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인간의 한계.명백한 사실 1811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1. 17:19
2018-11-27 21:37:47조회 : 214         
사무엘상 44강(인간의 한계), 마태복음 106강(명백한 사실)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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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12-01 14:37 

인간의 한계 (삼상 15장22-26절) 

대전- 44강 

  

이근호 

  

2018년 11월 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5:22-26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 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 15: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삼상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여기 사무엘이 사울에게 일방적으로 이렇게 평가를 해요. 일방적이죠. 평가라고 하는 것은 뭐, 일이 일어나고 난 뒤에 해야 하는 거잖아요. 뭐, 일을 해야 평가를 받죠. 일을 해야. 학생이 선생님 보고 “공부 잘하겠습니다.”라고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요. 근데 먼저 시험을 치고 내 점수가 얼마인지 알고 난 뒤에, 지적을 받고 난 뒤에 공부 잘하겠다고 하는 것이 옳거든요. 사람이 누굴 지적한다는 것, 평가한다는 것은 뭔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항상 성경공부를 할 때는 기본을 잊어버린 경우가 있는데 기본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이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것같이 하나님과 인간세계 사이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겁니다. 맞지요? 하나님이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름대로의 나라가 있어요. 그 나라가 하나님나라입니다. 맞지요?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나라죠. 

  

그러면 인간은 그냥 홀로 있습니까? 아니면 나름대로의 나라가 있습니까? 인간에게 나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나라 있죠. 성경이 없다고, 성경을 모른다고 칩시다. 사람들이 하나님나라에 갈 때에는, 자기는 천국 갈 사람이라고 어떤 식으로 자기를 꾸며대겠습니까? 어떻게 인테리어 하겠어요? 이 인간나라에서 통하는 방식대로 하나님나라에 가려고 그렇게 시도를 하겠죠. 아파트에도 미세먼지 있는 것처럼 인간나라의 방식을 그대로 해서 하나님나라에 올라가겠죠. 

  

올라가면서 뭐라고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가는 하나님나라하고 인간나라하고 별 다를 게 없다고 자꾸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교회가 그거잖아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잠재력이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잠재력을 키워서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그러한 실적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말 들으세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인간나라에서는 뭘 갖게 되느냐 하면 희망을 갖게 돼요. 아, 죽어서 좋은 데 갈 수 있다고.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경우에는 뭣이 없을 경우를 말합니까? 성경이 없을 경우죠. 성경이 없을 경우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하나 성경이 있다고 할지라도 성령으로 해석하지 않고 내가 성경을 해석해도 똑같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성령에 의해서 해석하지 않고 내가 해석할 때.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들은 그 다음에 대꾸할 말이 생각이 날 거예요. 

  

그러면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과 인간들이 기본정서로서, 또는 상식으로서 해석하는 것과 어떻 게 다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정상이죠. 그 말을 달리 이야기해야 돼요. 성령은 누구로부터 오는 겁니까? 라는 질문과 이어져야 해요. 성령이 오려면 그냥 오는 것이 아니에요. 우선 사건이 하나 터지고요. 그 사건에 의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그 사건이 터지지 아니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오지 않아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것은 하늘나라와 합당치 않습니다. 그 사건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무슨 사건이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사건이죠. 십자가사건이 있다는 말은 인간들의 나라의 원리와 하나님나라 원리가 다른 정도가 아니에요. 다른 정도가 아니고, 또 무지한 정도가 아니에요. 무지하면 보태면 되니까. 이게 다른 정도도 아니고 무지한 정도도 아니고 정반대가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끝장을 낸 사건이거든요. 끝장 본 사건이라고요. 우리가 많이 무식했습니다, 라는 그거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무식하면 공부를 더하면 될 문제에요. 이 십자가사건은 어디를 건드리느냐 하면 인간본성자체를 건드린 사건입니다. 인간본성자체를. 교회에 나오든, 장로, 집사든 관계없어요. 인간본성은 인간이 바꾸지를 못해요. 

  

여러분 다들 자녀들 있지요? 평생 동안 바꿔보려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만약에 그 자녀가 거듭났다면 부모의 덕이에요? 성령의 역사에요? 성령의 역사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부모가 아무리 용을 써도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나라라고 하는 것은 숫자가 한 명이 아니에요. 여러 명이에요. 여러 명이 나를 만들잖아요. 여러 명이 한결같은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심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십자가사건을 알아먹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은 성령에 의해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사건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이 알고 악에 받쳐서 예수님을 살해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은 뭐가 뭔지 몰라요. 예수님께서 인간의 배후를 아십니다. 인간은 자기배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배후가 없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4가지의 정치방식이 있습니다. 인간 배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4가지의 정치방식이 있습니다. 1. 민주주의, 2. 전체주의, 독재라고 보면 돼요. 3. 신정주의, 4. 공산주의(=사회주의) 이 4가지가 인류역사 동안에 계속해서 이어져왔습니다. 

  

민주주의는 B.C5세기경, 7세기부터 그리스의. 현재 그리스죠. 발칸반도. 그리스에서 했던, 작은 계곡과 계곡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소박한 도시국가가 있었어요. 도시국가가 자기들 나름대로의, 숫자가 얼마 안 되니까. 나름대로 농사지어가지고, 성인남자에 한해서는, 귀족들이, 또는 시민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시민은 귀족이니까, 시민(귀족)에 의해서 민주주의가 여기에 싹이 텄습니다. 

  

신정주의라고 하는 것은 바로 B.C4000년경부터 이집트에서 한 거예요. 신정주의라고 하는 것은 이 자체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지상에 있는 유토피아로 고정, 확정짓겠다는 겁니다. 이 신정주의를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또는 경제이론가지고 해보겠다고 하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신정주의는 뭐냐 하면 종교로 하는 거예요. 종교로. 이집트에서는 태양신을 믿으니까. 

  

그러면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무슨 주의겠어요? 신정주의가 가장 오래됐겠죠. 왜냐하면 지금도 많은 부족들 가운데 신정주의를 택하고 있습니다. 신정주의에서는 신을 믿는 거예요. 신이 통치하는데 신과 그 구성원 사이 중간에 있는 것을 샤머니, 무당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 일주일 전인가 인도의 어떤, 진화론에 의하면 6만여 동안 공개되지 않는 부족에 미국사람이 들어가서 화살 맞아죽었어요. 인도에서. 

  

그럼 인도정부는 뭘 해요? 자, 그 부족은 영토상 인도의 소속이죠. 그럼 인도의 전역에 인도의 헌법이, 법률이 적용되는 영토가 인도영토죠. 그러면 살인하면 그 죄인을 체포해서 형벌에 처해야 하죠. 그 뒤의 소식은 제가 몰라요. 그러면 미국관광객이 들어갔는데 화살을 쏘아버렸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인도의 치안은, 그 지역의 경찰권은 마땅히 그 지역에 가가지고 범인을 색출해서 재판에 넘겨야죠. 

  

근데 그렇게 될 경우에는 6만년 고립된 것이 개방이 돼버리죠. 우리나라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나라 같으면 그거 말이 안 되죠. 이거는 신정정치 같은 유사한 정치가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 아직도 있습니다. 파키스탄 나라에 속한 부족이 자기 여동생이 남자친구를 사귀면 그 가문의 이름으로 여동생을 때려죽여버려요. 이슬람국가 법률에 의해서. 그러나 파키스탄에서는 이슬람헌법 그런 것을 용납 안 해요. 그래서 그 부족에 찾아가서 여동생 때려죽인 오빠들부터 해서 이웃, 친척들을 다 불러내어서 형법에 처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부족은 반발할거죠. 나라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냐? 하겠죠. 그리고 그들이 기껏 반발하는 것이 다음에 총리투표 할 때 표 찍어주나 봐라,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도는 그거보다 더 심하다는 뜻이에요. 파키스탄보다 더 심한 거예요. 그만큼 인도는 부족 하나 다룰 수 있는 치안공권력이 그만큼 미약하죠. 월급을 줘야하는데 돈이 없으니까. 카스트제도도 있으니까. 

  

여러분에게 민주주의, 전체주의, 신정주의, 공산주의 중에서 한번 골라잡으라고 한다면 어느 것을 골라잡겠습니까? 어떤 인간도 이걸 골라잡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그냥 주어진 상황이에요. 주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골라잡을 입장이 못 됩니다. 북한 애들한테 골라잡으라고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 이 4가지 중에서 골라잡으세요.” 이러면 아바이 수령이 가만두지 않겠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 유교적 사회주의가 북한이잖아요. 죽여 버리죠. 뭣 때문에? 국가의 명예 때문에. 

  

그래서 민주주의 빼놓고, 전체주의, 신정주의, 공산주의는 뭐냐 하면은, 신정주의는 신의 명예라고 하지만 사실은 국가의 명예죠. 전부 다 이거는 통합된 전체 공동체의 초월적인 명예 때문에 이들은 법이 적용됩니다. 스탈린 같은 경우에는 공산주의지만, 그들은 러시아 소비에트를 위해서 이천만 명 죽였어요. 이천만 명. 공산당 혁명, 볼셰비키혁명에 의해서. 볼셰비키라고 하는 것은 다수파라는 뜻입니다. 다 죽였어요. 

  

지금 초등학교에서는 이 4가지밖에는 안 가르쳐주죠. 이 4가지.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요. 오늘 사무엘상 15장을 통해서 주제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세계의 한계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여러분 좌절되는 경우가 없던가요? 아니, 제가 말을 잘못했죠. 늘 좌절되죠. ‘이 딴 것 해서 무슨 도움이 되지? 이거 없어도 사는데 내가 무슨 짓 하지?’ 오히려 이런 생각이 퍼센트를 따지면 그 생각이 95퍼센트, 95퍼센트도 사실은 적은 거죠. 99퍼센트가 내가 예수 믿지 않아도 될 문제가 아니냐는 생각이 더 많이 시간상으로 밀려올 겁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는 ‘이래서는 안 되는데, 복음대로 살아야 되는데,’라고 해놓고는 본인이 본인한테 물어요. “복음이 뭐꼬? 참 그게 뭐였었지?” 복음이 뭐였었지? 나에게 아무것이 실감나게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복음이 뭔지. ‘아, 복음은 주일에 교회 가서 들으면 되겠네.’ 교회 가봤자 복음 나오는 데도 없지만. ‘아, 복음은 강의 들으면 되겠네.’ 그럼 강의듣기 전에는 복음이 빠져나갔어요. 복음이 없어. 복음이 없는데 얼굴은 좋아. 살이 쪄. 이런 경우.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돼요? 복음 있는 것과 없는 경우, 사람들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을 때, 도대체 신자인 티가 뭐야? 신자가 없는 것 같아요. 신자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뭔가 이상해. 그건 뭐냐 하면 보이는 것이 늘 우리를 완전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보이는 것이. 

  

오늘 본문 다시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이야기했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자, 순종과 듣는 것을 이렇게 한편에 세운다면, 저쪽 맞은편에는 뭐가 있어요? 제사 있고 수양의 기름이 있죠. 제사는 눈에 보입니다. 수양의 기름이 눈에 보입니다. 다 형식이고 기계적이에요. 반복이 가능합니다. 인간의 행함의 가미가 가능합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나을까요? 순종이 나을까요? 이거는 정말 오늘날 교인들에게 답변하기 어려운 거예요. “예배가 순종이잖아요.”라고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어느새 몇 초도 안 걸리고 보이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사실은 타락한 거죠. 인간은 툭툭 나가 떨어져요. 보이는 것으로. 기도할 때,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했는데, 갑자기 집안에 한 5억이 들어왔다. 그러면 “주님 사랑합니다.”가 뭐로 바뀌었어요? “5억 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바뀌었죠. 

  

5억이라는 돈은 눈에 보이죠. 주님은 안 보이죠. 안 보이는 것이 뭐로 전락해버렸습니까? 보이는 것으로 전락해놓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기도 응답받았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냥 뚝뚝 떨어져요. 주식 사놓고 떨어질까 봐 염려하는 것하고 똑같이 뚝뚝 떨어집니다. 보이는 것으로 소급돼버려요. 

  

왜 이 말이 중요하냐 하면은, 사무엘이 사울이 그 보이는 제사와 보이는 수양의 기름을 드리려고 할 그 때에, 그때 나타나가지고 말리든지, 이러지 마세요, 라고 해야 될 게 아닙니까? 정말 국가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지금 전쟁 중이거든요. 지금 전쟁 중이에요. 국가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해야 국가가 살게 돼요. 그러면 국가의 명예는 계속 살아있고 패배해버리면 국가는 아주 치명적인, 전부 다 사로잡혀갑니다. 아말렉하고 전쟁 중이었으니까. 사실은 전쟁 중에 그런 일이 있었죠. 지금은 전쟁이 끝난 상태지만, 전쟁 중에 있었죠.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잘난 체 하는 이유가, 전체주의 독재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어떤 특정종교, 이란의 호메이니가 있죠. 그 인간은 아주 웃기는 인간이에요. 스탈린하고 똑같은 인간이에요. 호메이니 들어봤죠. 종교가 보이지 않는 알라신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잖아요. 공산주의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밖엔 없잖아요. 대안이, 해답은 민주주의 해답입니다, 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다 가르쳐줘요. 

  

촛불집회 왜 일어났습니까? 민주주의라는 이 종교 신봉하자는 거예요. 이 종교. 민주주의는 종교가 돼버렸어요. 왜? 인간의 종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가고 더 이상은 더 이상 비교할 수 없을, 최상의 것을 최고로 믿을만하다고 다 같이 우기는 것, 선동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근데 생각해보세요. 민주주의 대통령이십니까? 어디 영부인이에요? 아니죠. 민주주의라고 해놓고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가끔씩 돌아오는 선거일에 투표하는 거죠. 

  

투표하고 난 뒤에 당선된 사람이 내 말 듣습니까? 안 듣죠. 이거 뭐예요? 빼앗긴 거 같은 느낌은 안 듭니까? 말이 직접민주주의지 사실은 간접이에요. 대리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어요. 대리는 대체밖에 안 돼요. 이미 우리 손을 떠났어요. “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다 할게.” 이미 손을 떠나버렸어요. 소외된 거예요. 정치인에게 우리가 배제당한 거예요. 이게 민주주의에요. 다수가 아니고 소수끼리 모인 겁니다. 소위 정치적인 엘리트끼리. 

  

이들끼리 뭐하겠어요? 단합하겠죠.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아니에요. 그들의 장기집권을 위해서. 그들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왜냐하면 정치하면 정보가 있기 마련이고, 그 정보가 있으면 자기 일가친척에게 그 정보를 미리 알려주게 되면 땅값이 상승하는데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거예요. 돈 수십억 들여서 정치하고, 그 정치하면서 집안끼리 수십억을 빼내기 위한 기대의식으로 도박을 한 거죠. 

  

우리는, 다만 일반국민들은 도박을 자제했다는 것뿐이고. 그들은 도박을 했다는 것뿐이고. 낙선된 사람은 도박에 돈을 날린 것뿐이고. 다음에 또 도전하게 될 것이고. 도박하기 전에 도박의 위험수위를 줄이는 방법은 당첨이 가능한 그 정당에다가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비례대표제가 되어가지고 5년간 국회의원으로 월급 받아먹고 다음에 지역구로 나가기 위해 사전에 준비하는 그것. 

  

민주주의라는 게, 그걸 정치놀음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정치놀이죠. 정치놀이. 사회에서 직장생활 하기는 싫고 돈은 있고, 자기들끼리 노닥거리는 장을 정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거 아니라면 대안이 있나? 이러거든요. 대안이 있나? 훌륭한 사람이 한다고요? 이게 전체주의에요. 훌륭한 사람이 한다고 하는 것이 전체주의에요. 

  

인자하고 자비롭고 희생적이고 오직 국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그걸 전체주의라고 합니다. 전체주의에서 나오는 독재를 할 때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왜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시대를 거론합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전체주의를 했거든요. 참 그때가 좋았다고 하거든요. 그러나 다 지나간 시절이죠. 그때 우리나라 못 살던 시절에 얼마나 우리는 그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얼마나 잘 살았어요. 새마을운동해가지고. 호응했다고 이러잖아요. 김일성이는 안 그랬습니까? 신정주의는 안 그랬어요? 

  

자,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정치는 무슨 정치입니까? 민주주의? 아니죠. 전체주의? 아니죠. 신정주의? 아니죠. 공산주의? 아니죠. 공산주의라는 게 뭐냐 하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거예요. 사유재산을 없애가지고 능력에 따라서 일하되, 필요에 따라서 능력 외에 많은 그것을 골고루 분배받는 것을 공산주의라고 합니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인류의 역사를 소유의 역사로 보는 거예요. 소유의 역사.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소유를 하는데, 이 소유가 골고루 노동한 만큼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정치꾼들 자기들은 노동을 안 하니까 놀잖아요. 놀면서도 노동한 사람보다 더 떵떵거리고 잘 사는 이유는 여기에서부터 착취라는 것이 성립됐다는 거예요. 착취. 그 착취하는데 이들이 옛날식의 뭐냐 하면 자본가들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자본가들. 

  

돈이 돈을 버는 거예요. 돈은 그냥 교환수단의 종이일 뿐인데, 그 교환수단이 많은 것이 보다 더 많은 것을 빼낼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옛날부터 있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더 수월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생산해서 이득을 얻는데 그 생산의 모든 수단, 공장의 기계 같은 그런 것을 말해요. 기계, 부동산, 이런 것을 말합니다. 생산수단을 자본가가 독점하고 있으니까, 독점할 수밖에 없죠. 자기가 투자했으니까. 투자한 쪽에서 이득을 많이 가져가야 된다. 

  

그러니까 가면 갈수록 노동자들은 점점 더 여기에 종속되겠죠. 점점 더 종속되는 거예요. 왜? 자기가 가진 이득을 점점 더 크게 모으니까. 돈이 돈을 버니까요. 부동산하는 사람이 계속 돈 벌잖아요. 집에서 노는 데에도 불구하고 돈을 번다는 말은 그만큼 돈을 빼앗긴 쪽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처음에 이사 올 때는 월세 50만원을 내놓은 사람이 나중에는 80만원, 100만원까지 올라가니까, 그만큼 뭡니까? 빼앗긴 거예요. 집주인한테. 맨 그 집인데. 점점 돈이 넘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책은 뭡니까? 문제는 사유재산에서 문제가 되니까, 국가가 그것을 다 걷어가지고 골고루 나눠주되, 보통 능력껏 하게 되면 몸이 약한 사람은 얼마 안 된다고요. 그러니까 국가가 일은 능력껏 하되, 분배를 골고루 가져가자는 거예요. 처음에 중국 공산당처럼. 광산에 있는 사람이 100을 받을 때, 대학교수는 50을 받아요. 의사도 50을 받아요. 왜? 이들의 능력대로 하면 200, 500이 되기 때문에. 광산에 있는 사람을 100주고 이들을 50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허름하게 사는 사람, 막노동하는 사람도 떵떵거리며 사는 시대. 그래서 모택동이가 그것가지고 히트를 친 거예요. 실제로 그걸 했고. 

  

그런데 이 마르크스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마르크스가 사유재산에 대한 것은 뭐냐 하면 재산, 권리를 국가가 가져갔잖아요. 그런데 뭐도 가져갔느냐 하면은 권리라는 이름의 재산까지 다 가져가버렸어요. 권리라는 이름의 재산. 인간은 야망이 있고 희망이 있어요. 그것마저 완전히 가져간 거예요. 북한처럼. 꿈마저 가져간 거예요. 인간이 남하고 똑같이 되려고 살아갑니까? 튀려고 살아가는 거예요. 창세기 3장을 몰랐어요. 나만이 신이 된다는 그 속성을 몰랐던 거예요. 

  

그 마르크스가 사도행전 2장에서 공산주의를 주장했잖아요. 그게 성령의 공동체거든요. 결국 성경이 공산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성경이 알려줬다는 겁니다. 근데 그 사회는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되죠. 성령이 왔을 때 그들은 먹고 마시는, 나눠주는 그걸로 그냥 끝이었습니까? 아니면 누구의 재림을 원했던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 하늘나라를 원했죠. 그 예수님의 재림은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예수님으로만 만족하는 세계입니다. 

  

자, 우리가 사무엘상 15장을 하고 있는데, 사무엘상 15장에서 아까 했던 중요한 것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이 제사를 드리고 수양의 기름을 드릴 때 스톱하라고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다 드리고 왔습니까? 다 드리고 왔죠.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의미는요, 이스라엘 자체가 뭐냐 하면 장차 영원한 천국, 천국이 이스라엘이죠. 이 이스라엘과 인간이 생각하는 땅의 이스라엘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도 이것과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인생은 실패하라고 있는 인생이에요.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고문이라고 했죠. 고문. 고문 받는 거예요. 아무리 가져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세상이 우리를 괴롭혀서가 아니라 내 욕심이 나를 괴롭혀서 그래요. 내 욕심이 나를 괴롭힌다고요. 우리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이게 억누를 문제가 아닙니다. 

  

무의식에서 내 욕심이 자꾸 나로 하여금 지금의 나로 만족 못하게 만들어요. 자꾸 헛된 꿈에 우리를 몰아넣어요. 우리는 쫓겨 다닌다 할까요? 인생은 자꾸 누구한테 위협을 당하고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아요. 재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자꾸 누가 쫓아와요. 사실은 내 욕망이 나를 가만두지 않고 나를 괴롭혀요. 학원폭력? 내 안에 내 폭력이 있어요. 내 안에 내가 나를 폭력으로 몰아넣습니다. 정 밀어 넣으면 우리는 자살하죠. 하도 내가 나를 괴롭히니까. 내가 살 길은 뭐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내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밖엔 없어요. 

  

중학생이 옥상에서 뛰어내려서 죽었죠. 담배를 왜 피웠어요? 그래. 걔 담배는 왜 피워요? 그래. 중학생이 담배를 피울 때, 뭐 호기심이라고 하는데, 호기심이 아니에요. 담배피우는 인간들은 그렇게 놀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 또래에 그렇게 되게 돼있어요. 그 담배를 왜 피우게 했어요? 허풍든 거예요. 허풍들 때 누가 그걸 말리지 않았습니까? 부모들이 그걸 말리지 않았어요. “아이고, 귀한 내 자식!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라. 지금 아니면 언제 또 하겠냐.” 이래 나온 거예요. 그 부모들이. 뭐 러시아 엄마가 그런지 모르지만. 그 부모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학교에서 뭘 가르쳐줍니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은 거짓말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가르쳐준 것이 없어요. 니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 남들을 이용하지 않으면 너는 경쟁에서 못 살아남는다는 그 기술, 그 테크닉 외에는 학교에서 가르쳐준 것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없어요. 학교가면 학교의 명예, 집에 가면 집안의 명예, 국가는 전체주의, 우리 아버지의 명예, 국가는 우리나라의 명예, 우리나라의 명예는 일종의 마약 같아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용서가 돼요. 크리스마스 때 사면 많이 하잖아요. 부처님 왔다 가신 날도 사면 많이 하고. 

  

사울 왕이 왜 제사를 드렸습니까? 제사 드린 것이 자기가 재미나서 드린 겁니까? 수양의 기름 왜 드렸어요? 사울 왕은 누구를 의식하느냐 하면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 그들과 구성되어 있는 이스라엘 명예를 위해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 거예요. 그들이 조급하거든요. “뭐하십니까? 우리의 지도자요! 승리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제사 드리면 적들이 물러간다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에요. 관념이라니까요. 관념. 

  

왜? 그러한 관념은 지금껏 써먹혀왔으니까. 먹혀왔으니까. 교회에서 뭐라고 해요? 몸 아프면 기도하면 낫는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교회에서 써먹어온 거예요. 교회가 위기 있을 때부터 몇몇 사람들이 새벽기도 나오면서 주께서 해결점을 주셨다. 이게 이데올로기라니까요. 무슨 명예입니까? 교회의 명예에요. 교회의 명예라니까요. 교인들은 거기의 쫄따구죠. 교회공산주의에요. 교회공산주의. 교회사회주의. 목사님 건드리면 신을 건드리는 것이니까 우리교회 저주 온다는. 내 집구석 안 다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종에게 충성을 해야 된다는. 

  

제가 교인들에게 목돈을 내지 말라는 이유가, 목돈을 내게 되면 교회가 자기의 사유화돼요. 목돈을 낸 본인이 사유화돼요. 남은 100만원 냈는데 자기는 500만원 내었다. 그러면 500만원 낸 사람이 10만원 낸 사람이 교회를 함부로 이야기하면 자기가 나서서 정의의 사도가 된다니까요. 왜? 자기의 모든 귀한 가치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몫으로 이 교회라는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내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 사랑한 게 아니고 뭐냐 하면 내가 투자한 내 기업을, 사업체를 내가 투자한 셈이 돼요. 물론 목돈 안 내도 한 30년, 50년간 자식들까지 대를 이어서 그 교회에 다니면, 그 교회는 자기의 사유화가 돼요. 사유화됩니다. 목사가 의논해도 나하고 의논하라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 터줏대감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목돈 안 내면 그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 운영 안 돼요. 운영이 안 되면 그 교회 그럼 말아먹어야 되잖아? 말아먹어야죠. 교회가 눈에 보이니까. 교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자기 가정에 더 신경을 써버려요. 

  

전에 이야기했죠. 두 집 살림하다가 이제는 한 집 살림으로 자기 가정만 신경 쓰면 되니까. 그 말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서는 자기부인이 되어야 해요. 자기부인. 자기부정이 돼야 되거든요. 자기부정. 이 세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사무엘이 사울이 다 하고 난 뒤에, 일을 저지르게 해놓고 왜 뒤에 추궁을 하느냐 하면은, 자기부인이 되는 나라가 바로 우리를 기다리는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자기부인에는 예수님마저도 예외가 없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고 하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예수님마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물며 우리가 해야 될 고백이 이거잖아요. “주여,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아! 그런 기도 제목, 그런 교회 봤습니까?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갑자기 목소리를 변조시켜가지고.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통성으로!” 이런 교회 봤어요? 

  

심지어 가정에서 식사기도 할 때, 아버지가 내가 오늘 기도한다. “주여, 우리 가정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합니까? “그저, 수능 친 우리 애 점수 잘 나오게 해주시고..”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애 둘이나 군에 가 있는데 몸 건강하게 해주시고.. 제발 엄마 신경 안 쓰이게 해주소서.” 뭐, 이러죠. 우리의 기도할 내용이 눈에 보이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참 슬픈 일입니다. 정말 서글픈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나라는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이스라엘 나라를 새로 만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지금까지는 가짜입니다. 사기집단이에요. 사기집단, 가짜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순종한다는 의미가 순종 안 하겠다는 것을 확실히 눈에 보게 한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순종 안 했지?”라는 평입니다. 책망 받는 거죠. “니 순종 안 했잖아?”라는. 뭔가 일을 저질러놓고 옵니다. 

  

한 20개월 쯤 된, 두 돌 쯤 된 애가, 엄마가 우유를 줬는데, 우유가 약간 뜨거우면 애가 내려놓으면 되잖아요. 그냥 놔버려요. 컵 여러 개 깼어요. 물도 마시다가 그냥 던져버린다니까요. 그럼 엄마가 때찌하고 난리죠. 그러나 애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게 다에요. 그게. 주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식은 우리가 늘 가짜라는 것을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이게 주의 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주의 뜻이 아니라는 말은 전혀 현실적이 아니라는 것. 이거는 조작된 것이고 엉터리,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해요. 근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찾아요. 눈에 보이는 것을. 오늘도 참석 안 하시는 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지금 신경 써서 그래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우리 마음이 항상 가득가득 채워져 있어요. 매일같이.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것을 채울 수밖에 없어요. 이걸 버리라는 것을 말도 안 되는 것이고. 해당사항이 없고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작용하는 것, 그것이 더 우월적으로, 더 위의 강한 힘으로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체험, 경험들이 되어야 됩니다. 더 다스려야 된다는 것. 

  

사무엘이 사울에게 찾아왔을 때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을 때에, 그 순종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올 때까지 왜 안 기다렸습니까?” 하는 거예요. “내가 올 때까지 왜 안 기다렸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만약에 이 사울이 “그래, 지금 하지 말고 한 일주일 기다리자.”라고 하면 일주일내에 사무엘이 왔었겠어요? 안 옵니다. “에이, 더는 못 참겠다.”라고 하는 그 순간에 나타나요. 더는 못 참겠다. 

  

이것은 항상 우리가 보이는, 나는 항상 보이는 것의 한계점으로 다루어지는 겁니다. 오늘 제목은 한계점인데, 나는 보이는 것으로 항상 다루어진다. 연탄집게 보면 연탄구멍에 집어넣는 곳은 벌겋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인간 말종의 모습을, 우리를 통해서 모델 식으로, 이걸 대변하는 사람 식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우리를 대변해서. 그게 성도에요. 그게 성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다지 무가치한 게 아니죠. 어쩔 때 가치가 있습니까? “아, 인간은 이래서 지옥 가는구나! 이래서 천국 못 가는구나!”를, 성도를 통해서 대변자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신약에 성령 받은 사람들을 여러분이 이야기를 해보세요. 누구누구입니까? 신약성경에 나오는. 열두 제자죠. 열두 제자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떻습니까? 거의 바닥이죠. 

  

열두 제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으나 오실 주님을 기다린다.”라는 거예요.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초대교인들이 서로 나누었지만 다들 부자 되었어요? 재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들이 어떤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어요? 아니에요. 그들이 기다린 것은 뭐냐, “주께서 곧 오십니다.”라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께서 곧 오십니다.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항상 하늘나라와 이 세상나라가 얼마나 전혀 다름을, 그 경계선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경계선상에서. 물론 성도라고 해서 평균이하로 다 노숙자로 사는 것이 아니고, 제법 부동산이 있고 돈이 있더라도 그걸 자랑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성도라고 해서 다 빌빌거리고 다 마스크하고 아프고, 꼭 이럴 필요가 없어요. 건강해요. 

  

세상 사람들은 다 마스크 벗고 건강했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지만, 하지만 성도는 이래 죽으면 얼마나 좋겠냐 하는 생각이 들죠. 아, 곧 가라고 지금 아프구나. 그만 살라고 하면 그만 살지 뭐. 그만 살더라도 일단 약은 먹고. 일단 병원에 예약은 해놓고. 살 찔 것은 찌고. 갑자기 살이 찌는 이유가 더 살고 싶어서 찌는 것은 아니고.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것을 티를 내시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거예요.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아까 이야기한 연탄집게, 불속에 들어가는 부분은 벌겋잖아요. 그렇지만 그 손잡이 긴 부분은 시커먼 쇠 색깔이 그대로 나오죠. 물론 우리의 대부분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자랑질 하는 것.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요. 

  

보이는 것으로 자랑질 하고, 자랑질 했으면 죽어라고 남한테 욕하고. 화내고.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자기한테 짜증내고. 좀 자기보다 못하면 막 신나서 난리에요. 누구 연예인 중에 이혼했다고 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나는 이혼 안 했거든. 갑자기 남편이 좋아 보이고 그래요. 자기는 이혼 안 했거든. 이혼해서 망해라. 누구하나 남편 한 200억 사기 쳤다고 하면 기분이 막 좋아가지고. 우리 남편은 200억 사기까지는 아니고. 김나영이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사람이 있어요. 몰라도 돼요. 하늘나라 문제에 안 나옵니다. 누구하나 연예인 남편 사기 쳤다고 하면 기분이 막 좋고. 도끼 부모님이 어떠니 하면 막 신나. 대부분이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신자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우리의 진짜 면면은 이 점을, 성령께서 순간순간 이 지점을 부각시킨다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누구지? 내가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이 살아가서는 되겠어? 라는 생각이, 연탄집게의 집게부분인 벌건 이 지점. 이 지점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결정하는 것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자기 잘남을 자랑하기 때문에 홀로 살아가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근데 여기서는(연탄집게의 벌건 부분) 뭐냐 하면 성도는 홀로 있지 않다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홀로 있지 않죠. 사울 왕이 통치하지만, 신정정치처럼 통치하지만, 누가 함께 있습니까? 그들 가운데 누가 함께 있죠? 사무엘이잖아요. 사무엘이 함께 있는 거예요. 

  

사무엘이 있는 것처럼, 여러분 속에 주님의 속한 영이 우리를 이렇게 지적질 해줄 때, 우리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이 벌건 부분 때문에,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신약의 제자들이 늘 그렇게 훌륭하게 산 것은 아니에요. 늘 믿음 좋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21장 18절에서 베드로에게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는 말은, 평소에 베드로가 지가 원하는 대로 했다는 말이에요. 그냥 막 살았다는 거예요. 막 살았는데 함께 계신 성령께서(연탄집게 벌건 부분) 사도답게 한 거예요. 베드로가 완벽하게 살았다, 돈 욕심 없었다, 그런 게 아니고 성령께서 하신 겁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지고 난 사건이후에 오는 거예요. 성령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증인되는 거예요.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날마다 말씀으로 책망하는 거예요. 책망하고 늘 우리는 반복해서 회개하고. 구원받았기 때문에 늘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마디로 줄이면 마음을 낮추는 겁니다. 마음을 낮추라. 마음을 낮추라는 말은 내가 그다지 잘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늘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잘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언제 잘난 존재라는 것으로 착각을 하느냐 하면 남하고 비교할 때 그러는데,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하고 비교하라는 것이 성령의 소식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갔는가, 이렇게 보라는 거예요. 볼 때,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해가지고 아주 환장을 했죠. 

  

아까 제가 민주주의나 이런 것을 이야기할 때, 그냥 상식이라고 이래 듣지 마세요. 다시 한 번 적어볼게요. 상식 아닙니다. 우리가 뉴스 보면서 민주주의가 하는 것 보면서 얼마나 반대합니까? 벌써 우리가 어느 새 민주주의 증인이 되었어요. 공산주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는 공산주의를 보면서, 만약에 우리가 김정일하고 아는 사이라면 북한사람 조지는데 한편이 될 거고. 

  

왜? 사람은 어떤 권력이 있어버리면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해요. 독립유공자라면 보다 더 많은 후원금을 더 빼내려고 하고. 나라에서 조사한다고 하면 싫어해요. 기득권자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기득권자입니다. 누구나 기득권자에요. 대학 강사시절하고 대학 교수시절하고 다릅니다. 강사시절에는 교수들 죽이려고 하죠. 지가 교수되고 난 뒤에는 강사들 월급 깎으려고 이래 나옵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 내 이야기에요. 공산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 신정주의, 늘 우리는 99.9퍼센트가 지금 다 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돈 좀 되려고 하면, “나라 뭐 하노? 분배해야지. 소득이 균등해야지.” 갑자기 하늘나라 백성 다 잊어버리고 민주주의 백성, 경제평등으로, 그걸로 막 나가요. 

  

근데 아는 친척이 기업하는데 기업이 안 된다고 하면, “노동자들 데모하면 안 돼. 기업이 안 살아.” 이러고. 또 누가 취직해서 잘렸다고 하면, “사장, 너무해. 지들은 골프치고.” 항상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변화가 되는지. 막 요동을 쳐. 너무 변해가지고 어지러워요. 이 상황 속에서는 여기 편들다가 이 상황 속에서는 여기 편들다가. 

  

도대체 누구의 증인이에요? 누가 이걸 잡아줍니까? 우리는 진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이 땅에 아무것도 아닌 자를, 주께서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자 속에 쑥 들어와서, 사무엘이 들어온 거예요. 우리가 늘 가짜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진짜는 뭐냐, 성령을 보내주신 주님의 몸, 주님의 나라를 벌써 시작하게 해준 주님의 일, 그 관계, 그것이 진짜 미래의 우리 모습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8-12-01 14:38 
명백한 사실 (마 25장 45-46) 

대전- 106강 

  

이근호 

  

2018년 11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5: 45-46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5장 45절부터 보겠습니다. 우리 성도한테 중요한 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실제로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느냐, 그냥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하는 것은 성도 아니라도 누구나 아는 상식이고요. 왜냐하면 신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창조가 풀리니까. 실제로 하나님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보면,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 이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한쪽은 영생으로, 한쪽은 영원한 벌에 들어가도록 일하십니다. 

  

그러면 영벌이라는 곳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인데, 뭐 잘못한 게 있다는 거거든요. 근데 세상에서의 모든 기준은 뭐냐 하면 잘못했다, 잘했다는 것을 누가 판단하느냐 하면은 내가 판단합니다. 광주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이 집은 tv가 없으니까, 근데 만약에 칠판만한 tv를 사왔다고 한다면, 벽에 걸기 위해서 그냥 걸면 쑥 내려가잖아요. 그럼 거치대를 먼저 뒤에 딱 해놓고, 거치대에 턱 얹어버리면 이건 안 내려가잖아요. 

  

악마가 인간에게 거치대를 하나 만들어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선과악의 지식이라는 거치대를 하나 만들어놨어요. 원래 창조할 때는 인간 속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없는 건데, 뭘 하나 거치대로 만들었느냐 하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라는 거치대를 딱 해놓고 거기다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악마가 집어넣어준 거치대에 준해서 옳고 그름을 전부 다 판단하도록 그렇게 인간들을 몰아세운 겁니다. 

  

그러면 빼려면 뭘 빼야 돼요? 착하면 안 돼요. 뭘 빼야 돼요? 선과 악이라는 인식, 지식 자체, 악마가 집어넣은 것을, 그게 빠져야 되겠죠. 그걸 빼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가 손 넣고 이걸 뺄 수 있습니까? 왜 못 빼느냐 하면은, 이 선과 악의 지식을 빼는 것을 인간은 뭐로 보느냐 하면은 선으로 봐요. 이게 모순되는 거죠. 선과 악을 빼는 것을 빼내자. 이것이 옳다. 이것을 선이라고 인간은 우기는 겁니다. 

  

초반부터 좀 어렵죠. 이게 니체하고 불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선과 악을 넘어서자. 그러면 아까 제가 첫째 시간 강의의 끝부분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불신자의 특징은 홀로 산다고 했죠. 자, 보세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특징이 뭐냐, 스스로 시인해요. 혼자 사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가 철폐 안 되면, 선악과를 주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잖아요. 나는 선악과 따먹지 않아야 되는 제한을 받아요. 그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지시를 파괴시켜버린 겁니다. 파괴시켜버리고 내 안에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죠. 

  

그러면 홀로 사는 것이 되죠. 홀로 사는 인간이 선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빼버린다. 그러면 이런 결정도 결국은 뭡니까? 온리 유 only you. 오직 자기 혼자서 결정한 거죠. 결과를 예상합니다. 내가 빼고 남아 있는 그 결과는 뭐냐, 잘난 나가 되겠죠. 잘난 나. 드디어 선악에 휘둘리지 않는 잘난 나.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 맞죠. 이 논리에 하자 없습니다. 

  

자, 아주 보편적이고 유행되는 쉬운 논리를 해봅시다. 내가 여기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 율법에 보니까 나는 죄만 짓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나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는다고 합시다. 믿게 되면, 그럼 천국 간 것은 누굽니까? 예수 믿은 내가 가죠.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혼자고 저기서도 내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나 자신을, 여기서 내 자신을 귀하게 여긴 그 귀함이 도중에 희석되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천국에 가서도 합격한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고 흐뭇하게 보는 거예요. 

  

이게 이미 선악의 지식에서, 선악과에 의해서 홀로 된 인간들이 도저히 달라질 수 없는, 빼도 박도 못하는 본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거 자체를 하려면 “나 구원 돼야 돼.” 구원되려는 나를 없애야 되겠죠. 천국가야 될 나를 없애야 되겠죠. 본인이 자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칼로 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나를 칼로 친다는 것은 나를 없앰으로써 나를 거듭나게 하게 되면 나는 구원 받는다는, 나라는 의식은 여전히 살아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의식 자체가 이게 영이 아니고 육이에요. 육에서 못 벗어나고 그 사이에서 뺑뺑이 돌고 순환하는 겁니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도망칠 수 없어요. 도망 못 칩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성경은 우리하고 이야기를 안 하죠. 성경은 뭐냐, 예수님하고 이야기한 겁니다. 자,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첫째 시간에 언급했듯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거잖아요. 그렇죠. 근데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고 죽어 마땅해요. 율법은 저주받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제시키고, 여기 성경대로 합당한 사람을 하나님 쪽에서 보내버립니다.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성경은 누구를 증거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 이야기하라고 한 것이 성경이에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의 그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성경은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기 위해서 준 성경이에요. 죽은 자는 귀도 이미 죽고, 눈도 이미 죽고, 코도 죽고, 다 죽었기 때문에 성경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해요. 모릅니다. 아무것도 몰라요. 

  

이 말은 성경이 인간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 구원의 목적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라고 준 목적이 아니에요. 그럼 목적이 뭐냐, 예수님을 주 되심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성경을 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죠. 예수님의 주 되심,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 혼자 잘나라고 성경주신 겁니다. 

  

근데 이 주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활동으로서 이 주가 두 가지의 기능으로 나타나요. 뭐냐 하면 구원주도 되고 심판주도 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46절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는데, 그 조건이 뭐냐 하면 45절에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안 한 것이 곧, 그 다음 두 글자가 뭡니까? “내게”죠. 내게. 나에게. 내게 안 한 거예요.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러니까
천국 가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한 것, 그게 기준이 되어서 천국가고.
지옥 가는 사람, 영원한 벌에 들어가는 사람은 예수님한테 안 했다는 것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자리에 교회를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내 자식, 내 가정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자식한테 잘해준다고 천당 가고, 인물 좋다고 천당 가고 그런 거 없어요. 애들 노래 있잖아요. 돈으로도 못가요. ⯄에다가 못가요가 붙어요. ⯄에 계속 바꿔치기 하면 돼요. 돈으로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가요. 어여뻐도 못가요. 공부 잘해서도 못가요. 어떻게 해도 못가요.
 

  

왜냐하면 못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이 있기 때문에. 아, 내가 가서는 그 천국이 망치겠구나, 하는 것을. 그게 천국이에요. 내가 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목사님, 천국 간 사람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두 번 창조됐거든요. 두 번 창조돼서 간 거예요. 현재 나는 아니고, 내가 다른 내가 돼서 간 거예요. 그래서 이 악마는 뭐냐 하면, 뭘 거부하느냐 하면 인간의 두 번 창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를 쓰고 안 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악마가 기독교나, 천주교라는 종교를 만들어도, 그 종교에서의 두 번 창조는 뭐냐 하면 내가 두 번 태어난 것을 이야기하죠. 그러나 나는 두 번 태어나지 않아요. 두 번 태어난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못가니까, 나로 태어난 나는 죽고 예수님의 것으로 태어나야 돼요. 예수님의 것으로. 

  

듣든지 말든지 모르겠다. 지금 성경의 논리를 따라가야 됩니다. 내가 지금 어떻게 구원받을까를 자꾸 염두에 두고 하면 안 돼요. 악마의 이야기를 했을 때 나하고 상관없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악마의 이야기를 할 때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악마의 생각과 이퀄(=)이 될 수 있다고 늘 생각해야 됩니다. 

  

악마가 관여한 자가 누구냐 하면 아담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누구의 후손이냐 하면 아담의 후손이에요. 이게 육인데요, 아담의 후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현재 있는 이 몸, 이 몸에서 난 내가 성립이 돼요. 이게 아담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이 몸에서만 내가 나와요. 예수님의 몸에서 내가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할게요. 여러분들이 의아한 눈치를 보여서. 한 분 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죠.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모든 인간이 죽은 거죠. 죽은 거예요. 자꾸 다시 살 생각하지 마세요. 죽었는데 누구만 살아났습니까? 예수님만 살아났죠. 그럼 산몸은 예수님 몸에만 해당이 되고 나머지기는 해당이 안 돼요. 다 죽었으니까. 예수님의 몸에서 누가, 죽은 자에게 성령이 찾아온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몸이 돼요. 내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내 몸이 예수님의 몸이 되어서 그냥 부활될 때, 일단 내 몸의 모든 것은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몸, 행함 이런 모든 것은 의미 없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무의미해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내 죽음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거예요. 인생의 모든 활동은. 백날 해봐야 죽어요. 

  

죽었는데도 저녁 먹으로 가고, 죽었는데도 뭐 공부하는 거예요. 해봐야 안 살아나요. 그게. 해봐야 성경공부 한 나, 저녁 먹은 나, 죽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어요. 이 강아지 해봐야 늙어죽어요. 주인이 안다가 미끄러져서 죽을 수도 있고. 강아지 선배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문제고. 지난번 강아지가 그렇게 됐죠. 

  

지금 기독교교리라는 것은 다 잊으세요. 기독교교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마귀가 “당신 귀합니다. 당신 천국 보내줄 테니까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입시생 프로모션이라고 해요. 입시생 프로모션. 갑자기 이걸 제목으로 하고 싶어요. 맞춤합격을 해주겠다는 거예요. 맞춤합격. 

  

여러분들이 교회에 온 이유가 뭐냐, 죽어서 천당 가려는 거잖아요. 자기 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자식들 다 데려다가 천당 보내고. 거기 가서 뭐 할 건데? 천국 가서 거기에 또 텐트하나 쳐요. 해가지고, 다른 옆집 302동이 오면 안 돼. 내 새끼하고, 우리 남편 봐줬다. 내 새끼, 내 남편하고 이래 우리끼리 살아요. 우리끼리. 뭐 버너도 가져가고, 뭐 천국 가서 야영할 일이 있습니까? 

  

인간들이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세상에서 만들어낸 그 모든 체제가 기껏 눈에 보이는 것,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눈에 보이는 그것만 담아요. 그래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뭡니까? “하늘나라에 맨션아파트 있잖아.” 천국에서 맨션아파트에 산다는 겁니다. 거기가면 산다는 거예요. 안 삽니다. 

  

두 번 태어났다는 것은 뭐냐 하면 한 번은 죽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켜요.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안 좋아해요. 왜냐하면 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정말로 사흘 만에 살아났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로요. 사도행전에 사도들의 설교를 조사해보면 그들이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고 살아났습니다.” 

  

뭐, 민주주의니, 우리나라 발전이니, 뭐 이런 거 하나도 없어요. 그냥 예수님이야기에요.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럼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너무나 사실적이죠.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적과 경계되는 사실적인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 몸은 살아있다. 거울 앞에 내 몸은 살아있다. 사실적이거든요. 이 두 개의 사실적인 것에 있어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한쪽을 죽여야 돼요. 예수를 죽여야 내가 살아요. 이 사실을 완강하게 거부해줘야 내가 산다는 이게 정당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만약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 사실 같으면 나는 지금 죽어야 돼요. 더 살 이유도 없어요. 날 위해서 사는 내 인생은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없어져야 마땅한데 질질 끈다는 것은 내가 아마도 전생에 보이스피싱 주모자 같아요.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거짓인줄 알면서도, 내 구라에 넘어가서 그 덕분에 내가 좀 더 이유도 없이 그냥 살아보자는 이게 내가 믿고 싶은 사실이다. 이래 나와는 겁니다. 

  

복음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모두가 싫어해요. 너무나 명백하거든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모두가 싫어해요. 정말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 강의하고 설교하면, 어설픈 연기자들 같아요. 어설픈 연기자들의 특징이 뭐냐 배우들이 눈의 시선을 안 봅니다. 전부 다 시선을 회피해버려요. 고함 더 질러버리죠. 나중에는 시끄럽다고 난리에요. 설교내용은 거론 안 하고 시끄럽다고 난리에요. 

  

목사가 설교 잘하겠다. 그 말은 설교 잘 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순간 내가 살아남아야겠다는 의도가 강렬하게 거기에 담길 수가 있어요. 죽어도 좋아가 아니라 설교 잘하는 목사로 내내 유지되어야 되겠다는 그 생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 목사님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 말이에요. 성경대로입니다. 살아있더라도 죽은 자로 살아있으면 돼요. 죽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겁니다. 죽음을 위하여.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아까 했죠?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요? 죽음치다꺼리 하면서 살아가죠. 결국 아무리 붙잡아도 내 몸은 자꾸 내 손에서 빠져나가고, 내가 의도한 것이 없이 죽음 쪽으로 달려 나가고 있고, 더 살아야 돼! 더 살아야 돼! 바짓가랑이 붙들어도 또 매일같이 젊음과 청춘은 내 몸에서 빠져나가고. 점점 더 허리 아프고 기침 나고 마스크하고. 점점 더 이래하다가 우에 할고? 하루하루가 달라요. 하루하루가 다르고 점점 더 기력이 없어지고. 또 그걸 감추려고 하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우리의 죽음은 일상의 우리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합체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죽음은 성공이죠.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는 죽음이니까 성공작이 돼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렴풋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그때 문제고. 

  

지금은 죽을 때까지, 죽는 그 순간까지 나는 영천에 집지어놓고 헬스하고, 신성일처럼, 불과 사흘 전에 웃통 벗고 헬스기계하면서 근육 만져보라고 했어요. 그게 MBC다큐멘터리로 찍어놓은 것이 있다니까요. 죽고 난 뒤에 두 방송에서 나왔어요. 하나는 KBS인지 SBS인지 모르겠지만. 근육 만져보라고 했는데 사흘 만에 죽었어요. 안 죽으려고 한 인간은 죽고, 죽으려고 한 인간은 골골대면서 계속 살아서 전국노래자랑하고 있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시편에서인가, 그때 니가 봐라. 니 옆에 있는 사람 다 죽어있다. 언젠가는 다 없어져요. 강아지도 죽고, 그 모든 게 죽어요. 미리 알아야 돼요. 이걸. 죽는다는 이것을 기정사실화시키고, 기정사실에서 ‘기정’을 빼버리고 그냥 ‘사실’이에요. 내가 죽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둘 다 사실인데 왜 한쪽은 영생이 사실이고 한쪽은 지옥이 사실이냐 이 말이죠. 왜? 한쪽은 지옥 가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냐 이 말이죠. 

  

그것은 양쪽 다 예수님이 안 놓치고 활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은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 뜻이 아니에요. 지옥 가는 것은 치밀하고 열성 있는 주님의 간곡함으로 지옥 가는 거예요. 주께서 지옥 가는 사람을 기어이 지옥가게 하셔요. 우리가 이걸 믿으셔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의 큰소리치는 것을 그렇게 부러워하지 마시고, 큰소리치면서 그 사람은 죽어가고 있고 지옥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옥가기 전에 마음껏 큰소리쳐라 이 말이죠. 이재명이든 누가 됐든. “나는 안 했다. 나는 김부선하고 안 잤다.” 마음대로 큰소리쳐라. 치되, 그 소리하면서 지옥가고 있어요. 주께서 그렇게 몰아넣어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김정일이 그렇게 욕하지 마세요. 지옥가고 있는 중인데. 그렇게 배후에서 누가 역사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이 우리도 이렇게 천국 가도록 몰아넣지 않습니까? 라고 하실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안 보이시는 분입니다. 안 보이는 거예요. 융털돌기라고 있거든요. 식도라든지 장에. 우리 내부의 융털돌기를 쫙 펴버리면 테니스코트만큼의 면적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융털돌기의 면적이 전부 다 외부와 접촉이 되어 있거든요. 인간 자체가 테니스코트라면 죽음에 딱 맞닿아있어요. 마치 우리가 밖에 나가면 미세먼지와 맞닿아있는 것처럼. 늘 죽음에 맞닿아있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방금 지옥 가는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가는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님과 코인사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면 돼요. 코인사가 뭡니까? 아빠엄마가 자식들 예뻐할 때 코를 맞대고 막 부비면서 하죠. 그야말로 코가 맞대고 있죠. 딱 맞대고 있는 거예요. 이쪽 테니스코트, 천국은 저쪽 테니스코트 이래 있는 거예요. 이것이 이미 주께서 정확히 인도하죠. 

  

그러면 시간의 흐름, 변화라는 것은 무의미한 거예요. 이걸 지워버립시다. 그러면 정지된 것으로 봐요. 정지된 것. 스톱이 된 거예요. 이런 눈이 있어야 믿음이에요. 남 잘 되는 것, 괜히 속이 배알틀리고 그러지 마세요. 모든 것은 정숙하고 고요해요. 스톱이 되어 있어요. 내일도 무슨 일이 있는데 잘 안되면 어떻게 하지, 너무 초조하면 안 돼요. 내일이라는 변화가 아예 없습니다. 그냥 변화 융털돌기라니까. 또 하나의. 

  

내일가면 내일의 주님이 또 계시잖아요. 내일의 주님은 또 뜹니다. 내일의 해가 뜨는 정도가 아니에요. 내일을 관장하고 하나도 자기의 능력에서 빠져나감이 없이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내일의 주님이 또 내일의 해를 뜨게 만들었어요. 주님하고 코인사하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주님은 밀쳐내도 코인사에요. 주님은 떠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갈 사람은 꼭 천국가야 하고, 지옥 갈 사람은 꼭 지옥가야 되는 아주 세밀한 일을 하시기 때문에, 멀찍이 떨어질 리도 없고 떨어질 필요도 없고 떨어지지도 않아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인간들만 자꾸 얼쩡거리니까, 그 움직이는 존재가 다인 줄 아는데, 보이지 않는 분이 딱 붙어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야기입니다.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소자를 치워버리세요. 지극히 작은 자를 치워버리면 곧바로 직접 맞닿은 것은, 주님과 맞닿은 채로 살아가는 겁니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합니까? 이게 최고 아닙니까? 내가 정지되었다는 것. 그럼 정지되었으면, 우리가 보통 정지되었으면 정지된 상태가 어떤 상태가 정지된 상태에요? 죽은 상태죠. 

  

죽은 상태에 있는, 죽은 상태는 뭐 째도 가만히 있어요. 진작 그리 살지. 진즉에. 째도 고소 같은 것 하지 말고. 돈 좀 사기 쳐도 그만 가만히 있지. 진즉에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호들갑은 왜 그리 호들갑을 떨고 있어요. 마치 살아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주식 좀 내려가니까 호들갑을 떨어. 펀드 좀 내려가니까 호들갑을 떨어. 신한은행에 전화해서 펀드 몇 퍼센트 떨어졌는지 아주 호들갑을 떨어. 땅 사놓은 것, 땅값 올라간 것, 119부동산 알아봐가지고 호들갑을 떨어요. 

  

주님보기에, 주님 눈으로 보세요. 아예 우리 눈을 빼가지고, 주님의 눈동자로 갈아치웁시다. 눈으로 보세요. 우리는 뭘 해도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에 불과합니다. 그 확정된 운명의 밭에서, 어떤 사람은 가라지, 어떤 사람은 알곡, 재배작물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가라지와 알곡 그 외에는 없어요. 주께서 이렇게 절대로 자기의 결정에서 못 벗어나도록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실, 명백한 사실입니다. 명백한 사실이에요. 믿읍시다, 라고 하는 말도 잘못이에요. 왜? 죽었으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정지된 것은 죽은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펜을 들게 하신 것은 주께서 들게 하신 거예요. 놓는 것은 주께서 놓게 하신 거예요. 눈을 깜빡이게 하신 것도 주께서 깜빡이게 하신 거예요. 주님의 코인사에요. 다 그렇게 하신 거예요. 묵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 역사는 다 죽은 거예요. 역사 인식도 죽은 거고. 자, 그러면 이렇게 아시고, 지금까지 한 것은 주의 눈동자로 바꿔치기 한 거예요. 

  

그럼 주의 눈동자 빼버리고 인간의 눈동자로 다시 바꿔치기 해봅시다. 아까 인간의 눈동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의 몸이라고 했죠. 자, 아담의 몸에 달린 눈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아담의 몸은 홀로서기 하는 거예요. 홀로서기하게 되면 지금 혼자 자기 자신이 홀로 살아남은 거죠. 홀로 살아남은 거예요. 

  

가인의 예를 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죽은 자가 아벨입니까? 가인입니까? 분명히 아벨은 죽고 가인은 살아남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아벨은 하나님과 살아있고 가인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옥 가는 사람들은 뭘 나타나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한 그것을 유감없이, 평생 죽을 때까지, 눈감을 때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주님 앞에서 다 드러내면서 발악을 해야 되고, 분통을 해야 되고, 격분을 해야 되고, 짜증을 내야 되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해야 돼요. 

  

신자도 마찬가지죠. 신자는 다만 그러한 모든 것이 주께서 허용하신, 우리가 죽어 마땅함을 알리기 위해서 마귀 짓했다는 것을, 그들은 믿음이오니까 아는 거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성도는 뭐냐 하면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홀로 있지 않고 겹쳐있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있는 것이 성도에요. 물론 예수님이 코인사로 주도권을 쥐고. 

  

그런데 불신자는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에요. 거울 앞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잖아요. 우리도 안 보이지만 우리는 알아요. 왜 아느냐? 묻지 마세요. 그것은 성령께서 알게 하시니까. 나는 홀로 있지 않다. 주님이 간섭하고 지켜보고 있다. 아는데, 불신자는 그게 안 된다니까요. 그게 안 되거든요. 그러면 거울 보면 나잖아요. 내가 거기에 살아있다 이 말이죠. 

  

살기 위해서 뭔가 해야 돼요. 직장을 다니든지, 뭐 어떤 노력을 하든지, 땅을 파든지, 시위를 하든지, 사기를 치든지, 뭘 해야 돼요. 하는데, 그 하는 모습이 뭐냐 하면은 아까 처음 강의할 때 이야기한 거치대가 있죠. 뭘 걸어놓는 것.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이죠. 그러면 인간이 살아남아야 하겠다고 하면서 선과 악을 행할 때, 결과적으로 뭐냐 하면 내가 사는데 유리하면 선이고 내가 사는데 불리하면 악이 되는 겁니다. 참 웃기죠. 웃기는 이야기에요. 지금 강아지가 얼마나 잘 듣는지. 아이고, 강아지야 고맙다.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본받으라. 아이들처럼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했어요. 그냥 본받으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다고 되어 있어요. 어린아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살 애들 후회 막 하던가요? 아니, 세 돌 아이들까지 후회 안 해요. 

  

아까 이야기했던, 우유 약간 뜨거우니까 놓으면 되는데, 진짜 놓으면 돼요. 근데 막 던진다니까요. 그냥 땅바닥에 내쳐요. 무슨 감각이 먼저냐 하면은 “이거 먹으면 안 돼!” 이게 더 강하지, 그 뒤에 미래가 어떻게 되고 하는 그것은 몰라요. 본성적으로 내치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나무라잖아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후회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회를 잡지 않아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기회를 잡지 않습니다. “다음에 잘할게. 다음에 할 때는 내가 많이 해야지.” 이게 없어요. 기회도 없고 후회도 하지 않아요. 그냥 뭐냐 하면 즉흥적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어린아이는 시간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간과 거래하지 않아요. 청소년쯤 되면, 엄마가 뭐라고 하면 “다음에 잘할게.” 이렇게 하거든요. 

  

근데 이미 어린애가 아니에요. 지금 지가 살겠다는 것이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근데 의도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즉흥적인데, 그럼 어린애같이 되려면 기회를 얻겠다든지 후회한다는 이것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죠. 다시 말해서 기회를 줘봐야 소용이 없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니까 갑자기 어떤 노래가 생각이 나는데.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럼 기회도 소용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시간을 끝까지 가본들 내 운명은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고자 하는 노력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 뜻이죠. 다른 말로 하면 “선과 악에서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겠다고 애쓴 그 모든 노력이, 절대로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미리 당겨서 아는 거예요. 미리 당겨서.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간은 다시 태어나면 어린아이로 태어납니다. 

  

어린아이로 태어남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태어난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을 버리고 부활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부활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활의 질이, 본질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가 담겨있는 채로 부활될 때, 이게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몸은 부활로 남아있지만 이미 영으로 부활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첫째부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벌써 또 부활이라고 하면, 성경에는 부활 아니라고 하는데 부활했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하는데, 첫째부활. 요한계시록 20장 5절에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부활이라” 6절, “이 첫째부활에 참여한 자는 복이 있고”라고 되어 있죠. 그 첫째부활이 있다는 것은 무슨 부활도 있다? 둘째부활이 있고. 첫째사망이 있다면 둘째사망도 있고. 둘째사망은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이 둘째사망이에요. 

  

첫째, 둘째 이것을 마귀가 싫어한다고 했죠. 왜냐하면 마귀는 인간을 아담의 자손으로 만들었으면 마귀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끝까지 너는 사람으로 살아라 이 말입니다. 니 몸은 하나뿐이라고, 니가 주어진 이 몸이 전부라고, 거기에 너는 모든 승부를 걸어야 된다.”라고 그렇게 계속해서 가르치는 거예요. 그 가르침이 그냥 가르침이 아니고 우리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르침이에요. 거기서 나온 노래가 뿜뿜~~이에요. 계속 뿜어져 나와요. 방탄 소년단이 왜 좋아요? 그냥 좋아요. 그냥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그냥 뿜어져 나와요. 

  

뿜어져 나온다는 것은 뭐가 나온다? 선악논리가 뿜어져 나와요. 선과 악.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선한 것은 내가 사는데 유리한 것이고. 단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왕 살아있으면 멋있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산다, 잘 산다, 남이 부러움을 살 정도로 잘 사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여기 산다에 포함시킨 겁니다. 밥이나 먹여주는 것은 교도소에서도 살죠. 그게 아니고 보란 듯이 사는 거예요. 그걸 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빌딩을 갖고 있는 재벌이 있다고 합시다. 재벌3세고 한 20대인데, 까불락 거리기가 한량이 없다 이 말이죠. 걔에게 친구들이 있잖아요. 재벌3세이면 친구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다 이 말이죠. 술집에 가서 돈 한 천만 원씩 날리고 쓴다 이 말이죠. 그러면서도 이 재벌3세가 뭡니까? “너희들은 나로 인하여 산다.”라고 보죠. 갑질 하는 거죠. 너희들은 나로 인하여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 사는 거예요. 나를 부러워하면서. 

  

이렇게 살고 싶은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을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갑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 말이죠. 상대적으로.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상대를 찾을 수밖에 없고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어요. 한 20년간 적금 넣어서 아파트 한 25평짜리 샀는데, 오랜만에 여고동창생을 만났는데 자기 집에 놀러 오래요. 이번에 100평짜리 아파트 샀는데 놀러 오래요. 4분의 1밖에 안 돼요. 그리고 하는 말이 “나 이렇게 살아.”라고 하는 순간, 그렇게 못 사는 나는 살아도 시시하게 사는 것이 돼요. 제대로 안 사는 것이 돼버려요. 제대로 안 사는 것이 됐다고요. 

  

그래서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보다 망해버린 친구를 만나야 그나마도 숨을 쉬는 거예요. ‘아, 그래도 사는 게 맞긴 맞구나.’ 우리는 만날 인간이 이렇게 살아요. 그냥. 이렇게 산다고요. ‘이만하게 사는 것도 우리 부모가 날 위해서 얼마나 기도를 해줬다고.’ 그러니까 교회 다녀도 소용이 없어요. 교회 다니면서 기도한 내용이 뭐냐 하면 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 거예요. 잘 살게 해달라고. 

  

우리 아버지가 교회에 목돈으로 헌금한 것도, 선교헌금 많이 낸 것도 잘 살라고 선교헌금 낸 거예요. 전부 다 마귀한테 속아 넘어 간 거예요. 내가 설치지 않으면 나는 못 산다는 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러면 거기서 나오는 법칙이 있어요. 살아있는 내가 더 사는 것, 이 보편적인 법칙이 오늘날 뭐냐 하면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지식). 모든 과학지식은 진보 때문에 그래요. 진보. 발전. 이걸 진화라고 하죠. 

  

원래 진화라는 단어는 없어요. 진화라는 단어는 없는데 진화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써요. 원래 다윈이 말하는 것은 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이야기한 겁니다. 어떻게 달라질지는 모르잖아요. 그냥 변화한다. 모든 동식물은 변화한다고 했지 진화한다고 안 했는데, 앞에 ‘진’자를 넣어버리면 변화해도 좋게 달라진다고 인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기적인 유전자’를 썼던 리처드 도킨스도 마찬가지고. 

  

진화한다는 거예요. 진화하는 것이 아니에요. 변화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변하죠.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변하죠. 늙어죽죠. 진화론 공부 많이 하면 뭐합니까? 늙어죽는데. 지가 박사 되고 의학박사가 되면 뭐합니까? 늙어죽는데. 죽음이 사실이에요? 과학이 사실입니까? 죽는 게 사실이에요. 너무나 명백해요. 너무나 명백하다고요. 이렇게 고함치면 고함지르지 말라고 하는데, 고함지르고 안 지르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무나 명백하다니까. 

  

움직여봐야 소용이 없어요. 사는데 유리해요. 사는데 유리하면 또 착각한다니까요. 어제보다 더 살았구나! 어제보다 더 산 게 아니고 주께서 더 살게 하신 거죠. 주께서. 왜? 주의 공로를 자꾸 마귀한테 속아가지고 내 공로로 전환시키니까. 주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감사하는 거예요. 범사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겁니다. 죽으라고 하는 것이 자살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자살하나 안 하나 그건 의미 없고. 자살해도 주의 뜻이 되어야 하니까. 감사하라는 말이죠. 

  

죽더라도 살더라도,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것을 감사하라. 주께서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코 비비는 코인사 하는 것을 감사하라 이 말이죠. 감사하려면 나는 늘 주님이 살아계셔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고, 나는 사나 안 사나 그거 의미 없어야 돼요. 주님이 살아있다는 내 증거로 주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잘났다는 증거로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자, 그러면 영생 얻는 것은 주님의 덕분으로 치자. 왜? 주님의 생명으로 얻었으니까. 그러면 벌은 왜 받습니까? 라고 할 때에, 원래 영벌은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여기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 보면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마귀가 불과 유황불에 들어가요. 

  

근데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사망이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둘째사망, 지옥불에 가요. 

  

그럼 여기서 살인자,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과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 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이거는 특정인물이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주님께서 영벌에 집어넣기 위해서 마귀 말 외에는 절대로 안 믿는 자들로 그렇게 만든 겁니다. 

  

말이 어렵죠. 사도바울이 사도된 것은 본인의 실력이 아니고 환경 탓이에요. 환경이 사도로 하여금 그렇게 몰아세운 겁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 내려갈 때 ‘이쯤 되면 예수님이 오실 텐데.’ 이랬습니까? 그냥 찾아왔잖아요. 우리가 성령 받을 때 ‘이쯤 와서는 성령 받아야 되는데.’ 이랬습니까? 그냥 찾아와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꺼번에 다 믿어진 거예요. 한꺼번에. 한꺼번에 믿어진 거예요. 이거 빼고 저거는 다음번에 믿고 이런 거 없어요. 

  

아까 했잖아요. 기회가 주어진다든지, 후회한다든지 이거는 성도한테 있을 수 없다고요. 이거는 어린애 같은 심정이 아니에요. 선악을 유지하게 되면 자꾸 후회가 된다니까요. “다음에 잘할 걸, 잘할 걸.” “다음에 믿을 걸.” 믿는 것도 우리 힘 같으면 믿으면 되는데, 우리 힘으로 믿은 게 아니기 때문에 후회될 건덕지도 없어요. 그냥 어린애에요. 어린애는 부모한테 태어나서 어린애된 거예요. 태어날 때 어린애부터 있잖아요. 

  

주님이 두 번째 창조하신 거예요. 생명으로 창조하신 거예요. 주께서 우리 어머니고 주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죠. 우린 주님의 패밀리고. 그래서 주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는 거예요. 내 힘이 아니에요. 하나 되신 주님이 그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하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좀 뻔뻔스러워요.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면 끝나버려요. 무슨 일 안 한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결국엔 영벌과 영생밖에 없는데, 이것은 바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작은 자한테, 그러니까 성령 받은 자에요. 이 작은 자, 성도한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한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서 지난주일 낮 설교할 때 제가 끝부분에 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속임수라고 했죠. 

  

마귀는 속이는 자에요. 마귀는 우리를 계속 속였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겁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제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딴 이야기는 하지 마라.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지 주님은 벌써 죽었다.” 계속해서, 매일, 매순간 일상생활 하는데 계속 가로막아요. “니가 노력 안 하면, 니가 취직 안 하면 니는 굶어죽어.” 계속 우리를 죽음에 궁지로 몰아넣고 한다 이 말이죠. 

  

이게 속임수인데, 주님의 속임수는 뭐냐, 악마한테 속아주면서 악마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주님의 속임수에요. 지극히 작은 자, 우리 보기에 지극히 작은 자가 별 대단치도 않아요. 근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마귀가. 왜냐하면 이 성도가 지 잘났다고 해서 경쟁하는 사람 같으면 건드려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래. 본인이 아무것도 아닌데 주께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다시 태어나서 살게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님을 거론함에도 불구하고, 근데 마귀가 아무것도 아니니까 까불지 말라고 건드려버린 거예요. 이거는 폭탄을 건드려버린 거예요. 폭탄을.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자기들 기준해서 대단해보인 사람은 우대해주고 대수롭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거든요. 근데 이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복음 외에는 스스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누가 봐도 건드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처럼, 그렇게 함부로 누가 건드려도 그냥 다 자빠지고 엎어지는, 아무 힘도 없고 대들지 못하는 그러한 미미한 존재처럼 간주하는데, 의도적으로 주께서 이 성도를 미끼로 세상에 내세운 거예요. 미끼로. 걸려들라고. 

  

그래서 천국은, 가서 천국이 아니라 이미 천국인 것처럼. 지옥도 꼭 죽어봐야 지옥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곧 지옥입니다. 악마가 십자가복음 못 들게 만들고, 계속 잘하면 잘될 수 있다고 변화를 독려해요. 악마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잘되도록 계속 격려해주는 일을 악마가 해요.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라는 노래 있잖아요. 잘 풀리는 집처럼. 잘 될 거라고 자꾸 격려해주고, 독려해주고, 엎어지면 용기를 부여하고. 

  

악마가 하는 유명한 표어가 있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게 악마가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표어는 뭐냐, 하나님은 스스로 돕지 않는 자를 스스로 돕지 못하도록 돕는다. 이게 주님의 표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게 정지되어 있고, 죽은 모습이고, 운명이 확정되어 있다는 그 안목. 주님의 눈동자가 우리의 눈동자를 바꿔치기 해서, 그런 안목으로 어두운 세계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