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강-여호수아 8장 30~35절(에발산)201811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8장 30~35절입니다. 구약성경 332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맨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말의 중요성이죠. 말이 사람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일어나는 일들은 그전에 율법 안에서 계획 잡힌 대로 그대로 추진되는 중이라는 거죠. 종속되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과 팔자와 일어나는 일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말씀에 기록된 대로만 진행될 뿐이라는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들의 행복이라든지 그들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다시 말해서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 되게 하는 것은 내 쪽에서 찾지 말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말씀의 관계에서 그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이 땅에서 소멸될 필요가 있어요. 말씀을 띄우기 위해서 우리가 소멸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그다음에 나오는 게 있어요. 안개라는 말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앞에 뭔가 붙어 있는 말이 있어요. “없어지는 안개니라”
없어짐의 기능에 충실하고 없어지고 있음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없어지기 위해서. 있음은 없어지기 위한 준비단계가 되는 겁니다. 없어질 때 마귀에 속한 사람은 겁을 내죠. 내가 살고, 나를 위해서만 살았다가, 내 가정과 내 자식과 내 집안을 위해 살다가 ‘내가 없어져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하며 당황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의 대책은 뭐냐 하면 종갓집이라는 거예요. 종갓집. 이것은 내가 죽더라도 조상 살아 있으면 되었고, 내가 죽더라도 아들 종손 살아 있으면 그것들이 제사 지내 주면 내가 죽더라도 섭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안 믿는 연세 많은 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죽더라도 꼭 제사는 잊지 마라”하며 그런 당부를 하거든요.
그러면 본인이 그런 당부를 하기 이전에 그 연세 많은 시어머니가 시집 온 며느리에게 꼭 당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다른 것은 부탁 안 하지만 일 년에 제사 4번이다. 그 정도는 우리집 시집 온 며느리로서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거기서 어떤 며느리가 “제사 왜 드리는 데요?”라고 토 달지 않습니다.
제사를 왜 드려야 됩니까? 그런 것을 질문하지 않아요. 세상에서는. 왜냐 하면 그게 자기 존재의 영원성의 보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킨스라는 사람은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에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죽어도 DNA는 계속 살아남는다는 겁니다. 아들 때 1/2이고 손자 때에 1/8 이렇게 계속해서 1/8이든 1/16이든 계속 나라는 쪼가리는 이 우주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이 땅에서 휘날리면서 조각으로 유영하면서 헤엄치고 있다는 거예요.
자식이 없으면 그게 안 되는데 자식이 있으면 나는 자식 속에서 DNA로 살아남았다는 겁니다. 안 죽었다는 겁니다. 집념, 집착이 대단하죠. 그러나 우리가 본 성경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말씀이 살아 있으니까 말씀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네가 잠시 살아 있다는 거예요. A little. 잠시, 아주 조금만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살아 있다면 내가 어떻게 내 고유의 인생을 사느냐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 자체에 어떤 고유한 인물 또는 고유한 내용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지요. 말씀은 어디에서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면 선악에서 선악 구조로부터 생명 구조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악이라는 것은 선과 악이죠. 선을 행하면 복 받고 악을 행하면 저주받는다.
선악이라는 것이 인간 속에서는 통합이 안 돼요. 선과 악은 서로 벌어져 있습니다. 통합이 안 된다는 것은 이건 최종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여기 오늘 본문 34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언약궤를 가지고 에발 산과 그리심 산 가운데 세우시고 처음에는 에발 산에 한 단을 세웠죠.
에발 산에 단을 세우시고 그다음에 절반은 그리심 산에 절반은 에발 산에 세웠는데 거기서 뭘 하느냐 하면 백성들이 할 일이 있어요. 그 할 일이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증거 하는 겁니다. 여기 34절에 보면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라 하는 것은 신명기 2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예가 나와 있어요. 뭐 뭐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하면 다른 사람은 아멘 할지어다 하고, 뭐 뭐를 하는 사람은 저주받을 지어다 하면 아멘 하고 이렇게 여기 보면 저주가 열 가지가 나와요. 열 가지의 저주가 나오는데 축복은 안 나옵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예시니까.
어쨌든 간에 말씀은 우리로 인하여 말씀은 말씀대로 살아 있어야 된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백성들은 “아멘”이라고 진실로 그러해야 한다고 동조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하는 순간, 말씀에 동조하는 순간, 우리가 말씀에 아멘 하는 순간 그 말씀에 철저하게 우리가 예속되는 겁니다. 예속이라는 말은 노예가 된다는 뜻이에요.
나를 고유의 것으로 측정하거나 평가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나 어떤 인간이냐 할 때 내 행함 가지고 너 행한 것 내놓고 나 행한 것 내놓으면서 누가 누가 잘났다 그렇게 평가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어떤 인간이냐는 말씀에 비춰서 네가 어떤 인간이며 난 어떤 인간이냐를 말씀에 비춰서 어떤 인간인지를 보자는 거죠.
말씀을 끄집어 놓고 논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끄집어 논하게 되면 그 축복과 저주는 어떻게 통합되느냐는 문제가 나오거든요. 저주는 저주요 복은 복이거든요. 저주는 저주고 복은 복이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노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통합되려면 저주와 축복이 하나가 되어서 그 통합된 그 자체가 하나님이 원하는 생명이 되는 것으로 레벨업 되어야 합니다. 업그레이드되어야 하거든요. 선악을 충분히 충족시키는 조건 하에 생명 나무로 도약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은 인간이 못하고 말씀 스스로가 그 과정을 추진하게 되는 겁니다.
추진하는 방법은 뭐냐, 추진하는 방법은 여기 오늘 본문에 보면 30절에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바라기는 우리교회 교인들이 인당 한 500만 원씩 내가지고 이스라엘을 한 번 갔으면 좋겠어요. 인당 500하면 거기에 십자가 마을 사람들까지 합하면 뭐 얼마 안 되죠. 몇억만 있으면 되지.
거기 가보면 실제 제가 에발 산과 그리심 산을 봤습니다. 거기서 그리심 산은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차를 타고 올라가고 에발 산은 못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팔레스타인 지역이기 때문에 못 가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겁도 없이 뭐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사실은 뜨끔해서 벌벌 떨었지만 에발 산에 갔어요. 에발 산은 저주의 산이에요.
저주의 산에 산 밑까지 갔거든요. 세겜이라는 곳에 갔는데 갔다가 후딱 나왔지요. 우리 죽는 게 걱정이 아니고 잡히면 몸값 때문에 나라에 폐를 끼칠지 모르니까. 전쟁 중이라 거기가 적진이거든요. 그 에발 산에 단을 세웠다는 말은 그 에발 산이 저주 산이에요. 누군가 이 선악에 대한 책임을 혼자 일임하는 분이 에발산에서 대신 우리 이스라엘 백성 대신 저주를 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런 저주를 하나의 중간 매체로 해서 선과 악에 대해서 더 이상 하나님께서 묻지를 않는 거예요. 책임을 안 묻는 거예요. 네가 이런 행동을 했으니 벌을 받으라는 것에 대해서 일체 하나님께서는 대신 저주받은 그분으로 인해 우리에게 추궁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잊어주세요”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걸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런 작업을 위해 통합을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라는 레벨을 벗어나야 해요. 행위를 벗어나고 말씀과 말씀이 맞춰져서 거기서 어떤 결과물을 낼 때 내어진 결과물이 우리에게 재투입되게 되면 그 투입된 효과로 인하여 우리는 더 이상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조건에 맞추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먼저 인간부터 전부 소멸시켜버리죠. 시편 37편 36절에 보면 제가 참 좋아하는 구절인데요. “사람이 지나갈 때 저가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 그러니까 처소가 발생 되지 않는다는 거죠. 사람이 분명히 있었는데 다시 돌아보니 사람이 없어요.
인간 자체가 이 땅에서는 없어지게 하나님께서 일하게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인간이 있어 버리면 그게 여론이 돼요. 여론이 되면 우리는 여론의 심한 압박을 받게 되어 있어요. 내 아는 주변 사람들이 뒷담을 하면서 나를 어떻게 폄하하고, 모독하고 하겠느냐는 거죠. 뭐 옷을 이상하게 입고 왔다는 둥.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듣고 돌아보니까 이미 죽었어요. 모두다. 기관총 맞고 죽었는지 어땠는지 싹 죽었어요. 미국에 파라다이스라는 마을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낙원이라는 뜻인데 그 낙원이 완전히 불바다 되었어요. 분명히 거기에 수천 명이 살았는데 없어졌어요. 이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전략이에요.
사람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누구도 너를 욕하지 못하도록. 평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레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난 너와 안 논다. 너와 놀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복과 저주에서 하나님께서 저주 입장에서 이 세상을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심판이거든요. 그 심판하는 그것이 바로 곧 심판하고 난 뒤에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행위 자체가 구원의 행위예요. 심판행위가 구원의 능력입니다. 없어져도 마땅함을 받아들일 때 그게 바로 그 사람이 구원의 관계 속에 끼어 있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8장 21~22절에 보면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룻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것을 받아들여야 이게 구원이 되는 건데, 왜냐 하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그런 안목을 가질 때 그 사람은 축복과 저주가 통합된 사람이에요.
인간은 범죄하고 난 뒤에 선과 악을 먹었잖아요. 선과 악이 괴리되어 있잖아요. 선과 악이 괴리 되어 있는데 성도는 그 악이라는 것, 악이 선이 될 수 있다는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라는 겁니다. 내가 죄지어서 저주받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작업에 일부가 되는 거예요. 구원작업에 과정이 되는 겁니다.
선과 악을 분리하면 영원히 못 따라 붙여요. 이러면 마귀에게 계속해서 쫓김을 당해요. 너는 선해야 한다. 그러지 말고 아예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함이라고 보게 되면 그 안에서 저주받아 마땅함을 누가 깨우쳐 주는가? 주님의 성령이 와서 그걸 깨우쳐 주는 자체가 구원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혜경궁과 김 씨를 따로 분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혜경궁 김 씨라는 거예요. 그런데 앞뒤를 한번 바꿔 맞춰봅시다. 김혜경이 돼요. 혜경궁 김 씨인데 뒤에 김씨를 앞으로 당기면 김혜경이잖아요. 이재명이 부인 아닙니까. 선과 악을 한 몸에 담아버리자는 말이죠.
악을 버리고 선으로 가지 말고 아예 그 악이라는 것을 선악과 따먹은 그 악이라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 나보다 더 중요한 선악과에 기능을 보여주는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살아가는 그 위치가 이미 구원에 종속된 겁니다. 그걸 우리가 못해요. 그걸 누가 먼저 했는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시고 바로 이 저주의 산 에발 산 밑에 자기의 희생을 드린 겁니다.
이사야 37장 6절에 보면 그 말이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건 여호와 하나님께서 먼저 이 땅에서 능욕을 받아요. 심한 욕을 당하시는 겁니다. 그 심한 욕을 당하시는 내용이 이사야 50장에도 나옵니다.
6절에 보면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대단한 수모를 당하셨고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이사야 52장 끝에 보면
“이왕에 그의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은 인생보다 상하였으며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열방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라 네가 아직 전파되지 아니한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라고 해 놓고 이사야 53장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듣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오셨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한 멋진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아침에 이야기했듯이 꿈이라고 여겼던 그 꿈이 현실로 들어왔을 때 현실속에 들어 온 진짜 하나님 모습은 뭐냐 하면 이렇게 누구보다도 얼굴이 상하고 사람에게 얻어맞아서 엉망진창이고 피흘림을 당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진짜 얼굴을 우리 눈 앞에 공개했습니다.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죠. 하나님이 보고 싶어요? 진짜 보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얻어맞은 그 모습이 하나님의 모습이에요. 나사렛 예수.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울에게 찾아 왔을 때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거든요. 능욕을 당하신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사람에게.
그것이 바로 에발 산 밑에 저주의 산 밑에 축복과 저주, 선과 악을 통합시키기 위해서, 축복과 저주를 몸소 자기 속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 주께서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겁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보면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바로 이 위치 있잖아요, 그가 매 맞은 위치, 그가 우리의 징계를 받는 위치, 그걸 십자가라고 하는데 그 위치가 평소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보려고 애쓰던 모든 위치를 이걸 없애버리는 힘이 나온다는 말이죠. 더 이상 너는 네 자리에서 살지 말고 이 자리에서 살라는 겁니다. 내가 매 맞는 자리, 징계받는 이 자리가 새롭게 너에게 제공하는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통합된 자리예요.
평소에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합니까? 이쁘고 아름답고 착하고 순하고. 20대 아가씨들은 멋진 남자를 원해요.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든 부모는 그저 자기 딸에게 잘하는 착한 남자가 최고라고 하죠. 그러면 철없는 20대는 “난 나쁜 남자가 좋아.”라고 하죠. 참 철없는 소리죠.
그저 살아보면 멋지고 키 크고 그런 거 소용없고 너에게 잘해주는 남자가 최고죠. 그러나 20대 아가씨들은 그런 말이 선뜻 와 닿지 않습니다. 자기는 못생겨 놓고 꼭 현빈 찾고, 장동건 찾고, 이병헌과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하는데 현실은 모두 늙어 가고 있다는 거죠.
정말 주께서 우리에게 제공한 아름다움이라 하는 것은 정반대로 능욕 받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걸 그리워해야 해요. 우리가 보고 싶어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라는 이 분리된 자아를 처리해 주시는 분. 도대체 어떤 일을 벌이셨기에 드디어 선악에 안 매어도 되는 진짜 내가 있는 자리는 내가 원하는 자리 내가 갖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 나를 없애주시는 그 자리고 없애 주신 후 그 자리를 대신 채워주시는 그 자리는 바로 십자가 앞입니다.
피 흘리는 앞, 강도가 봤던, 본 정도가 아니고 같이 동기생이죠. 십자가에 매달려 같이 쳐다봤어요. 십자가 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돈 주고 못사는 자리입니다. 복권 2000억 되어도 가질 수 없는 자리예요. 최고의 자리는 뭐냐, 나를 없애되 나의 죄까지 없애주는 그 자리, 그 위치, 그것을 우리가 그리워해야 해요. 그것을 우리가 보고 싶어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백이 그거였어요. “주님 보고 싶습니다” 사도 요한의 보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어린양으로 죽었던 그 주님이 보고 싶다고 요한계시록에 계시를 받았던 거예요. 우리가 너무나 자신이 잘나 보이기 때문에 나같이 잘난 수준에서는 나같이 잘난 수준의 잘생긴 남자를 원한다고 하지만 그 잘남도 나이 들면 다 과거 지사일 뿐이에요.
한때 젊었지만 지금 늙은 그 모습이 자기 모습이거든요. 지난번에 대구강의 제목이 뭐냐 하면 ‘이게 나예요’입니다. 이 늙어 가는 내 모습이 나예요. 점점 더 소멸해 가는 거예요. 늙어 없어져 가는 거예요. 안개처럼 사라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구원작업입니다. 이제는 쓸데없는 거 그리워하고 찾지 말고 제대로 만나야 하고 봐야 하고 손에 못 자국, 옆구리에 창 자국, 왜 그분 놔두고 엉뚱한 분 자꾸 그리워하고 있느냔 말이죠.
그분을 보고 싶어 해야지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어떤 사람은 태진아 보고 싶다고, 어떤 사람은 방탄 소년단 보고 싶다고 하고 얼마나 철이 없습니까? 정작 사람들에게 외면당한 예수님의 대신 맞으시고 십자가 지시고 피 흘리신 그분을 정말 보고 싶어 하는 거 그것이 바로 에발 산에 있는 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꿈이 아니고 실제 일어난 현실이에요. 가장 충실한 현실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너무 건방졌습니다. 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한결같이 젊고 곱고 잘생기고 멋있고 늘 힘이 있는 사람인 줄 착각했습니다. 없애버리는 주님의 구원 작전에 감사하며 이제는 그 일을 하신 모든 것을 날 위해서 희생하고 아파하시던 고된 주님의 모습을 찾고 그리워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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