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복 작전
2018년 11월 4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8:15-18
(8:14) 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찍이 일어나서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고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8:15)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 패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8:16) 그 성 모든 백성이 그들을 따르려고 모여서 여호수아를 따르며 유인함을 입어 성을 멀리 떠나니
(8:17)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따랐더라
(8: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아이성을 두 번에 걸쳐 공격하게 합니다. 아이성 함락이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승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전쟁 상대자인 악마가 지배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정신 하에 있어서의 승리란, 쟁취하고 소유하면 그만인 겁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심정으로 여리고성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존에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자아에게 하나님께서 큰 선물을 주시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즉 자신을 그냥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기뻐하는 바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그런 하나님이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달라져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덮쳐서 동행하시는 것은 마치 샌드위치와 같이 두 쪽의 빵조각을 두고서 어느 한쪽의 빵조각은 지옥으로 통하고, 어느 한쪽의 빵 조각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 어떤 인간이라도 홀로 산다면 그 사람을 100% 지옥행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스라엘과 아이성과의 전쟁이란, 천국과 통하는 분과 함께 하는 쪽이지 아니면 천국과 상관없이 자력으로 버티는 쪽인지의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아이성을 이겨 이스라엘 몫으로 넘겨주지 않습니다. 이 전쟁의 와중에서 이스라엘에게 변화를 조성해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매복작전’을 벌리게 하시는 겁니다. 매복작전이란 상대해야 될 적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전쟁이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전쟁의 현장에 적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본인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필히 적은 우쭐댈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치 흠모하는 연예인을 만나지 않는 상태에서 연예인을 언급하는 것이 막상 만나게 된 상태에서 연예인을 언급할 때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지 않게 됩니다. 매복이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곧 자신을 부각하지 않는 겁니다. 자신의 가치보다 더 높은 가치를 주목합니다. 이 매복작전은 주님이 시키신 일입니다.(수 1:2) 너희들 원대로 승리케 하시는 것이 주안점이 아니라 이 전쟁에서 너 자신의 주도권을 포기하겠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이런 전쟁의 원리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친구’란 ‘희생’이 먼저 있을 때, 그 때 없는 곳에서 새롭게 발생된다고 말입니다.
‘희생’이란, 독자적인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천명입니다. 친구라는 관계가 형성되려면 자기만 가치를 버려야 합니다. 마치 VIP를 지켜주기 위해 주요 인물의 옷을 입고 전쟁에 나가 대신 총 맞고 칼 맞아 죽는 역할과 같은 겁니다. 즉 나의 가치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구약에서도 이러한 원리가 나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대신 아버지 사울왕에서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 한지라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줄 알고”(삼상 20:31-33)
요나단에게 관심사는 본인이 아닙니다. 오직 다윗입니다. 바로 이 정신을 이스라엘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요하지 결코 본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아이성 함락에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악마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적을 향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향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 아이성을 정복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정복을 아니하신 겁니다. 이스라엘의 달라짐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희생하심’의 취지가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몰래 숨어서 전쟁한다는 것은 얼핏 남자답지 못하고 굴욕적 태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 굴욕이 무기입니다. 즉 자신의 가치를 그다지 높이 책정하지 않는 겁니다. 의도적인 낮아짐은 승리의 결과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게도 이 원칙을 쓰십니다.
마태복음 21:2-5에 보면,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겸손대회’를 열게 되면 나귀를 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나귀를 짊어지는 것으로 우승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즉 인간들 나름대로 낮춤의 극한의 모습을 보이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의 겸손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겸손으로 인해 예수님의 겸손을 가리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행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주님의 겸손을 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귀를 타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타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가시는 모습이 결코 하나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겸손의 극치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겸손 여부를 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의 딸들’만이 이해되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시온의 딸’이 아닙니다. 주님의 겸손과 관련해서 ‘시온의 딸’입니다. 그 관련성 있는 특수한 겸손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귀와 왕’의 연결성입니다. 즉 왕은 그 합당함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전혀 신분에 어울리지도 않는 ‘나귀 타심’이 곧 최고의 임금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바로 그것이 겸손입니다.
왕께서 자신의 권한 다 사용하시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이 ‘시온의 딸’ 즉 참된 이스라엘이 형성된다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시온의 딸’은 아예 없는 겁니다. 즉 ‘시온의 딸’ 속에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시온에 갈 수없음의 내용이 본질에 담겨 있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의 굴복을 창피스럽게 여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11-04 20:51:38 | 조회 : 2 | 209강-여호수아 8장 15~18절(매복 작전)20181104-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16.46.79.235) | | 209강-여호수아 8장 15~18절(매복 작전)20181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8장 15~18절입니다. 구약성경 330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그 성읍에 있는 모든 백성이 그들을 추격하려고 모여 여호수아를 추격하며 유인함을 받아 아이 성읍을 멀리 떠나니,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추격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아이성을 점령하는데 두 번씩이나 실수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아이성은 실패라는 그 자체를 아는 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겁니다.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이 몸이 부모가 보기에는 성공작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실패작이라는 겁니다. 물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고요.
이렇게 거듭 전쟁을 하게 하셔서 이중 전쟁을 하는데 이걸 신약 적으로 보면 우리 인생 있고 거듭 예수님의 인생이 있고, 예수님의 공생애가 있고 우리 인생이 있고, 이 두 개를 샌드위치처럼 겹칩니다. 이게 겹치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이걸 겹침으로써 예수님의 몸과 연결되어있는 ‘나’여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렇게 덮쳐지고 겹쳐진 요소가 없으면 그냥 그 몸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단번에 점령하지 못하게 하고 한번 실패 후에 그다음에 아이성을 치게 하는데 뭐 두 번 세 번 해보라 해도 인간은 소용없어요. 똑같이 행동해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8장 2절에 보면 지난 시간에 했는데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그리고 그다음에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라고 되어있 는데 전쟁하는 방식을 복병으로 매복 작전해서 이기는 것까지 주께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매복작전을 처음부터 그렇게 매복작전 하게 하시지 왜 이제 와 두 번째 실패를 겪고 난 후에 하게 하시느냐 하면 매복작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몸을 숨기는 거예요. 자기 몸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전쟁을 할 때 두 양측의 몸이 다 등장해서 전쟁이 성립되는데 한쪽 몸이 숨어 있어요. 그러면 그 전쟁이라는 현장에 어느 몸만 바짝 부각이 되느냐 하면 바로 자기 몸만 바짝 부각이 되겠죠. 자기 몸만.
실제로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들이 자기 집에 친구들과 있을 때 나는 누구누구와 사진 찍어봤고 누구랑 뭐 했다고 하는데 막상 어떤 사람은 태진아가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해요. 나이도 70세가 넘은 것 같은데 태진아 팬이 되어서 난리도 아니에요. 살림남에 보면 나와요. 하여튼 태진아를 소개해 줬어요. 말도 못 해요. 태진아가 없을 땐 자기만 부각 되는 겁니다. 물론 개인 취향이겠지만 태진아가 뭐가 좋다고 벌벌 떨면서 말도 못 하고 있느냔 말이죠.
사람이 전쟁할 때 적 없이 전쟁하면 혼자 잘났잖아요. 대단하죠. 그러나 막상 적들이 등장하게 되면 내가 이론상 아는 것과 실제로 전쟁에 승리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성으로 하여금 전쟁할 때에 무슨 전쟁을 하느냐 하면 우쭐대는 쪽이 패배하고 자기를 감추는 쪽이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의 전형적인 모델을 사용하십니다.
나는 숨어 있기만 했는데 결과적으로 승리를 했을 때 그 승리는 숨기만 한 본인에게 절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런 작전을 절묘하게 이끄신 주님에게만 돌아가겠죠. 그래서 우리가 영적 전쟁, 사도바울이 말하는 마귀와 전쟁을 할 때 영적 전쟁에서는 반드시 아이성 매복작전을 그대로 인수인계하듯이 그렇게 해야 해요. 마귀에게는.
“마귀야 나와라” 하면서 십자가 들고 마늘 들고나올 필요 없어요. 십자가 들고 해봐야 십자가 빼앗아 버리고 십자가가 벽에서 뱅뱅 돌아가고 그럽니다. 귀신영화 보면 그런 거 많아요. 침대에 있는 아가가 머리 확 돌아가고 퇴마사 신부들이 기겁해요. 참 바보 같은 것이 마귀가 지혜롭습니다.
이미 악마가 인간을 쥐고 있으면 인간은 악마를 못 이기게 되어있어요. 이기는 방법은 져버리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마귀를 이길 생각하지 말고 져버리면 마귀는 자기가 써먹던 작전이 아니라 당황하죠. 이러면서 마귀가 무안해하면서 패배하는 겁니다.
나대지 말라는 거죠. 자기에게 돌아올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주께서는 용납하지 않는 거, 내가 설치지 않더라도 일은 되도록 돌아간다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전쟁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이 매복작전에 있어서 하나님이 이렇게 시키는 대로 매복해서 복병하면서 했다고 할 때 그래서 아이성의 적들이 일이 잘 풀리는 것으로 생각해서 우쭐대고 까불다가 뒤에서 처서 대패를 했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전쟁의 승리 방법은 신약에서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면 본인이 승리한 것이 아니고 본인의 승리를 위해서 뒤에서 후원해준 어떤 친구의 희생으로 인하여 내가 나 되는 그러한 사건들을 계속 반복시킵니다. 백일의 낭군에 보면 세자를 죽이려고 좌상이 목숨을 노렸어요.
좌상이 세자를 죽이려고 덤벼들었을 때 거기에 호위무사가 자기가 세자의 옷을 입고 세자를 살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친구가 자기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되어있어요. 현대인들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설쳐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3절에 보면 본인이 설쳐버리면 그것은 질적으로 천국의 원리 또는 하나님의 전쟁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친구가 날 위해서 대신 희생을 치루 게 되면 그 친구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을 받는 그 법칙이 진정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원리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을 악마가 지배하고 있기때문에 그래요. 교만한 자, 잘난 체하는 자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상식처럼 되어있어요. 잘나지 아니하면 인간 대우 못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있어요. 그럼 신약은 그렇게 되어있다 치면 그럼 구약에는 그런 게 없느냐. 있지요.
사무엘상 20장 4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여기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대목에서 “입 맞추고”라는 대목을 통해서 둘은 동성애자였다는 결론도 어떤 사람은 감히 내립니다.
이 요나단이 어느 정도로 다윗을 사랑하느냐 하면 사무엘상 20장 32절에 보면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 사울 왕에게 대들어요. “요나단이 그 부친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하고 자기가 다윗의 대변자로 나섭니다. 나서니까 사울이 33절에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지라” 자기 아들마저 죽이려고 한 거예요. 악신이 들려서.
“요나단이 그 부친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식탁을 떠나고” 이렇게 해서 그걸 자기 친구에게 고자질하죠. 우리 아버지가 너 죽이려고 환장했으니 너는 정말 마지막도 그런지를 확인하려고 활 쏘는 아이를 데려가서 활을 멀리 쏘거든 도망치라는 신호로 알고 도망치라고 하고 정말 활을 멀리 쏘았거든요.
멀리하고 난 뒤에 그 둘이 사전에 짠 암호대로 ‘아, 내가 여기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생각하면서 둘이 껴안고 입 맞추면서 울면서 요나단이 하는 말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했는데 결국 요나단은 아버지 곁에 있으면서 마지막에 아버지와 함께 전사합니다. 블레셋 전쟁에서.
이 전쟁에서 항상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결코 다윗이 잘났다고 보면 안 되고 요나단이 자기 포기를 했다는 겁니다. 요나단은 나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승리가 있다는 것을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걸 먼저 하나님이 “야, 나를 사랑해라” 가 아니라 먼저 시범을 하나님 쪽에서 보인 거죠.
너희들은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 놓고 그다음에 사랑은 이런 거라는 참된 사랑을 먼저 보여주는데 요한복음 15장 13절에 하신 말씀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나와 있어요. 이 대목이 어려운 대목이에요. 뭐냐 하면 일단 친구는 없는 거예요. “우리 친구 아이가?” 이런 거 믿지 마세요. 친구 아니에요.
친구 아닌데 그냥 사랑이 아니고 희생이 되면 그 희생에서 없던 친구가 새롭게 발생 되는 겁니다. 전에 이야기 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예수님과 자기가 친구라 하는데 그건 잘못된 거예요. 자기가 여기 있고 예수님 저기 있고 해서 서로 친구 하자고 해서 친구 하는 게 아니고 친구라 하는 것은 두 존재가 있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두 존재는 없어지고 뭔가 희생되는 분이 있어야 돼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서 너무 기대가 커서 이게 문제가 돼요. 제일 좋은 것은 친구로 있으면 돼요. 제가 어떤 분에게 그런 이야기 했지만 결혼하지 말고 그냥 서로 친구로 사랑하시라고 했는데 뭐 결혼할 필요가 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되지. 이게 뭐냐 하면 그냥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지 말고 이게 에베소서 5장에 나온 말씀인데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는 거예요. 상대를 위해서. 신부는 신랑을 위해서. 신랑은 신부를 위해서. 그게 바로 부부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강제적 신부가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신랑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신랑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미흡하나마 결혼하게 된 거예요. 이게 하나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아주 뼈속까지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사람을 믿느니 마귀를 믿겠다 할 정도로 그걸 뼈속까지 느끼게 하시는 거예요.
어떤 부부가 등산하는데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어요. 아내가 산을 먼저 올라가는데 남편이 뒤따라 왔어요. 그때 아내가 뒤따라 오는 남편을 향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은 “아직도 따라옵니까?” 정말 이건 적어 놔야 합니다. 아직도 자기를 따라오느냔 말이죠. 이제 퇴직했으니 가라는 거죠. 돈 나올 구석도 없는데. 자기에게 줄 것도 없으면서 아직도 따라오느냔 말이죠.
부부라는 것은 각자 상대방에게 패배할 의향이 조금도 없어요. 미쳤다고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합니까? 미쳤다고 남에게 져요? 이기는 게 보람인데. 우리는 이런 본성을 가지고 어디까지 지금 차지하려고 하느냐 하면 천국까지 차지하려고 합니다. 마귀를 이기자.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나가서 마귀를 이기고 천국을 반드시 쟁취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두 번 거듭 다시 태어나야 해요. 한 번 태어나고 아이성에서 한 번 지고, 또 그다음에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이렇게 샌드위치 되어야 해요. 이런 인생만 계산해서는 말이 안 돼요. 지금 이 인생은 단풍놀이한다고 다 올라갔어요. 조금 있으면 다 내려올 거예요.
이런 겹쳐진 인생이라야 우리가 나는 못 이겼지만 친구되시는 분의 희생 덕분에 천국 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항상 매복작전이에요. 나대면 안 되고 설치면 안 돼요. 자칫하면 이렇게 우쭐댈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 전쟁에 있어서 매복한다는 것이 상당히 남자답지 못하죠.
남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뭐냐 하면 ‘에고, 남자가...’ 이런 말이죠. ‘쫀쫀하게 쩨쩨하게’ 이런 말 나오면 남자들은 정신 못 차립니다. 자기가 카드 막 긁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나 천국은 굴욕이 무기입니다. 어느 정도 굴욕 할 수 있는지 이거는 바닥도 없어요. 계속해서 굴욕적이어야 해요.
석궁 가지고 닭 쏘라 하면 쏘고 칼로 치라고 하면 치고 염색하라고 하면 하고 지금 가족 생계문제가 걸렸는데 그게 문제겠습니까? 나대는 인간들은 과거에 굴욕적인 것을 당해 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법칙은 간단해요. 사기당한 사람이 사기 치는 거예요. 뭔가 당한 사람이 또 화딱지 나서 남한테 해대는 거예요.
누가 굴욕적인가를 마태복음 25장에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어요.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인데 내일 되면 그것보다 더 줄어들어야 해요. 내가 안 나대도 괜찮아요. 주께서는 벌레도 다 보이는데 우리가 안 나댄다고 잊어버리시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목자는 양을 안다고 했거든요. 목자는 양을 알아요. 목자는 자기 양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아요.
괜히 우리가 나댄다고 못 찾아내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양까지 다 챙기는데 하자나 실수가 없으신 분이 주님이에요. 환란 공고 핍박 어떤 것들이 오더라도 우리는 환란 곤고중에 나자빠지지만 주께서는 그 가운데서 오히려 강한 손길을 느끼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손길을 놓쳐서 잊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전쟁에 시범적으로 보이는 것이 마태복음 21장 4절에 들어 보면 ‘아, 그 말씀이구나’ 할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는 대목이에요. 5절에 보면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되어있어요.
요 대목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대목 역시 어려워요. 시온 딸은 없어요. 시온 딸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시온 딸은 왕이 나귀를 탈 때 그게 겸손으로 이해되는 사람이 없는 시온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게 시온 딸이에요. 자기를 시온 딸로 여기지 마시고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뭔가 움직여야 거기서 결과물이 나오지 내가 움직여서 주님을 붙든다고 해서 내 안에 주님이 쑥 들어오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사람들 손에 붙잡힐 분이 아니에요. 그거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들입니다. 가롯유다는 자살하고. 왜 우리 뜻에 안 잡히느냔 말이죠. 그것은 너의 뜻이거든요. 주님은 철저하게 우리 뜻을 피해갑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모든 마음가짐은 악마의 마음이에요. 우쭐대지 못해서 환장했어요.
사진 찍고 싶고 뭐 나대고 싶고 다 그렇거든요. 예전에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만 그랬는데 이제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까지 소원이 뭐냐 하면 방탄소년단처럼 되는 거예요. 요즘 빌보드차트 순위에 계속 올라가거든요. 만약 방탄소년단을 아무도 안 알아주면 아무도 그것을 장래 희망으로 할 사람이 없지요.
사람들은 뭐라고 핑계를 대느냐 하면 “나는 음악이 좋아요” 음악이 좋거든 지리산 가서 혼자 음악 하라는 말이죠. 음악 좋다는 말은 전부 다 빈말입니다.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음악이 좋은 것이 아니고 인기가 좋은 거예요. “나는 글쓰기가 좋아” 글쓰기가 좋은 것이 아니고 유명한 소설가가 좋아요. 과학이 좋은 게 아니에요. 노벨 물리학상 받는 게 좋아요.
왜냐 하면 이건 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우리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봅시다. 이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고 악마의 마음이에요. 악마의 마음이라니까요. 악마의 마음을 지금 주께서 구원하는데 예수님은 친구가 되셔서, 우리 힘으로는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리 대신 요나단이 등장하고 우리 대신 호위무사가 되시는 거예요.
“쏴라. 화살을 나에게 쏴라. 내가 죽을게.” 숨어 있는 악마의 세력이 우리를 향하여 쏠 때 주께서 대신 맞아주시는 역할을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그 대목을 다시 한번 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시되” 시온의 딸은 없어요. 시온의 딸, 다윗 언약의 완성의 딸, 천국 백성이죠.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현대인은 왕이 없잖아요. 왕이라고 하면 싫어합니다. 본인이 왕노릇하고 있기때문에. 그런데 왕이 임해서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걸 보면서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나귀를 탄 것이 그게 왜 겸손이냐? 이게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나귀를 타는 게 왜 겸손이냐 하는 거예요. 정말 겸손할 거 같으면 나귀를 타지 말고 아예 무릎으로 기어가야 그걸 겸손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겸손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나귀를 타고 그걸 겸손이라고 덧붙여 버립니다. 그러면 나귀 타는 것과 겸손 둘 사이에 연결이 안 되어있어요. “제가 겸손하게 차를 바꾸겠습니다. 그랜저로”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거죠. 벤츠는 아니라는 거죠. 벤츠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랜저급인데 이게 왜 겸손이냐는 거죠. 그러면 머리 좋은 사람은 뭘 파악해야 합니까? 원래 최고급을 타야 하는데 많이 낮춘 폭을 겸손으로 이해하는 자라면 그게 바로 시온의 딸이라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주님은 나를 아예 밟아도 괜찮고 나를 당장 때려 죽여도 되는데 그런 대단한 분이 나귀를 타고 오실 정도까지 낮추셨습니까?’라고 그걸 알아보는 사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시온의 딸이고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왕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반응이라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겸손하려고 하면 아예 뭘 타지도 않죠. 그냥 맨발로 돌아다닐 거예요. 그러나 이런 것이 어려운 거예요. 겸손이라는 말을 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 말고 그 본질과 나타난 현상 사이에 격차를 파악하는 새로운 겸손의 눈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겸손 하라고 하면 “주님, 나귀 타셨습니까? 저는 무릎으로 기겠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마귀적인 것이고 악마적이에요. 나대지 마세요. 나대지 마. “주께서 하신 그것이 정답이고 그 정답에 네가 거들지 마.” 주님 하는 일에 우리가 거들지 맙시다. 우리는 다 생산물이에요.
예수님의 친구 되시는 그 생산물 앞에서, 쉽게 말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리 교만해도 겸손한 거고요, 우리가 아무리 나대도 우리는 겸손한 거예요. 뭐만 놓치지 않는다면? 십자가 앞에서 이미 구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천하에 우리같이 겸손한 사람은 없습니다. 탑시다! 뭐든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간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시고 희생하시는 주님만 있으면 되지, 왜 우리가 그 앞에 얼쩡거리고 나대는지. 주여 이제는 주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주님의 사랑으로 족하고 감사하는 남은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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