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강-여호수아 8장 24~29절(아이성 진멸)20181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8장 24~29절입니다. 구약성경 331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적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황폐하였으며,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사고방식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으니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진리고 달리 말해서 확실한 것은 없으니 나에게 이익이 되고 나에게 힘이 된다면 그게 횡재하는 것이다. 일단 챙기고 보자. 어차피 확실한 진리는 없지 아니한가?”라는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왜 주셨겠습니까? 성경 속에 확실한 것이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좀 더 그것을 좁혀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의 움직임 속에서 모든 확실한 것은 그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법, 율법 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항상 재편 되게 되어있어요.
이 우주의 원리를 맞춰 주어야, 우주의 원리에 합당해야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도 되고 구원이라는 것이 되거든요. 그 우주의 원리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희생했다는 거예요. 십자가예요. 십자가 희생함으로 그 십자가 희생의 원칙을 그것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 그것을 연결되어있고 다 이어져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희생을 모르게 된다면 그건 지옥 불에 가죠. 희생을 아는 사람은 천국 갑니다. 막상 천국에 와보니까 그 한 중심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어린양이, 예수님이 죽었었음을 기념하는 보좌가 천국의 그 중심부에 있었고 바로 거기서부터 생명의 강이 흐르고 있었어요. 그 보좌의 밑에서. 요한계시록 22장의 이야기입니다. 보좌 밑에서 흐르고 있었어요.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뭔가 중심부가 따로 있고 그 중심부에서 강이 시작되고, 그 강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다 적셨다고 되어있어요. 네 개의 강이 흘러서 모든 것을 적셨습니다. 그러면 ‘아, 강물 맛있다’ 하면서 멈추지 말고 강물을 추적해 봐야 해요. 강물을 따라가 봐야 해요.
그 중심부에서 어떤 활동이 벌어지기에 에덴동산이 에덴동산, 낙원의 극치인 낙원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는 그 원천이 그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과죠. 에덴동산에 있을 때는 아직 선악과가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명 나무의 효과가 솔솔 사면을 에덴동산 전체를 적셨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 나무가 언제 인간과 결별 되었는가. 바로 생명 나무와 인간 사이에 칸막이 역할을 했던 것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법입니다. 인간은 이미 출발할 때부터 법에 의해서 가로막혀있어요. 이 말은 “너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네가 원천이 아니니, 네가 출발지점이 아니니까 너의 임의대로 그것이 달라지거나 바꿔질 일은 없다. 이 우주의 원리는 너 말고 다른 곳에서 바꾸지 네가 알아서 바꾸거나 변경시킬 수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나의 희생으로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나의 노력으로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하여튼 나는 아니에요. 무조건. 내 운명은 내 미래는 나는 아니에요. 내 운명과 미래는 나 말고 다른 곳에 확정된 곳에 결정 난 곳에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살아가면서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해요.
내 뜻대로 되어 보세요. 맨날 중심부가 나죠. 내가 나서서 내 운명을 바꾸려고 시도하겠지요. 그게 바로 종교 아닙니까. 신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한 거예요. 성경공부를 왜 합니까? 하나님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좋기 때문에 성경공부라는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성경공부하고 지옥 가고 그게 무슨 난리입니까? 성경 공부하는 이유는 그게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예요. 기도하는 이유는 너의 기도하고 운명하고 아무 관련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위해서 기도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반드시 어떤 성과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하는 그 마음 자체가 뜯겨 나가야 할 요소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주변에 자꾸 일이 벌어져서 기도하지 말라 해도 기도 안 나올 수가 없죠. 나쁜짓 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왜? 조심조심 행동해야 이번 15일에 또 수능인데 부모가 경망스럽게 행동하면 아이 점수가 10점씩 날라갈 수가 있다고 내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아무 상관 없는데. 이상스럽게 우리는 상관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선악과 따먹고 선악 지식으로 움직이는 우리 자신을 파괴해야 합니다. 파괴하는데 내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요. 인간이 자기를 파괴할 의사를 가지고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와서 들러붙어야 돼요. 비누작용이 그렇잖아요. 먼지가 때가 있는데 비누가 와서 달라붙고 데려가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는 신부라 보고 신랑이 와서 데려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모든 현대인은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노력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게 굉장히 모순되는 겁니다. 모순되는 예를 하나 들게 되면 여자는 봄을 타요. 남자는 가을을 탑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보통 봄에 결혼하고 남자들은 가을에 하거든요.
이게 말이 안 된단 말이죠. 하나인데 하나를 따로따로 보니까 깨어지는 모순되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예요.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로 통합해서 봐야 한다는 겁니다. 통합해서. 신부가 구원받기 위해서 신랑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신랑이 자기에게 합당한 신부 만들기에 나서서 우리를 신부라고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부값도 못 하는데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신부라고 해주는 거예요. 그것이 나의, 이 신부의 가치가 아니라 신랑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그냥 신랑에게 당한 것뿐이죠. 여자는 남자에게 늘 당하기 마련이에요. 결국 결혼해 놓고 여자는 남자에게 당하지만. 정확한 건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오늘 설교의 본문을 대하면서 이걸 먼저 들어가야 해요. 고정된 존재가 아닌 변화라는 거. 고정된 존재가 아니고 늘 사건이 유발된다는 겁니다. 그 사건 중에 오늘 본문에 내용에서는 사건은 뭐냐, “다 죽여라”입니다. “다 죽여라” 사람이 다 죽여라 해도 남겨두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바로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걸 이용하려고.
제가 TV를 안 좋아하는데 우연히 보다가 눈에 띄었는데 갑자기 울분이 솟는 내용이 있었어요. 아들 나이가 40세 가까이 된 거 같아요. 중국에서 나쁜 짓을 하고 온 모양이에요. 취직하면 얼마 못 버티고 나오고, 들어갔다 나오고 해요. 엄마가 닭 관련된 작은 식당을 하는데 아들이 하도 놀고만 있고 대책이 없으니까 아들보고 식당일 같이하자고 해서 같이 했어요.
엄마는 27년간 식당을 했으니까 음식 맛은 보통이고 잘하는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아들보고 하라니까 아들이 자기는 홀 담당이라고 해서 손님 안 오면 맨날 놀러 가고 딴짓하고 게임 하고 이런 거 하는 거예요. 엄마만 혼자 하는 거예요. 백종원이가 동원하지 않을 수가 없죠. 백종원 쉐프가 가서 아들을 나무랍니다.
“너 놀 때 엄마는 운다. 너는 꼭 엄마를 울려야 하겠느냐?” 이런 식으로 심하게 나무랐어요. “네가 뭔데 엄마를 울리느냐? 엄마가 무슨 죄가 있느냐?” 하면서 나무라는 거예요. 제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다면 아들에게 딱 이말 한마디 할 거예요. “엄마를 이용하지 마라” 이건 그 백수 아들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하늘나라의 정답, 우주에 재편하는 원리는 뭐냐 하면 “네가 이용할 거리를 남기지 마라” 입니다. 네가 너 잘되기 위해서 이용할 거리를 네 앞에 두지 말라는 거예요. 12살 된 아들을 둔 엄마가 탄식하면서 글을 올렸어요. 조금만 뭐 하라 하면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면서 엄마에게 대든다는 거예요.
12살 먹은 중학교 1학년이에요. 그럴 때 엄마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아이가 두 살 때는 안 그랬다는 겁니다. 두 살 때, 세 살 때는 안 그랬다는 거예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귀여운 아들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간이 지나서 13살 되니까 엄마에게 달려들 듯이 밖에서 화난 것을 엄마에게 푸는 거예요.
엄마가 얼마나 만만했으면 그랬겠어요. 엄마는 그걸 오냐오냐 다 받아줬지요. 왜 받아 주었습니까? 엄마가 자식 덕을 보겠다는 거예요. 덕을 보겠다는 것이 뭐 용돈을 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이 잘됨으로 그걸로 내가 괜찮은 미래를, 인생을 살았다는 증거로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되는 그것으로 뭔가 자기 자신이 득을 얻겠다는 심보로 자식을 키운 겁니다.
자식을 진멸하지 못했어요. 자신이 자식을 죽이지 못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 귀한 자식을 왜 죽입니까?”하는데 신명기 19장 21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런 악을 너희 중에서 행하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이런 말이 나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촘촘한 하나님의 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이 법이라는 것은 마치 걸리면 감전되게 되어있어요. 걸렸다 하면 “네가 복 받을 짓을 안 했으면 저주받아라”하는 양단간에 결정을 촉구하는 법들이에요. 그게. 진공이라고 마음대로 손 젖고 살 수가 없어요. 하나하나 저촉되게 되어있어요. 하나하나 전부다.
지리산에서 도 닦다가 다시 돌아오면 모든 게 법입니다. 지리산에서는 자기 혼자 운동하고 검법 익히고 하지만 도시에서 그 짓거리 하면 신고 들어와요. 이 세상 도시는 촘촘한 법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못 한다고요. 이 동네 70먹은 영감들이 오랜만에 버스 타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티를 팍 냅니다.
여기서 담배 피웁니다. 승강장에서. 제가 담배 피우지 말라 하거든요. “이 나이도 어린 것이, 나이 60도 안 된 것이 어른보고 지적질 하느냐.” 하면서 자기 담배 피운 것은 생각 안 하고. 이게 뭐냐 하면 집에서 계속 담배 피우는 것을 자기 부인이 그냥 봐준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말을 안 해줬어요. 그 사람은 법이 없어요. 혼자 자기 마음대로 산 거예요.
그러나 세상 살면 세상 적인 법에 다 저촉이 되거든요. 전문가가 뭐냐 하면 법을 아는 것이 전문가예요. 그래서 나라의 국가 경영은 법을 전공한 사람에게 다 맡기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그들이 엘리트예요. 옳고 그름을 그들이 판단하거든요. 그 촘촘한 법에 의하면 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인간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과 겸하여 같이 살아야 할 나라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될 나라가 그 나라예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뭐냐, 문제를 출제했잖아요. 법을 제시했잖아요. 그러면 그 법에 저촉되는, 법을 안 지킬 사람은 나가라는 거거든요. 이 세상이. 그래서 마지막에 불 심판, 전에는 물 심판이 있다는 이 이야기가 주님의 입장은 이겁니다. 이 세상은 내 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한다는 이런 식이에요.
눈에 안 보이는 촘촘한 법적인 그물망이 보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건재합니까? 이 법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법이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거기에서 새로운 것들이 자꾸 변화되는 거예요. 새로운 것들이 자꾸 변화돼요. 새로운 것들의 변화에 준해서 이스라엘 자기 백성도 강제적으로 변해가는 겁니다.
그 변하는 조치 중의 하나가 오늘 전쟁이에요. 전쟁의 취지는 뭐냐 하면 서로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거든 죽여버리라는 전쟁이에요. 호의를 받아 주지 않거든 적인 줄 알고 작살 내버리라는 것이 전쟁의 취지입니다.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원주민들이 있는데 백인들이 왔을 때 토인들이 돼지를 줬을 때는 이거 개무시하면 전쟁하겠다는 신호예요.
그런데 백인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조개껍질로 답례하니까 ‘아, 우리는 이제 주고받는 사이기 때문에 적이 아니고 원수가 아닙니다’라는 그런 새로운 관계에서 친하게 지낸 거예요. 친하게 지내서 그들은 결국 멸망 당했죠. 친하게 지내서 마우리족 몇 명 빼고 다 죽었잖아요. 원주민들 다 죽었어요. 호주나 뉴질랜드 정부에서 취직 안 해도 돈 주니까 그것 가지고 마약해서 다 죽은 거예요.
움직이지 않아서 다 죽은 거예요. 움직이지 않으면 죽어요. 연세 많아도 움직이면 살아요. 90 넘어서까지 마이크 잡고 ‘전국 노래자랑’ 하니까 오래 살아요. 안 그러면 일찍 죽어요. 뭔가 일거리를 찾아서, 텃밭을 하든지 찾아서 움직거려야 한다니까요.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현재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다가 아니거든요. 모형이니까.
마지막 때에 천국 백성 되기 위해서는 현재 육적인 인간과 새로운 인간 사이에 어떤 촘촘한 변화를 율법 속에서 그걸 계속해서 끄집어내고 그걸 전개시켜야 할 임무가 있는 겁니다. 그럼 그걸 전개할 때 어떤 식으로 전개하느냐 하면 진멸해 버리라고 되어있거든요. 그럼 진멸하면 뭐가 남느냐 하면서 여러분들이 의아해하실 건데 오늘 본문 29절 끝에 보면 “그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이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라 그것이 오늘날까지 있더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왜 다른 백성들은 아이성에 속한 사람들은 다 죽여놓고 왜 왕은 금방 안 죽이느냐는 겁니다. 왜 왕은 바로 죽이지 않느냐.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성급하게 결과만 딱 보려고 해요. 수학 시험지에서 채점할 때에 결과만 보는 것은 객관식 문제에서 수학의 계산 부분이 잘못된 거예요. 제가 문교부 장관이라면 수능을 없애겠어요. 본고사로 가겠다는 것이 제 혼자의 의견입니다.
객관식 하지 말고 대충 찍지 말고 그냥 본인 그것을 주관식으로 하는 거예요. 수학문제 풀 때는 정답이 틀려도 정답이 되는 수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과정을 보거든요. 과정을. 과정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왕의 처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왕의 처단이 뭐와 닮았느냐 하면 여호수아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죠. 이름이 아간입니다.
7장 1절에 보면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취하였음이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대목 제가 설교할 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아간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자기는 자기 행함의 실적을 챙긴 것뿐인데 뭐가 잘못되었는가? 할 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간의 잘못은 바로 개인 구원이었다는 거죠.
이게 집단으로 오는 거예요. 단체로 오거든요. 안양강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속을 어묵 꼬챙이로 뚫어 버리면 이게 하나의 집단이 돼요. 동일한 것이 관통해 버리니까. 안양강의 제목이 관통이에요. 관통했다는 말은 나만의 개성이나 나만의 실력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력과 개성, 남녀노소 그런 거는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관통하는 것에 꿰어 버리면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백성이에요.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했음이 관통되고 그 관통된 작대기를 들어버리면 그것에 같이 딸려 오는 그들이 바로 그들이 천국 백성이에요. 그 꼬챙이를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144000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 언약이 관통해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 관통한 관 속에서 뭐가 흐르느냐. 오직 하나만 흘러요. 예수님의 피입니다. 십자가의 피만 흘러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십자가 지지 않았다고 이렇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나 나나 전부 다 똑같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는 거죠. 그 고정된 것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달라지고 변화되어야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만약에 우리가 고정되어 버리면 고정된 내 모습이 마치 도착지점인 줄 알고 내가 나를 섬기는 오류를 범합니다.
마치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려요. 예수 믿는 내가 나에게 우상이 되면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해 버려요. 참, 이 싸움은 도대체 언제까지 갈지...복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이것 때문에 결별합니다. 이것 때문에. “고만 해라. 듣기 싫다” 결국 이것 때문이에요. 예수님을 자랑할 거냐?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할 거냐? 그것 때문에 사단나는 겁니다. 갈라섬이 있어요.
꼬챙이가 없어요. 관통한 것이 없어요. 도 닦는 겁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 우주가 형성되어 있고, 우주가 완성되었다는 이 말은 그 희생을 알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알겠다는 나를 이 희생이 관통해 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적은 어디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 적이 있었던 겁니다. 아간이라는 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이성을 점령할 수 있는 자격이 못 된 겁니다. 그것을, 내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아이성을 점령할 수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거예요. 거듭나는 거예요. 새롭게 되는 겁니다. 우리 성도의 일생은 매일같이 거듭나는데 그 거듭나는 이유는 조건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오늘도 나는 살 자격 없다.
살려고 하는 것이 나에게 최후의 원수다. 나를 천국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나를 더 살게 하겠다는 이 터무니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왜냐 하면 내가 살고자 한다면 이 우주의 원리가 내가 살고자 하는 욕망에 가로막혀서 방해받아요. 죽어 버린다고요. 가려져 버린다고요.
마치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황폐했다는 말은 모든 것이 없어지는 거죠. 그러면 없어질 때 이스라엘도 거기에 동참해야 해요. 내가 누구를 진멸한다는 말은, 잘 들어보세요, 누구를 진멸한다는 것은 나는 진멸 안 당해야 해가 아니라 진멸 당하는 그 인간과 나와 다를 바 없음을 알고 진멸에 나서야 해요.
왜냐 하면 내가 진멸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그들을 진멸하기 때문에 그 율법이 그들에게만 적용되겠어요? 나에게는 적용 안 됩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할 때 돌로 치고 “주여 그 돌로 나를 쳐 죽이옵소서. 나는 남을 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라고 해야죠. “나는 구원받을 자격 없습니다.”라는 이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그 소리가 우리에게 나오도록, 나올 수 없는 소리인데 나오도록 주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결과물이 되는 거예요. 전쟁의 결과물이 되지요. 내가 전쟁에 승리하겠다고 하면 승리하는 나는 계속 안 죽어야 하는데 내 입에서 나는 진멸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내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이 다른 곳에 쥐어져 있는데 그 잡힌 당사자가 우리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 비슷한 예가 이 시중에 나도는 바로 돈, 화폐라는 겁니다. 화폐는 그냥 종이예요. 천 달러라 해도 뭐 두꺼워서 그 안에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종이예요. 그런데 왜 그 돈이 좋으냐 하면 이 돈을 은행에 가면 이 돈에 대한 가치를 제공하거든요. 시장에 가면 그만한 물건을 제공하잖아요. 그게 은행에 예치되어있는 지급준비금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치된 지급준비금.
은행에 돈이 없다면 그건 휴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 전쟁이라는 현장과 장차 십자가로 완성된 우주, 새 하늘과 새 땅과 이렇게 연결이 되어있어요. 이쪽에 우리는 시장통에 들고 가는 돈인 하나의 얇은 종이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에 대한 가치는 천국에 예치되어있습니다. 지급준비금이에요.
그 예치된 것을 골로새서 3장 3절에서는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두 자로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너의 생명은, 너의 예치된 적급은, 너의 돈은, 하늘나라 은행에 예치되어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우리가 얇디얇은, 훅 불면 날아가는, 칼이 와서 찌르면 죽어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얇은 돈 같은 것이지만 그러한 돈의 움직임은 곧 주님과 하늘나라와 연결되어있음을 발산하고 알리기 위한 일종의 전쟁이죠.
이 세상과의 전쟁에서 일꾼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간이 죽을 때 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돌무더기를 만들어 기념되게 했어요. 그런데 똑같이 아이성 왕 죽을 때는 이게 당장 죽이지 않고 개인이 아니라 전체로, 전체 다 보는 데서 집단 적으로 돌을 던져서 죽게 만듭니다. 진멸의 마무리 단계예요. 진멸할 때 왕은 살려두고 나머지는 다 죽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왕을 죽일 때는 합세해서 왕을 죽이고, 큰 돌무더기가 되게 하고 그것을 기념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잘났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만든 법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나도 언제든지 당하면 당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비가시적인 초월적인 주님의 보이지 않는 그 법에 의해서 처단된 결과물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승리한 것이 우리의 승리가 아니고 주의 법의 승리 주님의 승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진멸의 대상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국 못 가는가? 다 진멸해 버리고. 미군 유해 발굴단에서 DNA를 찾아내는 방법이 그거예요. 70명이나 되어서 누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미국에서 미군 유해를 미국으로 가져가면 미국 연구소에서 DNA가 덜 빠져나간 딱딱한 뼈를 조사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DNA를 끄집어내야 해요.
하나하나 끄집어내듯이 주님께서 황폐한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시도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음인데 아무것도 없음에서 백성다움이 서서히 풍겨 나오는 그러한 기능이 얇디얇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 몸에서 백성다운 기능이 발산되도록 거기에 나올 수 있도록 주께서 매일같이 이끌어내십니다.
‘나도 진멸 당해 마땅한데 주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 피의 가치를 위해서 나는 백성이 되었구나’라는 새로운 피조물의 면모를 우리가 보여준다면 이것이 나에 의한 나이 변화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우리가 백성 됨을 보여주는 주님의 매일같이 달라지는 하나님 은혜의 조치라는 것을 매일같이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중에 있음을 저희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전쟁이 아니라 과연 이 땅에 주의 백성이 있는지, 주님 살아 있는지, 주께서 살아 활동하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전사로서 군인으로서 저희들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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