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갈
2018년 8월 19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5:2-5
(5:2)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5: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5: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5: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철없는 아이들은 히히덕거리면서 놀기 바쁘지만 스승님 혼자 밤을 세워 뭔가 일하신다면, 그 학교는 선생님에 의해서 돌아가는 학교라는 것은 금방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들은 항상 자기 일에 바쁩니다. 자기 일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들의 일도 물 넘치는 요단강 앞에서 막힙니다. 건너가고자 해도 건널 수 없는 장벽에 마주하게 되면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다.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할 것같지만 요단강이라는 그 경계선 안 쪽에서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을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짝 마른 요단강 바닥의 존재성을 품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이라는 요소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난날에 대해서 그냥 과거로 치부하고 싶어합니다. “나 새 사람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시비걸지 말라”가 되어싶어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새겨 넣으신 코드는 세월이 가면서 예상 못한 새로운 일이 자꾸만 발생되어 나옵니다. 즉 불가능이 기존의 ‘가능성의 세계’를 뚫고 나오는 겁니다. 그저 우연히 과거 요단강 한 번 건넌 것으로 하나님의 일이 마감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코자 한 그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이나 불가능성을 달성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명합니다. ‘할례’란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전기 소케트를 뽑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가능성으로 살아서는 아니된다 는 말입니다. 육을 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이 자기에게 손 댈 수없는 대상이라는 겁니다.
이런 규정으로 인하여 앞으로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요단강 레벨’의 사태가 계속 밀려들게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위상이 세상에서는 발견될 수 없는, 요단강 바닥에 깔린 돌 같은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물을 걷어내어 주셔야지만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 위상을 반복해서 들추어내는 그 현장에 하나님의 동행하심도 같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할례를 통해서 이 세상과 관계가 끊어진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앞으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그것은 요한복음 4:14에 그 예가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로 만들었습니다. 여인은 우물을 감싸는 껍데기가 되어서 우물을 껴안고 사는 양상이 되어버립니다. 즉 소케트를 뽑고 그 자리에 천국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아예 빈 칸으로, 구멍으로 남겨두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더 이상 내 쪽에서 시도하는 것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쪽에서 작업해서 내 구원이 구성하는 일이 아예 차단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빈 칸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내 것으로부터 내가 손을 떼는 과정은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세례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침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여기에서 ‘임박한 진노’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뭐가 쫓기고 있습니다. 그들을 뒤에서 누가 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다급함을 전혀 느끼기 못하고 있습니다. ‘최후’라든지 ‘끝’이라는 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을 따라 요단강 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잘나고 잘난 자신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즉 대단한 자신의 과거가 결코 임박한 진노를 면제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끝점이 곧 자신이 원래 시작해야 될 지점인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 임박했다는 ‘진노’가 무엇일까요?
그 ‘진노’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앞이, 그 심판대 앞이 인간이 갈 수 있는 최종지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심판을 기피할 수 없습니다.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요단강 물이 엄습하여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천국을 내다볼 일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요단강에서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마리아 여인이 안에 품고 있는 영생의 샘물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발산되고 뿜어져나오는 샘물입니다. 이것이 그동안 하나님께서 착실하게 계획 잡아오신 일의 결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만 몰두고 신경씁니다. 그러다 보니 빈 깡통이 되어야 될 자아에 쑬모없는 것으로 항상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통해서 여리고성을 비롯해서 계속해서 요단강과 같은 사태를 안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 난관을 자기 힘으로 극복하기 위해 온갖 수완을 다 발휘하게 됩니다.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가지고 위기를 모면하려고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도 하고 제사도 드려봅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 짝도 소용없는 이유는, 애초부터 이미 요단강에 죽어버린 자신의 몸에 여전히 기대와 솜씨를 걸기 때문입니다. ‘길갈’은 굴러 갔다는 뜻입니다. 수치가 굴러갔다는 겁니다. 곧 죄가 굴러간 겁니다. 할례를 행하면서 세상과 엮인 모든 것이 부끄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멀리 멀러 떼 내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돌아서면 또다시 복음을 거부하는 본성이 몸을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준비해둔 ‘허무성’을 계속 발생시키십니다. 세상과 연결되었을 때의 인간의 몸은 ‘그냥 계속 살아가는 그것이 남은 일이다’고 여겼던 겁니다. 자신이 진즉에 물에 빠져 죽고, 임박한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자꾸만 거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의도적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시키는 차원에서 주님을 성도를 가만두지 않고 요단강 같은 불가능이 지속적으로 찾아들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환란 속에서 잃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8-19 20:41:08 | 조회 : 8 | 198강-여호수아 5장 2~5절(길갈)20180819-이 근호 목사 | 이름 : 송민선 (IP:116.46.79.235) | | 198강-여호수아 5장 2~5절(길갈)201808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5장 2~5절입니다. 구약성경 324페이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요단강 건너가면서 돌 12개를 취해서 길갈이라는 그 여리고 동편, 그 여리고 맞은 편에 길갈에서 12개의 돌 기념탑을 세우게 합니다. 요단강은 홍수 때인데도 불구하고 갈라졌고,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 빠져 나왔고, 그리고 5장에 넘어가게 되면 다시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도록 하신 겁니다.
이 모든 계획이 하나님만 아시는 계획이에요. 일종의 하나님의 꼼지락거림이라 할 수 있는데, 혼자서 뭘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계획과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은 모르고 주님만 그냥 부지런히 뭘 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뒤늦게 왜 이런 사람은 꼭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왜 꼭 필요한지, 나중에 그들은 알게 되죠.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 구원에 대해서 사실은 인간들은 관심이 없어요. 인간 구원에 자기 백성 구원에 누가 전적으로 관심 있느냐 하면 구원하시는 하나님 본인의 자기 숙제이고 자기 과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들었잖아요. 그런데 돌아서 보세요. 우리는 또 복음 듣기 싫어요. 이게 인간입니다. 복음은 좋아한다고 하지만 날마다 복음을 반복해서 듣기 싫어해요.
왜냐하면 모기약 뿌리는 거 같아요. 냄새는 나는데 곧 냄새가 사라지죠. 그만큼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이 강력합니다. 이 땅에 젖은 우리의 습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발을 뺄 수가 없어요. 교회 50년 다녔다. 그래서 뭐? 아무것도 안 남았어요. 복음 안다. 그래서 뭐? 여전히 우리는 복음보다 돈 좋아하는데요. 남들에게 사랑받고 칭찬받는 걸 좋아하는데요.
주님의 꼼지락거림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꼼지락해 봐야 그건 안 통하는 거예요. 쇼생크 탈출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그걸 저는 세 번이나 봤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그런데 그 영화 마지막 대목에 흑인 죄수가 있는데 40년 동안 교도소에 있다가 마지막에 교도소 당국에서 풀어줬어요. 그러면 40년 동안 교도소 지긋지긋해서 꼴도 보기 싫겠지요.
그런데 나와 보니 40년 동안 교화가 된 것이 아니고 적응이 된 겁니다. 교도소 생활에.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음으로 교화가 된 것이 아니에요. 성경 말씀으로 인간 된 것이 아니에요. 세상에 적응이 된 거예요. 그래서 흑인은 교도소 밖에서 무력감으로 자살을 하려고 하죠.
천국은 우리에게 굉장히 낯설어요. 천국이 낯설기때문에 교회가 유사 천국을 만들어요.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천국이 아니고 천국은 인간 손으로 교회가 못 만들어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예상 밖의 일이 터지게 하십니다. 예상 밖의 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안다고 여기고 앞으로 될 모든 일에 대해서 자기 뜻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항상 예상 밖의 일을 벌이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잠시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그런데 그 예상 밖의 일을 벌여서 내가 시도하는 그것보다도 우리가 시도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우리를 꾸준하게 천국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예상 밖의 일을 돌이켜 보면서 알 수 있어요.
어제 토요일에 용인에 계신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했어요. “우리가 뭘 해도 의미 없다면 그러면 뭘 해야 합니까?”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해드렸습니다. 이번 수련회 때 기차 앞에 서지 말고 뒤에 서라 했지요. 의미 없다는 것을 언제 알 수 있느냐 하면 기차 뒤에 섰을 때 비로소 의미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사람은 항상 앞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시간관이 그래요. 인간은 자꾸 미래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의미 없지만 이건 아마 나에게 의미 있을 거야’라고 계속해서 자꾸 앞을 계획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런데 나중에 그 계획이 일종에 깐죽거린다고 하는데, 굉장히 촐랑대고 깐죽거리고 자랑거리 만들기 위해서 싸대고 합니다.
돌아서고 보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십자가 마을에 글을 쓴 사람이나 반박을 한 사람이나 깐죽거렸는데 우리는 알죠. 돌아서면 그게 의미 없다는 것을. 그래서 이렇게 십자가 마을에 글을 쓰신 그분을 보면서 제가 글을 쓰려고 했어요. 제목을 ‘김비서가 왜 이럴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고 했는데. 글을 썼다가 화내다가 스스로 자기가 회개하고 뭐 난리도 아니죠.
그것은 바로 예상 밖의 일을 끄집어내는 방식이 그 방식밖에 없기때문에, ‘이건 내가 지면 안 되고 이겨야 해. 이건 목숨 걸어야 해.’라는 것이 가만히 있어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뭔가 깐죽거리고 설치는 가운데서 스스로 주저앉게 만드는 방식으로 주께서 예상 밖의 새로운 것을 제공하시는 겁니다. “네 방식 아니지? 그렇지? 네가 정신 차리는 그 방식 아니지?”라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를 만나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평생을 살면서 꼭 등신같이 산 것 같아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왜 나는 저런 고백이 안 되었을까?’ 평생을 60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꼭 등신같이 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절대로 이상규 집사님보고 그런 거 아닙니다.(ㅅㅅ)
진짜 모든 인간은 등신같이 살아요. 자기 딴에 안다고 설치는데 아무짝도 구원에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꼼지락, 주님께서 뭔가 벌이는 일에 대해서 주님의 조치를 이제는 기차 뒤에 서서 봐야 해요. 기차 뒤에서 내가 살아오면서 이런 무의미가 주님이 이미 예상 한 바라는 겁니다.
내가 무의미하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주님께서 그렇게 예상하고 억누르고 낮췄는데 우리가 습성이 낮추기를 싫어하거든요. 내가 여기 존재감을 드러내기를 원한단 말이죠. 그렇게 등신같이 사는 것이 막상 살아보면 그렇지만 실상은 그게 싫어요. 똑똑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고 그런 겁니다. 뭔가 큰일 한 것처럼 대단한 일 한 것처럼 그러고 싶어 하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준비하셨느냐 하면 할례를 준비했어요. 할례가 뭐냐 하면 소켓을 뽑는 거예요. 그동안 세상과 연결되어 있던 소켓을 뽑는 거예요. 소켓 뽑으면 에어컨 틀어도 안 돌아갑니다. 텔레비전 안 나와요. 우리는 평생에 이 세상과 꽂혀 있어야 이게 나에게 생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소켓을 뽑아 버립니다. 왜 뽑느냐 하면 요단강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는 겁니다. “네가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어?” 그것도 한때가 아니에요. 요단강 건너고 난 뒤에 요단강을 어떻게 해서 건널 수 있었는지 기념할 수 있는 돌을, 바짝 마른 돌중에서 12개를 취해서 기념탑을 세우는데, 12개를 취했다는 말은 이스라엘 만들기 작업은 너희들의 숙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숙제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 되기 싫어한다 할지라도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이 나는 이스라엘 만들기를 꾸준히 하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이고 고집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표시하는 그 12개의 돌은 어떤 돌이냐 하면 바짝 마른 요단강 한복판에 있었던 돌이에요. 그러면 요단강이 마르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 돌은 발견될 수 없는 돌이고 만약에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와 놓고 다시 돌아서니까 요단강이 다시 원 상태로 돌아왔어요.
원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자꾸 그 과거를 생각하는데 본인이 만약에 그 이스라엘 돌이라면 요단강이 이렇게 가득 차더라도 요단강이 바짝 말랐을 때 주님이 건져 내었다는 그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거 잊어버리면 우리의 정체감이 근원으로 전부 다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요단강을 건널 수가 없는데 건넜다가 되거든요.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면 우리 자신을 볼 때 건널 수 없었는데 건넜다가 되는 겁니다. 이거는 내가 할 수 없는데 주께서 하게 하신 일이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 바짝 마른 그것을 들춰내기를 원하고 우리는 그걸 과거니까 어제 구원받았고 또 오늘 새로운 일이 터지면 그게 감춰지고 덮혀져요.
어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손들고 오고 오늘은 손 다 내려 버리는 거죠. 다시 바닥이 드러나야 할 바닥 존재가 바닥이 아니고 어느새 시간 따라서 세월 따라서 벌써 또 육적인 본성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해서 소켓을 뽑아 버렸어요. 그러면 소켓을 뽑아 버렸으니까 그 뽑힌 소켓을 가지고 천국에 꽂아야 영생이 주어질 거라는 생각을 하겠지요. 소켓을 뽑아 놓고 아예 천국에 꽂지를 않아요.
그러면 소켓을 뽑으면 거기에 뭐가 생기냐 하면 빈터가 생깁니다. 구멍이 생겨요. 그러면 ‘그러면 안 되잖아’라는 생각이 들지요. 마태복음 1장에 유명한 대목 나옵니다. 마리아가 임신했습니다. 남자 친구 요셉이 자기하고 동침도 안 했는데 임신했으니까 분명히 다른 남자와 놀아났다고 치고, 요셉이 좀 점잖은 사람이라 이걸 SNS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여기 1장 18절 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들어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소켓을 빼버립니다. 관계를 끊어버리죠. 이게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뭐 점잖든 아니든 너하고는 끝났다는 거죠.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하면서 끝내는 거죠.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인간을 건너가게 했다는 것은 세상과 결별하라는 이야기예요.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그리고 그 사실을 할례 해 버립니다. 할례 해 버리면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뚫려버린 그 세상과 같이 연결된 그 육적인 것이 할례를 통해서 끊어져 버리면 그 끊어진 자리를 다시 세상 것으로 이어주거나 다른 것으로 이을 순 없어요.
뭘 제시하느냐 하면 끊어졌음을 계속 지속해서 그것을 증거로 내놓아야 해요. 나는 세상과 끊어졌다는 것을. 스스로 내가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그것이 헛방인 것을 이제는 그 증거가 저에게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럴 경우에 주님의 조치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거기에 빈터가 된, 완전히 뚫려버린 구멍 난 여자가 등장해요.
요한복음 4장 14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하고 만나는 대목인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물을 안고. 옛날에 우리 집에서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좋아해서 할머니가 막걸리를 담갔어요.
할아버지는 결국 그 막걸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위암에 걸려서. 아예 막걸리를 품고 살았어요. 큰 단지에 막걸리가 효모를 넣어서 뽀글뽀글하거든요. 그걸 이불로 덮어 쌉니다. 그래서 따뜻해지면 술 익는 소리가 나요. 그래서 술 익는 마을의 가정이 되죠. 그것을 국자나 표주박으로 퍼먹고 하셨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 인생이라는 것은 없고 술 단지, 주님의 샘솟는 단지, 우물, 새로운 영생우물 붙들고 사는 그런 여인이 되고 말았어요. 그게 예배라는 겁니다. 예배라는 것은 마음 뚫려서 오라는 겁니다. 찬양이나 예배, 기도, 이런 것으로 채우지 말고 뻥 뚫린 상태로 오라는 거예요. 그게 성전의 의미예요. 성전은 빈터예요. 성전의 실체는 뭐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십자가 마을은 실체가 없어요. 우리도 실체가 없어요. 있는 것처럼 그걸 붙들고 싸우고 하면 안 돼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술 단지 옆에 있는 이불, 많이 봐줘서 그 이불, 그 이불로 둘러싸게 되면 이불은 술은 아닌데 이불로 둘러싼 그 가운데 뭐가 있다는 거예요. 안 보이지만 그 가운데 뭐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영생의 목마르지 않은 영원한 샘물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걸 소켓을 뽑은 현장이에요. 주께서 할례를 통해서 소켓을 뽑은 그 현장에 목마르지 않은 것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세상에 그냥 살면 어떤가? 그것은 마태복음 3장 7절에 보면 세례요한의 세례가 잘 이야기되어 있어요.
7절에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그다음에 중요한 말 나옵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임박한 진노. 그러니까 요한에게 세례받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공통점이 있는데 뭐냐 하면 그들만이 뭘 아느냐 하면 임박한 진노가 곧 들이닥친다는 의식을 안고 사는 사람은 마치 돼지 떼 들어가는 것처럼 그냥 요단강 물에 들어가는 거예요.
요단강 물에 피서하려고 들어가는 거 아닙니다. 맨날 요단강 물에 물장구치는 것이 취미가 되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임박한 진노에 쫓기듯이 요단강 물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게 세례라는 겁니다. 세례는 뒤에서 밀어붙이는 힘이 있고 그 힘이 진짜 팩트, 현실인 것을 알고 그들만 ‘임박한 진노가 오는구나’ 하면서 쫓기듯이 우르르 간 곳이 바로 뭐냐 하면 물속에 풍덩 하는 겁니다. 물속에 풍덩. 그게 요한의 세례예요.
그러면 임박한 진노가 뭐냐? 그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목수의 아들이라는 둥,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라는 둥 이러잖아요. 그러나 정녕 예수님의 세례를 아는 사람은 저분이 바로 심판 주가 된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임박한 진노로 오신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걸 받아들이면 예수님께서 임박한 진노로 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중앙을 도려내는 거예요. 내 찬란한 역사, 상장받은 것들. 태진아라는 가수는 받은 상장이 218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하여튼 태진아 집을 소개하는데 엄청나게 많이 받았어요. 그게 쫙 진열되어 있습니다. 그거 임박한 진노 앞에서 다 없애야 해요. 태진아가 기독교 신자라니까 마음속으로는 없앴겠지요. 하지만 집에는 그런 게 쫙 있어요.
자신의 과거, 이 만큼 잘 나갔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 임박한 진노 앞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 지금 세례요한이 외치는 겁니다. 세례요한도 임박한 진노가 뭔지를 자기도 잘 몰라요. 불로써 심판한다는 거는 아는데 누가 그렇게 하는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오실 분이 오실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오셨을 때 예수님이 바로, 저분이 바로 세상을 심판하실, 임박한 진노를 실제화시킬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할례라는 것은 할례 자체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에요. 일종의 세례요한의 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우리가 요단강에서 왜 살아났지? 죽어야 마땅한데 어떻게 건너왔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세상과의 소켓을 끊어버리고 둘러치자’
그러면 둘러친 그 안에서, 술 단지에서 뽀글뽀글 뭔가 올라오겠지요? 이게 주님의 꼼지락거림이에요. 주께서 뭔가 일을 하시겠지요. 시작하시는 분이 이미 일을 시작했잖아요. 완전 거덜 냈잖아요. 우리의 자랑거리, 과거에 잘 나갔던 거, 상장받은 거, 그런 거 다 거덜 냈잖아요. 거덜 낼 때는 그만한 꼼지락거림이 있고 뭔가 이유가 있단 말이죠.
시작하신 분이 주님 같으면 이걸 우리 것을, 이 자랑거리를 걷어 낼 때 다 이유가 있어요. 뭔가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거, 지켜야 할 거, 우리가 보여줄 게 뭔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우리 힘으로, 우리 힘으로 예수를 증거 할 수는 없습니다.
끝으로, 그럼 우리는 할례받았다고 할례받은 걸 자랑질 한다고 “우리는 할례받았지. 복 받았어. 너희는 할례 없지? 너희는 죽어.” 뭐 이런 자기 할례 자랑질이나 하려고 하는 겁니까? 그 다음 꼼지락거림이 뭐냐 하면 바로 할례받은 상태로 5장에 보면 여리고 성을 점령해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이제 미치는 짓이죠.
우리의 실력과 우리가 갖고 있던 과거의 정보력에 의하면 절대로 여리고 성을 못 치게 되어 있어요. 너무 견고하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그냥 가만히 놔두면 좋겠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을 그냥 놔두면 되는데 꼭 이렇게 예상밖에 그런 사태를 맞닥뜨리게 만들어요.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분명히 사마리아 여인처럼 주님만 증거 하고, 우리는 그냥 술 단지를 두르고 있는 이불에 불과합니다”라고 아무것도 아니라 하다가 막상 어떤 사태가 오게 되면 요단강 건너가기 전에 했던 걱정을 새로운 요단강으로 또 맞닥뜨리게 돼요. 저거 어떻게 건너나? 내 수로 어떻게 건너지?
그 뒤에 나오는 여호수아에서 내내 그렇고 여호수아 끝나고 사사기 나오면 사사기 내내가 뭐냐 하면 요단강을 계속해서 마주치게 만들어요. 요단강을. 그러면 처음에 인간들은 “못 건넙니다. 안 됩니다. 어쩌려고 이렇게 했습니까? 여리고 성이라니. 우리는 죽었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러려고 우리가 예수 믿었나?” 온갖 것들이 다 나오죠.
바로 그런 것들을 주님께서는 할례로 잘라낸 것들이에요. 우리 자신은 주께서 성령세례로 뭔가 죄를 끊어 냈다는데 끊어진 죄가 어떠한 내용이 들어 있는지를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걸 확인하는 겁니다. 계속 끊어 내면서 우리는 막 좌절하고 주저앉고 절망하고 이럽니다. 어디서 하느냐 하면 기관차 앞차에서.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기관차 뒤차로 보내요. 저 뒤로 보내요. 보내면서 “봐라, 여름에 그렇게 더운데 오늘 시원하지? 그지?” 이 말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가 잘난 척해도 하늘만 쳐다본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농업 기술이 어떠니 저수지가 어떠니 4대강 사업 이야기하지만, 비가 안 오면 끝장이잖아요.
인간은 하늘 없으면 못 사는 존재, 그러면 그 말이 뭐냐,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였다는 고백이 자동으로 터져 나와야지 않습니까? 다급할 때는 주의 은혜 해놓고는 막상 뭔가 한숨 돌렸다 싶으면 ‘내가 잘나서, 기도해서, 금식해서, 우리가 노력해서’ 하면서 자꾸 이미 갖다 버릴 죄를 또 가져와서 자기의 트로피로 삼아서 또 자기 자랑한단 말이죠.
그래서 또 우리는 성경을 보게 합니다. 할례 행했다는 것은 길갈이라는 것은 굴러 내려간 거예요. 벌써 내려간 거란 말이죠. 내려갔다면 우리는 이미 텅텅 빈 깡통이에요. 이제는 김깡통, 최깡통, 박깡통, 이깡통, 이렇게 깡통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 안으로 다시 들어오면 안 돼요.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돌아서면 또 쌓이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새로운 요단강 만나게 하십니다. 갖고 있던 것으로 해결해 보려고 하다가 안 됩니다. 안 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뒤 칸에 갑니다. “주여, 내가 사는 게 이렇게 허무하군요.” “그래, 원래 허무했어. 원래 허무한 거야. 몰랐어? 아무것도 아니야.”
다시 깨닫고 나서 돌아서면 이미 문제 해결은 끝난 거예요. 마음이 높아졌기 때문에 문젯거리가 된 거예요. 낮춰버리면 문젯거리도 아닌 시시한 일, 사소한 일, 정말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마귀에게 놀아난 겁니다. 협박 공갈 당한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 내 차로 남의 차 박아도 아무것도 아니고, 뺑소니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 죽는 것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썼습니까?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주께서는 그 샘물을 통해서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영생이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게 해 주기 위해서 오늘도 새로운 요단강을 대기해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적응 잘했습니다. 요령 하나 정말 끝내주게 사는 요령 챙겼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께서는 소켓을 뽑아 버리고 주님의 것으로 사용되기를 원하는 이 몸이 얼마나 고귀한 몸인지를 우리는 예전에 몰랐습니다. 주여, 새로운 일이 왔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쁨으로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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