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장관
2018년 9월 2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5:13-15
(5: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5: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5: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가로 막는다'는 것은 행로를 ‘반대한다’는 뜻으로 보시면 됩니다. 누가 봐도 여호수아는 제대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호수아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입니다. 따라서 자신은 정로로 간다고 여길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사나이에게 여호수아가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그만큼 자신의 결정에 자신감이 있다고 본 겁니다. 즉 자신을 반대하는 자가 하나님에게 적이 되고 자기에게 찬동하는 자는 하나님 뜻에 부합된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주장하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사태는 정반대였습니다. 소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제대로 일한다고 여기는 그 장담이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태도였던 겁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여호수아 및 이스라엘 내부에 ‘약속의 땅’에 대해 잘못된 복선을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애굽에서 고생스럽게 살았던 그들에게 ‘인생 만회’의 기회라고 여기고 ‘약속의 땅’을 선망했던 겁니다. 즉 광야에서 고생한 그 이상의 보상을 착하고 어질고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필히 해주실 것이라고 여깁니다.
쉽게 말해서 ‘고생한 자로의 자만과 교만’을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이스라엘과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가로막히도록 하신 것은 참으로 진정한 ‘약속의 사람’으로 파악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은 겁니다. 간단히 말해서 “네 자신에 대해서 네가 철저히 실하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승리하는 것이 망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승리를 원한다면 그 경우가 지옥으로 그 사람을 데려가는 경우입니다. ‘가로 막음’이란 지상의 이스라엘 뜻과 하늘의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애굽에 살다가 같은 지평 위에 있는 가나안 땅으로 수평 이동하는 중입니다.
자신들이 이제 달라질 필요가 없이 지금 이대로 들어가면 들어갈 수 있다 고 자부한 겁니다. 그들은 ‘단절’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겁니다. 신약에서는 물론 성도들이 이 세상 한 구석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는 결정적으로 완벽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고 정탐꾼이 그곳에 갔을 때에도 실제로 굵은 포도를 갖고 왔었습니다. 환상이나 꿈 속의 세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곳에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던 환경보다 더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받는다고 여긴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산입니다. 약속의 땅의 차지와 유지는 완전히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빼야 합니다. 즉 인간은 약속의 땅 정복에 철저하게 실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영원히 거주하고 싶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인간은 인간대로 자기가 살고 싶은 곳이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영원히 살고 싶은 곳을 가지고 ‘약속의 땅’이라고 지칭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의 소망과 약속은 배제되어야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고집이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기 한계와 오류를 끄집어내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단절된 상황을 인간이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이 찾아오시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이 감기에 걸리면, ‘감기 들었다’고 표현합니다. ‘감기 행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왜 감기를 만들었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감기가 덮쳤다’고 언급하는 겁니다.
군대장관의 방문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처음 출애굽을 계획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을 반복해서 통보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출애굽기 3:11-12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먼저 군대장관에게 질문할 처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지시는 도리어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내려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와서 모세에게 지시를 내리듯이 말입니다. 이처럼 여호수아는 모세언약의 범주 밖으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신발을 벗습니다. 모세가 신발을 벗은 것과 같습니다.(출 3:5)
이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모든 힘을 빼야 합니다.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일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정복도 불가능합니다. 차라리 정복되지 못하는 이 몸마저 하나님의 일에 던져 넣어야 합니다. 이러한 종속된 입장 표명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할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처소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 나갈까요? 시편 74:2-7에 보면,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도를 박살나도록 허용하십니다. 이 절차가 필수적입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의 의도나 기대가 들어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의 업적만이 성소에 들어가야 그것이 하나님이 영원히 계실만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79:9에 보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기대치가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이름의 공로만이 살아남는 그곳, 바로 그곳에 성도가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허술함과 무가치성을 도리어 주의 이름만 드러내는 곳에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9-02 21:34:58 | 조회 : 22 | 200강-여호수아 5장 13~15절(군대 장관)20180902-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16.46.79.235) | | 200강-여호수아 5장 13~15절(군대 장관)201809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5장 13~15절입니다. 구약성경 325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약속의 땅이라는 것이 세상 애굽과 이렇게 붙어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애굽 땅이 따로 차지하고 있고 그 다음에 나가면 광야가 되고 가나안 땅이라는 것이 실제로 버티고 있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군대는 그냥 차분하게 행진해서 걸어가게 되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애굽에서 저쪽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천국 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나라에 가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무리 돌아 다녀도 거기가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 시대에 무대에서는 바로 옆이 애굽이고 약간 만 더 가게 되면 바로 약속의 땅이라고 그렇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무대 장치가.
그러다 보니까 여기서 오해가 생긴 거예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그냥 두 발로 딛고 들어가면 되는 걸로 여겼던 겁니다. 내가 가는 곳이 곧 약속의 땅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면 여기서 신약 적으로 한다면 신약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되면 그것이 천국이 되는데 여기서 단절이라는 것이 성립이 되거든요.
지금 여호수아 5장에서는 여호수아가 단절이라는 것을 감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는 뭘 하느냐 하면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분에게 먼저 질문을 합니다. 먼저 질문을 하는 것이 실수가 되는데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 입장에서 보면 누가 봐도 여호수아에게는 이 사람이 사람인데 어떤 사람이 자기 앞길을 가로막으니까 여호수아는 본인이 해야 될 사명도 있고 임무가 있어서 바쁜데 칼을 들고 마주 서니까 “너는 우리의 같은 동지야 적이야?”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적이라면 베어버리고 동지라면 나에게 굴복하라는 그런 뜻이겠지요.
먼저 물었던 것이 문제가 됩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라고 여호수아가 질문을 할 때에 그 질문은 자기 입장에서 제대로 된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지금 여호와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사명을 받은 자기의 조치와 판단이 하자가 없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상하게도 여호수아 가는 길에 가로막고 나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천사라는 말이죠.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면 천사입니다. 어떻게 같은 편끼리 대적이 되도록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여호수아에게 뭘 이야기 하느냐 하면 약속의 땅은 단절되어 있고 끊어져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냥 순하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계속 진척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는 하나님께 분명한 사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분명한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꼭 긍정적인 주의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복음을 아는 선교사들이라면, 거의 없습니다만 혹시 있다고 치고,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을 누가 막느냐 하면 나에게 사명을 준 하나님, 그 분이 지금 내 일을 가로막고 있다는 거예요.
사명을 줘 놓고 사명을 줬기 때문에 어떤 기회를 주느냐 하면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에 반대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멋진 기회를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제공해 줍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기는 그 길이 곧 망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이기는 그 길이 망하는 길.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줬다는 것을 나에게 사명을 줬다고 생각하지 말고 보편적인 인간에게 사명을 줬다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보편적 인간들은 사명을 받는 동시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되고 그 반응을 통해서 인간의 속마음 ‘나는 누구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 속마음을 끄집어내게 만들어 놓고 소위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빙자해서 자신의 야욕과 승부욕을 불태우는 그것을 긍정적인 하나님의 일이라고 남에게 퍼트릴 수밖에 없는 그런 더러운 성격을 우리 모두가 갖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인간을 지금 약속의 땅에 넣어 주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교회 나와서 자기 인생을 만회하려고 합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 저를 더욱 실패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우리는 아예 오후에 기도 순서를 없앴는데, 얼마나 마음의 짐을 덜어 줬는지 마치 내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된 느낌이에요.
교회 나와서 기도 할 때에 은연중에 잠복되어 있는 욕망이 자꾸 밖으로 나오는 겁니다.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여, 아니 되옵니다. 주여, 통촉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인간들을 어디로 가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지정한 성소로 이동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땅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살아야지, 저기서 살아야지.’라고 사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 ‘하나님의 인도함으로 잘 살게 되겠지. 전에는 못살았는데 내 인생 만회되어서 잘 살게 되겠지.’라는 그런 희망을 품고, 그걸 사람들은 약속,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이라고 그렇게 우기는 겁니다. 이 군대 장관이 막아서지 않을 수가 없어요.
민수기 22장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 나오는데 주일학교에서도 제가 언급을 했습니다.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귀족에게 돈 받아먹고 자기 나라를 침공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의 저주가 임하게 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요새 말하면 청부살인이죠, 그들을 저주해서 죽이려고 했더니만 발람이 받은 돈이 있으니 나귀를 타고 갑니다.
가는데 이 나귀가 평소에는 계속해서 자기 주인 말을 잘 들었어요. 그런데 민수기 22장에 보니 정말 깜짝 놀랄만한 말이 나와요. 2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라고 나귀가 말을 합니다. 원래 나귀의 구강구조는 말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귀가 말을 한다는 이런 아이디어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지 어느 인간도 모르는 거예요. 30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여니, 나귀가 자기 속마음을 털어 놓는데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분간이 안돼요. 분명히 발람 선지자가 나귀를 탔으면 나귀는 자가용이거든요. 여러분이 타는 자가용이 말하는 거 봤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브레이크 밟아도 안 밟히고 갑자기 차가 기울어 졌을 때, 성질나서 차 주인이 막 차를 때리면서 “이 차가 미쳤나.” 이러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차에게 말을 하게 해서 “내가 12년 5개월 동안 주인의 말을 안들은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3번씩이나 때리십니까?”라고 차가 말을 하면 아마 기절할 거예요.
그동안 죽은 기계를 타고 다닌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체를 타고 다녔다고 생각했을 때에 그건 내가 형성된 이 세상의 프레임에 있어서 뭔가 놓친 게 있는 거예요. 왜 놓쳤는가? 내가 편한 데로 살았으니까 가진 것보다 놓친 게 더 많겠죠. 차가 말을 한다는 것이 기적처럼 다가오는 것처럼 발람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발람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뭐냐 하면 앞에 26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나귀가 그렇게 조치를 안했으면 군대 장관의 천사의 칼날에 주인이 죽지요. 주인을 살리기 위해서 나귀가 의도적으로 조치를 한 거예요.
이처럼 여호수아는 줄곧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인생관을 단절이 없이, 끊어짐이 없이 ‘그래, 내가 이제 하나님의 대해서는 얼추 아니까 이 정보와 이 내용을 가지고 천국까지 매진하자’라고 하나님의 사명감을 가지고 나아가는데 오늘 본문에 천사가 딱 가로 막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의 완전한 실패를 요구하는 겁니다. 몸에서 힘을 다 빼라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힘이 있으면 누구 일이 되는가 하면 자기 일이 돼요. 가진 힘을 다 빼게 되면 누구 일이 되느냐 하면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전문가가 따로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돼요. 우리는 나름대로 내 인생 가지만 항상 좁은 길로 가지 않고 본성상 넓은 길로, 편한 길로 가려고 합니다.
예수는 믿되 편하게 믿자고 하면 편하게 믿는 걸 원하는 거예요? 아니면 예수 믿는 걸 원하는 거예요? 두 개 거든요. 예수 믿되 편하게 믿자.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안 편하면 예수 안 믿을 거예요? 내가 불편하게 되면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까?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천국을 가는 길에서 자기 의사를 거기에 섞어 넣은 겁니다. 섞은 거예요.
이게 인간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럼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걸 빼야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냐면 강제로 칼 들고 빼야 하는 겁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고 네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힘을 빼지 못하는 한 네가 정신 못 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완전히 힘을 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는 땅이 아니에요. 죽어도 상관없는 땅이에요. 죽어도 상관없는 땅. 그렇게 되면 살아 있는 사람이 불쌍해요. 살아 있는 사람이 애처로워요. ‘에고, 빨리 죽지. 뭐 하려고 그렇게 살라고 하느냐.’ 그 말이죠. 세상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최종적으로 내려가고 내려가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그야말로 햄릿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결국 그것이 남아요. 어떻게 사느냐 죽느냐 하는 그것이 남아요.
앞에, 위에 있는 것들 다 걷어내면 딱 남는 것이 사느냐 죽느냐는 겁니다. 그거는 인간의 뜻이고 하나님의 뜻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은 출애굽기 3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냈을 때에 목적을 이미 정해 놓았어요.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이유는 성소 만들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되도록 이스라엘 전체를 성전의 벽돌로, 성전 구조에 필요한 사람들로 그렇게 만들고자 한 거예요. 목적이 다르지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의 목적은 뭐냐 하면 내가 사느냐 죽느냐이고, 내가 살면 성공이고 죽으면 실패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밑바닥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인간을 데리고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실만한 성전 만들기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목적이 완전히 다르지요. 하나님이 계실만한 곳 만들기, 그런 장소 만들기는 하나님의 뜻이고, 애굽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약속이 땅에서 떵떵거리고 잘 살자는 여호수아와 인간의 뜻이에요. 그러니 이 군대 장관이 가로막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울 때 우는 목적이 뭡니까? 그 밑바닥에 가면 자기의 살아왔던 것과 다르니까 우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가로막고 이걸 단절시키고 끊어버립니다. 끊는다는 것은 네가 가져온 모든 것은 여기서는 그걸 일체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효로 돌리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수인계를 해야 하지요. 인수인계를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여기에 나옵니다. 14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갑과 을이 뒤바뀌었습니다. 이걸 신약에서는 이렇게 정의해요. 하나님은 의사냐? 판사냐? 하는 문제입니다. 의사는 감기 걸렸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분이 오신 거예요. 감기라는 분이 오신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저쪽에서 감기가 덮친 거예요. 그러나 판사는 당신이 무엇을 행했느냐를 물어요. 네가 무엇을 행했느냐를 묻는 것은 곧 판사, 정죄하는 마귀 담당이에요.
마귀는 매일같이 우리를 찾아와서 “너는 또 오늘 무슨 짓을 했느냐? 오늘 무슨 악한 짓을 했느냐? 오늘 무슨 실수와 오류가 없느냐? 너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를 봤잖아. 너 때문에 가족이 어렵잖아. 앞으로 똑바로 할 거야? 안 할 거야?” “합니다” “옳지. 더 착실하게 해야지.” 이렇게 보다 더 완벽을 요구하고 보다 철저를 요구하는 것은 악마의 주특기입니다.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어요. 완전히 음주 운전 측정이에요. 더,더,더,더,더..!! 이번에 오랜만에 형님 가족들을 만나서 이야기 들어 보니까 우리 형이 선볼 때 이야기를 해요. 형이 말을 약간 더듬어요. 더듬으니까 형수님 쪽에서 형을 좋게 봤어요. 뭐라고 말도 안 되는 법칙을 내세우느냐 하면 말 더듬는 사람치고 자기 아내 예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광산 김씨같은 말도 안 되는 법칙을 만들어 버렸어요. 이런 말은 생전 처음 듣는 거예요. 게다가 형수님 쪽 집안에서 우리 집안을 좋게 본 게, 결정적으로 우리 어머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상견례를 하는데 모두 다 아무 말 안 하고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우리 어머니가 한 말이 있어요.
“우리 집은 뭐 자랑할 게 없지만, 우리 집은 첩이 없고 노름꾼 없는 것이 우리 집 자랑입니다” 그것도 자랑이라고...얼마나 무능했으면 첩이 없고 얼마나 돈이 없으면 노름도 못하냐는 거죠. 그런데 그 순수함에 다 넘어갔어요. 아무것도 없어도 그냥 통과예요. 힘을 뺀 겁니다. 물론 우리 어머니가 의도한 건 아닙니다.
힘을 쫙 뺀 거예요. 그야말로 의인인 척 하지 않고 죄인인 척 해도 안 돼요. 그냥 죄인이에요. 막 사는 것이 나중에 천국의 상견례에 유리합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어. 주님 앞에 뽐낼 게 없어. 자랑할 게 아무것도 없어. 악마는 자꾸 전쟁을 우리의 몫으로 돌립니다. 네가 잘해야 구원받고 네가 철저해야 구원받는다고.
성경 말씀 폼으로 있느냐고 하면서 그거 지켜서 철저에 철저를 기하면 마귀가 무서워서 도망간다고 합니다. 말도 안 더듬고, 완벽에 완벽을 기하며 집안 자랑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냥 그분이 오신 거예요. 그분이. 군대 천사가 그냥 오신 거예요. 성령이 그냥 오신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게 아닙니다.
바보 등신 같은 우리에게 오른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그냥 덥석 붙잡아서 “가자, 성전으로.” 하시는 거예요. “어, 나는 살고 싶은데.”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가자. 성전으로.” 하면서 잡아당기는 거예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은 뭘 마실까, 뭘 먹을까, 뭘 입고 살까를 생각하는 게 아니에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라고 했잖아요. 그 나라 의.
“그 나라 의를 구하라” 그 나라 의는 네가 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덥석 우리 손을 잡을 때, 그 나라 의가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마치 감기 걸리듯이, 몸살 하듯이, 기침하듯이 그냥 오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내 중심의 세계관이 애굽같은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뭔가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안 들고 사는데 지장이 된다면 자꾸 만회할 생각을 해요.
과거에 빼앗긴 청춘을 보상받으려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어 버리면 그 땅은 예수님의 성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고 나에게 영광 돌리는 나만을 위한 성전이 돼요. 나를 위한 교회가 돼요. 나를 빛내기 위한 신앙이 되어 버립니다. 이건 예수를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를 빙자해서 나를 알아 달라는 이야기죠.
따라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그게 찾아와야 해요. “우리 가정은 다 믿는 가정입니다”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을 만나면 듣는 입장에서 “그러면 언제 단절이 있었지요? 다 믿는 가정인데 천국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는 고백이나 체험은 언제쯤 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고백이 없었다면 이것은 자기 성전이죠. 그래서 여기에서 약간 어려운 걸 할 수밖에 없는데 시편 74편 4절에서 7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덮칩니다. 덮쳐서 자기 성전을 자기가 알아서 만들어요. 어떻게 하냐 하면 일단 깨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점이 좀 어려워요. 그냥 성전 만들면 되는데 성전 만들 때 성전을 깨어지게 만들고 깨어져서 없어진 파편을 주워 모아서 사람들이 버린 돌을 머릿돌이 되게 하셔서 새로운 성전이 되게 만들어요.
그 과정을 한번 이렇게 실패하고 실패한 터 위에 다시 세움으로 말미암아 일체 인간의 공로가 섞이지 않는 성전이 되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 성전에 스케줄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자, 가자, 천국으로!” 가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실패를 먼저 시범으로 보여주십니다. 그게 십자가에 죽으심이죠.
그리고 예수님 죽으시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보란 듯이 이야기해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한 거예요. 이러니 얼마나 인간들이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자기 뜻을 포기할 마음은 끝까지 없어지지 않거든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기 뜻을 포기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천국 못갑니다. 자기 뜻을 없애야 하는데 없어 질 수가 없어요.
그러면 대신 주님께서 우리 뜻을 말아 먹어야 되죠.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할 때 거기에 우리의 뜻도 이미 거기에서 제켜버린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는 아직도 자기 뜻을 고집하고 있으니까 관심사가 여전히 손가락이 자기에게 와 있은 거예요.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의 원수가 주의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게” 하는 것이 스케줄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40년, 50년 믿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경험하시거든 여러분들은 지금 제 코스에 접어드신 거예요. 그동안 열심히 하나님 일 한 것이 전혀 구원에 보탬이 안 되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라는 것을 명심하게 될 때에 정말 지금 여러분은 정상 코스에 접어 든 겁니다.
사람은 하게 되면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뭐든지 하게 되면 기대하게 돼요. 그러면 부서지고 나서 어떻게 되느냐. 시편 79편 6절에서 9절까지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그러니까 그 성전은 뭐냐 하면 인간 빼고 주의 이름 집어넣고, 그러면 인간을 빼면 인간이 빠집니까? 절대로 안 빠져요.
인간은 뭐든지 무라도 하려고 하고 교회 와서 하나님을 도와주려고 해요. 그걸 빼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꽃꽂이는 내가 할 수 있는데. 청소 봉사는 내가 할 수 있는데.’ 꼭 뭔가 하나님께 기여 하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 보기에 가장 꼴 보기 싫은 겁니다. 하지마라고 하는데 해요.
그렇게 해서 남는 게 뭐냐 하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아버려요. “그렇다면 해라. 하고, 내가 그것을 아무짝도 소용없게 철저하게 망가뜨려 줄게.” 그럴 때 여러분은 지금 복 받은 겁니다. 복 받은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은 철저한 실패, 아까 제가 말한 철저한 실패자라는 명찰을 붙여야 해요. 철저한 실패자. 드디어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 이게 바로 세리와 창기 아닙니까?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그런 혜택을 받겠어요. 그러고 난 뒤에 시편 79편 9절에 보면 “우리 구운의 하나님이여” 이제 구원이 나왔어요. 구원 받을 자격도 없고 구원 안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주께서 감기 들게 하실 때 그분이 오신 거예요. 그분이 의사니까, 그분은 의사고 우리는 환자니까 그분이 의사니까 오신 거예요.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주께서 우리를 건질 때는 일말의 나의 공로나 행함이 섞이지 않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 없었으면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면서 철저히 하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찾아오게 되면 이미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이제 남은 것은 뭐냐, 실패하는 즐거움만 있으면 됩니다. 실패하는 즐거움. 뭐 잘 하시잖아요. 골프 치는 실패, 크루즈여행가는 실패, 뭐든 재미나는 일을 하실 때 뭘 해도 그것이 남들 보기에는 성공처럼 보이지만, 한 달 1억 버는 실패처럼 성공처럼 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이것이 바로 내 것도 아니고, 내가 의도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은혜로 그냥 주시는 거예요.
생각만 합시다. 기분좋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지만 뭐 생각은 못합니까? 생각은 자유인데. 그게 주의 은혜로 주실 겁니다. 누구에게? 실패한 우리에게. 누구에게? 죄밖에 지은 기억 없는 우리에게. 주께서 은혜로 주실 때 그게 바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모든 것을 주께 다 바칠 수 있는 주님의 승리이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승리되기를 원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땅은 우리가 살기 좋은 땅이 아니라 우리가 떵떵 거리는 세계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만 남기는, 주님의 이름만 높이고 주님의 공로만 백퍼센트 보이는 그 세계가 그것이 천국인 것을 저희들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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