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길갈의 유월절(수5;10-12) 1808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27. 18:31
018-08-26 15:05:03조회 : 42         
   길갈의 유월절18082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길갈의 유월절(여호수아 5:10-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myfPyPPLbY, Hit:6
 이근호18-08-26 15:50 
길갈의 유월절 

2018년 8월 26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5:10-12 

(5:10)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5:11)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5:12)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요단강 건너다’ 이것은 인간들의 솜씨가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화자찬할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솜씨를 인정하지 않는가?”를 따질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행함에 무척 조심스러움을 부여합니다. 이것은 ‘나의 행함이 원인이 되어 원하는 결과를 가지겠다’는 의지를 반영합니다. 

열심히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는 말도 되고, 혹은 무엇을 기피하고 거부하므로 서 나쁜 결과를 얻지 않겠다는 말도 됩니다. 어쨌든 자신이 원인이 되어서 예상되는 결과를 얻어 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리 애써도 요단강만을 상류쪽에서 적채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의 원인으로 집약시킵니다. 즉 ‘하나의 원인에서 하나의 결과를!’ 실시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확고한 결심을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보여주십니다. 인간들로서는 예상 밖의 일들을 경험합니다. 결코 기분 좋은 경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네들이 예상 못한 결과를 접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의도를 반영하지 않는다 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기적을 행한 능력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기적을 예상했어도, ‘예상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쉬운 예로,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수월하게 신앙생활 하도록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편한 신앙생활’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늘에 내리는 만나를 미리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별로 달갑지 않습니다. 그 만나 내림 앞에서 자신들의 요구는 모두 묵살 당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일관되게 주어지는 하늘의 하나 밖에 없는 원인은 이 지상에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까요? 그것이 ‘언약궤’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25:20에 보면,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천사’가 나옵니다. 천사는 이 인간 세상 소속이 아닙니다. 하늘에 소속입니다. 이 하늘의 소속자가 이스라엘 내부에 섞여 들어옵니다. 

그러면 쉽게 표현해서 이스라엘은 ‘붕붕 떠는 민족’이 됩니다. 지상에 발 닿을듯 말듯 하면서 ‘지상에 속하지 아니한 민족’임을 나타냅니다. 천사가 같이 있다는 그 언약궤의 효과입니다. ‘언약궤를 들었다’는 제사장의 행동에 최종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 자체에 있습니다. 

이 언약궤의 존재가 유일한 원인, 곧 ‘언약’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지상에서 알 수 있는 최초의 원인이라면 그 원인에 의해서 최후의 결과로 하나로 맺어져야 하겠지요. 그것은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최초 원인과 최후 결과를 연결시키는 겁니다. 구약에서는 원인이 ‘언약궤’에 있지만 신약에 오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장차 직접 오실 창조주에게 연결시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 중간에 이스라엘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향해서 말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그냥 받들어 모시기만 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가지고 ‘예상되는 결과’를 도출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왜 하나님께서는 일절 인간으로부터 원인을 끄집어내려고 하지 않으신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반복시키십니다. 그 결과를 반복시키므로서 언약궤가 지닌 원인의 폭을 더욱 깊이 파내려가십니다. 

높은 건물일수록 땅을 깊이 파야하는 것처럼 언약궤가 장차 오실 ‘말씀의 육신되시는 분’과 만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를 더욱 심화시켜야 합니다. 죄가 더욱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예상못한 능력과 기적은 더욱 커집니다. 그렇다면 죄를 더 짓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이미 이 세상은 ‘악의 평범성’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곧 죄의 보편성이지요. 즉 죄를 알아서 일부러 죄를 짓지 않더라도 평범하게 사는 삶 그 자체마저도 죄가 되는게 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자기 딴에 착실히 살지만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다 추적할 수 없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를 보고서 자신의 노동력을 집어넣어 의자를 만들 때, 그 의자는 자신의 사유재산이라고 우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에 나무가 무한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달랑 두 그루 밖에 없고 그 마을 사람은 네 사람이라면, 이것은 개인의 사유재산 획득 행위가 상대방의 세상 사는 권리를 침해한 바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노동은 개인적인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인 노동이 되는 겁니다. 즉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고 싶다고 해도 사회가 그 노동의 결과물을 구입하지 아니하면 자신은 손해가 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죄란, 사회 구조상 보편적인 상황에 합세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이 원인이 되어 예상되는 결과를 도출하려는 그 의지가 하나의 의로운  권리로 행세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집단의 생리에서 이탈하여 본인만이 독자적으로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세상을 닮아가든지, 아니면 세상을 배격하든지 상관없이 이미 ‘있는 세상’을 전제를 감안한 아이디어이기에 절대적으로 창의적인 초월적 원인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인간들이 자신감을 갖는 그런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난제로 찾아오십니다. 

인간들은 그 위기 상황 속에서 원망을 하게 되고, 화를 내고 혹은 자기 자신을 자책을 하므로서 마치 자신이 원인으로 개입될 자격이 있는 양 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습니다. 구원이란 오직 하나밖에 없는 언약궤의 원인으로 굳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언약궤를 앞장 세운다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장 세우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죄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오직 언약궤의 정신을 홀로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어린양의 가치만 돋보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일어날 일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수님에게서 나왔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8-26 21:42 
199강-여호수아 5장 10~12절(길갈의 유월절)201808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5장 10~12절입니다. 구약성경 325페이지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한 가지의 원리로 한 가지의 결과를 다 설명하는 거, 그것이 성경을 관통하는 맥입니다. 한 가지의 원리라는 것이 그냥 하늘을 쳐다보면 너무 많은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뭘 내려주느냐 하면 지상에서 인간이 알고 있는 상식이 깨어지는 그 어떤 원인, 뻔히 아는데 이럴 수는 없는데 벌어져버리는 획기적인 사건 그 사건들이 여호수아 이전에 출애굽기에 계속해서 반복해서, 거의 반복해서 계속 주어졌어요. 

한 가지의 원리에서 한가지의 결과가 필연적으로 연결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요단강 건널 때에 처음에도 그런 게 있었습니다만 갈수록 그 한 가지 원리가 지상에서 이스라엘 역사에 따라서 또렷해져요. 점점 분명해 집니다. 갈수록 하늘나라 정보를 점점 더 투입시키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때는 그 주었던 모든 정보, 그 말씀이 아예 몸으로 와 버렸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등장한 겁니다. 그 분이 한 가지 원인에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하나의 원인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유명한 말씀이죠. 모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그분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이죠. 심지어 마귀까지 예수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마귀 되어야 하는 그런 쪽으로 사도바울은 모든 걸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구약이니까 신약에서 그 해답을 안다고 치고 구약이니까 구약 나름대로의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초점을 한 가지에 모으도록 하는 일들이 일어나죠. 

지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바로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난 뒤의 상황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에 여기서 누가 건너느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됩니다.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은 결과는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습니다. 근데 아까 제가 설명했을 때처럼 한 가지의 결과는 한 가지의 원인에서 나온다고 했지요. 

그 원인이 대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높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 여호수아 6장에 들어가면 언약궤를 들고 도니까 여리고성이 무너졌죠. 그러니까 언약궤가 모든 이 세상에 있어야 될 원인이 언약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0절에 보면 언약궤에 대해서 소개되어 있어요. 

거기 소개되어 있는 속죄소를 만들고 그 위에 보게 되면 20절에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이 그룹이라 하는 것은 천사입니다. 천사는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지요. 인간세계 바깥에 있는 외재성이죠. 바깥에 존재하는 피조물입니다. 

바깥에 존재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과 믹스, 섞이게 된 거예요. 섞이게 되게 되면 이스라엘 자체가 이 지상에서 두 발이 뜨게 되어 있어요. 헬륨가스 기구타면 두 발이 뜨잖아요. 성도는 분명히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데 땅에 속하지 않고 붕붕 뜨는 겁니다. 

이런 경험은 여름에 바다 해수욕장에 가면 됩니다. 헤엄은 못치고 갈 때까지 가보자 할 때, 결국은 헤엄 못 치는 사람의 마지막 한계는 발 닿을 듯 말 듯 한 그 깊이까지 들어가죠. 그 때 물의 부력을 느끼면서 잠시 뜨기도 하고 겁내면서 디뎌보면 또 땅이 있고 그것처럼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우리 언약궤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이렇게 부력을 가집니다. 

그래서 우리를 붕붕 뜨게 만들어요. 세상에 대해서 뜨게 만듭니다. 아침에 제가 여자 마라톤 3등 했다고 했는데 4등 했어요. 울고불고 난리 났습니다. 왜 3등은 되고 4등은 안되는가, 왜 그게 울 일인가 하면 두 발이 땅에 닿아 있어서 그런 거예요. 천사의 그룹이 없어서 그래요. 속에 언약궤가 없어서 그래요. 

요단강 조절은 누가 했느냐, 요단강이 예상 밖에 흐르는 물이 열려서 차단되었다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밖에 없는 원인을 그런 식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봐, 강은 흐르게 되어 있지? 그런데 거봐. 언약궤 들어가니까 안 흐르잖아.”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땅에서 생각해서 구상한 이 모든 것은 결코 원인이라고 이야기 하면 안 돼.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하는 그것을 지상에 있는 과학적인 분석과 원인을 찾아서 그렇게 그걸 정답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외부에서 와야 돼요. 외부에서. 발이 붕붕 떠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아침마다 빨리 걷기 운동을 하는데 한 여섯시쯤 운동하고 오는데 5톤 트럭이, 5톤 탑차가 하얀 바탕에다가 벌건 글씨로 뭐라고 썼느냐 하면 ‘볼보는 쓰레기다’라고 적어 놨어요. 볼보라고 하면 유명한 자동차회사 이름인데 쓰레기라고 하니까 왜 그런가하고 뒤쪽을 보니까 ‘나와 내 가정을 깨뜨려 버린 볼보 코리아의 인면수심의 김영재 회장은 석고대죄 하라’ 이렇게 쓰여 있어요. 얼굴은 사람인데 이 속에는 짐승이 들어 있는 김영재 회장은 석고대죄 하라. 

차가 고장 나서 가족 중에 누가 죽은 모양이죠. 그래서 복수 한다고 5톤 트럭에다 볼보는 쓰레기라고 쓴 거예요. 그러게 쓰레기를 왜 샀는지 몰라요. 그냥 국산 타지. 뭐 잘났다고 볼보를 샀느냐고 생각했는데 이게 원한이고 복수고 보복이잖아요. 왜 복수하고 왜 보복합니까? 화는 주님이 내야 해요. 우리는 화를 낼 하등의 자격이 없어요. 

홀로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언약궤가 들어 있잖아요. 붕붕 뜨는 언약궤가 함께 있다면 저쪽에 요단강에 30km 전부터 물이 그쳤지요. 물이 끊어졌는데 그 끊어진 곳에 물에 물이 중첩이 되어 있다고 성경에 본문에 나오잖아요. 물에 물이 중첩이 되어서 흐리지 않지요. 저쪽은 벌써 흘러 내려가 버렸죠. 그렇다면 흘러내려가서 길이 훤하게 나온 이 판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같이 건너면서 싸우겠어요? 안 싸우겠어요? 화를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지금 누구 덕분에 건너가면서 왜 사적인 화를 내냐는 말이죠. 아니, 지옥 가는 사람도 있는데, 좀 몸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지금 지옥 가는 사람도 있잖아요. 뭣도 모르고. 그런 사람을 좀 생각해 보세요. 좀 인생 어렵게 살고 힘들게 사는 거, 그거 뭐 별개 아닙니다. 영원히 유황불 가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너무 건방진가요? 

이 점을 주님께서도 같이 걱정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줬는데, 은혜를 줘도 줄 때 그 때만 고맙다고 해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고마운 줄을 몰라요. 그러면 주님의 조치는 뭐냐 하면 더 심화시키는 겁니다. 획기적인 것을 더 심화시키는 거예요. 예상 밖의 일을 더 심화시키는 겁니다. 

심화시키기 위해서 예상 밖의 은혜가 어느 정도 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집 지을 때 고층 건물은 깊이 있게 파야 되잖아요. 깊이 있게 지하를 파야 하듯이 주님께서는 더 깊이 있는 죄가 나오도록 더 난처하고 황당하고 곤란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화 낼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서도 거기에다 뭘 반복시키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유월절을 반복시킵니다. “유월절을 한마디로 하면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이거예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지배하는 게 유월절입니다. 이것은 미친 거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지배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산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산 사람을 무서워하지 말라는 거. 

설교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한 가지의 원인에 의해서 한 가지의 결과로 모든 게 응축이 돼요. 그러면 죽은 사람이 원인이라면 산 사람은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는 원인 제공자가 아닙니다. 나의 운명을 박살 낼 사람은 살아 있는 김정은이든 누구든 간에 어떤 인간도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사람 아닙니다. 

죽은 사람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돼요. 죽은 사람이. 그래야 우리가 붕붕 뜹니다. 안 그러면 내가 쫙 가라앉게 되어 있어요. 요 근래 내 주변에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그렇다면 몸이 약해서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지옥 가는 사람에 비하면 우울증은 우리가 용납해 줍시다. 

이것도 뭐 그냥 곱게 가는 것보다, 천국 가는데 온갖 경험 해보라고 하는 거라고 이렇게 생각합시다. 그래서 제발 고개 숙이지 말고 고개를 드세요. 어차피 지은 것이 죄밖에 없고 앞으로 지을 것도 죄밖에 없는데 고개 좀 들고, 사정 있다고 하지 말고, 울지 말고, 고개 좀 드세요. 다음에 할 땐 3등 한다고 하면서 고개 들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왜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지배하느냐하면 유월절이라 하는 것이 죽은 양을 말해요. 죽은 양이 집안에 있는 산 이스라엘 가정을 살리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에너지로부터 자기를 살 수 있는 에너지를 끌어당기면 안 됩니다. 죽은 자로부터 영생의 에너지가 밀려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천사가 엎드려져 있는 그 언약궤란 말이죠. 그 언약궤에, 그 천사가 있는 상자에다 유월절 어린양이 그 쪽을 향하여 매일같이 그 거기에다가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피 뿌리고. 일 년에 한 번은 직접 들어가지만. 성막과 지성소 거리 간격이 얼마 되지도 않아요. 방향이 같은 방향이에요. 동쪽에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이스라엘 전체 50만 대군을 이끄는 것은 천사라는 말입니다. 거기는 인간이 살아 있으면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자로 하여금 나를 죽음이 붕붕 뜨게 한다는 이 너무나 충격적인 예상 밖의 진실을 진실답게 계속해서 느끼라는 말이죠. 유월절은 양이죠. 그러나 신약에는 뭐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그분이 우리를 붕붕 뜨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붕붕 뜨게 하는 거예요.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했을 때, 방금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 한 내용을 오해한 사람입니다. 한 가지 원인이 한 가지 결과를 낳는다고 한다면 결과 쪽에서 뭘 할까라는 질문 자체가 나오면 안 됩니다. 주께서 나에게 뭘 유발 시켰는지를 물어야 돼요. 

죄를 유발 시킵니다. 죄는 주께서 짓게 해주실 때 죄라는 것이 느껴지도록 해야 되지, 내가 지은 죄는 원인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악마와 관계있기 때문에 진정한 죄, 의와 연결된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어떻게 짓습니까? 망치 들고 뭐 해 볼까요?”라고 하는데 오늘날 세계는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몸소 힘쓰고 애쓰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악의 평범성이라고 해요. 악의 평범함.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하면 바로 나치 전범 재판에서 나오는 이야기예요. 나치 전범자에게 “당신은 왜 유대인들을 학살 했는가?”라고 물으니까 “저는 시킨 대로 했습니다. 시킨 대로.”라고 대답했어요.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저는 집에 가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아내에게 훌륭한 남편이고 자식에게는 모범적인 아버지입니다.”라고 했어요. 조사해 보니 맞아요. 

자기 아이에게는 너무 자상스러운데 유대인 아이는 그냥 가스실에 보내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본인은 일말의 책임을 안지는 겁니다. 왜? 이거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위치에서 윗사람인 히틀러가 나에게 시켜서 한 거예요. 이걸 악의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더 심도 있게 말해서 악의 평범함입니다. 아주 평범한 직장인, 아주 평범한 숙녀, 신사가 이미 악랄하기 짝이 없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어요. 

악의 평범성. 너무나 다들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내가 그다지 악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를 않아요. 가장이 되어서 가족 먹여 살리려고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공무원 되어서 직장에서 시켜서 열심히 일했다. 직장에서 공무원이 스파가서 찜질하고 노는 게 문제지 시킨 대로 하는 것은 오히려 충실한 가장이죠. 거기에서 누가 탓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각자 각자 자기 할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게 왜 악이냐고 하는 겁니다. 

그게 왜 악이냐 하면 노동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이 상식으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전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나무가 있는데 아무나 만질 수 있는 나무예요.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가지고 의자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그 의자는 누구 것이냐 하는 겁니다. 내 것이 돼요. 이게 사유재산의 개념의 시작입니다. 존 로크라는 사람이 주장했어요. 

따라서 내가 노동을 집어넣어서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내 한평생 이렇게 애썼기 때문에 이 가정은 내 가정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노동이라 하는 것은 개인적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런데 후에 마르크스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노동이라는 것이 산에 나무가 무한대로 많으면 내 노동을 가지고 내 것으로 해도 되는데 만약 그 마을에 의자 만드는 나무가 달랑 두 그루 있는데 사람이 네 사람이라면 두 사람은 나무를 사용해도 된다는 그런 고급 정보를 미리 빼돌린 소위 권력층에 있는 사람이 자기 노동으로 했을 때 과연 그 의자가 본인 것이냐 누구의 것을 착취한 것인가를 묻는 겁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은 사회적이지 개인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일하고 싶어도 수능이 점수가 떨어져서, 일하고 싶어도 스펙이 없어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해서 온도 50도가 넘는 철공소에서 일하다가 6개월 만에 뛰쳐나오고 철공소 취직해서 집까지 옮겨 놨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전세 일 년 계약인데 어디 오가도 못할 때에 책임이 사회에 일부가 있느냐 없느냐 아니면 본인의 결정적인 실수 문제이냐를 따질 때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사회라는 것은 열심히 일한다고 부자 되는 게 아니에요. 잠언 서에 나오죠. 열심히 일하는 자가 부자 된다고. 치킨 집을 예로 들어 봅시다. 우리나라 치킨 집들이 평균적으로 하루 16시간 일해요. 한 달에 며칠 일하느냐 하면 28일 일해요. 치킨 집이. 일요일에 대목 아닙니까? 그래서 한 달 수입이 얼마냐 하면 수입이 250만 인데, 250만원 중에서 임대료가 100만원 나가요. 떨어지는 것은 150만원 떨어집니다. 그것도 온 식구 다 달려들어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열심히 일했어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일하면 그 에너지가 젊은 에너지라면 열심히 일할 수 있지만 20년 동안 일해보세요. 척추부터해서 온 곳이 다 망가지는데요. 그 다음부터는 16시간 일해도 그 만한 생산량은 안 나옵니다. 하루 평균적으로 28마리 튀긴다는데 나중에 60세 넘어서 28마리 못 튀기고, 튀겨도 팔리지 않아요. 맛없다고. 

그러니까 왜 제품 개발을 안 했느냐고 하면 개발할 돈이 없고, 인테리어 안 했느냐 하면 그것도 돈이죠. 온통 경쟁마당이에요. 누가 경쟁을 조성했느냐는 겁니다. 누가. 이거는 사회가 책임질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에 의하면 종교라는 것은 뭐냐 하면 아침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일단 내 것 챙기고 그 다음에 복음까지 챙겨서 천당 가려는 인간들이에요. 이런 약삭빠른 인간들이에요. 

평소에 노동으로 남의 것을 자기 것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 예수의 피까지 내 것 만들어 놓고, 이거 소유했으니까 주님께 용서 받았다고 구원해 줄 거라는 사고방식 가지고 어딜 가요? 천국 간다고요? 그게 바로 영이 아니고 육이에요. 그게 육이라고요. 결코 자기 포기하지 않고 천당 가는 위인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란 말은 반성하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의가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천사와 함께 있는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내가 무슨 소리하고 무슨 짓거리를 해도 설교도 마찬가지고요, 무슨 짓거리를 해도 원인을 원인답게 하기 위한 죄의 까발림이라고 그걸 받아 들여야 된다는 이 말입니다. 

왜 화를 내요? 잘 한 게 있으니까 화를 내지요. 잘 한 게 없다면 화 낼 이유가 없죠. 세월호 아이들 죽었다고 화내지 마란 말이죠. 그럼 주님께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최종적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에요. 왜? 내가 안 만들었잖아요. 천사가 준거지 내가 안 만들었단 말이죠. 

방금 한 이 개념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유월절에 그게 다 담겨 있는 겁니다. 유월절에.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은 소위 우리는 이제 구원 받았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한다는 그것으로 하여금 네가 알고 있는 그런 얕은 유월절 말고 좀 더 깊이 있는 유월절로 내가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 유월절 데려가고 데려가다가 나중에 구약 끝나고 신약 오게 되면 바로 예수님이 유월절에 어린양이 돼요.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라면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면 되겠다고 하겠지만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들이 의인이 아닌 것을 다 까발리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시 말해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었다는 말은 아무도 믿는 자 없고, 아무도 구원될 자 없음까지 몽땅 다 결과로 내 놓은 겁니다. 

오직 주님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주님의 자기 결정이에요. ‘십자가 여기 있구나, 저거 믿으면 구원 받겠지.’라는 내 결정이 여기 들어가면 그것도 죄가 돼요. 믿음이 죄가 되고, 소망이 죄가 되고, 사랑이 죄가 되는 겁니다. 죄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느긋해요. 느긋합니다. 

시편 22편 2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인데요, 이 난해한 이야기를 사람들은 그 중요함을 잘 잊고 있어요. 뭐냐 하면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지옥간 자들이 지옥에 가서 뭐하느냐 하면 주님의 주님 됨을 그 때서야 정신 차리고, 정신 번쩍 들어서 주님의 고유 권한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살아 있는 저희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결과물. 

우리가 주를 아는 것이 내가 잘나서 주를 아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결정에 의해서 하나의 원인으로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결정해서 구원 받으면 원인이 두 가지가 되어 버려요. 예수님도 잘했지만 그걸 믿어 준 나도 잘 했다가 돼요. 두 개로 갈라져 버려요.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내 쪽을 포기해야 돼요. 

내가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믿게 하셔서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태어나서 죽어가는 것도 주님께서 강력하게 지금 나를 그쪽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하나도 안 바쁜데 주님 혼자 바빠요. 죽음에 몰아넣기 위해서.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존 로크라는 사람은 얼마나 착각했는지 인간의 목숨은 하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갖고 있다고 했어요. 세 가지가 뭐냐 하면 생명과 자유와 재산은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양보 못한다. 그 때부터 이 사회가 권력이 왕에게만 있던 것이 둘로 나눠졌어요. 

행정은 나라가 하고 법을 세우는 것은 인간들의 모임, 부르주아들이 국회에서 하는 이런 권력이 그 때부터 나눠졌어요. 18세기에. 그게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그냥 된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몇 백년 전만 해도 왕정시대예요. 이병헌이 미 군복입고 설칠 때예요. 미스터 선샤인. 그 때는 이순신 장군이 왕 때문에 죽었다고요. 바보예요. 그 때는 나라 개념이 없어요. 왕 앞에 자기 목숨 바친 거예요. 국민, 국가 개념이 없었습니다. 

프레임이 달라요. 인간들은 정말 바보 같아요. 자기 살고자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죄라니까요. 유월절을 몰라요. 유월절. 이스라엘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몰라요. 어린양 피 발라서 이쪽이 다 살았단 것을 몰라요. 그냥 열심히 열심히 교회 나오고, 목사 말도 열심히 듣고, 뭐든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에요. 

원인은 나의 열심부터가 아니라 주님의 열심히 나로 하여금 사태파악을 하게 하시고, 원인은 오직 주로부터 와서 주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줄 때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처럼 “너희는 내가 이 땅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이 땅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지금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너로 하여금 진리를 증거 하게 하려 함이라, 붕붕 뜨게 함이라”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마시고요, 자책하지 마시고, 고개 들고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태파악을 우리가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시는 거 어떻게 받아 챙길까만 생각했습니다. 죄 짓는 세월, 천국 갈 거 실컷 지옥체험 하라고 있는 세월, 주께서 원인이 되어서 제공한 특혜란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