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강-여호수아 14장 6~9절(갈렙의 땅)201903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4장 6~9절입니다. 구약성경 341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케 쫓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케 쫓았은 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땅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겁니다. 무슨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로 갈렙이라는 사람과 땅과의 연관성입니다. 땅은 갈렙같은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거죠. 땅이, 부동산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합당치 않은 걸 가지고 표현을 이렇게 합니다. “토해 내치리라”라고 요한계시록에 표현되어 있어요. ‘우웩’하는 거 있죠. 술 먹고 까불다가 ‘우웩’하는 거.
안 맞다는 말입니다. 이 땅의 속성과 기거하려는 너의 생리가 안 맞으니까 토해 내치는 겁니다. 주님의 생리작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받아 줄 수가 없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땅의 속성이 어떤 것이냐가 우리는 궁금하죠. 도대체 땅의 생리가 어떠하기에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토해 내치는가.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말합니다. 갈렙을 보아라. 갈렙같은 사람은 땅을 차지할 만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시기나서 말하죠. ‘갈렙 네가 뭔데? 자기가 뭐했다고.’ 그럴 줄 알고 하나님께서는 이 갈렙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여호수아에게 당당하게 고백하게 했습니다. 자기 권리인 것처럼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정탐하러 갈 때 나는 들어가도 된다고 이야기했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간다고 이야기했다”라고 했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갈렙 본인이 알고 있어요. 갈렙 본인이 정탐하던 그 시점부터 정말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본인은 중도에 죽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땅을 밟아야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꾸준히 갈렙 자신과 여호수아를 계속해서 이끄시는 이유를 본인이 안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마음과 땅의 속성이 하나같이 일치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그러면 거기에 갈렙과 더불어서 같이 들어가도 된다고 이야기했던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수아입니다. 투톱이죠. 열두 명 중에서 오직 두 사람만 들어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퍼센트가 굉장히 낮았죠.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간다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면서 지금부터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어떤 난해한 것이 시작되느냐 하면 갈렙이 갖고 있던 믿음이라는 것이 과연 구약적으로 해석이 가능하냐는 겁니다. 구약적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갈렙은 인간이면서도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구약에 있으면서 신약적 요소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적 의지와 생각을 갖고있는 사람에게는 갈렙이 들어가도 된다고 이야기한 그 주장이 도대체 어디서 도출되었는지를 알 길이 없어요.
이거는 상식과 도무지 통하지 않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게 되면 정탐꾼을 보내는 이야기가 나오고 2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에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해요. 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들어가려고 보니 도저히 우리 능력으로 들어가지 못할 땅이 버티고 있고 여기 머무르려고 하니까 광야에서는 우리 힘으로 못살고. 뭐라 하느냐 하면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신약적 관점이기 때문에 지금 이 사람들이 믿음이 아니고 이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믿음에 대들고 있다고, 엉터리 믿음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그 현장에 있었다고 보세요.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가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하는 겁니다. 못 들어가는 게 뻔한데 들어갈 수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마치 객기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도박이나 오기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우리는 오히려 갈렙과 여호수아를 이해 못 하는 사람으로 따로 분류해야 해요. 믿음 좋은데 대다수가 못 들어간다는 쪽에 속한다면 우리가 갈렙과 여호수아의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리 안다고 보지 말고 도저히 모르고 이해 못 한다는 쪽으로 차근차근 밟아 와야 해요.
밟아 오는 방법은 이러한 상황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신약 상에 똑같이 되풀이된다는 하나님의 친절하심에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는 못 들어가고 갈 수 없다는 거. 그것은 왜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 너무나 도가 심하고 경지가 높은 수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러면 신약 성경을 보게 되면 제가 말한 취지를 다소 이해하실 겁니다.
누가복음 1장 75절에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찬양을 하죠. 찬양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목표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라고 하면서 섬김 앞에서 뭐를 뚫어내느냐 하면 두려움이라는 것을 뚫어내고 섬긴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구체적인 예가 누가복음 8장 35절에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나와요. 귀신 나간 자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돼지 떼와 귀신들린 청년 이야기인데, 돼지 떼에게로 귀신이 들어가서 돼지가 바다로 몰살하고 그 뒤에 귀신들렸던 청년은 온전하게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표현이 뭐냐 하면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아래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두려워하거늘” 두려워했다는 거예요.
저는 이게 믿음의 정점이라 봐요. 중간에 중간 과정에 있는 사람이 제일 두려운 것은 그걸 자기는 한참 거쳐 가고 있는데, 그 과정 속에 있는데 이미 완전한 완제품이 자기 앞에 들이닥칠 때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째 이런 일이’ 우리는 온전하려고 애쓰고 있잖아요. 인간의 본성상, 보다 온전 함, 보다 하나님께 영광, 보다 하나님 앞에 더 높은 경지, 이런 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관점의 상승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관점의 상승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루하루 살면서 내가 알던 관점이 다음 날이 되면 기존의 관점을 재수정해서 오늘 이 정도 하게 되면 괜찮겠지라는 관점 수정에 들어가요. 그다음 날이 되면 또 오늘의 관점이 수정되어 ‘아,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이구나’라고 수정이 또 들어갑니다. 두 달 되면 수정이 또 들어가요. 그러면 결국 자기는 선의 정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상승곡선을 그린다고 생각해요. 상승곡선.
전에 지남철 이야기했죠? 자기장에서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인간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기운, 능력이 뭘까를 이야기하면서 지남철의 자기장은 보이지 않는데 근처에 쇠가루를 뿌리니까 자기장이 형성되죠. 그걸 점으로 찍어보자는 말이죠. 점으로 찍어버리면 하나의 선이 형성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수학에서 방정식이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사건을 점으로 이어버리면 선이 되고, 선이 모이면 그건 확률이 되고, 확률이 되면 그건 공간이 되고, 자기장이 공간이 되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 역학은 그렇게 만들어 내는 거죠. 그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설명해 내고요. 물리학자들의 언어는 수학이에요. 수학은 일반언어가 아닙니다. 어떤 장을 필드를 염두에 두고 찍어내는 거예요. 확률상. 전자의 분포. 전자의 분포는 여기서 가장 높을 확률이 크다는 거죠.
과학에서는 말하죠. “봤냐?” 그런데 이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죠.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그 공간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점으로 찍어서 이쪽에서 어떤 규격화를 하는 겁니다. 과학은 그래서 뭐냐 하면 불확실성에서, 더 확실하게, 더 확실하게 접근해 가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도리의 전부입니다.
‘착해라’ 천사처럼 온전할 수는 없어요. 세상 때가 묻으니까. 그러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뭐냐 하면 보다 선하기 위해서 거룩에 경건에 접근해 가는 그거예요. 접근해 가면서 그냥 가지 않고 정점을 찍어요. 찍으면서 뭐라 하냐면 내 신앙은 독수리처럼,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독수리처럼 날로 상승한다는 거예요. 그걸 관점의 상승이라고 해요. 나는 옛날보다 수준이 높아졌다고요.
그 수준 높고, 신앙 좋고, 믿음 좋고, 갈수록 죄는 줄어들고 의는 늘어나는 그거, 사건 하나 터지면 훅 갑니다. 그 모든 것이 훅 간다고요. 남 앞에 존경받고 정말 천사 같고 남에게 이웃사랑 한 사람들이 사건 하난 터지면 검찰청 앞에서, 포토존 앞에서 손으로 얼굴 가리고 있어요. 그렇게 검사받고 난 뒤에 관악산 올라가 자살하는 거예요.
왜 자살합니까? 북한처럼 밥 못 먹어서 자살합니까?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겨내지를 못해요. 두려움. 인간의 마지막 족쇄는 두려움이에요. 왜 나는 지금 진행 중인데 너는 왜 최종적으로 도달해 버렸냐는 말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그곳에 떡하니 앉아 있느냔 말이죠. 미흡한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나 그것이 두렵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불 신앙이라고 해요. 그 두려움을 불 신앙이라고 합니다. ‘아,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데’라고 하거든요.
갈렙은 구약 속에 신약 적인 존재입니다. 노력해서 쟁취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역할과 자기 할 일이 뭐였느냐 하면 최선을 다하여 바짝 주님 옆에 붙어 있는 게 저들의 할 일입니다. 바짝. 절대로 이 좋은 기적과 이 좋은 말씀과 자기가 행했던 많은 권능이 있는 이상은 내 쪽에서 주님을 내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한방에 그들은 훅 갔습니다. 십자가 사건 한방에 훅 갔어요. 십자가 사건의 효과는 뭐냐 하면 철저한 나의 배제입니다. 우리 행함의 배제예요. 내가 공들여서 쌓아놓은 그 모든 성과를 한방에 갖다 버리는 거예요. 갖다 버리는 거. 열심히 계획 잡고 행여 나쁜 길로 갈까, 행여 불 신앙적으로 타락할까,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으니까 타락하거나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늘 조바심내며 시도했던 나의 모든 성과들이 쓰레기인 줄을 본인이 몰랐던 거예요. 갖다버릴 요소인 줄 몰랐던 겁니다.
완제품은 그 끝에 선이 닿는 것이 아니에요. 완제품은 그래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누가복음에 그 귀신 나간 사람이 온전해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말은 그 온전함은 내가 상상했던 온전함이 아니었어요. 왜냐 하면 상상했던 온전함은 내가 온전함인데 그것이 아니고 나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그것을 무산시키는 그 무엇, 그것이 온전함이거든요.
내가 시도했고 내가 노력하면 얼추 이 정도는 되겠지, 손에 잡히겠지 하는 그 예측과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을 딱 온전함으로 드러냈을 때 거기에서 오는 충격 같은 거, 그 앞에서의 나의 초라함, 그동안 내가 무슨 헛짓을 했는지에 대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는 쇼크, 그것 앞에서 인간은 그동안 내가 시도한 것과 온전함 사이에 개입이 등장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은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열심히 살았다는 거,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약속의 땅에 토착민들에게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넘볼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그러한 큰 몸집과 발달 된 무기를 가지고 있도록 그 상황을 일부러 배치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배치된 적들의 숫자나 화력이나 군사력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있는 내내 그 사람들이 출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의 온전함을 그냥 얻은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갈렙 노선입니다. 갈렙의 아우 옷니엘이 최초로 등장하는 사사입니다. 사사기 3장 9~10절에 보면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옷니엘이라는 사람이 갈렙의 동생입니다. 같은 집안사람이죠. 그 사람이 약속의 땅을 구원해 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무시당했던 약속 자체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약속 자체를. 오늘날 교인들의 관심사가 자기 구원, 자기 사적인 개인 구원에 있으니까 모든 성경해석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전부 다 엉터리가 되어버려요.
하나님께서는 약속 자체를 끄집어내려고 하는데 우리는 자기 자신 속에서 자기 구원에 대한 미련이 너무 강해요. 내가 잘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너를 이용해서 약속을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온전함이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그 온전함이 나오는데 이건 병든 정도가 아니에요.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8장 49절에 보면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항상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 때는 바깥에서 기적에 대한 세상 적인 평가가 먼저 적혀 있어요. 너희들이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그러니까 반드시 결과만 보고 나도 동의한다고 하지 말고 안 믿는 사람 편에 서서 접근해 보란 말이죠. 접근이 가능한지.
이미 사람이 죽었어요. 회당장의 딸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없어요. 왜냐 하면 그 당시 이론에 의하면 죽은 자는 이미 하나님 품 또는 음부에 들어갔기 때문에 마지막 때가 되어야 접선 가능해요.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자를 끄집어내는 것은 무당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마르다도 생각이 같았어요. “죽은 오빠를 만나게 될 거다” “네, 마지막 때 만나겠지요”라는 것이 그 당시 유통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참 편리해요. 왜냐 하면 두려움 없이 쉽게 생각한다면 마지막 때 마지막에 만날거라 믿고 그렇게 되면 지금 나의 그런 사고방식은 아무런 하자 없는 사고방식으로 스스로 자기가 인정할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훅 치고 들어 옵니다. 마지막이 아니고 지금 오빠를 만날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죽었는데. 우리의 삶은 죽음은 저쪽이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끼리의 세상에서 내가 어떤 인간이고 어떻게 적응하고 사느냐가 우리 관심사의 전부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 범주를 확장 시킵니다. 네가 지금 중요한 것을 잘라버리고 빼버렸다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주님께서는 죽음을 가지고 훅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왜? 그래야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두렵지 말아야 할 것에 두려움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을 노출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50절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이게 가능합니까?
지금 안 믿어서 “예수님, 죽은 사람은 손대지 맙시다. 죽은 사람은 곱게 보냅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자기 딴에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죽은 자는 다시 못 살린다’라는 겁니다. 여기에 새삼스럽게 충고듣고 “예, 순종하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말한다고 들어먹을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한계를 못 벗어나게 되어 있는데 그 한계를 계속 주께서는 외곽에서 밀어붙이고 있는 거예요.
“너는 이것밖에 안 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해라.”에서 믿기만 하라는 말 앞에 두려워 말라는 이 말은 “네가 지금 너의 생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너는 두려워하고 있다”라는 말이에요. 따라서 너는 그 두려움 밖으로 못 빠져나오고 두려움에 갇혀 있는 꼴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예수 믿는다는 둥 하나님 믿는다는 둥 삼위일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전부다가 뭐냐 하면 어디에 완전히 갇혀 있는 꼴인데 이게 두려움에 갇혀 있는 꼴이에요. 두렵기 때문에 믿는 거예요. 두렵기 때문에.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중간 과정에 있는 사람은 안 되고 이미 두려움을 넘어선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제 말이 갈렙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가 따라 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겁니다. 갈렙은 특이한 존재이지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에요. ‘나도 갈렙처럼 믿을걸’ 하지만 그 당시 현장에 가보세요. 갈렙처럼 믿는지. 안 믿어요.
그 현장, 약속의 땅 현장에 가보았다고 칩시다. 여러분 뭐가 무서운 줄 알아요? 팔레스타인민병대가 무섭고 이스라엘 군대가 무서워요. 가는 곳마다 검문, 검문, 예루살렘 안에도 검문소가 세 군데나 돼요. 검문에서 걸리면 통곡의 벽도 못 봐요. 구경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앞에 의도적으로 두려움을 차려놓고 우리로 하여금 그 두려움 앞에서 오줌 질금 하도록 만들고 벌벌 떨게 만들어요. 그게 우리의 하루하루 일상입니다.
우리는 그것밖에 안 돼요. 뭘 뚫어요? 못 뚫어요. 갈렙의 존재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질투심 내지 마시고 반겨야 합니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계신 분, 그리고 그 분 덕분에 약속의 땅을 밟았다는 사실, 항상 우리는 두려워하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이쪽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어요.
이미 완제품을 주시는 분에게 이동해야 합니다. 그 이동하는 방법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 14장 절에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라고 나오죠. 길갈이 해답입니다. 길갈이라 하는 곳은 다윗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길갈이었어요. 길갈에 이스라엘 총 지휘부를 두었습니다. 길갈에서 스톱(stop)하는 거예요.
길갈에 누가 계시는가? 여호수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길갈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궤가 있어요. 언약궤가 있다는 말이 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계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주인공은 여호수아도 아니고 갈렙도 아니고 갈렙을 통해서 보여주는 갈렙이 지향하고 있는 그 약속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갈렙은 무슨 뜻으로 들어갈 수 없는 약속의 땅을 들어갈 수 있다고 우기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먼저 그곳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믿었던 거예요. 우리보다 먼저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신 분,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맛보신 분, 이 신약시대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서 그곳에 천국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뭔가 시그널이 왔던 거거든요. 성령이죠. 성령. 우리에게 성령이 왔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 합격이야.”라는 뜻이에요. 합격통지서가 온 겁니다. 완제품 되었다는 거예요. 네가 수고하고 애써도 그 완제품이라는 선물과 족히 비교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네가 노력하는 것은 완제품과 네 노력과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내 노력은 항상 관점의 상승으로 항상 새로운 두려움 앞에서 무용지물이 돼요. “나는 믿씁니다~믿씁니다” ‘ㅆ’넣어 가면서 “쭈여, 쭈여” ‘ㅉ’들어가면서 하는 이유가 믿음은 없고 두려움이 있어서 그래요.
“쭈여~ 쭈여~나는 믿씁니다~믿씁니다” 아무리 해도 내일이 돼서 알지 못할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놀러 가는데 가스 불 안 끄고 간 댈지, 운전하는데 차 바퀴에 펑크가 난 댈지, 이런 새로운 사태가 벌어지면 갑자기 두려움이 확 밀려오죠. 두려움이. 예상 못 한 거죠. 예상 못 한 두려움. 믿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요. 무슨 믿음이 있습니까? 무슨 믿음이?
믿음 없음을 바로 갈렙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거, 바로 문제는 뭐냐 하면 믿음 없는데, 있는 척하는 그 가짜를 들통나게 해서 그걸 제거 시키는 작업에 우리가 충실해야 한다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를 믿지 않는 거, 나를 아주 바보로 여기는 거. 제가 예전에 이야기했는데 어떤 분이 나이 50이 넘었는데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제가 참 바보 같아요”라고 하는 그거, 바로 그거예요. 바보의 특징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내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너무 바보 같은데 너무 막 주신다는 겁니다. 바보일 뿐인데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제공하셨다는 사실이에요.
길갈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언약궤가 인간의 방해 공작을 뚫고, 불 신앙의 두려움을 뚫고, 네 두려움보다 내가 앞장서서 먼저 그 두려움을 뚫고, 선점해서 뚫어낸 거예요. 길이 없어요. 이스라엘은 어디 길이 없어요. 그런데 언약궤가 앞장서서 길을 내면 그게 길이 되는 거예요. 길은 매일같이 내일 되면 또 길이 이뤄질 거예요. 그 길이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내가 꼭 바보 같아’입니다.
내가 노력하는 것이 내 사는데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노력, 시답지도 않은 노력을 해온 거예요. 그리고 그것도 귀하다고 자기 기준 삼아서 그 점 점을 찍어서 내 인생이라는 방정식을 따로 내가 만들어 내요. 마치 무슨 대단한 사건인 양 여기면서. 그리고 남들 앞에서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살이를 쭉 내놓으면서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노력했지만 내 믿음으로 버텼다고 하는 그것마저 ‘바보 같아. 내가 보기에는’이라고 여기면서 내 믿음은 소용없음을 아는 것이 완제품의 특징입니다. 갈렙의 특징이에요.
주께서 신약의 요소를 이렇게 심어줬으니까 왜 어떻게 믿었는지를 묻지를 마세요. 나도 몰라. 그게 왜 믿어지는지. 다만 주께서 주의 약속이 그것이라고 하시면 그뿐입니다. 주의 약속이 내가 하는 열심보다 더 세다는 것만 고백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보가 안 되려는 게 문제였습니다. 똑똑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추가로 주어지는 공포와 사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같이 경험하면서도 아직도 자기 자존심 챙기려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꽝스럽습니다. 주님만 믿게 하옵소서. 주님만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짐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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