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3 - 당당함
18,09,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00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6강. 허무와 율법과의 관계) 인간은 장래 일을 모르지요. 그러면 끊어진 겁니다.
너희는 장래의 일을 몰라 !!
우리 인간은 장래의 일을 모르는데, 이것은 전도서에 여러 번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보고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장래의 일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파악하게 될 때 하나님을 개입시켜서 파악하라는 겁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지 싶은데, "하나님이 오늘도 이렇게 살려주셨구나. 그래서 출근을 하게 하시고, 일을 시키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러분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그렇게 오늘 하루가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우리가 장래의 일을 모르기 때문인데, 하지만 그렇게 몰라도 우리가 하루 하루를 힘차게 살아가는 것은, 그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주님이 시킨 것이기에 마무리도 주님이 알아서 해주신다는 겁니다. 인생의 마무리까지도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인생의 마무리를 누가 합니까? 자기가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장래의 일을 모르면서도 "내 앞가림은 내가 한다" 라고 하는데, 모르는데 말이죠. 전도서에 분명히 모른다고 하는데, 그렇게 모르면 자기 앞가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서커스 단장과 원숭이 !!
그렇게 모를 때는 확실한 아는 분도 손을 잡고 살아야 하는데, 물론 우리가 잡는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 잡혀서 말이죠. 서커스 단장의 손에 이끌려 무대에 등장하는 원숭이를 생각해보세요. 단장은 크고 원숭이는 조그마한데, 그 걸어나오는 모습이 우스광스럽다는 겁니다. 혼자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반드시 단장에 손에 이끌려서 나온다는 말이죠.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다고 보자는 겁니다. 주님은 서커스 단장이고 우리는 원숭이라는 말이죠.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서커스는 원숭이가 좋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원숭이는 어디까지나 단장에게 돈을 버려다주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숭이가 자꾸만 아는 척을 하면 단장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장래의 일을 몰라. 이 모든 것은 헛된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전도서인데, 이 전도서는 구약에서 율법에 속하는데 말이죠. 율법의 끝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의 끝인데,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의 끝에 무엇을 준비해놓았는고 하니, 율법의 완성을 준비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인고 하니, 그 율법이 전도서인데, 그러면 전도서를 서커스 단장이라고 보자는 것이죠. 우리는 그 단장의 손에 잡힌 원숭이이고 말이죠.
악마, '혼자 살아라' !!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쥐고 있는데, 그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뱀, 즉 악마가 개입해서 뭐라고 합니까? "왜 붙잡혀서 사는가? 그냥 혼자 살아라" 라고 하는데, 악마는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악마가 그렇게 살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악마는 하나님과 별개의 존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일체 관여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그 심보를, 그것을 우리 인간 속에 그대로 집어넣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온다" 라는 것은, 들어온 그 악마의 마음을 두고 '죄'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악마의 마음이 우리 인간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라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자기가 지은 죄만 죄로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미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나쁜 것만 나쁜 것으로 알지, 선도 나쁘다는 것은 어떻게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말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서커스 단장과 원숭이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두고 죄라고 여기시는데, 그런데 그게 그냥 끊어진 것이 아니고 누가 개입을 했는데, 그게 누구입니까? 사탄이 와서 선악과로 유혹해서 끊어버리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인간은 계속해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할 존재인데, 즉 율법에 종속된 존재라는 말이죠.
그것을 제가 서커스 단장과 원숭이로 비유를 들었다는 겁니다. 원숭이는 계속해서 서커스 단장에 종속이 되는데, 원숭이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서커스 단장을 위해서 무대에 끌려나왔는데, 그게 바로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피조물은 그게 정상인데, 피조물은 피조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게 살려고 하면 교회가 아니고 팔공산의 갓바위에 가면 된다는 겁니다. 거기서는 신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말이죠. 교회에 나올 때는 자진해서 주님의 똘마니가 되겠다는, 그런 각오로 나왔다고 저는 생각하고 싶은데,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에 30년, 40년을 다닌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다시 정상의 자리, 종속의 자리, 즉 주님이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런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바로 네가 가는 곳이다" 라고 하셨다는 말이죠.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러니 지금 제가 저의 주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데, 천국은 천국의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자들이 간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어야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교인들이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하는 요소가 강렬한데, 저는 그게 참 답답하다는 말이죠.
잠시 퀴즈를 !!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물으면, 여기에 대해서 답변을 하시면 되는데, 정상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아니면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자기 잘났음을 자랑하면서 살아가고 싶은지를 말이죠. 물론 테스트라고 하기보다는 자기 점검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 번 해보자는 겁니다.
여러분, "나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한다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초반부터 어렵지요? 예수님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겁니다. 지금 천국이 코앞에 있다고 여기고 답변해주시면 좋겠는데, 천국은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불러주신다는 말이죠. "너는 내가 부른 자가 맞나? 그게 아니면 너는 너 자신이 알아서 왔나?" 라고, 주님을 그것을 측정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성경대로만 하시는데,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한 평생을 자기 잘났다고 여기면서 살아온, 그런 의인들은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대입을 시켜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 질문인데, 우리는 죄인이니 죄에 매여있는데, 만약에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한다면, 죄를 지었을 경우와 짓지 않았을 경우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악이고, 짓지 않았을 경우에는 악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한 죄인은 아니라는 말이죠. 온전한 죄인이 되려고 하면 죄에 매여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에 매여서 예수님에게 간다는 말이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장치 !!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실 때, 그냥 맨손으로 불러주십니까? 아니면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장치를 앞장세워서 불러주십니까?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장치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대신해서 우리 죄를 예수님의 의로 바꾸었다는 말이죠.
이것은 다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인데, 이렇게 될 때 주체가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된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죄가 주인이었는데 말이죠. 이것이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즉 "너희는 죄의 종이었다가, 이제는 의의 종, 혹은 주님의 종이 되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의 서커스 단장이 되고 우리는 원숭이가 되었다는 말이죠.
(롬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롬 6: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렇다면 이제 관객들은 "저 원숭이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원숭이의 주인이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보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주체는 '나'이어야 합니까? 따로 계신다는 겁니까? 따로 계셔야 하는데, 왜냐하면 천국은 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죠. 자기가 한 때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이제 혼자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런 경우는 성경에 없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는 자기가 전도하고 헌금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그런 법은 없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해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마 7: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것은, 주님이 완전히 장악한 자들인데, 즉 목자가 목자로서 양을 아는 것이지, 양이 목자를 골라잡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목자가 되어서 양을 붙잡게 되면, 그 양은 목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죠. 이미 무대에 원숭이가 있고, 그 원숭이는 주인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원숭이가 마음대로 활개를 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는 관객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말이죠. 그래서 원숭이가 설치지 못하도록 주인이 잡고 있는데,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전에는 내가 주체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주체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나는 원숭이다 !!
여러분은 여기까지 동의가 되지 싶은데, 이론적으로는 굉장히 쉽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제 실제상황으로 들어가게 되면, 지금까지의 이론에 의하면 자기가 주체가 아니고 주님이 주체인데, 그러면 "나는 원숭이다" 라는 겁니다. 완전히 진화론자가 된 기분인데(ㅋㅋ),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치자는 말이죠.
그러면 그 원숭이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들, 그 일어나는 사건들은 누가 제공한 겁니까? 모두 주님께서 하셨다는 겁니다. 부도가 나던지, 암에 걸리던지 해도, 그것은 모두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란 말이죠. 주님께서 해와 달과 별과, 그 모든 자연환경, 그리고 발걸음 하나 하나도 모두 주님이 조성했다는 겁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 갔을 때 풍랑이 일었는데,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이란 말이죠. 제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아서 그 입을 벌려 그 안에 있는 돈을 꺼내서 세금을 내게 한 것도, 그것도 주님이 하신 것이란 말이죠.
그리고 베드로를 보고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신 것도, 만약을 그것을 베드로가 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주체가 되는데, 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밖에 몰랐던 죄인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죄라는 자기 혼자 돗대로 사는 것이고, 의는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란 말이죠.
(눅 5: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눅 5: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러나, 실제로 적용하게 되면 !!
여러분, 참 쉽지요? 그런데 이것을 실제로 적용을 시켜보자는 겁니다. '믿씁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제가 여러분을 의심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저는 믿지만 우리가 서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한 번 해보자는 겁니다(ㅋㅋ).
자기는 교회에 다니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꾸만 다가와서 같이 죄를 짓자고 하면서 치근거린다는 겁니다. "나와 결혼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죠. 자기가 보니까 그것은 분명히 나쁜 짓인데, 그래서 "1번, 내가 강하게 거절한다", "2번, 내가 상대방이 기분이 나쁘지 않게 완곡하게 거절한다" 라고 한다면, 어느 쪽입니까? 둘 다 아닌데, 왜냐하면 '내가' 라는 것이 들어가기 때문에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까, "나는 주체가 아니고 오직 주님만이 주체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것을 "믿씁니다, 믿씁니다" 라고 했는데, 즉 "나는 신자이지 불신자가 아니다" 라고 장담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신자' 라는 것을 조사해보니까, 신자는 죄인인데 그런데 그 죄를 의로 바꾸어주는 주님이 함께 있다는 말이죠.
마치 서커스 단장이 원숭이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주님이 꼼짝도 하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는데, 그러니 모든 것은 주님이 다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어진 모든 상황은 자기가 원한 것이 결코 아니고, 주님께서 임의로 주셨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나'와 '주님'의 관계인데, 그런데 실상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간들을 만난다는 말이죠. 자기는 '나' 라는 주체는 없고 주님이 주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인간들을 만나면서 그 인간들이 질척거리고 건드리니까, 그만 누가 의식이 됩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고 하면서, '나' 라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강하게 안 된다고 하면서 거절을 하든지, 완곡하게 거절을 하든지 간에, 그 순간 '나' 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자기의 모든 행동은 결국 '나'를 깨끗하고 착하고 바르고 신자답게 지키는 쪽으로, 그렇게 모든 결정은 누가 내리는고 하니, 자기가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사라진 '나' 라는 주체를 또 다시 설득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역시 내가 최고다 !!
그게 과연 신자의 모습입니까?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세상에 나가서 "믿은 놈은 나밖에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자꾸만 집적대고 하니, "안 됩니다. 안 되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은 직장의 상사라고 하든지 말이죠.
추석 때 집안식구들이 모이고 하면, 모일 때만 해도 "나는 신자다.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라고 했는데, 그런데 친척들 가운데 꼭 어떤 사람이 있는고 하니, 대통령 어록이라고 하면서 적어와서 돌리고 하는 사람이 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최저생계비 문제가 나오고 하면, 분위기가 그만 이상해진다는 말이죠. 자기도 한 소리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없는 주체를 상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체를 거론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착하게, 선하게, 신자답게, 성도답게, 그런 식으로 "나는 내 힘으로 지킨다" 라고 하는 생각이, 그게 사라졌다고 여겼는데 불연 듯 다시 떠오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죠. 과연 신자가 맡느냐는 겁니다.
자기는 깨끗하고 조용히 살고 싶은데,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를 건드린다는 말이죠. 그러면 방어를 하든지 공격을 하든지, 뭔가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방어를 하는 것이 자기를 망치는 쪽이 아니고, 자기는 죄만 짓는 죄인이라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방금 "나는 천하의 죄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라고 해놓고는, 막상 행동으로 나설 때는 어떻게 나옵니까?
"이 나쁜 놈아, 니가 나에게 같이 죄를 짓자고 공모하는 일이 내가 말려들 것 같아? 나는 말려들지 않아. 너나 나쁜 짓을 해라. 나는 착하게 살래. 나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 거야" 라고 하는 자기의 본래 의도가 그대로 노출된다는 겁니다. 다들 그런 경험이 없다는 표정들인데 말이죠(ㅋㅋ).
쉽게 말해서 성경에서 주님이 "너는 죄인이야" 라고 헤도, 우리는 막상 이 세상에 나오게 되면, 그래서 대인관계를 맺게 되면, 그들과는 자기는 죄인이라고 하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럴 의사가 없다는 말이죠. "주님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흉악한 죄를 지을 수가 있는가? 너나 지어라. 나는 지을 수 없다" 라는 앞서서 튀어나울 때,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그만 다 날아가고 만다는 겁니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하필이면 그런 경우를 예로 드십니까?" 라고 하는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아무리 보고 믿는다고 해도 진정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방식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을 말이죠. 성경에서 믿을 것만 자꾸 자기에게 덮어씌우면, 그것이 자기 것이 된다고 여기는데, 하지만 성경말씀은 송곳과도 같아서, 옷처럼 겉에 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를 파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파고 들어오는데, 그래서 성도라고 하면 반드시 복음이 나와야지,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안에 자기 잘남이 들어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믿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막상 건드리니 '최저임금'이 튀어나오고 하면, 그것은 "너보다 내가 낫다" 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게 교회뿐만이 아니라 집안문제도 그렇고, 매사가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제부터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유는 성경말씀이 우리 속까지 파고 들어와야 하는데, 바깥에서 웅웅거리면서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 좋은 예가 성경에 당연히 있는데, 성경말씀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교재 103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사울 왕은 엔돌 지방에 거주하는 신접한 여인을 찾게 됩니다.
(삼상 28:1)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삼상 28:2)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삼상 28:3)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 (삼상 28:4)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 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 쳤더니 (삼상 28:5)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삼상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삼상 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무당을 찾아간 사울 왕 !!
지금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 즉 무당을 찾는데, 그런데 사울 왕은 그 이전에 이미 이 여인을 어떻게 했습니까? 내쫓았다는 겁니다. 이론적으로 그런 여자는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믿음이 있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당연한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론적으로 잘 수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렇게 여인을 쫓아낼 때 사울 왕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미처 알지를 못했는데, 즉 신접한 여인과 자기가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을, 자기도 그 여인과 똑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물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중들이나 갓바위에 가는 사람들을 보고 "에이, 지옥에 갈 놈들아!" 라고 한다면, 그때는 자기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자기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저 중들과는 다를 것이라 여기는 그 상상력, 그 오류를 이 성경말씀이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교재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사울 왕이 어떻게 이 여인을 찾게 되었는지, 그 정신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이스라엘의 권력은 인간을 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단이 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언약이 쥐고 있습니다.
감사함과 고마움인가? 두려움과 공포인가?
여기에 언약을 언급하고 있는데, 사울 왕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이 신접한 여인을 쫓아내면서, 그때 자기는 착하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면서 그 여인을 쫓아낼 때, 그것은 자기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했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제가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이 언약이 서커스 단장이라고 하면 사울 왕은 원숭이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이 사실을 사울 왕은 이론적으로 아는데, 즉 "나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순종해야 하는 책임자로 있다" 라는 것을 말이죠.
이런 결정도 주님이 시켜서 했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주님이 시킨 일이 아니라고 하면, 사람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주님이 시킨 일인지 아닌지, 그것을 악마가 먼저 안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결정한 일은 항상 두려움과 공포를 유발시키게 되는데, 우리 인간 그런 절정을 하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결정한 것이 잘 되어야 하는데, 또 하나님이 삐딱선을 타게 하면 안 되는데, 좀 더 열심히 기도할까?"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자기가 결정을 해놓고는, 그야말로 걱정과 염려를 혼자서 다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킨 일은 어떻습니까? 항상 감사함과 고마움이 나오게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결정한 것은 그게 아니고, 두려움과 공포가 나온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치근거려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게 주님의 결정이라고 하면 감사함과 고마움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저 사람이 나에게 참 잘해주었는데, 그런데 내가 이번에 안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삐치면 어떻게 하지? 앞으로 어떻게 얼굴을 보지?" 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바로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온 것이란 말이죠.
추석이 되어서 자식들이 찾아왔는데, 그러면 오후 5시가 되면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오늘은 자고 가겠습니다" 라고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서로 쿡쿡 찌르면서 말을 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보통 남자가 "야야, 처갓집도 가야지" 라고 하면서 밀어낸다는 겁니다(ㅋㅋ).
아들과 며느리는 큰마음을 먹고 자고 가기로 했는데, 그런데 부모가 되어서 당일에 그냥 돌려보내 버리는데, 그러면 그렇게 결정을 자기들이 해놓고, 그 결정에 무엇이 따릅니까? 두려움과 공포가 찾아온다는 겁니다. "오랜만에 와서 자고 가려고 하는데, 부모가 되어서 그렇게 싸늘하게 나올 줄 몰랐다. 다시는 오는가 봐라. 용돈도 이제 없다" 라고 하면서 보복이 들어올까 싶어서 말이죠.
그러니 감사함과 고마움이 아니라, 자기가 결정을 해놓으니 두려움과 공포가 끌어안게 된다는 겁니다. 아직도 자기가 주체인데, 자기가 결정했다는 말이죠. 어떤 결정을 했는데, 그게 주님의 일이라고 하면 감사와 고마움이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존재가 자랑스러워야 !!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고 하니, 주께서 성령으로 시킬 때까지 자기는 보류를 해야하는데, 이게 참 어려운데 말이죠.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 서커스 단장이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주체가 되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그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이것은 나쁜 짓입니다" 라고 하면서 고함을 쳐도 괜찮다는 겁니다.
주님이 결정을 하게 되면,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야 한다는 말이죠.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주님이 자기를 죽인다고 하면, 그 죽음조차도 자랑스러워야 한다는 것이죠. 집안에 무슨 결정을 하더라도, "내가 이런 결정을 다하다니?" 라고 하면서, 그것이 자랑스러워야 한다는 겁니다.
둘째가 나이가 35살인데, 아직 장가도 가지 않고 직장도 없어서 알바나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해외여행를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백만원을 모았는데 50만원이 모자란다고 하면, 도와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을 엄마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했는데 아버지가 듣고 50만원을 보태준다는 겁니다.
그렇게 그렇게 해놓고 "저 놈이 다음에는 백만원을 달라고 하지 않을까?" 라고 하게 된다면, 그런 걱정이 든다는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아니고, 아들이 50만원만 달라고 했어도 백만원을 주고도, 그게 자랑스러워야, 즉 고맙고 감사해야 그게 주의 일이라는 말이죠. 돈이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놓고는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하면서, 깊은 연대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은 무엇인고 하니, 항상 주님이 자기를 무시하는 쪽으로 사태를 일으킬 때, "주여, 저는 무시를 당해도 당연합니다. 제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것, 그게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오후시간에 "자발적으로 등신이 되세요" 라고 했는데, 너무 따지게 되면 자기가 너무 똑똑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해관계를 너무 예민하게 가져가게 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치근대는 사람을 잘랐을 때,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워야하고, 주께 감사해야하고, 고마워해야 한다는 겁니다. 후한이 두렵고, 앞으로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것이 두렵고 신경이 쓰인다고 하면, 아예 그런 결정차제를 하지 말라는 것이죠.
후회 없는 삶 !!
신앙은 이론이 아닌데, 하나님은 그런 이론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제생활에 있어서 "주님, 모든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니, 저는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후회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장래를 우리는 모르는데, 몰라서 서커스 단장의 손에 잡힌 것인데, 율법의 완성이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며느리와 자식이 와서는 자고 가겠다고 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천국에 가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부모가 자식에 관한 일에 결정을 내릴 때, 자식은 부모에게서 그런 것을 배운다는 겁니다. 유산을 남겨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니고 말이죠.
돈을 백만원 주고도 벌벌 떨고 하면, 자식은 돈을 받고 나서도 기분이 나쁜데, 그러니 자식에게 돈을 불 생각을 하지말고, 자신 만만하게 자랑스러워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의 모습, 그게 바로 인생을 제대로 살아가는 대범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결정에 의해서 살아가는 말이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줄로 아는데, 무엇을 결정할 때 주저한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인데, 그게 바로 "믿을 것은 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이론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소리를 더 잘 하면서 큰소리를 치는데 말이죠.
무당을 찾아간 사울 왕 !!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지금 사울 왕은 벌벌 떨고 있는데, 그래서 무당을 찾아오는데, 하지만 언약에 의하면 무당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정신적으로 이미 무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그래서 무당을 찾아갔다는 말이죠. 세속을 싫어하는 척을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신자이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이죠. "나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술과 담배는 가까이 하지 않는다" 라고 하면서도, 돌아서면 "아, 땡기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신자인 척을 한답시고 다 끊어놓고는, 돌아서서 엄청 그리워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사무엘을 불러내어서 사울 왕을 책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울 왕은 신접한 여인과 똑같은 신세로서, 그러니 이것은 둘 다 언약 바깥으로 추방되어있음을 말해주는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자기와 똑같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되었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 104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미 죽어서 떠나버린 사무엘 선지자와의 연결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만 가능했다는 말은,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도 역시 언약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였음을 말해줍니다.
너는 내 쪽이 아니다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울 왕에 있어서 사무엘 선지자는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나타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설명이 더 어렵습니까? 사울 왕에게는 사무엘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그에게는 사무엘을 만난 것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무엘에게 "너는 내 쪽이 아니야" 라는 지적을 받는다는 말이죠.
중요해서 한 번 적어보겠는데, 선지자가 사울에게 지적하는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너는 내 쪽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이게 바로 저주라는 겁니다. 천국에 있는 사람이 지옥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것뿐인데, 그래서 아브라함이 천국에서 나사로와 함께 있으면서 부자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니 쪽과 내 쪽은 자리가 다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명절에 자식놈이 와서 싫은 소리를 할 때, "너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라고 나와야 하는데, 물론 말로만 그렇게 하지말고 다르다고 하는 그 당당함을, 오늘 강의제목은 '당당함'이 좋겠는데 말이죠. 그 대상이 자식이든 그 누구이든 간에 성도라고 하면 그런 모습, 즉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어떤 일이 있어도, 35살이 되어서 취직을 못한 자식이 있어도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조차도 자기의 주체가 되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기에, 거기에 당당하게 동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제 아들놈, 취직을 좀 시켜주세요" 라고 하지말고, 그것은 분리를 했다고 하면서 그리워하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자기 아들이 잘 되어서 남들에게 자랑질을 하고 싶은, 그러한 그림이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신기한 것들과의 접촉이 결코 인간의 가치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소속을 확연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천국에 갔다가 왔다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물론 다 가까지만 설령 진짜라고 할지라도, 그런 신기한 것들과의 접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나는 그게 부러워. 그렇게 살고 싶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 쪽 소속이 아니고 세상 쪽이라는 말이죠.
이 세상에는 서커스 단장이 없는데, 이미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알아서 산다는 겁니다. "나는 착하다. 나는 나쁜 짓을 가능한 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귀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그것을 자기 행함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원숭이인데, 율법의 완성에 의하면 우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이 손을 잡아주어서, 그분이 십자가를 지신 덕분에, 그래서 우리는 당당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당당함을 주님의 공로로 돌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 정도로 종속이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아까 낸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않았는데, 물론 해답은 이미 나왔지남 말이죠. 어떤 사람이 치근댄다고 하면, "같이 놀자"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해도 안 되고, 완곡하게 거절해도 안 되고,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때는 자기 결정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의 결정이 아니라 주님의 결정이라고 여기고 당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는 당신이 없어도, 나는 주님만 있어도 삽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그 당당함으로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내가 당신에게 도움을 입은 것은 맞지만, 그것은 주님이 그렇게 하신 문제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빚을 갚는다든지, 예의를 차리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상당히 배은망덕하고 버릇이 없는데,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성도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무의미해 !!
그래서 주일 낮 시간 마지막에 "인간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무의미합니다" 라고 했는데, 그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잘나고 착한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의미는 오직 주님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자유인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당당하고 거침이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막 산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어떤 결정을 해도 잘난 것이 아닌데, 강하게 거절을 하든 완곡하게 거절을 하든 간에,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결정이 자기 결정이 아니라 주님의 결정임을 당당하게 내보일 때,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말이죠. 성도라고 하면 그런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온갖 예를 다 차리고, 그러면서 "내가 너무 차렸나?" 라고 하면서 고민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앞으로 그 사람을 어떻게 보지?" 라고 하는데, 주님이 만나게 해주면 만나고 그렇게 않으면 만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 왜 자꾸만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 인생도 아닌데 말이죠.
과연 여러분은 삶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바로 죄악의 삶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다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하지말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울 왕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이제 교재 10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다윗언약의 진수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왕을 통해서 드러나는 '저주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다윗언약은 결코 '다윗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닌데, '다윗언약의 나라'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다윗언약의 나라'의 특징은 주체가 없다는 것인데, 우리는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허무한 존재라는 겁니다. 아니 허무한 존재가 무슨 나라를 만듭니까? 그러니 우리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의 나라라는 말이죠. 그러니 '나'가 거기에 있으면 안 되고, '나'와 함께 하신 분이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 라고 하면 그게 바로 주체인데, 쉽게 말해서 "내가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라는 겁니다. 자기는 허무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전도서를 공부하고 있는데 말이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하는 것이 누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장래의 일을 모르니 말이죠.
헛된 인간의 헛되지 않으려고 자기 나라를 생각하면 안 되는데, 우리보고 헛되다고 이야기하신 그분의 나라에 우리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인데, 과연 어느 쪽이 당당합니까? 한 쪽은 그야말로 당당한데,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면 우리는 당당한 척을 할 수밖에 없는데, 어느 쪽이 당당한 것이고, 어느 쪽이 당당한 척을 하느냐는 겁니다.
룸살롱과 교회 !!
당당한 척을 하는 삶을 살면 그야말로 피곤한데, 바깥에서는 허세를 부리지만 집에만 오면 그야말로 쪼그라들고 만다는 것이죠. 남자들이 가는 곳 중에서 '룸살롱' 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물론 저는 아직까지 가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거기에는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수표를 마구 던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돈을 뿌리지 말고 진라면을 뿌려보라는 말이죠. 5개가 든 세트 하나를 2,500원이면 사는데, 그러니 10만원이면 진라면을 무려 250개 뿌릴 수 있다는 겁니다. 돈이 종이로 되어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데, 그게 라면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아까우냐는 말이죠. 집에 와서는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모르고, 거기서는 술에 취해서 마구 날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룸살롱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헌금도 마찬가지인데, 어느 교회에 젊은 부부가 자기들도 빚이 있으면서 1억을 헌금했다고 하는데, 그게 10년도 더 되었는데, 지금도 그 가족들이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벌어서 내가 내는데, 니가 왜?" 라고 할지 몰라도,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의 주체는 혼자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식구들이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자아는 말이죠. 장례식 때 사람들이 왜 찾아옵니까?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온다는 것이죠. 교회의 보이스피싱에 걸러서 그만 거액을 날렸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데, 하지만 그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또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싶어서 말이죠.
물론 교회의 목사는 입이 찢어지는데, 물론 헌금이 목사의 돈은 아니지만, 그렇게 헌금을 많이 우려내는 목사는, 그게 정년동안 그 교회에 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헌금하는 것 자체를 좋아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 정도로 능력이 있는 목사니까, 장로들아 나를 쫓아내지 마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목사의 수법을 제대로 알아야 대처를 잘 하는데, 거기에 비하면 장로들은 아직도 순진하다는 말이죠. 장로들은 그것도 모르고 "이번에 온 목사는 재주가 있네"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교회에 있어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목사는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닌데, 물론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믿음이 없으니 목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 헌금할 돈이 있으면 맛있는 것을 사 드세요" 라고 40년 전부터 외쳤는데, 그러면 헌금을 하지 않으면 임대료도 내지 못하고 교회가 유지되면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집에서 모이면 된다는 겁니다. 교회는 없어지라고 있는 것인데, 말씀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천국이 다윗의 나라가 아니듯이 교회는 목사의 나라가 아닌데, 주님의 나라라는 겁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주님의 말씀만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죠. 그 말씀으로 인해서, 과거에는 자기가 스스로 당당한 척을 했다가,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에게 붙잡힘 바가 되어서, 그 자체로 자기가 좀 허접해도 당당한 것, 그게 이미 천국에 도착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사울은 왜 다윗을 핍박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다윗의 존재 자체가 사울 왕의 자리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남들이 보기에는 신앙이 있는 척을 했는데, 무당까지 쫓아내고 하면서 말이죠. 물론 나중에는 자기 발로 찾아갔지만 말이죠. 그런데 그 모든 행위가 결국 누가 좋아라고 한 것입니까? 자기 좋아라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사울에게 과연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렇지 않느냐는 말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주님 좋아라고 믿습니까? 아니면 자기 좋아라고 믿습니까? 우리는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 좋아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신자라고 해도 그것을 알기는 아는데, 하지만 불신자와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그게 죄임을 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 힘으로는 고칠 수가 없는데, 안 된다는 말이죠. "나는 나 밖에 모른다" 라는 것을 고칠 수 없는데, 그러니 주제파악을 하면서, 주님이 우리 대신에 주인공이 되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당당하고 자신만만하게 살면 된다는 겁니다.
끝까지 못난이 !!
그러니 "내가 잘났다. 내 결정이 옳았다" 라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자기가 결정해놓고 떨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결정해도 엉터리인데, 우리는 못난이라는 말이죠. 그것도 끝까지 못난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을 증거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못났으니, 그 못난 모습을 증거하면 된다는 것이죠.
세리가 예수님에게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고 천국에 갔는데, 반면에 바리새인은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고 잘났습니다" 라고 하다가 그만 지옥에 갔다는 말이죠. 그것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온다는 겁니다. 요즘 성경구절을 이야기하기가 겁이 나는데, 너무나 많이 틀려서 말이죠.
이번에는 누가복음 18장이 맞지요? 아무리 성경구절이 틀리고 해도, 당당하게 설교와 강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ㅋㅋ), 그러면 왜 여기에 바리새인과 세리가 등장합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세리와 같지 않고 착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잘라내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그래서 사울 왕은 다윗을 핍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 라는 원리입니다.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 !!
이게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닌데, 우리의 매일같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을 욕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데, 언약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날마다 들추어낸다는 말이죠. 즉 우리는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 라고 하고, 주님은 "그래서 니가 죄인이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나는 착하다. 나는 훌륭하다" 라고 하면 타인이 와서 건드리는데, 그러면 우리는 자기의 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하게 하던 완곡하게 하던 거부를 하는데, "사탄아 물러거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해가면서 말이죠.
시험이란?
성경에 보면 '시험한다' 라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 시험은 마귀가 하는데 말이죠. 그것이 마귀의 임무라는 겁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시험하는 분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런데 막상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하신다는 겁니다.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인데, 욥도 있고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시험을 하신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있는 곳이 이 지상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상은 마귀에게 속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시험한다는 것은 곧 마귀를 시험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고 있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란 말이죠.
시험은 '덫'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하지만 성경에서는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덫은, 자기가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고 의인이 되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시험이라는 말이죠. 자기를 나쁜 놈으로 만들기 위해서 마귀가 덫을 놓은 것이 아니라, 마귀는 "천하에 너보다 더 착한 사람은 없다" 라는 쪽으로 덫에 빠지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하에 제일 착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만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는데, 그러니 언제나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겁니다. 걸림돌에서 말이죠. 여러분도 다른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 있지 싶은데, 그들이 여러분에 무슨 말을 합니까? "니가 알고 있는 것이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너무 막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교회는 그만 다녀라"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친구들은 이제 다 정리하고 없습니까?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이 정도는 갖추어야지, 그렇게 너무 나가면 짐승과 뭐가 다를 게 있어?" 라고 하면서, 설득력이 있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그렇게 듣다가 보면 동의가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복음을 10년, 20년을 들어도 그동안 숨기고 있던 본색이 다 드러나고 만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남들은 악해도 나는 착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죽을 때까지 자기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말이죠. 사람들이 "세상은 악하다" 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비록 이 세상은 악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겠다" 라는 것인데, 즉 "나는 함께 악하지는 않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은 망해도 자기는 결코 망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 자기를 따로 독립시켜 놓는다는 말이죠. 똑같은 조폭이라고 해도, 나쁜 조폭이 있고 착한 조폭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마귀의 덫에 빠진 것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언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울에 의해서 저질러진 다윗 핍박은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으면 그렇게 하게 될 정당방위입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자기 존재부터 챙기게 되어있습니다.
성인군자도, 자기 존재부터 !!
우리 인간은 아무리 성인군자라고 해도 자기 존재부터 챙기게 되어있는데, 바로 이것을 마귀가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에 우리 인간에게 눈물로서 호소를 하는데, 충성어린 조언을 한다는 것이죠. "니가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노?"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겁을 낸다는 겁니다.
'인습' 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데, 몸에 베여있는 것이 말이죠. 아까 우리 몸에 말씀이 새겨진다고 했는데, 이미 안개처럼 우리에게 축축하게 스며들어와 있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 라는 것인데, 그리고 이제 선과 악을 알았으니 악한 쪽이 아니라 선한 쪽으로 간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오히려 더 생생해지는데, 나이가 들면 들수록 말이죠. 그러니 어느 인간이 이것을 마다할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내가 착하게 잘 살았으니까, 우리 집안이 이 정도라도 되었다" 라는 것인데, 만약 자기가 악하게 살았다고 하면 집안이 옛날에 이미 박살났다는 겁니다.
명절에 자식들을 모아놓고서 하는 소리가 바로 이것인데, 그러면 자식들이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 저희들이 한 두 번을 듣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양쪽이 다 덫에 빠진 대화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화가 되어야 합니까? 아버지가 "내가 이만큼 고생해서 너희들을 키웠다" 라고 하면, 자식들은 "그러니 아버지는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신자가 아닙니다" 라고, 그렇게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아버지는 "너희가 아니면 누가 나의 본심을 알려주겠는가?" 라고 하게 되고 말이죠.
이렇게 되면 드디어 덫에서 빠져나왔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데, 인간은 자기의 착함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준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방금 이야기한 "내 밥그릇은 내가 지킨다" 라고 하는, 그런 모습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부교역자가 교인들에게 인기가 많으면 당회장은 조용히 부교역자를 불러서 퇴출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 밥그릇에 개가 와서 핥아대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당회장 자리는 자기 밥그릇인데, 즉 자기 노후대책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부교역자가 자기보다 인기가 있고 설교를 잘한다고 하면, 물론 당회장 목사 앞에서는 교인들이 그런 소리를 하지 않겠지만 말이죠.
아무튼 "부목사님이 우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면 지금보다도 더 부흥이 되었겠다" 라는 소리가 교인들 사이에서 오고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얼마나 말이 많은 곳인지 모르는데, 그러면 결국은 당회장 목사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부목사를 불러서 "이제 계약이 만료되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쫓아내어 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집안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자기 아들보다 며느리가 괜찮아 보여도, 물론 그것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 것은 괜찮은데, 동네 미장원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다든지 하면 참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은 '나' 라는 존재를 떠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나'를 배신할 수 있어야 !!
그래서 어제 낮 시간에 "나와 헤어지세요" 라고 했는데, 자기를 배신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와 대화를 하면 안 되는데, 주님과 해야한다는 말이죠. 자기와 대화를 하니, 결정을 해놓고도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게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당방위' 라는 것인데, 그러니 당회장은 부교역자를 쫓아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자기 범위를 침범했으니 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자기를 공격했으니 방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교재를 보겠습니다.
** 다윗언약의 형식은, 핍박을 받고 설움을 당하고 억눌린 모습으로 오는 인물로 보여줍니다.
고통, 희생, 핍박, 그리고 죽음 !!
이게 오늘 강의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윗언약으로 오신 분은 우리 속에 무엇을 집어넣는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신령하고 영적인 것을 넣는 것이 아닌데, 즉 자기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것을 넣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인데, 핍박을 받고 설움을 당하고 억눌린 모습으로 오는 인물 보여준다는 겁니다. 고통, 희생, 핍박, 그리고 죽음, 이런 것을 우리 속에 집어넣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들떠서 대다한 것처럼 여기는데, 그런 우리에게 주님의 고통과 희생과 핍박과 죽음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 맞지만, 그러나 현실에 접속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과 상대할 때는 '나' 라는 주체가 없는데, 즉 죄인인데, 그런데 이 세상에 나가서 남들과 상대할 때는 없는 주체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렇게 없는 주체가 생기면서 "너보다는 내가 낫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죄에 빠져서 지옥에 가라, 나는 천국에 갈란다" 라고 하는 자기 주체의 의로움이라고 하는 덫에 또다시 빠지고 만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낸 것은 주님인데, 즉 우리가 이론상 믿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믿는 것인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죠.
죄인의 당당함 !!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가 결정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없는 '나'를 끄집어내서 결정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것은 죄가 드러나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당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죄인을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나쁜 일이냐는 말이죠.
주님께서 "나는 죄인을 구원하려고 왔다. 너는 죄인이지?" 라고 하면, 우리는 "예,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려고 왔는데, 그래서 의사가 "당신은 환자입니다" 라고 하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 어떻게 열을 받고 속상한 일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죠.
병원에 의사가 왜 있습니까? 환자를 고치기 위해서 있는데, 그렇다면 주님은 왜 있습니까?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고 하면 주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돗대로 살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죠. 그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이제는 좀 자유롭고, 자기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한은 북한을 손댈 자격이 없어 !!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짓을 보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이야기인데, 북한에 대해서 그냥 좀 두라는 겁니다. 왜 정치인들이 손을 댑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말이죠. 남한이 북한보다 좀 잘산다고 하면서 도와주자고 하는데, 우리가 그들보다 잘 살면 얼마나 잘 삽니까? 설령 좀 잘 살아도 겸손하게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이산가족들이 만나고 하는데, 물론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하지만 만나게 되면 결국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돈 때문에 만난 사람들도 모두 헤어지는 판국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죠. 물론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닌데, 오히려 재수가 없어서 오래 산다는 겁니다. 효자를 만나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데, 죽으려고 하면 병원에 입원시켜서 링거를 꼽아서 놓아주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불효자를 만나서 "빨리 보내자" 라고 할 때, 그게 복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주님을 죽인 곳인데, 지옥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오래 살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대충 살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성도에게 주어진 당당함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자식과 만나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아버지, 왜 벌써 가려고 합니까? - 나는 죄인이야. - 왜 죄인입니까? - 너 같은 자식을 낳았으니 죄인이지" 라고 하는,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영적인 문제만 !!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자식을 낳았으니, 그러한 인간이 자기 몸에서 나왔으니, 그러니 그게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말이죠. 그래서 자식과는 돈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적인 것을 말이죠.
마찬가지로 북한의 경우에도, 영적인 이야기는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돈 문제로는 이야기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 돈 때문에 결국는 북한을 다 버려놓는다는 말이죠. 우리 남한이 과연 북한보다 낫습니까? 오히려 더 엉망이 아닙니까? 중국을 한 번 보세요. 완전히 개판이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바로 돈, 즉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요즘 중국에 있던 지하교회들이 없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게 자본주의가 들어와서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교회가 없어도 돈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자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돈을 가지고 후원하든지, 물론 여러분은 돈이 없어서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자식들이 돈을 잘 번다고 해서 잘 한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영적인 존재인데, 보이지 않는 서커스 단장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우리 좋아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주님 좋아라고 태어났는데, 물론 이것이 이론상으로 믿기 어렵지 않는데, 그런데 막상 이 세상에 나가서 부딪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역시 자기 자랑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잘 되었다" 라고 말이죠.
다시 사무엘상 28장으로 !!
다시 교재 102페이지로 돌아가겠는데, 거기에 보면 사무엘상 28장이 나오는데, 사울 왕이 무당을 찾아간다는 겁니다. 사울 왕이 그 이전에는 에봇을 입은 제사장을 찾아갔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제사장이 아니라 무당을 찾아간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봇은 일종의 복장이 아닌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는 자리, 즉 언약의 지시가 있는 자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그게 아니라, "저것이 나에게 필요할까? 이것이 나에게 필요할까?" 라고 하면서, 자기 위주로, 즉 '인간 대 인간'의 만남으로만 여겼다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의 교인들은 주님이 보내신 자들인데, 아무리 숫자가 적어도 말이죠. "내가 너의 사정을 다 아는데, 니가 왜?" 라고 하지말고, "주님이 보내셨다" 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왜 보내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공임을, 그것을 새롭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보셨다는 겁니다.
사울 왕이 이전에 제사장을 찾아갔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기도 신앙이 있다는 것을, 즉 신앙인인 척을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본성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음에는 무당을 찾아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권력을 쥐는 것인데, 즉 자기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란 말이죠.
다시 말해서, "역시 사울 왕은 훌륭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라고,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래서 결국 무당을 찾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함부로 욕을 할 수 없다고 했는데, 우리도 예수님을 찾기는 찾지만, 정작 찾고 싶은 것은 무엇인고 하니, 우리 자신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 그런 무당을 찾고 싶다는 겁니다.
자기 소원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최고야. 역시 잘났어" 라고 하는 것인데, 그런 소리가 듣고 싶다는 말이죠. 하지만 이렇게 되면 십자가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즉 희생, 고통, 아픔, 죽음, 그런 것과는 그만 이별을 한 셈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 이별을 하고 말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그 피 묻은 손, 못 자국이 있는 아픈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신다는 말이죠.
집안에서 누가 아프면 마음이 아프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집안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은 늘 겸손해야하고 겸비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지, 작다고 해서 토라지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야들아,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라 !!
디모데전서 6장에 보면,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라고 하는데, 이것을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면 어떻겠습니까? 물론 저의 제안인데, 이번 추석 때 자식들을 만나게 되면 이 말씀을 남겨주시면 좋겠다는 겁니다.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물론 그렇게 하면 자식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아빠는 놀러갈 것은 다 가보고, 쓸 것은 다 쓰고, 명품을 사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삐치고 하면서, 그런데 우리보고는?" 라고 나올 텐데, 그러면 준비된 멘트가 있지요? "그러니 내가 죄인이지"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 자식들이 "나도 죄인이니 아빠처럼 마음대로 놀러 다니고, 쓸 것도 쓰고, 또한 명품도 챙기고 싶어" 라고 나올 수도 있는데 말이죠. 물론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대화가 오고 가면서 그 마음 속에는 말씀이 새겨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야말로 시시한 인간들인데, 그런데 진실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아야 하는 존재들인데, 아니 입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데,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희생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희생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욕심이 문제였고 화근이었습니다. 좀 잘산다고 하면서 남을 도와주고 어쩌고 하는데, 그런 허세 덩어리, 잘남 덩어리, 평생을 가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으로 지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 자들이 천국에 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인 줄로 아오니, 그런 주님만 자랑하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9,27 오후 6시에 마침.
악어들아, 아버지는 죄인이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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