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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성과 맏물(수8;1-2) 1810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0. 29. 07:15
2018-10-28 14:55:32조회 : 23         
   아이성과 맏물181028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아이성과 맏물(여호수아 8: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fl3sDYTUSk, Hit:1
 이근호18-10-28 15:47 
아이성과 맏물 

2018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8:1-2 


(8: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8:2)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주실 것이면 여리고성처럼 그냥 돌기만 해도 함락되도록 하시지 왜 이스라엘이 아이성을 공격하시는데 말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성 몇 개를 더 얻는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계속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자들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들어 나가실 때, 인간들의 숨은 본성도 같이 노출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희망찬 역사만이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과거를 이해할 때, 역사로 정립 읽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들이 실제로 경험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아무리 감각적으로 경험했다고 해서 인간의 마음 자체가 다른 마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에 걸쳐 아이성을 공격케 하신 것은, 과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결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로 인간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 ‘달라짐’이 인위적인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역사 속의 인간’이 역사의 의미를 뽑아낼 재주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일관되게 주신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그 진행과정에 있어 인간의 오산과 판단미스로 인하여 성급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즉 출제자가 낸 문제의 정답은 출제자 당사자만이 아는 겁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인간들이 정답을 내놓게 되므로서 인간의 숨겨진 본색이 표면화됩니다. 아이성 점령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생각한 하나님과 참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어긋남을 안다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아간’이라는 적폐요소를 솎아내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여금 다시금 아이성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십니다. 과연 솎아낸 그 요소가 무엇이기에 전쟁의 양상이 일거에 달라지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간의 요소는, 이스라엘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내용이어서 아간은 다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자신을 뜻을 위한 하나님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1:18-20에 보면,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를 가운데 두고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실 때, 무화과나무는 아직 열매맺을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그 무화과나무는 비정상적인 병든 나무가 아니라 도리어 정상적인 나무라는 것을 반증해줍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의 정상스러움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화근이 됩니다. 보통 인간들 같으면, 아직 열매맺을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본인들이 필요로 한다면 이는 본인들 잘못이지 결코 무화과나무 탓이 아닌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이 원할 때 열매가 맺지 않는다는 이는 예수님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저주가 떨어집니다. 

곧 뭔가 정상에서 벗어나게 행했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받는다면 여기에 할 말이 없지만 전혀 비정상적으로 산 것도 아니요 정상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어느 특정 시점에 예수님이 원했는데 즉시로 열매를 내지 못했다면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정상이나 비정상이니 하는 것은 진정한 예수님의 판단과 부합될 수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판단한 ‘역사’라는 것은 그 자체에서 선과 악으로 결론 내리게 되는 이런 결정이 되레 예수님의 결정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매를 요구할 때, 그 현장에 열매가 없으면 저주받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 마음대로입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들의 의견은 배제당합니다. 그 배제당한 것이 돌에 맞아죽었던 아간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아이성 점령은 아간 이전의 이스라엘 마음과는 다른 마음가짐의 이스라엘이 되어야하겠지요. 그 변경 사항이 오늘 본문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수 8:2) 

여리고성의 함락 작전에서는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되어 있습니다.(수7:17) 이것은 위반한 자가 아간이었고 이로서 이스라엘은 아이성 함락에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실패의 요소라 빠졌다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가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점을 알기 위해 전에 하나님이 주셨던 율법을 살펴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23:14-19에 보면,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내 절기 희생의 기름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지니라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1년에 필히 세 차례 지정된 절기를 지키라고 하는 내용과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드려라’는 명령과 그리고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지니라’라고 이색적인 지시가 같이 묶여져 있습니다. 이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날마다 첫 것이 되어야 한다’입니다. 

이 ‘첫 것’은 혈육적으로 시도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미 염소라 할지라고 염소 새끼의 위상을 ‘어미’라는 혈육에서 건져낼 수 없다는 겁니다. 비-역사는 역사에서 나오지만 역사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겁니다. 역사를 통해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한계에 직면해야 합니다.  

첫 것은 유월절의 피처럼 필히 죽음을 경과해야 합니다. 즉 ‘내 힘으로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는 생각이 솎아져야 합니다. 나는 죽고 하나님의 죽음 한데 섞여서 영생을 얻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업적인 ‘맏이’에게는 그 모든 축복을 제공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쟁에서 얻은 탈취물을 이스라엘에게 제공하시는 것을 허락하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방인 같은 저희들 마음 속에 그 나라와 그 의가 심어져서 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10-29 06:27 
208강-여호수아 8장 1~2절(아이성과 맏물)20181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8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329페이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가지라 너는 아이 성 뒤에 복병을 둘지니라 하시니” 

아이성은 여리고성의 부록이라고 했습니다. 아이성을 공격하면서 여리고성을 공격하면서 몰랐던 미진한 내용들이 아이성을 통해서 제대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우리가 함락했는데 아이성은 우리가 실패했다면 왜 큰 성은 쉽게 주면서 작은 성은 금방 얻을 수 없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리고성을 접수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에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주시는 분인데 여리고성을 주시는 분도 아니요 아이성을 주시는 분도 아니고 하나님은 뭘 주시느냐하면 달라져야 할 우리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달라질 수 없는 그 마음을 주님께서는 강제로 달라지게 하셔서 그 달라진 마음을 주님의 손이 거쳐 간, 주님이 손댄 새로운 마음, 내가 손댄 내 마음이 아니고 주님이 개입해서 직접 손댄 그 마음을 이제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그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오직 거기서 탈취할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해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셀프죠. 이제 네 것 해도 괜찮아. 이제는 거기 아이성에서 두 번째 전투로 얻었던 것은 나에게 바치지 말고 그냥 너 가져도 된다는 거죠. 왜? 아이성을 거쳐서 처음에 ‘이건 우리 것이야’라고 가졌던 그 마음이 아니고 이건 주시는 분이 거져 주신다는 그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마음으로 교체가 된 마음이기 때문에 그때 하나님이 가져도 이건 내가 잘나서 가졌다는 마음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거 보면 얼마나 세세하게 일하십니까. 우리는 참 성질이 급합니다. 기도 좀 해 놓고 안 준다고 닦달하고 아주 욕심 적인 본색이 드러나는데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운명이란 거슬러 봐야 운명의 진가가 나타난다고. 그냥 나는 구원받은 천국 가는 운명이라고 까불지 말고 그 운명을 주님 쪽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운명이라고 하는 그것이 내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건 착각에 해당하는 겁니다. 

‘나는 예수 믿었다. 나는 예전부터 선택되었기 때문에 천당 간다’ 그것이 착각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자칫하면 자기의 신앙생활 했던 자기 성과와 실적처럼 자기 훈장처럼 여길 수가 있어요. 따라서 그건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정된 자는 반드시 영생을 얻고 천국 가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교체가 되는 조건 하에 그것을 알게 하시는 거죠. 

우리 마음의 교체는 우리 힘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체중을 쟀는데 중국산 체중계 올라가니까 54킬로 나왔어요. 이걸 좋아해야 될지 기뻐해야 될지 슬퍼해야 될지...속으로 다시는 다이소에서 체중계 안 산다고 다짐을 했죠. 다이소에서 샀거든요. 54킬로가 희망 사항인지 몰라도 실제 그렇지 않은데 거기에 54킬로 나와 있어요. 

제가 속으로 ‘아하, 내가 원하는 기준을 세상이 제공하는 구나’ 했지요.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이런 응답을 얻었다는 것을 마귀가 제공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내가 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기존에 내 마음이 원하는 것과 주께서 주시는 것과 한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꾸 그것을 외면해 버려요. 

아침에 교독문 할 때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라고 나와 있어요.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겠어요? 입을 것 풍족하고 먹을 것 풍족하고 뭐든지 넉넉하면 우리는 더는 바랄 것 없다고 이렇게 되잖아요. 더는 욕심이 없죠. 더 바라면 죄가 됨이라는 ‘10월에 어느 날’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 말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이방인이 뭘 원하는지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계속 숙지시키는 겁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우리는 불신자가 됩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눈을 아예 안 떠야 되는 데. ‘하나님 믿기 때문에 오늘은 좋은 일 생길 거야. 오늘 과속해도 안 걸리게 하실 거야’ 하면서 맨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내놓는데 그게 뭐냐 하면 함부로 아이성을 점령하듯이 함부로 이 세상을 믿음이라는 실력 믿고 우리는 함부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가는 그 길과 주님이 오셔서 가셨던 길이 방향이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돼요. 버스노선 번호가 달라요. 이쪽은 급행 6번인데 저쪽은 급행 1번가고 완전히 가는 방향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알아서 잘 사신다고 생각하는 데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아버지에게 기도하면서 “어디로 갈까요. 다음의 지시는 무엇입니까?”
때가 되매 주께서 인도하시는 데로 지시받아서 움직였습니다. 


선지자들도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러면 지시받는다는 게 뭐냐 하면 항상 ‘내 뜻대로 마옵시고’가 전제가 되어 있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가 전제가 되어 있으면
항상 우리는 바르게 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일단은 내 속에 있는 내 욕심과 욕망을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하세요.
이게 성도가 사는 방법입니다. 


죄인이 죄 내놓지 딴 거 뭐 내놓겠어요? 죄인이 죄 아닌 걸 내놓는 이게 수상합니다. 그건 의심해 봐야 해요. 내가 미쳤구나. 죄인이 죄 지어야 하지 착한 것이 왜 나오나. 이렇게 되면 곤란하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죄인에게는 아이성도 허락이 안 되고 여리고성도 허락이 안 되지만, 다만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는 것은 아이성도 주고 여리고성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달라질 수 없는 우리 마음을 주님 뜻으로 강제로 달라지게 하셨다는 이것을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아직도 이 세상을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달라지는 방식이 어떤 방식인가. 일단 구약은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 있어야 비역사가 나와요. 역사를 외면하고 비역사가 안 나와요. 영이라 하는 것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육을 통해서만 영이 나오거든요. 

6.25 막 일어나기 직전, 그때, 군인들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봤어요. 하필 1950년 6월 25일에 영화를 봤단 말이에요. 영화를 한참 보고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은 영화 관람객입니다. 그런데 그 자막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지금 현역 군인들은 빨리 군대로 복귀하세요.’라는 것이 영화 자막에 나왔단 말이죠. 

자 그렇다면 이걸 지금 이중 존재라 하는데, 우리는 역사적 존재예요. 이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역 군인들은 ‘영화 보지 말고 빨리 군대 복귀하세요.’라는 자막이 나왔을 때 할머니들이 막 일어서고 이러지 않거든요. 계속 영화 보고 앉아 있지. 누가 일어서느냐 하면 휴가 나온 군인들만 영화 중단하고 복귀하려고 일어서 나오겠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역사 속에 푹 잠겨 살게 하십니다. 눈만 뜨면 내 생각이고 눈만 뜨면 우리는 나밖에 몰라요. 그냥 사세요. 그게 그렇게 되어야 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원대 복귀하라는 지시가 왔을 때 옆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성경 말씀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는 게 이상해요. 알아듣는 게. 이중 존재거든요. 역사에 속하면서 비역사적 존재. 이게 성도잖아요. 예수님의 얼굴 모습은 목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똑같은 입장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래서 성도라고 해서 유별나게 복장 달리하고 머리랑 수염 기르고 유별나게 하지 말고 일상생활 그대로 가야 돼요. 

그래도 가야 내가 스스로 나를 달라지게 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테크닉을 발휘하는 것과 실제로 주님께서 나를 달라지게 하시는 것과 그 차이를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내가 나를 근사한 영적 존재로 바꾸기 위해서 시도하는 것과 나는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그냥 내려갔는데 강제로 주님께서 그쪽 아니라고 막아서는 그런 사태와 구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사태의 구분이 기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을 할 때에 36명 죽고 그렇게 쫓겨 가도록 방치 하신 거예요. 아이성 점령이라는 역사적 사항조차도 그 속에 비역사적 요소가 다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두 번째 아이성을 공격하면서 달라진 것이 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거기에서 탈취한 물건은 셀프다. 네가 알아서 네 것해라” 

이 점이 왜 이리 중요한가 하면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여호수아 보고 있잖아요. 그 앞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계명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해하기를 계명을 자신들이 지킨다고 하는데 계명은 이스라엘이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하나님 본인이 지킵니다. 

왜냐하면 출제자만이 정답을 알지, 문제를 출제하지 않은 사람은 정답을 모릅니다. 물론 예외는 있어요. 자기 아버지가 교무과장쯤 되면 정답을 아는데 그 외에는 정답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정답이라고 내놓은 것과 실제로 하나님의 정답과 비교를 해보라는 거죠. 네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지만 너를 구원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새록새록 드러나겠지요. 

그러면 출애굽기 23장 15절에서 19절에 보면 거기에 세 가지의 축제인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하고 세 가지 이야기와 그다음에 미리 어려운 대목을 이야기하면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는 이 대목입니다. 수많은 신학자들 그리고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이 문제를 풀려고 골머리를 앓았어요. 

왜 생뚱맞게 하나님의 첫 소산물 이야기하면서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왜 이야기했을까.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출제한 출제자만이 정답을 알지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모른다는 말을 알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펼쳐져야 해요. 

모른다고 해서 겸손하다고 봐주는 거 없어요. 그리고 “너의 생각이 있잖아!”라고 할 때 “저는 모르기로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하라는 겁니다. “저는 기도 못 해요” 그러지 말고 하라는 겁니다. 뭘 자꾸 내놓아야 해요. 내놓아야 한다니까요. 왜냐 하면 내놓으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왜곡되게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 자기 본인이 교체할 건더기가 표면화되죠. 

이 염소 새끼를 엄마 젖으로 삶지 말라는 그 대목과 비슷하게 어려운 대목이 마태복음 21장 19절인데 두 개를 연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9절에 무화과나무 이야기 나와요. 무화과나무에게 갔는데 때가 안되었기 때문에 열매가 없었어요. 때가 안 돼서. 아마 그 무화과나무가 조생종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예수님이 배고파서 보는데 열매가 없어요. 사람 같으면 때가 안 되면 열매가 없기때문에 무화과나무 자체에서 어떤 부당성을 찾지를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희한하게도 자신이 목마른데 열매가 없다고 하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거예요. 제자들은 ‘누구보고 이야기 한 거지? 나무 보고 이야기할 일은 없고.’ 하며 의아한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나무가 바짝 말랐어요. 영원토록 너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멀쩡한 괜찮은 나무하나 예수님 만나서 갑자기 저주받아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은 굉장히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나쁜짓 해서 벌 받을 거 같으면 할 말이 없죠. 나쁜짓 하지도 않았는데 저주받았다고 했을 때, 예수님 저주의 근거가 과연 나쁜짓 했을 때만 저주하실 분인가를, 그럴 분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지요. 

나쁜짓 해서 저주할 거 같으면 마땅한데 문제는 어떤 인간도 나쁜짓 안 하는 인간이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서 천국 백성으로 데리고 가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죠. 제가 정답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본질이 표면화된 거예요. 예수님이 원하는 자와 원하지 않는 자로 저주와 축복이 가름 됩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내가 나쁜짓을 많이 했는가 적게 했는가, 얼마나 착한 일을 했는가는 주님의 저주와 심판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깡패예요. 그냥 본인이 싫으면 싫은 거고, 좋으면 좋은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알곡과 가라지가 나오는데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그 평도 사람이 구분하거나 결정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결정하려고 하면 “가만 두어라” 하십니다. “가만둬. 마지막 때에 천사가 알아서 할 거야. 네가 뭘 안다고.” 가라지인 줄 알고 뽑아놓으면 알곡이고, 알곡인 줄 알고 뽑아놓으면 가라지고. 할아버지가 7살 된 손자보고 흰머리 뽑으라고 하면 흰머리 검은 머리 다 뽑아요. 손놀림이 더디기 때문에. 

제발 나에 대한 판단을 나에게 내리지 마세요. 우리는 그러한 권한 없습니다. 내가 심판하고 내가 정죄할 권한이 나에게는 없어요.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도화지예요. 주께서 어떤 필기도구를 가지고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는 그림 그리는 대로 그려질 도화지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해변가 모래사장에 코 그리고 눈 그린다는 노래 있잖아요. 다른 거 다 그렸는데 한가지 못 그린 것이 아쉽다는 거예요. 그게 당신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주의 마음을 그리면 그리는 대로 있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물론 그걸 곡해하죠. 내가 얼마나 훌륭하면 이렇게 구원을 했구나. 이것이 곡해인데 이 마음을 바꿔야 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출애굽기로 다시 돌아와서 출애굽기 23장 15절에 보게 되면 세 가지 절기나 앞뒤로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첫 열매, 나는 첫 열매하고 상대한다는 겁니다. 

첫 열매. 그런데 첫 열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죽었다’가 나와야 해요. 그냥 나오면 안 돼요. 그럼 뭘 죽이는가. 바로 구원받고자 하는 나, 구원받고자 하는 나, 축복받고자 하는 나, 천당 가고자 하는 나, 그런 모든 나를 주께서 죽여 버립니다. 그건 네 생각이지 내 생각이 아니라는 겁니다. 

첫 열매라 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장자들은 유월절 피에 의해서 그들이 주님의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맏아들. 예수님이 맏물이고 맏아들이에요. 왜냐 하면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하늘의 형상입니다. 땅의 형상이 아니고 하늘의 형상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하는 이 첫 소산물은 혈육에서 뽑아낼 수 있는 그런 소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가축을 통해서 소개해 주는 거예요. 

엄마와 새끼 관계에서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니고 이 두 개가 역사인데, 역사가 아니고 비역사가 역사 속에 스며들어서 유발된 결과물로 인하여 우리가 첫 열매가 되는 거예요. 신약시대에 오게 되면 우리 이 땅에 있는 사람 말고 다른 곳에 계시는 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우리가 첫 열매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령을 받으므로, 십자가의 영을 받으므로 그렇게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야기 좀 더 나와봅시다. 여기에 모든 축제인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에 그대로 나와 있어요. “네가 빈손으로 나왔지만 첫 열매를 거둠이라” 그 거둔 것을 네가 바치고 그 첫 열매의 취지를 계속해서 살려내어서 저장하는 것이 수장절이에요. 

날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그 첫 번째 하나님의 손이 닿아 있던 첫 번째, 너희들이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그러한 생소한 존재라는 것을 늘 확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당시도 그렇고 오늘 우리에게도 매일 눈만 뜨면 너는 주님의 피로 인해 용서받은 첫 번째 열매, 맏물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자각시키는 겁니다. 이 마음으로 바뀌어야 해요. 

그럼 맏물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는가. 맏물이 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냥 가지라고 주는 거예요. 다시 오늘 본문에 돌아와서 그동안 여리고성을 차지하면서 그들은 뿌듯했습니다. 그다음 아이성을 공격할 때는 그들은 마땅히 여리고성 큰 것을 주었으니까 뒤에 조그만 아이성은 그냥 줄 줄 알았죠. 

바로 그 하나님이 나를 현재 있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모르고 나는 나니까 무조건 주셔야 한다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가질 수 없는 사고방식이에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을 통해서 뭔가 빼냈어요. 뭐냐 하면 아간의 요소를 빼냈습니다. ‘내가 했으니까 내가 뭔가 얻어야 합니다’라는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품어 있으니까 그걸 빼는 거예요. 

종기 났을 때나 고름 날 때 뽑아내면 시원하죠. 티눈 박혔을 때 빼내면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티눈 빼면 분화구처럼 구멍이 뚫린다니까요. 그처럼 주님께서 내 인생은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까 내가 이렇게 믿음 좋으니까 주셨다 하는 그 요소를 매일 아침 눈만 뜨면 그걸 뽑아내야 해요. 

만약에 우리가 먹을 거 입을 거 넉넉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찾겠습니까? 부동산 많고 통장에 잔고 많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좋은 분이 아니에요. 그건 이방인들이 그런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하는 이런 요소만 있으면 나는 더는 필요 없다고 하면, 그 요소를 뽑아내야 해요. 너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란 말이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는 첫 맏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같이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맏물 되시는 예수님이 가졌던 모든 하늘의 영광을 그대로 셀프, 이제는 네가 거기에 참여하라는 겁니다.
이건 주님의 것인 동시에 너의 것이야. 하나님이 너를 위해서 준 거라고 이렇게 제공되는 겁니다. 


그거 가르치려고 하나님께서는 아이성에 부딪쳐서 깨지게 만들고 깨지면 그냥 깨지는 것이 아니고 “누구야, 내 것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 가져간 자가 누구야?”라고 기어이 구별해서 뽑아내듯이, 아간 뽑아내서 그걸 죽이고 돌로 덮고 불사르고 그다음에 다시 아이로 쳐들어가게 하되 심지어 방법까지 알려줍니다. 

오늘 알려준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복병 작전을 하라는 방법이에요. 본문에 나오죠. 그 지시까지 다 하는 이유가 이게 주께서 작심하시고 만든 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는 얼마나 챙겼느냐,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새로운 맏물로서 주께서 마음을 바꿔주고 계신다는 이것이 여리고성이나 아이성보다 더 귀한 걸 받은 거예요. 

내 인생 사는 것은 예수님 증거 하라는 인생이지 내 욕심 채우라는 인생이 아니었음을 이제는 우리가 알 때, 그 마음 자체가 우리에게 주신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힘대로 뜻대로 내 마음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안 바뀐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매일 불신자 되더라도 주께서 매일 신자로 바꿔주시는 주님의 친히 작업하시는 그 손길을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