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강-여호수아 7장 16~18절(죄인 뽑기)201810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7장 16~18절입니다. 구약성경 328페이지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범죄자를 찾아내는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누가 범인인지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증거를 좁혀갈 때 여자는 뺍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 전쟁에서 여자가 참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단 남자들 모아 놓고 열두 지파 나오게 하고 거기에서 뽑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께서 범인을 뽑는데 범인이 잘못한 게 뭐냐는 거예요.
아간이라는 사람이 결국 범인으로 나타났는데 요새 같으면 CCTV 보면 될 텐데 그게 없었거든요. 아간을 뽑았는데 아간이 뭐를 그렇게 잘못했느냐. 아간이 잘못한 것은 이거예요. 자기의 노동의 대가를 얻은 게 잘못입니다. 희한하죠. 자기의 수고한 대가를 얻는 게 그게 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천국은 그런 동네가, 그런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내 노동의 대가를 주는 동네가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서도 천국에 못 가는 사람의 행동을 보여준 거예요. 아간이.
이것은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와도 같습니다.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 포도원 주인이 약속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씩 줄 거라고. 그러면 약속을 기억해야죠. 한 시간 일한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약속대로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그러면 다른 일 많이 한 사람은 갑자기 원래 약속한 것을 거부하는 요소가 자기 마음속에 동하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 일해서 한 데나리온 줬으니까 나는 여섯 시간 일했으니 나는 6데나리온 줄 거라고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생각을 한 거예요. 약속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약속을 위해서 있어요. 약속이 먼저입니다. 인간은 나중이에요.
약속이 약속되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인간을 뽑은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은 범죄 한 인간이에요. 괜찮은 인간을 뽑은 게 아니고 범죄 한 인간을 통해서 하는데 범죄 한 인간이 필요한 이유가 약속이 스스로 갱신해 나가는데 범죄 한 인간만큼 적당한 인간이 없습니다. 시행착오라는 말이 있잖아요.
잘못해야 실체가 어떤 내용으로 그 일에 대해서 실수를 해 줘야 해요. 실수하지 않으면 허황된 망상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류현진이가 무조건 잘 던지는 건 아니에요. 실수해야 해요. 패배해야 해요. 패배할 때 내가 실수 한 것이 아니고 원래 실수한 그것이 본인의 진면목입니다.
실수라는 것이 본인은 잘 할 수 있었는데 실수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오히려 잘 할 수 있는 게 이상스러워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낯설어야 돼요.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됩니다. “살아 있어서 미안합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이런 소리를 해야해요. “아직 살아 있을 가치도 없는 게 살아 있어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돼야 해요.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어떤 계명적으로 ‘지켰으면 괜찮았을 텐데...’ 이런 식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난리입니다. 우리에게 그 큰성을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그렇게 나왔을 거예요. 그들은 아이성이라는 부록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여리고성의 점령은 아이성을 합쳐야 비로소 여리고성의 취지가 드러나는 겁니다.
여리고성의 점령은 결국 네가 잘나서 점령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성이 실패해 줘야, 실패의 요소가 담겨야 비로소 그들은 천국을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에 가는 백성이거든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실수와 얼마나 많은 좌절과 패배와 낭패가 우리를 기다릴지 모릅니다.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낭패는 뭐냐 하면 내가 죽는다는 거예요. 이 미모가 끝나고 이 건강이 끝난다는 겁니다. 이 힘이 쫙 빠진다는 거예요. 왜 우리에게 가을을 줬습니까? 가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뭐냐 하면 낙엽이에요. 낙엽의 뉘앙스는 뭐냐 하면 아무짝에 쓸데없음입니다. 아무 쓸데없는 거.
뭐 청소년 때는 낙엽 주워서 책갈피로 넣지만, 그것도 보기 싫은 낙엽은 후보감으로 들어가지도 못하죠. 어느 노래에 ‘낙엽처럼 가버린 사람’도 있지만 낙엽처럼 우리는 결국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낙엽도 한때는 푸르렀잖아요. 연탄재도 함부로 차지 말라고 어떤 시에서 그러잖아요. 한때는 너희에게 뜨거운 존재였다고.
낙엽도 처음부터 낙엽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토록 파릇파릇할 줄 알았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렇게 환영받고 했던 낙엽도 다 사람들에게 밟혀서 조각조각 나고 하듯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에 주께서 쓰실 때 쓰임 받으면 오히려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천사도 그런 존재를 부러워합니다. “좋겠다. 예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는데 네가 거기에 끼어들다니”
보통 배역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맡은 역할이 보통 역할이 아니에요. 죄인이라는 역할이. 그 역할을 통해서 주님이 인간보다 더 우선되는 약속의 약속됨의 그 새로움을 계속해서 들춰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늘 새로움이 나와야 해요. 그러면 새로움이 나오지 않는 가짜 성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보충하려고 합니다.
결핍을 채우려고 해요. ‘이렇게 고치면 됩니까? 이렇게 고치면 됩니까?’라고 채우려고 하는 겁니다. 아침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굉장히 미안한 느낌이 들었는데 술, 담배, 낚시 끊으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스스로 하는 자기 개선이 되어서 시험들죠. 태국의 청년들이 누구나 3주에서 7개월 동안 중이 되는 것을 자기의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젊은이들 군에 가듯이.
태국의 불교라는 것은 227가지의 계명을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계명을 지키면 왜 지키느냐 하면 그 계명을 지키게 되면 덕을 쌓게 되고 그 덕은 자기뿐만 아니고 자기 가족들에게 두루 할당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자본주의적입니까?
형제 5명 가운데 한 명 사법고시 합격해서 판사 검사 되게 되면 누구 하나 뜨면 다른 동생들은 땡잡았어요. 자식들 가운데 누구 하나 의사 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가문의 영광처럼 여겨서 자기가 의사도 아닌데 의사처럼 행세합니다. 아버지 하나 노끈장사 하게 되면 그 아들 둘은 아무 직업도 없이 아버지 밑에 사는 거예요. 광산 김씨처럼. 제가 이 이야기 계속할 참이에요.
언약을 갱신할 때에 그 언약을 갱신해야 될 이유가 이 언약궤로 인해서 요단강을 건너왔잖아요.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온 그 언약궤가 멈추지 않고 어디까지 돌파하느냐 하면 여리고성을 뺑뺑 돌았습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요단강을 건너게 했던 그 기적이 여리고성을 완전히 13바퀴 칭칭 감았다고 보세요.
요단강을 건너게 했던 그것을 요단강이 감당하지 못해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는 언약궤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위력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요단강으로 평소에 홍수가 안 나는 강인데 갑자기 홍수가 나게 만들어요. 홍수가 나게 만들어서 이제는 “너희들은 집에 가 있어. 보기만 해.” 하면서 백성들 빼고 언약궤 대 자연재해 홍수가 서로 맞짱뜨는 겁니다.
이거는 홍해도 마찬가지예요. 앞에 홍해 바다 넘실거리고 뒤에 애굽 군사 따라오게 만들고. 그 배치를 보세요. 그 배치 사이에 누가 끼어있느냐 하면 남자만 40만 이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끼어있습니다. 오가도 못해요.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그겁니다. 그동안 도대체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이 과연 믿을 만하냐는 겁니다.
하나님 믿고 뭐가 잘 돼야 하지 잘되는 게 뭐냐? 이건 잘 되는 것이 아니고 이건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믿는 사람을 하나님 믿는다는 그 믿음 자체의 능력을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느냐 하면 그 하나님이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고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도 다 나를 위해 나 좋으라고 믿는 거예요. 그것을 쫙 빼란 말이죠. 나를 위한 믿음, 소망, 사랑은 없는 거예요. 애초부터 그런 건 없는 거예요. 우리교회 잘 되고, 우리 집안 잘 되고 그런 건 없어요. 그런 하나님은 아예 없어요. 그럴 거 같으면 교회 안 나온다고 하면 오지 마세요. 누가 오라 했어요?
오늘 본문에 뽑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밀어내는 겁니다. 지난번에 하나님의 전도는 밀어내는 거라 하니까 동영상에 오랜만에 ‘싫어요’가 올라왔어요. 전도하면 모아야지 왜 밀어내냐는 겁니다. 밀어내는 것이 전도예요. 밀어내는 거. 오지 말라는 거예요. 왜 꾸역꾸역 뭐 얻으려고 오는 거예요? 올 필요 없는데.
창세기 9장 23절~26절에 보면 거기에 노아의 가족이 나와 있어요. 노아의 가족은 노아의 방주를 거쳐서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생사를 같이 넘나들었던 사람들이에요. 이 여덟 명이.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 이 여덟 명이 몽땅 합격자로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미 홍수 심판을 건너고 난 뒤에 이미 합격했다는 그들 가운데서 밀어내기를 시도하게 됩니다.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를 먹지요. 포도주를 먹을 때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은 술 안 먹는데 노아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서 술을 처먹고 이게 무슨 잘못된 짓이냐고 하는데 옛날 우리 인류의 종족들은 곡물을 만드는 이유가 탄수화물로 배를 채우려고 곡물을 생산한 것이 아니고 술 만들려고 곡물을 재배했어요. 술 만들려고. 인류 문화학에 보면 나와요.
미치고 환장하고 싶어서 그 곡물을 재배하는 거예요. 재배라는 것은 경작을 말합니다. 경작의 이유는 술 만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노아도 보세요. 술을 먹잖아요. 술을 먹으니까 이제 정신이 나간 거죠. 그리고 하체를 벗고 있으니까 거기에 아들 세 명 중에서 한 아들 함이 아버지를 보고 조롱했고 그 함의 아들 가나안도 조롱했어요. 은혜를 모독한 거죠.
그런데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 야벳과 셈은 보지 않고 뒷걸음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언약의 갱신이에요. 노아에서 방주를 만들었다는 그 방주의 의미가 뭐냐 하면 너희들이 죄 없어서 건져지는 것이 아니고 죄 있는데 심판에서 면제하기 위해서 추가되는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새로운 정보, 덮어주는 거예요.
이 덮어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궤에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언약궤 용서가, 그 덮어주는 뚜껑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를 억눌러서(press) 덮어주는 거예요. 덮어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지어야 하는 거예요. 죄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야 하는 거예요.
“목사님, 우리가 무슨 능력으로 죄를 짓습니까?”하는데 살아 있는 자체가 죄가 뿜어져 나옵니다. 죄가 새롭게 뿜어져 나오면 우리는 결핍이 아니고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은혜가 추가해서 우리에게 터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거든요.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의미는 존재해야 돼요.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야 하고 기왕 존재하는 거 이 존재의 가치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기뻐하는 거, 내가 사랑하는 것이 계속해서 그런 일들만 일어나기를 보름달보고 빌던지 해보고 빌던지 무조건 세상에는 내가 원하는 일들만 일어나기를 원하는 거예요.
한화 야구팀 팬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계신 분이 아주 열렬한 팬인데, 한화 야구팀이 살아가는 보람이에요. 대전이 한화 본토인데 대전에서 두 게임 다 졌습니다. 그게 야구가 지게 되면 하루 일과 모든 게 다 짜증이 나요. LA 다저스 결승 올라간다고 늘 신경 쓰다가 드디어 류현진은 못 던졌지만 다른 선수가 잘 던져서 올라갔거든요. 하루종일 싱글벙글한 거죠.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아쉬운 게 있으면 사람이 갑자기 친절해져요. 아쉬운 게 있으면. 사람이 노숙자나 깡패 비슷한 사람은 항상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앵그리버드처럼. 항상 뭔가 사람 시비 걸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사람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요. 왜 이런 몰골을 한 사람이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가?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서울에 가면 지하철 공짜로 타는 경로우대 티켓 뽑는 곳이 있어요. 그거 뽑는데 저는 주민등록 넣어서 딱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방법을 몰랐어요. 그 사람이 아무리 봐도 평소에 친절을 베풀 사람이 아닌데 아쉽잖아요. 그래서 친절하게 저에게 하는데 제가 가르쳐 줬어요. 사람이 아무리 노숙자고 시비 걸려고 하는 사람이라도 아쉬운 거 있거든 마음 낮추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대해 탓하고 남 탓하고 세상 꼬라지 어떻다는 둥, 문재인 어떻다는 둥, 태극기 어떻다는 둥 해도 만약 그 사람들이 아쉬운 게 있으면 얼마든지 우리는 “예~예~”하고 친절할 정도로 그렇게 비겁 덩어리예요. 이게 바로 죄입니다. 절대적인 정의의 기준이 없어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어요.
우리에게 유리하게 되면 갑자기 우리는 천사로 변하고 나에게 좀 손해다 싶으면 나중에 적으로 변합니다. 내가 내 마음을 감당 못해요. 욱하고 성질 올라옵니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우리는 온전하지 못한 의미에서 주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죄인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못난 놈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얼마나 주께 감사합니까?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막달라마리아는 그냥 창녀 수준의 여자예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걸 내치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란 말이죠.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주님 어디 계신지 몰라서 울고 있습니다.” 더이상 그 여자에게 뭘 요구합니까? 교회가. 주님 보고 싶다는데 뭘 더 요구해요.
목사가, 장로가, 집사가 그 막달라마리아 앉아 있다면 뭐를 더 요구합니까? 오히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고개를 숙여야죠. 세상에 예수 믿고 잘 되고 복 받고 쓰잘데없는 자기 죄, 내가 잘 돼야 한다는 그 죄를 발휘하는 사람 앞에서 막달라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주님만으로 족합니다. 왜 그런 고백이 우리 입에서는 안 나오는 겁니까? 교회 불나도 괜찮아요. 가스 새로 갈았는데 가스 갈다가 터져도 괜찮아요. 주님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우리가 그런 고백한 지가 언제 적입니까? 그 하나님에게 잘못한 게 있어야 돼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아간이 뭘 잘못했습니까? 아간은 잘못한 게 없어요. 왜냐하면 아간이 잘못했다면 지금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아간은 자기의 참전한 노동의 대가, 병장이 월급 20만원 받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여리고성에 참전해서 이런 일을 했으니까 이만한 건 챙겨도 괜찮지 않으냐는 것이 아간의 생각입니다. 아간을 돌로 쳐 죽였거든요. 7장 마지막에 보세요.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골 골짜기거든요. 주님께서 이거는 철저하게 두 번 다시 이른 괴물은 우리 이스라엘에서 솟아나지 말라고 꼭꼭 눌러놨잖아요. 이거 키우십니다.
아간을 아무리 무덤화시켜도 이미 아간이 있는 그 요소하고 살아남은 우리 요소하고 똑같은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아간에게 돌을 쳤다면 이제 그 돌 가지고 나를 쳐야 해요. 우리교회 부흥되야 되고, 내 가정 잘 돼야 하고, 우리 취직해야 하고, 결혼해야 하고, 앞에 전부 다 ‘나’가 붙잖아요. 오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번개가 쳐도 번개는 없다고.
사건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나온 거죠. 우리는 주께서 살려주는 결과로써 나라는 것이 그때 그때 임시 땜빵으로 나타난 거예요. 주께서 은혜로 구원했는데 구원해 주니까 갑자기 뭐라 하냐면 내가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는데? 주님의 존재를 우리가 대신하면 안 돼요. 주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면 그 주님 앞에서 내 존재는 사라져야 하죠.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니까 사기꾼에게 걸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로 여리고성을 이겼으면 언약궤 안에 뭐가 들었는지를 보란 말이죠. 언약궤 안에는 그동안 광야에 있으면서 하나님께 원망하게 만들었어요. 아간처럼 어떤 특정 개인이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집단적으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원망했어요.
심지어 모세까지 원망했어요. 물 없어서 원망, 고기 먹고 싶다고 원망. 고기를 줘도 우리같으면 안심 스테이크 주잖아요. 그런데 메추라기 그게 뭐가 맛있다고. 맛이 없지요. 하지만 고기 먹고 싶은데 못 먹는 사람에게는 그게 맛있는 거예요. 부자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들 아무리 맛있는 거 줘도 맛없어요. 그런데 사냥 다녀와서 먹으면 팥죽 한 그릇도 그렇게 맛 있단 말이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행복을 갉아 먹는다는 생각을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주께서는 줄 것 다 줬습니다. 줄 것 줬는데 또 달라고 해요. 지금 그만하면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더 달라는 거예요. 주고 안 주고는 주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왜냐 하면 구원시키는 주도권은 주님이 쥐고 있지 우리가 안 쥐고 있거든요.
맨날 달래. 엎어져서 새벽기도 하면서 맨날 달래. 우리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주여, 주님 주신 은혜를 감당 못 하고 기껏 오늘도 이런 죄를 가지고 왔나이다. 주여 여기 있습니다. 저를 돌로 쳐도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여리고성을 함락시켰던 언약궤의 언약궤다운 모습을 이제는 바깥에 언약궤가 아니라 내 안에 언약궤가 있음을 드러내는 운반체로, 언약궤 운반체로 오늘날 신약 성도들이 있는 겁니다.
내 안에 성전 있고, 내 안에 주님 계시고, 내 안에 언약궤 있는 겁니다. 내 죄를, 내가 죄밖에 지을 수 없는 것을 이렇게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피로써 많이 봐주고 있음을 우리가 살아 있는 이것으로 맘껏 보여주는 것이 벌써 시작된 천국 생활이에요. 이름을 고쳐야 해요. 이봐줌, 최 봐줌, 김 봐줌으로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 해요. 한나, 다윗, 요셉 그런 이름 좀 짓지 말고 안 짓는 걸 지어야 해요. 창의성 있게. 최탕자, 김개, 박죄인 이런 거. 아무도 나에게 이름 지어 달라고 안 올 거예요.
여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뽑을 때 그 뽑힌 인간이 절대로 미리 회개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독하죠. 인간이 사람 앞에 회개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회개할 지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뭔가 철저하게 이 작업을 남들이 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알아서 한 것이 아니고 법원에서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다룬다는 그 안에서만 인간은 회개가 돼요.
목사 앞에 회개하지 마세요. 교인들 앞에서 자기 죄를 고하지 마세요. 쓸데없는 스캔들 떠돌면 골치 아픕니다. 하지 마세요. 다 같은 죄인이 죄인들 앞에 왜 죄를 이야기합니까? 주께서 건드리는데 어떻게 건드리느냐 하면 마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비빔밥을 먹는데 배고픔 가운데 비빔밥이 양이 얼마 안 돼요.
비빔밥 먹으면서 양도 얼마 안 되고 막 먹으면서 더 먹을까 말까 하는데 주인이 그런 소리 할 때 그 비빔밥 그릇에 다 먹고 남은 쌀 알갱이 다섯 개, 그 다섯 알갱이가 주인의 눈을 바라보는 그 마음, ‘이제는 내 차례인가요?’ 그러면 알갱이는 안 잡히기 위해서 뒤로 물러가죠. 궁지에 몰렸으니까. 궁지에 몰렸는데 그 비빔밥 밥그릇이 무쇠라. 빠져나갈 데가 없어요.
결국 앞에 있는 선배들 다 떨어지고 자기 혼자만 달랑 남았어요.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나와의 일대일 관계. 얼마나 그리웠던 상황입니까? 얼마나 축복 된 상황인가요. 세상 사람 다 안 보이고 주님과 자신만 보일 때 그때는 아간처럼 드디어 내가 성공하지 못한 내 죄 찾기에 주님이 기어이 성공하셨군요. 주여 제가 그런 죄인입니다.
이게 바로 집요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아는 과학은 절대로 자기의 박식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십자가를 아는 예술가는 절대로 자기의 예술 작품을 절대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목사는 자기가 목회 성공하리라는 생각이 일체 없어요. 지금 당장 죽어도 좋다는 거예요.
내가 밝혀낼 수 없는 죄를 밝혀 줬다는 말은 그 자체가 천국입니다. 이미 천국에 도착했어요.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그대 앞에 있으면 나는 한 없이 작아져도 괜찮아요. 내 인생을 아주 웃음거리 만들어도 그것조차도 나에게 최적화된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는 말 외에, 주여 이것 때문에 피 흘렸군요 하는 언약궤의 가치를 노출 시킬 수 있도록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터질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님으로부터 늘 주어지기를, 그게 우리의 소원이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는 것이 실수였고, 하는 움직임이 다 오류였습니다. 다 착각이었습니다. 주님은 약속 중심인데 내 중심인지 알았습니다. 우리 인생 백년 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을 이미 여기서 확정 짓게 하시고 한 번 죄인이 반복해서 죄인 된다는 이 사실만큼 우리가 더 가난할 수 없고 더 행복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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