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강의

보호본능 1808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15. 18:40
2018-08-12 00:23:10조회 : 3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0 - 보호본능이름 : 구득영 (IP:203.223.97.179)
[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0 - 보호본능

18,08,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4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사무엘상 5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렇게 빼앗았으니까 이미 소유한 것이죠. 그러면 언약궤의 소유권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는데, 그 언약궤를 다곤 신상이 있는 신전에 두었다는 겁니다. 

(삼상 5:1)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삼상 5:2)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빼앗간 언약궤, 그러나 !!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아 갔는데, 그러면 이 언약궤가 단독으로 있는지, 아니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을 지어서 있는지, 그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다고 하면, 그러면 언약궤는 자기 백성들과 헤어져서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여기에 컴퓨터가 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만질 수 있는 기술자가 전혀 없다고 하면, 그 컴퓨터는 그만 무용지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컴퓨터는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기술자와 함께 한 조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언약궤도 과연 컴퓨터처럼 기술자와 한 조를, 즉 이스라엘과 한 조를 이루고 있느냐는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당연히 언약궤가 자기들을 위한 언약궤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자기들 이스라엘이 빠지게 되면 언약궤는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나무상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무엘상 5장을 보면,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는데,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아서 어떻게 분해하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이 신상이 있는 곳에 가만히 두었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아침에 보니, 다곤 신상의 모가지라는 모가지는 모두 다 부러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신상을 누가 건드렸습니까? 튼튼하게 잘 만든 신상인데 말이죠. 

(삼상 5:3)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삼상 5:4)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움직이는 물체 !!

원래 움직임이란 것은 인간만이 하는 것인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나무상자가 아니고 두뇌를 가진 인간이란 말이죠. 그러니 누가 "친다, 팬다, 부순다" 라고 하면, 그것은 인간이 설치는 영역에서만 해당이 되고, 또한 그 영역에서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형사가 범죄현장에 갔는데,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엉망인데, 그런데 범인이 들어온 흔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미제의 사건이 되고 마는데, 왜냐하면 흩어져 있고 부셔져 있고 하는 그 모든 것은 사람이 했다고 보니 말이죠. 

만약에 아무도 없는데 불이 났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미제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아무도 없이 불이 날 수는 없는데, 물론 요즘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자연발화가 되기도 한다는데 말이죠. 그래도 범인이 있기는 있는데, 햇빛이 바로 범인이라는 겁니다(ㅋㅋ). 

이슬람의 전설에 보면 마호멧트의 시체가 공중을 날아다녔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게 자석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는 겁니다. 과학이 발달하게 되면, 인간만이 힘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자연, 인격이 없는 말이죠.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모두가 죽었다고 여긴 그 죽음의 물체가 힘을 발휘한 사례는 몇 가지가 있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지구 !!

여러분, 지구가 움직입니까? 물론 움직이는데, 누가 움직이게 합니까?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뉴턴은 밝혀내었는데, 그것을 관성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처음에 떨어져 나오면서 돌던 그 관성으로 인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돌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혼자 도는 것이 아니고 같이 도는데, 그것을 '만유인력'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태양에서 나오는 좋지 않는 광선은 지구가 어떻게 막아내는고 하니,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인데, 그래서 강력한 자기장으로 막아내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지구의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겁니다. 지구는 외핵과 내핵으로 되어있는데, 내핵에서 액체로 된 뜨거운 금속이 위와 아래로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거기서 자장이 발생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패러데이의 법칙' 이라고 하는데, 전자의 움직임이 자장을 발생시킨다는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더 나아가서, 도대체 자석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기에 힘을 발휘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무슨 말인고 하니, "죽어있는 물체가 왜 움직이는가?" 라는 것이죠. 자석 안에 움직이는 것이 있는데, 그 움직임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소립자'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소립자는 움직이게 하는 것은 '광자(플로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전자가 이렇게 있고 핵이 있다고 하면, 서로 왔다갔다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소립자라고 하고, 그게 광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광자는 전기와 자기학을 형성시키는 요소가 된다는 말이죠. 이게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17가지 표준모델인데, 아무튼 이런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물체는 죽어있지만, 사실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입자가 움직이는 힘을 '에너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현대 물리학에서는 "이 세상은 에너지 덩어리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에너지 종류 중에서 눈물이나 기쁨이나 사랑과 같은 것이 있을까요? 없는데,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같은 것을 현대 물리학에서는 에너지 움직임의 효과라고 한다는 겁니다. 제일이 사랑이든 믿음이든 간에 말이죠. 

그렇다면 그 의미를 그대로 사무엘상 5장으로 가지고 오면, 그때 다곤신상은 서 있었는데, 그리고 그 앞에 마치 막 시집을 온 새색시처럼 언약궤를 다소곳이 두었는데, 그리고 거기에 CCTV를 설치해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새벽 2시 4o분에 다곤신상이 쓰러지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는데, 그런데 외부의 침입은 전혀 없었다는 말이죠. 즉 생명이 없는 두 물체가 마주보고 있는데, 한 쪽이 "내가 졌다" 라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은 애굽의 첫 번째 재앙에 보면,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었는데, 애굽의 술사들도 그렇게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뱀이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까, 모세가 던진 지팡이가 된 뱀이 그들의 뱀을 그만 잡아먹어 버렸다는 겁니다. 진짜가 가짜를 처리해버렸다는 말이죠. 

귀신아 물러가라 !!

그리고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에베소로 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도바울이 귀신을 쫓고 했다는 겁니다. 그때 '스게와' 라는 유대 제사장과 그의 일곱 아들이 무슨 흉내를 내었습니까? 자기들도 사도바울처럼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물러가라"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귀신들이 그런 가짜 예수에게 기가 죽을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귀신이 하는 말이, "내가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아는데,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도로 귀신이 덮치는 바람에 그만 혼이 났다는 겁니다.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행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신나 하면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사도바울을 너무나 우습게 알지 않았는지, 그런 점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우리는 예수를 믿지 너를 믿지 않아" 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의 가치를 낮추어보고 동급으로 여겨서 서로 막 먹으려고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귀신의 나라에서는 사도바울이 보통 사람이 전혀 아닌데, 인간은 몰라도 귀신은 다 안다는 겁니다. 뱀처럼 지혜롭다는 말이죠. 그러니 현실을 볼 때 과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아이큐가 제일 낮고 반에서 꼴찌를 하는 귀신도 당해낼 수 없다는 말이죠. 

꼴찌 귀신도 당해내지 못하는 인간들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일부에서는 계룡산이 어쩌고 하겠지만, 그런데 신학자나 목사들이 천국에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공부를 하면 할수록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발각이 된다는 겁니다.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게 해서 목회에 성공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믿기 않기 때문에 교회를 믿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성장을 부르짖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면 교회는 안중에도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교회가 망해도, 그게 예수님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가 불이 나고 교인들이 없어도, 자기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는 말이죠. 

우리 장로님이 과거에 공장을 하셨는데, 그런데 그때 공장에 불이 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겁니다. 장로님,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내가 하는 일이 예수님을 가로막았구나. 주님의 귀함을 내가 훼손을 시켰구나" 라고 하면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는 말이죠. 물론 공장에 불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는데, 설령 불이 난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것을 목사나 장로들은 모르는데, 그런데 귀신은 안다는 말이죠. 그런 면에서 사도행전이 얼마나 고마운 책인지 모르는데, 믿음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하는 것을 다 까발려 버린다는 겁니다. 

사실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구약전체가 다 그러한데, 이제부터 조금 어려워지는데 말이죠.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언약궤가 물체입니까? 물체가 아닙니까? 물론 인간들 눈에는 물체로 보이는데, 우리가 성경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먼저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고 하니, "나에게 문제점이 있다" 라고 하면서 성경말씀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물체를 물체로 보고, 물체가 아닌 것은 정신이나 영으로 구분해서 보는데, 그런데 만약에 주님께서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죠. 즉 "너희들의 눈에는 물체로 보이지? 그런데 내가 그 죽은 물체를 영으로 한 번 사용을 해봐? 그때는 너희들은 뭐라고 할 것이지?" 라고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아하, 나에게 문제가 있었구나. 나는 똑바로 해석을 한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었구나"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러니 우리는 그동안 오류에서 나온 오류를 가지고 우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틀린 것이 아니라 맞다고 하면서 말이죠. 

절박함이 인간을 움직인다 !!

그래서 제가 공식을 하나 만들어보았는데, "절박함이 인간을 움직인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출애굽기와 사사기에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왔는데, 물론 사무엘상도 그렇고 말이죠. 평소에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었는데, 그런데 요셉을 알던 바로 왕이 죽고 그 다음 바로 왕으로 가게 되는데, 그가 뭐라고 합니까? "요셉이 누구지? 우리 땅에 왜 다른 민족이 들어와 있지?"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린 바로 왕이 등장을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히브리 민족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자 그 히브리 민족에게는 절박함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상달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보냈는고 하니, 지금 그들이 다 삐쳐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에 파견근무를 시켰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절박함이 부딪침으로 이어지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라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 누구와도 엮이기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들 조용한 동네에 가서 전원주택을 지어서 살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2억에서 3억 정도를 주면 괜찮다고 하는데, 땅 값은 빼고 말이죠. 그리고 땅은 대전근처가 평당 70에서 80정도라고 하는데, 거기도 번잡스럽다면 그 옆에 영동을 가면 더 조용하다는 겁니다. 그 동네는 걸 그룹이 하나 나온 것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ㅋㅋ). 

다시 말해서, "이제 복음을 알았으니 그 누구와도 엮이는 것은 싫다. 그동안 참으로 많이 엮였으니, 이제는 조용히 살고 싶다" 라는 겁니다. 아마 우리 십자가 마을 사람들도 은근히 그것을 바라고 있지 싶은데(ㅋㅋ), 그렇지 않습니까? 

모세의 부딪침 !!

그런데 주님께서는 모세를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는 젊어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이다가 혼 줄이 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어디로 보내는고 하니, 모세가 그야말로 엮이기 싫어하는 곳에 집어넣어 버렸는데, 그것도 다 늙어서 말이죠. 그야말로 부딪침인데, 그러니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다시 하겠는데,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는 언약궤라고 했는데, 즉 컴퓨터와 기술자라는 겁니다. 다룰 수 있는 기술자가 없다고 하면 컴퓨터는 깡통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자동차와 기사라고 해도 괜찮은데, 자동차가 언약궤라고 하면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그렇게 한 조를 이루어서 언약궤가 기능을 발휘한다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그게 전혀 오해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런데 언약궤를 그만 빼앗기고 말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그냥 얌전하게 있는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마치 차고에 있는 자동차처럼 말이죠. 왜냐하면 기사가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그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이 믿는 다곤 신상을 꺾어버렸다는 겁니다. 옛날의 전쟁은 무엇인고 하니, 신의 깃발을 빼앗게 되면 이미 승리한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깃발이고 말이죠.

그런데 그야말로 새색시와도 같은 언약궤과 다곤 신상을 그만 박살을 내놓았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교회 바로 옆에 절이 있다고 하면, 그런데 우리교회의 십자가 종탑이 꺾여버린다고 하면, 물론 우리교회는 그런 종탑이 없지만 말이죠. 그러면 우리교회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우리교회의 기가 옆에 있는 절의 기보다 약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이죠. 아닌가요?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몰고 다녔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빠진 상태에서 언약궤가 사건을 일으키니까, 비로소 언약궤의 진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언약궤가 아무리 귀해도 물체인데, 스스로 이동이 가능한 물체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제사장이 이동을 시키고 해야하는데, 언약궤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장애등급을 가진 나무상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반드시 가술자가 필요한데, 그런데 언약궤는 기술자가 없는 상태에서 다곤 신상을 그만 부수어 버렸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블레셋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고, 누구도 놀라야 하는고 하니, 이스라엘 쪽에서도 놀라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분석에 들어가야 하는데, 언약궤의 분석을 감히 우리가 한 번 해보자는 말이죠. 그 당시에 언약궤는 '돌판+나무상자' 인데, 여기서 상자가 물체라는 것은 모두 아는 것인데, 그러면 돌판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역시 물체라는 겁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은 모세가 성질이 나서 그만 깨버렸는데, 그러니 언약궤 안에 있는 돌판은 모세가 산밑에서 다시 다듬어서 만들었다는 것이죠. 원래의 돌판 모습을 본 사람이 모세밖에 없으니, 그래서 자기가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죠. 

언약궤와 안경집 !!

그러니 언약궤는 물체인데, 그런데 이 물체가 다곤 신상과 만나서 신상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는데, 그러면 과연 언약궤가 물체가 맞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물체가 맞는데, 그런데 왜 움직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싶은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아침에 그만 안경을 잊어버렸는데, 그런데 한 참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안경을 찾으려고 하면 자기 눈이 잘 보여야만 하는데, 그런데 장작 안경이 없으니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 좁은 집에서 무려 30분을 찾았는데, 그래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안경을 발견하지 못하고 안경집을 발견했는데, 안경집은 안경처럼 생긴 것이 아닌데, 하지만 막상 열어보니 그 안에 안경이 들어있다는 말이죠. 안경집에는 안경이라는 물체가 들어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궤 안에는 물체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않는 언약이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의 한계는 무엇인고 하니, 보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하나의 물체로 보았는데, 그런데 물체가 전부가 아니라 물체가 오히려 무엇을 감추고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언약을 덮어서 감추고 있었다는 겁니다. 

모세와 지팡이 !!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지팡이는 그냥 지팡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이적을 행할 때, 주로 무슨 도구를 사용했는고 하니, 그게 지팡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고, 다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잡은 손을 품에 넣으니 문둥병에 걸리고, 다시 넣었다가 빼니 나았다는 말이죠. 그리고 지팡이를 강물에 대니까 강물이 그만 피로 변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까, 그 이전에는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었는데, 즉 지팡이는 모세의 소유물이었다는 말이죠.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고 하니, 이제는 그만 지팡이에 종속된 모세로 만들고 말았다는 겁니다. 

물체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

그 논리를 설명하면, 그렇지 않아도 더우니까 그만 생략하고,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면, 성도의 몸을 주님께서 성전으로 사용하실 때, 성전은 물체인데, 우리의 몸도 역시 물체라는 겁니다. 우리의 몸이 물체라는 것은 병원에 가면 바로 알 수 있는데, 특히 수술을 할 때 한 번 보라는 말이죠. 우리는 끝까지 물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체라고 여기고 확정을 지었는데, 그런데 그 몸을 하나님께서 성령이 계시는 성전으로 사용한다고 했을 때, 그러면 물체에서 하나님의 전으로 넘어올 수 있는 지식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을까요?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그게 바로 절박함인데,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과거에 알았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살펴보게 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안경집의 뚜껑을 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몇 가지의 경우의 수가 나올까요? 정답은 매우 간단한데, 두 가지라는 겁니다. 안경의 '있음'과 '없음' 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면,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도 나오는데,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데 절박함에서 자기 자신의 뚜껑을 열어보니까 어떻다는 겁니까? 자기는 애초부터 성령을 받은 적도 없고, 예수를 믿은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을 자기가 잘 아는데,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만 있고, 정작 중요한 예수님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을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데, 그래서 교회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교회는 가시적인데, 즉 눈에 보인다는 말이죠. 자기가 바로 교회인데, 그런데 왜 굳이 교회를 만들려고 합니까? 자기가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것을 잘 아는데, 그래서 교회를 만들어서, 절이나 성당도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교회를 만들어서 안경집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50년을 교회에 다녔으니 설마 내쫓지는 않겠지? 주님의 이름으로 이 정도의 거대한 부동산을 만들어서 바쳤으니, 설마 그 정성을 무시하지는 않겠지?" 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물체에서 시작해서 물체로 끝나는, 돈으로 환산이 되는, 부동산으로 마감이 되는, 그것을 계속해서 붙든다는 겁니다. 특히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의 장로들이 말이죠. 

그러니 말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세운 교회다" 라는 것인데, 돈과 패물을 바쳐서 말이죠. 어제 오후예배를 마치고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교회의 헌금함을 열었는데, 거기에 반지가 들어있었다는 겁니다. 김 집사님의 회계담당인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완전 '깜놀' 인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반지가 아니라 그냥 고리였다는 겁니다(ㅋㅋ).

그러면서 김 집사님이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 과거 부흥회 때 반지를 막 빼서 헌금함에 넣던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을 바치라고 하는데, 자기에게는 정작 주님이 없으니 자기 손에서 가락지를 뺀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교회는 자기 가락지가 포함된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지분을 조금이라도 집어넣어서 자기 교회라고 하는 의식을 가질 때, 그러면 누군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자기를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미 바친 뇌물이 제법 축적되어 있기에 말이죠. 그게 바로 오늘날의 교회이고 성당이고 선교단체인데, 그렇게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꿈과 보호본능 !!

그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오늘강의 제목을 이것을 하면 좋겠는데, 그게 '보호본능' 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밤에 잠을 자면 꿈을 꾸는데, 왜 꿈을 꾸는고 하니, 꿈을 보면 그야말로 절박함이 넘치는데, 위기의 연속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좋지 않는 것들을 꿈속에서 해소를 한다는 말이죠. 즉 꿈이 자기를 보호해주는 방어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좋지 않는 사태를 미리 예상을 해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대비하는 본능이 두뇌를 통해서 발생하는데, 그게 밤에도 멈추지 않고 꿈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꿈의 해석은 하나로 모이는데, '자기 보호' 라는 말이죠.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쪽으로, 그게 우리 인간의 모든 행위의 바탕이라는 말이죠. "나만 살면 된다" 라는 것이 계속해서 진척되고 있음이 꿈을 통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꿈은 아침이 되면 사라진다는 말이죠.

낮에도 쉬지 않는 보호본능 !!

꿈에 밤에 잘 때 꾸는데, 그러면 낮에 자지 않을 때는 이러한 의식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는데, 자기가 가는 곳이라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다 있다는 겁니다. 낮에는 그 꿈을 가시화를 시키는데, 회사 일에 열중한다든지 하면서 말이죠. 그것이 모두 다 자기 보호인데, 즉 "덥지만 열심히 일해서 우리 가족이 살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자기를 보호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평생동안 자기 보호인데, 아무리 고상한 진리를 이야기해도, 그런 것은 다 군더더기라는 겁니다. 모두 다 뜯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나는 내가 살린다" 라는 것인데, 어제 주일 낮에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감추고 있는데, 왜냐하면 안경집에 안경이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왜 안경이, 아니 왜 주님이 없는고 하니까, 주님은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주님이 아니란 말이죠. 어떻게 죽은 자를 체포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를 붙잡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기를 보호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인들이 다들 쉬쉬하고 있는데, 빈 안경집을 가지고 말이죠. 그런데 그 빈 안경집에 무엇을 적어놓았는데, "나는 기독교 신자다" 라고 말이죠. 물론 그 안에는 주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와 같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심지어 복음까지 더해서 말이죠. 

그런 식으로 자기 살리기에 나서는데, 그래서 싸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싸움은 '나 지키기' 라는 말이죠. 그러니 평소애 사는 것이 매우 답답한데, 누가 터트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카타르시스' 라고 하는데, 그 역할을 문학과 예술에서 해준다는 겁니다. 음악이나 시가 그러하다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노래가사를 하나 준비했는데, 지난 시간에도 친절하게 하나 준비를 했었지 싶은데 말이죠. 가사를 보면 얼마나 우리의 카타르시스를 진솔하게 해소해주는지 모르는데, 한 번 들어보시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부르는 것은 아니고 읽어드리겠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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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 ] 임재범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 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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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부르는 18번이 바로 이 노래인데, 낮에는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마치고는 술을 한 잔 걸치고 마이크를 잡고 부른다는 겁니다. 물론 아마추어가 부르기에는 노래가 좀 어려운데 말이죠. 그러면 왜 그렇게 할까요? 그것은 바로 안경집에 누구만 들어있는고 하니, 자기 자신만 들어있다는 말이죠. 

주일 낮 설교를 유투브에 올려놓았더니만, 보통은 댓글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 보니 누가 약간 길게 써놓았다는 말이죠. 그 사람이 뭐라고 달아놓았는고 하니, "목사님의 강의에 동의를 하면 할수록 힘이 빠집니다" 라고 해놓았다는 겁니다(ㅋㅋ). 그래서 저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는데, "힘을 왜 가졌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왜 지고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오직 '나'만의 세계 !!

그러한 심보가 무엇인고 하니, 여기 가사에도 나오듯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인간은 오직 자기만의 세계, 그것 외에는 달리 아무런 목적도 없고 소망도 없다는 겁니다. 

아까 에너지라고 했는데, 지난 수련회에서도 했는데, 모든 물리학의 초점은, 그게 스토아 학파에 있어서는 응집, 혹은 응축이라는 겁니다.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죠. 그래서 힘을 집대성하게 되는데, 누가 건드리면 쏘고 말이죠. 

새우의 꼬리를 만지다가 쏘여서 이틀 뒤에 그만 죽었다고 하는 어느 아줌마의 이야기를 듣고, 언뜻 스치는 생각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새우의 자기 보호이고 본능이라는 겁니다. 새우꼬리가 뾰족한 것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새우의 꼬리가 다들 있다는 말이죠. 

교회는 50년을 다녔는데, 그런데 막상 펼쳐보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데, 그런데 그 세계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싶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태양을 향해서 날아갔던 이카로스의 날개처럼, 그렇게 펼쳐 보이고 싶다는 말이죠. 통영에 가면 천사의 날개를 그려놓은 것이 있는데, 인간은 누구나 그렇게 날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비상',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꿈' 이라는 겁니다. 꿈은 자기 보호본능이라는 말이죠. 개척교회를 해서 꿈을 펼치고 싶고, 골프를 쳐서 꿈을 펼치고 싶고, 야구선수를 해서 꿈을 펼치고 싶다는 말이죠. 하지만 모든 인간은 안경집 속에 있어야할 안경은 없고, 마치 누에꼬치 속의 애벌레처럼 자기만 들어있는데, 그리고는 뚜껑을 만들어서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무덤과 빈 무덤 !!

바로 그런 상태와 대조를 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은 죽으시고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하면 무덤과 빈 무덤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무덤과 예수님의 빈 무덤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인데 말이죠. 

빈 무덤이라는 것은, 무덤에 무엇이 없다는 겁니까? 시체가 없다는 말이죠. 조금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미 죽은 자는 체포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죽은 예수님을 불러서 실험대에 올려놓고, "심장무게는 얼마이고, 당뇨증상은 어떻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부를 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만약에 그렇게 되면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다는 겁니까? 그러면 주도권이 언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경집에 있는 것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동안 그런 식으로 언약궤를 다루어왔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물론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의 수의를 토리노 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사기라는 말이죠. 천주교는 별 짓들을 다 하는데, 그게 뻘짓이라는 겁니다(ㅋㅋ). 그리고 마리아 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고 하는데, 그러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관광객들이 성지순례를 한다고 하면서 몰려들고 말이죠. 특히 스페인은 그런 것으로 먹고산다는 겁니다. 

다시 시작하면 !!

아무튼 언약궤의 진수는 그것을 다루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떨어졌을 때 드러난다는 말이죠. 강의를 다시 해보겠는데, 언약궤는 물체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그런 지시를 내렸는데, 언약궤를 이동시킬 때는 피가 묻은 거룩한 제사장이 메고 가라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요단강을 건너가고, 여리고 성에 모인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돌 때도 언약궤를 앞장세운다는 겁니다. 그러니 언약궤는 물체이지만 무엇이 있어야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이 된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어서 다루어주어야, 그렇게 둘이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지만, 구원은 그 십자가를 자기가 믿어주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죠. 그게 침례교를 비롯한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고방식인데, 그것을 신학적으로는 알미니안주의라고 하는데 말이죠. 인간 쪽에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것인데, 그럴 리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인데, 그러면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없는 체로 가만히 있으면 좋은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과도한 믿음의 행위를 한다는 겁니다. 선교사들이 대표적인데, 굳이 외국에 왜 나갑니까? 저는 그 사고방식이 심히 의심스러운데, 그게 허영심이 아니라고 하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말이죠. 

물론 외국으로 나갈 수는 있는데, 누군가가 쫓아내면 그때 나가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가 태어난 곳에 그냥 살면 된다는 말이죠. 어디서 무엇을 하던 다 밥을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하는 짓인데, 그러니 "선교는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선교사도 없는데, 그냥 두 글자로 '죄인' 이라고 하면 된다는 말이죠. 

엮이기 싫어 !!

아무튼 '언약궤+이스라엘'이 언약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스라엘을 떼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물체인 언약궤가 혼자서 상대방 블레셋을 작살내고 말았는데, 신의 깃발을 뽑아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면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이제 다곤 신을 무서워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무서워하겠습니까? 적의 신을 더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그들은 구원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엮이기 싫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정말이지 예수님은 무서운 분인데, 그런데 주님에 의해서 그 무서운 분과 본의 아니게 엮여져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죠. 왜 주님이 무서운고 하니,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보기 때문에 무섭다는 겁니다. 

죽기보다 싫은 '망신살' !!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망신살' 이라는 것인데, 오늘 강의제목을 이것으로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정치인에게 뇌물을 준 기업가가 검찰에 불려나간 다음날에 왜 자살을 합니까?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아무리 회사가 망해도 노숙자보자는 낫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망신살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최후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롯유다도 바로 그런 경우이고 말이죠. "12제자 중의 한 명이고, 스승에게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고 귀신까지 쫓아낸 당신이 어떻게 스승을 팔아먹을 수 있는가?" 라고 했을 때, 가롯유다는 도저히 거기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망신살이 성립되려고 하면 무엇이 꾸준히 지속되어야 합니까? "나는 이런 이런 자다" 라고 하는 자의식을 붙들려고 한다는 겁니다. 즉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나답다" 라고 말이죠. 그런데 그게 되지 않을 때는 망신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복음 평론가나 복음을 즐기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안경집에 안경이, 즉 "너희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는가?" 라는 겁니다. 물론 온종일 집에서 복음을 듣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는 주님의 안경집인데,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한 것이다" 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인간은 다 똑같은데 말이죠. "실례합니다. 잠시 머리 뚜껑을 열겠습니다" 라고 해서 조사를 해보면 압니까?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물질밖에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인간내부를 조사해보니 !!

똑똑한 과학자들이 인간을 다 열어서 조사를 해보았는데, 허블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지만, 전자 현미경으로는 인간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겁니다. 그것보다 더 세밀한 현미경도 있다고 하는데, 1985년에 이미 원자를 촬영했다는 말이죠. 원자가 과학자들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그 원자 하나를 핀셋으로 집어서 'IBM' 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는데, 물론 'IBM' 회사에서 말이죠. 그러니 모든 것이 원자로 되어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진실인데, 그러면 그 원자에 영혼이 어디 들어있습니까? 원자에 예수님이 들어있습니까?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궤' 라는 상자를 분석해보면, 그것이 아카시아 나무인데, 그러면 아카시아 나무의 원자와 분자를 조사하고, 그리고 돌판을 조사하면 어떻게 됩니까? 돌은 지구내부에 있던 마그마가 올라와서 식어서 된 것인데, 그리고 지금도 식으려고 준비를 하는 내핵이 있고 말이죠. 

과학의 치명적 오류 !!

과학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더 세밀하게 보기, 더 정확하게 보기,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기, 그게 과학이라는 겁니다. 과학 따로, 무엇 따로, 그런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다가보면 분석에 들어간다는 말이죠. 

그러면 언약궤를 분석하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아카시아 나무와 돌판으로 되어있다고 분석하는 것이 말이죠. 아까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자기 자신에게 오류가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연구를 해도, 그렇게 연구하는 자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그게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아쿠아룸에 갇혀있는 인간의 한계인데,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해운대에 있는 아쿠아룸에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두 갇혀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연구를 해도 자기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은 자기가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움직이는고 하니, 조금 전에 무슨 본능이라고 했습니까? 

보호본능, 즉 무조건 자기를 사수하고 정당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변명해가면서 자기를 키운다는 말이죠. 제가 노래를 또 불러야 합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겁니다. 일체 자기에게 간섭하지 말라는 것인데, 물론 어릴 때는 엄마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컸으니 유산이나 물려주면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복음을 평론하는데, 혹시나 자기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이죠. 즉 자기 보호인데, 그렇게 복음을 즐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안에는 누구만 들어있는고 하니, 번데기만 들어있다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은 이게 좋지 싶은데, 즉 자기만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조상 탓입니다 !!

이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조상 때문에 그러한데, 그러니 앞으로 모든 잘못은 조상 탓으로 돌리면 된다는 것이죠. 물론 잘 되면 자기 탓이고 말이죠.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데, 서로 장단이 잘 맞다는 겁니다. 누구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게 우리에게 자연스럽다는 것이죠. 밤에 꾸는 꿈도 보호본능이니 말이죠. 

"목사님, 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저를 보호할 수 있는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나왔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솔직한 모습이라는 말이죠. 즉 "나를 손대지 말라" 라는 것인데, 만약에 손을 대면 밤낮으로 싸운다는 겁니다. 

십자가 마을은 도를 닦는 곳이 아닌데, 만나서 부딪쳐야 한다는 말이죠. "목사님, 그게 싫어서 십자가 마을에 왔는데, 그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ㅋㅋ), 만나서 부딪치고 깨지고, 그런 가운데 욕을 얻어먹고 해야한다는 말이죠. 선이 악으로 바뀌고, 악이 선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선이 악으로 바뀌는 것은 쉬워도,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인간을 이렇게 결부를 시켜놓고는 이스라엘을 떼어버리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로마서 11장의 말씀처럼,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물론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복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그 복음이 안경집에서 멈추면 안 되고,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안경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을 끄집어내어서, 자기 자신 속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라는 것을 안착시키자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나를 낳은 아버지 때문입니다 !!

어제 낮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내서 사람을 많이 다치게 했는데, 그런데 그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우리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낳아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그렇게 아주 생뚱맞은 답변을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낳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고 말이죠.

이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악질적인 답변인데, 사고를 낸 당사자로서 자기가 해야할 도리는 전혀 하지를 않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조상 탓으로 돌린다는 겁니다. 완전히 책임회피라는 말이죠. 그렇게 나오면 사람들에게서 돌에 맞아도 달리 할 말이 없는데,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사실은 그것이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보상을 다해주고, 그리고 교도소에서 복역도 다 마치고 나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대로 마음이 편하지 않는데, 그래서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주 안에 있다 !!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이미 악마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말이죠. 누구나 다 그러한데,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데, 빠져나왔다는 겁니다. 바로 그 과정을 어제 갈라디아서 5장을 하면서 "주께서 불러주셨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빠져나온 결과가 무엇인고 하니, "주 안에 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주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런 지식을 하나 확보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정말로 주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정말 자기는 안경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그러면 주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안경집을 교체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어떤 불만도 가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군요" 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나오게 되는데, 우리 인간은 그런 절박함과 망신살을 당하지 않게 되면, 더욱 더 자기 응집과 응축이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단단해진다는 말이죠. 

다시 모세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파견근무를 시켰는데, 그러면 그 배치를 한 번 살퍼보자는 겁니다.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노예생활이 괴로워서 누구에게 기도를 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적한 곳에 있는 모세를 보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의 이야기를 어떻게 됩니까? 우리네 상식에 의하면, 오는 모세를 히브리인들이 환영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이 과연 환영을 합니까? 그들이 환경은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을 죽여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의 본능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강의에 의하면 보호본능 때문인데, 즉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사는 것이 힘들어서 말이죠. 그러면 사는 것이 힘들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부르짖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정도밖에 되지를 않는데, 그러니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배가 부를 때 좋아하는 것과 답답할 때 좋아하는 것은 다른데, 인간은 자기가 어느 정도로 개판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절박함이 왔을 때, 비로소 "아하, 내가 이 정도로 망가졌구나" 라고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는데, 아론을 '1+1'로 해서 말이죠. 아론이 이야기를 하고 모세는 그것을 아론에게 전달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그들을 죽여달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들이 모세와 아론이 온 취지를 몰랐던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어디에 갇혀있었는고 하니, 애굽에서의 여유로웠던 옛적생활이 그들 내부에 스며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애굽과 한 통속이라고 보면 되는데, 즉 자기들이 괴로우니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게 애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겁니까? 아니면 과거처럼 애굽에서 잘 사는 겁니까? 그냥 잘 살게 해달라는 것이지, 애굽에서의 탈출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교인들에 교회에 나와서 뭐라고 기도합니까? "저는 죽여주세요. 이 세상에서 탈출하게 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날씨가 더우니 "어서 가을이 오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한다는 겁니다. 당장에 비라도 좀 왔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주님, 저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

물론 사람들끼리 모여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러니 인간은 자기 편하기 위해서 산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이 천국에 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데,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에 불러주어도 우리는 마다해야 한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주님, 저는 천국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저는 저밖에 모르는데, 그런 저의 성질을 주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자꾸만 넣어주려고 하십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그게 성도의 고백이라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그런 고백이 나온다는 말이죠. "제가 교회를 몇 년을 다녔고, 선교헌금을 얼마를 했고, 봉사를 어느 정도 했습니다" 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저를 죽여주세요" 라고 기도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 보호본능이기에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뭐라고 하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이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비켜가게 하옵소서" 라고 했다는 겁니다. 

(막 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러면 예수님이 그런 기도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왜 인간들이 악마의 족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지,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강력한 권세가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 자신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러니 다른 인간들을 말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자기가 성도라고 하면서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까불어도, 정말이지 절박함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밖에 달리 나올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하는데, 자기가 죄인임을 말이죠.

특별한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서 죽인 것이 아닌데, 오늘날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잠을 자고 있는데, 주님이 우리의 뚜껑을 열면 우리도 뚜껑이 열린다는 겁니다. 앞의 뚜껑과 뒤의 뚜껑의 의미가 전혀 다른데 말이죠(ㅋㅋ). 

예를 들어서, 요즘 같이 더울 때 한 밤중에 아파트에 정전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에어컨도 꺼지고 선풍기도 꺼지고 난리가 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야?" 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바로 나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아파트의 변압기를 바꾸자고 했을 때, 괜찮다고 한 아파트 관리소장을 낳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의 아버지인데,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계속 찾아 올라가면 결국은 아담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 "성질대로 살자" 라는 것인데, 믿음이 있는 척을 하지말고 말이죠. 서로의 성질을 내면서 밤낮으로 붙어보자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말고 달리 길이 없다는 말이죠. 구원이란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서,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이게 믿어지지 않습니까? 양은 목자를 알고 목자도 양을 아는데, 그러면 그 어떤 권세라도 그 목자에게서 양을 빼앗아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겁이 나서 벌벌 떨 수는 있겠지만, 주님은 빼앗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에게 종속이 되었기에 말이죠.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같은 본문을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려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그래도 살펴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날씨가 더우면 분통이 터지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니 말이죠. 여기서 시편 131편을 보겠습니다. 

(시 131:1)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

여기 1절에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교만이냐는 겁니다. 1층, 2층, 3층, 몇 층입니까? 이 교만은 그야말로 끝도 없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게 하신다는 말이죠. 

그리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복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사람이라고 하면 싸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그런데 왜 싸웁니까? 자기 마음이 높고 교만하니, 그래서 이기려고 싸운다는 겁니다. 

2절에는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라고 하는데, 일은 엄마가 합니까? 아기가 합니까? 엄마가 하는데, 그런데 그 2살짜리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 보면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라고 하는데, 그러니 고요하고 평온해야 한다는 말이죠. 

요즘 제가 중세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중세 신학자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물론 문제가 많은 신학인데, "높이 올라가면 나를 잊어버린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고린도후서 12장을 들었는데, 자기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그게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말이죠.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주는 대로 받아라 !!

그러니 거지인데, 주는 대로 받는다는 겁니다. 38도면 38도로 받고, 40도면 40도로 고맙게 받는다는 말이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받고, 태풍이 불면 태풍이 부는 대로 받는다는 겁니다. 어차피 안개처럼 다들 사라질 것인데, 그러니 이 세상에서 지옥구경이나 한다는 말이죠. 

옛날에 서수남 하청일이 '서울구경' 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 마지막에 보면 "서울구경 잘했네" 라고 하면서 마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면 되는데,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도를 닦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에게는 무엇이 준비되어있는고 하니까, 원치 않는 절박함과 원치 않는 엮임, 그리고 원치 않는 만남을 통해서, 모든 것을 주님이 홀로 다 하셨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데, 그런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남들과 자기를 비교해서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즉 "내가 복음을 많이 아는지, 니가 복음을 많이 아는지 붙어봐?" 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3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영원함에 종속되어있다는 겁니다.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죠. 

언약궤는, 얼른 나가 주세요 !!

다시 사무엘상 5장으로 돌아와서, 언약궤가 블레셋의 다곤 신상을 그만 박살을 내어버렸는데, 그래서 블레셋이 여호와 앞에 일단 항복을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아니기에, 그래서 자기들의 땅에서 얼른 언약궤를 내보내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무엇과도 같은고 하니, 일단 와서 복음은 들었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다시 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얼른 내보기를 원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언약궤를 내보면 나머지는 어떤 영역이 되겠습니까? 복음이 들리지 않는 곳, 복음이 빠져버린 곳, 그곳은 누구의 영역이 되겠습니까? 자기만의 영역이 되는데, 그러니 재수에 옴이 붙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처럼, 지금은 자기의 영역으로만 사는데, 아쿠와룸에 갇혀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깨져서 지옥과 천국으로 분류가 되면, 자기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그 비누방울이 그대로 지옥불에 노출이 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말이죠.

복음을 아는 마귀, 그러나 !!

마귀가 복음을 압니까? 모릅니까? 당연히 아는데, 그리고 자기가 멸망할 것도 안다는 겁니다.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말이죠.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귀신이 들린 여종이 하나 나오는데, 그녀가 뭐라고 합니까? 사도바울의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들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행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행 16:17)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행 16: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참으로 신기한데, 마귀가 그것을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마귀는 자기가 알면서도 치료를 거부하는데, 그래서 들뢰즈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모든 사람들은 정신병자들이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체 치료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냥 내버려두어라. 나는 이대로 살란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을 내치게 되면 현재 그래도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들리는 자들에게만 해당이 되는데, 그리고 마치 모기약을 뿌리듯이 그것이 유포되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말이죠. 즉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을 강력히 거부하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만 힘이 빠집니다" 라는 식으로 말이죠. 다 맞는 말인데, 하지만 자기만은 제발 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미 새우 꼬리에 쏘여서 죽었다는 겁니다. 

빈 무덤을 그리워하자 !!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닌데,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 좋습니까? 예수님의 빈 무덤이 좋습니까? 아니면 화려한 자기 무덤이 좋습니까? 우리는 빈 무덤을 사모해야 하는데, 무덤에 시신이 있다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시신이 죽기 전에는 돌아다녔는데, 앉아서 강의도 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미워하라" 라고 하셨는데, 설쳐봐야 무덤에 들어가는데, 그러니 그렇게 하지말고 아예 빈 무덤을 사랑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빈 무덤이라는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살아있다는 것인데, 즉 주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인데, 그 주님을 죽어가는 자기 자신보다 더욱 더 사랑하는 말이죠. 

그 주님께서 우리를 안경집으로 사용해주셨는데, 그냥 쓰레기통이 내버려도 무방한데 말이죠. 그리고 안경은 주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안경집의 뚜껑을 열 때 주님이 그 안에 계셔야만 하는데, 그러면 그 주님을 어디서 구하면 됩니까? 대구의 칠성시장에 가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주께서 성령으로 찾아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찾아왔는지 찾아오지 않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주님이 찾아오시면 절박함이 생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서 주님을 보고 나가라고 하면서 반항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그 반항을 주님께서 이겨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천국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갈 만한 사람을 보내세요" 라고 하는, 자기 보호본능으로 보면 그야말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런 희한한 고백이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개입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자유, 이게 얼마나 놀랍고 탐나는 것인지 모른다는 말이죠.

패배자로 살아가는 기쁨을 !!

다시 말해서, "나는 패배자로 살아갑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즉 "나는 아무런 이길 무기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얻어터져도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즐거움과 기쁨, 그것이 바로 성도의 자유이고 넉넉함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의 이론이나 정보로 그치게 되면, 물론 그래도 우리는 어쩔 수가 없지만, 그런데 택한 백성이라고 하면, "나는 나를 미워해야 한다는 것이 옳습니다" 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현실화를 시키고 만다는 것이죠. 부딪침과 마주침을 통해서 말이죠. 

물론 처음에는 모르는데, 그래서 "어디서 함부로 까불어?" 라고 하다가,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데, 자기는 언약궤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즉 주님을 자기 손에 붙잡으려고 하다가 그만 놓쳐버리는, 그래서 언약이 없는 허접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다시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라고 하면서 회개를 되는데, 그것도 아주 즐거운 회개의 기도를 말이죠. 그래서 "주님이 저보다 더욱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것을 주님께서 터치를 해주시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블레셋이 언약궤와 같이 있던 경험이 있었지만, 그것은 재앙이었고 전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재앙으로 여겼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은혜로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그것이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셔도 되는데,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자신의 주인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8,11 오후 4시에 마침.

조용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날마다 깨트려 주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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