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위반자 18101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0. 19. 19:28
2018-10-18 20:47:06조회 : 1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5 - 위반자이름 : 구득영 (IP:183.102.224.145)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5 - 위반자

                                                             18,10,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킵니까? 안식일 날 하루를 쉬면서 제사를 드리면 됩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의 취지를 알려고 하면 반드시 안식일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출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민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민 15:33)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민 15:34)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민 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사람이 나무를 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닌데, 그런데 그것을 안식일에 하게 되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인간 세계에서 '시간' 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옹호하고 추구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뒤를 따라가게 되는데, 즉 "내가 옛날에 이렇게 행했다. 저렇게 행했다" 라고 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게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은 특정 시간에 자기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것을 누구에게 요청한 적도 없고, 요청할 마음도 없는데, 그런 것에 구애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말이죠.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남들의 지시는 받기 싫어한다는 것이죠.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 !!

하지만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자기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인데,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존재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실 때는 무엇을 가지고 오셨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시간과 공간까지도 가지고 오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삶, 즉 자기의 생존, 자기의 생계를 고려하면서, 그 나름대로의 시간과 공간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가축이 많다고 하면 당연히 목초지가 많은 공간을 원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당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게 풀이 많은 곳에 가야 자기 가축을 먹일 수 있고, 그래야 자기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있다는 말이죠. 그렇게 해야 자기의 삶이 윤택해지기 때문에, 그래서 목초지가 많은 공간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포되어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우리 인간들끼리 하게 되면 탓할 사람이 전혀 없는데, 누구나 다 좋은 목초지에 가축을 키우려고 하고, 이것은 다 동의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누구나 다 차지할 수는 없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운이 좋구나" 라고 하고 끝내게 되는데, 그런 사람만 그런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죠.

간섭쟁이 하나님 !!

그런데 하나님께서 들어오시면서 "그런 공간은 잊어라"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하나님이 들어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간섭쟁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간섭을 해도 대충 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의 바닥까지 긁어가면서 하신다는 말이죠. 

이러한 하나님을 누가 좋다고 믿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선택하고 골라서 믿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애초부터 엉터리인데, 자기가 좋아서 고른 신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쳐들어오신 하나님, 그것을 '침노' 라고 하는데 말이죠. 마치 정복자가 쳐들어와서 자기 수하에 두는 것처럼, 그렇게 오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바닥, 생존의 바닥, 생존의 바닥 자체를 완전히 노출시켜버린다는 겁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말이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시간과 공간을 따로 있는데, 그것을 우리 인간이 자신의 생존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시간과 공간 의식과 마주치게 함으로서, 우리 인간의 존재 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게 하신다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감추어야 하지?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 한 첫 번째 행동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가리는 것인데 말이죠. 그것은 뭔가 감출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가리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가리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기가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그것은 모른다는 겁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물론 육체적인 것을 감추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지금 경기도 도지사의 몸에 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매스컴이 시끄럽다는 겁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점 때문에 말이죠. 그게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아무튼 인간은 그 누구라도 그런 게 있다고 하면 당연히 가리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 싶어하고, 그래서 옷을 입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언제 허용합니까? 그 타인이 용납될 때만 그 감추어진 것을 허용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결혼인데, 그러면 그 타인에게 자기의 은밀한 것을 같이 공유하겠다고 하는 결정을 누가 내립니까? 그것도 본인이 내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결정을 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타자에게 공개하지 않은 은밀한 것이 다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가 가리면 가릴수록 자기가 절대화가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흐지부지하게 되겠습니까? 가리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점 더 절대화가 된다는 겁니다.

대문이 많다는 것은?

오스트리아에 어느 백작이 만든 성이 있는데, 한 번도 적에게 정복을 당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제가 그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는데, 절벽 꼭대기에 지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입구가 무려 9개라는 겁니다. 그러니 적들이 짜증이 나서 공격을 하지 못하는데, 9군데를 일일이 다 통과를 해야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뭔가 대문이 많다고 하는 것은, "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라는 의미인데, 그것은 맞선을 볼 때도 마찬가지인데, 선을 보면서 다 공개하는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조금 조금씩 허용을 한다는 말이죠. 즉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 공개해도 되는 사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시간과 공간인데, 그래서 만난 것을 기념하는 백일축하파티를 열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뽀뽀까지는 허용하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감추는 것이 많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외부로부터 강력하게 자기를 지키고 싶어한다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를 지키고 싶어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나오는데 말이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여, 살려주세요 !!

거기에 비해서 세리나 강도, 그리고 자기를 개 같은 여자라고 했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물론 이 여인은 자기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감추고 싶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만 작살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자기에게는 귀신이 들린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즉 집안에 우환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자기 집에 하나님이 들이닥침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지키고 싶어도 전혀 지키지 못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지키려고 했던 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갔을 때, 그러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모습 그대로,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막 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막 7: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막 7: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복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 그가 강도가 아니고 부자라고 한다면, 그것을 얼마나 즐거워하겠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던 부자의 맞은 편에 살았던 거지 나사로를 보라는 말이죠. 그가 거지인 것은 누가 봐도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강도가 믿을 것은 누구밖에 없는고 하니, 지켜주던 말던 간에 그 모든 운명의 결정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든 다 가진 자는 자기 손에서 감출 것은 감추고 더할 것은 더하고 하는데, 그런데 강도의 경우에는 다 들통이 남으로서, 주님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을 해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이죠

열 두 제자들의 경우에, 나름대로는 자기들이 잘났다고 하는데, 지줌지줌, 즉 제 각기 말이죠. 그런데 그 열 두 제자들이 갈릴리를 통과하다가 그만 풍랑이 일어서 난리가 났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무능력함, 불가능성, 마주친 대자연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해서 아무런 대책이 없는데, 속수무책이라는 겁니다.

그야말로 허접한 존재들인데, 그게 주님에 의해서 발각이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제자들도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배에서 물을 퍼내고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깨울 수밖에는 없었는데, '믿음 있음'이 아니고 '믿음 없음'의 상태에서 깨웠다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10페이지를 미리 보겠습니다.

**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는,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의 현장에서, 자신이 예수를 믿지 않는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동안 믿는 것이 아니었음을 파악하는 가운데 예수를 믿게 하는 겁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요? 즉 '예수 믿지 않는 것을 통해서 예수 믿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를 믿지 않는 주체는 누구며, 나중에 믿는다고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요?

주체가 바뀌지 않으면 믿음이 발생하지 않는데, 그러니 '나'의 믿음은 절대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가 믿는 믿음은 안 된다는 말이죠. 그 '나'를 저주로 죽여버리는데, 그렇게 저주로서 죽인 그분이 그 현장, 즉 '나' 안에 들어오심으로서 비로소 믿음은 선물이 된다는 겁니다.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선물이 되는 것인데,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선이라는 말이죠. 생명은 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나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기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성경공부를 해서 자기가 알려고 하는데, 그러면 아는 주체가 달랑 자기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주체를 가지고는 돈 문제나 가정에 문제가 터지면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시 자기 고유의 주체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것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가려놓고 그 가린 것 뒤에서 계속해서 도망을 치고 있는데, 즉 숨고 있다는 말이죠. 그게 주체인데, 그러니 무엇이 부끄러운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무조건 가림막을 치고 그 뒤에서 숨는다는 말이죠. 그게 창세기 3장의 아담이라는 겁니다.

여기는 나만의 성(城) !!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서 나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절대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라고 하면서 버틴다는 말이죠. 무엇을 좀 하라고 하면 바쁘다고 하면서 핑계를 대는데, 그런 핑계 가운데 하나가 목회라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만 목회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믿음이 없는 사람들만 교회에 온다는 말이죠. 그래야 교회가 되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가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을 앞에 두고 자꾸만 도망을 치려고 한다는 말이죠. 

타인이 오지 못하도록 9개의 성문을 걸어놓고, 그러면 그 안은 자기 만의 공간이 된다는 말이죠.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언급했는데 말이죠. 절대 공간이 되는데, 즉 절대자인 라멕의 공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왕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 안으로 숨어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스카이 라이프를 설치해서, 하루 종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본다는 말이죠.

인간의 본성은 나이가 들어서 퇴직을 해야 제대로 드러나는데, 그 이전에는 돈을 번다고 이 세상에 자기를 노출시켜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퇴직을 하고 나면 숨을 곳만 골라서 돌아다니면 된다는 말이죠. 즉 "더 이상 나를 찾지 마라. 문을 잠궈 놓았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세요?" 라고 한다는 것은 숨어있다는 의미인데,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공개가 되어있으니 말이죠. 심지어 옷도 하나 입지 않고 말이죠. 그러니 자기를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보는데,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모습이 제대로 공개된 현장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곳인데, 물론 지금은 그 현장을 아랍 장사꾼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말이죠. 제대로 그 현장을 보여주려면 그 주위에 집들이 하나도 없어야 하는데, 벌판이 되어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런 모습이다" 라고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죠. 그것도 최종적으로 말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자기의 눈에 보인다는 것이죠.

너도 아닌, 나도 아닌 !!

그래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묻는데, "정말 보이지 않는가?" 라고 말이죠. 사도바울은 "나는 이렇게 할 테니, 너는 저렇게 해라" 라는 식이 아니라, "너는 나를 보지 말고, 나는 너를 보지 말고, 우리는 다같이 한 곳을 보자" 라고, 즉 "너도 아닌 나도 아닌, 즉 십자가를 바라보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러면서 복음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아니라면 둘이 앉아서 다방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잘남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보게 되면, 그 어느 인간도 구원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것이 들통나고 만다는 겁니다.

평안하냐?

자기가 절대화를 시켜서 닫아놓은 그 성문을, 주님께서는 그것을 뚫고 들어오신다고 피를 흘렸다는 말이죠. 환영을 받으면서 유유히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창에 찔리고 못에 박히신 그 몸으로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열 한 명의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예수님께서 "도마야!" 라고 부르시면서 그 현장에 오셨다는 말이죠. 

그게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평안하냐?" 라고 하시면서 들어오셨는데, 노크를 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들어오셨는데, 예수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은 그 정도의 권한은 있다는 말이죠.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다니엘서 5장에도 보면, 벨사살 왕이 잔치를 벌리는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는 글을 쓰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그것을 다니엘을 통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보게 된다는 겁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라고, 그게 왕의 나라는 이제 망한다는 의미라는 말이죠. 주님은 그들에게나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권한이 충분히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들이 보기에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거부하는, 그런 문을 9개가 아니고 엄청 많이 설치해놓고 있다는 말이죠. 행동이나 말하는 톤에서, 거기에 대한 자긍심과 같은 느낀다는 겁니다. 뻔히 하는 것인데, 굳이 거기에 자물쇠를 채울 필요가 없는데, 그런데 건성건성으로 한다는 말이죠. 
 
실없는 농담 !!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필요가 없는, 그야말로 실없는 농담이란 겁니다. 최백호가 부른 '낭만에 대하여' 라는 가사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다방에 앉아서 마담과 실없는 농담을 한다고 말이죠. 그것을 우리 주님은 어떻게 볼까요?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노출시키기 위함인데, 그래서 주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겁니다.

다시 정리를 해보면, '믿음 없음'을 자각하는 것이 '믿음 있음' 이라는 것인데, 어제 낮 시간에 육으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육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영의 작업이 개시되었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가 은혜를 받은 자라는 말이죠. 

목초지인가? 약속의 땅인가?

다시 교재 108페이지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무를 하는데, 그런데 안식일에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인간들이 자기 생계 때문에 나름대로 시간과 공간을 조절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오시는데, 빈손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시간과 공간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목초지가 있다고 해서 그게 목초지, 즉 약속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의 몸이 주님과의 만남의 장소라고 하면, 그러면 더 이상 자기 몸이 아니고 주님이 계신 곳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의 몸을 아예 접수하셨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죠. 등기이전을 하셨는데, 즉 "너의 인생이 그 어떻게 꼬이든 간에, 너의 몸은 이제 너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규정을 하시면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목초지가 더 이상 목초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약속의 땅인 것처럼,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위해서 산에 나무를 하려고 갔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안식일에 나무를 하느냐고 시비를 건다는 말이죠.

그러면 나무를 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안식일을 제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는데, 제가 굳이 그것을 지킬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게 민수기 15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죽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나무를 한 사람을 마을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데리고 와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공개처형을 시킨다는 말이죠.    
 
(민 15:3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사형집행에 동참해라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굉장히 중요한데 말이죠.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같이 동참을 해주어야, 그게 하나님의 말씀에 동참한 것이 된다는 겁니다.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나는 나무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개인적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 내에서 말씀을 위반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처벌을 하라고 하셨을 때, 그런 하나님의 입장에 동참한 자들만이 말씀을 지킨 자가 된다는 겁니다. 결코 쉽지 않은데, 법을 어긴 자가 있다고 하면, 온 국민이 다 사형집행에 가담을 해주어야, 그게 법을 지킨 것이 된다는 말이죠.

약혼자를 죽여라 !!

여기 교재에 보면 예를 들어놓았는데,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가 나오는데 말이죠. 만약 결혼을 약속한 그 사람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하면, 그러면 그 약혼자의 사형을 집행하는 일에 과연 자기도 동참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짱돌을 들고 약혼자를 향해서 "죽어라!" 라고 하면서 집어던질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예가 너무 잔인합니까?

이것을 지금까지 강의한 것에 적용시켜보면, 인간 사회에서 약혼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하고나 결혼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뭔가 굳게 닫는 성문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약혼자라는 것은 자기 성(城) 안으로 들어오게 용납한 자라는 겁니다. 즉 자기 시간과 공간은 공유해도 좋다고 말이죠. 얼굴이 예뻐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무튼 허락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약혼자가 안식일에 나무를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니가 돌을 들고 죽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의 선택보다도 침범한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세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인정하느냐고 하나님이 묻는다는 겁니다.

그 약혼자가 성문 밖에 있을 때는 그냥 한 사람의 여자에 불과한데, 그런데 그게 여자가 약혼자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와 같은 공간에 들어왔다는 것이고, 그런 약혼자를 죽인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라는 계명을 통해서, 그것까지도 같이 묻고 있다는 겁니다. "너 자신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이것을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런데 한국교회는 말씀을 지켜서 자기가 살겠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완전히 말씀과 배치가 되는데, "얼레리 꼴레리, 저 사람은 주일에 장사를 하는데, 나는  장사도 하지 않고 교회에 왔지롱!" 라고 하고 있다는 말이죠. 만약에 그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고 하면 돌로 쳐죽일 겁니까? 어떻게 하겠느냐는 겁니다.

자식은 아무리 성장을 해도 자기 품 안의 자식이고, 자기 존재의 확장이란 말이죠. 그래서 세월호의 경우에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자식들이 희생된 부모의 마음이 오죽하겠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5년이나 지났으면 이제는 마무리를 지어도 되는데, 온 국민이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죠.

물론 부모로서는 여러 의구심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국정원과의 관련설이라던지 사고 원인을 밝혀줄 각종 증거들이 시원치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찾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무한대라는 것이죠. 물론 그것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간이 태어난 것 자체가 변수라는 말이죠. 

경제가 어려울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누구의 멱살을 붙잡고,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 그 분풀이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자살은 살인인데, 왜냐하면 죽이려고 상대를 찾다가 찾다가 찾지 못해서 자기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화가 나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 자살인데,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는 겁니다.  

어찌할꼬?

저도 거기에 동의하는데,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자기를 죽인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도 살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거기에 너무나 분통이 터져서 하나님을 붙잡을 수가 없으니 대신해서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이죠. 즉 "나는 살고 니가 죽어라" 라는 것인데, 물론 그분이 하나님인 줄 몰랐는데 말이죠. 

그런데 사흘만에 부활하니 어떻게 됩니까? 물론 부활할 줄도 몰랐는데, 그 다음에 성령이 오니 비로소 "어찌할꼬?" 라고 하면서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물론 난리가 날 사람만 나겠지만 말이죠. 죽이지 않아야 될 분을 죽였다고 하는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을 진즉에 안 사람이 신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에는 반드시 무엇이 포함되어야 합니까? "나는 죽었다" 라는 것이 들어있어야만 한다는 말이죠. "살아서 전도를 하겠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살았다' 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먼저 '죽었다' 라는 것이 있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자기가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러니 주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믿게 해주셨다는 말이죠. 그렇게 주님이 하게 했을 때, 그러면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나오게 되는데,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표현이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제가 언제 했습니까? 제가 언제 입을 것을 주었고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에 가는 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게 예수님의 양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데, 교회에 들락날락한다고 해서 천국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자로 들통이 난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하는데, 들킬까 싶어서 도망치지 말고 말이죠. 복음을 전해보면 다들 도망치기에 바쁜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부가 자기의 동굴이 있어서 말이죠. 우박이 떨어져서 피하는 것보다 더 빨리 피한다는 겁니다(ㅋㅋ).

계속해서 교재 108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계명의 취지를 알려고 하면 안식일을 위반하는 사람이 출현해야 합니다. 그렇게 위반하는 자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그 위반한 자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안식일을 지켰다고 믿는 사람들이 제대로 안식일을 지킨 것인지 아닌지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함께 동참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동참을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람과 자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죠. 망대가 넘어져서 18명이 죽고, 그리고 이번에 인도네시아에서 지진이 나서 무려 2,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는데, 그게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휴, 나는 살았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나를 왜 살려줍니까? 나에게는 왜 망대가 넘어지지 않습니까? 왜 나에게는 지진이 나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지 않고 왜 살려주시는지, 그것을 반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감춘다고 했는데, 무엇을 감춥니까? 그것을 이제 공개하겠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을 꽁꽁 감추고 있다는 말이죠. 자기는 자기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그런데 주님이 자기를 살렸다는 사실을 꽁꽁 감추어주어야, 계속해서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까지 산다고 고생을 많이 했다" 라는 것은, 그런 말을 할 때는 뒤에 무엇을 감추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뭔가 알 수 없는 운명이 자기를 살렸다는 것을 애써 숨기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계속해서 잘난 자기가 되니 말이죠. 

광산 김씨 이야기 !!

또 광산 김씨 이야기를 좀 해야하겠는데, 거기에 보면 자식이 두 명인데, 하나는 40대고 다른 하나는 30대인데, 둘 다 백수라는 겁니다. 첫째는 준백수이고 둘째는 완전백수인데,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말이죠. 그런데도 전혀 마르지 않고 살이 쪘는데, 80키로가 넘는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와 아빠 덕분에, 가족의 품 안에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말이죠.

치킨도 네 마리씩 먹고 하는데, 제대로 된 지옥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들의 행동이나 태도 하나 하나가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의 태도가 어떠한고 하니, 이 아버지가 주인공인데, 그가 자식들을 야단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로서의 뿌듯함을 즐기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식들과 아내를 자기 다 먹여 살리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무엇을 감추고 있습니까? 방금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키웠다고 하는 것을 애써서 감추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감춥니까? 인간의 눈에는 타인밖에 보이지 않는데, 자기와 비슷한 남들과의 관계로 인해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그러니 하나님은 개무시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너에게 지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인간의 성격이라는 말이죠. 즉 "나는 너에게 절대로 지기 싫다" 라는 겁니다. 이 고집은 80세를 지나고 90을 지나서 100이 되어도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는 말이죠.    

과거에 그런 뉴스가 있었는데, 90이 넘은 할아버지가 80이 넘은 할머니를 옆에 태우고 차를 운전해 가다가 그만 실수로 절벽에 떨어져서 죽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 뉴스를 접하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자식들에게는 참 잘되었다. 병원에도 가지 않고 말이야" 라고 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I CAN DO IT !!

그러면 왜 90이 지나도 운전면허증을 반납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자기 이미지 속에는 운전하는 자기 자신은 30대이고 40대라는 겁니다. 그렇게 꿈속에서 살아가는데, 그러니 인간은 자기 얼굴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모르고,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만 압니까? "너에게 지기 싫은 것이 바로 나다" 라는 것인데, 그것만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주변에 남들이 있어주어야 자기가 규정이 되는데, 그래서 밥을 먹고 밖으로 나간다는 말이죠. 남들이 있음으로서 "나는 이 정도다" 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 남들이 없으면 그만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마는데, 그것을 세 글자로 '외롭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특히 남자들은 남성 호르몬으로 인해서 가을에 엄청 외로움을 타는데, 그래서 가을만 되면 아무에게나 편지를 쓴다는 겁니다. 제목이 '가을편지' 인데, 그 가사를 지은 분이 바로 '고은' 이라는 시인인데, 이동원이 불렀고 말이죠. "가을에는 편지를 쓰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라고 하는데, 아무나 걸려들라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바보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규명을 못해요. 남들을 만나면서 그때그때마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것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안식일 계명을 무시한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남들 앞에 서려고 하니 당연히 남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고, 90이 되어도 운전대를 놓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노인네들의 입에 발린 소리가 무엇인고 하니, "나도 할 수 있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옆에서 할머니가 말린다는 겁니다. 그러니 나이가 들면 살아가는 하루일과가 무엇인고 하니, 한 쪽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설치는 것이고, 다른 쪽은 그것을 말리는 것이란 말이죠.

그렇게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는데, "가서 제발 조심하소" 라고 하면, "잔소리 좀 하지 마라"  그러면서 사고라는 사고는 다 치고 말이죠. 왜 그렇게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합니까? 그래야만 자기가 절대자, 즉 신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반대로 나가시는데, "니가 그동안 살아온 것은 너의 덕이 아니었다. 그것을 위반자를 통해서 봐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위반자를 우리가 찾아다녀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모든 법의 위반자는 단 한 분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했기에 말이죠.

위반자, 예수 그리스도 !!

모든 위반자인 첫 번째 아담, 즉 인간의 죄를, 미처 인간 자신도 모르는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해서 다 가지고 가심으로서,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저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저주받은 자' 라는 겁니다. 이것은 그 어떤 철학이나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요즘 '알쓸신잡3'가 뜨는데, 하지만 아무리 인간의 문명이 어떻고 그리스가 어떻고 해도, 소위 우리나라에서 지식인들 4명이 나오는데 말이죠. 그들이 아무리 유식한 체를 하면서 수다를 마구 떨고 해도, 거기에 '저주받은 자' 라는 것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마지막 때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그는 천재 중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는 조각이고 뭐고 간에 모두 끊어버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자기는 저주받은 자라는 말이죠.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는데, 방송에서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악마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감추도록 하는데, 그래서 상대방과 비교를 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즉 "저 사람보다 니가 낫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악마는 계속해서 똑같이 저주받은 인간들을 만나도록 해서, "저 사람을 따라붙어야지. 저 사람보다 행복해야지. 뛰어나야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인데 말이죠.

그렇게 해서 십자가 복음과는 거리를 두게 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그게 악마의 충동질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북핵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고, 최저 생계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내버려두고, 그야말로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시간을 다 보내고 있다는 말이죠. 

나는 저주받은 자다 !!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나는 저주받은 자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니 저주를 받는 자가 감히 구원해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염치가 있어야지 말이죠. 그런데 저주를 받은 자에게서 구원이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라는 말이죠.

강도가 "주여, 저를 생각해주세요" 라고 하니, 예수님이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강도가 주고 받는 대화는 장차 성경에 기록되기 위함인데, 성령이 그렇게 역사를 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누가복음 23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만약에 우리에게서 복음적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면,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도구에 불과한데, 성령께서 다루시는 말이죠.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계시가 아닌데, 성령의 역사로 성경에 기록된 것만 계시라는 겁니다.

 몰론 악마의 일이라고 해도 어떻습니까? 그것을 성령께서 다루시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는 말이죠.

아무튼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인데,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뭐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인간은 저주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자리가 '나' 자신을 진정성이 있게 집어넣어졌다고 하면, 그 '나' 라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나'를 다루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그 주체에서 "나는 너보다 낫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라는 문장 속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계시가 되는데, 천사도 귀하게 보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이죠.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그 인간을 객체로 다루고 있으니, 그 얼마나 귀한 인간이냐는 겁니다. 이것이 움직이는 성전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지면서 말이죠.

구원은 저주 가운데 !!

그러니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것에서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즉 다저주가 환경이 될 때 여기서 하나님의 용서가 나오고 구원이 나오거든요. 그러니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것 자체가 곧 구원을 받은 자라는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데, 악마가 눈을 흐리게 해서 말이죠. 자기가 저주를 받았는지, 자기 잘난 체를 하려고 만나려고 가는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죠.

자기를 인정해주는 타인, 그것을 이 세상에서는 친구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자들을 만나려고 돌아다니게 되면, 그만 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주가 있는 곳에서만 구원이 나오는데, 없는 곳에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십자가 사건 자체가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만물의 찌끼처럼 여겼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그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진 자가 된다는 말이죠. 

(고후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기서 교재 10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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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안식일을 어긴 자가 1,000명이고 어기지 않은 자가 자기 혼자라고 하면, 

혼자 돌을 들고 1,000명을 한 장소에 모아놓고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얻어맞지요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현장입니다. 

"바라바라는 강도를 살려주고, 예수를 못박으소서 못박으소서" 라고 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진리 쪽에 섰어요. 


그러니 오늘날 성도가 성도답다는 것은, 

비진리적인 사람들에게 포위된채 성도는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잘나서 성도가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뽑아주셨기에, 이건 내 뜻이 아니에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난데없이 구원된거에요, 즉 주께서 찾아왔으니까, 

그런데 자기 주위에 악착같이 해서 구원되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연적으로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자기도 그렇게 살아왔는데, 자기도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천국에 가라고 했는데, 그래서 교회에 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하면 세례를 받고, 십일조를 내라고 하면 십일조를 내고, 삼위일체를 믿으라고 하면 믿고, 자기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 즉 주님의 대신 죽으심의 세계 속에 들어오니까, 그것이 그야말로 헛짓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대소동 !!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실 때는 시간과 공간으로 찾아오셨다고 했는데,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기 예수가 되었는데, 그래서 그 아기 예수로 인해서 예루살렘에서 그런 소동이 일어났다는 말이죠. 헤롯은 귀신이 들린 자인데, 그래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그때 태어난 아기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가 거짓임이 들통나니 말이죠. 

악마는 왜 세상에 복음이 증거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합니까?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라는 것을 전하는 것은 말리지 않는데, 오히려 그런 것은 더욱 권장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훼방을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교회 자체도 의미가 없어지고, 교회에 등록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에 녹아들어져야 !!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나가셨는데, 그러면서 이 땅에 무엇을 남겼는고 하니까, 피와 살을 남겼죠. 그게 곧 대신죽음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하셨단 말이죠. 그러니 성도의 모든 주체는 이 예수님의 피와 살에 녹아들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성도가 보여주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피와 살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자기가 보여주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시는 것인데 말이죠. 어떻게 보여주느냐  

이렇게 오미자차가 있는데, 제가 맛있게 마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오지마차를 마시게 된 이유는, 여기에는 권사님의 수고가 있고 한데, 

그런데 결국은 그게 예수님의 피와 살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저는 오미자차를 마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피와 살에 나오는 은혜를 먹으면서 사는 겁니다


은혜를 먹었다고 하면 소유가 되는데, 그러니 그것은 은혜를 먹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출처를 찾아보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증거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즉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기가 강도든 세리든 창기든, 그런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남들과 비교하고 견주어서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인생은 무채색 !!

어제 낮 시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무채색이라고 말이죠. 색깔이 없다는 겁니다. 자기 개성과 자기 색깔을 주장하는 것이 인간인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대구시에서 주최하는 축제들 가운데 '칼라풀' 이라는 축제가 있다고 하는데, 명색이 섬유도시라고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칼라풀하지 않는데, 다들 칙칙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전부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말이죠. 국회의원들이 폼을 잡고 국정감사를 하면서 큰소리를 치고 하는데, 하지만 모두가 죽은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옷 색깔도 보면 칙칙하다는 말이죠(ㅋㅋ). 

"안식을 지켜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것이 아닌데, 우리는 이런 계명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무엇을 만듭니까?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만든다는 겁니다.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죠. 주일은 인간들이 만든 것인데, 그래서 주일에 직장에서 쉬고 하니 여행도 다니고 편리하고 좋다는 겁니다. 

우리는 전부가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 그리고 죽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사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한 시간과 공간인데, 물론 그것을 우리는 끄집어내지 않지만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매일 살아가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관행과 제도에 속아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제 교재 110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위반자가 다수가 되는 형상을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줍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위반자가 다수가 된다는 겁니다. 위반자는 분명히 한 명인데, 그런데 그 한 명으로 인해서 다수가 다친다는 말이죠. 이것이 주일오후에 하고 있는 설교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을 침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6명이 죽고 마는데,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데, 즉 "가라고 했으면 가도록 해주어야지 왜 브레이크를 겁니까?" 라는 겁니다.

(수 7:5)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육 인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와서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수 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수 7:7) 여호수아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붙여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편을 족하게 여겨 거하였더면 좋을뻔 하였나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먼저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 나서 노획물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을 아간이 감추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 함락이, 그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말이죠. 아니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여리고 성 함락의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그것은 한 번 믿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살아있는 동안, 천국에 갈 때까지, 아니 천국에 가서도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의 경우에는 "나는 위반자다" 라고 하는, 즉 "나는 저주를 받은 자다" 라고 하는 취지가 천국에 가서도 계속해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죄인을 주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이 말이죠.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십자가 앞에서 살자" 라고 할 수 있는데, 비교하면 화가 난다는 겁니다. 70평짜리 동창생의 아파트에 가면, 커피맛이고 뭐고 간에 왕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반면에 단칸방에 살고 있는 동창생에게 가면 위로를 받는다는 겁니다.

위반자가, 한 사람에서 다수로 !!

그런데 여기에 위반자가 다수가 된다고 했는데, 다시 말해서 위반자는 한 사람인데 이것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장을 시키는 작업,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라는 겁니다. 그래서 혈육으로 맺어진 나라는 필히 망해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취지라는 말이죠.

혈육으로 맺어진 나라를 요한복음 8장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조상이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유대인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반박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악마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유대인들이 "우리의 조상은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았다" 라고 하니,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죄에 매여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나' 라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 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 8: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요 8: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자유케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데리고 나오는 식으로 빼돌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데리고 나와서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부어서, "너희는 창세 전부터 이런 자였다" 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신다는 겁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일을 '나' 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해주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내가 의인가? 죄인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죄를 의로 바꾸시는 작업의 증인으로서 창세 전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게 피조물의 역할이란 말이죠. 피조물은 피조물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피조물은 창조주의 의미로 종결되어야 하는데, 피조물은 그 중간과정에 참여된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모든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하는데, 그게 곧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볼 때 자막으로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필요가 없고, 등장인물은 감독 한 사람만 나오면 된다는 말이죠. 물론 영화를 찍을 때는 배우들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배우들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각자의 역할을 맡았을 뿐이라는 겁니다. 착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착한 사람이 아니고, 악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악한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스타는 누구입니까? 누가 스타로 각광을 받습니까? 감독입니까? 아니죠. 배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배후에는 관심이 없고 배우에만 신경을 쓰는데, 즉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배우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그런 역할을 맡은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위반자가 다수가 되는 모습을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줍니다. 다수가 왕을 구하고 왕이 등장하면, 그것으로 인해서 평소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싶어한다는 속성이 드러납니다. 
 
(삼상 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위반자가 다수가 되는 것이 곧, 이스라엘 역사 !!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 라고 하는 내용인데, 이게 다수의 의견인데, 이 다수의 의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가 없는데 왕이 생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 전체가 이미 다수자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 다수자의 대표가 사울이고, 그 사울 왕이 사무엘 선지자 앞에서 온갖 짓거리를 다 한다는 말이죠.  

그가 여자 무당을 찾아가는데, 그런데 왕이 그렇게 한다는 것은 왕 개인이 아니고 왕으로 추대한 백성들의 대표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왕이 무당을 찾는다는 것은, 모든 대중들이 왕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속성과 같이 묶여져 있다는 말이죠.

지금 나라꼴이 이렇게 개판이 되었는고 하니, 박근헤를 찍어준 사람들이 문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찍어주면 됩니까? 물론 정동영도 나오기는 했지만,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됩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아무튼 대표자가 잘못하게 되면, 거기에 소속된 사람들은 다 잘못한 것이 된다는 겁니다. 백성들의 요구로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 사울로 인해서 피해를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인데, 사실은 다윗이라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 본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만나게 된 것도, 그리고 골리앗의 갑옷이 없는 미간 사이에 물매돌이 박힌 것도, 그것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죠. 다윗은 형들의 도시락을 주려고 갔다가 그만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을 공격한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한 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민중들이 뽑아서 미는 가짜 왕이,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구원하시는 진짜 하나님을 핍박하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을, 즉 모든 어른들이 다 무시할 만한, 어른이 아닌 소년을 내세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뒤집기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감추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실상은 뒤로 감추고 앞에는 조작된 자기의 모습으로,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말이죠. 그런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뒤집기를 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남들에게 지기를 너무너무 싫어하니까, 아예 져버리는 사람을 데리고, 즉 소자를 데리고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감추고 있는 것을 하나님은 익히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다윗과 사울 !!

그래서 다윗이 계속해서 쫓겨다니는데, 다윗과 사울의 관계는 어떠한고 하니, 사울 다음이 다윗이니, 우리 생각에는 빨리 사울을 퇴직을 시키고 다윗을 왕으로 만들면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울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왕이라고 버티면서, 그런 범위 안에서 다윗을 핍박한다는 말이죠.

이미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렇다고 하면 나머지 정치적 상황도 다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왕이 두 명인데, 가짜 왕이 진짜 왕을 핍박하면서 진짜 왕 노릇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가운데 우리는 어디를 주목해야 하는고 하니, 시편 22편과 23편을 보면, 특히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인데, 그것을 다윗이 미리 예고하고 있다는 겁니다.   
      
(시 22:1) [다윗의 시, 영장으로 아얠롓사할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누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인데, 그게 누구입니까? 다윗이 왕이 된 그 나라의 백성들이 자기를 괴롭힌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악한 권력인데, 그런데 일반 백성들이 세상 권력을 당해내지 못해서, 약해 보이는 하나님이 세우신 진짜 왕을 괴롭히고 있다는 말이죠. 다윗을 추종하는 자들은 겨우 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시를 당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무엘상에 보면 나와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사울이 다윗을 핍박한 것에 있어서 주목해야하는 것이 있는데, '엔게디' 라는 곳에서 있었던 일인데 말이죠. 사울이 3,000명을 뽑아서 다윗을 쫓아가다가 피곤해서 쉬려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곳이 하필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있던 곳이라는 겁니다.

'엔게디' 라는 곳에서 !!

그래서 다윗의 신하가 뭐라고 합니까? "이번 기획에 사울을 없애버립시다. 그러면 백성들도 당신을 따를 겁니다" 라고 하는데, 상당히 정치적인 제안을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사울의 옷깃만 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아팠다는 말이죠.

이제 사울이 잠이 깨어서 동굴을 나갔는데, 그 뒤를 다윗이 멀리서 따라가서 뭐라고 합니까? "저는 당신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왕의 옷자락을 좀 잘났는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왕도 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 진짜 왕이신 하나님께서 왕을 바꾸었다는 것을, 그것을 이제 인정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웠는데, 그러니 기름을 부어주신 분에 의해서 그 기름을 부음이 이 지상에 효과가 나타나야, 그게 정상이란 것이 다윗의 생각이란 말이죠. 다윗이 왜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까? 그도 기름부음을 받아서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신 것이, 그것이 인간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의 개인적인 정치적 욕망에 의해서 기름부어주심이 훼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윗의 생각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오직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 24: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삼상 24: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삼상 24:9)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매일같이 죽고, 매일같이 살고 !!

좀 쉽게 설명을 해보면, 여기에 큰 참기름 통이 있고 그 아래에 조그마한 병들이 있다고 하면, 여기 큰 통에서 작은 병들에게 따라주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인데, 여기 병들을 바뀌어도 참기름만 있다고 하면, 그것을 계속해서 따라주면 되면 된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다고 하면, 그 중앙에 '성막'이 있는데,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성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여기 주위의 백성들은 오늘도 살아있는데, 그런데 이 성막에서는 매일같이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주위가 매일같이 산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천국의 원리라는 겁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이 어린양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어린양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영원한 죽음을 품고 있다" 라는 겁니다. 어린양이 드린 단 번의 제사로 인해서, 그 혜택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산다는 말이죠. 매일같이 영원히 산다는 겁니다.

(계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그러니 헌금을 하든 무엇을 하든, 그 중앙이 확정되었다고 하면 우리의 운명도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이고, 이것을 '믿음' 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나'를 믿지 않는 것인데, 하루에 열 두 번도 더 변덕을 부리는 자기 자신을 말이죠. 

다시 말해서, "믿을 것을 믿어야지, 나를 왜 믿어!" 라고 하는 것이 신자이고, 반면에 "나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어!" 라고 하는 것이 불신자라는 겁니다. 자기 실력과 성경공부, 믿음이라는 자기 감정, 또한 자기 열심과 목회, 그런 것을 믿는 것은 불신자라는 말이죠. 한 달에 성경공부를 아무리 많이 인도하고 해도,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도망치는 목사, 왜?

그래서 목사에게 복음을 전하면 도망을 치는데, 왜냐하면 개인적 영광과 생존과 삶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말이죠.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자기만 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관념적인 대상과 자기가 직접 통하면 된다는 것인데, 그 중간에는 십자가 복음이 없다는 말이죠.

중간에 십자가 복음이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지금까지 자기가 알았던 하나님은 가짜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자기가 왜왔던 것이 다 엉터리라는 것이 들통이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진짜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하면, "목회란 없구나. 목사도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남은 생애를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기가 싫어서 도망을 친다는 말이죠. 자기에게는 약혼자가 있기에 겁니다. 피앙새가 말이죠. 자기 아내가 있고 자식들이 있는데, 그러니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교회는 직장인데, 순진한 교인들에게 주의 전이지만 말이죠. 하지만 전도사나 목사처럼 월급을 받는 자들에게는 교회가 사업체라는 겁니다.   

십자가도 폐업이 되는가?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 자영업 75퍼센트가 폐업을 한다고 하는데, 교회는 더하다는 말이죠. 교회가 폐업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과연 기름부음이 폐업이 되느냐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었으니 폐업이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무슨 폐업이 되느냐는 말이죠. 전도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도대체 전도를 누가 하느냐는 겁니다. 다 위에서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매일같이 살림을 받고 있는 입장이지, 자기가 살려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입장에 놓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살아있다고 해서 내일도 산다는 보장이 없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는 말이죠. 오히려 "지금까지 살았으니, 오늘밤에 죽어도 군소리를 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귀가 제일 협박하는 것이 바로 '죽는다' 라는 것인데, 그게 왜 협박이 되는고 하니, 그동안 자기가 공들여서 했던 것을 모두 놓아야 한다는 말이죠. 놓을 수가 없는데, 그것 때문에 대인관계에 있어서 남들에게 기죽지 않고 살았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룬 것이 있기에, 그것 때문에 남들에게 기가 죽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음껏 사회에 나가서 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하니, 아까워서 죽을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껏 사업체가 부도가 나면, 비로소 "이제 한 번 죽어볼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갑이 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교재 111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성경이 이런 생생한 상황을 지금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내가 갑이 되고, 또한 내가 주인공이 된 이 현장에서, 내가 곧 사울로 살고 있음을 폭로시키고 있습니다.

갑질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 !!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바로 위반자,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그런데 불신자와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이 이미 주님이 하시는 일이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가 갑질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말이죠. 

물론 이것을 안다고 해서 인간성이 변하고 하는 것은 아닌데, 제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살려고 해도 어떻게 됩니까?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되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저는 그래도 복음을 알잖아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말이죠.

입혀주시는 하나님 !!

이제 강의를 정리하면, 인간은 가리는데, 그런데 성도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 성도에게는 입히신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으로 덧입혀주신다는 말이죠. 즉 "니가 이 세상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것을 아니까, 내가 괜찮은 등산복으로 입혀줄게"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 등산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인데, 그 옷을 입고 타인에게 나가라는 말이죠.

강도가 되던 창녀가 되던, 이제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이 이왕 사는 것, 전에는 감추었는데 이제는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다 드러났으니, 이제는 옷을 입혀주시겠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인데, 그러니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나가면 된다는 말이죠.

구약의 선지자들의 경우에도, 자기들이 못났다는 것을 아는데, 그런데도 "예, 아니오" 라는 것을 과감하게 말할 수 있었던,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천상회의에서 입혀준 그 옷, 하나님의 솜씨로 만들어진 그 옷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결코 꿀리지 않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런 옷을 휘감고 배짱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아파야 그 본색이 드러나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 않고, 남들의 눈치만 보면서, 자기를 조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인생도 이제는 너무나 피곤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의 남은 인생이 피곤하지 않은,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10,18 오후 8시에 마침.

                                                   폐업의 날이 다가올수록 복음은 더욱 더 왕성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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