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강-여호수아 7장 10–12절(실패한 원인)201810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7장 10–12절입니다. 구약성경 328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약속의 땅에 가겠다고 이스라엘 사람이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애굽에서 나오라고 강제로 이끌어내신 것은 히브리인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으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서 보호하고 안 죽여야 될 것이 아닙니까?
화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면 안 되지요. 나오라고 하신 당사자가 주님이라면 이럴 거면 왜 애굽에서 나오게 했느냐고, 거기서 죽으나 애굽에서 죽으나 광야에서 죽으나 전쟁하다가 죽으나 하나님께 벌 받아 죽으나 결국은 이스라엘에게 돌아갈 이익이 없잖아요. 사람은 자기가 이익이 없는데 그 일을 왜 나설까요? 안 나서지요.
그래서 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은혜받으려고 억지를 부리는데 사실은 인간들이 사는 것을 좀 가만히 놔두면 좋겠어요. 주님께서. 그냥 이렇게 사는 대로 살자는 식으로 좀 손을 안 댔으면 하는 생각이 들지요. 왜 죽는지 그걸 죽을 때가 되면 알지 그걸 미리 알 필요도 없고 그것도 귀찮고 그냥 살 때까지 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거죠. 장래에 대해서 모르고 사는 것에 대해서 좀 내 버려두면 되지 않는가 하는 요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그래, 너의 마음대로 멋대로 살아라. 그러나 하나는 잊지 마라. 마지막에 심판이 있다” 이건 뭐, 협박인지 공갈인지. 그럼 심판을 면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뭐 대책도 없어요. 그냥 살라는 거죠. 심판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이런 식이에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네가 심판을 면제받기 위해서 어떤 대책을 세운다고 해서 그 대책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방식이 있어요. 하나님의 방식대로 골라내요. 가려내시는 주님의 손길에 의해서 한쪽은 지옥이고 한쪽은 천국입니다. 우리가 거들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어요. 그 결정을 변하게 할 수 있는 끼어들기도 우리에게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느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가려내기, 골라내기가 너무 우리에게 혹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원하는 기대를 일체 고려하지않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오죠. 그런데 그만큼 우리가 고집이 세다고 생각해 보세요.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실적을 원합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했더니만 이런 실적이 있다는 것을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그런 실적을 배격하십니다. 잘라내시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이성 치다가 36명 죽고 실패한 이야기에 이어서 나왔습니다. 여호수아 너무 참담해서 엎드려 기도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니까 “일어나라, 네가 왜 엎드려 있느냐”라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나니”라고 나와요.
하나님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언약을 언약대로 그대로 들춰내겠다는데 너는 왜 협조를 안 하느냐?”라는 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내세운 약속, 구원의 방식을 인간을 위해서 양보할 생각이 없어요. 그 언약 자체를 발췌해서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기에 부합되는지 아니면 부합되지 않는지를 측정해서 부합되지 않는 것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구원하십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주님께서는 밀어내는 방식으로 구원해요. 모아놓고 밀어내는 겁니다. 전도라 하는 것은 꼬시려고 하니까 힘든 데 밀어내기 전도는 참 쉬워요. 여러분 다들 그렇게 하고 계시죠? “복음을 네가 안 믿거든 나는 너에게 안 전하겠다.”라고 이렇게 밀어내는 겁니다. 쭉 밀어내요. “오지마. 와도 너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라고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기는 참 쉽습니다. 이렇게 하는 전도를 좀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밀어내는 제 나름의 방식은 이런 겁니다. 그 실 오징어포를 고추장에 버무려서 요리해 놓으면 떡이 되어서 하나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먹을 때에는 하나하나 떼어서 먹어야 돼요. 젓가락 가지고 하나하나 떼 내듯이. 주님께서는 천국 못 갈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에 끼어드는 것을 실 오징어 갈라내듯이 하나하나 다 들춰내요.
다 들춰낼 때 뭘 하느냐 하면 주님의 자기 실적으로 고추장처럼 들러붙어 있는지, 아니면 내 실적으로 천국 가려고 들러붙어 있는지를 하나하나 골라서 다 떼 냅니다. 이게 주님의 선교이고 주님의 전도 방법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오늘 아이성 전쟁이 충분히 이해되어요. 하나님께서 전쟁을 일으켰다.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골라낼 자를 골라내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
전쟁을 일으켰는데 거기서 물건을 하나 도난당했어요. 여기 7장 1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 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아간이 바치지 않고 몰래 숨겼습니다. 그런데 그 물건이 뭐가 그렇게 귀해서 하나님께서 찾느냐 하면 그 물건은 하나님이 저주했다는 증표가 담겨 있는 물건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심판, 지옥으로 규정했다는 것이 담겨 있는 물건이 그게 주님의 전쟁부산물로 나오는 전쟁이고 물건입니다. 그렇다면 그 물건과 무엇을 동일시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시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역시 인간입니다. 인간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인간은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철저하게 버림받아야 돼요. 인간은 절대로 천국에 못 온다는 증거가 이스라엘에게만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 겁니다. 자기 전쟁의 실적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잘났으니까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하여금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게 만들어요. 그럼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강도가 되고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게 주님의 업적입니다. 주님의 업적이에요. 주께서 그런 물건을 원하는 겁니다. ‘야, 이거 물건이네.’ 이렇게도 말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버리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기로 작정했다는 표시를 표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걸 기념품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이따위 인간도 구원했다는 거예요. 이따위 인간도. 그걸 사도바울이 알게 된 거예요. 원래 더러운 인간은 천국에 못 갑니다. 심지어 어린이 유치원도 못생기고 더러운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들이 안 건드려요.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 어릴 때 많이 남자아이들에게 찝쩍거림을 받았지요?
깨끗하고 이뻐서 괜히 와서 장난치고 꼬집고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는 사이 하자는 이야기예요. 좋다는 표현을 밉다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민족들이 있고 거기에다 단군의 민족도 있는데 주께서는 그런 거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오직 이스라엘 백성, 바로 왕이 무서워 벌벌 떠는 극히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인간들, 전혀 다른 민족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을 주께서 택했다는 거예요.
택해서 하나님 언약의 표시를 아주 도장 찍듯이 꽂아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꽂아 놓고 “거봐, 이런 인간들도 내가 구원했잖아”라는 티를 내시는 거예요. 그런데 7장 1절에 아간은 하나님께 보여야 하는 그 물건을 자기가 빼돌린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일은 하나님이 하시되 내가 사적으로 취하는 이득도 내가 이 전쟁에 참여했으니 내 실적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빼돌린 거예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는 식이죠. 하나님 팔아먹고 예수 팔아먹고 교회는 교회대로 잘 되고 뭐 이런 식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런 복을 받았다고 “주님이여, 이 복을 가져왔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주께서는 복 말고 십자가 내놓으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보고. 교회 지붕에 십자가 있잖아요. 십자가 내놓으라 했지 언제 이런 복 받았다고 복 내놓으라고 했느냐는 거죠.
마지막 때에 하나님 받으시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예요. 그거 받습니다. 그게 하나님 전쟁의 결과물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여러분들이 평소에 하루하루 살면서 여러분들이 사는 그러한 목표라고 할까요, 인생관이 뭡니까? 가만히 따져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정반대예요.
그저 ‘하나님 도와주세요. 뭐? 살 수 있도록. 하나님 덕분에 잘 살았다고 티가 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런 식이란 말이죠. 그게 아간이에요.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 멀었구나. 더 망해봐야 네가 정신을 차리지. 더 망해보아야.” “주여, 십자가 외에는 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그게 저절로 나와야 돼요. 저절로.
‘주님 덕분에 자식 잘되고 주님 덕분에 사업 잘되고’ 자꾸 이런 되지도 않는 것을 하는데 그건 순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 대목을 보면서 주님의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서는 그 전에 먼저 범죄의 원인과 성격을 분명히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언급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여기 본문에서 11절에 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명한 언약을 어겼다”라고 나오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무슨 언약을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렇게 했느냐 하시는 거예요. 이런 대목에서 어려우니까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사건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일으키면 인간은 대처를 너무 잘해요.
전에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하면, 또 암 걸리면 기도하려고 덤벼든단 말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대책을 주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칙은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그 원칙은 그 사태 속에서 그 원칙들을 뽑아내는 겁니다.
그 원칙이 뭐냐 하면 레위기 27장 28~29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온전히 바쳐진 그 사람은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출애굽의 사건을 반복하겠다는 겁니다. 출애굽 사건을 한마디로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상대하지 않고 어린양과 상대한다는 것이 출애굽입니다. 그게 출애굽이에요. 그러면 그 어린양이라는 것이 하나님은 매애~하는 양과 상대한다는 것이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양으로 표상된 그분의 후속으로 생산된 자들이 있어요. 그들이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각 가정의 맏이입니다.
그 맏이는 출애굽기 13장 1~2절에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의 혈육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바친 바 되었다는 겁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받겠다는 겁니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은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생산된 것은 하나님이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역할 속에서 초태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그다음부터 이스라엘을 잘라내는 거죠. 그것을 로마서 9장에서는 남은 자라고 합니다. 남은 자.
로마서 9장 27절에 보면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구원에 골인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만 구원해요. 그러면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만 구원하니까 이스라엘이 모여 회의해서 “여기서 남을 사람 손들어 보세요.” 해서 손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나야 해요. 계속 전쟁이 일어나서 아까 전에 밀어낸다고 했죠? 계속해서 주께서 ‘나 이러면 하나님 안 믿어. 나 이러면 예수 안 믿어.’ 하는 사람들이 자꾸 발생하도록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조치를 내려 주십니다. “이래도 안 나갈래? 너 이래도 아직까지 예수 믿을래?”라는 식으로 계속 밀어냅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그루터기조차도 뽑힌다고 했으니까 십분의 일만큼의 그루터기만 남아 있는데 그것마저 뽑혀 버려요. 계속해서 남은 자는 내가 남을 거라는 각오와 결심을 한다고 해서 남아 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인생을 살다 보면 주께서 잘라내는 작업을 생생하게 느끼게 될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만 있으면 더는 소원 없습니다.” 하는 그것이 진정성 있게 올 때, 그때 다시 한번 남은 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죠. 그런데 십자가만 있으면 좋다는 그것이 그냥 평온할 때, 만사형통할 때 하는 고백의 느낌과 정말 주위에서 차라리 그리 살려면 약 먹고 죽으라는 그런 지경까지 왔을 때 ‘저는 약 먹고 안 죽을래요. 주님만 있으면 감사해요.’ 이런 일을 통해서 ‘그동안 살려 준 것도 어딘데...’ 라는 그런 고백이 강요가 아니라 저절로 나오게 할 때 주의 은혜입니다.
세상에 대해 어떤 미련 같은 것이 없거든요. 제가 아침에 이야기 드렸지만 그 전에 먼저 육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먼저 인간은 자기 삶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앙심을 품게 되어 있고 그 다음 절차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규탄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오늘 설교 처음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이러려고 주께서는 애굽에 잘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 끄집어냈냐는 거죠. 이러려고. 그런데 그 코스가 천국 가는 코스인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살아 있기에 언약 때문에 언약이 남긴 실적으로써 언약과 결합 된 사람만 천국과 결합 된 사람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남은 자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구약성경에서 누가 남았습니까? 남기는 요. 다 잘렸지요. 다 잘렸어요. 어떤 누구도 언약에 합당한 사람은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없고 이스라엘 가운데 딱 한 사람 있었어요.
한사람.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 하여” 이 마태복음 1장 18절 오기 전까지 1절에서 17절까지는 뭐냐 하면 잘라내는 작업을 한 거예요. 잘라내는 작업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계보라” 해놓고 계속해서 누가 정말 하나님의 언약대로 합당한 사람인지를 분명히 이스라엘 안에 숨어 있기는 숨어 있는데 거기 때가 되어야 그분이 제2의 인간으로 제2의 아담으로 비로소 드러나게 됩니다.
그 2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실적으로 삼아서 이제는 예수님의 자기 이름으로 “너의 이름 버리고 내가 알아서 구원해 줄게”라고 해서 이제는 성령이 오시게 되거든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성령을 훼방하면 영원히 지옥 갑니다. 사함이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자기 앙심을 품고 주를 규탄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아, 이것도 주의 일이구나. 이게 주님을 주님답게 드러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나로 하여금 잘리게 하셨구나. 남은 자는 오직 주님밖에 없는데 나는 남은 자 근처 가려고 하다가 튕겨 나와야 되는 구나.’
그리고 다시 시작해요. 예수님이 남은 자니까 예수님과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 덕분에 남은 자가 돼버려요. 그것이 마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여기에는 ‘나’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거예요.
그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나가 되어 있는 그 상태를 말합니다. 구약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땅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실습 기간이고 시험 기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실습 많이 해봤잖아요. 지리 시간 같으면 우리나라 모형 해놓고 여기가 지리산이고 여기가 남산이고 여기가 강원도고 하듯이 이스라엘 자신이 지도라고 보시면 돼요.
모형지도. 그 모형지도에서 실험적인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이라고 우겼던 구원받았다고 우겼던 자들이 하나님의 전쟁이 하나씩 툭툭 터질 때마다 그들은 하나씩 밀려 나가는 겁니다. 밀려 나갈 때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이러려고 구원했습니까? 왜 우리에게 실익이 없습니까? 내가 잘 된다는 이익은 어디서 찾습니까?’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들은 하나님과 그런 의문점을 담고 이스라엘 역사가 이어져 나가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 역사가 이어져 나가는 그 끝에 정말 모든 것을 마감시키는 예수님이 거기서 탄생을 하죠. 탄생을 해버리면 그때부터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 만날 장소를 따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만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순수하게 만드신 만남의 장소인 바로 죄인인 우리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용도는 뭐냐 하면 주께서 일하시는 장소, 주님의 작업소, 주님이 공들여서 활동하시는 그 장소가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주님의 작업장이 움직인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우리는 그동안 그걸 모르고 내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이익을 얻었느냐는 내 중심의 생각을 했는데 오늘 이 여호수아의 언약 중심으로 생각하셔서 주께서 어느 장소에 어느 집에 어느 나라에 살게 하시거든 그게 그 장소에서 일을 벌이시려고 주께서 함께 우리를 장기알처럼 움직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앙심품지 마시고요, 조금만 내 뜻대로 안 된다고 규탄하고 데모하고 그러지 마시고, 그게 우리가 우리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나의 이 망가진 인생마저도 정말 귀한 주의 정확하고 완벽한 주의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쉬지 않고 활동하시는 주님, 이 땅에서 주님 찾는다고 분주한데 우리 자신의 모습이 주님 활동하는 장소인 것을 이제는 알았습니다. 주님에 의해서 남은 자가 되었고,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죄 용서받고 의인이 되었사오니 주님 전쟁의 실적만을 세상에 증거 하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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