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2a 부산강의 : [시편]15(8편)-인간 없음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8편을 비롯해서 모든 성경을 보게 되면, 특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성경 전체가 혹시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비현실적이라는 생각 또는 비실제적이라는 것, 비현실적은 아니더라도 우리 실제에 그다지 보탬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처음에 천국에 대해서 하나님의 복음, 십자가의 용서로 간다고 할 때 기분 좋았지요. 그 뒤에, 뭐? 그 뒤에 뭐가 있는데? 성경 전체 핵심 되는 것을 한꺼번에 내가 가졌다고 했을 때 내가 가진 복음이 마치 보험 들 듯이 내 죽음 이후도 책임지지 보장이 된다면 나머지 죽을 때까지의 그 간격을 그다지 성경이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 확 들어올 겁니다.
중간에 띄엄띄엄 교회 나와도, 아예 일 년에 한 번밖에 안 나와도, 삼 년 만에 나와도 이미 알 건 알고 챙길 건 챙겼으니까 그다지 내게 손해는 되지 않겠다는 것, 내 인생에 지장이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연사할 때까지 여기 생존과 뭐로 채우느냐 하는 거예요.
자연사에 대해서 우리가 거부하진 않아요. 사람은 다 늙어 죽으니까. 자연사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은 자연사, 누구나 죽는다는 것까지는 아는데 나중에 늙어죽더라도 지금은 생존에 해 있잖아요. 이 둘을 분리하는 겁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살아 있다는 거죠. 그러면 뭐가 빠졌느냐 하면, 자연사가 정상이고 생존이 비정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질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자연사할 때 누구나 죽는다고 하거든요. 누구나 죽는 것이 아니고, 이게 정상이니까 당연히 죽이시는 분의 조치에 의해서 죽는 거예요. 당연히 죽는 겁니다.
은행에 들어갔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대기표를 뽑습니다. 자기 번호를 부르면 담당직원 앞에 서요. 그러면 호출당할 때까지 그 사람이 은행을 벗어나야 됩니까? 은행 안에 있어야 되지요. 은행 안에서 티비나 농협 광고 다 들어야 된다 이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볼 일 있어서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자연사 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는 발상을 가져야 돼요. 내가 죽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에요. 주님의 일이 되면, 죽어도 마땅한데 생존도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로서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해줘 봐야 돌아서서, 복음 챙겼는데 내 나름대로 살지, 뭐. 또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세상에, 내가 성경 얼마 안 봤지만 성경을 보면 인간이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없어요. 성경 자체가 용납 안 해요. 성경만 덮으면 모든 인간이 자길 위해서 살아요. 그걸 구체적으로 자기 실익, 실제 이익을 위해서 살아요.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란 말이죠. 주님은 자연사 되고 만날 분이기 때문에 지금은 털어내는 거예요. 그냥 혼자 있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혼자 자기 일 하고 싶은 겁니다. 혼자 자기 일 하고 싶으니까 자기 일이 있고, 본인은 그걸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데 그걸 왜 시비 걸어? 내가 하고 싶단 말이야. 난 더 살고 싶단 말이야. 왜 시비 걸어? 20대 젊은이가 해운대 벤츠 타다 음주 운전해서 구속됐잖아요. 제 아내가 그래요. 저 부모가 참 기가 찬다. 그 나이에 벤츠를 왜 사주나?
그럼 그 부모는 그럴 거예요. 내 자식한테 내가 사주고 싶은데, 왜?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왜 남들이 나에게 간섭하느냐? 이거거든요. 앞으로 술 안 먹고 사람 안 다치게 하면 되잖아, 라는 식으로 모든 게 마무리될 때 그 사람은 뭘 놓친 거예요?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없지요.
그럼 20대가 음주 운전한 걸 욕할 게 아니고 우린 평소에 어때요? 지금 우리는 주의 일 하고 있습니까, 내 일 하고 있습니까? 어느 것이 멀고 어느 것이 가까워요? 솔직히 말해서 주님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이 맡기신 일, 사명 하는데 그게 아까 이야기했지만 공허한 거예요. 성경에서 하는 것이 전부 공허해 보이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요.
그런데 내 몸은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있다는 이 말 자체가 실내용이 없는 거라 아주 공허한 거예요. 왜 성경말씀이 공허하다고 느껴질까요, 성경 전체가? 실생활에 아무 보탬이 안 되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왜 그렇게 하게 될까요? 인간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공허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게 실제 이익이 있어야 되고, 이걸 니체 같은 철학자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니체가 상당히 대우받는 이유가 핵심적으로 이야기해서 그래요. 인간이 실익을 얻는다는 것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에서 현대에 맞지요. 그런데 니체는 이걸 한 자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은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간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의 흔적은 뭘 빼기 위함이라? 우리에게 힘을 쫙 빼기 위함이라. 니체는 기독교를 반대하기 때문에 반대로 나갑니다. 인간은 힘을 기르기 위해서, 힘을 모으기 위해서, 힘을 장착하기 위해서, 많은 힘 안에 자기가 안주하기 위해서 인간은 살아가는데 힘을 모으는 감정을 의지라고 했어요.
그래서 니체는 인간이 의지를 갖는 게 아니고 의지에 의해서 인간은 딸려 가는데 그 의지에 목적이 있다. 그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생존의 힘, 살고자 하는 그 힘에 의해서 인간은 모든 행위를 하게 되는데, 그 행위에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그것은 노리는 게 있고, 기대감이 있다는 겁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
니체가 그런 이야기하기 전에 힘을 둘로 나눴어요. 좋은 힘과 나쁜 힘. 같은 칼인데 도둑놈이 쓰면 살인하고, 요리사가 쓰면 요리가 된다는 식으로. 독사를 물을 먹으면 독을 내지만 엄마가 물을 먹으면 젖을 내지요. 니체가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게 좋다, 나쁘다는 게 인간의 무한한 의지에 굴레를 씌운다는 겁니다. 선악을 넘어서, 에요. 니체철학은 선과 악을 넘어서서 거기에 뭐가 있는가를 들여다 볼 생각했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동안 유럽에서 선과 악을 기독교가 지배했거든요. 기독교를 이제는 잊어버려라. 기독교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신에 의해서 선과 악을 자꾸 강요하는데 솔직히 네 자신을 들여다 봐. 기독교 떼버리고 신 떼버리고 남는 건 뭐가 있느냐 하면, 이 몸이 남아있지요. 이 몸이 아침이면 충만하게 껄떡거리면서 울렁대면서 추구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나를 유지하는 힘을 모으기 위해서 아침부터 껄떡거리고 설치고 있는 거예요.
힘을 모으기 위해서 의지가 동원되는 거예요. 의지가 가동되니까 좋으니 나쁘니 할 게 아니라, 좋으니 나쁘니 하는 것은 외부에서 타인이 하잖아요. 타인 중에서 제일 높은 최고의 타인이 신인 거예요. 기독교 신 없애버리면 나는 나한테 물으면 된다는 거예요. 넌 뭘 원해? 그걸 원해? 하면 돼. 해. 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철학은 네 자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군대에서 하고 조폭들이 하는 것 있잖아요. 하면 된다. 상당히 비윤리적으로 보이잖아요. 이 비윤리적인 것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21세기 사회정치경제 사상에 기본으로 스며들었습니까? 사회정치경제, 외교, 건강, 의학에 스며들었지만 가정까지 스며들었어요.
가정에서 아버지는 장로고, 엄마는 권사로 강제로 애를 교회에 데려간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버지, 엄마가 어린 자식을 교회 데려가는 것은 기독교 정신으로 둘러싸여 또는 성경 정신으로 포장하고 지키기 위해서 가잖아요. 그런데 그 애들이 학교나 사회에서 같은 또래를 만나면 뭐가 스며듭니까? 부모는 어제 교회 갔으니까 지가 버텨내고 견디겠지 하는데
막상 그들의 활동하는 대부분의 시간은 무엇이 침투하고 무엇에 영향을 받아요? 미세먼지? 물론 미세먼지일 수 있어요. 정신적 미세먼지가 뭐냐 말이죠. 바로 그거잖아요. 하면 된다, 아닙니까. 힘 모으는 거예요. 니체사상이 니체 개인적 사상이 아니고 오늘날 보편화된 거예요. 힘 있는 게 사람 대우받는 겁니다.
힘 모으는 시간에 성경을 본다? 이건 니체는 성경 제쳐놓으라 했거든요. 하나님 믿지 말라 했거든요. 네가 신이지 다른 신이 어디 있다고 네가 신되는 게 초인사상인데 네 자신이 신이지 다른 신은 없다고 이야기한다 말이에요. 그렇다면 거기에 부합되는 철학도 사상도 내가 신이라는데 합당한 철학을 인간들은 이끌어오는 겁니다.
그동안 기독교 가정에서 눌러놨지만 그렇다면 자녀들의 본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에요. 눌러놨을 뿐이죠. 누름이 해체가 되고 족쇄가 풀리게 되면 바깥이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니체사상이 확 들어오는 거예요. 사람은 힘이 있어야 산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성경 자체가 제가 처음에 어떻게 느껴진다 했습니까? 공허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공허한 이유를 다시 설명하게 되면, 인간은 언젠가는 자연사 되고 지금 생존해 있다. 자연사와 생존을 인간은 가시적으로 분리시키는 거예요.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살아 있잖아, 하고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분리시켰단 말이죠. 왜냐하면 누구나 죽으니까. 그런데 자연사, 모든 잘잘못 가리지 않고 다 죽는다는 말은 누구의 일이라 했습니까?
죽음이 인간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잖아요. 죽는 게 하나님의 일이라면 살아 있다는 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 배치되는 거예요.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반대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존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생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 때문에 이건 안 살아도 계속 살게 된다는 생각을 이 세상에 누가 갖겠습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살아봐야지. 살아 있다는 것을 자기 일로 간주하지 살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간주를 안 하잖아요. 그러니까 살아 있다는 게 내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는 이 성경을 볼 리가 없지요.
부산모임에 여러 명 오게 되면 강조를 안 하겠는데 전보다 없다고 생각이드니까 없는 이유를 찾아내는 거예요. 성경 자체를 시시하게 보는 거예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봐도 되고 안 봐도 되는 것, 그 이유를 줄곧 20분 동안 이야기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다시 결론내리면, 내가 사는 것은 누구 일이다? 아버지 일이 아니고 당사자 내 일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온 동네방네 시비 걸고 화내고 분노하고 격분하지요. 왜 신이 뭔데 내 일에 방해합니까? 어떻습니까, 누가 방해자에요? 누가 누굴 방해한다 말입니까? 살고자 하는 것이 주의 일을 방해했지, 살고자 한 인간이 주의 일을 방해한 거예요.
죽는 것이 주의 일이라면, 주의 일 맞지요. 내가 죽고 싶어 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래도 강제로 죽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잖아요. 주의 일이라면 그 주의 일과 생존을 분리 못 시킨단 말이죠. 연속돼있다 이 말이죠. 자연사와 생존이 이어져있어요. 자연사하는 일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입장에선 연결돼있어요.
그리고 95년을 살았다칩시다. 내일 안 죽습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주께서 그 날 죽으라면 95년 산 것, 죽음 앞에서 다 날아갑니다. 없는 거예요. 인간은 없는 존재란 말을 제가 어느 관점, 어느 지점에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지점에서 없는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의존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없는 존재의 말을 듣지 말란 말이죠. 지나 나나 없어질 존잰데 그 말 왜 듣습니까? 들어봤자 상대방에서 무슨 이야기 나오느냐 하면, 나 이렇게 사는데 버텼다고 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의 일이 나오는 게 아니고. 나는 나 사는데 이런 헌신적인 노력을 했더니만 이만큼이라도 살았다는 그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누구한테 많이 들었습니까? 사랑하는 부모님한테 많이 들었잖아요.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시편 27편 10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누가 나를 버렸다고요?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주님을 나를 영접했다. 내가 사는 게 부모의 명예와 가문과 우리 집안의 체면을 위해서 살았다는 사람은 보이스피싱한테 걸린 거예요. 속임을 당한 거예요. 지금 내가 사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내가 사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은 나를 버릴 리가 없지요. 그런데 누군 버립니까? 부모는 버리는 거예요. 부모가 우리를 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상당히 의아해 여기느냐 하면, 어릴 때부터 부모한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이렇게 고생해서 살았으니까 너도 나처럼 고생해서 살면 된다고 그 모델케이스를 부모 자신이 생존한 원리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잘못된 것 맞잖아요. 잘못됐거든요. 부모 본인이 뭘 안다고. 주님이 직접 이야기하면 되지요.
내 몸은 남이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내 몸을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관리하겠어요? 주님이 관리합니다. 관리하는 뜻과 원칙과 계획과 방식은 바로 우리가 보고자 하는 이 성경에 나옵니다. 거기에 목표도 있고 의미도 있어요. 목적도 있어요. 과정도 다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안 듣는 이유는 벌써 마음가짐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그 생각이 가득차서 그래요. 전에 우리가 철학 공부했잖아요. 그게 바로 니체사상이고 후배 철학자들이 니체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이 생각은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오늘도 살아야지. 이건 비정상이에요. 성경에서 비정상으로 본다니까요. 오늘도 죽어야지. 정상으로 보는 거예요. 누가 반대로 이야기하게 해요? 그건 우리를 지옥 보내려고 애쓰는 그 존재, 악마지요. 악마가 미세먼지처럼 완전히 온 인류를 다 덮어놓으니까.
악마는 항상 예수님을 의식해요. 네가 예수처럼 망하면 안 된다고. 예수처럼 맥아래 없이 아무 대가 없이 실적도 없이 그냥 쓸쓸하게 죽어서야 되겠는가, 라는 식의 정신을 우리 내부에 계속해서 백신 주사 놓듯이 우리 정신에 집어넣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 아니까 안 그런 것 같지요. 만약에 집안에 어떤 일이 있어 보세요. 자식이 무슨 문제가 생기고 내 몸에 어떤 병이 와 보세요. 대번에 나오는 게 격분이에요. 돌아버려요. 미쳐버려요. 울기도 하고.
나중에 교회 교인들이 전부 다 자기 사는 게 정상이라는 식으로 나가면 누가 영향 받느냐 하면, 복음 전하는 목사도 헷갈려요. 내가 저들이 원치 않는 걸 이야기해서 저들이 삐졌고 교회 들어올 때부터 입이 대발 나왔고 나갈 때까지 삐져서 돌아가고. 내가 뭔가 잘못했는가, 달리 설교해야 되는가?
그럼 명성교회 목사처럼 그렇게 설교해야 되는지, 아니면 대전에 있는 코미디언 목사처럼 그렇게 설교해야 되는지, 조용기처럼 해야 되는지 헷갈려. 반은 개혁적으로 하고 반은 복 받는다고 사람 달래고 해야 되는지, 갑자기 성경이 안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는 거예요. 같이 있던 교인들 눈에 안 보이면 그 사람들 어떻게 달래서 데려오고 싶고. 이런 게 막 눈에 보이거든요.
그럼 주님께서 그 목사가 기도한다면 응답한다고 칩시다. 너, 왜 어떤 의도에서 그런 걱정하느냐고 한다면, 교인들이 안 오잖아요. 교인들이 오면 무엇이 너한테 이익인데? 내가 오래 살잖아요. 힘을 갖춘 큰 교회가 되어 오래 살잖아요. “목사님, 설교 잘못돼서 진짜 우리 교회 힘이 없습니다.” 이런 소리 귀에 들어오게 되면 진짜 교회인지, 엉터리 교회인지, 아니면 우리가 억지로 우기는 건지 목사 자체가 헷갈리는 거예요.
힘이 없기 때문에 힘이. 은연중에 뭘 기대했습니까? 결국 오늘 강의에서 뚜렷한 비정상이 나왔네요. 인간에게 뭐가 문제입니까? 기대감, 이게 화근이네. 이게 사단 냈어. 기대가, 은근히 노리는 것. 성경을 백 독, 천 독해도 기대갖고 보는 거예요. 성경 보고 우리 남편 어떻게 꼬셔서 교회 나오게 하는가, 이런 기대감. 성경 보고 자식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없을까, 하는 기대감.
이런 기대감이 내 뜻인 건 맞는데 과연 그게 나를 생존케 하시는 주의 뜻인가? 지금 나와 더불어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뜻 맞는가? 이것을 여러분 성경에서 확인해본 적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우리의 기대감을 완전히 배제시킵니다.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기대감에는 전제가 있어요. 나의 기대감이기 때문에 일단 내가 살아야 돼. 내가 산다는 걸 기정사실화하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걸 기대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덧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기대감을 박살내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박살내요. 지금껏 제가 수십 년 복음 전하면서 듣는 사람들이 제일 이해 안 되는 게 이 말이에요. 우린 이미 죽었다는 말. 아마 그들도 수천 번 들었을 거예요. 수천 번 들으면 뭐합니까? 이해가 안 되는데. 괴리라 하지요. 너무 괴리현상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오늘 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공허하다는 거예요.
성경대로 했는데 이상하게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대목에 와서 결정타를 날리는 겁니다. 이미 죽은 자란 것을. 이게 실감이 나지 않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 이미 죽은 자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논리들은 굉장히 쉬워요. 죽은 자가 무슨 기대를 하겠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죽은 자가 무슨 욕심을 내겠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이미 죽었다는 이것만 되게 되면, 그 다음 성경에 어려운 공허하니 관념적인 그것이 진짜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것이 그대로 쉽게, 쉽게 다 연결되는데 문제는 딱 어디에 걸리느냐 하면, 과연 성경에서 나를 죽은 자라고 하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미 우린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분명히 하는데 그게 마음에 와 닿질 않으니까 이게 고민인 거예요.
와 닿지 않으니까 기대감 같은 게 생기고 내 뜻대로 해보면 복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복이 안 오고 일이 꼬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분통을 터뜨리고. 죽은 자가 무슨 분통을 터뜨려요. 말이 안 되거든요. 말이 안 되지만 말이 안 되는 게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올 땐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말이 안 되는 줄 알지만 내 쪽에서 어떻게 처신하란 말입니까? 성경 세계가 현실이 아니고 지금 말이 안 된다고 화내고 있는 이게 현실이라면 무슨 수로 그걸 내가 떨쳐낼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살아야 되겠는데.
시편 8편입니다. 시편 8편의 주제는 이겁니다. 사람이 그립다. 어디 사람 없소, 이게 주제입니다. 사람 같은 사람이 없어요. 언약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없어요. 전부 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요. 관계가 끊어진 채. 관계가 끊어진 걸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연사와 달라요. 인간이 자연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걸 그때야 알겠지요. 죽고 난 뒤에는 알겠지요.
부자가 죽어서 지옥 가고 난 뒤에 비로소 진짜 자기의 위상을 알게 됐지요. 죽어서 지옥 간 게 아니에요. 살아서 지옥 가야 될 짓거리만 한 거예요. 생각이나 마음이나 태도가 지옥 갈 그것만 한 거예요. 술을 먹는다. 왜 먹느냐? 아까 니체철학에서 술을 먹는 이유는, 힘이 없다는 그 상실감을 메우기 위해서 그걸 감추기 위해서 술을 먹는 거예요. 내가 개뿔도 아닌 것이 싫다는 거예요. 개가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왜냐하면 자기 기억 속에는 잘 나가던 자기가 괴물처럼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잘 나가던 내 모습과 초라한 현실이 너무 괴리가 크니까 이게 싫어서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술을 먹어야 잠이 온다는 거예요. 늘 술 먹을 순 없지요. 벤츠 타고 돌아다니는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근사하게 여기는 내 기대감을 충족한 나는 어디 있느냐고 호소하면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온 짓 다하는 겁니다. 내가 되고 싶은 기대감에 충만한 그 나를 못내 잊지를 못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설교시간에 예를 들었는데요. 나이가 팔십이 넘은 안다성이란 가수가 있어요. <사랑이 메아리칠 때>나 <바닷가에서> 부른 노래 들어보면 바닷가에서 여인이 머플러 날리며 서있다고 했잖아요. 혼자 바닷가에 왜 갔습니까? 해녀도 아니고 바닷가에 왜 가요. 뭔가 찾고 싶은 거예요. 권혜경 씨가 불렀던 노래 <산장의 여인>, <호반의 벤치> 이런 것 있거든요.
그 노래 들어보세요. 자아 찾기 나선 겁니다. 이 자아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아까 이야기한 내 관리는 누가 한다? 기어이 내가 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 말은 누구한테 맡기기 싫다? 주님한테 맡기기 싫은 거예요. 주님이여, 내 일에서 손 떼세요, 라는 거예요. <호반의 벤치>가. 모든 드라마 주제가 그거에요. 신이시여, 손 떼세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고 내가 가꾸고 나갈 겁니다. 내 기대감에 충족되게.
그걸 우리 주님은 아셔요. 그래서 시편 8편을 통해서 어디 사람 같은 자 없는지 찾는 겁니다. 그것을 두 자로 ‘인자’라 하는 거예요. 사람 같은 사람 없지요. 전부 다 악마에 속했지요. 자기밖에 모르죠. 힘 키우기 위해서 어떤 기대감 갖고 미친 듯이 설치지요. 자기한테 항상 실익, 실제적인 이익을 오늘 얼마나 획득했는지 정산하지요. 저녁 때 자기가 판단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판단할 때 실제 모든 힘, 은행통장에 있는 힘, 그리고 내가 느끼는 힘, 내가 유력한 몇몇 친구를 안다는 힘, 세상에 나가면 이만큼 알아준다는 그 힘을 부러워해서 그 힘을 추앙하고 숭상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니체의 의하면 오늘날 뭐냐 하면, 초인들의 누리는 종교입니다.
유럽의 남자들의 종교는 뭐라 했습니까? 축구. 전 세계 청소년들이 종교는 뭡니까? 방탄소년단. 이게 어디서 겁나게 일본이 건드려. 댓글 달아서 일본방송국을 마비시켜버렸어요. 어딜 우리의 신을 건드려. 우리의 신인데. 왜 방탄소년단이 신이냐 하면,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춤만 추고 노래만 해도 조회수가 무려 40억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어릴 적 꿈이에요.
남들이 알아주는 거예요. 누구를? 그 중심부에 뭐가 있습니까? 모든 알아줌의 중심부에 내가 있는 거예요. 거기에 비해서 60대, 70대 해운대 앞에 까마귀도 똑같은 시커먼 옷 입고 앉아있을 때 본인이 얼마나 초라하겠습니까? 방탄소년단과 75살 먹은 나의 초라함 모습. 샤워해도 냄새나고 어떻게 해도 자식들도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하고 손자들도 오지 말라 하고. 이쪽은 춤 좀만 해도 40억 조회수, 이쪽은 오라해도 안 가고.
결국 호반의 벤치고 바닷가에서, 바다라는 죽음의 깊이와 그 경계선에 설 수밖에 없지요. 나, 이대로 죽어야 되나? 그동안 평생을 나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애썼는데 그 결론이 결국 내가 알아서 내 목숨 없애야 되는 이게 진정 나란 말인가, 하고 서있는 거예요. 그런데 바닷가에서 죽을까말까 하고 있는데 자기야, 하고 헤어진 애인이 돌아오게 되면 또 좋다고 있지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 돌아온다는 것도 거짓말. 이래도 거짓말 저래도 거짓말. 조항조의 <거짓말> 가사 읽어보세요. 정말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가 또 속고 속지만 그래도 너의 빈자리는 남겨두겠다는 거예요. 돌아올 생각도 안 하는데 빈자리는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돌아온다는 말 좀 해달라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자기 혼자 산다는 게 힘들어요.
그런데 과연 인자, 모든 사람이 자기한테 박수 치고 자기를 잘한다고 다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게 서로 경쟁관계잖아요. 결국 이용당하지 않으면 이용할 사람이 없다는 이 모순된 관계 속에 아무런 실적도 없이 살아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러한 세상에 대해서 시편 8편 1절은 뭐냐 하면,
시편 8편 1절과 2절에서 시도하는 것은 전쟁입니다. 전쟁을 벌여요. 전쟁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자기 공동체에 경계를 만들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요. 내가 사랑하는 쪽과 내가 미워하는 쪽을 구분 짓기 위해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 전쟁에서 우리 공동체에서 책임져야 될 것과 책임지지 않을 것과의 구분, 이 구분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구분되지 않습니다.
북한에 귤 보내면 북한과 전쟁상태가 안 돼요. 왜? 그들에게 맛있는 것 주겠다고, 책임지겠다고 나서기 때문에 전쟁상태가 안 되는 거죠. 북한이 핵무기를 어디 써먹으려고 만들었느냐? 설마 남한은 아니겠지. 이렇게 될 때는 하나의 민족공동체가 되는 거예요. 둘 사이에는 전쟁이 없는 거예요. 종전선언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전쟁이란 내가 책임져야 할 것과 책임지지 않을 것과의 전쟁이에요.
전쟁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니까 다른 말로 옮길게요. 경쟁이라 합시다. 경쟁이란 자기 딸이 입사시험에서 서류합격하고 면접 보는 날이다. 그러면 엄마는 마음이 답답해서 그 현장에 찾아가본다고. 그런데 면접시험장에 두 명이 아니고 백 명 왔다고 하면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쟁과 전쟁이 있겠지요.
전쟁을 왜 하느냐 하면, 재는 내 딸이라는 내가 평생을 다하여 책임질 같은 테두리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전쟁을 하는 것은 내 사람과 내 사람 아닌 것,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아말렉과 전쟁했지요. 아말렉에 대해서 아예 작살내라 했거든요. 요즘 용어로 하면 섬멸. 진멸, 섬멸 비슷한 말이에요. 섬멸은 깡그리 씨를 말리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전쟁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나의 약속의 땅, 천국이죠. 약속의 땅에서 주님이 사랑하지 않는 책임지지 않는 대상들을 만나게 해서 이스라엘을 어디까지 규정할 수 있는가를 전쟁을 통해서 정리하는 겁니다. 이게 전쟁이에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같은 데서 우리의 싸움은 영적 전쟁이라 했지요. 에베소서 6장에서 그 전쟁의 무기를 뭐로 무장하라 했어요? 복음으로 무장하지요. 복음의 세계가 천국이에요. 새 언약이니까, 살과 피. 그런데 복음으로 무장하라 했는데,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은 사는 게 자기 일이다, 주의 일이다? 주의 일이죠. 그런데 그냥 주의 일이라 하면 너무 공허하잖아요. 공허한 주의 일에 실제적인 계획이나 프로젝트나 과정이나 목표, 목적은 성경말씀에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그게 에베소서에서 전쟁을 복음으로 해요. 복음으로 전쟁하게 되면 어떤 패로 나눠지겠어요? 복음으로 천국 가는 패와 복음을 거부하는 쪽이 나오겠지요.
여러분, 이게 공허합니까?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에요? 처음에 강의할 때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복음 듣고 그 다음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는 이유는 보험 들어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기 위해서 일단 아니까 지금 생존과 자연사 될 때까지 그 간격은 이제는 뭐로 메운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고 싶은 자기 포부와 자기 계획으로 그걸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존은 주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 됩니까? 나의 일이 되는 거예요. 나의 일이라고 우기는 그 순간순간에 주께서 복음을 줬어요, 안 줬어요? 복음으로 이 땅이 움직이잖아요. 그걸 놓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없는 거예요.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서 전쟁을 위해서 해야 되는데 전부 다 자기 일에 급급하고 자기 일에 정신 팔려서 지금 내 몸으로 하시는 주의 일에 관심이 없는 거예요. 무관심한 거에요.
그러면 목사님, 짜증내지 마시고 복음이 이렇게 한다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이야기하면 되지, 라고 한다면 그걸 아까 이야기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죽은 자다.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죽은 자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덧씌워지고 덧입혀진 것은 뭐냐? 주의 일만 남아있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십자가 일을 위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다. 매일 살려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 전~~~혀 납득이 안 돼요. 주님께서 납득이 안 되는 것을 조각냅니다. 시간으로 조각내요. 하루치를 뭐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 보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고 너희들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했지요. 그 뒤에 뭐라고 합니까? 그 날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아침 되고 저녁 되니, 그 날 속에 인간을 가둬놓고 그걸 인간으로 규정한 거예요.
아침을 누가 만듭니까? 주님이 만들지요. 저녁을 누가 만듭니까? 주님 만들었지요. 그럼 아침, 저녁이라는 박스 안에 인간을 세웠을 때 인간은 누구의 솜씨입니까? 주님의 솜씨지요. 그러면 주님의 일은 뭐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만 살아라, 이 말입니다. 그걸 너한테 허용했다는 겁니다. 거기 필요한 양식으로 하루치만 줘요.
그게 바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친 겁니다. 내일 양식을 쌓아두지 마라. 그러면 내일은 어떻게 살라고? 내일 살고 죽는 것을 네가 판단할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의 일에선 내일이 기대가 되지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은 없다니까 제임스 딘 영화가 생각나네. 내일 죽을 테니까 오늘 먹고 마시자는 성경말씀도 갑자기 생각나고.
내일은 없는 날인데 의도적으로 생각한 네 잘못이다. 그래도 사람이 계획을 잡고 살아야지 성을 쌓아도 계획 잡고하고 전쟁을 해도 계획 잡고 한다는 성경말씀도 있는데 내일 뭘 할 건지 미리 예상해야 되지 않습니까? 불의한 청지기도 자기가 퇴직하고 난 뒤를 생각해서 챙길 것 챙기지 않았습니까? 내일을 생각하지 안 할 수 없지요, 라고 하는데
내일은 여기서 과제를 줘요. 나를 위한 내일이란 게 없고 주님의 과제가 내일까지 넘어가게 되면 비록 내일이 안 되더라도 오늘 우리가 그 내일을 생각해야 되는 겁니다.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오늘 범위를 넘어간다면 이건 주께서 주신 과제가 넘어가는 거예요.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원하는 일을 한다, 원치 않는 일을 한다? 원치 않는 일에 네가 종사하고 있는 거예요.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갔다. 이건 누구 뜻입니까? 주님의 뜻이잖아요. 제발 갔으면, 갔으면. 아니죠. 주의 뜻이라고요. 아마 제발 갔으면 하는 것은 게으른 종이나 그런 소리했을 거예요. 귀찮아 죽겠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그렇게 우기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기 일이라는 것을 죽음을 통해서 아예 제거를 한 거예요. 제거를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럼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이런 식으로 아버지한테 순종하신 거예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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