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53 - 나와 우리
19,03,1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2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용서를 받는 것도 집단적으로 처리되는 일인 동시에,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서 형벌을 당하는 경우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
* '나'가 아닌, '집단' !!
여기에 "용서를 받는 것도 집단적으로 처리된다" 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보면 이게 당연한 이야기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행동이 자기에게 결과로 주어진다고, 그렇게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는 말이죠. 그렇게 용서가 집단적으로 된다고 하면, 자기가 행동한 것과 용서한 것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기도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우리' 라는 것인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나에게'가 아니고 '우리에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니 성경은 '나'와 '우리'의 싸움인데, 그래서 교회에 올 때는 '나'로 왔다가,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우리'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나'로부터의 해방,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연연해하지 않는, '나'에 대해서 손을 뗄 수 있는 자유함, 바로 그것이란 말이죠.
* 갈렙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 !!
어제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갈렙이 들어갈 수 없는 불가능한 나라에 들어간다고 우겼을 때, 그 갈렙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신약에서 밝혀진다는 겁니다. 갈렙의 의식이 계속 발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말이죠. 신약에서는 "갑렙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있다" 라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하는데, 혹은 "여호수아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다. 왜냐하면 선지자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구약에서는 갈렙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구약은 '나'와 '우리'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 '너'의 싸움이 된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갑렙 너는 무엇이기에 들어간다고 우기는가?" 라고 하게 되면, 그렇다면 '갑렙'과 그 외의 사람들인 '너'의 싸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갈렙이 개인적으로 믿음이 있습니까? 그런 차원이 아닌데, 왜냐하면 신약에 오게 되면, 갈렙 개인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 갈렙 속에는 뭔가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설교시간에 '신기한 것'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말이죠.
아주 장대한 민족이 버티고 있는 그 나라에 오합지졸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들어간다는 것은 성립이 되지 않는데, 달리 말하면,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종류의 인간들이기 때문에 말이죠. 이스라엘도 힘으로 버티고, 토착민들도 힘으로 버티고, 그러니 둘 다 약속과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속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까, 즉 "전쟁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꾸준히 약속의 땅까지 근접하게 만드신 이질적인 요소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언약궤' 라는 겁니다. 언약궤가 길을 열어주어야만 바로 길이 열린다는 말이죠.
* '언약궤' 라는 이질적 요소가 !!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먼저 건너게 되는데, 그렇게 기적적으로 건넜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길갈에 12개의 돌을 가지고 제단을 쌓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길갈의 사고방식으로 중무장이 된 12개의 돌,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12지파라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는 각 개인의 가치라는 것은 없어진다는 겁니다.
(수 4:15)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수 4:16)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수 4:17)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수 4:18)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 (수 4:19)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수 4: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수 4: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수 4: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수 4: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수 4: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 우리는 시다바리 !!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넌 것이 인간들의 힘이나 지혜가 아니고, 물론 인간의 믿음도 아니고, 그것은 언약궤가 먼저 길을 열어주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죠. 이 언약궤가 바로 믿음인데, 그러니까 갈렙은 단순하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들어가지 못하는 게 맞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간다고 하니 들어간다. 우리는 시다바리처럼 뒤따라갈 뿐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약속을 따라가서 가면 되는데, 그런데 그 약속이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의 기적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나'의 일이 아니고 '너'의 일이 아닌데, 이러한 '나'와 '너'가 만나서 '우리'가 된다는 것은, 그것은 이 세상에서 통하는 공식이지 하늘나라에서는 먹혀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와 싸우는 '우리'는 없는 '우리' 라는 것인데, 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담겨있는 '우리' 라는 겁니다.
* 기존의 '나'와 대비되는, 새로운 '나' !!
그러니 개인적인 의도를 가지고 교회에 나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개인의 생각은 자기가 자기를 천국에 가는 것을 가로막는데, 왜냐하면 그 '나'가 계속해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를 없애고 우리로 전환을 시켜야 하는데, 그 '나'에게 없는 '우리'로 전환하기 위해서 '나'와 대비가 되는 새로운 '나'가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새로운 '나'가 누구인고 하니,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바로 그 '나' 라는 말이죠. 즉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고 버티고 있는 '나'가, 예수님의 '나'와 만나서 박살나고, 바로 이 예수님의 '나'에서 발생되는 것이 바로 없었던 '우리'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겨나게 된다는 말이죠.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니 용서에 있어서도, '개인' 용서라는 것은 없고, 어디까지나 '우리' 용서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시작한다는 말이죠. 이것을 보다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20장을 보겠는데, 17절입니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여기에 보면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너희', 즉 '우리' 라고 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나'가 아니고 예수님의 '나'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 즉 '우리' 하나님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이 보증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각 개인의 행함에 의해서 보증되는 것이 아니라, 즉 자기 행동에 따라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게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만약에 자기 행동여부에 따라서 그것이 결정이 된다고 하면, 그렇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되어버리면, 이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출발점이 '나' 라는 것이 아니고, 그 '나'를 대체해서 주님이 그 자리에게 계신다는 말이죠.
그게 교재 124페이지와 125페이지에 나오는데, 그러면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첫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그 예수님을 표상하기 위해서 첫 번째 아담이 있습니다. --------------------------------------------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두 번째 아담을 위한 첫 번째 아담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출발을 '나'로부터 하면 안 되고, 즉 '나'를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계셨고, 그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이 땅에 만들어지고 나타나야 한다" 라는 겁니다. 직업이 어떻든 간에,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무엇을 하든, 그런 것은 아담이라는 포괄적인 범주 안에 있다는 겁니다. 여행을 가서 독감에 걸리든 말든, 그런 것은 다 아담에 속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 라는 것을 통해서 나타나는 반응과 모습들은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자기의 우수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 라는 것이 존재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을 어떻게 받습니까? "네가 남들에게 내세울 자랑거리가 있어야 인생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라고, 우리는 그렇게 줄기차게 교육을 받아왔다는 말이죠.
* 광산 김씨, 똑바로 해 !!
그래서 소위 집안의 어른이랍시고 뭐라고 합니까? "그 따위 짓을 하려면 우리 집안에서 나가라" 라고 하는데, 즉 "우리 집안의 사람이라면 집안의 사람답게 살아야한다" 라고, 그것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특히 '광산 김씨' 라는 TV프로를 보면,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똑바로 해. 그렇지 않으면 광산 김씨 집안에 먹칠을 한단 말이야" 라고 하는데, 광주에 가면 이런 광산 김씨들이 많다고 하는데 말이죠.
(녹취 구 - 목사님, 광산 김씨가 떴는데, '하나 뿐인 내편' 마지막 회에도 출현했습니다. ㅋㅋ)
이것은 광산 김씨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도 역시 그런 교육을 받아왔는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우리 집안의 그 '우리' 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 '나'를 살려내는 '우리' 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교회에 와서 예수님이라고 하니, 무슨 생각을 합니까? 당연히 '나'를 위한 예수가 된다는 말이죠. 거기에 삼위일체 하나님까지도 다 얹어서 통합을 시키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애굽에 나올 때는 좋았는데, 그래서 휘파람을 불고 찬양을 하면서 난리가 났다는 말이죠. 마치 아이들이 소풍을 가는 것처럼 좋아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는다는 겁니다. 약속에 땅에 가지도 못하고 무려 60만명이 죽는다는 말이죠. 광야에서 40년 동안 뺑뺑이를 돌리면서 모두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약속에 땅에 들어가게 못하게 만드는데, 왜냐하면 그런 사고방식으로는 들어가 봐야 그게 약속의 땅이겠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이 생각하는 약속의 땅과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약속의 땅은 다르다는 겁니다. 천국이 그렇다는 말이죠.
* '나'를 위한 시간인가? '복음'을 위한 시간인가?
이것을 간단하게 문장으로 써보면, "나를 위한 시간인가? 복음을 위한 시간인가?" 라고 할 수 있는데, 구약 이스라엘 역사가 과연 누구를 위한 시간인지, 그것을 한 번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자기를 위해서 택했다고 하시는데, 그게 하나님의 이름인데, 135편에 나온다는 말이죠.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그만 바꾸어 버렸는데, 그래서 망했다는 겁니다. 즉 자기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고 여겼다는 말이죠.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즉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것이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그것은 이 세대에서 주장하는 상식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나'로 바뀌어지는 것, 그게 바로 갈렙의 믿음이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약속의 땅은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닌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들과 똑같은 힘의 사고방식을 가진 토착민들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힘이 부족하면 밀고 들어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것이죠.
* 약속을 믿은 갈렙 !!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맞는데, 그런데 갈렙은 왜 들어간다고 자기 혼자 주장을 하는고 하니, 이스라엘에게는 저들과는 다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들에게는 없는 것, 그게 바로 '약속' 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갈렙은 약속을 믿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약속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약속이 약속이 되게 하기 위해서 특별히 우리를 이스라엘로 만들었다고 하면, 그러면 약속이 알아서 우리를 약속대로 약속에 땅에 넣어줄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갈렙의 주장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되려면 무엇이 극복되어야 하는고 하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 선교를 할 때 잔머리를 많이 굴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약속의 땅에는 그런 잔머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기도할 때도 잔머리를 많이 굴리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기도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물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넣지만, 그 내용은 보면 완전히 이방인의 기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응답이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정리하면, 약속의 땅은 우리 인간에게 없는 나라인데, 그런데 그 없는 나라가 있다고 약속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그것이 그 없는 나라에 들어가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없는 나라에 우리를 데리고 갈 때는 용서가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성경이 참으로 오묘한데, 힘이 아닌 용서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용서는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고 하니,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죄가 없으면 용서가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래서 ①주님은 용서부터 먼저 주신다는 겁니다.
* 힘이 아닌, 용서 !!
그러면서 왜 용서가 아니면 안 되는지를, 용서뿐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②우리에게 죄를 발생시킨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죄를 발생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③체험들이라는 겁니다. 즉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것이 죄를 보여주는 하나의 마당이 되고 무대가 된다는 말이죠.
용서를 하셨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것인데, 강도가 천국에 갈 때 강도짓을 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강도짓을 하든, 세리짓을 하든, 창기짓을 하든, 구원을 받는 것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여기서 마태복음 26장을 보겠는데, 51절에서 53절입니다.
(마 26: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마 26: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여기 53절에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라고, 이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믿음이 검토대상이 되는데, 지금 베드로 앞에는 소수의 예수님 패거리밖에 없다는 말이죠. 반면에 상대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로마군인들인데, 즉 갈렙 앞의 가나안 토착민들과도 같다는 겁니다.
* 예수님의 신변을 지키려는 베드로, 그러나 !!
지금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신변을 지키려고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베드로가 내세우는 방식이 과연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게 바로 인간이 할 도리를 다 끄집어낸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취한 행동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칼을 가지고, 즉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가 자기 한계를 드러내도록 유도했다고 볼 수가 있다는 말이죠. 아무튼 베드로는 그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정당한 일이고, 그러니 그게 정당한 분노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베드로는 자기 하나를 희생해서 예수님을 지킬 수만 있다고 하면, 그것을 매우 대단한 일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이번에 뉴질랜드에서 총기난사가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떤 이슬람 할아버지가 자기의 온 몸으로 범인을 막아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의분이 베드로에게도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서 정작 누가 책망을 받는고 하니,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베드로가 믿음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베드로에게는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 시점에서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베드로의 모든 시간은 자기를 위한 시간인데, 주님을 위한, 복음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투자한 시간들을 계속해서 보내왔다는 말이죠. 그게 베드로의 생애인데,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지켜온 방식으로 예수님도 지키려고 했다는 겁니다.
* 베드로야, 검을 다시 집어넣어라 !!
그러니 그게 천국에 통하겠습니까? 통하지 않는데, 열심히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고 "검을 다시 집어넣어라" 라고 하시는데, 이것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자기 성질은 성질대로 다 드러나고, 책망은 책망대로 받고, 즉 주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사가 이깁니까? 인간이 이깁니까? 구약의 역사 가운데 엘리사가 전쟁을 할 때 천사를 동원해서 했는데, 아람군대가 아무리 많아도 천사들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죠. 야곱이 에서를 만나러 갈 때 하나님의 군대가 호위를 했다는 겁니다.
(창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창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천사의 힘을 인정한다는 것은,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겠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너의 힘은 하나님 나라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다는 겁니다. "너의 힘, 즉 너의 의, 너의 거룩, 너의 경건, 그런 하나님의 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죠.
만약에 12천사가 오게 되면, 아무리 로마군병이라고 해도 게임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왜 12명의 천사를 동원시켜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았는지, 그런 숙제를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는 말이죠.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 보이스 오버 데블 !!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악마의 시험' 이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을 붙이자면 '영적전쟁'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적전쟁은 성령팀과 악령팀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빠지는데, 즉 인간은 없다는 것이죠.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그러니 성령을 받지 않으면 영적전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악령이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인간은 빠지는데, 제가 처음부터 '나'와 '우리'의 싸움에 있어서, '나'는 빠져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말이죠.
악마의 시험이라면 악마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즉 유일하게 '나' 라고 하는 주의 이름이 왔을 때 비로소 악마는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의 시험이 무엇인고 하니,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밀어붙이면 천국이든 무엇이든 간에 할 수 있다.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현재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총동원하게 되면, 우리가 그리워하던 영원한 안식과 행복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도 받아낼 수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악마의 속삭임인데, 즉 '보이스 오버 데블' 이라는 말이죠(ㅋㅋ).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가 한국교회를 보게 되면, 이게 성령의 소리입니까? 악마의 소리입니까? 당연히 악마의 소리인데, 그러니 그런 악마의 소리를 들으려고 교회에 가는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주님의 소리가 아니고 말이죠. 그것은 천주교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교회에서는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해주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개인적인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오게 되면 내놓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내놓게 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이야기한 자기 의로움, 경건, 거룩, 그런 것들이란 말이죠.
* 당신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교회에서 하는 악마의 소리를 주님의 소리로 여겨서 거기에 맞추어 나가게 되면, 그렇다면 '나'가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까? 당연히 '나'의 구원인데, 그래서 개인구원은 악마의 짓거리라는 겁니다. 그것을 세 글자로 '구원파' 라고 하는데, 즉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당신은 이렇게 하면 구원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죠.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게 다 한국교회에서 나왔는데, 기존 한국교회에서 하던 짓거리 중에서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서, 더 정교하게 교리로 만들어서 따로 살림을 차렸다는 겁니다. 여호와 증인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이 나누어주는 '깨어라' 라는 쪽지를 보면 "당신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기존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전도지에도 보면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행복은 건강에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은 돈에 있는 것도 아니고, 행복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악마의 음성이란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결과적으로 자기가 잘 되는 것인데, 그런 쪽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한다는 말이죠. 거기서 나온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영적전쟁을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악마와 같은 울타리에 있으면 악마와 같은 논리로 뺑뺑이를 돌고 있는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악마를 이길 수 있느냐는 말이죠. 마치 물에 빠져서 자기운동화 끈을 자기가 당기는 것과도 같은데, 물 속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다리만 들리는데, 그러면 오히려 몸은 더 빠지는데, 그렇게 몸통이 눌리면서 "기도하자. 전도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죠.
* 영적전쟁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
사도바울은 영적전쟁을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정작 영적전쟁을 할 수 있지를 않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전쟁을 할 수 있습니까? 제가 갈렙을 이야기했는데, 영적전쟁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은 완제품인데, 미흡함이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아들이 되려고 노력해서 아들이 되었다고 하면 미흡함이 있을 수가 있는데,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은,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제품으로 나온 것이 때문인데, 그래서 그것은 전혀 미흡함이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 자체로서 완전한 아들인데, 불완전한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죠.
로마서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바울이 매우 바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데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보면 얼마나 깊이가 있고 차분한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사도바울이 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솜씨라는 말이죠. 로마서 8장 14절과 15절입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무서워 !!
사람들이 영적전쟁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에게는 이미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제대로 전쟁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무서워한다는 것은 자기도 실패할 수가 있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감인데, 천국에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감, 자기 미래가 불안하고 비참할 수 있다는 공포감, 그래서 지금 살아가는 것도 역시 불안불안한데, 그런 초조감을 지울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으세요. 성령을 받으세요.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좋은 물건은 다 모른다는 겁니다. 프로폴리스, 오메가3 등등,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모으는데, 그런데 자기는 슬슬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죠. 즉 성경에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그런 것을 다 모으는데, 비실비실이라는 겁니다.
혹시 자기를 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은 미완료라는 말이죠. 미흡함인데, 내일이 되면 생각이 또 달라지고, 한 달이 지나면 또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 순간은 완벽해 보이지만, 돌아서면 또 뭔가가 빠져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링거를 맞듯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면 복음폐인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ㅋㅋ).
여기서 근본적으로 잘못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개인, 그것을 '개별성' 이라고 하는데, 개인이 살려고 하니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죠. 성경에는 구원론이 없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 이야기밖에 없다는 겁니다. 구원이 아니고, '나' 라는 것은 예수님으로 마감이 된다는 말이죠.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담은 오직 예수님 !!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아담은 오직 예수님뿐인데,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첫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두 번째 아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먼저 계시고, 나머지 모든 아담들은,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그 하나의 아담의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는 천국권과 지옥권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두 종류의 인간들이 다양한 민족을 통해서 펼쳐진다는 말이죠. 물론 민족은 다양하지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민족은 이스라엘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12정탐꾼들 가운데 약속에 땅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밖에 없다는 말이죠. 홍해를 건넌 자들 중에서, 이 두 명밖에 없다는 겁니다.
(민 32:10) 그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민 32: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민 32:12)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민 32: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
* 약속의 땅은, 약속이 들어간다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약속의 땅의 속성과,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부합된다는 말이죠. 즉 "우리 인간들은 들어갈 수 없다. 맞아. 충분히 인정해. 그러나 이 약속의 땅은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들어간다" 라는 겁니다.
바로 그 약속이 언약궤에 담기게 되는데, 그런데 인간이 자기 개인을 생각한다면 그 약속은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나' 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보면 이삭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먼저 이스마엘을 주시고, 그 다음에 자식을 낳게 하시는데, 그 자식은 우리 육에서 나온 자식이 아니라는 말이죠.
3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약속한 것인데, 그 약속의 자녀가 바로 이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은 이스마엘의 나라가 아니고 이삭의 나라인데,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이스마엘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 유일한 '나'에서 늘어난 '너희' !!
그것이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이라고, 그렇게 되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의 아버지를 너희 아버지라고 인정하고 불러도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출발점이 유일한 '나'에서 늘어난 '너희', 즉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즉 예수님 개인의 확장이라고 보면 된다는 겁니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제가 설명을 하면서도 한계를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유일한 '나'가 아닌, 유한하고 육적인 자기 자신, 즉 '나'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성령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그런데 그 성령은 자기가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주신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성령세례'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분이, 마지막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겁니다.
(요 1:32)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요 1: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요 1: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
그게 요엘서에 나오는 예언인데,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것을 사도행전 2장에서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행 2: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행 2: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데, 즉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자들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는 상황이나, 오늘날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힘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것은 맞는 말인데,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인정하자는 것인데,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그들이 말이 틀린 것이 아니고 맞다는 겁니다. '나' 라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히 맞기는 맞는데, 즉 "나의 힘, 나의 지혜, 그런 것으로 안 된다" 라는 말이죠.
* '약속'과 '나', 죄, 그리고 용서 !!
그러면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약속에 의해서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과 '나' 사이에 무엇이 성립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죄가 성립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용서를 받아서 들어간다는 말이죠. 즉 용서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주님이 넣어주신다" 라는 것은 맞는데,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을 빼먹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주님은 용서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법의 위반자, 즉 죄인이라는 겁니다.
* 법의 위반자 !!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주어야 하는데, 즉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법의 위반, 즉 죄가 된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악마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악마와 같은 편인데, 그런데 무슨 악마를 이기고 천국에 간다는 겁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는데, 따라서 악마에게 속한 자들에게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용서 외에는 없다는 것이죠.
주님은 우리와 거래를 하고 동업을 하시는 것이 아닌데, 오직 용서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용서가 계속해서 일어나려고 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는 말이죠. 살인자이고, 포행자인데, 그것을 아주 기분이 좋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즉 세리고, 창기고, 강도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 '나' 라는 것은 없애는 것이 아니고 쓸모가 있다는 것인데, 그러면 무엇을 하는데 필요하다는 겁니까? 간음이 무엇이고 살인이 무엇인지, 즉 개인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양상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가시는데 그 예수님을 경찰이 잡으려고 하니까, 자기에게 있는 칼을 가지고 예수님을 지킨다고 하면서 설치는, 그런 짓이 여기에 속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노림수가 아니고 순수한 마음에서 한 것인데, 나름 소박한 마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소박한 마음이 죄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박을 받았는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아제 개그인데 말이죠(ㅋㅋ). "목사님, 열심히 헌금을 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예, 잘 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일에 수고가 많았습니다" 라고 해주면 된다는 겁니다.
아직 오늘강의를 절반도 하지 않았는데, 할 것이 많은데, 영적전쟁까지 가려고 하면 갈 길이 멀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12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첫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아담이 먼저 있고 그 예수님을 표상하기 위해서 첫 번째 아담이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모형이 실체를 향하여 압력을 가할 처지에 있지 아니합니다. --------------------------------------------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 !!
여기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고 하는데, 그 오실 자는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모형은 무엇입니까? 모형은 실체에 대해서 압력을 가할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고 하는데,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에게 협박을 가하거나 위협을 가할 입장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 증명을 할 의무가 없어 !!
물론 이렇게 말하면, "아니 목사님,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협박하고 겁을 주었습니까?" 라고 할 텐데, 그것을 제가 증명해드리겠다는 말이죠. 이것을 글로 써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 증명을 할 의무가 없다" 라는 것인데,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기를 믿어달라고, 그렇게 자기 증명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동조할 이유나 의무가 없다는 말이죠.
여기서 요한복음 2장 24절과 25절을 보겠습니다.
(요 2: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 2: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부탁입니다. 믿어주세요" 라고 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는 여기에 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증명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주님과 거래를 합니까? "당신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면 내가 당신을 믿어줄 용의가 있다" 라고 말이죠. 주님은 그런 것에 대해서 전혀 동조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실체이고 본체이기 때문에, 모형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인간 배후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악마와 영적인 전쟁을 하려고 하면 악마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그러면 그 악마의 수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 너를 간섭하는 놈을 제거하라 !!
악마는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낸다는 말이죠. 달리 말하면, "나는 통제하고 지배하는 꺼리를 없애버리는 짓을 악마가 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어디 나에게 간섭을 해?" 라고 하는 것을 악마가 없애버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악마가 아담을 계속해서 부추기고 유혹했던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의 한계처럼 느껴지는 선악과나무를 너의 손으로 뽑아버려라. 즉 삼켜버려라. 먹어버려라" 라고 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하면서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을 제거하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아침에 자고 있는데 "계란이 왔어요" 라고 하면, 창문을 닫으면 되는데, 그래도 안 되면 "아저씨, 좀 조용히 해주세요. 스피커를 꺼주세요"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TV 소리가 시끄러우면 끄면 되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하면, 방송국에 연락해서 그 사람을 나오지 못하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러니까 이것은 "감히 누가 나에게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지적질을 하는가? 도대체 누구야?" 라는 것인데,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기 눈에 보이지 않도록 그만 없애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악마의 마음이란 말이죠.
* 내가 가장이다 !!
저의 20대 시절에 있었던 일인데, 그때는 제가 아직 취직을 하기 전이었는데, 그때 성경말씀을 보고 있으니까 형님이 어떻게 했는고 하니, 보고 있던 성경책을 그만 찢어버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취직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성경을 본다고 말이죠. 그래도 자기가 가장이랍시고, 가장 노릇을 한 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어떤 가정은, 동생들이 바둑이나 두면서 빈둥거리면서 노니까, 형이 그만 도끼를 가지고 두꺼운 바둑판을 박살을 내고 말았는데, 즉 "앞으로 계속해서 놀면 너희들의 머리가 이 바둑판처럼 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형으로서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인데, 그분이 충북대학교를 나와서 농학박사까지 되었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하면, 복음이 들려오는 스피커는 부수어 버리고 책은 찢어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악마가 가르쳐준 수법인데, 즉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면 거기에 대해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죠.
아내가 잔소리가 심하면 방법은 간단한데, 그러면 서로 갈라서면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남자가 살림살이가 어떻고 하면서 잔소리를 하면 헤어지면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갈라서서 남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나' 라는 겁니다.
* 예수님의 잔소리, 그리고 십자가 사건 !!
그래서 악마가 아담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네가 바로 신인데, 그런데 구차하게도 너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통제자를 너의 머리에 왜 두는가? 너의 손으로 없애버리면 되잖아. 이 바보야! "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게 악마의 음성이라는 겁니다.
유대사회가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잔소리가 나왔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님을 죽이면 되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들은 더 이상 자기들을 간섭할 자는 없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전설의 고향 시리즈 중에서, 그 유명한 덕대골 사건이 터진다는 겁니다. 즉 "내 다리 내놔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ㅋㅋ).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십자가를 앞장세우면서 "네가 나를 죽였잖아" 라고 하시면서 쳐들어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용서가 용서가 되기 위해서 먼저 자기 죄의 성격이 규정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인간의 죄는 무엇인고 하니, 곧 악마와 한 통속인데, 그 악마의 마음이 "나는 곧 신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 대구모임에 왔다간 분들이 한 두 명이 아닌데,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것인데, 왜 그렇게 나옵니까? 자기가 곧 신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내가 돈이 있어서 술을 마시고 벤츠를 타던 말던, 그것은 돈도 없는 너희들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내 돈을 내가 쓰겠다는데, 너희가 왜?" 라고 한다는 겁니다.
* 너희가 왜?
여기서 오늘 강의제목이 또 나왔는데, "너희가 왜?" 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끝까지 무엇이 남아있는고 하니, "나는 나다" 라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가 얼마나 솔직한지 모르는데, 즉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라는 말이죠. 그것과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악마의 소리가 똑같은데, 즉 "네가 부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길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런 불교교리가 먹히는데, 그래서 천주교도 그대로 따라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기독교도 그러하고 말이죠. "기독교인들, 너희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그것은 너희들이 신이 되고자 하는 수법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워치만 니이고, 또한 위트니스 니 쪽에서 주장하는 교리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용서의 개념이 없는데, 즉 "나는 쭈려그야 한다" 라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저 자기가 점점 더 우수한 존재로 달라지는, 그러한 재미로 교회에 다닌다는 겁니다. 자체적으로 더 멋있게, 더 훌륭하게, 그렇게 빛이 나야한다는 말이죠.
* 개인용서인가? 집단용서인가?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용서는 개인용서입니까? 집단용서입니까? 집단용서인데, 그렇게 일단 용서부터 받아놓고, 개인적으로 "너는 이런 이런 죄인이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이, 영적전쟁에 들어갈 잽도 되지 못하는 짓들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아닌 악마 쪽에 속한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 이름으로 신이 되겠다는 겁니다. 목사를 비롯해서 이런 인간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직접 자기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는데, 저에게 충고하기를 "목사님, 성경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겁니다" 라고 했는데, 그리고 이게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고객들이 그것만 원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무엇인고 하니, 성경에 보면 "말씀을 받는 것조차도 신이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게 요한복음 6장인지 지금 당장은 찾지를 못하겠는데 말이죠. 그리고 시편 82편에 보면, "너희는 다 신들이며 그의 아들들이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시 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래서 결국은 이스라엘이 그런 대목을 가지고 신이 되려고 하다가 그만 망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신이 되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은 영적전쟁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경쟁자인 악마가 무슨 시도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같이 병행하면서 드러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 악마의 정체는, 예수님이 하신 일과 병해서 !!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악마에 대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우리 인간은 신이 아니면서도 신을 추구하는 그 본성이 점점 더 노골화가 된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신이 되는 겁니까? 죄인이 되는 겁니까? 백이면 백이 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지금보다도 더욱 나아진다는 것에 대해서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데, 물론 교회에 나올 때도 그러하고 말이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 죄임됨을 더욱 더 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겁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을 점점 더 심화시키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느냐는 것이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아침은 먹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침을 먹은 것도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과분한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는 말이죠. "내가 이 정도 일을 했으니, 밥을 먹을 자격은 된다" 라고 하면, 그러면 영적전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영적전쟁의 방법은 죄인을 앞장세우는 것인데, 그래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그 용서의 위력과, 그리고 그것을 저쪽이 가지고 있는, 즉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거기에 동원된 모든 종교적인 위력과의 전쟁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시도와, 그리고 자기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산다고 하는, 바로 그것 사이의 전쟁이라는 말이죠. 그게 주님이 벌리시는 영적전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저쪽은 '나' 라는 것에 모든 힘을 다 실은 반면에, 오히려 성도는 자기에게 있는 힘을 모두 다 뽑아내고, 그리고 무엇만 의지한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약속, 즉 약속이 약속되게 하신다는 그 약속의 구체화, 즉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다 의지한다는 말이죠.
*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그렇게 되면, 저쪽은 아무리 돌려서 이야기를 해도 결국 자기 자랑이고, 반면에 우리는 무엇을 자랑한다는 겁니까? 물론 그것을 예수님만 자랑한다고 해도 되는데,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에서 구체적으로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러니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과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그 의미가 좀 다른데,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것을 예수님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것이고, 물론 그게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그야말로 묵사발로 만든 그 사건에 대해서 너무 너무 고맙게 여긴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겁니다. 자기 죄의 본질을 들추어내게 한 십자가 사건, 거기에 감사한다는 말이죠.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두 문장을 쓰겠는데, 그 차이점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이것은 철학에서 많이 하는 질문이란 말이죠. 두 번째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인데, 이게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질문이라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면, '나' 라는 개인에서 출발해서 어디에 꽂히는고 하니,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나' 라는 것은 계속해서 단단하게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 라는 것이 있어야 그런 질문이 성립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 라는 것이 확고하게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라고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모호한 질문을 통해서 모호함에서 확고함으로 나감으로서, '나'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나' 라는 것에 대해서 더욱 더 알고자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여기에 확고하게 있다" 라고 하는 것보다도, 그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자기가 놓여있는 그 공간, 그 영역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나' 라는 것이 아닌, '영역' 이라는 말이죠.
* 너희는 예수 안에 있다 !!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편지의 경우에, 사도바울이 어떤 질문을 하고 있고, 또한 거기에 대해서 답변을 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예수 안'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즉 "너희는 예수 안에 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이것을 쉬운 말로 하면,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러면 가족은 무엇입니까?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태어나야 하는데, 그러면 점차로 아들이 됩니까? 이미 아들입니까? 이미 아들인데, 그런데 이것을 누가 제일 싫어하겠습니까? 악마가 제일 싫어한다는 말이죠. "왜 너의 솜씨를 발휘할 생각을 하지 않는가?"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 그분의 아들이래 !!
그러면 성도는 무엇입니까? 솜씨를 발휘하던 말던 간에 자기는 이미 아들의 신분이 되었다는 말이죠. "그분의 아들이래!" 라고, 즉 "그분이 성령 안에서 나를 아들이라고 규정하셨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고치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리고 그 아들됨에서 탈출할 수 있는 능력도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죠.
살아도 아들이고 죽어도 아들인데, 즉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위상에 대해서 더 이상 손댈 여지가 없다는 말이죠. 자기가 어떻게 해서 아들이 되었으면,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부속품을 갈아넣든지 해야하는데, 전혀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아들이래!" 라고, 그렇게 되기 때문에 말이죠.
예를 들어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만약 추락을 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조종해서 그런 겁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자기는 그냥 'C-47' 좌석에 앉아있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사고가 나든, 무사히 도착을 하던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비행기 안에 있었을 뿐이고, 그러니 추락을 하면 추락하는 것이고, 무사히 착륙을 하면 착륙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비행기 안에, 즉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이죠. 어제 낮 예배시간에 거기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즉 "예수 안에서 행하게 하심이라" 라고, 그냥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행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그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면 "너의 솜씨를 부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왜 솜씨를 부리지 않는가? 기도를 잘하면서, 왜 하지 않는가?" 라고, 그렇게 자꾸만 우리에게 부채질을 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날씨도 덥지 않은데 자꾸만 부채질을 한다는 말이죠(ㅋㅋ).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죠.
* 천사보다 높은 위상이, '아들' !!
그러면 여러분, 최고의 신분이 무엇입니까? 1등이 천사이고, 2등이 성도입니까? 천사보다 높은 위상이 바로 아들인데, 천사도 흠모한다는 겁니다. 그게 히브리서 1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이혼을 하던 사기를 치던, 너는 아들이야" 라는 것인데, 천식에 걸려서 기침을 달고 살아도 아들이라는 겁니다(ㅋㅋ).
(히 1: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 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저쪽의 약속의 땅에 사는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장대와 같다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에 있다고 하면, 거기는 가야만 하는 나라라는 말이죠. 자기가 원하는 나라가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라고 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수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들이 된 것이 우리 뜻입니까? 결코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주님이 아들이 되게 했으면 게임은 끝났는데, 그런데 우리의 육적인 속성으로 인해서 매일같이 의심한다는 겁니다. "내가 아들로서 이렇게 살면 되겠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죠. 어떤 사람은, 로마서나 에베소서를 보면 몇 장부터 몇 장까지는 성도의 삶이 어떻고 저떻고, 그렇게 되어있다고 하는데, 어디를 구라를 떠느냐는 겁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성경을 다 버려놓았는데, 소위 QT를 하게 되면 전부가 그렇다는 말이죠. 에베소서 1장부터 4장까지는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성경해석이라는 겁니다. "너희는 이렇게 하라" 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는 어디에 소속이 되어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관심사가 "나는 성도가 되어야해" 라고 하니, 악마가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는데, 그래서 "너는 이렇게 하면 돼. 그렇게 해서 성도가 되었으면, 이제부터는 이렇게 살아야해" 라고 하면, 계속해서 그 관심사를 어디에 두게 합니까? 악마가 계속해서 개별적인, 즉 "나' 라는 것에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줄 곧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편하기도 하도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 개인용서가 아닌 집단용서 !!
그런데 우리의 용서는 무슨 용서라고 했습니까? 개인용서가 아닌 집단용서인데, 남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도 죄를 지었고, 자기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남도 죄를 지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아담에 속한 모든 자로서, 성도라고 하면 반드시 죄를 알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개인적인 죄가 아니고 집단적인 죄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대해서 조금만 공부를 하게 되도 알게 되는데,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짓는 죄가 자기 혼자서 짓는 죄가 아니고, 집단에 속한 이 세상에서,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지은 죄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가 죄를 지으면 교인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소위 당회에서 결정을 내리면 집사들을 비롯해서 교인들은 모두 다 따라하는데,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교인들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 성실했던 공무원, '아이히만' !!
'아이히만' 이라고 하는,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죽였던 범죄자가 전범재판에서 뭐라고 합니까? "당신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가?" 라고 하니, 그가 답하기를, "나는 공무원으로서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 ※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3.19 ~ 1962.6.1) 졸링겐 출생.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하고 지휘하였다. 독일의 항복 후 가족과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망하여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비밀정보 모사드에 의해 체포를 당하여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2차대전 중 나치스 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600만 명의 학살책임에 대한 추궁을 당한 끝에 사형판결을 받고, 1962년 6월 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두산백과) --------------------------------------------
이것을 보고 그 당시 뉴욕 타임즈의 기자였던 '한나 아렌트'가 글을 쓰기를, "그가 왜 죄를 지었는고 하니, 성질이 포악하고 잔인해서 그런 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서 죄를 지었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무원의 뇌는 항상 신상품이라는 말도 있는데(ㅋㅋ), 제발 생각을 좀 하면서 살라는 것이죠.
그렇게 유대인을 학살한 이 양반이 이웃에는 얼마나 친절하고, 그리고 얼마나 가정적인 가장이었는지 모르는데, 전혀 개차반이 아니었데, 물론 교회도 다녔다는 겁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인간의 인격은 노동에 최적화가 되어있다는 말이죠. 즉 자기가 하는 일에 매진을 하려고 하면, 자기가 하는 일에 자기 몸이 변형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나오는고 하니, "나는 잘났다. 나는 정당하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즉 자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공무원으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는 무엇이 아니라는 겁니까? 죄인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런 결과를 도출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전범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 "나는 시키는 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라는 것과 "시키는 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라는 게 글자 하나 차이가 아니라,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속해있는 그 세상을 자기가 거부한다고 해서, 유대인 600만이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는 잘려도, 그 자리에 자기와 닮은 인간을 집어넣어서 히틀러는 계속해서 그 일을 한다는 말이죠. 물론 아이히만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그러하다는 겁니다.
* 인간은 부속품이 지나지 않아 !!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데, 만약 그 부속품이 하나 말썽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게 만약에 자동차라고 하면 새 자동차로 바꿉니까? 그것이 아니라, 그 부속품을 다른 부속품으로 교체하면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느 교회에 목사가 새로 부임을 해서 "여러분,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가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교인들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 목사라는 부속품을 빼고, 다른 부속품으로 교환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 것이 싫어서 베드로는 자기 딴에는 나름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즉 칼을 들고 설쳤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하게 되는데, "칼을 다시 꽂아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즉 "너의 최선을 보여주는 것이 너의 할 일이 아니야. 너는 도망을 치는 것이 너의 할 일이다" 라는 겁니다.
우리 각 개인은 베드로처럼 나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우리 각 개인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이 생각하시는 집단, 즉 주님의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원래 없는데, 그런데 그 없는 것에서 윤곽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낚시줄 !!
우리 이 집사님이 쓰신 글이 있는데, 낚시에 관한 것인데 말이죠. 거기에 무슨 내용이 있는고 하니, 낚시를 하는데 고기를 미끼를 먹으려고 왔다가 낚시줄이 있는 것을 보고 돌아선다는 겁니다. 그러니 물고기 눈에 보이는 값싼 낚시줄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물고기에게는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죽음의 줄이 보인다는 말이죠. 그러면 죽음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낚시줄을 비싼 것으로 바꾸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고기가 그 미끼를 물기까지는 줄이 없었는데, 그런데 미끼를 무는 순간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없음이 있음이 된다는 말이죠. 하늘나라가 바로 그러한데, 우리 힘으로 가지려고 하는 것은 가짜라는 말이죠.
* 아하, '우리교회' !!
자기 힘으로 교회를 한다면 그것은 가짜인데,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없는 그 교회가 비로소 드러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없는 교회는 '내' 교회가 아닌, '우리'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의 이름이 '우리교회' 라는 것인데, 물론 이것도 역시 아제개그인데 말이죠(ㅋㅋ).
그 우리교회를 다른 말로 하면 존재하지 않는 교회인데, 그리고 그 교회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용서라는 겁니다. 그렇게 용서이기 때문에, 즉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것이 죄인을 죄인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과 한 패밀리, 한 가족이 된다는 겁니다.
* 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를 고집하는가?
이미 아들이 되었는데, 그러니 더 손을 대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죠. 손을 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발전을 의미하는데, 즉 손을 댄다는 것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 아니라, 그만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고집하는 노선이 되어버린다는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남을 이기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귀를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그 '나' 라는 것이 규정이 되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아닌 남이 상대방으로 등장하면, 그만 이기려고 싸움을 벌리게 된다는 겁니다.
*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특히 여자들의 경우에, 이 나와바리에서는 자기가 제일 예쁜데, 그런데 새로운 교인이 왔는데 너무 예쁘다는 말이죠. 특히 화장이 참 잘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라이벌 의식을 느낀다는 말이죠. 그리고 남자들의 경우에는 수입인데, 즉 "한 달에 얼마나 버는가?" 라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그것이 연금이고 말이죠.
우리가 주님의 영적전쟁을 벌려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나' 라는 것이 너무나도 고정이 되어서 그만 자기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들추어낸, 즉 "나는 왜 나의 힘으로는 구원이 되지 않는가? 나의 힘이 아닌 용서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하는, 바로 그 문제라는 말이죠.
*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한 시간 !!
그것도 자기가 지은 죄를 자기가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죄, 하지만 아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누구나 다 지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것, 그것이 곧 우리가 이미 아들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주님의 후발적인 조치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죄가 얼마나 응축이 되었으면 피가 아니고서는, 용서가 아니고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 라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시켜주는 인생을 살아가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남은 인생은 우리 자신의 시간이 아니고 누구의 시간인고 하니, 복음을 위한 시간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복음을 위한 시간인데, 우리는 그 복음의 시간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따라서 두 번째 아담이 새로운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아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심판하는 새로운 기준을 작동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무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음'입니다. 용서할 자격이 있기에 용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받을 입장이 되지도 못하는 자에게 용서해주시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긍휼'입니다. 즉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겁니다. --------------------------------------------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 아무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기에 !!
첫 번째 아담에 속한 모든 것들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은, 곧 개인의 자질과 수준과 계급을 다 철폐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종이든 자유자든, 거기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데,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다는 말이죠.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나오는데, 그런데 교회에서는 왜 개인적인 역량을 발휘하라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아니고 마귀의 전당이이라는 말이죠. 아무도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인간을 상대하지 않는데, 그래서 긍휼이고,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하시는 분에 의해서만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고 연출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누구는 용서하고 누구는 용서하지 않고, 그것은 완전히 인간을 배제하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때문에, 내 결정을 내 인생에 집어넣지 마세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복음을 위한 시간이기 때문에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지, 내가 해야하는것이 이니고 주께서 마주치게, 맞닥드리게 만들어요.
* 파리가 잡혀준 것 !!
어제 낮에 그런 예화를 들었는데,왜 내가 그것을 못깨달았을까 ,내가 파리를 잡은 것이 아니고 파리가 잡혀준거에요. 아! 그 기쁨의 순간!, 이것을 깨닫고 얼마나 흥분이 되었는지, '우리'니까 같이 누리고 싶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잡혀준거에요.
그러니 내가 저 사람과 결혼했다. 아니에요. 저 사람이 자기와 결혼을 해준거에요. 그렇게 살면 가정이 참 행복할까요. 물론 가정의 행복을 우리가 추구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찍혀준거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인데, 우리가 착각하다가보니 영적전쟁을 못했습니다. 나의 전쟁을 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전쟁은 없고 모든 것이 복음을 위한 주님을 위한 시간언것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9,3,25 오후 4시에 마침.
여보, 파리채 좀 가져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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