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늘에 앉음(엡2;5-6) 19021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2. 19. 07:42

하늘에 앉음(에베소서 2:5-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Z7EfAnlFf_c, Hit:15

 이근호19-02-17 13:38 
하늘에 앉음 

2019년 2월 17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5-6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사도가 언급한 복음은 참으로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이미 ‘하늘에 앉아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들의 움직임과 자연풍광만 눈에 들어옵니다. 어디를 봐서 천국입니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천국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천국가는 중인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미 천국에 왔다고 말을 합니다. 이는 기존의 인간의 인식과 사고와 정신세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인간 의식’이란 ‘자기 것’에 집중하는 식의 이해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살리고 자기 것을 살리려고 시도하는 의식하는 의식입니다. 

이 방식의 의하면 인간은 필히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24:1의 말씀을 예를 들겠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각가지 자기정당함을 보장할 수 있는 해석을 내어놓습니다. 
첫째 유대교의 샴마이 학파의 해석은 ‘일의 수치’에 단어에 강조점을 둡니다. 즉 아내의 부정이 이혼의 유일한 사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곧 아내를 내쫓기 위해 아내쪽에서 무슨 부정이 있는 혈안이 되어 있겠지요. 

둘째 이론은 ‘일’에 강조점을 둡니다. 아내의 부정 뿐만 아니라 아내가 하는 일들이 단점으로 인하여 남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그 어떤 행동들 (예를 들면 늘 큰소리를 친다든지, 빵을 검게 태운 다든지 하는 것)도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합니다. 

셋째 이론은, 랍비 아카바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이 해석은 ‘남편을 기쁘게’에 강조합니다. 즉 남편 보기에 현재 아내보다 더 이쁜 여자가 발견될 경우에는 남편은 상대적으로 현 아내가 기쁘게 하지 못하는 이유로 이혼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이론은 이러합니다. ‘남편’, ‘아내’라는 조항을 ‘배우자’로 바꿉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여자라 할지라도 얼마든 여자 본인을 기쁘게 해주지 못하는 남편이 있다면 여자쪽에서 이혼이 가능하다는 식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혼한 자’가 아니라 결혼 자체를 무효화해서 서류상 ‘아예 혼인한 적이 없는 사람’이고 싶은 겁니다. 

이런 네 가지 해석이 모두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기 정당성을 꿰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이렇게 확보된 자기 정당성으로 천국을 뚫어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신명기 24:1을 해석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의도나 기대나 목적을 갖고서 성경 말씀을 대하는 것은 다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함의 정당함을 근거로 만든 ‘자기 만의 세계’를 포기 못하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 스스로도 모르는 그 어떤 꿍꿍이를 노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꿍꿍이’가 바로 ‘자기조직화’입니다. 인간은 본성상 ‘자기 파괴’를 두려워합니다. 자기에게 찾아드는 공포에 대해서 자기 식으로 해결해보겠다는 겁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영화에서 12살에 시집가는 철모른 소녀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시집을 가면 나는 침대에 잘 수 있고 누가 노크를 해주어야 내 방에 들어오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자와 내가 원치 않는 자를 구별해서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자와 내가 원치 않는 자를 구별’하겠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나만의 위한 공간 장만’ 행위입니다. 이런 작업에 행운을 달라고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고기 잡는 어부가 되어라’고 하셨습니다.(막 1:17) 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전에 고기가 자율적으로 놀던 공간, 즉 물의 공간‘에서 끄집어내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도를 보내신 것은 몸에 배긴 현 세계로부터의 건짐입니다. 빼냄입니다. 이미 길들어진 가치관에서의 빼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는 마치 석유만 가득찬 드럼통에 새 한 마리가 통째로 빠졌다고 봅시다. 그리고 죽은 새를 작대로로 건져올린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그 새가 푸덕거리면서 설치는 모든 것이 석유방울이 됩니다. 왜냐하면 온통 기름으로 뒤집어쓰셨으니까요. 이미 하늘에 앉게 되었음을 성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따로 이 땅에 보내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 예수님이십니다. 천국은 인간이 원해서가 아니라 구분이 원해서, 하나님이 원해서 생긴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에 하신 일로 정해집니다. 그분은 구원에 필요한 조치를 다 마무리지으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미 하늘에 자기 백성’을 않혀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석유드럼통에서 끄집어진 새처럼, 우리도 죄와 허물로 옴퍅 뒤집어쓴 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14에, “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새로운 함수(확정난 원리)가 작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자기 자신이 행함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만 보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천국 만드심’의 일환으로 일군으로 가담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천국에 앉아있기에 우리 성도가 평생 할 일은
‘죄와 허물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천국’은 오늘 본문에 ‘정지화면’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허물의 이 세상도 ‘지옥의 정지화면’ 속에서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님이 계속 은혜를 주시는 것이, 이 ‘땅의 사람’으로 살라고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지옥에 갔어야 될 우리는 큰 호사를 누리고 있구나’를 말하기 위해서 주시는 겁니다. 

인생이란 그저 하나의 스냅사진과 같습니다. 아무리 우연곡절이 많은 인생이라도 남는 것은 자기만 행복하려고 몸부림친 죄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누군지 사도 말씀 앞에서 제대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3강-엡 2장 5-6(하늘에 앉음)190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5-6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오늘 본문에 보면 이미 성도는 하늘에 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앉을 것이다, 가 아닙니다. 교회 나와서 잘 애쓰면 하늘에 앉혀줄게, 가 아니라 이미 하늘에 앉았다고 되어 있어요. 이미 하늘에 앉았다. 이게 지금 사도바울의 주장입니다. 요즘 세상에 유행되는 말이, ‘허무맹랑’ 그리고 ‘터무니없음’이라는 단어입니다.

 

광주에 암약하고 있던 북한군 630명이 광주사태가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그 후에 그 사람들 북한의 고위층으로 다 앉아 있다는 거예요. 인공지능의 인식 파악하는 장치를 이용해서 현재 630명인데 앞으로 1200명쯤으로 늘어날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허무맹랑한, 터무니없는 이야기, 이미 마감된 끝난 이야기, 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광주사태 그 이야기가 터무니없는 것은 오늘 본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보고 하늘에 앉았다는 거예요. 터무니없고, 터무니없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하늘에 앉았다는 거예요. 교회도 필요 없는 거예요. 하늘에 앉았다는데요. 이미 하늘에 앉았어요.

 

여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살렸고 하늘에 앉혔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아무리 둘러봐도 하늘의 모습은 전혀 안보이고 그냥 거리에 사람 돌아다니고, 방송이나 신문에 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가 나와요.

 

이곳이 어딜 봐서 하늘입니까? ‘그래, 고생하면서 살다 죽어서는 좋은나라 가겠지.’ 우리가 기껏 정리하는 것이 이 정도에요. 하늘에 앉은 것은 아니고 앉으려고 지금 주께서 인도는 하시겠지. 그러나 아예 하늘에 앉혔다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냐, 라고 생각들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오늘 사도바울의 유언비어에 비하면 이것은 유언비어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이미 앉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마다 이 본문을 피해갑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제가 사도바울을 대신해서 몇 가지 더 언급해드리겠어요. 에베소서 1장 7절에 있는 말씀이죠.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거 허무맹랑한 것 아니겠어요?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신났네. 죄 짓고 나중에 교회 와서 죄 씻으면 그만이니까. 세례 받으면 그만이잖아요. 너무 터무니없게 수월한 겁니다. 성경말씀 좀 지키고, 폼 내고, 신앙생활 하는 티를 좀 내줘야 천당 가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죄 씻음이 안 된다는 겁니다.

 

또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2장 33절. 하여튼 성경이 다 터무니없는 거예요. 북한군 630명 이야기보다 더해요.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 말은 뭐냐? 성령 받지 않으면 누구나 천국을 못 간다는 겁니다. 교회 와서 목돈 내고 아무리 떼쓰고 교회 열두 개 채우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돌아다녀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천국을 못 간다는 것이 사도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허무맹랑함을 집어넣읍시다.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이에요. 네가 아무리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도 위에서 뭔가 준 것을 안 받으면 너는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하나님 오른편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는데 그 성령을 받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에요. 이것도 교회에서 다 피해갑니다. 이미 하늘에 도착했다는 것, 그것도 피해가고, 예수 피로 말미암아 씻음 받는 그것도 피해가고, 성령을 받은 자만 구원한다, 아무리 애쓰는 것도 필요 없고, 목사나 장로도 필요 없고 성령을 받은 자에 한해서만 천국 간다는 이것도 피해가요.

 

왜냐하면 사람들의 근원적인 본성인 이성에 의해서 납득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설득이 될 문제가 아니에요. 요한복음 1장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그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느냐 하면, 그가, 성령 받은 자가 이제 곧 다른 백성에게, 천국 갈 백성에게 성령세례를 주는 자 이다, 라고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하늘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네가 세례 준 저 사람이 장차 하늘에서 성령세례를 줄자다. 네가 지금 물세례를 주지만 저분은 네 물세례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주게 되고 그 세례 있는 자만 천국가고 나머지는 못 간다, 라고 하는 그 사람이 네가 만난 그 사람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안 만났잖아요. 세례요한 좋겠다. 만났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안 만났잖아요.

 

우리 어떡하라고요? 또 터무니없이 허무맹랑한 이야기 아닙니까? 마가복음 1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네가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 그것을 가지고 ‘사람 전도하는 것’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셨습니까? 그것은 잘못이에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 했는데 어부는 고기를 잡잖아요. 그러면 고기가 놀던 그 바다, 그 세상이 뭐예요? 물이에요, 물. 물에서 놀던 고기, 이제는 예전에 잘나갔던 너의 나와바리, 그 영역, 그 물의 영역을 잊어버리는 사람을 네가 건지라는 그 말이거든요. 네가 건지게 된 사람 같으면 과거의 나는 이렇게 물고기인데, 내 세계는 물의 세계였다, 라는 것을 과거사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게 하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지금 우리가 노는 물, 그 나와바리가 뭡니까? 돈이잖아요, 돈. 명예잖아요. money, honor, beauty. 돈과 명예와 미. 이게 우리 모두 거짓말을 한다는 스카이캐슬 ost의 내용이에요. 돈과 명예, 가문의 명예지요, 자기 집안의 명예, 자기 명예도 되고. 돈과 명예와 아름다움. 우리가 놀던 가락이 이거예요. 우리 몸에 좍 배겨 있습니다.

 

교회 왜 왔어요? 돈 달라고 오고 명예 달라고 오고 나를 젊게, 예쁘게 해달라고 오잖아요. 사람답게 좀 살아보자고. 그것 요구하기 위해서 신에게 대들기 위해서 교회 온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고객이 왕이니까 교회에서 해줄 것은 “이렇게 하시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시작이 뭐냐? 이 땅, 이 세계의 것에서 놀다가 그게 좀 불만스럽고 미흡하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주장하니까, 그것도 허무맹랑하지만, 기도해서 응답받았다는 소문이 쫙 퍼졌으니까 그 교회 가서 기도하면 응답받는단다, 말씀도 좋단다, 말씀 들으면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대, 이렇게 되면 이것은 거기서 사람을 낚는 것이 아니에요.

 

그쪽 물에서 계속 놀게 만드는 것밖에 안된다고요. 오늘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미 네가 하늘에 앉았다는 겁니다. 지금 죽어서 천당 가려면 이미 앉으면 안돼요. 그러면 뭐가 빠지는가 하면, 교회가 불필요해요. 교회 자체가 필요 없다고요. 이미 천국 간 사람인데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도착지점에 와 버렸는데 무슨 버스가 필요해요? 전세버스가 왜 필요하고? 방주가 왜 필요합니까? 그래서 이 성경 보는 사람도 피해 가버려요. 모르겠다, 하고 피해 가버려요. 성경에 나와 있는데. 교회도 피해 가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왜 피해 가느냐 하면, 터무니없이, 터무니없이, 터무니없이, 터무니없이, 그리고 허무맹랑하고, 허무맹랑하고, 허무맹랑하고, 허무맹랑하기 때문에 피해가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그 본문에 도달한 거예요.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일에. 소위 종교의 선배라 하는 유대인들이 성경해석을 어떻게 했는지 예를 보일 텐데요. 예를 보이면 아, 그 당시 예수님을 죽이라고 했던 그 인간들의 후배가 오늘날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미리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성경이 있잖아요. 모세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다고요. 계시를 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를 제가 세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신명기 24장 1절을 해석할 때 세 종류의 해석을 내놨어요. 본문을 이야기하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사람이 아내를 맞이했는데 남편에게 수치가 되는 일을 발견하거든, 그리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냥 내보내지 말고 이혼증서를 써서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있어요. 신명기 24장 1절에 나옵니다. 자, 여기에 대해서 세 가지 유형의 해석을 했습니다.

 

첫째, 유대인의 샴마이학파가 있어요. 그 학파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남자는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하지 않는 한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 교묘하게 해석하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내에게서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거든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 돼요. 그러면 아내와 이혼하고 싶은 사람은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하려고 기를 쓰겠지요. 눈 부릅뜨고요.

 

유대인이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니까, 하나님의 법대로 하게 되면 자기에게 뭐가 주어진다? 정당함이 주어지니까. 이 정당함이 있으면 나는 죽어서 천국 가니까. 말씀대로 일치될 때 정당하고 그 정당한 것을 근거로 해서 천당 가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는 지켰다는 거예요.

 

샴마이 학파에서는 수치가 되는 일에 치중해요. 아내의 수치 되는 일이 뭘 까를 파헤치는데 치중합니다. 두 번째 힐렐학파가 있어요. 아내가 남편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망친 경우라도 남편은 이혼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빵도 제대로 못 굽는 아내와 결혼하게 되면 남편인 내가 남들 보기에 수치스럽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저 아내가 안 기쁘다는 거예요.

 

샴마이학파는 수치 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힐렐학파는 내가 그 여자를 안 좋아하는 그것에 치중해서 이혼해도 정당하다고 본 거예요. 세 번째 랍비아키바의 이야기는, 남편이 아내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하는 경우에는 남편은 이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남편이 아내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촌에서 자기 아내가 제일 예쁘다고 여겼는데 그 촌에 어떤 여자가 이사를 왔는데 자기 아내와 그 여자를 가만 비교해보니 그 여자가 아내보다 더 예쁘고, 그 예쁜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 아내가 못나 보일 때 내 기쁨이 감소가 된 거예요. 그럴 때는 이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샴마이학파는 수치 되는 일, 힐렐학파는 일, 어떤 일이냐 하면, 제대로 빵을 못 굽는 것, 빵을 타게 했다든지. ‘아이고, 빵도 못 굽는 저것을 보니 남편이 부끄럽다.’ 할 때는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세 번째 랍비아키바학파는 뭐냐? 계속해서 아내가 나에게 결혼의 기쁨을 주지 못할 때는 이혼할 수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성경말씀은 동일해요. 해석이 세 가지 갈렸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명기 24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고객만족이니까. 남편이 아내의 수치를 발견했다는 본문에서 남편과 아내를 뭘 로 바꾸느냐 하면, 배우자로 바꿔요.

 

머리 나쁜 사람은 지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배우자로 바꾸게 되면 남편이 일방적으로 “나 너하고 살기 싫어. 짜증나. 나 너하고 다니는 것이 수치스러워.” 했을 경우에만 이혼할 수 있는데 남편이나 아내의 자리가 배우자가 되어버리면 여자가 “나 너 같은 남자하고는 살기 싫다. 우리 갈라서자.” 그게 말씀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거예요.

 

신명기 24장 이 본문내용의 해석이 네 가지가 된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차기 전에 여자도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이 현대헌법입니다. 여자도 저 남자와 사는 것이 수치스러울 때는 차버릴 수 있다는 해석이에요. 고객만족이니까. 교회에 여자들이 더 많잖아요. 그런 남자한테 매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수치스러우면 이혼하면 그만이지요.

 

네 가지 해석이 다 특징이 있어요. 이게 오늘 본문 ‘하늘에 앉히시니’와 충돌을 일으키는데 특징이 뭐냐 하면, 어쨌든 말씀은 내 쪽에서 지켜야 된다는 의도, 그게 문제에요. 그게 문제였던 겁니다.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꿍꿍이를 갖고 있는가를 노출시키는 용도에요. 이 네 가지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이 있으면 손들고 제안하시기 바랍니다. 없어요. 인간들이 수천 년을 연구했으니까.

 

말씀을 왜 지켜야 되느냐? 옛 유대인이나 오늘날 교회에서 왜 그렇게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하느냐? 성경말씀을 지킬 때 자기가 잘났으니까. 자기가 의로워지니까. 자기가 정당화되니까. 정당화해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천국 갈 때 주 앞에 “저는 이렇게 성도답게 말씀 지키면서 살았습니다.”라고 내세울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게 바로 말씀에 대해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그러면 복음적 해석이 있어야 되잖아요. 복음적 해석이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대한 복음적 해석은, 인간은 어떤 의도, 기대나 목적을 갖는 그것이 죄다. 성경 신명기 24장 1절을 보면서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라는 말씀을 대하는 순간 거기서 어떤 의도가 가동이 돼요.

 

‘할렐루야 주님’ 이런 식으로.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욕심, 그리고 충동을 정당화 할 수 있는 빌미를 하나님 쪽에서 제공했다는데 대해서 박수치고 싶은 거예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 자신의 어떤 의도를 새롭게 구성하는 겁니다. 왜? 남이 뭐라고 했을 때 “성경말씀을 봐. 거기에 있잖아.”라고 내세울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내가 말씀을 이용해서 천국에 앉아보려는 거예요. 누구 식으로? 내식으로, 내가 원하는 식으로. 그래서 누가복음 16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혼증서를 써주겠다는 말이 “저 결혼한적 없습니다.” 하는 자기 식으로 자기 자신의 과거를 씻어버리는 시도를 말씀을 동원해서 시도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제가 이렇게 유대학파의 성경해석을 제시하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 아무리 날고 기어도 유대인이 성경해석 범주를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왜? 그들은 천재들이니까. 그들은 말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씀으로 천국 가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게 오늘날 교회의 선배들이에요.

 

그 선배의 그 후배들이 오늘날 교회라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하늘에 앉혔다는 것은 이걸 가지고 선언적이라고 합니다. 네가 손댈 것이 없다는 거예요. 네가 천국가기 위해서 네가 너에게 해야 될 어떤 짓거리는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네 쪽에서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이제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었으니까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을 했던 그 마음가짐을 생각해보세요. 유대인들의 성경해석의 마음가짐은 뭐냐? 내 쪽에서 시도해 보겠다는 거예요. 이 정당함이 유지되면서 천국 가서도 계속 정당하게 되기를.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손대지 말라, 네가 할 것이 없다는 것.

 

할 것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할 것이 없는데 내가 구태여 나서서 뭔가 하려고 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다 이루신 일에 대해서 거기에 내가 때를 입히는 겁니다. 잡 때를 입히는 거예요. 더럽게 하는 것이고 훼손시키는 거예요 그 가치를. 그러니까 제가 설교처음에 했잖아요.

 

사람들이 자기가치와 의미와 있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터무니없고,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하다는 거예요. 이 본문 말씀을 들을 때 허무맹랑하다는 거예요. 5절을 봅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이미 우리를 죽은 것으로 간주해요. 이것도 우리한테는 터무니없어요.

 

왜? 진맥해보니 살아 있네. 심장 뛰잖아요. 이게 왜 죽은 거예요? 안락사한 거예요? 이게 왜 죽은 거예요? 살아 있는데. 지금 말하고 있잖아요. 안 죽었잖아요. 얼마 전까지 천식이 있었지만. 지금 보세요. 지금 살아 있잖아요. 우리 집사님 덕분에 주사도 맞고 해서 살아났습니다. 살아 있잖아요, 이렇게.

 

여러분, 이걸 알아야 돼요. 천국은 내가 원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나는 내가 원한 것을 정당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올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 그 중간에 누굴 보냈어요. 메시아를 보냈다고요. 유대인은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이미 우리에게 메시아가 왔잖아요.

 

빈 깡통으로 왔습니까? 뭔가 본인이 해야 될 일을 갖고 왔다 그 말입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우리보기에는 내가 할 수 있는데, 내가 착할 수 있는데, 내가 바르게 살 수 있는데, 지금껏 내가 성실하게 인생 살 듯이 앞으로 성실하게 살 수 있는데, 라는 입장에서 “네가 뭘 해도 그것은 주의 일을 호작질하는 것”이 굉장히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이 보이지만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너를 보지 말고 오신 메시아가 지금 어떤 일을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언제 분노하십니까? 내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여러분이 분노할 경우는 여러분이 공포심을 갖고 있을 때 분노하는 겁니다. 공포심이 찾아왔을 때 반응이 뭐냐? 반대방향으로 분노로서 자기에게 온 공포심을 완화시키려고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생물학적으로 자기조직화라 하는데. 모든 생물은 자기조직화의 본능이 있고 그것은 자기파괴와 반대방향으로 가요.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자기가 파괴되는 거예요. 자기파괴 될 때는 자동적으로 저항을 하게 되는데 그 저항이 뭐냐 하면 분노에요. 그 분노가 제대로 안 먹힐 때는 그 분노가 자기에게 꽂히는데 그걸 가지고 자살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분 좋아서 자살하는 사람은 없어요.

 

가버나움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보고나서 평을 달아놨는데 그거 보고 영화 다 봤다고 하지 마세요. 그 평은 영화를 보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 평에는 안 적었지만 영화를 본 것 중에서 두 가지가 기억에 남아요.

 

하나는, 열한 살 먹은 소녀가 시집갈 때, 시집 간다기 보다는 팔려간 겁니다. 집세 못 내니까 집세 대신 강제로 팔려갔는데 팔려가면서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뭐라고 하느냐? “그 사람이 너 뭐해준다고 말해주대?” “이제 내 방이 생겼어.” 여러분, 보세요. 그 소녀가 하는 말이, “이제부터 내 방에는 노크를 해야 들어올 수 있어.”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과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을 가릴 수 있는 나만의 세계가 생겼어.”라고 소녀는 이야기합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 아닙니까? 지금 사람들은 다 자기 방이 있어요. 부모라도 노크하고 들어와야 돼요. 노크해야 되는 그 방은 자기세계입니다. 거기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원치 않는 사람을 가려내고, 받아줄 사람과 받아주지 않아야 될 사람을 가려내는 나만의 세계가 형성되어 있어요.

 

거기는 종교 같은 것, 이슬람교고 뭐고 필요 없어요. 알라신 필요 없어요. 나만의 세계가 나의 사는 목적입니다. 이게 전부에요. 우리 그거부터 출발해야 돼요. 교회 가서 천당 갈 생각하지 말고요. 내가 누구냐를 알아야 됩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내치는 그런 세계에요.

 

그 열한 살 먹은 소녀의 오빠가 있어요. 오빠가 영화 끝에 이렇게 말해요. 지랄 같은 내 12년 인생이라고. 지랄 같은 내 인생이라고 했어요. 지금 제가 완화해서 그렇게 했는데 원래는 그렇게 안 되어 있어요. 차마 말 못해요. 하지만 풀이하면 12년 내 인생이 지랄 같은 인생이라고 해요.

 

그 애가 감옥에 간 이유는 자기 여동생 임신시켜서 죽게 만든 그 사람을 칼로 찔러서 5년형을 받고 감옥에 갔을 때에 마지막에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열두 살 먹은 애가 그런 넋두리를 했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설교시간에 이런 상스러운 소리를 잘 안합니다만. 여러분 인생이 지랄 같지 않습니까? 엉터리 아닙니까? 내 뜻대로 되던가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을 엉망진창 꼴아 박게 하십니까? 그것은 주께서 두 개의 차원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앉혔다는 말은, 네가 지금 에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지옥에 갇혀 있다는 겁니다. 지옥에 있을 때는 땅의 함수관계가 있습니다.

 

함수관계라는 말은 수학용어인데요. y = 2x²+3x+k, 라고 방정식을 세울 수 있는 어떤 공식. 두 값이 –5와 6이라면 여기서 k의 값을 구하시오. 이런 유형이 고 3의 수능문제에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미 이 땅은 어떤 함수가 있고 모든 인간은 그 함수에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거기서 노크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내 방, 나만의 인생을 그 k값을 구하는 거예요.

 

나는 어떻게 나만의 세계를, 이 복잡한 세상,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진짜 엿 같은 세상에서 나만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을 얻을 것인가의 그 방정식에서 찾는다고 평생을 다 보낸 겁니다. 연금은 어떻게 타면 되고, 보험은 몇 개월 넣어야 되고. 그게 나만의 공간 아니겠어요? 그게 이 땅의 함수관계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늘에 앉힌 그 천국도 땅과 똑같이 함수관계에 있어요. 원칙, 법칙이 있어요. 그 법칙은, 모든 인간도 예외 없이 그 법칙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구원된 겁니다. 그 법칙을 손수 이루기 위해서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여러분, 그 법칙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법칙 이야기하는데 터무니없다고 하지 마시고요. 그 법칙이 뭐냐 하면, 허물로 죽기 위해서 일단은 인간을 석유드럼통에다 집어넣어요. 여러분, 석유드럼통에 빠져있는 참새 같은 것을 보신 적이 있어요? 석유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에 참새 같은 것이 푹 빠져버리면 그걸 작대기로 건져보면 완전히 시커멓게 석유를 뒤집어썼잖아요. 우리가 죄와 허물로 뒤집어썼다는 겁니다.

 

그 죄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을 지키려 하는 것이 그 죄에 포함되어 있어요. 말씀 지키는 것이 죄라니까요. 여호와 증인들이 군에 안가는 그것이 그들은 죄인 줄 몰랐던 거예요. 왜냐하면 목적과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군에 가서 피를 안 흘리고 헌혈 안 해서 남의 피를 사용 안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천국 가겠다는 그 목적과 의도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지금 여호와증인만 탓하는 거예요? 일반교인은 탓 안합니까? 본인의 목적과 의도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다 있는데. 그러니까 인간은 완전히 죄와 허물로 옴팍 뒤집어썼다는 말이지요. 눈만 뜨면 의도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과 의도의 목표는 뭡니까? 열한 살 먹은 소녀와 똑같은 거예요.

 

노크해야 들어오고 내가 반길 사람은 반기고 거부할 사람은 거부해서 나만의 행복한 미래를 만드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 땅의 함수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현재란 과거가 있어서 생겼다고요. 그러나 하늘나라 함수는 그게 아니에요. 미래를 위해서 먼저 있는 것이 현재라고. 완전히 달라요. 함수관계가 다릅니다.

 

그 정의역이 달라요. 천국은 이런 곳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그 정의영역이, 그 필드가 다르다는 그 말이지요. 교회가 외칠 것은 그거예요.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못 지키는 이 말씀을 어떻게 성취시켰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들려지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 겁니다.

 

헌금은 어떻게 하고, 전도는 어떻게 하고, 봉사는 어떻게 하고, 선교는 어떻게 하고, 이게 아니라니까요. 내 인생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지 그게 아니에요. 나는 그냥 죄로 뒤집어썼는데, 석유통에 빠졌는데, 그래서 석유통에서 뭘 할 때마다 석유방울이 튀어요. 죄가 튄다고요 사방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어떤 공포심에 눌려있어요. 공포심은 뭐냐? 나는 내 것을 지키고 싶은데 그게 방해가 되니 공포를 느끼고, 공포를 느끼니까 타인에 대해서 분노하고, 분노하니까 자살하고요. 그게 이 땅에 흐르는 함수입니다. 함수관계에요.

 

주님이 이 땅에서 이미 너희를 하늘에 앉혔다는 말은, 예수 믿는 우리 자신을, 자신의 백성을 어디에 포함시켰느냐 하면, 예수님 일에 포함을 시켜놓아 버린 겁니다. 포함을 시켜놓으면 우리의 담당할 것이 뭐냐? 죄와 허물로 죽으면 돼요. 참 쉽지요. 말씀을 지켜서 죽어가는 나를 살리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아, 나는 이렇게 하면서 죽어야 되는구나, 그 역할을 하시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이 뭐라는 것을 혹독하게 이 땅에 살면서 체험하시면 되는 거예요. 지옥이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하나씩 잃어가는 것이 지옥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잃어가게 하시는가 하면, 시간을 통해서 잃어가요. 하루를 살면 하루가 떨어져 나가요. 또 하루 살면 그 하루가 떨어져 나가요.

 

거울 보세요. 젊을 때는 이렇게 흰머리가 없었습니다. 염색했어요. 염색 안하면 희어져요. 70퍼센트가 되면 염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그 까맣던 머리가 흰머리가 돼요. 나중에는 빠집니다.

 

영국여왕의 남편 필립공은 96세에 운전하다 걸려서 운전면허 반납했어요. 지금 우리교회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70되어도 운전 잘합니다. 그런데 연세 96세 되어보세요. 운전 못하지요. 그래도 고집부립니다. 다 한고집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자진해서 운전면허증을 반납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안 받아 준다는 거예요. 자식도 나를 안 받아준다는 겁니다. 그 역할을 우리가 감사하게 기쁘게 합시다. 왜냐하면 이미 하늘에 앉아 있으니까.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이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니고 주님이 원했던 일인데 본의 아니게 성령이 임해서 주님이 원했던 그 일에 나도 거기에 같이 끼어들게 된 거예요.

 

운전면허증만 반납되어야 될까요? 반납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내 건강함, 팔굽혀펴기, 그런 것. 이것도 반납해야 돼요. 나는 엘리베이터 안타고 계단 올라간다. 이것도 반납해야 돼요. 서서히 온 관절이 다 뭉개집니다. 계단 내려갈 때 옆으로 난간 잡고 내려가야 돼요. 아파서 못 걸어가지고. 하나 둘 씩 솔솔, 그 귀한 내 것을 다 빼앗깁니다.

 

그 일을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가지고 다 삭제시키는 쪽으로 하루를 잘려 나가게 합니다. 잘려나가는 그 사진들이 스냅사진이 되어서 우리가 인생을 다 살게 되면 결국은 한 장의 사진이 돼요. 손에 잡으면 얇은 종이인화지 한 장 남아요. 이것이 네 인생이다.

 

하루 지나면 하루의 사진이 딱 찍혀 나옵니다. 그 다음 찍혀 나옵니다. 나의 과거는 지나간 추억의 사진첩에만 남아 있을 뿐이에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어디로 가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늘에 앉히시는 것은 정지화면입니다.

 

오늘 정지화면 놓쳐버리면 여러분은 설교 다 놓친 거예요. 정지화면입니다. 스냅사진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인생을 요란스럽게 살아도 그 프레임, 사진액자 밖으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누굴 만나고, 누구와 헤어지고, 누구하고 결혼하고, 누구하고 애 낳고, 백날 해도 오글오글 그 사진 안에, 프레임 안에 다 들어 있었던 일이에요.

 

하늘의 일이 아니고 네가 지옥에서 이렇게 살았노라, 하고 보여주는 그 한 장의 사진 안에 우리가 다 놓여 있습니다. 하늘에 앉혔다는 것은 정지화면이에요. 왜 정지화면이냐 하면, 이게 메시아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늘에 앉혔다는 말, 지금 하늘이 어디냐? 주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거든요. 아까 사도행전 2장에서 보셨지요.

 

오른편이 어떤 자리냐 하면, 지상의 변화를 유발하는 자리가 오른편의 자리에요. 출애굽기 15장에서 오른손의 능력이라는 말은,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오른쪽에 있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인간은 절대로 안 달라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안 달라지려고 하는 인간의 이름을 바꿔버려요.

 

인간의 이름에서 주의 이름으로. 육의 사람을 받은 이름에서 영의, 주의 이름으로 살게 되리라, 하는 것을 선언하는 이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약속의 자식을 낳았다는 겁니다. 불가능해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약속이라는 자식을 낳게 돼요. 우리 몸을 통해서.

 

분명히 우리는 죄인이에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국에 앉혔다는 내용물이 나와요. 자식이 생산되듯이 그게 나와요. 왜냐하면 하늘의 함수는 뭐냐? 요한계시록 7장 14절에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13절에서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라고 물으니까 14절에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석유로 시커멓게 뒤집어 쓴 그들에게 졸지에 예수의 피가 거기에 덮이게 되면 하얗게 되어버려요. 우리가운데 터무니없다는, 허무맹랑하다는 이야기는 안하겠지요?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을 씻어내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예수의 피 밖에 없어요. 예수의 피로 씻음 받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교회가 만들어낸 천국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우리가 도착한 천국이 아니고 우리가 가야될 천국이기 때문에 뭘 살리느냐 하면, 자기가 수십 년 동안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교회법에 충성하고, 남에게 이웃 사랑하고, 자기가 착한 일 한 그것을 쥐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교회가 진짜 천국이 너무 터무니없으니까, 도저히 이 말이 안 믿겨지니까, 이미 하늘에 앉혔다는 말이, 시간 속으로 정지화면이 된 이것이 안 믿겨지니까 이걸 뭘 로 바꾸느냐 하면, 천국의 대용으로 바꾸는 거예요. 열심히 노력하시면 나중에 죽어서 좋은데 가십니다, 이렇게 바꾸는 거예요.

 

여러분, 이래도 교회가 이단 아니에요? 신천지보고 이단이라 하는 것이 이상해. 신천지도 기존 교회에서 나왔거든요. 여호와의 증인도 마찬가지고요. 기존교회가 없었으면 안 나왔을 단체들이에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할 때 비교급으로 사용한 이것, 어렵다는 이것은 불가능함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가 수련회에서 여러분이 보셨지요. 비교급은 불가능한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못생긴 여자가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말은,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내가 나에게 뭘 했는가를 쳐다보지 말라는 겁니다. 메시아라는 그 전용기 있잖아요. 베트남 갈 때 김정은이 전용기 타고 가잖아요.

 

천국에서 온 그 전용기 타고 오신 분이 뭘 했는가에 주목해야 돼요.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을 받게 되면 더 이상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지킬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사람이 내가 지킬 것을 생각하게 되면 자꾸 공포감이 밀려옵니다. 무서워져요 자꾸. 매사가 무서워요. 무서우면 자기를 지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주의 역할로, 너는 죄와 허물로 죽은 역할을 하라고, 그 역할을 우리가 부여받게 되면, 모든 세상사는 것이 호사입니다. 호사. 하루 세끼 먹는 것도 호사고요, 지옥이 물 한 방울이 없다는데 세끼나 먹지요. 저쪽에 가면 생수가 있거든요. 오늘 점심메뉴가 뭡니까? 미역국입니까? 닭개장. 닭개장이 호사 아닙니까?

 

가버나움 그 영화 보세요. 모든 초등학생에게 다 보여주고 싶어요. 지금 세상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애들이 봐야 돼요, 애들이. 징징거리는 애들이 봐야 돼요. 어떻게 살아가는지. 구정물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번 봐야 돼요. 어른 잘못 때문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정치적 잘못 때문에.

 

하루 세끼 먹는 것도 호사고, 건강한 이것도 호사고요. 왜 건강해야 돼요? 말도 안돼요. 지옥에 사는 인간이 왜 건강해야 됩니까? 지옥에 있는 인간이 왜 안 굶어야 돼요? 굶어야 돼요. 그런데 주시잖아요. 이걸 가지고 큰 은혜라 하는데 그 은혜 안에 내용이 들어 있어요. 천국의 함수, 천국의 원리와 법칙을 그냥 물과 햇빛을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담아서 주는 거예요.

 

네가, 햇빛 있다, 공기 있다, 목숨 얻었다, 신난다 하지 말고 이 땅에서 너는 벌써 벗어났다, 너는 주의 일의 역할의 연기자야,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거자야, 그 역할 하라고 우리에게 계속 살게 하시고 은혜 주시는 겁니다. 다시금 제가 분명히 당부합니다만, 다 지나가면 사진첩에 지나지 않은 인생에서 제발 내가 주를 위해서 큰 일했다는 오만과 자만심을 갖지 마세요.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에요. 운전면허증 반납 안 할 거야 정말. 그게 내 정체성이고 내 가치고 의미인데, 평생 운전했는데 그걸 왜 자진해서 반납해요? 내 목숨 반납하는 것이나 똑같은 것인데. 사고를 내야 이제 반납하지요. 왜 내 것을 남에게 줘요? 내가 지키고 싶고, 내 귀한 것, 내 추억이 다 담겨 있는데 그걸 왜 내놔요? 미쳤어요?

 

그러니까 그걸 이미 아시고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너는 벌써 하늘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미 그것은 고정된 운명, 그걸 정지화면, 확정된 운명자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우리 역할은 뭐냐 하면, 아주 쉬운 거예요. 그냥 죄지으시고, 허물 뒤집어쓰세요. 그것밖에 없어요.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 하는 그 고집 피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그게 바로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오늘까지 안 살았으면 미처 몰랐던 나의 죄인 되고 허물됨이라는 것.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어요. 사도바울은 자랑합니다.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요. 내가 못난 것을 자랑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한다. 십자가도 자랑하지만 내가 이렇게 변변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것을 자랑해요.

 

그것도 즐겁게, 감사하면서. 너만 지옥이야? 나도 지옥이야, 라고 경쟁하듯이 우리는 이 땅에 죄와 허물을 이제는 거침없는 하이킥, 거침없이 자신의 죄와 허물을 인정하는 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북한군 630명, 오든 안 오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슨 의도로 왔다고 이야기했는지, 안 왔다고 하는 그것도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이 모든 것이 오늘날 관심사로 되어 있는 의도고 목적인데 그게 죄입니다.

 

따라서 이 땅은 광주사태를 통해서 지옥인 것이 또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하고 비교해서 자신을 평가하지 말고 제발 성경 좀 보게 하옵소서. 사도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좀 보게 하옵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무슨 일을 하셨는지 제발 관심 둘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