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살았다 (마 25장 32- 46) 대전- 103강
이근호
2018년 8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 32-46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25: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32정부터 보겠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어요. 심판 주 되시는 주님께서 이미 판정을 내렸습니다. 오른 쪽과 왼쪽을 구분하고 다음에 판정을 내린 입장에서 이 쪽은 보내라! 천국에 참여 할 사람은 천국에 참여해라! 빠이! 빠이! 이미 판정이 났는데 거기에 뒤늦게 언급할 이유가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구분해 놓고 오른 쪽과 왼쪽을 구분해 놓고 네가 왜 왼편에 서 있고 너는 왜 오른 편에 서 있는 지를 이미 갈라놓고 이야기 한다고요.
그리고 저 뒤에 나온 말은 뭐냐하면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이럴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이렇게 나온 다고요. 지옥 가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제가 언제 주님께 마실 것을 안주었습니까? 알았으면 진작 주었지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여기사 이야기 하는 것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은 본인이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결정 났다는 거에요. 교회 백날 다녀도 소용없어요. 천국 가려고 애써도 소용없어요. 안다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거잖아요. 알아도 소용없고 몰라도 소용없어요.
알아도 소용없으면 통곡이라도 하지 몰라도 소용없으면 통곡할 것도 없어요. 그냥 사세요에요. 그냥 막사세요에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그냥 살고 있어! 내가 알아서 뽑을 테니까! 그 말이에요. 회사가 사람을 뽑을 때 입사공고를 안 낸다니까요. 인사 책임자가 사장님이라면 그냥 놀고 있는 사람에게 “야! 너 와!”보통은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하잖아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는 지 이야기 하고 가셔야지 이러잖아요. 그런데 주의 뜻은 뭐냐하면 “야! 너 와!”이렇게 하면 그냥 끌려가듯 가는 거에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딸려 가는 거에요. 그냥 유괴 당하는 것처럼.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 몰라도 소용없는 사람은 그냥 나둬버려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내어버려 두는 거에요. 거기에 동생애가 나오는데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든 말든 여호와 증인이 군에 가든 말든 니 마음대로 해! 그냥 방치해요. 유괴하는 것의 반대말은 방치하는 거에요. (방치 = 내어버려 두사) 그냥 내버려 두는 거에요. 이것을 보면 사도행전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사도행전에는 선교가 없지요. 선교가 없다면 구원은 어떻게 받는 가? 외재성, 성령이 오지요. 성령이 오면 주님의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하기 싫어도 되야 돼요.
빌립 집사가 싫어도 사막에 가야 되고 누굴 만나야 되고 사도 바울이 싫어도 폭풍 만나야 되고 토인 만나야 되고 누굴 만나야 되요. 내가 뭘 했다 안했다가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사도와 베드로가 나오잖아요. 주님과의 관계를 주목해야 되요. 성령께서 어떻게 하셨냐가 중요하지 몇 명 건지고 몇 명 만났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어차피 이 땅은 죽음의 세계이고 사도들은 다 죽어가고 야고보도 죽지요, 베드로도 나중에 잡혀가고 사도 바울도 죽으러 가지요. 죽으러 가도 상관없어요. 이 관계가 살아 있잖아요. 사도 바울이 죽어도 이 관계는 살아 있잖아요.
인간은 처음부터 죽은 거에요. 주일 날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뒤에서 떠밀고 앞에서 댕기고 인간은 처음부터 죽은 거에요. 살았다는 기준을 누가 정하냐 하면 하나님이 정해야 됩니다. 낙원의 조건이 뭐냐하면 선과 악을 기준을 모르는 것이 낙원의 조건입니다. 선과 악을 모른다는 조건하에 이 조건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에요. 선을 모르고 낙을 모르는 조건하에 이간 바보 등신이지요.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고 하나님의 의도 몰라요. 이건 바나나, 이건 사과 이것만 아는 거에요. 그냥 주는 것 먹고 그냥 사면 되요. 더 고민 할 것도 없고 하지마라는 것은 안 하면 되요.
선악은 모르지만 따먹지 마라하면 안 따먹으면 되는 거에요. 그것 빼놓고 나머지는 먹으면 되는 거에요. 예수 믿으라 하면 믿으면 되는 거에요. 월급이 안 나오고 애가 아프고 신경 쓰지 말라니까요. 그냥 예수님만 믿으면 되요. 아브라함이 그냥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되요. 아는 게 탈이에요. 안다는 것은 그냥 아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으로 안다는 것이 주의 판정입니다. 선과 악이 주입된 앎이에요. 안다는 게. 사람을 볼 때 당신을 좋은 사람으로 압니다. 뭐가 앞에 붙어요. 나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좋은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으로 압니다.
나는 당신을 압니다, 해고지하는 사람으로 압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을 그냥 만나는 게 아니에요. 선과 악을 토대로 해서 만난다니까요. 그래서 선과 악은 확장이 된다고 했지요. 선과 악이 선만 있는 게 아니에요. 선은 뭐냐? 악이 아닌 것, 악이 뭐냐? 선이 아닌 것. 이렇게 된 겁니다. 짝을 이루는 것, 선과 악의 개념은 짝이 없는 독자적인 개념은 없어요. 예를 들면 예쁘다의 뜻이 뭐냐하면 반드시 안 예쁨과 견주어 예쁨이 되는 겁니다. 여러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시골 강원도 골짜기에 주민 수가 한 50명 남짓한 곳에 예배당이 하나 있는데 30대 아가씨가 오르간을 친다.
총각이 네 명이다. 여기서 총각이란 20대에서 50대 까지를 말합니다. 이 마을에서 예쁘다의 의미는 뭐냐하면 이상형(ideal type) 이 기준이 되요. 왜냐하면 20대가 예쁜 이유가 20대이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50대 총각이 볼 때 자기는 30년이라는 세월의 굴곡이 있잖아요. 아무리 예뻐도 세월이 지나가면 수분이 빠져요. 탄력성이 떨어진다고요. 여러분 나이 80된 할머니가 다리 내 놓고 옷 입은 것 봤습니까? 못 내 놓지요. 생기 있지 않으니까 바짝 마른 육포 같은 다리로 못 내놓고 나이가 들수록 치마 길이가 길어지잖아요. 십대나 20대는 치마 길이가 짧아져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라니까요. 이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그런데 이 마을에 등산 왔다가 길을 잃어 20대의 서울 아가씨가 두 명이 왔다. 그 때부터 반주하던 아가씨는 이쁘다가 아니라못 생기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ideal type)이 깨지는 겁니다. 인간의 이상, 초원적인 것은 어디서 만든다? 나의 경험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진짜 초월을 봐서가 아니라, 이상 세계를 봐서가 아니라 지금 보다 더 나은 무엇, 지금 보다 월등한 무엇. 이것이 어디에서 나왔다. 선과 악에서 나온 겁니다.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만은 선과 악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로 보냐 하면
철학자나 윤리학자들은 뭐로 보냐하면 인간 속에 선이 있다고 본 거에요. 악이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것을 실마리라 하는데 실마리가 뭐냐 뭔가 둘둘 말린 곳의 끄트머리를 실마리라 해요. 이것에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나온다면 인간 속에 선과 악이 함께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선을 악으로 쫓아내면 내 마음은 개선되겠지요? 정화 되겠지요? 왜 이런 생각을 하냐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 그럼 사회가 좋은 사회가 좋겠어요? 나쁜 사회가 좋겠어요? 좋은 사회라는 것은 뭐냐?
질서가 잡히고 좋아하는 세계라는 말이죠. 질서가 잡힌다는 것은 남들이 누구와 같았으면 좋겠어요? 내 마음 같았으면 좋겠지요. 안 싸우고 그래서 이 사회는 정의로와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정의를 최고의 덕으로 본 겁니다. 그러면 정의롭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자기 일을 잘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보는 겁니다. 통치자는 지혜가 있어야 되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은 용기가 있어야 되고 농사짓고 공사장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은 참아야 되고 절제가 있어야 되지요. 지혜의 덕, 용기의 덕, 절제의 덕 각각 자기 일에 맞도록 갖추려면 이것이 뭐냐? 사회는 정의롭다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뭐냐? 조선 시대 아닙니까? 상놈은 상놈답게 해야 되요. 상놈이 지혜로우면 어떻게 됩니까? 나라 꼴이 안 되지요? 그렇지요? 지혜는 통치자만 갖고 있어야 되요. 통치자는 세상을 보다 넓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대장간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넓게 보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데 양반들이 10냥 밖에 안 내. 100냥 내놔! 하면 나라 꼴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 되지요? 참아야 된다고요. 가정에서 남편은 뭡니까? 하늘. 여자는 땅, 여자의 할 일은 참아야 하느니라 여자의 덕은 참아야 하느니라 . 왜? 남자는 밖에 나가 큰일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리고 여자가 배우면 안돼! 여자가 배우면 지혜로와져 세상을 넓게 보기 때문에 남편의 무식이 들통나요. 가정의 남자와 여자가 바뀌게 되면 나라 꼴이 안돼요. 그레서 여자는 항상 남자보다 무식해야 되고 더 알면 안 되고 항상 집구석에서 군불만 떼면 되지 여자는 오직 남편 말만 들어야 되요. 남편 말만 들어야 되고 시키는 대로 들어야 되요. 그렇게 되면 여자는 시집이라는 사회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절제하고 칭찬받고 이게 너에게 주는 복이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 볼께요. 인간에겐 뭐가 있다? 선과 악이 있다. 이것을 성경에선 한마디로 육이라 했어요.
이게 바로 지옥이에요. 선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냐 내 안의 갈등인 선을 키우고 악을 내쫓음으로 천국에 간다. 이게 바로 육입니다. 한국 교회는 뭡니까? 사람들을 지옥에 다 보내요. 지옥에 다 보냅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천국은 어떻게 간다고 했습니까? 내 선을 키우고 악을 내쫓아서 훌륭한 사람 되면 천국 갑니까? 어떻게 합니까? 그런 나를 잊어 버려라! 지금 선의 게이지가 올라가고 악은 내려갑니다. 신이 납니다라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거지요. 그 자체를 왜냐하면 천국은 아버지가 누구에게 보낸다? 예수님을 보낸다. 그러면 천국 지옥은 누가 다 이루었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어요.
그러면 이상형(ideal type)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에요. 우리 힘으로 잊어버리지 않아요. 어떻게 나를 잊습니까? 십자가 마을에 모였더라도 말씀 들을 땐 말씀을 보잖아요. 다들 잊어 버려요. 50분하고 10분 쉬잖아요. 은혜 받은 건 다 날아가고 잊어 버려요. 나중에 끝나고 나면 뭐 때문에 모여 있나 하지요. 10분 쉴 때 전부 자기 생각만 하지요. 그것을 도루묵이라 해요. 다시 할 께요. 낙원이란 선과 악을 모르는 조건하에서 낙원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2장이거든요. 그런데 3장에 보면 이미 우리가 선과 악을 알게 되지요. 왜? 선과 악을 왜 모르는 조건이야 하면
낙원은 다시 말해 천국은 악마를 넣어 주지 않는 조건 하에 천국이에요. 이게 왜 어려운 말이냐 하면 천국 없는 지옥 없고 지옥 없는 천국은 없어요. 왜냐하면 지옥과 천국은 같은 조를 맞춰 만들어 낸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낸 거에요. 그러면 지옥은 누굴 위해 만든 것이냐? 악마를 유황불에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겁니다. 악마로 하여금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와요. 여러 번 이야기했기 때문에 유황불에 거짓 선지자가 나와요. 항상 지옥은 누굴 위해 있는가? 악마가 안 나와요. 성경은 제일 뒤로 가게 되면 앞에 있는 것의 결론이 요한계시록에 다 몰려 있어요.
천국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선악과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그러면 천국에는 뭐가 있냐 하면 생명 나무가 있어요. 예수님 자신이 생명나무라고 아까 했지요.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니까 결국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뭐냐하면 생명나무만 알아야 될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선악과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못 알아듣지요. “내가 그럼 지킬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증인 될까요?”자꾸 외부에서 오는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이미 선으로 여긴 자체가 잘못이잖아요.
주님 옳소이다! 그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주님은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옳소이다야!” 옳소이다라고 해놓고 십자가에 죽여 버리고서, 주님은 내게 꼭 필요한 분이다하면 주님은“니가 알아?”제가 주님은 알지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 모르는 이유를 주님은 아셔요. 그게 뭐냐하면 죽었기 때문에 숨 안 쉰다고 죽은 것이 아니고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악마와 한 통속 되면 죽은 거에요. 아직도 생각 중에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라라고 했는데 왜 여기서 닭을 거론 하셨을까?
이 말씀을 안지가 40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 부분이 깔끔하게 풀리지 않아요. 계속 생각하는 거에요. 왜 닭이 들어가는 거에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오늘도 오면서 그 생각을 했거든요. 제가 정리 한 것은 이거에요. 닭이 울어 버리면 뭐가 되요? 소나 돼지가 아닌 닭다운 닭이 되지요. 닭이 음매~하면 닭이 아니잖아요. 닭이 운다는 것은 닭이 가장 닭다울 때이지요. 베드로가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한 그것이 가장 베드로다울 때에요. 다시 말해 베드로가 가장 악마스러울 때. 주님 앞에서 베드로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낸 것은 자기가 뭔가 하겠다고 할 때.
그게 바로 주님과의 단절, 끊어짐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뭘 하겠다는 것. 내가 목숨을 바치겠다는 거에요. 여기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은 본인이 살아있다는 생각하는 거에요? 죽어 있고 생각하는 거에요?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살아 있으니까 귀하게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너무나 모르는 거에요. 그야 말로 사탄아! 물러가라!~와 똑같은 것이거든요. 제자들에게 나는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난다는 것을 마태복음 16장에서 이야기 하셨지요.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나서 이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보면 예수님이 죽으실 때 값을 치루기 위해 죽으시는 거에요. 예수님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에요. 주구의 값을 치루기 위해 죽는 겁니다. 어떤 값이냐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값이에요. 베드로는 자신을 살아 있다고 봤지요. 그러니까 자기에겐 귀한 목숨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내 목숨은 귀하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위인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침에 눈 만 뜨면 살아야겠다는 것뿐이에요. 음주 운전으로 다쳤다. 뭐 보상 좀 해주면 되겠지라고 하지요. 그런데 죽은 사람이 92살 된 사람과 96된 할머니가 죽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 참 땡 잡았네!
내일 모레 죽을 사람인데 받혀 죽었으니 보상금 한 5000만원 만 되도 자식들 좋아 하겠네!가 되요.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하나는 20대 고 하나는 30대이면 아이고! 세상에~이렇게 되는 거에요. 세월호에서 빠져 죽은 아이들이 17살이다 하면 아이고! 세상에~ 이게 뭡니까? 스마트 폰 밧데리가 아직 남아 있는 거에요. 저녁에 자기 전에 스마트 폰 밧데리 충전 하지요. 아침에 보면 밤새 충전해서 꽉 차 있지요. 우리는 그것을 생생한 생명으로 보는 거에요. 하루 종일 사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점점 량이 줄지요. 우리는 우리를 밧데리 충전하듯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어릴 때는 생명력이 넘쳐서 그 만쯤한 애들은 못생긴 애가 없어요. 머리 깎이나 안 깎이나 다 이뻐요. 왜 생명이 충만하니까 그런데 나이 95세치고 예쁜 사람 봤습니까? 괴물이죠. 안 볼란다! 요양 병원에 있는 부모를 잘 못 찾아가게 갑니다. 옛날 좋은 기억으로 찾아 가지요. 막상 보게 되면 코에 뭘 꽂고 하아~ 하아~숨 내쉬고 들이 쉬고 있어요. 눈 떠 보세요 해도 감고 있어요. 그런데 그 부모가 서른에도 그랬습니까? 안 그랬지요. 잠재되어 있어요. 어닌 애 안에 그런 노인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기 찰 노릇 아닙니까? 주님은 시간을 이미 끝난 시간으로 봅니다.
이미 죽었던 안목으로 어린 애를 봐요. 아까 첫 째 시간에 아말렉의 어린 아이도 진멸하라 할 때 조금도 아깝지 안 습니다. 왜 어차피 늙어 죽을 아이니까. 네 눈엔 어린 애로 보이냐? 내 눈에 90세 노인으로 보인다. 아무 의미 없지요. 왜 질적으론 이미 선악과를 알고 있으니까. 본능적으로 선악을 알고 있어요. 선악을 아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내가 절대자인 조건으로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이미 신처럼 됐음을 유지하는 그것이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성품입니다. 그것을 맹자는 사단칠정[四端七情] 인. 의. 예, 지라고 하는데
<참고>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은 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인간의 본성(本性)에서 우러나오는 마음(감정)으로서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착한 본성[德]에서 발로되어 나오는 감정을 말하고, 칠정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감정이다.
인과 의의 차이점은 애가 만약에 어른에게 맞아서 아프면 불쌍해서 꼬옥 안아 주는 것이 인이에요. 의는 애 편에 서서 어른을 패 주는 것이에요. 소극적이고 적극적이에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대기업의 횡포에 의해서 작은 마트가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할 때 인은 뭐냐하면 아이고! 안됐다하며 그 집에서 물건 하나 더 사주는 것이 인이라면 머리에 띠 두르고 대기업은 물러 거라! 대모 하는 것이 의에요. 여러분은 인을 할래요? 의를 할래요? 예란 남을 배려하는 겁니다. 지는 지식이지요. 이것이 인간 속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 속에는 이런 것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것도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선이 들어 있고 악도 들어 있으니까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 군자 같이 산다는 것이 뭘 의미 하는지 한 평생 살아가는 것이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면 해야 될 일이 뭐냐 내 안에 있는 선으로 악을 몰아 내는 것. 이게 하늘의 뜻이라는 겁니다. 맹자 이야기를 했는데 가만히 들어 보니 교회 이야기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가 지옥이라는 것에요. 계속 관심사가 어디로 쏠립니까? 날마다 큐티 하면서 나는 얼만큼 복을 받는 가? 착하면 복을 준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이상형(ideal type)이 누구냐 하면 내가 나의 이상형이에요. 거기다가 목사가 뭐라고 하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야 하면 거룩한 분이잖아요. 거룩한 분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게 되면 나머지는 복이 그냥 주어지는 복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지상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들, 얻고자 하는 것들, 자식이 공부 잘하고 내가 부자 되는 것, 내 몸 건간 한 것, 이런 것들을 보너스로 주겠다는 거에요. 여러분 근원적으로 뭐가 잘못 된 줄 모르겠어요? 근원적으로 우리가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잘못 된 거에요. 주제 파악을 못해서 그래서 주님께서 너는 막 살았다는 거에요. 언제 이야기해요? 최후 심판 때. 천국 가는 사람도 막 살았고 지옥 가는 사람도 막 살았고.
제목을 막 살았다로 해야 겠어요. 그냥 막 살은 거에요. 그런데 막 사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하면 악마의 성품으로 막 살았어요. 천국 가는 사람이나 지옥 가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나는 알아요. 내가 어떻게 산 지를 알아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그것도 생각 안 나겠지만 치매 안 걸린 조건 하에 알아요. 내가 알기 때문에 뭘 몰라요? 나 밖에 모르는 이런 인간이 주님께 물을 대접 한 것을 몰라요. 왜? 100% 내가 한 것만 알기 때문에 내가 주님이 목마를 떼 마실 것을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준 기억이 안나요. 하루 종일 나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도착해보니까 어디이다? 천국이다. 우째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 까? 아까 요한복음 6장 66절이 그거죠. 하나님은 자기가 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 한 적이 없다는 거에요. 그 결과물이 바로 아무도 모르고 예수님에게 유괴 당해서 와보니까 천국이라 그러면 그 사람이 천국에 가서 자기 자랑하겠어요? 자기가 행한 것 내 놓겠습니까? 안 내 놓겠습니까? 더러운 죄 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요. 그래서 면류관마저 부끄러워 쓰질 못해요. 후딱 벗어서 누구 발 앞에 던집니까? 주님 발 앞에 던지지요. 주님께서 쓰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나님 주와 예수님 주가 쓰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고백을 최후 심판 때 가서 할까요? 미리 해야 됩니까? 지금 마태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십자가 지고 난 후가 되면 모든 일이 마태복음 25장은 끝났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통보합니다. 물론 인간의 시간상으론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재림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이미 끝났어요. 버블이 우리말로 풍선이지요. 풍선 안에처럼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 있으면 예수 안에는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죽어 있는 우리에게 뭘 찾았습니까? 값을 치룬 거에요. 바깥에 보면 뭐가 있습니까? 율법이 있어요. 율법 있는 곳에서 비누 방울 안을 보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애들끼리 학교에서 놀다가 선생님이 누구 하나를 편애하니까 사랑 받지 못한 쪽에서 “에에 내가 어제 물건 훔치는 것 봤어요. 고자질 하는 거 있잖아요. 율법은 계속 고자질 하는 거에요. 율법은 선악으로 고자질을 해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선생님이 오기 전에 누구와 있어야 하면 자기들끼리 놀았잖아요. 자기들끼리는 고만고만 같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선생님이 와서 편애를 한 거에요. 편애가 있어야 질투가 유발 되요. 지금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함으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뭘 유발 시키냐 하면 질투심이 유발 되게 만드십니다. 제는 한 게 없는데 지금 주님 품안에 있어요라고 질투하게 만든다니까요. 그러면 백부장은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 하라고 해서 했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왔어요. 내 쪽에서 뭔가 준비한 게 없어요.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음식 준비하고 했잖아요. 그런데 여동생 마리아는 뭐했습니까? 아무것도 그냥 말씀만 듣는 거에요. 왕 싸가지에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좋은 쪽을 택했다 하지요. 그러면 어떤 목사님들은 그래 갖고 목회 안되면 어떻게 하냐? 전부 왕 싸가지가 돼서 헌금도 안해 말씀만 듣고 도망가기 바빠서 교회 형광등이 나가든 화장실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어~ 자기 편한대로 살아 그러면 목회 자체가 안되잖아요라고 한다면 닭 모가지 날아가듯 해야 되요. 왜? 완벽한 교회를 해 보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완벽한 교회를 해서 완벽한 신자이고 싶어 해요. 최후의 악마의 시험이 그겁니다. 내가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해야 되고 완벽한 목사, 완벽한 집사, 철저한 성도 되려 해요.
이 유혹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십자가 마을에서 너 뭘 모른다 하면 기분 되게 나쁘지요. 아니야~ 알아 하고 반박 하지요. 이게 결국 뭐에요? 진짜 닭 목을 치듯 해야 되요. 사이다의 병뚜껑을 열면 팍 하고 쏟아져 나오지요. 차여 있던 것이 뿜어져 나와야 되요. 나의 완벽도 빠져 나가야 되고 철저함도 빠져 나가야 되고 내가 복음 안다는 자랑 질도 빠져 나가야 되요. 율법은 옛날에 예수 안에 있지 않던 시절을 생각나게 해서 자꾸 유인하는 거에요. “나와! 거기서 서로서로 착한 자랑하던 그 시절이 좋았잖아! 네 믿음 좋다고. 신앙 좋다고 자랑할 때 네 기분 좋았잖아! 너 왜 거기 가 있어?”자꾸 나오라고 하는 거에요.
그 때 주님은 뭐러고 하십니까? 얘는 율법에서 이미 죽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누워서 아무 말 못하잖아요. 죽었는데 보고 너 빨리 돈 갚아! 너 예수 믿는다고 고백해야지! 사도신경 해봐! 찬송가 틀어줄까? 해도 이미 눈 감았어요. 기도 하자! 너 열심히 헌금도 하고 신앙생활하고 전도해야 성도의 삶이잖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 받으라고 에베소서에 나오잖아! 본받자! 하는 데 죽어 버렸는데요. 경건하게“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베드로 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해야지! 해도 이미 죽어 버렸는데요.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이미 율법에 의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이다. 죽은 놈을 흔들어 깨워 봐야 소용없어요. 마귀가 그래도 안 먹히니까 뭐라고 합니까? 저주하며 니가 지난여름에 네가 한 짓을 내가 안다. 너는 이제 끝났어! 만약에 니가 우리 교회에 안 나오면 니 자식 재수 했지! 이번에 수능에서 또 떨어 질꺼야! 이것을 누가 이야기 할까요? 문제는 내 안의 내가 이야기 합니다. 내 안의 옛 성품이 잘 나가는 재미로 살았던 내가 나를 힘들게 해요. 결론은 내가 나를 힘들게 해요. 주여! 이런 짓 하다가 벌 받으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목사하다가 교인 다 떠나가 버려서 달랑 두 명 남아 버리면 노후 대책도 못 세웠는데 안 되잖아요.
항상 이래요. 아까 첫째 시간 제목이 뭐였습니까? 오지마라를 잊어 버렸어요. 교인이 많이 오게 꼬셔야 교회가 유지되고 운영이 되고 돈 줄도 생기고 유지가 되요. 그 근거가 뭐냐하면 나는 죽었다는 말입니까? 살았다는 말입니까? 살아있는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 싫다는 거에요. 그런 안목이 어디서 생겼어요. 나에게서 남이 죽는 건 괜찮아요. 나는 죽으면 안돼! 왜 내가 죽으면 안 되는 데요? 그런 성품을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마귀에게 배운 거죠, 난 착하니까 남에 집에 비가 많이 와서 물들어 오는 건 괜찮아요. 신나게 퍼내라! 하면서 우리 집에 물들어 오면 주여! 왜 이러십니까?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인간의 힘으로 절대로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이게 뭐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구원받았지요. 구원받았는데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되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가 목적이 되야 되요.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막 살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기 위해서 외부에서 마귀가 우리에게 지적질 하는 것을 허용을 해요.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막상 매일 벌벌 떨어요. 매일 이런 짓 해서 벌 받으면 어떻하나? 이런 식으로 내가 착한 일 했으니 복 받겠지! 안 주면 어떻하나?
복 받아도 이 복이 몇 달 못 가겠지 하고 벌벌 떨고 있어요. 모든 것이 공포와 불안감이 한 순간도 없어 질 때가 없어요. 늘상 그래요. 강의 제목도 벌써 잊어 버렸어요. 항상 우리는 5분전의 나에요. 5분 지나면 5분 전의 나는 이미 죽어 버렸어요. 그때 좋았던 것이 10분 후엔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1시간 후엔 어떤 괴물로 될지 장담 못합니다. 지금은 말씀을 들으니까 착한 것 같은데 만약에 2시간 뒤에 누구와 멱살 잡고 싸운다면 이건 인간도 아니지요. 그럴 때 2시간 전의 나는 뭡니까? 이미 죽었어요. 날마다 살립니다. 뭘로? 주님의 살아계심에 사는 거에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에서 주님 살아계심에 살아 있는 거에요. 로마서 7장 24절을 보겠습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사도 바울이 어떤 요령을 부려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 받았는가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시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에요. 사도는 몇 명을 꼬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사도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 졌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 사도행전이 되듯이 로마서도 마찬가지에요. 주님께선 사도를 곤고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이 몸이 예수 믿는 다고 안 사라져요.
안 먹으면 배고파요. 화나는 일이 있으면 화가 나고 성질나요. 잘난 척 할 때는 흐믓해요. 이런 건 없어지지 않아요. 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문제에요.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값을 줘야 하는 가? 우리는 재 놓고 값을 다 치러놓고 치룬 상태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거에요. 우리의 잘잘못을 일체 묻지 않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매일 어디에 놀아나냐 하면 내가 잘했을까 못 했을까? 실수를 조금했을까? 많이 했을까? 남에게 해코지를 많이 했을까 혹시 남에게 엉뚱한 소리는 안했을까? 남에게 잔소리 한 건 아닌가? 이것 우리 두뇌가 자꾸 기억해요.
말도 안 들어, 기억하지 말라고 기억해요. 나는 옛날에 이뻣었다, 잘 났었다를 기억한다니까요. 이것을 기억하다 보니까 내 안에 뿌연 죄만 자꾸 차요. 예수안에 있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내 안에 육의 모습을 자꾸 드러내는 겁니다. 주일 날 할 것을 미리 당겨서 하자면 육의 열매가 뭐냐하면 시기와 질투가 있지요. 그게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제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고 앞으로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고 못 고친다니까요. 고칠 수가 없어요. 왜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이 죽은 자를 살렸잖아요. 죽은 나를 내가 살렸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죽어 있는데 외부에서 나를 살렸잖아요. 외부에서 살리심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상태인가를 남은 생을 통해서 새록새록 마음껏 보여 줘야지요. 이렇게 앉아 있어 점잖지만 나이 90쯤 되면 자식들 보고 욕하고 너희가 바쁜 모양이지 자주 안 오는 거 보니까 그래 내가 너희를 다 키웠어! 하고 행악질을 하는 거에요. 어머니 그렇게 안 봤습니다. 권사님이 그러시면 안 되는데 권사가 왜 붙여요? 거기서! 뭔데?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머니 이러다 지옥 가겠다! “그래! 나 지옥 간다!” 예수님이 좋아요? 미쳤나 예수님을 왜 좋아 하는데.. 다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40대에 50에 주여! 주여! 하며 새벽 기도 하던 사람들이에요. 자식들을 위해서. 알아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구원 받아요. 우리는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믿을 게 없음을 인장할 때 성령이 한번 오면 떠나지 않아요. 90대에 행악질해도 40대에 성령이 오면 오히려 우리를 까발리지요. 내가 성령을 소유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안되요. 성령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물어 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값을 치뤘는지 얼마나 개판이었습니까? 내가 모르는 개판, 내가 모르는 지독한 악마를 주께서 성령을 통해서 살려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따라서 육의 열매라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웃음) 아니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열매라고 한 겁니다. 보게 되면 항목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옛날에 예수 믿기 전에는 그랬지가 아니에요. 예수 믿고 난 뒤에 나와야 될 것들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막 살아서 남을 해코지하면 어떻게 합니까? 예를 들면 그 조절을 보면 질투에도 너무 나가는 질투와 적은 질투가 있어요. 우리는 막 나가는 것을 진짜로 보지만 살아가면서 작은 질투도 질투에 포함되듯 나는 죽은 자였었어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계속 나와서 구원이 아닌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라는 것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제대로 보게 하옵소서! 내가 구원받으려고 천국에 가려고 성경 보지 않게 하옵소서! 하지만 시작은 내 좋으라고 보다가 성령께서 역사하게 되면 나는 이미 망가졌고 죽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쪽으로 일하시는 것을 증거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