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강-여호수아 4장 1~3절(요단강의 돌)201808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4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324페이지입니다.
“온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 밤 너희가 유숙할 그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는데요, 요단강을 건널 때의 그 길이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인간이 가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드는 길이에요. 주님 가시려고 만든 길에 인간이 끼어든다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우리의 길은 예배 마치고, 버스 타고, 차 타고 집에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나’고 집에서도 ‘나’예요. 심지어 죽어서도 지옥입니다. 인간은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그게 우리의 길입니다. 왜냐 하면 죄의 값은 심판이고 지옥입니다. 당연히 지옥 가야지요. 죄를 지었으면. 죽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의아해야 합니다.
“주여, 제 일을 좀 그냥 놔두세요. 좀 개입하지 마시고. 나 이렇게 살다 죽을래요.”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늘 돌을 취하듯이 “내가, 이 하나님이 너를 찾아올 때는 이미 너라는 인간은 너의 것에서 손을 떼.”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미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이 싸움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온 것은 접니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주장인 반 면에 “아니야, 요단을 건너온 것은 너희가 아니야, 내 사람이야.” 따라서 그 돌을 취해서 돌탑을 쌓아요. 이 돌탑이 가는 곳에 뭐냐 하면 주님의 업적이 계속 쌓아지는 곳이고 그 업적이 연속되는 그 길만이 이 땅을 방문했던 하나님이 자기가 가는 올레길입니다.
요새는 제주도 올레길 위험해요. 함부로 가면 안 되죠. 주님이 가시는 그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뭐에서 뭐로 변해야 하느냐. 사람에서 돌로 변해야돼요. 주께서 변하게 한, 주께서 기념되게 한 돌로 그렇게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달라지려면 우리 자신이 ‘나’라고 하는 그 존재 의식을 파괴해야 합니다.
아침에 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시간상 압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침에 한 내용을 솔다가 물었던 대목도 있고 해서 제가 중요한 것을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카페에 어떤 여자가 앉아 있을 때 어떤 남자가 그 여인을 보고 반했을 때, 이미 그것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전제해서 ‘나’라는 남자는 ‘너’라는 여자에게 반해 버렸다가 돼요.
그런데 그럴 경우에 여자가 변화가 일어나니까 ‘내가 반했던 건 저 모습이 아닌데.’가 되어 버려요. 당신은 변하고 나는 존재가 되어 버려요. 이걸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만약에 주님이 존재고 우리가 변화라면, 우리는 변화되는 것이 마땅하죠. 변화는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믿음 다르고 내일 믿음 다르고, 오늘은 주님 기뻐하다가 돌아서면 주님 원망하고,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어요. 왜? 변하니까.
이 변화가 변화를 붙잡아 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변화를 뚫고 주님께서 딱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스스로 벌이려는 작업이에요. 우리 좋으라고 찾아 온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본인 가기 위해서 길을 닦듯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주님이 자신의 자신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 좋으라고 찾아온 거예요. 우리 좋으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좋으라고 어떤 일을 행하게 되면 나중에 식상하게 되면 나중에 포기하게 돼요. 나중에 “나 교회 그만 다닐래. 전에는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재미없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20년 30년 교회 다녀도 소용없습니다. 그 시도를 내가 했잖아요. 내가 불도저 동원하고 지게차 동원하고 내가 포크레인 동원해서 내가 나를 모셔서 천국 가겠다고 길을 닦는데 그건 100프로 엉터리죠.
교회가 전부 다 엉터리입니다. 알아서 길 닦으라는 겁니다. 성경 말씀 보고. 십자가 지라 하면 네가 십자가 지고. 세상에 자기가 십자가 지고 천당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라는 것은, “네가 십자가 지고 해 봤나?” “네, 해 봤습니다.” “그래, 그러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그게 아닌 것을. 네가 몇 년 교회 다녔어?” “40년이요.” “그럼 이제는 알겠지? 그게 지옥 가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겠네요.” “그럼 할 수 없지. 너의 길을 많이 닦아라.”
안치환이라는 가수가 있는데 운동권 비슷하게 흉내 내는 가수가 있어요. 그 가수가 불렀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제목에 저는 발끈했습니다. 이건 아니다. 절대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왜냐하면 꽃은 자기의 시듦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의 시듦을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망할 수는 없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그러나 꽃은 계속 시들어가도 괜찮아요. 그게 주께서 꽃을 만드는 솜씨이기 때문에. 주님은 꽃과 주님의 말씀을 비교하기 위해서 꽃을 만들었어요. 꽃의 영광이 아름답지만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이라는 존재가 확고한 존재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그 가사에서 뭐라고 하냐 하면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지요’라고 해요. 뭘 아는데?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이 뭘 아는데?
이 가사 바꿔야 합니다. 지옥을 안고 사는 사람은 알지요. 우리는 지옥을 품고 살아야 해요. 지옥을 품고. 친구들이 같이 만나서 한잔하면서 “회사를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동창을 위하여” 할 때, 우리는 구호를 바꿔야 됩니다. “지옥을 위하여” 지옥을 품으라고 이 땅에 태어났고 그 태어나면서 외부에서 쏟아지는 온갖 정보와 살아남기 위한 요령들, 대인관계, 그런 것은 우리가 지옥 가는 속성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그런 것들과 얽히고설킨 거예요.
그래서 형성된 것이 지옥입니다. 지옥이기 때문에 우리는 막살아도 막살게 된 것을 감사하죠. 마법에서 풀린 것을 감사하죠. 그 얼마나 주저하면서 살았습니까? 악마의 마법대로 조심해서 살았습니까? 진짜 꿈에도 가위 눌렀어요. 밤중에도 조심해서 산다고. 전도서에 의하면 옳고 그름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데.
공부한 것도 공부 안 한 것도, 착하게 산 것도 악하게 산 것도, 전도서에 의하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교도소 들락거린 인간이나 지리산 도 닦는 인간이나 모두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겁니다. 이거는 마법이 풀려야 알아요. 멋대로 사나, 함부로 사나, 함부로 살지 안으나 다 똑같아요.
그동안 우리 성질 너무 죽였어. 후회돼요, 정말. 그동안 우리 헛산 거예요. 성경에서는 언급하는 것은 두 가지 개념이 있다고 제가 강남 강의에서 했어요. 두 가지 개념이 뭐냐 하면 그 같은 개념을 두고 주께서 풀이했을 때 개념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개념이 다르다고 이야기했어요. 예를 들면 주께서 용서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네가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하라는 말씀이 있거든요.
용서하라는 말이 뭐냐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어디 건방지게 남을 용서합니까?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전제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용서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해야 해요. 사랑을 아는 자만이 자기를 미워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마리아가 임신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욕을 했습니다. 불륜인가?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어요? 그 사랑하는 약혼자 요셉, 요셉도 당황했습니다. 요셉이 워낙 점잖은 사람이라서, 끊기는 끊되 동네방네 나발 불지 않고 종용히,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게 뭐냐, 우사스럽다는 말입니다. 종용히 끊고자 했어요. 그 종용히 끊고자 하는 심보가 뭐냐 하면 지금까지 구축한 나를 여전히 사랑하겠다는 집념과 고집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알기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뭐가 납득이 안 되느냐 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내가 왜 죽느냐는 겁니다.
자기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요. 생각해 보세요. 백화점에 어떤 아주머니가 옷을 훔치는데 내가 훔쳤습니까? 그런데 그 훔친 여자는 도망갔는데 나보러 벌금 내라고 하면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러니까 처음에 복음을 알기 전에 그분은 정말 머리가 똑똑했어요. 지금도 머리가 똑똑하지만. 참 어처구니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자기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는데 내가 왜 죽느냐는 거예요.
이 문제가 풀리지를 않았어요. 계속해서 복음을 들었답니다. 문제 해결은 성경책을 내가 분석하고 연구하고, 설교 해석해서 된 것이 아니에요. 한가지 놓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나는 당연히 살아야겠다는 이것이 폭탄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성경을 보는 전제가 뭐냐, 나는 마땅히 천당 가야 하고,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그런 심보를 이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으레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경이 딱 치고 들어오거든요. 선악과 따 먹었는데 선악과의 자손인 너도 죽어야 한다고 하면 여기서 거침없이 반발 나옵니다. “저는 선악과 구경한 적도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현재 선악과 따먹고 죽어 있는 본성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남은 죽어도, 남은 세월호, 네월호에 빠지든지 우리 아이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그 심보 있잖아요. 남들은 고속도로에서 받쳐 죽어도 우리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왜? 나니까.
요 본성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들추어지는 겁니다. 오늘 아침 예배 전에 장로님과 이야기를 하는데 장로님이 요즘 전도 많이 하거든요. 하는데 아무리 해도 먹혀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어느 대목에서 먹혀들지 않느냐면 “내가 왜 죄인이냐?”라는 겁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 아무리 설득을 해도 내가 왜 죄인이냐가 납득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복음을 안 들어서가 아니에요. 세상 것이 너무 꽉 차 있어요. 창고에 물건이 너무 꽉 차서 이게 들어 올 구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창고에 들어간 물건들이 뭐냐 하면 하나같이 ‘나는 복 받을 만하니까 복 받았고 나는 훌륭해서 살만하니까 이 만큼 하나님께서 살려 줬다’라는 거예요. 그 장로님이 교회 60년 다녔다던가 아주 오래 다녔어요.
나는 할 도리를 다했기 때문에 이 정도는 받아도 마땅하다가 자기 창고에 가득 들어 있는 거예요. 아까 예배 마치고 솔다가 질문했던 것이 이겁니다. “성도가 불임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도가 불임이 되었다. 사실은 제가 빠뜨렸습니다만 고추를 자르려면 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자가 되면 자식을 못 낳잖아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남편 없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에게서 할례가 오게 되면 나는 언약 사람으로 내가 의롭다는 뜻이 아니고 할례 자체가 빈자리예요. 멀쩡한 사람도 고자 만들고 멀쩡한 여자도 불임여성 만드는 겁니다. 완전히 우리의 의의 자리가 불모의 자리, 더 나아가서 불임의 자리로 만드는 거예요.
우리는 물론 결혼하면 아이를 놓지요. 아이를 낳아 봐야 죽을 내가 낳은 죽을 자식이에요. 낳으면 죽어요. 그 손녀 또 낳아 봐야 또 죽어요. 죽은 양이 백날 낳아 봐야 그거 아무도 구원 못 시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그 언약 안에서, 언약이 꽂힌 그 안에서, 언약 자체가 주님의 존재 개입이라 했으니까, 그렇게 꽂히게 되면 땅의 불임에 하늘의 거듭난 씨가 결합 되면서 새 생명을 맺는 겁니다.
이게 할례 언약이에요. 그 할례 언약이 진짜 인지에 대한 증거는 “예수님이 죽었다가~”라고 하면 ‘뭐 죽는 거야 사람은 다 죽지’라고 생각하는데 아니요,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는 데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사도의 복음이라고 했지요? 간단한 문장인데 세상에 일어난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써 나머지 모든 인간의 존재는 다 헛방이에요.
다 긁어내야 해요. 바닥을 드러내야 해요. 저수지의 물이 고갈되면 그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있었던 마을의 흔적들이 남잖아요. 쓰레기들. 거꾸로 박혀 있는 차들이 나온다고요. 우리의 바닥의 진면모, 빈 그릇의 바닥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예를 든 것이 “살인하지 말라”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살인 안 했다고 버텨도 나중에 막상 되게 되면 정말 아무 해 준 것도 없이 아주 밉고 저 인간은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봤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꾸 떠올라요. 분노가.
아니 분노 없이 짜증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날씨 더우면 다쳐도 짜증 나죠. 오늘 아침에 캐나다 캘거리에서 카톡이 왔는데 뭐라고 하냐 하면 요셉 집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참, 한국에 사는 사람들 존경합니다” 이렇게 왔어요. 왜냐 하면 캘거리가 1933년에 그때 캘거리의 최고 온도를 여름에 기록을 세웠는데 36.1도 였어요. 그런데 오늘 37도 찍는답니다. 캘거리가.
그러니 서울 39도, 대구 40도 가까이 되니까 존경한다는 거예요. 그 대목에서 제가 가슴에 꼽치는 게 있었어요. 뭐냐 하면 한국 사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간 사람 존경합니다는 거예요. 이 더운데 피해서 빨리 천국 간 사람 있잖아요. 정말 천국 간 사람 존경해요. 이 더운 날씨, 기록 깨는 날씨 안 겪어도 되니까.
그런데 우리는 뭣 때문에 더 살라고 아등바등 애를 씁니까? 우리는 불모이기 때문에 파탄 난 몸이기 때문에 절대로 남을 용서할 권한도 없고 용서할 자격도 없고 용서할 재주도 없어요. 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용서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만 살아남아요. 말씀만.
왜냐 하면 그 용서 할 자리는 대가를 지불한 자리기 때문에. 그 자리가 고스란히 주님만이 지불했다는 것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게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고 성령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마세요. 교회는 싸워야 해요. 우리교회는 지금 너무 조용해요. 너무 좋아. 제가 누구를 만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꾸 싸우려고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바쁘다고 안 만나 줘요. 어디 뭐 좋은 관계하는 거 아니고 싸우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 만난다고 다 피해버려요. 다들 바쁘니까. 학교 과외 한다고 바쁘고, 신방 가고 싶어도 미안해서 못가요. 나 지금 싸우려고 가는데. 안 싸울랍니다. 싸울 의사가 없는 게 아니고 시간이 없어. 다들 점잖아요. 이거 교회 위기인데요.
남을 미워할 줄도 몰라요. 뭐 전부 다 봉사를 안 하니, 봉사를 좀 해야 봉사하는 속에서 남에게 봉사 안 한다고 나를 이용해 먹는다고 화를 내는데 다 손 놓고 있으니, 개판 되자고 다 손 놓고 있으니 아무도 미워할 사람이 없어. 미워 할 수 있는 기회를 알아서 다 처리해버렸어요.
가족끼리는 안 미워하잖아요. 결속력이 있잖아요. 그런데 술 몇 잔 들어가니까 난리도 아니에요. 광산 김씨. 나 정말 광산 김씨 때문에 요새 삽니다. 어떻게 60년대 70년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줘요. 올케 시누이까지 등쳐먹고, 모자 바꾸고, 술 한 잔 들어가니 점잖다가 두 잔 들어가니 왜 내 아이 욕하냐고 막 싸우고 광산 김씨 다 깨지고...
여러분 광산 김씨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습이에요. 광산 김씨 제목이 뭐냐 하면 살림하는 남자예요. 앞에 쪽은 보지 말고 광산 김씨 나오는 그 대목만 보세요. 인간의 면면을 어떻게 그렇게 절실하게 드러내는지 제가 태어나서 그렇게 절실한 프로그램 처음 봐요. 일은 주님이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아무리 내가 정신 차려야 된다고 해도 주께서 매일 같이 변하게 해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해. 예수님께 감사해야 해. 맞아 목사님 말씀대로 감사해야 해. 감사 못 합니다. 주께서 감사를 못 하게 만들어요. 자기 주제 파악하라고. 너는 너밖에 모르고 너만 사랑하는 것으로 계속 변화시킵니다. 왜 자꾸 너는 너라는 존재를 쥐려고 하느냐. 지킬 게 있다는 거, 그게 마귀죠. 무슨 지킬 것이 있습니까? 지킬 것이 없는데.
우리는 지킬 것이 없어요. 지키면 안 돼요. 지키지 마세요. 그냥 막사세요. 지킬 것 없어요. 주님이 주님 알아서 우리를 자기 길로 삼은 돌멩이로 사용하는데, 요단강이 우리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무서워서 벌어진 거예요. 나중에 그 요단강 취지가 이스라엘에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하나님이 계속 책망을 하는 이유는 요단강 취지가 주님 때문에 벌어졌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들은 자기가 잘나서 요단강이 벌어지고 홍해가 벌어진 줄 알고 있어요. 십자가에 나 때문에 죽었다가 아니에요. 주님이 자신의 가는 길이 그 길이에요. 아버지에게 받은 언약은 예수님 혼자만 이룹니다.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사람이 있어요. 실존 인물이 아니고 소설에 나오는 인물인데 가난한 대학생인데 사회 꼬라지를 보니 개판도 아니거든요. 대학생이니까 뭘 좀 배웠을 거 아닙니까. 사회 정의에 기여 하는 방법이 뭐냐를 생각했어요. 그게 뭐냐, 수량적 사회주의 또는 공상적 사회주의인데 수량적으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 겁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욕심 많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게 되면 그 재산이 100명을 살릴 수 있다면 내가 그 노파를 죽이는 것이 사회 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마 그 라스콜리니코프의 정신 사고방식은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그것과 비슷할 거예요. 똑같을 겁니다.
‘트롤리의 딜레마’라는 것이 심리학에 나오는데 전차가 가는데 전차 철로가 두 개로 갈라지는데 한쪽은 다섯 명이 묶어져 있고 다른 한쪽은 한 사람이 묶어져 있는데 전차는 어느 길로 가야 옳으냐입니다. 이쪽으로 가게 되면 묶인 한 사람이 죽지만 저쪽으로 가게 되면 다섯 명이 죽으니까 한 사람 죽이는 것이 다섯 사람 죽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사회 정의의 딜레마라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어떤 해답은 없어요. 그냥 사회 정의는 딜레마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말을 들을 때 복음적으로 여러분은 이렇게 답변하세요. “그러면 복음적으로 이건 어떻게 설명합니까?” “이미 다 죽었습니다” 죽은 거 확인 사살하라고 예수님 오신 거예요. 확인 사살된 사람은 천국 가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그냥 지옥 가요.
네가 나에게 용서받은 것처럼 용서하라는 말은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고 확인 사살하라는 말이에요. “주여, 나는 남을 용서할 자격이 못 됩니다.” 내가 어떻게 남을 용서해요? 나밖에 모르는데.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오늘도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인간 스스로 자기 개선한다고 말씀을 얼마나 공부하는지 몰라요. 자기 개선한다고.
라스콜리니코프가 뭐냐 하면 바로 개인이 갖고 있던 정의가 이게 사회적으로 확산되어서 사회 정의를 이룬다는 겁니다. 그 점이 중요해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가 마귀입니다. 개인이 갖고있는 나 잘났으니까 나 속해 있는 나라도 덩달아 정의로워야 해. 이게 촛불이고 이게 태극기예요. 똑같아요. 자기 정의롭다는 겁니다.
자기는 죽으면 안 되고 자기는 벌 받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이런 힘든 나라에 살 수 있는 그런 천박한 인간이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에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할 수도 없고 자기를 미워할 수도 없는 거, 이거는 천국 가는 길이 자기가 가고 싶은 길에 떡하니 상상해서 천국이라는 유토피아를 걸쳐놓은 거예요.
그리고 그 중간에다가 교회를 깔아 놓았어요. 교회는 진흙탕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너나 나나 누구를 사랑할 자격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음을 다시 늘 교회 와서 확인해야 합니다. 지금 안 온 사람은 도 닦고 있는 사람이에요. 같잖은 사람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잘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받으면 되지. 은혜받은 거 내일 되면 또 변합니다.
베네수엘라는 얼마나 물가가 오르는지 밥 시키고 먹는 중에 밥값이 올라가요. 물가 100만프로 올라갔으니까. 비빔밥 5000원짜리 시켰는데 다 먹고 나면 5500원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뭐냐 하면 우리는 매일같이 망하는 중이라는 겁니다. 그 사실을 우리 안에 존재로 꽂혀 있는 주님이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했습니다. 남하고 경쟁해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과연 그런 자격이 있는지 아예 묻지를 않았습니다. 주여 변화하는 이 불모의 불임의 자리가 비로소 주님의 신부가 되고 주님의 색시가 되어서 새 생명에 이른다는, 그게 교회가 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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