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구강의] '전도서'속의 그리스도 42 - 아는 사이
18,09,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97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 모세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통하는 통로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정해져있습니다.
정해져있습니다 !!
여기에 보면 "모세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통하는 통로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정해져있습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이 문장에 나오는 단어들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일반 사람들은 제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제일 먼저 나오는 '모세언약'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예 들어본 적도 없고, 또 '하나님'은 추상적으로 희미하게만 알고 있고, 그리고 '이스라엘' 이라고 하면 남의 나라로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남의 나라 역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긴다는 겁니다.
물론 '통로' 라는 것은 사회에서도 모두가 사용하는 말인데,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유일한 길, 그것을 두고 통로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대제사장' 이라는 단어도 역시 낯설다는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마지막에 나오는 '정해져있습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고정되고 확정되었다는 것인데, 물론 그것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일지 모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너무나 역겹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미 정해지게 된다면, 거기에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데, 그래서 졸지에 '을'이 되는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죠. 누군가가 미리 정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거기에 대한 반발심이 생긴다는 겁니다. 즉 "니가 무엇이기에 내 허락도 없이 정하노?"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여기 교재 97페이지에 나오는 이 문장 하나를 가지고도 할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는 겁니다. 2박 3일 동안 수련회를 해도 되지 싶은데, 다시 읽어보면, "모세언약에 의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통하는 통로는 대제사장을 통해서 정해져있습니다"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먼저 '모세언약'은 전혀 생소하고, '하나님'은 대충 안다고 치고, '이스라엘'은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대제사장'은 낯설고, '통해서'는 아는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 '정해져있습니다' 라는 것은 격분할 일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는 없는데, 비록 하나님이라고 해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왜 여기에 나오는고 하니, 그동안 이런 원리가 고대유적지처럼 땅 속에 묻혀있었다고 보면, 그래서 그 위에 흙으로 덮여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는 '텔' 이라고 하는데, 왜 '텔아비브' 라는 도시가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수도인데 말이죠. 그 텔이 무엇인고 하니, 여러 가지가 묻혀있어서 그게 불룩하게 언덕으로 되어있다는 겁니다. 고대유적지 가운데는 그런 것이 제법 많은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집을 지어서 그게 무너지면, 그것을 없애고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또 다시 짓는다는 겁니다. 그게 집 하나만 그런 게 아니고, 마을자체가 그렇게 되고, 도시 자체가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계속해서 그 위에 짓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강이 있고 해서 살기가 좋으니 계속해서 자손 대대로 거기에 산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은, 자기들 뿌리에 관심을 !!
그래서 그곳을 발굴해보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현재 살고 있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자기의 뿌리가 중심인데, 그렇게 해서 그 뿌리와 자기가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정상적으로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려시대도 지나가고 조선시대도 지나갔는데, 그러니 그때를 거론하는 사람은 족보장사를 하는 사람밖에 없다는 겁니다. 족보책이라고 하면서 한 권에 몇 십만원씩 받아 챙긴다는 말이죠. 왜 가끔 자기 집안이 소속된 문중의 누구누구라고 하면서, 그런 전화가 오지 않습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 족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나중에 나이가 들면 몰라도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아닌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자기들의 뜻이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자기 나라가 유지되고 그 결과가 주어질 것인데, 그래서 자기들은 천국백성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그들의 본질인데, 놀랍게도 그 본질이 지금도 이스라엘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결속을 시킵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한 스케줄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후손들은 그 스케줄을 파악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대로만 하면, 거기서 이탈하지 않으면 자기들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모든 설계도는 하나님이 마련했고, 자기들은 그 설계도대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들의 실패와 성공은 어떻게 됩니까? 그 설계도에서 이탈하느냐, 그렇지 않고 정상적으로 유지하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그것만 따지면 되는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호수아 1장 7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는다는 말이죠.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이것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불러서 이야기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그야말로 추상과도 같은 명령이고 스케줄이란 말이죠. 이것을 두 글자로 '약속' 이라고 하고, 혹은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약속과 언약의 차이점 !!
먼저 약속과 언약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약속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고, 언약은 그 약속의 상대자로서 인간을 선택해서, 인간과 하나님이 사이에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약속과 언약은 조금 다른데, 이런 식의 언약이 잘 쓰이지를 않기 때문에, 이것을 보통 '계약'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잘 쓰는 용어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과 그렇게 계약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약속의 경우에는 하나님만 살아계시면 되지만, 그런데 계약을 하게 되면, 그 계약이 계속해서 유지가 되려고 하면 그 계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상관이 없고, 이스라엘이 존속을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아니라 그 약속을 구체화한 것이 계약이기 때문에, 그 약속의 구체화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내칠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 때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흩어지고 고생을 했는고 하니까, 그것은 야단을 치기 위함이라는 말이죠.
그들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정신을 차리라고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때리는 것처럼 징계를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징계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더욱 하나님의 자식임을 확정짓는 증거물이 되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계약서'가 있어 !!
거기에 대해서 다른 민족들이 비아냥거리기도 하는데, 그래서 "너희들이 그렇게 나오는 증거가 있어?" 라고 했을 때, 그들이 내세우는 것이 바로 모세오경, 즉 '율법' 이라는 겁니다. 오늘 교재에 보면 모세언약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언약이니 계약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자기들에게 계약서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서울의 63빌딩이 자기 것이라고 한다면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생각만 해도 흐뭇하죠? 그것이 바로 계약서인데, 마찬가지로 "과연 하늘나라가 있는가?" 라고 했을 때, 그런데 계약서를 보니 그 하늘나라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계약서를 철저히 숙지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예루살렘의 시가지에서 그 계약서대로 철저하게 그야말로 시범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있었는데 말이죠. 왜 제가 올려놓은 동영상에 보면, 부림절과 관련해서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오지요? 그게 그들의 평소 복장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소득은 이스라엘 평균소득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국가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데, 전 국민의 15%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들은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로 예루살렘에 살고 텔아비브에는 거의 없다는 말이죠. 텔아비브에는 돈 많은 장사꾼들이 살고,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어서 그들이 거기에 산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성전을 지킵니까? 메시야가 두 자리를 딛고 온다는 말이죠. 마치 로버트 태권브이처럼 말이죠. 바로 그 메시야를 예수로 바꾼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 그것이 미국에서 바람이 불었던 '세대주의' 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온다고 하는데, 그런데 미국의 세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그 감람산에 선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 감람산이 예루살렘 성전 옆에 있는 조그마한 둔산인데, 거기에 '승천교회' 라고 해서 예배당이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조금 내려가게 되면, '주기도문 교회'가 있고, 더 내려가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곳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리아가 죽은 곳도 나오는데, '마리아 승천교회'도 있고 말이죠.
그리고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메시야가 오게 되면 죽은 자가 무덤을 열고 나오는데, 그래서 대부분의 그 넓은 지역이 유대인들의 무덤이라는 겁니다. 십자가가 없는 무덤이란 말이죠. 석관으로 아주 촘촘하게 만들어놓았는데, 이제 메시야만 오면 된다는 겁니다. 메시야가 오면 너무 비좁아서 난리가 나지 싶은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그들은 그런 것이 계약서에 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있는 계약서대로 이니 말이죠. 계약서는 문자로 되어있고, 문자는 우리가 이해하게 되어있는데, 그러면 그게 정보로서 우리 머릿속에 기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옳다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허무하다 !!
유대인들이 계약서의 내용대로 하고, 또한 그 내용대로 기다리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왜 문제인지 그것을 한 글자로 말씀을 드리겠는데, 지금 우리가 전도서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전도서 1장에 보면 이 세상은 허무하다고 하는데, 분명히 그것이 말씀에 있다는 겁니다. 즉 계약서의 내용이라는 말이죠.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런데 그 '허무하다'가 이 땅에 오면 무엇이 되는고 하니, '허무하라'가 된다는 겁니다. '다'가 '라'로 바뀐다는 말이죠. 사람과 계약을 할 때 주님께서는 먼저 결론을 내리고 마는데, 즉 단정을 짓는다는 겁니다. 일종의 선언이고 선포라는 말이죠. 즉 "이 세상은 무조건 허무하다" 라는 겁니다.
계약서가 이상해요 !!
그런데 실제로 구원받을 자가 계약서를 작성해놓고 보면, '허무하다'가 '허무하라'로 바뀐다는 말이죠. 그러면 계약을 할 사람의 경우에는 계약서를 읽어보고 그것이 납득이 될 경우에만 찍는데, 그렇지요? 하지만 게약서를 읽어보니, 그 내용이 자기가 원하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허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일단 버티기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허무하게는 살지 않겠다" 라고 나오게 되는데, 그러니 여기서 인간의 자율권이 작동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을 인간과 계약을 하게 되면,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을 네가 실행에 옮겨라" 라고 하게 되는데, 그런데 인간은 그 내용이 싫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그대서 나름대로 선과 악을 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자기 스스로 악하게 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간음을 하지 않아서 천국에 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러니 계약서의 내용이 너무나 역겨워서, 자기는 너무나 착하고 착한, 즉 천심인데, 그런 착한 자기와는 반대가 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서 반발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간음을 해라. 하지만 나만큼은 간음을 하지 않겠어. 여자가 지나가면 전봇대에 부딪치는 한이 있어도 눈을 감겠어. 그렇게 살겠어"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인데, 극도의 절제하는 삶을 살겠다는 말이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행동하겠다는 것이죠. 자기의 행동으로 인해서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지, 혹은 하나님께 누가 되지는 않는지, 만약에 그게 거룩하다고 하면 행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동원되는 성경구절이 많이 있는데 말이죠.
여기서 빌립보서 4장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말씀을 들으니 무슨 생각이 듭니까? 자기 행동에 대해서 항상 조심하고 점검해야 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경우에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다" 라고 되어있는데,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너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잖아? 그러니 악을 버리고 선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지킬래? 말래?" 라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예, 지키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내가 영생을 줄게. 그리고 상급도 주겠다. 그러면 이제 되었지?" 라고 여기게 되고, 그러면 마치 계약이 체결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가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전보다 더 착하고 훌륭해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교인들도 역시 그렇게 여긴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혹시 실수를 하거나 미처 잘 몰라서 했다고 하면 후속조치가 마련되어있는데, 그게 두고 회개라는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성당의 경우에는 신부를 찾아가고 고해성사를 하고, 교회의 경우에는 새벽기도를 나가든지 해서, "모두 것이 내 탓이요" 라고 하면서 자기 가슴을 치면서 자기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햐얀 헌금봉투로서 그것에 대한 성의를 표시하고 말이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죄의 보편성'이 빠져있어 !!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과 계약을 할 때 무엇이 빠진 겁니까? 죄의 보편성이 빠져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약은 어디를 겨냥하는고 하니,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 될 때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말이죠.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그때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없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있었다는 겁니다.
10가지 재앙 중에서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인데, 알다시피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던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국가로 만들어주셨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국가에 개입을 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과 동행을 하시는데, 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눈에 보이는 자기 인간들끼리 모이면 국가가 되는 줄로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실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주어야 그게 하나님이 만드신 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형제들끼리, 그렇게 자기들끼리 모이면 그게 국가인 줄 알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에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이 들어가는데, 즉 피흘린 죽음이 여기에 삽입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빠지면 그들 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들에게는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가 빠져있어 !!
그런데 조금 전에 제가 이야기한 것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취지가 통 채로 빠져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로 만들면서 잔소리를 했습니까? "너희들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말이죠.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모세가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모세는 어려서부터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민족의식에 충만한 인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 마흔에 깃대를 들었는데 그만 실패를 하고 말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쳐서 양을 치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세월이 지나 나이 여든의 노인에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는데,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와 아론이 같이 애굽으로 간다는 말이죠. 물론 처음에는 모세가 반발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일은 하나님이 벌리시는데, 다만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시범조교가 되어서 보여주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 !!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하나님과 맺은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 이라는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니 당연히 그 말씀을 받은 자기들과 계약을 맺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인간들과 말이죠.
이것이 그들의 치명적인 오해인데, 성경공부를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달리 말해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면 됩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제외시키고 계약을 맺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어서 그 결과를 택배로 부쳐주셨다는 말이죠. 물론 배송료는 무료인데, 물건값도 무료라는 겁니다. 사실은 물건을 신청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그 사람 속에 집어넣어버렸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 사람은 자기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성경공부를 할 필요가 없네요?"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님의 그 약속, 혹은 언약, 혹은 계약, 방금 약속의 구체화가 언약이라고 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계약을 하려고 하면, 그 이전에 먼저 인간이 나서게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에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인간이 먼저 나서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그냥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는 말이죠. 지금도 우리 속에서 선과 악이 마구 꿈틀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일을 누가 할꼬?" 라고 하면, 우리 인간은 "제가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나서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마저도 자기가 지킴으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얼마나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는 인간인지를 드러내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나는 너와 계약을 하지 않았어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인간이 왜 계약에 나섭니까? 그것은 자기는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인데, 그런 가치가 있는 '나'를 의로운 인간으로 본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의로운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보신다는 말이죠. 이것부터가 맞지 않는데, 인간은 하나님과 달리 자기 자신을 쓸모가 있는 존재로 여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에 도움되는 인간으로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깨닫는데 무려 1,500년이나 걸렸는데, 그것도 깨닫는 자만 깨달은 것인데, 아무나 다 깨달은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나에게 주었다. 이것은 계약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내가 열심히 그 말씀대로 좋고 올바른 것만 행하고 나쁜 것을 추방시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겠지" 라고 여긴다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치고 말고 할 필요도 없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나왔다는 말이죠.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 이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르는데 말이죠. 우리가 성경말씀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치더라도,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기본적으로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가려고 들이민다는 것이죠. 즉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 숨만 쉬면 착한 것만 추구했습니다. 좋은 것만을 보았고, 순수한 길만 걸었습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나는 너와 계약을 하지 않았어"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한 것이 아니라 독생자이신 예수님과 계약을 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일임하셨다는 겁니다.
요즘 성경말씀을 통 채로 공부한다는 모임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데, 오히려 교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말이죠. 성경공부를 하면서 점점 더 인간을 버려놓는다는 겁니다. 강퍅의 강도가 점점 더 세어지고 있다는 말이죠. "나는 이 성경을 이정도 공부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그래서? 그것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렇게 성경을 공부해서 자기를 구원하겠다고 나온다는 것이죠. 계약의 당사자가 인간인 줄 알고 말이죠.
저는 담배를 끊었습니다 !!
아까 빌립보서 4장을 보았는데, 거기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그대로 지켰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묻는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죠. 즉 "당신이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올바르고 착하게 살았다고 하는 증거를 보세요" 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에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을 피웠는데, 이제 끊었습니다" 라고 한다면, 하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담배를 끊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겁니다. 주로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한 소리를 듣고 끊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이죠. 만약에 "소주를 한 병에서 반 명으로 줄였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그 반병도 마저 줄여야 한다는 겁니다.
변화인가? 모방인가?
이번에 어머님 장례식을 치르면서 음식상에서 술을 모두 빼라고 제가 강력하게 요구를 했는데, 왜냐하면 술이 있으면 오래 머문다는 말이죠. 일단 부조를 했으면 빨리 돌아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술이 들어가면 대화가 순수해지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그만 붕 떠서 허세를 부린다는 말이죠. 그런 소리까지 들어주려면 정말이지 피곤하다는 겁니다. 물론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취중괴담이라는 말이죠(ㅋㅋ).
제가 그렇게 주장을 해서 집안의 술꾼들이 술을 많이 참았는데, 이제 장레식도 거의 마지막이 되어 올 사람들도 다 오고 해서, 더 이상은 조의금도 들어올 곳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갑자기 상주가 술을 마시려고 해서 제가 말렸는데, 아무리 파장 분위기라고 해도 상주가 술 냄새를 풍기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도 결국은 마셨지만 말이죠.
아무튼 제가 주장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사람들이 많이 참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니란 것이죠. 그러니 인간이 형식적으로 말씀을 지키면, 그것은 변화된 것은 아니고, 모방이라는 겁니다. 참되고 정결하고, 경건하다는 것을 모방하고 있다는 말이죠.
인간은, 변하지 않아 !!
담배를 10년 끊고 술을 10년 끊어봐야 새로운 계기가 생기면, 만약에 자기 아내가 고치지 못할 중병에 걸린다든지 하면 그만 술을 다시 마시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동안은 꾹 참고 있었는데, 결코 변화가 아니라는 말이죠.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생은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에, 그래서 남들의 평가에 맞추어서 살아간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속으로 꽉꽉 눌리고 있는데, 즉 변화가 아니고 억제라는 것이죠. 그야말로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겁니다. 병명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은 옛날 우리나라의 여성들을 대부분이 우울증 환자라고 할 수도 있는데, 물론 '화병' 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말이죠.
자기 소신과는 달리 남들에게 맞춘다는 것은, 즉 자기 개성을 포기하고 타인의 개성에 맞춘다는 것은 그야말로 노예라는 겁니다. 그래서 잘해주면 좋아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노예' 라고 하는데 말이죠. 물론 기뻐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타인에게 놀아나는 노예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지금은 조금 완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타인의 갑질은 여전한데, 을질도 생겨나고 말이죠.
저는 저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
그것이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나오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말이죠. 바리새인이 자기를 누구와 비교를 합니까? 세리와 비교해서 자기가 낫다고 한다는 겁니다.
(눅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조폭두목, 삭개오 !!
유대의 왕이 로마와 계약을 맺는데, 일정 액수를 세금으로 거두어서 로마의 원로원에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니 말이죠. 그러면 왕은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을 정하고, 그런 사람을 세리장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그러면 세리장은 그것을 입찰에 부치는데, 마치 구두를 만드는 무두쟁이들에게 가죽을 입찰에 부치듯이 말이죠.
그러면 누가 당첨이 되겠습니까? 당연히 액수를 많이 써서 낸 사람이 되는데, 그러면 그 일부는 세리장이 먹고 왕과 계약한 액수대로 낸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청에 하청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세리는 그 당시에 그야말로 죄인 중에서 괴수로 욕을 먹었다는 겁니다. 로마에서 정한 액수의 몇 배를 받아내니 말이죠. 그렇게 해야 자기에게도 남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인간인데, 그는 세리도 아니고 세리의 두목인 세리장이라는 말이죠. 양아치가 아니고 조폭인데, 그것도 조폭두목이라는 겁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한다는 겁니다. 뭐라고 합니까? 여기서는 세리가 자기를 두고 죄인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이 세리는 삭개오는 아니고 다른 세리인데 말이죠.
하지만 거기에 비해서,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돈마저도 남들에게 베풀어주니, 상대적으로 얼마나 고귀한 존재입니까? 그렇지요? 이제 손만 내밀면 곧 하늘나라에 닿을 수 있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랑질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그 맛있는 고기도 먹지 않고 야채만 먹는데, 마치 다니엘처럼 말이죠. 또한 십일조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면서, 그렇게 말씀대로 살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철저했는데, 하지만 그런 그가 어디에 갔습니까? 그만 지옥에 갔다는 겁니다. 계속 잘 하고 있다가, 사실은 잘한 것도 아니자만, 9회말 2아웃에 그만 역전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누가 천국에 갔습니까? 돈만 밝히던 세리가 천국에 갔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을 너무나 충격적이라는 겁니다. 정말로 이것은 교회에 왔다가, 복음을 알고 교회를 차버리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죠. 교회가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천국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성당도 그러하고 말이죠.
변화된 인간에게는 자연도 순종해 !!
여기에 대해서 "목사님은 참되고 경건하다고 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친절한 제가 그것을 알려드리겠는데 말이죠. 개인의 변화인데, 즉 개인의 언약적 변화라는 겁니다. 개인에게 정말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과도 연결이 되는고 하니, 자연의 변동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내가 착해지니 갑자기 비가 오더라" 라고,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혹은 "내가 금식을 하니 산에 나무가 두 그루 뽑히더라" 라고, 그런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 주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7장 6절에 보면,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라고 되어있다는 겁니다. 적어도 믿음이 있다고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과연 이런 위인이 있을까요?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아무도 없는데, 그래서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데, 즉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 상대자가 아니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꺼운 성경말씀을 주셨다는 말이죠.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 없는 정도가 아니고 마이너스인데, 즉 율법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는 말이죠. 자기가 제대로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자들은 반대를 한다는 겁니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보통 여자들이 머리카락이 긴데, 평소에는 그렇게 있다가도 집안에 일이 있으면 그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묶고 나서 일을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대자연은 누구의 말을 듣습니까?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아가는 자들의 말을 듣는다는 말이죠. 대자연의 모든 변화는 그 방향이 있는데, 무턱대고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언약의 완성자, 그분을 향해서, 그분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말이죠.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이 아무리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그 바다가 누구의 말을 들었습니까? 주무시던 예수님이 한 마디를 하니 그만 "음메, 기죽어" 라고 하면서 조용해지고 말았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곳에 한 번 가봐야 실감이 나는데 말이죠(ㅋㅋ).
그러므로 해와 달과 모든 자연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그것을 두고 "대자연이 주님 앞에 순종한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순종하도록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리가 주님에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은 순종에 포함이 된다는 말이죠.
자기가 경건하고 착해서 그렇게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그렇게 고백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역시 우리의 뜻이나 결심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자기 결단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하지만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에게 한 번 물어보라는 겁니다. "그때 제가 주님을 믿은 것은 주님이 그렇게 작용하신 것이 맞지요?" 라고 말이죠. 물론 여러분은 지금도 잘 아시겠지만, "주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이 맞지요?" 라고 물어보라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을 천국에 가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당신은 어떻게 정결하고 착하고 경건합니까?" 라고 하면, "당신은 온유하고 화평하고 성령을 받은 것 같아요" 라고 하면, 우리는 "어흥?" 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주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다시 처음부터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전도서에서는 '허무하다' 라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오면 '허무하라' 라고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그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왜 허무해야 하지? 나는 허무하지 않을 거야. 나는 쓸모가 있고 가치가 있어"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 반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인데, 즉 "왜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 상대가 되지 못하는가?" 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말이죠. 그러니 "①허무하다. ②허무하라. ③허무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죠.
1번과 3번이 동일한데, 그런데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도중에 2번이 있는데, 즉 인간의 정체가 그만 들통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인간의 정체가 말이죠. 그러니 원래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데, 즉 '허무하다' 라는 것이 맞다는 것이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①허무하다' 라는 것을 '②허무하라' 라고 이해를 하기는 하는데, 하지만 자기는 그게 싫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허무한 것을 누가 좋아합니까? 그러니 허무하기가 싫다는 말이죠. 그래서 반발이 튀어나오는데, 하지만 이것은 미처 자기도 몰랐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총각이 어떤 처녀를 사랑하는데, 그런데 자기가 배운 것은 무엇인고 하니, 간음은 아내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교육을 받았다는 말이죠. 그래서 자기는 아직 총각이고, 그리고 상대방도 결혼한 여자가 아니기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간음인데, 물론 자기는 결혼을 해야 간음이 성립한다고 여겼는데, 그것이 하나님과의 계약인 줄 알았다는 말이죠.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면, "나는 총각이기 때문에 빼주세요"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무슨 십계명이 결혼하기 전에는 해당이 없고 하느냐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간음은 무엇인고 하니, 사실 우리는 간음죄도 저지를 능력이 없는데, 자기 속에 잠복되어있던 간음이 자기를 통해서 발산되는 것이지, 결혼을 하기 전이나 이후나 이 머슴아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만 결혼을 하지 않아서 사랑을 해도 그것이 간음이 아닌 줄로 알았지만, 결혼을 해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데, 인간은 계약 상대자가 아니기에 말이죠. 착하고 경건하면 구원해주고 하는 것이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선과 악을 안다고 하는 것 그 자체로서 그만 '땡' 이라는 겁니다. 그것으로 그냥 탈락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주여, 제가 선하게 살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은 선과 악, 그 자체를 몰라야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미 선과 악을 알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이미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로마서 3장을 보겠는데, 여기에 복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니까 아주 즐겁다는 말이죠. 3장 23절과 24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여기에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포이고 선언이라는 겁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인간은 죄를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50년이든 60년이든 간에 말이죠. 나이 74세에도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으면 82세에 나올 수 있고 말이죠.
실제로 제가 88세의 영감이 요양보호사의 손을 만지는 것을 제가 보았는데, 다방 마담인 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어머니가 입원하셨던 병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러자 간호사가 "에이!" 라고 한다는 겁니다(ㅋㅋ). 어떤 사람은 중환자실에서 입에 호스를 꼽고 있으면서도 간호사의 엉덩이를 만진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러면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율법이라는 잔소리가 주어졌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러한데, 왜냐하면 죄가 없는 곳에는 율법이 없다는 말이죠. 죄가 있음을 통고해주기 위해서 "이것을 하지 말라. 이것도 하지 말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정결하고, 무엇이든 착하고, 무엇이든 훌륭하다" 라고 하는 것은, "니가 어떤 노력을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라는 의미인데, 그것도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면,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내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되는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통로가 무엇입니까?" 라고, 즉 정말로 살아계신 하나님과 진짜 구원을 받는 사람과는 그 어떤 계통이 형성되는지,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금메달을 몇 개를 따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는 할 수 없는데, 자기는 무능한 자인데, 그런데 죽어서 눈을 떠보니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천국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그 통로, 즉 파이프에 주목하자는 것이죠. 거기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이죠.
값없이 !!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뭐라고 합니까? 세 글자로 '값없이'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렇게 값없이 의롭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만큼의 희생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값없이 의롭게 된 인간이 있는데, 그것도 하늘나라에서 말이죠.
자기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흠도 티도 없구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인데, 자기가 대충 봐도 흠이 그야말로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이렇게 정결하지?" 라고 하시는데, 이번 십자가 마을의 겨울수련회에서 이 내용을 하지 싶은데 말이죠.
우리에게 꽂힌 주님 !!
그것을 두 글자로 '사랑' 이라고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몸매도 아름답다는 겁니다. TV를 켜보면 이영자가 종종 나오는데, 뚱뚱한 젊은 여자인데 말이죠. 먹는 프로에 주로 많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뚱뚱한 몸매조차도 매력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나는 너를 보다가 마른 여자를 보면 너무 싫어"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ㅋㅋ).
그것을 '꽂혔다' 라고 하는데, 주님이 바로 우리에게 꽂혔다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꽂힌 것이 아니고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이유가 없는데, 자기 사랑하기에도 바쁘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 사랑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데, 그런데 주님이 우리에게 꽂혔다는 말이죠.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비록 남을 등쳐먹는 세리와 같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우리를 예쁘게 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랑인데, 그 사랑 앞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러니 그런 사랑 앞에서 제발 겸손을 떨지 말자는 겁니다. 사랑은 미안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게 '러브스토리'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인데 말이죠.
우리가 회개를 해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하든 말든 주님은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것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죠. 그것을 어제 낮 시간에 "장래의 운명이 먼저 적용되었다" 라고 했는데 말이죠. 이미 확정된 장래의 운명이 미리 적용이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24절에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인 선포인데, 우리가 행동을 의롭게 한다고 해서 변동되고 말고 할 사항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계약서에 이미 주님께서 자기의 피 묻은 손으로 사인을 하셨는데, 그리고 그 피는 우리의 행함이 전혀 섞이지 않는 오직 예수님의 피라는 말이죠.
우리가 희생을 한다고 해서 계약서의 효력이 더 발생하고, 죄를 짓는다고 해서 효력이 덜해지고 하는 것이 전햐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는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피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피라는 겁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6장에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겁니다. 영생의 조건은 오직 예수님의 피인데, 우리 자신의 피, 즉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 교회에 충성하는 것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죠.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계속해서 로마서 3장을 보겠는데, 25절과 26절입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서 사인을 !!
25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계약의 완성이라는 겁니다. 그 동안 계약서의 사인자리가 비어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산다" 라고 한 다음에 사인을 해야하는데, 그런데 사인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들어갔다가 빠졌는데, 그러니 전혀 합당치 않다는 말이죠.
다 이루었다 !!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서 사인을 하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바로 이 한 마디를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고 하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우리 쪽에서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막 놀면 되겠네요?" 라고 하는데, 물론 막 놀면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고 하니, 이 언약이 우리 속에 과제로 들어오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허락도 없이 말이죠. 그렇게 예수님의 피가, 즉 값없는 은혜가 '쑤욱' 들어오게 되면, 변화가 없던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이기주의인데, 즉 "나는 가치가 있다. 나는 잘났다" 라는 것이죠. 그게 우리 속에는 가득한데,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인데,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안에 꽉 차있던 이것이 우리의 껍질부분으로 밀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는 값없이 주시는 죄 용서가 작용하게 된다는 말이죠.
두 개의 '나' !!
그러면 우리 속에는 두 개의 '나'가 생기게 되는데, 즉 값없이 용서를 받은 '나', 그리고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인 '나', 그렇게 말이죠. 그러면 그게 같이 결합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바깥으로 밀려난 것을 두고 '죄' 라고 하고, 안 쪽에 있는 것을 '의'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이라는 겁니다. (녹취자 - 의인이 아닌가요?) 그리고 바깥에 밀려난 것은, 그것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는 죄인 중에 괴수가 된다는 겁니다. 아주 즐겁게 말이죠.
어떤 사람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무슨 그런 짓을 하는가?" 라고 하는데, 그러면 "나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비꼬면서 "그것 참 편리하구나. 참 얼굴도 두껍다" 라고 나올 것이고, 그러면 "나도 나처럼 얼굴이 두꺼워봐라.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어" 라고 한다는 말이죠.
성도에게는 그런 낯두꺼운 자유가 있어서 하는데, 그런 뻔뻔함의 자유, 그야말로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 숨기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물론 숨길 수도 없지만 말이죠. 예수님의 피, 즉 의가 자기 안에 있는데 어떻게 숨기고 말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주어진 과제는?
그러면 과제가 어떤 것이고 하니, 주님의 의가 곧 언약의 완성인데, 그러면 여기서 배운 것을 복습해봅시다. 언약이 완성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자연의 변화인데, 우리가 열심을 낸다고 해서 해가 빨리 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은 어디를 겨냥해서 응축이 된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새언약인데, 그 새언약이 우리 속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과제가 주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까, 자기에게 일어난, 즉 자기 안에 있는 예수님의 의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움직이게 되는데, 그러면 죄인을 통해서 바깥에 있는 자연이나 사회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장차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가 없는 모임에서는 그저 화기애애한데, 조그만 있으면 추석이 되는데, 그러면 저는 긴장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을까 싶어서 말이죠. 물론 현장을 덮치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고스톱을 치면서 같이 깔깔 웃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ㅋㅋ). 문재인 대통령을 씹으면서 정치 이야기도 할 것이고 말이죠. 그러다가 마지막에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가 그만 싸늘해진다는 겁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의가 있는 자가 있는 현장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있는데, 자기는 친해지고 싶은데 졸지에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요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렇게 미움을 받으면 우리는 짜증이 나는데, 그러면 그 탓을 또 주님에게 돌린다는 겁니다. "괜히 복음을 말해가지고 이게 뭐꼬?"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게 주님의 작전인데, 우리로 하여금 온갖 욕을 다 듣게 만든다는 겁니다. "니가 말하는 것은 내가 알던 기독교와는 다르네? 너는 이단에 빠졌구나. 정신 차려라" 라는 소리를, 그것도 분위기가 좋아야하는 명절에 바가지로 듣게 된다는 말이죠.
아는 사이 !!
그러면 우리는 "주님은 왜 지금의 상황을 이렇게 힘들게 만들었습니까? 정말로 너무하십니다" 라고 나오는데,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정상적인 관계' 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 뭔가 언급을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사이' 라는 겁니다. (아멘!!)
이것이 오늘의 강의제목이 되지 싶은데, 참 멋진 제목이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주님과 안다는 것은 사이좋게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나서 주님에게 대드는 그 순간, 바로 그때 주님과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①허무하다' 라는 것이고, 그러면 '②허무하라' 라고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반발을 한다는 겁니다. "저는 우리 집안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동서에게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제가 복음을 안다는 이유로 사이가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동안 쌓아온 체면은 무엇이 됩니까? 그야말로 엉망이 되고 마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주님은 "잘해주어라. 아니 누가 뭐라고 해?"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절에 다니는 동서가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나옵니까? 주님이 동서와의 관계를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하면서 주님에게 대드는데, 그것이 바로 '허무하라' 라고 하는 것에서 나오는 반발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 보면, "아하, 주님에게 돌려야 하는 그 공로를,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같이 누리려고 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에게 미처 자기도 몰랐던 그런 얄팍한 수작이 숨어있었음을 말이죠.
자기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훌륭하거나 착하거나 경건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어느 사이에 주님의 그 훌륭함에 동승해서, 자기도 같이 훌륭해지려고 하는 욕구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죄인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도 믿고 남들에게 욕도 듣지 않고, "당신은 정말로 착합니다. 그야말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인기라는 것은, 들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사람을 얼마나 건방지게 만드는지 모르는데, 자기가 그만 업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밝음은, 반드시 어둠을 거쳐서 !!
그래서 여기서 새로운 공식을 하나 제시해드리겠는데, 하늘나라가 밝는데, 그런데 그 밝음에서 그냥 밝음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둠을 필수적으로 거쳐서 밝음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어둠의 절차가 필요한고 하니, 물론 우리는 헤헤거리면서 밝음에서 바로 밝음으로 가고 싶어하는데,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이 된다고 하니, 우리는 직통으로 바로 거룩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죠.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을 가까이하고 악은 멀리 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을 자기 손으로 측정하고 싶어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밝음에서 바로 밝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어둠을 경유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어둠이 내려앉았는데, 그때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없는 부활은 없는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밝음에서 어둠을 경유해서 밝음으로 갈 때, 우리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바로 밝음으로 가지말고, 그런 새치기는 반칙이니 안 되고, 먼저 어둠에 뛰어들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즉 어둠에 참여하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이것이 조금 전에 이야기한 "①허무하다. ②허무하라. ③허무하다" 라는 것과 똑같은 의미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둠에 참여하는 것인데, 즉 자기가 착한 줄로 알았는데 성경말씀을 보는 순간, 평생을 두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자기가 다 퍼낼 수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비가 많이 와서 집에 물이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처음에는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는데,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계속해서 물이 들어오면 나중에 짜증이 난다는 말이죠. 그러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악을 버리려고 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악이 있으면 재수가 없는 것도 같이 붙어서 온다는 것이죠. 나쁜 짓을 하면 꼭 경찰이 오지 않아도 겁이 나서 떤다는 겁니다.
어제 낮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라고 말이죠. 이중생이 경찰이 잡으러 오니까 잡히지 않으려고 죽은 사람처럼 변장을 하는데, 마치 눈을 감으면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니, 자기는 죽지 않았으면서도 죽은 체를 한다는 말이죠. "내 탓이요"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인간은 흉내만 낼뿐 !!
그러니 남들이 보면 경건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에 가서 "부족합니다.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기도를 하는데, 그러면서 시계를 본다는 말이죠. 30분을 채우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서 나와서는 어떻게 나옵니까? "내가 오늘 회개할 기도는 다 했으니, 오늘 좋지 않은 일만 생겨봐라. 그것은 모두 하나님 탓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살살 비는 것인데, 아이들은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서 자랐고 말이죠.
만약에 아버지가 아이를 야단친다고 했을 때, 그 아버지의 세계관을 모르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없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세계관에서는, 징벌적인 차원이 아니고는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너희들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했을 때, 그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것이 좀 궁색하겠구나" 라고 여겼는데, 즉 자기들의 생존차원에서 이해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좀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다" 라고, 그야말로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했다는 말이죠.
처음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데, 물론 목사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성경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집안에 우환이 있구나" 라는 정도로서 이해를 한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생각인데, 그래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네.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우환이 생긴다고 하네. 그러면 돈이 좀 들어도 십일조를 하면 되지"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과연 어떤 차원입니까? 교회에 관심이 있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차원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지금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변환하기 위해서, 교회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것을 두고 제가 '내 것 지키기' 라고 했는데 말이죠.
여기서 사무엘상 23장 9절을 보겠습니다.
(삼상 23:9)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대표성 !!
이것도 교재 97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에 '에봇'이 나오는데, 이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슈트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에봇이 이동하게 되면, 이 에봇은 모세언약에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 특징은 대표하는 것인데, 즉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를 하면, 이러한 대표성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이 대표성에 관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대제사장이 대표성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은 누구만 인정하는고 하니, 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대표성만 인정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구약에서 대표성을 가진 대제사장은 어느 지파 출신입니까?
12지파들 중에서 레위 지파인데, 이 레위 지파는 이미 이스라엘에 속해있다는 겁니다. 구약의 특징은 사람들 가운데서 대표성을 뽑는 것인데, 그런데 신약은 무엇인고 하니까, 사람들 가운데는 대표성이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대표성은 이 땅에 없는데, 하늘로부터 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출생 자체가 인간의 육과 상관이 없으니 성령으로 잉태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임신해서 출생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이 땅에 있는 인간은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수 없는데, 즉 대표성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죠.
물론 우리도 포함이 되는데,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안다고 해도 주님의 계약에 그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책임감에 눌리지 말고 가볍게 살면 된다는 말이죠. 어제 낮 시간에 낭비하라고 했는데, 낭비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어차피 주님은 우리의 행함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이죠.
여기서 히브리서 92장 23절에서 28절을 보겠습니다.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모형의 역할은?
여기 23절에 보면 모형이 나오는데, 구약은 모형이라는 겁니다. 24절에서는 그림자라고 하고 말이죠. 그러니 실체가 오게 되면 모형은 더 이상은 쓸모가 없다는 말이죠. 주님은 우리를 모형으로 사용을 하시는데, 그래서 우리를 죽인다는 겁니다.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하는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모형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보면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하는데, 이것은 죄와 상관이 없는 것인데, 그래서 28절에 보면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는 모형인데 무슨 모형인고 하니, 예수님으로 인해서 죄 없음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모형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 모형의 역할이 끝나면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을 동안에는 모형이면 되는데, 그것을 예수의 증인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모형이 아무렇게나 모형이 아니라 형상이 있는데, 그 형상은 하늘의 실체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바깥은 죄이고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있는데, 즉 예수님의 의가 들어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의를 우리는 우리의 죄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죄를 짓지 않았는데 어떻게 죄를 보여줍니까?" 라고 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반발'을 하게 되어있는데, 그 반발이 바로 죄라는 말이죠. "주님, 저는 이렇게 망가지기 싫습니다. 한 달 수입이 900만원에서 870만원이 뭡니까? 너무 하십니다" 라고 하는데, 그 30만원이 바로 반발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식이 전교에서 항상 1등을 했는데, 이번에 2등을 했다고 불평을 한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반발이라는 말이죠.
이번에 어머니 장례식에서 장의차를 운전하는 기사가 하는 말이, 자기가 고등학생 두 명을 옮긴 적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전교에서 1등을 하던 아이와 2등을 하던 아이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의 엄마들이 너무 설치는 바람에 그만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고 하는데, 이것이 정말로 대구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왜 1등을 해야합니까? 그게 모세언약에 나와있습니까? 인간의 가치는 전교1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란 말이죠. 여러분은 1등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한 번 있지 싶은데, 계속해서 1등이 아니고 한 번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좋은 머리를 가지고 집안을 자랑하라고 태어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죠.
우리는 이 땅에 모형으로 태어났는데, 그 모형의 역할이 무엇인고 하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의 잘남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지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주님과 '아는 사이' 라는 겁니다.
우리는 '아는 사이' !!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고 하니까, 어린양의 희생으로 인해서 나라가 만들어졌고, 그래서 그 나라는 인간들끼리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동행한 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십자가를 기준으로 해서 천국과 지옥은 이미 끝났는데, 즉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루셨다는 말이죠.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심어주셨는데,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곧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는 이 세상을 달리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우리와 같은 소자를 이 세상에 보내서, 말씀에 의해서 새로운 과제가 유발되도록 우리를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자기 것 챙기기에 급급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새로운 복음적인 과제를 유발시키시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직도 우리를 이 세상에서 데리고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으로부터 과제가 주어진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8,9,16 오후 5시에 마침.
우리 사이 아는 사이 복음 사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