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의 전쟁 (삼상 14장11-44절) 대전- 40강
이근호
2018년 7월 24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4:11-44
(삼상 14: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삼상 14: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삼상 14: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삼상 14:14)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 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삼상 14: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삼상 14:16)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삼상 14: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삼상 14: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사무엘 상 14장 11절에 보면 지금 전쟁하는 중이에요. 누구와의 전쟁이냐? 다른 사람들 보기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한다고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할례 받은 자와 할레 안 받은 자와의 전쟁으로 보는 거에요. 이 관점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할 때 모든 전쟁이 나의 전쟁이 되어 버려요. 나의 자존심과 나의 위신과 관련되어 있고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할 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직접 작살내도 되는 문제인데 왜 이스라엘을 앞장세워 전쟁하게 하는 가?
그 이유는 전쟁의 목표가 적을 물리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네 주제 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생각이 같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나와 생각이 같으니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협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나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자기는 늘 정당하다고 생각하니까 변명거리도 늘 생기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처벌 안하셨으면 좋겠다는 거에요. 용서를 해 달라는 말이 아니고 인간들은 용서란 말도 싫어해요. 처벌을 안 했으면 좋겠다. 처벌이 없었으면 좋겠다에요.
용서가 되면 죄인의 입장에 서 버리게 되요. 죄인의 입장은 용서만 귀해요. 그런데 이건 싫어해요. 왜냐하면 내가 뭐가 못 난 는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대인 관계에서도 늘 부딪히잖아요. 내가 너보다 못 난게 뭐가 있는데 하지요. 죄인이 될 경우에 용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이 나는 내 자존심 무너져도 괜찮아! 라고 나설 인간 아무도 없어요. 전쟁 벌여야 되지요. 왜 자진해서 죄인의 자리를 거부하니까 인간은 타고난 거에요. 난 너보다 못한 게 없어! 나도 나름대로 잘났어!가 기본 베이스로 깔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 하지만 실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잘남을 나타내는 전쟁이 됩니다.
모든 다툼이 다 그래요. 다퉈놓고 마지막에 계산해 보면 그다지 못나진 않았지! 죄인의 자리에 안 가는 겁니다. 주님의 전쟁이 아니고 나의 전쟁이 됐지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 듯이 나의 전쟁이 되어버리면 누가 적이냐 하면 주님이 오히려 나의 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벌을 하지 말아 달라 다시 말해서 늘 승리의 편에 서세 요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전쟁은 하나님이 개입하게 되지요.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선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용서 보다는 승리를 구한다는 것을 뻔히 아십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고 블레셋도 마찬가지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똑같은 인간끼리 붙여버립니다.
블레셋이야 여호와를 안 믿으니까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인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우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전쟁이든 질 리가 없다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질 리 없으니까 이길 것이다라고 여기는 겁니다. 만약에 이긴다면 누가 더불어 같이 이긴 자 편에서 생각하냐 하면 이스라엘이 한 것도 없이 그렇게 짐작하는 거에요. 주제 파악도 못하면서, 여기에서 요나단을 통해서 하는데 사실 요나단이 전쟁을 할 입장은 안되고 전쟁은 누굴 통해서 하냐 하면 그 당시에 왕이었던 사울의 명령대로 이스라엘은 포진되어 있고 저 쪽은 블레셋이 있습니다.
지중해가 있는 (블레셋 평야)에서 왔으니까 예루살렘 위인 북쪽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요단강이 나와요. 그 당시 사울의 고향(기브아)이 이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지금 사울의 명령으로 전쟁을 했습니까? 명령 없이 요나단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한 거에요? 요나단이 일방적으로 전쟁을 한 거지요. 그러면 사울이 명령을 한 적이 없지요. 사울은 왜 명령을 안 했냐하면 블레셋 군대가 수가 더 많다는 말이죠. 많을 때는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왜 기다려야 하나? 기다리면 무슨 수가 있겠지! 우린 숫자로는 밀리지만 하나님께서 쳐라! 그러면 이겼다는 공식으로 그렇게 막무가내로 믿었던 거에요.
시키는 대로 하면 이긴다. 사울이 그런 생각을 할 때 나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집어넣은 거에요? 뺀 거에요? 뺐지요. 나는 문제없다. 시키는 대로 하면 주님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 없이 움직였어요. 지시 받지 않은 하나님의 명령이 왕을 통해 나와야 하는 데 왕을 비껴나 아들 요나단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전쟁을 이미 개시했어요. 요나단의 전쟁 할 때의 원리가 뭐냐하면 내편 네 편이 아닌 할례 없는 자로 봐요. 이스라엘은 할례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 전쟁은 할례 없는 자와 할례 있는 자의 전쟁 그러면 할례 없는 자는 언약이 없다이고 할례 있는 자는 언약이 있다가 되요.
언약이 있다라는 말은 언약이 있으면 승리한다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생각해야 됩니다. 언약이 이렇게 현실적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거에요. 언약 세계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언약은 이 지상에 증거물을 남기기 원해요. 언약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언약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노아 때 생각해 봅시다. 노아가 하나님을 믿었지요. 노아는 믿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사람과 믿는 노아 사이에 어떤 증표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증표를 줍니다. 그게 뭐냐하면 방주 만들기에요.
방주를 만들므로 말미암아 이건 노아가 승리토록 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펼쳐지기 위해서 노아를 다루시는 겁니다. 그럴 때 노아의 입장은 쉽게 말해 바보. 등신 되는 거지요. 땡볕에 비가 올 생각이 없는데 방주도 얼마나 엄청나게 만들었어요? 잠시 피하는 보트가 아닙니다. 세상이 전부 이사 짐 챙기는 거하고 같은 거에요. 그리고 이사 짐은 챙기는 데 갈 데가 없어요. 이게 언약의 멋진 내용이에요. 방주라는 배를 타고 갈 목적지가 없어요. 미친 겁니다. 완전히 미친 거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뭐를 했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나름 목적이 있었어요.
부자가 된다든지 가정의 화목이라든지 행복이나 건강이라든지 목적이 있었는데 자기의 목적을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일상 아닙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상이 뭐냐하면 목적을 세우고 목적을 향해 나가는 거에요. 막 노동도 먹고 살려고 땡볕에서 하잖아요. 그런데 방주는 왜 만듭니까? 아무 쓸데없는 것에 몰두하지요. 요나단이 움직일 때, 언약을 거론했다는 말은 언약 받지 못한 자들이 가만히 있는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잖아요. 그러면 요나단이 보기에 언약 받지 못한 블레셋을 하나님이 움직이신 거에요. 움직였다는 말은 그들이 할례를 모르는 거에요. 개무시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바로 왕이 누굴 먼저 건드려요?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을 먼저 건드리지요. 아들을 낳으면 다 죽여라!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 애굽의 아들들이 다 죽었어요. 맏이는 다 죽었습니다. 너희가 죽였으니 그렇게 다 죽이는 거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따라 합니다. 인간이 자존심을 세우면 하나님은 자존심 없는 방향으로 나타나지요. 왜 자존심 있는 것은 언약이 아니고 자존심 없는 것이 언약이기 때문에 자존심과 자존심의 싸움, 이것은 성사 될 수 없습니다. 왜 자존심 있는 인간이 나에게 시비를 거느냐? 이 전쟁은 자존심 없음이 주님의 마음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벌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용서를 못 하잖아요. 나의 지속적인 일상을 원합니다. 여기에 언약이 개입되면서 용서가 되려면 무슨 자리가 마련돼야 하냐하면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마련되지 않는 자리. 죄인의 자리, 죄인의 자리란 아예 자존심은 없었습니다라는 자리. 나 같은 인간은 밟혀도 괜찮습니다하는 그 자리. 없는 자리를 만드는 거에요. 하나님이 개입하신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하면 없음으로 모든 있음을 치는 전쟁입니다. 인간 세상은 있음과 있음 밖에 없어요. 눈에 보이니까. 그런데 없음이라는 것은 아예 없으니까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묻고 계신 거에요.
네가 살고 있다. 그럼 어디서 나왔느냐? 네가 어디서 나왔는가? 어떤 아들이 군대에 가 있다. 그러면 군대가 자기 직업이에요? 아니지요. 너 어디서 왔어? 대전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있음을 계속 해버리면 이야기가 안 되고 있음과 있음과의 더 있기 위한 자존심 싸움인데 자존심이 뭡니까? 나는 없어지지 않을래! 에요. 난 여기서 허물어지지 않을래가 자존심 전쟁이에요. 더 버틸래가 자존심 전쟁이거든요. 주님은 너의 있음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다시 하번 묻는 거에요. 그 자동차 어디서 났어? 너 언제 월급 받아 자동차 샀나? 애 보고 묻는 게 아니지요. 분명히 없었는데 누구 줬잖아요.
우리 있음도 우리 존재도 없었는데 있는 거에요. 생년월일을 물을 때 1900 몇 년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1800년대에는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지요. 그런데 1800몇 년도라 하면 미친 사람이지요. 1900년도로 말하는 거에요. 하나님은 집요하게 우리의 바탕을 자꾸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있음은 없음을 위하여 봉사하라고 이 땅에 태어 난 겁니다. 고집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있다 보니까 고집이 생긴 거에요. 집착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수를 적게 하신 거에요. 저 쪽 블레셋은 숫자가 너무 많아요. 요나단은 언약대로 움직였지만 “어디서 할례 없는 것들이 우리를 공격해!”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쳐들어 온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나가서 싸우는 것도 뜻이다 요나단이 가는 데 무기도 없어요. 칼 두 자루 밖에 없어요. 그런데 저 쪽은 숫자가 많지요. 그러면 있음이 풍부한 거에요. 요나단은 달랑 두 명 이에요. 두 명이라는 것은 어디에 가까우냐? 없음에 가까워요. 없음과 있음의 전쟁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점에 유념해야 되냐하면 평소에 있음이 있음을 이기기 위해서 그동안 어떤 생각들을 꾸준히 해왔는가가 이 전쟁을 통해서 다 들통나요. 평소에 있음이 있음을 대결할 때 있는 것을 충분히 활용하잖아요. 그런 것은 블레셋이나 하라는 거에요.
언약 없는 것들은 마음대로 하라는 거에요. 그러면 이 쪽에 있는 것은 뭐냐하면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버리면 그 다음 전쟁은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들의 내부에서 붕괴되요. 사사기 같아요. 미디안 군대가 기드온은 300명이지요. 300명과 수십만하고는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붙이셨잖아요. 기드온은 칼이 몇 자루였다고요? 칼은 없었습니다. 기드온은 횃불과 항아리 이건 그 전쟁의 성격을 논하는 겁니다. 캄캄한 속에 빛으로 존재하는 이스라엘, 그런 성격을 논하기 위한 것이지 전쟁의 무기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의 칼이요. 여호와의 칼이라고 했거든요.
여호와의 칼은 있는 우리를 없음으로 바꾸는 거에요. 너는 쪼다 되면 성공이라는 것, 전쟁해서 쪼다되지 말고 전쟁 가운데서 쪼다라는 말은 있으나 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 사람이 아무것도 아닐 경우에만 자기 인생에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에서 무기라는 것은 뭐로 보냐 진공에 대해 반항할 때 무기가 되는 것이고 에너지가 있는 곳에서 저항이 생길 때 만약에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지요. 어린 아이가 아파트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덜 다쳐요. 왜 무게가 얼마 나가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맨 날 먹고 자고 하는 아줌마가 떨어지면 자기 무게에 자기가 죽어요.
어린 아이가 더 더위 타요? 어른이 더위 타요? 표면적으로 넓으니까 일사량을 많이 받는 겁니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잖아요. 자기 면적을 줄이세요. 욕을 해도 빠져 나가야지 오는 욕 다 받으려면 자기가 골키퍼도 아니고 왜 마중 나갑니까? 면적이 좁아져서 오는 욕도 피해 빠져 나가야 되요. 대나무 숲 나무의 바람처럼 쏙쏙 다 빠져 나가야 되요. 그런데 콘크리드 벽처럼 쓸데없이 온갖 세상일에 다 신경쓰니 그건 나이 60쯤 넘어 퇴직해서 뉴스만 보며 하고 그런 거 신경 쓸게 어디 있어요, 노모씨가 자살해 죽던 말든.
주님의 전쟁은 유를 무로 바꾸시는 거에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있으니 남의 이야기처럼 그러는데 하나님! 내가 듣고 있습니다. 그게 목적이 아니거든요. 니가 사실은 없어야 돼! 없어야 되는데 모든 세상을 무로 바꾸기 위해서 심판이지요. 심판하기 위해서 있는 유(有)를 심판하기 전에 먼저 유를 무로 바꾸는 모델을 만들어 버려요. 그러면 있음에서 없음이 될 때 전쟁에 넣어 개입해 버리면 모든 있는 것들은 유에서 무가 되는 과정 앞에서 가치가 없고 그들의 생존의 정당성은 보장 받지 못 합니다. 그동안 블레셋은 누가 키웠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키우셨거든요.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은 몰라요.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지킨다는 것을 알아서 영광 돌려야 되는데 하나님이 지키신다고 하는데 수시로 전쟁이 일어나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기들이 노력해서 됐다고 생각하겠지요.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민족과 다른 점이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몸에 새겼어요. 그것을 할례라 하지요. 할례란 하나님이 인간을 정성으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 취지입니다. 할례를 피 언약이라고 했어요. 몸이 있다는 자체가 영 꼴사납다는 거지요.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육체는 죽어 마땅하다는 뜻이거든요. 죽어 마땅하다고 고백할 때야 나는 너와 동행할 의사가 있다는 겁니다.
할례 언약을 세례라고 했지요. 성령으로 세례 받은 상태가 어떤 상태이냐 하면 죄인인데 주님이 동행하셔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할례에서 세례로 바뀌려면 회개해야 되요. 회개란 예수님 관점으로 세상 보기가 회개입니다. 울고불고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예수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거에요. 모든 인간은 창세기 3장에 생명나무에서 끊어 졌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주일 낮 설교 제목이 끊어진 자였어요. 마땅히 끊어져야 될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끊어져야 될 세상에서 내가 살아 왔었구나를 새로운 인식을 장착해서 살아가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세례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로마서 6장 8절에 있잖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의해서 새롭게 생겨난 사람만이 가능하다, 다시 본문 15절에 보면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조금 쳤는데 저쪽은 난리도 아니에요. 진동이 일어나면서 그리고 그 뒤에 21절부터 죽 보게 되면 원래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이 지배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얼마나 개판이 되었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지배하고 있어야 될 땅을 이방 민족이 지배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면 지배하고 있는 땅에 누가 삽니까? 히브리인들이 살겠지요. 사는 데 와서 점령하고 침공을 하니까 히브리인이지만 세금을 누구에게 내야 합니까? 팔레스타인에게 내고 하는 거에요. 며칠 전에 뉴스에 이스라엘 대통령이 선언 했잖아요. 이스라엘은 오직 유대 민족의 나라입니다라고 선언을 해버린 거에요. 이 말은 이스라엘에 15%가 누가 있냐 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국민이에요. 세금 다 내고 군대에 다 가고 국회의원 다 뽑고 국회의원 가운데 아랍인도 있어요. 그런데 이젠 그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게에요. 오직 유대인의 국가로 선언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번에 대모하고 그러잖아요. 세금 다 내고 이젠 국민이 아니고 점령 받은 자가 되요. 기존의 이스라엘 국민에서 하위 계급이 되는 겁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을 그러했을 때 일본이 그렇게 보는 것처럼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히브리인이 그런 입장이 된 거에요. 팔레스타인이 지배 계급이고 계급층이 바뀌었어요. 점령 당한 겁니다. 그런데 요단강에 와서 큰 떨림이 있으니까 팔레스타인에게 동조하다가 그들이 뒤늦게 해방을 외치는 거에요. 야! 우리 이스라엘 편에 서서 같이 전쟁하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동안 쪽도 못쓰던 원래 본토 히브리인들이 이 참에 거들은 거에요.
21절에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원래 사울이 전쟁 할 때 18절 봅시다.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아히야는 그 당시 제사장이에요.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사울이 전쟁 할 때는 전쟁의 루트가 오직 하나님이 나에게만 이야기 하신다. 제사장이 옆에 있으니까 이렇게 했는데 먼저 요나단이 움직였다고 했지요? 뒤늦게 참여한 거에요.
하나님의 궤에서 전쟁 시작이라고 제사장에게서 지시가 와야 하는데 그 지시 없이 전쟁이 일어난 거에요. 그런데 그 전쟁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난 전쟁이 되어버리고만 겁니다. 그러며 이건 무엇을 의미하냐? 이쪽 노선 하나님이 사울 왕과 제사장과 함께 한다는 노선은 헛방이 되버린 거에요. 교회에 목사들은 이런 것을 아주 싫어해요. 집사들 끼리 교회에서 뭘 하면 싫어해요. 왜 내 허락도 안 받냐 이 말이죠. 언약궤가 나한테 있는데 예전 우리 한국의 가부장 제도와 마찬가지에요. 허세와 허풍 밖에 없는 남편들이 무슨 일을 할 때 꼭 자기 허락이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오늘 날 가정은 전문가 시대에요. 아내의 전문 분야에 남편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이 분야에 수 십년의 노하우를 가진 아내가 하는 일을 자긴 전문가도 아닌데 관섭하면 낙하산 인사가 되지요? 감자 먹을 땐 어떻게 하고 하는 것을 관섭하면 안돼요. 그냥 주는 대로 먹어야 되요. 더워서 불 옆에 못 간다 그러면 자기가 라면 끓여 먹던 지 외식 하던지 빵 사먹던지 알아서 해야 되지 이 더위에 40도가 넘어 가는 데 무슨 화이어 하고 있냐 말이죠. 하루 세끼를 다 달라고 하면 도대체 어쩌라고. 옛날엔 여자가 못 배웠어요. 여자들은 남자에게 모든 종속적이었습니다. 지금은 자기 전공 분야가 따로 있어요.
전공 분야에서 조언을 받아야 되지요. 언약으로 전쟁하는 분야에서 사울은 전문가가 아닙니다. 요나단이 전문가에요. 왜냐하면 요나단은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이 전쟁은 어떤 전쟁이냐 하면 없음을 가지고 있음을 이기는 전쟁이지요. 사울도 얼추 흉내를 내지요? 왜 하나님의 언약궤와 같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겠지! 그거 아니거든요. 목적만 좋으면 될 줄 알고 있는데, 어쨌든 전쟁이 지금 무르익었습니다. 22절을 봅시다.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 하였더라
뒤 늦게 나와 추격하는 거에요. 마중물을 요나단이 개시 한 거지요. 깃대는 요나단이 들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이 힘을 내서 했어요. 그런데 24잘을 보세요.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피곤 하니 사울이 전문가도 아니면 가만히 있고 아들이 승리 하면 “아이고! 아들아! 잘했다. 이번 전쟁은 내가 한 게 없구나!” 이렇게 하면 얼마나 은혜로와요.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1. 내가 이번 전쟁에 아무것도 아니 했구나! 이런 결론이 나오길 원했던 거에요. 그런데 그 쥐에 보면 사울이 자기가 꼴에 왕이라고 자기는 한 것도 없이 다 피곤해서 녹초 되어 있는데 한 명도 살리지 말고 다 죽여라! 죽여라! 이러고 있다고요.
자기는 한 게 없으니까 힘이 남아돌아서 가만히 보니까 이미 전쟁에 저 쪽이 기울어 졌거든 해서 이 참에 왕 체면을 세우겠다는 거에요. 지금 피곤해서 퍼져 있는데 무슨 추격을 해요. 어려운 가운데 이 만큼 해줬으면 고맙습니다라고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하면 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이게 드러나면 안되고 꼭 블레셋이 물러나야 이긴 게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가 이긴 거에요.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할 자격도 없어라고 하는 자리가 이긴 건데 갑자기 욕심을 낸 거에요. 항상 이 욕심이 문제에요.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하는 거에요. 제가 주일 날 한도 초가라는 말을 썼지요.
은혜의 한도초과라는 말을 썼습니다. 한도초과라는 말은 별로 좋은 말이 아니지요. 카드 너무 많이 쓰면 그렇게 되는 데 주님은 은혜를 주실 때 한도초과로 주시죠. 처음 줄 때는 고맙습니다 하는데 너무 주니까 미안해요. 너무 은혜를 줘버리면 안 믿는 수가 있어요. 이 정도 가지 안 하셔도 되는데 점잖게 좋은 말로 타일러도 난 바르게 살 수 있는데 이렇게까지 은혜를 주시면 그 정도로 무능한 자인가? 우리의 마음을 낮추게 하시는 거에요. 일이 뭔가 잘 풀릴 때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모든 공로를 주께 돌리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못 사느냐 하면 있음과 있음으로 비교하며 살아서 그래요.
없음의 자리가 근원인데 자꾸 있음으로 기 안 죽으려고 그런데 사람들이 배고프니까 보이는 데로 먹었어요. 꿀 먹었지요. 전리품으로 잡은 고기를 피 째 먹었다고 했어요. 안 굽고 먹는 육회처럼, 그걸 누가 봤냐 하면 사울 왕이 봤어요. 사울 왕은 머리로는 전문가라 율법을 알아요. 머리는 전문가인데 몸은 비겁자에요.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피는 먹지 마라고 되어 있잖아요. 사울은 왕이니까 하나님이 피 째 먹지 마라고 되어 있는데 백성들이 먹게 되면 율법에 위반 되었다고 보는 거에요. 율법에 위반되면 그 뒤에 뭐가 따릅니까? 처벌이 따르지요. 저주 받지요.
(삼상 14: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삼상 14: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삼상 14:33)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저주 받으면 자기가 있는 나라가 망하잖아요. 이게 걱정이 되는 거에요. 이런 생각이 극히 자연스럽다에 동의합시다. 자연스럽지만 옳은 생각이냐를 생각해 봐요.
인간은 있음만을 생각하고 관심과 집착한다고요.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지키는 거에요. 하나님이 좋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좋은 게 아니에요. 이 정도의 있음을 건사하려고 유지하려고, 나쁜 짓을 안 하려고 하는 거에요. 이게 옳은 생각이냐 말이죠. 없음에서 벌써 이탈한 거죠. 있음의 레벨에서 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이야기 할 입장이 됩니까? 지금 사울이 누가 송아지 피 째 먹도록 유도 한 거에요? 사울 본인이에요.
공격하라고 한 게 이 참에 큰 승리가 아니고 더 큰 승리의 희열을 왕의 입장에서 한 번 짜릿하게 맛보려고 한 거에요. 회사 경영하고 같은 것이 중소 기업하다가 좀 유명해지고 트랜디 있고 잘 된다 싶으니까 그것을 담보로 은행에 빚을 내서 돈 되는 것이 보이는 곳에 문어발식으로 해서 나도 재벌 수준으로 가려고 사업은 도박이니까 그런 식으로 하지요. 그게 주제 넘는 것이고 자기가 잘 하는 일 말고 돈이 되는 것을 해서 십대 재벌 안에 들어가려고 마구잡이로 돈 빌려서 하는 거에요. 좀 잘되니까 그런 거에요. 지금 사울이 머리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욕심이 바로 죄를 낳지요.
성도는 뭐가 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성도에요. 왜냐하면 없는데 주셨으니까 늘 감사할 뿐이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감사 했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주어졌던 것이 없어도 군말하지 말라고 주시는 거에요. 한 60억 주셨다가 70억 가져가도 군말하지 말라고 60억 주시는 거에요. 우리 생각엔 70억 도로 가져가도 60억 가져보고 싶어요. 엇이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한 거에요. 처음엔 많이 있다가 다 날아가 버리는 꿈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누구 시냐를 보여주기 위해 바로의 꿈에 나타난 겁니다. 요셉이 개입 하지 않으면 7년 풍년 들었을 때 흥청망청 다 썼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의 개입으로 풍요할 때 어떤 의식이냐 하면 뭐 잘났다고 풍년이 되게 해 주었냐는 말입니다. 잘 난 것도 없는 데 풍년 되게 해 준거에요. 잘난 것도 없는 데 풍년 부자 되게 해준 거에요. 이것은 있을 때 없어 질 때를 기본으로 갖고 있으란 말이에요. 있을 때 없음을 깔아 버리란 말이죠. 없어도 되는데 주셨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러면 당신은 이 부근에서 최고의 부자가 될 것입니다. 요셉의 말을 듣고 바로가 부자가 됐고 요셉은 이것을 통해 어려운 처지의 아버지와 형제를 다 살리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는 거에요. 어린 애가 돈 벌려고 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선을 넘어 선 거지요. 있는 데로 감사한 겁니다.
사무엘 상 계속 진도 나가 봅시다. 28절 봅시다. 그러니까 적들을 다 물리치기 전까지 만약에 음식물에 손을 대는 사람은 내가 명하노니 저주 받는다고 한 거에요. 그러면 이 저주는 누가 받아야 되겠지요? 나중에 뒤에 보면 나오지만 다른 가정이 저주 받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 남은 가정이 누구의 가정이냐 하면 사울의 가정이에요. 마지막 남은 사람이 사울과 요나단 달랑 두 사람이 남았습니다.
(삼상 14: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어디에 나오냐 하면 41절부터 보면 다 뽑고 결국 누가 남았냐 하면 하나님의 선택의 초점이 점점 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처음에 명령을 내린 사울에게 가까이 가는 거에요. 이런 조건이면 죽이라고 했는데 그 조건을 멀리 던졌는데 점점 가까이 와서 처음 조건을 제시한 쪽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보통 무서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저주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셨지요. 그 돌로 결국 누구를 치게 되었어요? 그 돌을 결국 누구를 향해 돌을 치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향해 돌을 치게 되어 있어요. 그 전체를 언급해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언급한 겁니다.
(삼상 14: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삼상 14: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처음에 바리새인들이 돌로 치려고 했지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했지요.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에 나와 관계없는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법은 나와 관련되어 있어요. 나를 먼저 생각하고 상대도 생각하라는 말이죠.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비춰보고 상대를 보라는 말이죠.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인가를 알고 상대를 대하는 것, 그게 이웃 사랑이라는 것.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 했던 그 사랑.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빠지면 사랑이 아니에요. 십자가 복음을 집어넣어야 되요. 제자들이 이것을 몰랐어요. 부자가 예수님 앞에 나가 잘난 체 하다가 예수님을 떠났지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니까 부자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깜짝 놀라요. 지금 제자들은 부자와 자기들을 연관 시킨 거에요.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제자란 십자가를 집어넣어야 되요. 십자가를 집어넣으면 어떤 인간도 구원 받을 인간은 없다 입니다. 부자를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그럼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가 된 거에요. 결론은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할 때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구원의 문제가 니가 걱정 할 니 문제가 아니고 나 하나님의 문제이다. 내 문제를 니가 왜 걱정하냐?
구원은 하나님의 문제인데 걱정은 왜 우리가 합니까? 그 만큼 우리가 개만도 못한 거에요. 개가 집에 부도나서 주인이 은행의 통장 몇 개 인지 마이너스 통장 붙들고 걱정하고 있을 때 개가 옆에서 웁니까? 아이고 주인 잘못되면 나는 뭐 먹고 사나? 이런 게 있습니까? 주인이 걱정 하든 말든 오뉴월의 개 팔자처럼 퍼져 누워서 사료만 주면 그걸로 고맙다 하고 그거에요. 지금 개 한테 배워야 되요. 걱정 할 필요도 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어요, 우리가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주욱 질문하다가 끝에 가서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질문 자체가 어떻게 살아야 되냐하고 뭘하다 죽으면 됩니까? 이렇게 해야지요.
그래서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선 우리를 죽이는 과정에 있습니다. 요나단도 지금 죽는 과정 속에 있어요. 평생 살면서 이런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이렇게 겁 없이 두 사람만 가지고 전쟁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런다고 요나단이 사는 것도 아니고 생전에 언약과 관련된 일을 요나단이 한 겁니다. 성도가 그런 게 아닙니까? 어차피 성도든 성도가 아니든 죽어 갑니다. 죽어가면서 예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영원한 새 언약인 복음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죽어가는 거에요. 이렇게 율법을 어긴 죄가 누구에게 있는 가를 알아보자 해서 뽑기를 했지요. 뽑다 보니 누가 남았어요?
(삼상 14:38) 사울이 이르되 너희 군대의 지휘관들아 다 이리로 오라 오늘 이 죄가 누구에게 있나 알아보자 (삼상 14:39)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하되 모든 백성 중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매 (삼상 14:40) 이에 그가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는 저쪽에 있으라 나와 내 아들 요나단은 이쪽에 있으리라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왕의 생각에 좋은 대로 하소서 하니라 (삼상 14:41)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삼상 14:42) 사울이 이르되 나와 내 아들 요나단 사이에 뽑으라 하였더니 요나단이 뽑히니라 (삼상 14: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삼상 14: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 다음 39절 봅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 했어요. 머리만 전문가이니까 허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요. 42절에 요나단이 뽑히니까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꿀 먹었습니다. 먹지 말고 무조건 적을 추적하라 했는데 난 그때 못 들었습니다. 44절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지금 사울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자기 통로를 통해 지시하고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왜 왕이니까. 전에도 자기를 통해 승리하게 했으니까. 마지막 중요한 이야기인데 있음이 없음으로 갔으면 없음을 내용으로 한 껍데기인 있음이어야 되는데 안쪽의 내용인 없음을 빼버리고 없음의 자리에 있음이 채워져서 안 쪽도 있음이고 바깥 쪽도 있음이고 이게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나는 왕이라는 거에요. 내가 시키는 대로 안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너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라고 하니까 요나단 그럴 것 같으면 이번 전쟁에서 승리가 아니고 패배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다는 말은 꿀을 먹었어도 하나님은 아버지 편이 아니고 누구의 편이다? 내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편도 아닌데 하나님을 자꾸 거론하냐 이 말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 누굴 만나야 되요? 주님을 만나야 되지요. 그런데 교회에 가면 누구부터 만나요? 교회의 권력부터 만나요. 교회의 법과 체계부터 먼저 만나요. 제도부터 먼저 만납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안하면 찝찝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인정하고 나의 있음과 하나님의 있음 사이에 권력 체제가 아니고 있음을 과시하기 때문에 소외된 없음에서 하나님이 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되요. 소위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다는 것이 낮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 기술(스킬)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은 무조건 내 말을 듣는다는 거에요. 그럴 땐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을 우리 코앞에 내세웁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끄러워질 수 밖에 없지요. 그 방식을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방식을 사용해서 천국을 이루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