. 복음을 위해서니까 제발 나를 죽이지 마옵소서. 천식이 낫게 하시고 몸 건강하게. 이거는 핑계에요, 핑계. 흔히 세상에서 하는 개 같은 행세를 똑같이 한 거예요. 하나의 거래에요. 내 원하는 걸 해주시면 주님 원하는 것 해드리겠습니다, 라고 거래한 거예요.
12절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할 때 호소하는 취지를 이제 아시겠지요? 주님, 이건 아니잖아요. 이런 뜻으로 한 거예요.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운영되는 것은 이미 내 손을 떠났습니다. 저는 무능합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게 바로 주님을 증거 하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나는 무능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게 하셨다는 뜻은 뭐냐 하면, 이제부터 너는 네 증거는 물 건너갔고 사나죽으나 내 증거, 하나님이 이런 원리를 갖고 있다는 그것만 증거 하는 용도로 쓰일 거라는 시그널이에요. 아무것도 내가 할 수 없다는 것. 평소에 사람과 상대하다보니까 교인 얼만 나와, 한 주에 헌금 얼마 나와? 맨날 신경 쓰는 게 이거에요. 목회 성공했네.
난 이게 뭐고? 주여, 왜 저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까, 하는데 그것도 주께서 너한테 공짜로 공급하시는 거다. 처음부터 너는 범죄자였다. 그리고 그 범죄를 감추면서 그럴싸하게 인생 살고 싶은 거예요. 주부라고 다를 것 없어요. 어디 가서 내 자식 이야기할 때 이 정도밖에 안 돼, 그 정도.
어제 제 아내가 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그분이 아내에게 한 턱 쏘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큰 아들은 삼성 들어가고 둘째 아들은 현대 들어가고. 기분 좋아서 한 턱 내겠다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마땅한 일상생활 아닙니까. 우리는 그것을 세상이라고 부르지요. 우린 그걸 현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에는 창조의 원리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기 앞가림만 하면 그만이에요. 하나님 생각할 수 없습니다.
4절 다시 봅시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이걸 번역을 새롭게 해볼까요? “악인은 뻔뻔스럽게”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지요. 악인은 뻔뻔한 얼굴로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살아보니까 인생 경험상 하나님이 그다지 내 인생 일구는 데 필요치 않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체험이 아니면 입으로 나올 게 없어요. 하나님이 도와줄 걸로 여기고 살아보니까 하나님이 그다지 나한테 힘 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을 했다니까. 간증이죠. 신자만 간증 있는 게 아닙니다. 불신자도 한 간증합니다. 단단한 간증해요. 하나님이 없다는데 한 표 던진다.
이건 그냥 지식이 아니고 체험이 사상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모든 사상에는 뭐가 없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점점 더 확신이 드는 거예요. 기도원에서 은혜 받아서 신학교 가겠다고 할 때는 확신 있어요. 그런데 신학교 1학교 1학기부터 벌써 하나님 없습니다. 왜 없느냐 하면, 교수들이 하나님 없거든요. 교수들의 아무리 강의하더라도 전혀 하나님이 없어요.
교수들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네가 앞으로 목회자 될 텐데 사람들 교인들 상대할 텐데 이 구절 이 본문으로 이렇게 설교하면 교회 괜찮게 된다. 그런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신학이란 것은 신학을 위해서 신학을 하는 게 아니고 교회 유지와 지탱을 위해서 신학이 계속 뒷받침해주는 것이 신학역사의 전개과정이었습니다. 루터도 캘빈도 마찬가지였어요.
고객들이 신을 원하고 신전을 원해요. 흔히 교회라 하지요. 신전은 눈에 보이니까. 그들에 맞추기 위해서 기존에 천주교와 결별해서 이렇게 해야 옳다는 게 캘빈과 루터에요. 루터는 좀 덜한데 캘빈은 세세하게 목회하는 예배방식을 다 이야기해줬어요. 이 매뉴얼대로 하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러나 시편 10편에서는 그걸 전면적으로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시편 10편에서의 하나님은 뭐냐? 아픔 속에서의 하나님. 아픔 속에서 비로소 발견되는 하나님이거든요.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어떤 형식 틀 속에서가 아니라 아픔 속에서. 일종의 패배지요. 자기의 무능성을 체감하는 데서의 하나님이에요. 이스라엘도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다윗언약은 왕언약인데 왕언약이 확대될 때 이게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뭐와 대치되느냐 하면, 기존의 이스라엘과 대치가 돼요. 다윗언약 전에 모세언약이거든요. 모세언약에 준해서 버티던 이스라엘과 다윗언약에 준한 둘이 갈등을 일으키게 돼있어요.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를 두고 갈등을 일으키는 겁니다. 시대가 지났으니까.
전에 것이 낫느냐, 후에 낫느냐의 싸움이에요. 성경은 이미 정답을 내렸습니다. 나중 것이 정답이에요. 마지막 언약이 처음부터 있어 왔던 겁니다. 그전 언약은 마지막 언약을 위한 모형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겁니다. 그림자 붙들고 모형 붙들고 놀지 말라는 거예요. 다윗언약이 되면 모세언약은 다윗언약 안에 모세언약이 포섭이 돼요.
그러면 모세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을 주장하는 사람이 다윗언약에 뭐라고 공격하느냐 하면, 그러면 모세언약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느냐? 다윗은 말합니다. 내 아픔 안에 다 들어와 있다. 다윗언약은 왕 개념이거든요. 왕 안에 그러니까 여러 명이 지켜야 될 법을 어떻게 됐습니까? 한 사람으로 통합시킨 게 다윗언약이에요.
로마서 1장 3절에 예수님은 어딜 거쳐서 왔습니까? 예수님은 누구의 자손이라 했어요? 다윗의 자손으로 오지요. 마태복음 22장에도 나오지만 다윗의 자손이란 뭐냐 하면, 다윗언약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오지요. 다윗은 죽어서 묻혀있지만 그 자손은 부활했다고. 다윗언약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여럿이 하나로 통합이 되면서 여럿은 이제 각자의 개체가 자기를 보거나 그들의 합세했던 이스라엘이란 단체를 볼 것이 아니고 한 분을 봐야 돼요. 그럼 우린 생각하기를 다윗 한 분을 보면 될 것 아니냐, 하겠죠. 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다윗은 이 단체에서 쫓겨났으니까.
십자가 믿으면 되지, 하는데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게 십자가 사건,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분을 왜 신뢰해요. 죽어 보이지 않는데 믿을만한 보이는 사람도 있는데 보이지 않는 사람을 왜 의지합니까? 이것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지요.
다윗이 쫓겨났을 때 우리가 안 쫓아냈어요. 사울이 쫓아냈다고 하잖아요. 백성들이 누구의 권력을 두려워했던가요? 사울의 권력을 두려워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혼자 있는 게 아니고 권력의 압제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권력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거예요.
혼자 노래방에 노래 잘 부르죠. 북한의 김정은 부하들 있잖아요. 자기 집에서 자기 부하들한테는 갑질해요. 그런데 나이 칠십, 팔십 돼도 김정은 앞에서는 벌벌 떨어요. 왜? 폭탄으로 사살할까 싶어서. 전기의자가 아니라 폭탄으로 죽일까봐 벌벌 떠는 거예요. 내 속에 뭐가 있다? 우월한 월등한 어떤 권력에 대해서 자진해서 복종하는 속성이 심리가 있어요.
왜 그런 심리가 있느냐 하면, 그 권력을 나도 모르게 내 욕망이 부러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그것은 마귀가 예수님한테 시험했던 겁니다. 뭔가 은근히 원하는 게 있어요. 눈에 보이고 좋은 것들은 다 내 소유가 되기를 나는 가만있는데 내 이성은 그걸 원하지 않는데 내 욕망은 이성보다 힘이 세서 은근히 부러워해요.
나이 많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가 왠지 부러워요. 시어머니는 누가 미워요? 젊은 며느리가 미운 거예요. 난 너를 딸처럼 여긴다. 딸 같은 소리하고 있네. 봄인데 옷 하나 해야지. 백화점에서 옷을 사왔어요. 옷은 화사해요. 그리고 그 옷을 살 때 마네킹과 모델 보면 분명히 옷과 매치가 화사합니다. 몸이 화사하지 않은데 어떡해요. 결국 그 옷은 며느리 입으라고 줘버리고. 며느리는 시어머니 입던 거라 받아놓고는 …
인간은 자기 입장은 생각 안 해요. 꾸준히 좋은 것 생각합니다. 우리교회 연세가, 이 이야기해서 집사님 화 안 내는지 모르겠습니다만, 70 넘은 분인데 저보고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는 빨간 스포츠카 보면 부럽던데 목사님은 안 부럽습니까? 그분은 솔직한 게 주특기에요. 저는 안 부러운데요, 하면 자기는 왜 그리 부러운지 모르겠다고 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마음이 좋게 이야기해서 젊은 거예요. 그래서 했지요. 세상이 안 지겨운 모양입니다. 욕망은 처음부터 부러운 게 아니고 계속해서 부러워해 왔던 거지요. 이 세상에 남자, 여자 특히 남자들이 그런 경향이 있는데 사람은 뭐로 사느냐 하면, 게임하며 삽니다. 게임은 어디서 나왔는가? 선과 악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게임화 시킨 거예요.
악마로부터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여기에 승자와 패자를 늘 생각하기 마련이에요. 난 어느 편에 설까? 롯데자이언트인가, 삼성라이온즈인가? 모든 게 그래요. 일본 조져라. 한국 잘돼라. 이런 것 있잖아요. 남의 집 망해라. 우리 집 잘된다. 부부가 사이가 좋으면 누가 연예인 이혼해라. 전현무와 한혜진 헤어질 줄 알았어. 헤어져서 온 국민이 기뻐해.
이게 게임이거든요. 무조건 나는 승자 편이고 남들은 다 나보다 못해야 되고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나야 되고. 제가 전에 그랬잖아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한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파서 못 참아요. 배고픈 건 참을 수 있는데 남 잘되는 것은 도저히 배알이 틀려서 못 살아요.
이게 선악체계기 때문에. 항상 나는 어느 편입니까? 선악 중에서 선한 편이다.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알고 있다. 그 지식이 인간을 망치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늪에 빠진 겁니다. 항상 자기를 좋게 보고 의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조작하지요. 조작하고 변명하고 또 내부적으로 선악이 있을 때는 그걸 채찍질하고.
내부적인 선악을 그대로 외부적으로 터트려서 이 땅의 못난 놈들은 죽어야 마땅하고 고아 같은 것들은 없어져도 마땅하고. 왜? 나는 고아가 아니고 잘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조져버려야 된다. 그 내용이 있을 때 다윗은 어느 편에 서느냐 하면, 고아와 가난한 자, 그런 자의 횡포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란 말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란 왕 속에 모든 하나님의 뜻이 함축돼있는 구체화된 인물로 등장한 다윗언약의 내용입니다.
사사기에 그런 게 나오지요. 사사들이 언제 하나님께 호소하던가요? 편할 때가 아니고 느긋할 때가 아니고 풍부할 때가 아니고 쳐들어올 때가 아니에요. 쳐들어오게 되면 뭘 하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도리 다 해요. 퍼주기 하고 달래주고 다 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세월호 큰 배 빠져서 얘들 죽었지요. 그때 안산에 있는 학부모 말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뭘 생각했어요? 수습이 급선무 아닙니다. 그래서 빨리 돈 주고 아직 얘들이니까 이천 만원 주고 쉬쉬 하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액수가 점점 늘어갑니다. 사억 넘었어요. 그걸로 입 다물 줄 알았지요. 광화문에 세월호 진상규명하라고 노란텐트치기 시작했어요.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지요. 팽목항에 30평짜리 기념관 세우라 하는 거예요. 진도군에선 그건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또 들고 나설 거예요.
국회의사당 앞에서 택시운전사 카풀 반대한다고 분신했지요. 빨리 차 치우고 장례 치러야겠지. 그게 아니에요. 그것 붙들고 장례를 아예 국회의사당에서 벌입니다. 떼를 쓴다고 할까요, 뭐든지 다 통하는 그것, 그게 뭐냐 하면, 아픔이 일종의 생존의 방식 또는 무기가 됐지요. 날 잊지 말라는 거예요.
날 잊지 말라가 아닙니다. 성경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이여, 날 잊지 마. 그건 사람을 상대하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죽는 것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도 하나님께서 특수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서 나를 이 땅에서 아무것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든 거예요.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