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양각나팔(수6;8-9) 1809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17. 10:15
2018-09-16 15:00:20조회 : 28         
   양각 나팔 18091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양각나팔(여호수아 6:8-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LaYKi-LkLcc, Hit:3
 이근호18-09-16 15:38 
양각 나팔 

2018년 9월 16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6:8-9 

(6: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6:9)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나팔’ 자체가 하나님의 법 안에 담겨 있다는 말은 율법의 진척과정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나팔을 통해서 알리기 위함입니다. 이는 곧 법 준수에 대해서 이스라엘쪽에서 기여한 바가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팔붐’은 최종적이고 마감을 알리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알아서 일하시고 그 일을 끝냈음을 알리는 방편에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식으로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한 형편을 보게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게 되면 자신이 뭔가 가치있는 존재라도 된 양 착각하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 하나님 전쟁에 대해 자신이 긍정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것은 언약궤입니다. 즉 언약궤를 통해서 인간들이 이해못하는 하나님만의 스케줄이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 그 언약궤를 들고 가는 제사장이나 그 뒤따라 가는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시간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과 그 증거가 담기는 몸이 상호 다르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시간 이해는 자신이 몸을 증거로 잡고 파악합니다. 즉 자신이 몸이 많이 늙었고 쇠약하다고 보는 것은 그만큼 자기 몸이 시간 속을 통과했다는 증거로 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인간들은 자기 몸이 근사하게 바뀌는 그 대망의 때로 고대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저 ‘소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몸이 요구하는 대로, 혹은 자신의 몸을 위하여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됩니다.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이 벌이시는 일을 전혀 이해 못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7에 보면,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기 일에 긍정적으로 끼어드는 것을 배제하십니다. 이들 인간들은 평소에 세월 속에서 자신이 자기를 살려왔던 그 방식을 고수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자기를 위한 정보같은 것을 더 획득하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신이 요령껏 자신을 계속 살려내려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패배를 통해서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고 성공시키시는 겁니다. 거룩한 언약궤가 인간과 더불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인간편에 선 하나님을 대변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스케줄은 바로 그 언약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마감이 상대방, 즉 이스라엘 보기에 적군들 쪽에서 증거가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적이 이스라엘에게 패배한 역할을 하게 되는 쪽이기 때문입니다. 패배했다는 말은 곧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20:12-17에 보면,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잔혹하게 적들을 진멸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전쟁의 마감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나팔을 불어야 하는 쪽은 이미 하나님의 스케줄에 준해서 벌써 전쟁이 완료되었기에 비로서 하나님과 함께 남을 수 있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는 이스라엘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멸되어야 될 쪽만 진멸되어야 될 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도 하나님에 의해서 당연히 진멸되어야 될 대상자이다 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즉 이스라엘은 진멸당하는 적들을 통해서 자신의 진면목과 과거를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과거가 인간의 스케줄에 의해서는 미래가 됩니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인간의 시간 속에서 7과 함께 등장합니다. 일곱 번째 날, 첫날에 나팔을 부는 절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팔절’입니다. 그리고 7×7+1=50년이 되는 날에도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이 날은 바로 ‘해방의 날’입니다. 즉 인간이 손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대로 모든 것이 완료되었음을 나팔을 통해서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진멸될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드리바 된 것들입니다. 레위기 27: 28-29에 보면,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진멸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 곧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전쟁의 전리품이요 곧 하나님의 승리품이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실패한 자리에서만 스스로 승리하시기에, 이 땅에서 실패한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은 인간의 시간대 안에서 실패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8장에서 10장까지 보면,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차례로 불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이미 구원이 마감된 상태인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스케줄은 우리 몸과 상대해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과 상관해서 적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나가 전서 4:16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구원에 성사되었다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성도는 이미 구원되어 버린 겁니다. 

나머지 세월은 다 꿈 속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에게 너무 철저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9-17 05:51 
202강-여호수아 6장 8~9절(양각나팔)201809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6장 8~9절입니다. 구약성경 326페이지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 하더라”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두 가지를 나누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에 적용되는 시간 개념과 그리고 우리 인간 속에 없는 하나님만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시간, 다른 말로 스케줄, 하나님의 스케줄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과거에 준해서 미래로 나아가고자 준비하는 그 과정 속에서 자꾸만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고 있어요. 그동안 참을성 있게 꾸준히 하나님 따라 왔으니까 우리가 원하는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시고 그 나라가 우리가 원하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앞에 언약궤를 세우죠. 하나님의 언약궤를 환등기로 봅시다. 또는 영사기로 봅시다. 언약궤 안에 있는 그 시간 스케줄이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간 스케줄과 달라요. 그래서 이 언약궤는 인간이 범접하지 못합니다. 언약궤를 붙들면 인간이 죽어요. 

그저 모시는 것이시지, 들춰보면서 우리 자신의 지식에 더 보탤 수가 없습니다. 언약궤 안의 내용은 우리가 알아 버리면 그 언약궤 내용을 우리가 실천하려고 덤벼들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궤는 약속 궤입니다. 그것은 약속은 인간의 손을 떨치고 오직 하나님이 그 약속을 친히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이게 환등기이고 영사기예요. 

그러면 환등기나 영사기만으로는 안 되겠지요? 스크린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 스크린이 뭐냐 하면 여리고성입니다. 여리고성을 뱅뱅 돈다는 것은 하나님의 스케줄에 준해서 이스라엘 쪽에서 시간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여리고성 안에서 하나님의 시간이 계획대로 진척됩니다. 

그러면 여리고성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기생 라합이 살고 있어요. 여리고성을 뱅뱅 돌고 있는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고 있을 거예요. 왜? 시켰으니까. 나팔 불고, 언약궤 앞장세우고, 돌라고 하니까 돌지요. 하루에 한 바퀴 돌고 마지막에 일곱 바퀴를 돌지요. 나팔 불면서. 

그런데 평소에 그 나팔이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나팔 불라 하는 그 하나님의 법안에서 나팔의 위치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기에 실제로 효과 있는 증거물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냥 입 벌리고 나팔 불면 그게 나팔 부는 걸로 알고 있어요. 

나팔 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마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마감이 된 거예요. 그 마감이 된 것을 언약궤와 같이 동반해서 나팔 부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 언약궤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고, 인간의 힘이 필요치 않고 어떤 의견의 도움 없이 필히 그것을 이루어내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나팔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나팔은 마감, 마감이라고 보면 됩니다. 마감 때 부는 게 나팔이에요. 이게 구약 때 보니까 나팔이 별로 실감나지 않는데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5~16절에 보면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알고 시간 스케줄 가지고 이때가 언제냐고 물으시면 안돼요. 그건 묻는 게 예의가 아닙니다. 인간이 과거에서 습득한 모든 시간의 증거는 그냥 자기 몸에 축적했어요. 자기 몸이 늙어 가니까 ‘나는 오랜 인생을 살았구나’라는 모든 세월을 보냈다는 증거가 기껏해야 자기 몸에 자꾸 구축돼요. 

주님의 스케줄은 예수님의 몸에 구축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이 땅에 와서 어떻게 되고 그 다음에 다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온다는 그것이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다가설 수 없는 따로 노는 시간개념이에요. 시간절차이고 순서라니까요.

“그렇다면 예수님 올 때가 언제입니까?”라고 물으면 “그건 나에게 묻는 게 아니야”라고 사도행전 1장에 나오죠. 그 때와 그 시는 너의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네가 품고 있는 이 몸 가지고는 몸에서 나오는 시간 의식으로써는 주님의 시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덮치면 덮쳐지는 거죠. 그러면 우리 시간을 왜 무시합니까? 우리 몸은 이미 죽었거든요.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 할 때는 반드시 조건이 뭐냐? 죽여 놓고 구원해요. 안 죽었는데 살아 있는 걸, 뭐 산 낙지도 아니고, 살아 있는 걸 섭취하지 않습니다. 죽여 놓고 섭취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이해 못하죠. 산채로,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내가 이해하는 그 이해함으로 지금도 살아 있지만 더 살고 싶다는 겁니다. 인간이 기껏 생각해내는 게 그런 거잖아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도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 안하고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진짜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거 같아서 내가 억지로라도 예를 들어요. 무슨 예를 들었느냐 하면 우리 자신을 이렇게 선선한 가을바람 부는데 기분 좋게 두지 말고, 우리를 포항제철 같은 뜨거운 용광로 속에, 한 3000도쯤 되는 용광로 속에 푹 잠겼다고 봅시다. 

그건 너무 심한 예니까 그럼 사우나로 봅시다. 사우나에 넣어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리는 거예요. 사우나에 집어넣고 문을 잠궈 버리면 안에 있는 사람은 문 잠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이쯤 되면 나가야지 하고 나가려고 하니까 문이 안 열리는 거예요. 

그러면 뜨거운 사우나를 지옥으로 보자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그 안에서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간단해요. “살려주세요, 뽀빠이~” 이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게 평소에 안 되는 거예요. 이게 평소에 안돼요. 건강할 때는 안 되는 거예요. 꼭 아파서 병원에 누워야 “살려주세요, 뽀빠이~”가 되지 건강할 때는 이게 안돼요. 병원 갔다가 다시 나오면 헤헤거리고 또 생각 없지만. 

우리가 왜 살아 있다고 보느냐 하면 지금껏 살아 있다는 그 시간이 지금 나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리고성 안에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돌라는 말은 그들이 거기서 밥을 해먹든 떡을 만들어 먹든 추석을 즐기든 거기서 축구를 하던 야구를 하던 올림픽을 하든 관계없이 이미 그들은 포위된 상태예요. 

그 둘레에서 정복자가 뱅뱅 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마시고 즐기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하든지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겁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그 중에서 딱 한 사람 살아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에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그 근거가 하나님의 율법에 보면 하나님의 전쟁은 “진멸하라”였습니다. 하나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는 말이거든요. 다 죽이라는 이 말은 그거 다 죽여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이미 죽은 시체이기 때문에. 자기 딴에 펄펄 뛰고, 뭐 무역정책이 어떻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엔 다 죽은 거예요.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안 믿어요. 안 믿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가 또 요한계시록 10장 7절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10장 7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8장부터 10장까지 보면 일곱 나팔이 나와요. 첫째 나팔, 둘째 나팔,..나팔이 나온다고요. 나팔 불때마다 그게 뭐냐 하면 화투 패를 이렇게 뒤집는 겁니다. 죽은 거 맞잖아. 죽은 거 맞잖아. 죽은 거 맞잖아...하면서 점점 더 심화되게 갈수록 더욱더 “이런 짓 하니까 죽어 마땅하지. 이런 짓 하니까 죽어 마땅하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인간을 뒤집어 보니까 이게 산 게 아니고 다 죽은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죽은 거예요. 지금 여리고성을 뱅뱅 돌면서 나팔 불라고 하는 말은, 나팔이 뭐냐 하면 마감이거든요. 마감 때 부는 나팔이 그거예요. 그 마감 때 부는 나팔을 인간적인 시간 때로 뭐냐 하면 ‘7’이라고 해요. 일곱 번째라고 이야기해요. 일곱 번째. 

원래 나팔 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 그 절기는 1,2,3,4,5,6,7 일곱 번째 나오는 그 7월 1일날이 나팔 절이 되어가지고 나팔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나팔을 불게 되어 있느냐하면 7*7=49, 7의 완성 49 + 1, 그걸 50년인 희년이라고 하는데 그 희년에 나팔을 불게 되어 있어요. 양각 나팔을 불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걸 해방의 날이라고 해요. 해방의 날. 희년하니까 자꾸 교수들 놀러가는 날로 생각하는데... 

제가 안양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로마서 4장을 언급하면서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 인간은 왜 싸우느냐? 싸우는 것은 남을 지배 못해서 한이 맺혀 그렇게 싸운다는 거예요. 그러면 지배 못하고 한이 맺히면 그 다음 어떻게 하느냐? 복수 하려고 해요. 무조건 복수 하려고 해요. 

“왜 나에게 스크래치를 내느냐. 이 깨끗하고 싶은 나를 왜 네가 뭔데 나에게 흠집을 내느냐. 왜 나에게 부끄러운 요소를 만들어 내느냐.” 이러면서 싸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면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완전하게 되어야 될 법에 의해서 전부다 빚이 되어 버려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채무 불이행자입니다. 갚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요구한 그 거룩을 갚을 수가 없어요. 원수를 사랑하라는데 뭐, 안하면 안하지가 아닙니다. 그게 빚으로 돌아와요. “원수를 사랑하라” “나는 못 합니다” 하면 끝이 아니고 그게 빚으로 돌아온다고요. 

그래서 로마서 4장에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 네가 죄인이어서 지옥 가야 하는데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빚이 남아서 그런다는 겁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하게 되면 빚진 사람은 반드시 다 갚지 아니하면, 도저히 갚지 아니하면 그 빚진 값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은 사채업자예요. 사채업자입니다. 빚 안 갚으면 몽둥이 들고 와서 뱃속의 장기들 다 떼 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말 했잖아요. 마가복음 9장에서 “네 몸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리라” 찍어서 빚 갚으면 나머지 가지고 지옥 안 가는 게 낫다는 거예요. 사채업자도 이런 사채업자가 없습니다. 철처하게 계산하십니다. 

그래서 은혜가 뭐냐 하면 “빚 갚아 줄게. 다 갚았다.” 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일하게 되면 그걸 빚으로 여기거니와 하나님께서는 일한 것도 없이 이건 무죄도 아니고 아예 의롭다고 하시는 거예요. 무죄는 앞으로 죄 지으면 빚이 생길 가능성이 있지만 의롭다는 것은 어떤 것을 해도 의가 되도록 이게 다 변경된다는 거예요. 율법을 위반해도 그게 자꾸 의로운 일로 변경된다는 거예요. 

이게 아브라함에게 주는 복이고 그 복이 그냥 말로만 복 받으라는 게 아니라 말로만 빚 갚았다는 게 아니라 그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이죠.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등장해서 우리가 뭘 요구한 적도 없어요. 뭘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죽고 본인이 알아서 부활 했어요. 아버지에 의해서. 그리고 빚 갚았다는 거예요. 이걸 누가 믿겠어요. 

주님의 전쟁은 실패한 하나님만이 진짜 성공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은 그건 하나님이 아니고 나머지 모든 것이 귀신입니다. 악마예요. 악마의 변형체예요.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실패한 하나님인데 그 실패는 우리 죄 때문에 실패하신 거예요. 

하나님의 스케줄은 뭐냐, 자기가 자기를 위한 스케줄 짜기였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이 고생 받을게.” 하지만 성공 여부도 너에게 맡기지 않을게. 다만 너희들은 진멸 해버려라. 여리고성 사람들을 다 진멸하라는 말은 여리고성 사람이 너희보다 더 악해서가 아니라 그 여리고성 사람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한 전쟁은 바로 너희 앞에서 하나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너희 앞에서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사사기에 그런 게 나오는데 미디안 사람 14만 명이 넘는 그 많은 군대가 다들 한 일군하고 다들 자기 집에서는 괜찮은 장남들이고 전부다 귀한 집 자식들인데 어떻게 이스라엘과 잘못 만나가지고 전부 죽었거든요. 

그게 왜 죽느냐하며 그들이 너희보다 악해서 죽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저쪽이나 이쪽이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다 죽은 자인데 하나님의 자기를 위한 구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증거물로 저쪽을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안 죽입니까? 너희들은 너희들 스케줄이 아니고 언약궤 안에 들어 있는 스케줄에 따라서 나팔을 부는 쪽이니까 이미 구원받고 난 이후에 남겨진 남은자의 대우를 일찌감치 그 대우를 받고 있는 겁니다. 일찌감치. 성령이 오심이 그런 거죠. 

레위기 27장 28절부터 보면 “오직 여호와께 온전히 바친 모든 것은 사람이든지 가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무르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자는 다시 무르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 지니라” 

여리고성을 하면서 여리고성의 모든 물건은 다 하나님께 바치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왜 바쳐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손대면 안돼요. 인간이 협조한 일이 없기 때문에. 내 구원에 내가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맨 날 실패하고 또 실수했을 뿐이고 그리고 주님 앞에 빚진 자일뿐이에요. 

빚진 자가 조금 날라 갔다고 해서 그거 가지고 화내면 안돼요. 왜냐하면 이 목숨도 우리 것이 아니거든요. 제가 서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는데 왜 자식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느냐고 제가 따졌어요. 왜냐하면 자식 키우는데 우리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한 것이 없는데 기대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 아닙니까? 

여러분들 교회 나오는데 제가 뭐 한 거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안 나온다. 이제 몇 명 되지도 않는다.’ 이걸 왜 짜증을 내느냐 이 말이죠. 돈 한 푼 벌 때, 병원에 아픈 사람 있지만 또 예를 들면 돈 한번 벌 때 얼마나 열심히 벌었습니까? 한 번 끊기니까 다 날라 가잖아요. 인대 한번 나가니까 다 날라 가 버려요. 그 아까운 돈이. 보험도 안 들었는데. 

내가 나를 키우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나를 키우게 되면 자꾸 주님 오신 날을 계산해야 돼요. 왜? 평소에 내가 나를 키우듯이 내 구원받는 날도 내 정보가 미리 입력 돼 가지고 그 때쯤 되어서 정신 좀 차리고 해보겠다는 거예요. 

우리의 스케줄은 이미 구원 된 거예요. 이미. 왜냐하면 나팔이거든요. 이미 나팔이 우리와 함께 있어요. 양각 나팔이 우리와 함께 있다 이 말이죠. 자, 정리해 봅시다. 나팔이란 이미 완료된 이후, 이미 마감된 이후가 나팔이에요. 

그 나팔에 의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키운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은 하나님께 바친바 되어야 한다는 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레위기 27장에서 이야기 한 그거예요. 네 몸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가 네 구원을 걱정한다든지 신경 쓴다는 자체가 주님의 스케줄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겁니다. 

모든 스케줄이 언약에서 나왔는데 언약 지키지도 못한 인간이 왜 거기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합니까? 나의 구원은 나의 소망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구원해주세요”에서 나온 게 아니고 언약에서 나왔어요.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우리에 대한 구원의 여부와 옳고 그름의 여부가 같이 나온 거예요. 

이걸 알려 주려고 주님께서는 열두 인간들 택해 놓고 하나를 버리잖아요. 가롯유다를 버린다 이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버림받은 가롯유다나 너나 똑같다는 겁니다. 다만 가롯유다는 미움을 받았을 뿐이고 나머지 11명의 제자는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받은 거예요. 그걸 불쌍히 여김을 받는 긍휼이라고 해요. 긍휼. 봐주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어요.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우리는 그릇이에요. 사발. 대접. 우리는 대접이에요. 긍휼을 받는데 긍휼을 받고 있는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그동안 우리가 육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꾸 뭐라고 고집하느냐 하면, 아침에도 이야기 했지만, ‘내 자신이 앞으로 잘 할테니까 제 영광이 뭉개지는 일은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부끄러워지면 나 자살 할랍니다. 이렇게 망가지면 나는 더 이상 못 삽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자발적으로 등신이 안돼서 그래요. 

바보만 되면, 아이큐가 60만 되면, 60도 높아요, 아이큐 46으로 갑시다. 자발적으로 등신이 됩시다. 왜 그러냐 하면 똑똑하면 인간이 이기주의적 괴물이 되어 버려요. 따지고. 또 따지고. 사랑 앞에서 우리는 등신 되어도 괜찮아요. 왜? 사랑이 넉넉하니까. 바보라고 사랑 안하는 게 아니거든요. 자기밖에 모르는 이 이기주의적 괴물 때문에 주님이 얼마나 많이 시달렸습니까? 참 많이 시달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걸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손을 잡고 데려갑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쭉 데려가면서 이스라엘 데리고 가게 되면 처음에 이스라엘 오게 되니까 이게 주님의 적인데 자기 적인 줄 착각해가지고 자기 힘으로 이겨 보려고 기어이 내가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고 하면서 막 해봅니다. 해보는데 결국엔 나중에 힘 빠져서 못해요. 그래서 “이제 더는 못 합니다”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너 이제 꿈 그만 꿔라. 네가 한 것이 전부다 개꿈이다”라고 하시죠. 

너는 이미 이기고 지고 하는 그 대상에서 자체에서 벗어 난 거예요. 인생 성공하고 실패하는 그 대상 자체에서 이미 벗어났는데 얼마나 그동안 마귀에게 놀림 받고 마귀에게 시달렸으면, 심지어 구원받는 것도 성공하게 해달라고 하죠. 무슨 구원받는데 성공이 있어요. 구원이 누구 소관인데 자기가 성공을 해요. 사는 거 자체가 성공인데.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고 했잖아요. 모든 일이 다 성공이에요. 나팔소리는 지금 벌써 나팔소리가 계속 울리고 있는 겁니다. 일곱 나팔이 울리고 있어요. 마지막 때 제 3차 대전에서 이슬람과 이스라엘이 붙어서 그때 나팔 부는 것이 아니고 나팔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계속 불어대고 있습니다. 

정신 좀 차리란 말이죠. 네가 네 자신의 운명을 변경하는 게 아니고 이미 확정되었다고. 그래서 계속해서 뭘 보이느냐 하면 자꾸 십자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언약의 완성, 언약궤의 완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나팔을 우리와 관련되어있지 않고 나팔은 예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몸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나팔입니다. 

예수님 나타났을 때, 나팔소리 울리는 이유가 모든 스케줄은 살아계신 예수님과 관련 되서 세상은 움직여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뭐 트럼프가 어떻고 핵무기 하는 것은, 그 시답지 않은 거, 그런 것을 보여주면서 이제는 거기에 너무 휘둘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가슴 덜컥 내려앉고, 북한 가면 철도 공사하는데 철도공사 26조 들어가고, 도로공사 24조 들어가면 우리나라가 세금 더 내야 하나 하면서 막 온갖 걱정하고 또 태극기데모하면서 북한 그만 퍼줘라 하고, 옛날에는 세금 더 내라 할까 가슴 덜컥 내려앉았어요. 이제는 집 한 채 있다가 집 두 채 있다고 세금 더 내는가 했는데 어차피 키우는 담당이 우리가 아니잖아요. 기왕 꿈이라면 무슨 꿈이라도 좀 꿉시다. 꿈인 줄 알고 편하게 꿉시다. 어차피 부활되게 되면 다 꿈인 것을. 

따라서 제발 자발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등신같이, 바보 병신처럼 살아간다면 목사 입장에서 더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너무 똑똑하게 대처하지 마시고, 중구난방이라는 사자성어처럼 개판같이 그냥 그렇게 삽시다. 이미 누가 그렇게 살고 있었는가. 기생 라합은 그렇게 살았어요. 기생 라합은 여리고성에서 뭐 뷰티풀 축제를 하든 어떻든 간에 기생 라합은 주님 오시기만을 기다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 스케줄이 이미 우리 안에 십자가와 더불어서 장착되어서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어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걱정 엄청 많이 했습니다. 우리의 심신이 다 피폐할 정도로 염려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사나, 어떻게 하면 목숨 부지하나 24시간 눈만 뜨면 그것밖에 할 줄 모르고 너무 똑똑해서 탈이 났습니다. 주님 앞에 바보가 되어도 괜찮고 죄인이 되어도 괜찮다는 다 이루심만 사랑으로 우리가 점령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