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여리고성 앞에서(수6;1-5) 1809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10. 09:14
2018-09-09 14:59:56조회 : 21         
   여리고성 앞에서 180909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여리고성 앞에서(여호수아 6: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7FXK-_CEfk, Hit:0
 우리교회18-09-09 15:56 
여리고성 앞에서 

2018년 9월 9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6:1-5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6: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6:5)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이제는 여리고성 앞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앞에 있는 장애물들을 일찍 치워주시면서 수월하게 이스라엘을 인도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고통이 스며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든 하나님이든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을 고통입니다. 여유가 있어도 허무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공포스럽고 무시당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냥 눈 앞에 넘실대로 바다 물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서운 겁니다. 경쟁해야 하고 무시하고 싶어도 다가오는 그 존재들이 무서운 겁니다.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없는 대로 무섭고, 주위에 누가 살게 되면 그 사는 대로 귀찮고 번거럽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만족스러운 상황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협박을 받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세상 자체에서 인간의 태어나면서 협박받습니다. 그 협박은 이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세상 사람들이나 사는 것이 고만고만합니다.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자체적으로 세상을 이길 능력이 없습니다. 담력이나 용기는 있을 수 있지만 세상을 뒤덮은 힘에 순식간에 무용지물로 변합니다. 

즉 객기는 가질 수 있으나 어디까지 비현실적인 허세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 앞에 당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여리고성에 퍼부을 저주가 결코 이스라엘에게도 예외적인 것이 아님을 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여리고성 사람들보다 함께 계신 하나님이 더 두렵고 떨리는 분임을 알게 하십니다.
 

마치 학급에서 선생님께서 숙제 하지 않은 아동에게 체벌을 하면서 제일 먼저 번 아이에게 다소 심하게 때리게 되면 후에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큰 공포에 휩싸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를 이스라엘부터 절실하게 느껴야 하는 겁니다. 전에 홍해를 건널 때, 모세만 관여했고, 요단강 건널 때에는 제사장만 관여했지만 이제는 온 이스라엘이 다 관여해야 합니다. 

이는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현실 세계’의 혹독함을 더 깊이 맞닥뜨려야 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알리는 겁니다. 즉 과연 세상이 얼마나 더 무서운 것인가를 깊이 아는 동시에, 그렇게 유도하신 하나님 자신이 그런 세상의 무서움 보다 더 무서운 분인 것을 알게 하시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5: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이 ‘뽑음’을 모릅니다. 그저 많이 벌리고 벌리면 그것들이 자신에게 드리워진 생존의 공포를 완화시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무조건 자기 힘으로 심기만 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에서 심은 것까지도 뽑아낼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시편 127:1-2에 보면,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자기에 짊어지는 공포와 두려움을 해소하려 하시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러한 원칙에 갈수록 더 깊게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스라엘은 더 심화된 공포와 맞닥드리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가나안 땅의 생활 풍습은 그 고장의 종교성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정착 생활을 해보지 못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는 정착해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일일이 현지민들에게 배워야하고 인수받아야 합니다. 이 과정 속에서 사고방식마저 수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룩하고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외면하고 그 대신 주변에 포진한 이방민족들의 생활태도에 주눅들게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보다 사람들이 더 무서운 겁니다. 여리고성 같은 것은 적과 아군이 지역적으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경우,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들이 지역적으로 따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으로 한데 묶여 있기도 하고 사업을 같이 하기도 합니다. 협력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과연 ‘여리고성 무너뜨리기’를 어떤 식으로 성사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날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생존에서 오는 불편함으로 해소하는지를 살펴보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실험 실습으로 멈추지 않고 반복해왔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 자유나 인격까지 포기해야 하는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진절머리를 냅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윗 계급의 지시나 착취를 받지 않는 체제를 연구했습니다. 

‘아나코-생디칼리즘’라는 방식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기존의 공장에서는 직공들이 노동을 하고 사주로부터 봉급을 받은 형태라면, 이 ‘경제적 무정부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연대를 강조합니다. 즉 같이 생산하고, 같이 소비하고, 같이 소유하는 체제를 가지자는 겁니다. 모든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생존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인간이 결정하고 인간이 꾸며나가는 세계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심지 않는 것을 다 뽑아낼 요량으로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이 얼마나 큰 공포를 짊어지고 가는지를 몸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볍게 세상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의 능력은,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함을 감당해야 함을 알려주십니다. 세상과 경쟁할 필요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는, 모든 저주를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피에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니님 아버지, 생존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저 주시는 그 은혜의 고마움 앞에 잠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9-10 05:30 
201강-여호수아 6장 1~5절(여리고성 앞에서)201809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6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326페이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 지니라 하시매” 

어차피 무너질 걸 왜 막아 놓았을까요? 그냥 여리고 성을 피해 갈 수도 있는 문제고 또 그렇게 백성들에게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서비스해주는 마당에 더 깔끔하게 서비스해주셔서 다 무너뜨리고 난 뒤에 그 지역을 통과하도록 하면 되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성이 열리지도 않고 견고한 성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앞에 밝히 보이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홍해를 건너갈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바다라는 물이 보였지요. 뒤에는 애굽 군사가 따라오고 앞에는 넘치는 물이 있고, 역시 갈 수가 없죠. 요단강에서는 같은 물이지만 마른 땅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중간에 서 있고 백성들은 제사장이 벌여놓은 그 마른 땅에 통과하기만 하면 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죠. 모세가 지팡이로 길을 만들어 냈고 그들은 그냥 통과하기만 하면 됐지요.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이처럼 바다에 물만 보고 살 수는 없지요. 어디 바캉스 하는 것도 아니고 바닷가에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만나야 될 그것은 바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어떻게 꺽을 수 있느냐? 사람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느냐? 앞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우리가 마음가짐을 어떤 식으로 하게 되면 그 마음을 장착할 수 있느냐? 그런 문제들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홍해 갈때는 모세가 길을 열어 주었고 요단강은 제사장이 길을 열어 줬지만 여리고성 할 때는 온 백성이 각자 자신의 인생을 걸고 돌아야 돼요. 이것은 이런 장벽은 누가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물론 주님이 대신했지만, 누가 나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하나의 제사장처럼, 하나의 모세처럼 직접 현실을 맞닥뜨려야 하는 겁니다. 

그 현실을 시간으로 계산해 볼 때 특정한 날이 아닙니다. 6일 + 하루, 일주일 내내 7일 동안 모두가 현실과 현실과 싸워야 할 사람들과 맞닥뜨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6일 동안은 한 바퀴 돌고 7일째는 일곱 바퀴 돌라 했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6+1, 이거는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전부다 여리고 성을 돌아야 됩니다. 

누구 돌 때 자기는 낮잠 자고 이런 것이 안돼요. 스스로 그들은 현실과 맞닥뜨려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냥 바닷물이 아니에요. 생명 없는 요단강 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는 사람이 살고 있어요. 그 여리고 성에. 그리고 그들이 사는 방식과 지금 문 밖에서 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의 방식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를 바가 없는 둘은 달라야 되고, 한쪽은 무너져야 되고, 한쪽은 무너뜨려야 되는 이 구별할 수 있는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 몸소 체험해야 돼요. 살아가는 것이 별다른 거 없거든요. 똑같다 이 말이죠. 추석 때 명절날 집안사람 만나가지고 살아가는 이야기 들어보면 똑같아요. 그런데 어느 한쪽을, 시 삼촌 쪽은 여리고 성이고 나는 그걸 무너뜨려야 되고, 이렇게 구분 지을 수 있는 명쾌한 기준 같은 게 있습니까? 

만약에 그쪽이 이쪽을 무너뜨려야 하는 여리고성으로 간주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불도가 심한 집으로 시집을 갔는데 명절에 20명이 모였다. 그런데 19명이 전부다 절에 열심히 다닌다. 그중에 두 명은 중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자기 혼자 교회 간다면 저쪽이 오히려 이쪽을 여리고성으로 간주해서 무너뜨려 가지고 일체화 시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그중에 군데군데 나라가 다 찢어져 가지고 동쪽에 조금, 서쪽에 조금, 남쪽에 조금, 북쪽에 조금 있는 그게 바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이에요. 구분되어 있는 거죠. 제가 만약에 이스라엘 대통령 같으면 깔끔하게 확 밀어버리겠단 말이죠. 사실은 그렇게 밀려고 하고 있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이 다 성지인데 황금 돔은 이슬람의 예배처소이고 성전이라면 실효적 점령을 이스라엘이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내에 이슬람 성전이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봅니까? 현대 무기로 무장된 이스라엘 군 데려가서 나가라고 해야죠. 쫓아내야죠. 할 수 있거든요. 실제로 이스라엘 수상이 그렇게 했었어요. 어느 날 자기 군대 몰고 가서 이슬람 다 나가라고 시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욕 엄청 얻어먹었지만. 

이처럼 많은 쪽이 소수를 이렇게 하나로 만들어서 깔끔하게 질서를 회복하려 하는 것은 모든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안정된 질서라고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여리고 성을 미리 밀어버리시고 “옛날에 이런 성이 있었는데 내가 알아서 없애 버렸으니까 너희들은 나만 믿고 따라 오면 돼” 이렇게 편하게 하면 될 터인데 왜 여리고 성을 버티고 있게 해서 못 가게 하시냐는 말이죠. 

그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아직도 세상 사람을 두려워하는 공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타고 난 거죠. 태어 날 때부터 원숭이가 무섭나, 범이 무섭나 하지만 인간에게 무서운 것은 인간이 젤로 무서워요. 정말 무섭습니다. 여기서 궁중족발 가게 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궁중족발 열면 그 인간같이 무서운 게 없어요. 

가게 9년 동안 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월세 1200달라 하면서 나가라 하면 정말 얼마나 무서웠으면 도끼 들고 나서겠습니까? 그 집주인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죽일라고 하겠어요? 얼마나 무서웠으면. 남을 해친다는 것은 본인이 그 만큼 무섭다는 거예요. 알 수 없는 무서움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하나님과 동행하며 따라가면 되겠지 할 때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무서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 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그냥 하나님만 이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몸서리치는 체험을 했는지를 그들은 까마득히 모르고 그냥 헤헤거리면서 좋다고 그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찬양’ 이러고 있는 거예요. 대전역에 가면 대전 시장 있는데 2층에 청년들한테 값싸게 식당 하라고 열어줬어요. 식당 하라고. 

한 6명인가 한테 열어 줬거든요. 청년들이 뭐 요리를 할 줄 압니까? 장사를 할 줄 압니까?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백종원이 가서 한번 보니까 이건 기가 막히거든요. 요리는 요리대로 못하고 장사는 장사대로 안돼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방송국에서 방송 기재해서 그 큰 시장 상인들 다 시식단 만들어 가지고 청년들 보러 요리하라고 하고 20명쯤 되는 사람에게 전부다 시식해서 점수를 매기도록 했고 청년들이 만든 음식을 다시 먹고 싶은 사람은 O 표시를 하고 다시 안 먹고 싶은 사람은 X 표시를 하라고 했더니만 세상에 아무도 그 음식을 다시는 안 먹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음식을 했으면 그걸 보고 내가 음식을 잘 했는가 이걸 봐야 하지 않습니까? 연예인 왔다고 히히덕 거리면서 사인 받고 있고 자신들이 O 표시 받는지 X 표 받는지 아무 관심도 없어요. 방송국에서는 그들을 살려 주겠다고 식당에서 밥 먹게 하려고 그렇게 애쓰는데 막상 식당을 운영하는 청년들은 음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뭘 해야 하는 지 아무것도 몰라요. 

주님 따라 가게 되면 어디를 가냐 하면 천국 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천국 가는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를 압니까? 그냥 히히덕 거리고 같이 세상 그렇게 살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주님께서는 모진 체험을 했다고요. 어떤 체험을 했느냐 하면 세상에서 안 떨어지겠다고, 못 떨어지겠다고, 내 혈육이 아깝다고, 내 재산이 아깝다고, 내 부동산 이걸 못 놓겠다고 그저 찐득이처럼 딱 붙어서 주님이 말씀해도 뭐 듣지도 않고 그저 난 이거 죽어도 못 놓겠다고 버티는 겁니다. 

그렇게 버틸 때 주님께서 강제로 이 걸 떼게 하시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이 세상 것 날아가면 나는 큰일 나는 줄 알고. 제가 몇 번 이야기 했잖아요. 세상에서 고생해도 그건 고생이 아니라고. 세상에서 욕 얻어먹어도 그건 욕 얻어먹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지옥 유황불 들어간 사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당하는 고생은 고생도 아니에요. 그냥 장난치고 그냥 가다가 물 튀기는 거예요. 이거 털어버리면 그만이거든요. 

지금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 것만 보고 히히덕 거리면서 그냥 프로 야구만 들여다보고, 축구만 보고 세상 돌아가는 거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들. 문재인이 어떠니, 박근혜가 어떠니, 이명박이 어떠니 하는 그런 것들은 다 시시한, 정말 시시한 일이거든요. 그 시시한 일에 우리도 하나 넣어 줍시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시시한 일인데 우리는 그런 시시한 일들을 못 뗍니다. 무서워서 떨어요. 

특히 이제 막 아이 나아서 키우는 사람에게는 애가 울면 본인이 더 깜짝 놀라서 울어요. 어떻게 되지 않을까 겁나는 거죠. 알 수 없는 공포, 그 공포를 집대성한 것이 뭐냐 하면 여리고성입니다. 왜? 여리고성 안에 사는 사람이나 그 바깥에서 빙빙 도는 우리들이나 사는 모습이 똑같은데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해야 되고, 저주 받아야 되고, 우리는 저주 안 당해야 되니까 그들을 저주하고 심판하실 때의 그 공포는 살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이 느껴져야 돼요. 

신앙생활은 뭐냐 하면 세상이 불심판 받는 체험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미리 당겨서 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화가 났으면 작살내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걸 경험해 가지고 앞으로 여리고성 지나고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정말 농사짓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예요. 

이제는 여리고성이 아니고 농사짓는 사람인 그들에게 농사를 다 배워야 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농사짓는 경험이 없어요. 목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쪽 사람은 정착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이에요. 그들에게 한 수 배워야 됩니다. 그 가운데서 세상과 세상종교 그들이 농사짓는 데 필요한 모든 노하우와 종교가, 그게 바알 종교인데, 스며드는 거예요. 

바알종교 입장에서 농사짓는 달력이 다 나와요. 그 달력 데로 한다는 말은 그 종교 자체를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발을 뺍니까? 아니, 뺄까봐 더 겁을 낼 걸요? 주님께서는 세상과 더 깊숙하게 살도록 자꾸 기회를 주는 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이 세상 한 번 살아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드는지. 나보다 세상이 더 좋잖아. 그렇지?” 

세상에 더 미련 갖고 있고 거기서 사업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하는 이것이 마 치 자기 인생을 결단 내는 것처럼 그런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오는 거예요. ‘실패하면 안 된다. 우사스러우면 안 돼. 내 인생 망치면 안 돼.’ 이게 얼마나 큰 공포입니까? 뭐 나를 살린다고요? 

안중근이 죽인 사람이 있어요. 이토 히로부미라는 사람인데 이등박문이라는 사람을 죽였어요. 안중근이가 그를 죽일 때 나라 사랑해서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안중근 아들은? 안중근 아들의 이름은 안준생인데, 안준생이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친일파도 그런 친일파가 없어요. 

아버지는 나라 살리겠다고 총독인 이등박문을 죽였는데, 아들 안준생이는 일본의 회유에 빠져서 아버지는 아버지고 나는 내 인생 산다고 하면서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이등박문의 아들을 만났어요. 눈물겨운 상봉을 했어요. “미안합니다. 아버지가 잘못 생각해서 당신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하면서 두 사람의 아버지들이 죽고 아들끼리 만났어요. 왜 그렇게 되느냐. 세상의 삶이 주는 권력을 그렇게 하찮게 여길 수가 없어요.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조국을 살린다는 명분이라든지,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잡아당기는 그 강력한 생존의 두려움을 무슨 수로 그걸 털어 낼 수 있겠어요? 누가 자신 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 털어 냅니다. 뭐 복음 들고 목회하겠다고요? 참, 개가 웃겠어요. 복음은 목회하라고 준 게 아니에요. 목회 못한다고 준 게 복음입니다. 무슨 복음을 들고 목회를 합니까? 

제가 들은 이야기 인데 어떤 교회는 교회출석하게 되면 출석하고 등록을 하잖아요. 등록하면 교회에서 한보따리 선물을 준답니다. 그 선물이 아마 세제 종합세트를 준다고 하는 거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선물을 한보따리 주는 거예요. 이건 은행에서 통장 만들 때 주는 거 아니에요? 그건 보험회사에서 보험들 때 주는 거 아닙니까? 뭐 보람상조 등록했어요? 교회가 왜 그래요? 왜 선물을 주는데요?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 6+1이에요. 6일 내내 여리고성 돌아야 하고 그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 돌아서 총 13바퀴 도는 거예요. “돌아라. 그러면 무너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신 하나님이 좋게 이야기 했잖아요. 그 좋게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는 그 공포성이 그 무서운 공포심이 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여리고성이 우리 이스라엘을 점령해서 능지처참하는 것보다 더 강한 공포로 다가와야 해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안에 담겨있는 그 공포가 세상이 우리에게 칼을 겨누고 총을 겨누는 공포보다 더 세야하고 더 강렬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여리고성 같은 세상을 말씀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살려만 달라고 비는 거밖에 없어요. 왜냐면 여리고성 사는 사람도 생존만을 위해 살았고 우리도 생존만을 위해 사는 같은 동질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쪽은 저주하고 이쪽을 살리는 이유는 뭐냐? 하나님의 말씀뿐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나를 치는 공포보다도 같이 있는 하나님이 나를 저주한다는 그 공포심이 더 강렬해야 해요. “세상 말 안 듣더라도 주님 말 들어야 돼” 라고 할 정도로 그런 생생하게 와 닿는 감각이 말씀 속에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을 어떻게 장착하느냐? 제가 어리석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 서양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어떤 사람이 거위를 하나 시장에서 샀는데 어느 날 보니까 거위가 알을 낳는 것이 아니고 알이 황금알이에요. 황금알. 이게 무슨 병인가 싶어서 직접 만져보니까 진짜 황금이에요. 

다음날 또 황금알을 낳는 거예요. 계속 황금알을 낳는 거예요. 6일 + 1일. 일주일 내내. 그래서 주인이 생각하기를 황금알을 연금 받듯이 조금씩 받을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을까 생각한 거죠. 황금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황금알을 줄 것이라 생각해서 주인이 성질이 급해가지고 거위를 완전히 잘라 버렸습니다. 

잘라보니 그 안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그냥 내장 들었어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어요.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다고 하니까 주님 안에 뭐가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주님 안에 뭔가 내가 필요한 게 있는 줄 알았어요. 주님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쪼개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전혀 채워주지 못할 평범한 사람 정도가 아니고 그 보다 더 후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진짜 별 볼일 없는 분이 주님인데 하나님은 그 주님을 통해서 그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천국을 간다 하니까 우리는 우리 쪽에서 계산 해가지고 주님 안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이 가진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발을 뗄 수 없는 이 지독한 생존의 세계에서 혹독하게 멸시 당했다는 거, 그것뿐이에요. 주님은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감히 발을 못 떼는 이 세상에서 그냥 죽을 요량으로 발을 뗐다는 그 사실, 그 사실만 주님에게 들어 있을 뿐이에요. 주님에게 신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여리고성에서는 이건 맛보기에 불과하고 또 여호수아 뒤로 가면서, 사사기 들어가면 또 새로운, 그 만큼 저쪽을 통해서, 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죄가 더욱더 확대되고 더 심화 될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인도 하십니다. 

“주여, 여리고성 이겼습니다”하면 주께서는 “그래? 이거는? 또 이거는?” “아이고, 그건 못 하겠습니다.” 하게 됩니다. 여리고성보다 더 심한 거 알려 드릴까요? 마태복음 15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 천부께서 심지 아니하신 것은 다 뽑힐 것이니” 상도동 어린이집과 똑같은 거예요. “내 천부께서 심지 아니하신 것은 다 뽑힐 것이니” 우리 아버지가 심지 아니한 것은 다 뽑힌다고 나왔어요. 

시편 127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내 이름의 동산, 부동산 안 된다는 거예요. 내 것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버텨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적들뿐만이 아니고 우리도 저주받아 마땅한데 주님의 피가, 주님의 용서가 함께 있으니까 저주를 안 받는 거예요. 

그렇다면 저주 안 받는다고 좋아하지 말고 왜 우리는 저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인데 왜 우리는 저주 안 받는가, 그런 걸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를 관심이 그쪽까지 있어야지, 교회 나오고 예수 믿으니 나는 저주 안 받으니 내 맘대로 살자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막살아도 자기가 자기 힘으로 막 살면 안돼요. 주의 뜻으로 막 살아야 되죠. 이제 와서 말을 더 붙이냐 해도 할 수 없어요. 주의 뜻으로 막 살아야 돼요. 자기 맘대로 막 살면 안돼요. 그건 헤헤거리며 주님 이용하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인간들이 이 세상을 너무 힘들고 감당을 못해가지고 인간들이 머릿속에서 나온 이 세상을 이제는 공포를 줄이고 그런 두려움을 줄이고 어떻게 한번 같이 평화롭게 이상국가를 만들어보자 하는 그 아이디어가 사상가들 철학가들 그리고 많은 인간들의 지혜를 다 모아서 이어져 왔었어요. 

그 사상 체계가 국가의 정치철학으로 쭉 이어져 왔는데 그 중에서 노골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싫어하고 혐오하는 단체가 낸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아나코생디칼리즘 [anarcho syndicalisme]이라고 어렵게 되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노동 장에서 노동자가 임금을 받고 일을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삯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 계급이 생겨서 저쪽이 권력으로 갑질을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주장한 것은 권력이 있는 곳은 자유가 없다는 거예요. 이걸 뭐라 하냐면 경제적 무정부주의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경제적 무정부주의인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대주의, 공동생산, 공동소비, 공동소유라고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처럼. 사도행전의 공동체처럼. 자기 연대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걸 요즘 말로 순화한다면 일종의 협동조합 같은 거예요. 이런 자본주의에 신물이 나가지고 생산은 100을 했는데 자본가가 놀면서 50을 가져갔을 때, 처음에는 취직만 하게 해달라고 몸바치겠다고 하고 막상 들어가서 일 해보니까, 떼 가도 너무 많이 떼 가잖아요. 특히 용역회사들 너무 많이 떼 간단 말이죠. 

대리회사들, 용역회사들. 식당이나 건물 청소 용역회사들, 요새는 목사 설교 용역회사도 있어요. 회비만 내면 모든 설교를 다 보여주고 우리나라 유명 교회들 설교도 다 보여줘요. 제 설교도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알아서 적당히 골라잡아서 섞어서 설교하면 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어떤 권력도 없이 서로 돕고, 서로 신뢰하는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모두 끊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신으로부터 모든 말씀과 간섭부터 끊어버려야 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뭐냐 하면 아름다운 인간의 심성을 건들지 마라는 겁니다. 인간은 아름답다는 겁니다. 

이 말 들으면 여러분은 어디서 한 소리 가지고 그러는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게 되고 있어요. 신으로부터 끊어버려요. 우리들끼리 서로 돕는 거예요. 서로 협조하고, 서로 신뢰하고, 자신들이 아름답다는 거예요. 세상에서도 간섭받지 않고 교회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그냥 협동조합처럼 그렇게 해보자는 겁니다. 공동체처럼 그렇게 해보자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자기 죄를 더욱더 깊이 아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자기 잘났다밖에 안되지 죄를 깊이 알겠어요?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붉은 노을이 퍼져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참 멋있게 나오겠지요. 그러면 그 노을을 그 사람이 만들었습니까? 그 사람이 노을에게 지시했습니까?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과 상관없이 이미 형성된 환경 속에 이미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러면 노을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거잖아요. 그럼 이스라엘 나라 왜 있습니까? 이 점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있을 뿐이고 너희들은 거기서 장기판 알처럼 놓여 있을 뿐이에요. 

제가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나는 무슨 이유 때문에 여기에 놓여 져 있는가? 우리는 놓여 있는 것이지 내가 개척하고 개발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 보려고 애쓰는 게 아니에요. 그냥 어찌어찌해서 여기 놓여 있는 거예요. 오늘 죽든 언제 죽든 주께서 천국 갈수 있도록 인도하신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있느냐 하면 세상이 주는 공포, 내가 먹고 사는 공포보다 더 센 공포, 더 센 아픔과 그런 능력이 주님의 말씀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십계명 안에 들어 있는데 왜 피이고, 왜 나의 노력이 안 되느냐 하면 얼마나 그 저주가 무서웠으면 하나님의 자기 피가 아니면 그 저주의 뚜껑을 닫을 수가 없어요. 

날마다 우리에게 주는 이 햇볕과 공기는 예수님의 피에서 온 용서의 피가 아니면 안 되고, 그 용서의 피를 보고 우리에게 공기를 주시고, 산소를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거예요. 내 덕 아닙니다. 여러분 덕 아니에요. 세상에 시체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믿지 마세요. 세상은 기대할 게 없어요. 이용할 가치뿐이에요. 

명절 되거든 원 없이 이용하시고, 누구든지 이용하시되, 의지하거나 기대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기대할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여리고성을 우리에게 맞닥뜨리게 하심은 정말 우리가 주님을 더 두려워하고 신뢰하는 지, 아니면 세상 못 산다는 무서운 공포가 주님을 쫓아내는 지, 자기 자신을 돌아 볼 기회인 줄 압니다. 날마다 파도처럼 다가오는 여리고성을 보면서 다 아무것도 아니고 시시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의 생존보다 주님의 생명을 더 귀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