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713a야3장1절(말의 세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3장1절에서 12절까지 하겠습니다. 기니까 생략하고요, 제가 그냥 1절부터 12절까지 흐름만 딱 말씀드릴게요. 선생은 말하는 사람인데 말을 할 때에 주의하라. 그리고 그 주의해야 될 것은 주의해야 될 이유가, 그 입으로 하나님을 9절에 보면 찬양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것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생 된 자는 주의하라. 이렇게 돼있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선생이 아니다. 라는 사람은 볼 필요 없다. 이래 될 논리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누구보고 특정해서 이렇게 하라,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왜 말을 하는 선생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말하는데 주의성을 그렇게 강조 하는 취지가 뭐냐, 고걸 캐치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한테 한 이야기죠.
그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요게 참 오묘해요. 보통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사람이 있고 또 사람이 있잖아요. 있으면 우리는 사람의 A라는 이 덩치, 덩어리, 육신, 우리 눈에는 육신과 육신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육신과 육신을 인정하지 않아요. 네가 보는 어떤 덩어리, 덩치 이걸 인정하지 않고 뭘 인정하느냐, 주고받는 말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야고보서3장7절에 나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이 말은 쉽게 해서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규정해 놓았습니다. 짐승은 말 없음, 말 못함. 인간은 말을 함. 이런 차이점이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창세기1장을 그대로 가져가버립니다. 그러면 창세기1장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없음. 형상 있고 형상 없고 이렇게 되거든요.
야고보서3장9절에 보면 그런 암시가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3장9절에서 뭘 연관시키느냐 하면, 말과 무엇과 연관시켰다? 형상과 이렇게 직접 연관시켰다.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니 말하는 품새, 말하는 내용을 통해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하나님께서는 규정 하겠다. 이 말입니다. 규정하겠다는 말은 심판하겠다는 그런 말과 같지요.
그래서 이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나왔을 때에 야고보는 말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형상이 외부로 드러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그렇게 보는데 일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야고보처럼 이렇게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규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윤리성과 도덕성을 규정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이에요. 왜 잘못이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되려면 선과 악이라는 체계 안에 있어서만 이게 윤리성과 도덕성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체계 안에서. 그런데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치는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2장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건 옳지 않은 거예요. 왜 윤리성 도덕성이 하나님께서 내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윤리성 도덕성은 결국 무슨 결과를 낳느냐 하면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요 두 가지를 대조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럼 이건 무엇과 나중에 연결되느냐 하면 자기 변명조로 자기변명과 핑계로 이어지게 돼있어요. 기어이 나는 착해지고 싶어서. 심지어 조폭들 사이로도 이런 게 있어요. 조폭들. 나쁜 짓해도 사회가 그래서 그렇다든지 어릴 때 부모를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고아원에서 자라다 보니까 내가 못 배워서 그렇다든지 모든 탓을 자기는 여전히 선한 쪽에 있다는 것을 발악을 하듯이 주장하게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잘난 맛에 교회에 오는 거예요. 교회 손님들이 자기 잘난 맛에. 그래서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잘남이 더욱더 확대됩니다.” 하면 거기에 “어메! 기 살어.” 해서 죽기 살기로 그 의와 도덕을 유지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지요. 그러면 거기서 레벨에 따라서 선한 레벨과 악의 레벨에 따라서 점점 더 선과 악의 레벨이 높아지게 돼있어요.
어떤 식으로 높아지느냐 하면 남이 감히 나를 따라오지 못하는 레벨로 점점 내빼게 되는 겁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이게 교회에서 경쟁마당이 된 거예요. 경쟁마당. 신비주의가 왜 생깁니까? 새벽기도가서 옆에 사람이 대충 기도하고 나서려고 하는데 이거 뭐 초자가 와서 나보다 더 끓어 앉아있으니까 이게 자존심이 확 상하잖아요. ‘니 오늘 한 번 보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리 한다고요.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되면 진짜 개척교회 목사는 속상하지요. 왜냐하면 겨울에 새벽기도하면 기름을 때야 되잖아요. 한 시간 있으면 기름 값이 얼마인지를 계산이 된다 말이죠. 둘이 버텨버리면 빨리 목사는 끝나고 집에 가서 자야 되는데 아침 일찍 나왔기 때문에 자야 되거든요. 큰 교회야 여유 돈이 있으니까 보일러 계속 돌아가도 되는데. 이게 배틀. 현금 배틀, 기도 배틀, 선교 배틀, 부흥 배틀, 청소, 꽃꽂이 전부 다 배틀 들어가는 겁니다.
기어이 자기는 니가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있다 하는 그래서 설악산 같은 데에 갈 때에 높은 곳 보게 되면 저 밑에 헉헉거리는 거 보면 참 가찬지요. 에이~~ 멀었네. 높은 산에 가서 자긍심을 제공해서 세상에서 주눅 들고 실패한 거 교회 와서 칭찬받음으로서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회복하는 그러한 심리적인 치료, 힐링 그런 것을 노리고 교회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는 겁니다. 다 교회 사람들 왜 오느냐, 지 잘난 맛에 와요.
그러면 선악은 결국 어떤 부작용, 후유증을 낳느냐 하면, 이게 공포를 낳아요. 공포를 놓는다. 아무리 착하고 착해도 착한만큼 자기 자신의 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에 철저를 기하다 보면 예상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 그동안 쌓아온 나의 의로움과 착한 윤리에 흠집나지 않을까 주야로 걱정해요. 주야로. 걱정이 굉장히 되는 거예요.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요.
그런데 요한일서4장에 보면 사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오늘 강의 처음에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참, 오늘 강의 처음이 중요하지만, 끝까지 중요한 거 말씀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중요한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이건 말로 해서는 안돼요. 너무 중요해서.
“‘다행이다.’를 결정하는 조건은 이미 나타났다.” 다행이다를 결정하는 요건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다행이다! 가 뭐냐 하면 나에게 어떤 실수를 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구겨지고 망가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 않는 조건이 이미 나타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겁니다.
자, 피가 내 이마에 탁 붙어있다. 포스트잇을 이마에 붙였다 합시다. 여기에 피, 하나님의 약속된 피 입니다. 자기 피 아니에요. RH+ 이런 거 아니에요. 약속된 피를 이렇게 붙였다. 그럼 주님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피를 보거든요. 그럼 주님의 시선은 피에 가있다 말이죠. 나의 행동에 안 가있어요. 어떤 인간도 이미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를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 첫째는 율법이 뭔지를 모르고 두 번째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두 가지 다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킬 때에 예수님이 와야 율법의 내용을 아는데 예수님 오기 전에 자기 딴아 율법을 안다고 우겼고 두 번째는 내가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인간인 것을 예수님 오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로 드러나지 않다가 내가 오고 난 뒤에는 죄로 드러났다. 두 가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지만 마귀가 이미 인간을 선과 악을 지키기 때문에 뒤에서 군불 때는 거예요. 계속 부추겨서 산에 올라가게 만들어요. 자꾸 산에 올라가게 해가지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우월감이라든지 자긍심 승부 걸도록 부추기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공포심. 불안. 두려움.
내가 지금껏 교회 50년 60년 다니며 쌓아놓은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면 어쩌냐 하는 거예요. 이건 교회에 온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교회에 안 나온 사람들 공자, 맹자하는 사람이나 종교 없다 하는 사람들도 전부 다 지 자존심 때문에 살잖아요. 자존심을 딱 깨보면 수십년동안 자기 인생 살면서 쌓아놓은 자기가 남한테 기죽지 않을 만큼의 뭔가 형성된 게 있어요. 기죽지 않을 만큼의 형성된 것. 그게 허풍이고 허세인데 특히 남자한테는.
허풍과 허세 지키기 위해서 온갖 과도한 짓을 하면서 “나 건드리지 마! 나 이정도 잘났다.” 하는 게 있어요. TV에 그런 게 있어요. <광산김씨> 나오는 게 있어요. 살림남. 살림남에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잘 모르지요? 순박한 허세남이거든요. 아들 하나는 연애인인지 아닌지 경계가 모호한 놀면서 일하는 그 하나 있고 또 아이 하나는 식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식당을 시작했고, 그 아내는 미스 주부대회에 나가가지고 예선에 떨어진 사람이에요. 광산김씨 그걸 아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서 뭘 보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품새를 대표적으로 보여줘요.
그 사람은 개뿔도 없으면서 누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사람이 점을 왜 보느냐, 두려움 때문에 봐요. 점치는 거 무서워서 보는 거예요. 요한일서4장18절에 보면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쫒는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한테 얼마나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는지 보세요. 끊임없이 두려움을 내어쫒는 식으로 주께서는 이 피라는 이걸 붙여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거예요.
니가 귀한 거 받아놓고도 니가 쓸 줄을 모른다는 거예요. 다행이다! 이 다행이다 하는 게 천국 갔을 때만 다행이 아니고 모든 매사가 피가 요건이 개입되어서 다행이다. 가 되는 겁니다. 집에 불이 나도 다행이고, 아들 가출해도 다행이고, 이 사랑을 훼손시키고 와해시킬 어떤 조건도 추가적인 조건은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심정을 성도가 같이 공감되어야 돼요. 이건 요한일서에 보면 성령이 와서 그렇게 하신다 했는데.
니가 받은 게 얼마나 고귀하고 귀한 것인지 온 천하보다 귀한 걸 받아놨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벌벌 떨고 있느냐, 이리 묻는 겁니다. 어떤 교회법, 어떤 세상 윤리, 도덕법이라도 이 사랑의 다행이다를 그걸 취소시킬만한 이유는 요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손에 장 지으라 하면 장 지을게요. 어떤 경우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피를 흘려서 이 사랑의 피에 응축되는데 그 피를 흘림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걸 완료했다면 마귀의 노리는 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마귀는 인간에게 모든 걸 다 허용합니다. 자유도 주고 모든 걸 허용하되 단 하나만큼은 절대로 거기에 관심두지 않게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행이다!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다! 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다 이루었다. 그건 교회에서나 절에서나 세상에서나 그건 절대 발설 못하도록 계속해서 겁주는 식으로 하지요.
교회 나와서도 집구석 망해놓고 헌금 십일조를 안 해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공갈 협박 보이싱피싱하는데 계속해서 겁주는 거예요. 빨리 통장 바꿔야 한다고. 그러면 그 협박 공갈에 말려든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은 다 말려들어요. 그런데 처음에 교회 올 때는 지 자랑하러왔다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복음 듣고 다행이다를 이미 선점해버린 사람한테는 아예 도배를 다행이다. 예수의 피로 자기 영혼을 도배를 한 사람한테는 그 협박 공갈에 우습지요. 진짜 웃기네!
아~ 교회가 저리 장사하는구나. 아~ 저렇게 하는구나.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 됐구나. 믿음이 없는 조건하에 마귀가 목사를 되게 한 거예요. 장로도 마찬가지고. 아~ 교회 운영을 저리하는구나. 그 운영 법을 알게 된 거죠.
그렇다면 다시 야고보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처럼 어떤 특정적인 말로 나온다는 것은 말을 주의하라고 하는 이 야고보서의 뜻은 뭐냐 하면 내용이 제대로 다행이다.에 관련된 내용인가를 주님께서 주목하고 주시하겠다는 겁니다. 그냥 인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고 복음에 근거해서 하면 너무 딱딱하지요. 그러면 다른 더 쉽게 하겠습니다.
“이 기쁨에 얹어서 말을 하라.” 이 말입니다. 기쁨에 얹어서 말을 하라. 안 믿는 남편이나 복음을 모르는 가족들이나 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기쁨에 얹어서 해야 돼요. 기쁨에 얹지 않으면 이게 시합이 돼버립니다. 나 이만큼 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 바보야! 나한테 한수 배워라. 이리되면 야고보서 3장에 나온 것은 이건 뭐냐 하면 졸지에 본인이 스승이 돼요. 이 스승의 특징 업무를 이야기한 게 아니지요.
모든 성도가 다 스승으로서 행세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스승이 될 때에 기쁨이라는 쟁반에 얹어서 말을 해야 되는데, 이걸 이제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13장에는 이렇게 했어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사랑은 뭐냐 하면 사랑은 가벼움이거든요. 율법은 뭡니까? 무거움이죠. 무거웠었는데 무거움이 날아갔을 때 오는 가벼움. 뭔가 가슴에 응어리가 졌는데 어디 갔지? 그게? 갑자기 빠져나오니까 분화구처럼 빈자리가 생기는 거죠. 뭔가 있지 않아야 될 게 있었는데 내 힘이 아닌데 주님의 은혜로 빠져나오고 난 뒤에 그 기쁨의 자리가 그 빈자리가 기쁨의 자리에요. 기쁨의 자리.
그래서 기쁨의 자리를 주님께서 계속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고민거리를 주셔요. 고민거리 주시고 끙끙대고 끙끙댑니다. 구약에 사사기가 그런 거예요. 사사기가. 끙끙대면서 그 다음에 뭐냐 고민거리 주고 끙끙대고 그 다음에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실패로 끝나요. 그 다음에 “아이고~~ 모르겠다. 내 몸 내 것도 아닌데 내 인생 아닌데 죽여주시옵소서.”
이게 뭐냐 하면 그 모든 문제가 끙끙대고 노력하고 하는 이 모든 문제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러는데 이게 있어요. 내 숙제가 아니거든요. 요한복음6장39절 유명한 말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이것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그 일은 누가합니까? 주님이 하시지요. 개척교회 목사 본인이 하는 게 아니지요. 할 필요 없지요. 나한테 전도 안했다고 책벌하고 그런 거 없지요. 그런 것이 우리한테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요번에 수련회 하는데 수련회 제목이 사도행전 주제가 되는 겁니다. 마지막 째 9번째 제목을 미리 적어놨어요. ‘선교하지 않는 것이 선교다.’ 9번째 제목이. 첫 번째 제목은 이겁니다. 여기서만 공개할게요. 다른데서는 공개 안 해요. ‘무슨 일이 있어?’ 이게 제목이에요. 이게 첫 번째 제목이에요.
선교하지 않는 것이 선교인 이유가 우리가 선교 주체가 아니고 선교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교된 대상은 내가 선교하겠다는 그 의도마저 박탈당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제대로 우리를 성도 안 만드신 겁니다. 선교해야 되겠다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면 그건 주님 쪽에서 선교를 들 한 게 돼요. 아직 제대로 안한 게 돼요. 사도행전은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사도행전 첫 강의부터 사도행전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제가 말씀드릴 건데 1장부터 28장하잖아요. 그렇게 보시면 안돼요. 28장부터 거꾸로 올라와야 돼요. 그렇게 올라가서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보 등신같이 그런 걸 믿었다는 것을 못난 이방을 통해서 고발하는 책입니다. 역시 뭘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된 거예요. 그 잠수의 깊이가 더 넓은 거예요. 얕은 곳에서 훌짝 훌짝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깊은 물에 있는 보물을 건져서 얕은 물에 있는 보물의 식언 없음. 철딱서니 없음을 고발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뭐냐 하면 내 숙제가 아니지요. 그러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일어나는 일은 필히 일어나야 되는 일이에요. 전부 다. 필히 일어나야 될 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확정된 일이에요. 내가 몇 월 몇 일날 일어나야 될 일은 필히 확정된 일입니다. 그 확정된 일이 진행할 때에 그것이 고백으로 나온다는 말은 성도에게는 고백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에서 말을 주고받을 때 그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이 내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구분하겠다는 말은 그 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 맘속에 있던 주님께서 유발한 어떤 변화가 말로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말로해서 나오는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비폭력적이었지요. 그렇지요?
그 비폭력적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말로만 하셨다. 말씀만 하셨다는 거예요. 그게 IS와의 차이점입니다. IS는 말하면 줘패잖아요. 죽여 버리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거의 비폭력적이에요. 기껏 폭력해봐야 성전에 가서 나가라 했지요. 비폭력이라 하면 마치 도살할 양처럼 질질 세상한테 끌려가야 되지요. 그러면서 성경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성경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때가 되매. 성경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확정된 거예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가 되고 모든 게 확정된 겁니다. 확정난 일.
그럼 확정난 일이 있을 때에 이제부터 슬슬 어렵기 시작하는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까 몰라요. 제가 약간 걱정되긴 하는데요. 할 수 없어요. 이건. 어려워도 감당하셔야 돼요. 이미 확정된 일이라는 말은 확정된 내용이라면 이게 뭐냐 하면 여기서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의미. 말을 할 때 그냥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뭐를 싣고 있느냐, 내용을 담아서 의미를 담아서 전하거든요. 의미를 담아서.
확정된 내용이 있을 때 의미가 나오는데, 그러면 이렇게 주님께서 확정된 의미가 있다면, 반대가 뭐냐 하면 미확정된 내용을 가지고 말을 하게 되면 여기에 뭐냐 하면 인간들의 자체적인 자기 의미가 나오겠지요. 이 둘 사이가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확정된 내용은 아까 “다행이다.” 또는 “기쁨에 얹어서” 주눅 들지 않고 주께서 나를 망가뜨려서 기어이 내가 걱정했던 것 다 도려내고 나를 빈자리로 만들었어요. 빈자리. I am nothing이라는 말이 있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내용은 예수님이 이 내용 가지고 싸웠듯이 오늘날 싸움이 성도에게 이어집니다. 미확정된 인간들, 미확정된 인간이니까 여기서 두려움이 생기지요. 공포,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런 게 생기잖아요. 이런 게 뭐냐 하면 의미를 지키기에는 무슨 의미에요? 자기의미에요. 자기 의미 지키기. 자기 의미 지키기에서 확정된 건 내 가정 지키기, 내 자식 지키기, 내 남편, 내 직장 지키기, 내 금융거래 지키기, 교회 지키기, 전부 다 내 역사 지키고 내 자존심, 내 찬란한 아름다운 과거 인생사, 전부 다 자기 소속 단체 지키기죠.
그런데 이 지키기는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두려움과 공포가 이것이 계속 가중되지요. 이 끝은 뭐냐, 자살입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자살해버리지요. 그럼 자살하지 않은 사람은 지연된 자살이지요. 치매. 치매되면 얼굴부터 다르지요. 치매되면 얼굴이 달라져요. 착한 천심의 얼굴도 치매되게 되면 고집불통의 얼굴로 변합니다. 치매환자들의 얼굴이 다 그래요. 그렇게 순수했던 것도 완전히 불퉁스럽고 올리브 괴롭히는 부르투스 있잖아요. 그 얼굴이에요. 인간극장에도 나오는데 지리산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 하는데. 옛날에는 점잖은 얼굴이지만, 전 같지가 않아요.
두뇌에 변화가 일어나면 얼굴 표정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고집불통으로 보이는데 다른 말로 하면 내 것 못 놓겠다는 거예요. 내 과거 기억을 못 놓겠다. 맨날 지리산 살면서 혜화동가자. 서울 가자. 남산 밑에 동네 맨날 가자. 장기기억만 있어가지고 고집만 부리는 거예요. 남들을 보면 전부 다 저게 원수고 나를 해꼬지하고 이게 치매 걸리면 생긴다 하는데 사실은 말이 잘못됐어요. 우리 안에 누구나 잠복돼 있습니다. 아닌척하고 포장이 될 뿐이지 포장지만 딱 뜯으면 누구나 그것이 다 공통점으로 다 들어있어요. 건드리면 욱합니다. 건드리면 욱해요.
절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산 적이 없어요. 자기를 위해서 살았어요. 그래서 신앙도 자기 잘남을 위한 신앙이었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바람 안 피웠다. 그럼 누굴 위해서? 지 가정 지키기 위해서 바람 안 피운 거예요. 내 의미, 내 미확정된 의미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둘이 병행 안 된다고 이것을 전부 다 걷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아프지요. 굉장히 아파요. 이거 걷어내니까. 이걸 걷어내는 게 왜 아프냐 하면, 이것 때문에 남하고 비교 우열에 나서요. 비교 우열.
남보다 낫다는 점 때문에 고된 인생을 버티는 거예요. 남보다 낫다는 것 때문에. 강남에서 좀 살다가 일이 꼬여서 이상한데 와가지고 이 인덕원 못 사는데 와가지고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남자들이 왜 차를 좋아하느냐 하면 대출해서 사는 이유가 차가지고 자기의 의미를 존재의 의미를 지켜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남자들이 차 좋아하는 것은 옛날의 조선시대의 말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차를 건드리면 가다가 차바퀴를 건드리면 자기를 찬 게 아닌데 자기가 화를 내지요. 그걸 확장된 자아라 합니다. 확장된 자아.
차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누가 꽃꽂이를 했는데 애가 꽃꽂이를 건드렸다.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 사람은 화내요. 확장된 자아입니다.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제자 하나를 누가 이렇게 하면 선생님이 가만히 안두지요. 자기의 공로와 행함이 거기에 누적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행함은 문어 발 같아요. 전부다 걸쳐놓고 이것 건드리면 곧 주체 나를 건드리는 거예요.
요 방식을 주님께서 그대로 사용해서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두머리고 자기 지체. 너를 행한 게 곧 나한테 행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정리해 보면 인간은 말을 한다.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 그 말의 내용은 뭐냐 하면 바로 다행이다. 기쁨에 얹어서 하는 그 말. 그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과 예수님이 주도하는 고백인 반면에 그렇지 않고 말을 하면서 선악에 의해서 타인과의 비교 우열을 늘 염두에 두면서 이런 고백, 이런 기도, 이런 말을 함으로서 남들이 내가 얼마나 믿음 좋다고 칭찬하겠느냐, 그런 식으로 계속 생활해가요. 남을 의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도 여자 기도를 아예 없애버렸는데요. 여자 교인은 좋아가지고 입이. 정말 그 모양새가 꼭 이것 같아. 이제 종을 편히 쉬게 하시는군요. 왜냐하면 기도를 하면 되는데 기도하고 난 뒤에 그 기도내용을 그 사람의 본질로 뒷담화해서 문제에요. 계속 씹어대요. 믿음 좋을 줄 알았더니. 모든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나를 힘들게 해요. 그리고 그 나라 하는 것은 누가 조성했느냐 하면 평소 어릴 때부터 남들 보기에 제대로 살아야 돼! 라고 계속해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교육의 효과 그게 이만큼 빙하 쌓이듯이 계속 시루떡처럼 쌓여서 이게 꾹꾹 나를 누르는 거예요. 계속 눌려버려요.
그래서 말을 할 때에 평소에 남들에 의해서 조성된 말이고 그 조성된 말 자체가 “니는 반드시 남을 이겨야 돼! 지면 안 돼! 우리 가정은 이런 가정이야.” 라고 하니까 야고보서3장8절 한 번 봅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야기 듣고 보니까 여기 악이고 독이라 하는 것은 그 구심점에 누가 있어요? 센터에 바로 자신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아집, 집착,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있어야 된다는 그런 것이 자리 잡았지요.
그런데 그게 그냥 그것이 말로 나왔을 때는 누굴 죽인다? 바로 형제를 공격하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공격받듯이 형제를 공격하는 셈이 되어버리지요. 주님의 형제는 다행이다. 기쁨이다. 이게 나와야 되는데 형제라고 우기면서도 같이 섞여서 엉뚱한 소리하고 있을 때는 남한테 압박이 되고 협박이 되고 공갈이 되고 마귀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럼 말 안하면 되겠네. 입 다물고 있으면 될 게 아니냐. 그래서 이제 기도를 안 하지요. 기도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최고 좋은 것은 그러면 입 다물고 기도 못합니다. 안하면 뒤 담화 할 일도 없고 그렇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근원적으로 한 번 따라가 봅시다. 이 문제입니다. 왜말을 하는가. 사람은 왜 말을 하지요? 아무도 그런 질문을 안 하고 답도 생각 안하고 있지요. 이게 인간들이 건방져서 그래요. 길가에 들풀이 있습니다. 들풀. 길가에 들풀이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면 돼요. 지나가면 되는데 같이 가는 사람이 “저기 들풀 있네.” 하면서 드디어 뭐가 만들어졌어요? 들풀이라는 단어가 성립됐지요. 이게 말이 되지요. 사람이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을 자기를 중심화시키기 위해서 연관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자기 중심화에요.
“세상에 돌아가는 것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해!” 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인간의 죄된 본능에서 계속 나오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의해야 된다. 니 중심이냐 아니면 복음중심이냐. 니는 빈터냐 아니면 니가 중심에 니가 차지해서 예수님마저 쫒아내고 하나님마저 쫓아내고 니가 가운데 턱하니 보좌에 앉아있는 마귀처럼 앉아있느냐를 주의하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해서 인간은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태어나서 눈을 떴으니까 일단 그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마땅해! 라는 그런 주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질문부터 해보지요. 왜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로마서10장에서는 자기 의라고 하는데. 이걸 좀 더 함축적으로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행동과 삶은 자기 존재 증명용이에요. 인간은 자기 존재 증명용입니다.
말을 함으로서 나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거예요. 자기 존재 증명. 그런데 드러내면 그걸 알아줄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형무소에 안 가봤지만 가보면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독방에 갇힌다는 게 제일 힘들 답니다. 전화기도 없고 아무 외부 연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숨을 쉬어도 죽은 자에요.
특히 인터넷상에서 강제적으로 퇴출당하면 그 인터넷 세계에서 그 사람은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무도 찾지도 않고 자식도 찾지도 않고 가족도 없고 그저 라면이나 최저생활비 얻어가지고 라면이나 끓여먹으면 TV나 쳐다보고 있으면 그건 죽은 자지요. TV는 일방적으로 나한테 보여 지는 거잖아요. 내가 남한테 연락할 사람이 없으면 이 땅에 있으나 마나한 겁니다. 지연된 자살이지요. 자살한 이유가 아무도 내 사정 안 알아준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내 사정 알아주기 위해서 나는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지요.
그러면 왜 작은 교회 안가고 큰 교회 가느냐, 이용할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 여전도회 중에서 나하고 맞는 사람이 필히 있을 것이다. 어떤 정보, 생활의 정보, 어디 가면 피아노 레슨 어디가 잘 가르치고, 애들 과외 누가 잘하고, 이런 정보라든지 다 큰 딸이나 아들 시집보내고 장가 드리고 할 때에 또 장로님 다니는 회사에 믿음 좋다고 특채할 수도 있는 문제고 모든 가능성은 열어져 있거든요. 그게 뭐냐 자기 존재 증명이에요.
큰 교회 목사들이 사회적으로 자기 위신이 유명하다는 걸 가지고 광고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기독교 방송에 돈 내고 설교하는 이유가 우리 교회 소속된 자체가 이만큼 유명세를 떤다는 것이 자기가 아직도 살아갈 이유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증명이에요. 자기 존재 증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만큼 살기가 빡빡하다는 겁니다. 빡빡하니까 숨 좀 쉬자는 거예요.
지금까지 강의한 거 쉽게 하면 뭐냐, 빡빡하니까 나도 숨 좀 쉬자. 좀 알아둬. 뭘 알아주고? 나는 선과 악 사이에서 나는 선에 기울어져 있다. 이런 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 내잖아요.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뭐냐 하면 나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그런데 인간 대 인간들끼리 그렇게 인간이라고 우기지 나는 너희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니 어디를 봐서 인간이냐 말이지요. 흙이지. 잠시 인간의 모습을 띠지만 한 백년 살면 흙으로 환원되잖아요. 그러면 뭐 흙이지요. 바퀴벌레가 긁어먹어요. 결국 잠시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말이죠. 잠시 인간 모습하고 이렇게 예쁘게 있다 해서 하지만, 그 이쁜 것도 세월이 날아가 가지고 붙어가지고 뜯어내게 되면 온 전신이 안 아픈 데가 없고 전부가 점점 더 쇠퇴하고 소멸하지요. 내가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인간은 쇠퇴의 아이콘이라고. 쇠퇴하는 아이콘이에요. 쇠퇴가 뭐냐 인간들 보면 돼요.
쇠퇴할 때 그걸 본인이 아니까 자기가 젊을 때 생각하는 자기 존재는 대단한데 몸은 안 따라주니까 인간은 발악하는 겁니다. 발악하는데 60된 할아버지가 자기 아내한테 화냈다 해가지고 추징금해가지고 10년형 받았지요. 꾸준히 결혼생활하다가도 순간조로 잔소리한다고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평소에 뭡니까? 이거에요. 자기 존재 증명한 거예요. 그래서 이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심판은 뭐냐 스스로 알아서 심판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교회에 가만히 있으면 복음 몰라도 괜찮아요.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심판 중에 있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로마서3장에 나오지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니, 저주 아래 있는 게 그냥 가만히 있는 줄 알아요? 에어컨 아래 있다고 우리가 에어컨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찬 기운 나오잖아요. 저주의 기운이 온 땅에 추궁합니다. 애국가 고쳐야 돼요. 하나님이 계심으로서 동해바다 저주가 함께 하는 나라에요. 저주가.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걸 파스칼의 원리라고 했지요. 모든 면적이 압력은 동일하게 미친다고. 저주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도 성도의 몸도 이렇게 저주받아 죽잖아요. 얼마나 성도는 이게 굉장히 감사한 거예요. 내 몸으로도 처리 안 해도 주께서 알아서 처리해주니까 그것도 다행이다. 알아서 치매 걸리고 알아서 죽어가니까 그것도 다행이고. 점점 없어져가니까.
만화에 이런 게 있잖아요. 만화에 보면 실체가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뭔가 사막에서 온 피라미드의 기근이 오니까 피라미드의 미이라 기운이 오니까 이게 뜯기면서 모래로 변화는 게 있지요. 흩어지면서. 이게 모래로 변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60대 이상이 되면 거울을 잘 안 보려고 해요. 늘 실망이니까. 평소의 자아 이미지는 30대내지 40대 후반인데 막상 거울을 보면 안돼요. 거울을 보면 또 익숙해져가지고 견딜 만한데 특히 사진 찍으면 안 볼란다. 나, 안 볼란다. 차마 눈 뜨고 못 봅니다. 무슨 저런 귀신이 있나.
그러니까 자기가 착각에 빠지는 거예요. 귀신이면서도 아닌 척 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남자들 60되가지고 젊어 보이려고 청바지 입고 이렇게 깍둑이 머리해가지고 이리 하는데 아이고~ 저 주책. 나는 그렇게 해요. 제 아내 보면서 제발 TV에 60이상 나오지 말라고 그래요. 60이상 나오면 화면 다 버려요.
계속해서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말발을 설치는 이유가 어떤 경우라도 내 존재를 내가 스스로 못 버리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버리는 자체가 이게 벌 받는 중이에요. 벌 받는다고 손바닥 내. 매매! 이게 벌이 아니고 24시간 나를 못 잊는다는 게 나한테 형벌입니다. 저주에요. 좋은 일이 생겨도 이게 또 몇일 갈까? 이게 걱정되고 나쁜 일이 있으면 하필이면 이게 나에게 남들은 멀쩡한데 왜 이렇게 일어납니까? 모든 것이 나를 경유해서 그것을 다시 내가 그 의미를 쳐다보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게 이게 참 저주스러운 모습이지요.
주님께서 이러한 인간은 말을 해야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말은 해야 되고, 그럼 주님의 성도에게는 이렇게 내가 있는 한 절대로 내가 스스로 다행이다. 기쁨을 제공하지 못할 때에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다행이다와 기쁨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