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강-창 38장 1-6절(유다이야기)1807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8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58페이지입니다.
창 38:1-6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더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야곱의 족보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무려 열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족보 같으면 야곱의 이야기가 나와야 될 텐데 37장에 보면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해놓고 단번에 나오는 것이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왜 요셉이야기가 야곱의 족보에 주를 이루느냐, 본 내용을 다 구성하게 되느냐?
야곱의 족보는 야곱 개인적인 이야기여야 될 텐데 왜 요셉이야기가 먼저 등장하느냐 하면, 보통 족보는 인간의 혈육에 의해서, 그냥 인간의 혈육적인 자연스러움이 반영되어서 하나의 가문을 구성하지만 야곱의 경우는 인간의 혈육보다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야곱의 모든 시간을 주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 땅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왔습니다. 야곱이 꿈을 꿀 때 사다리가 내려오고 천사들이 활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의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것, 하나님이 이 지상을 어떻게 운영하느냐, 경영하느냐에 대해서 복 받았다는 야곱의 족보를 통해서 자기 뜻을 드러내는 겁니다.
따라서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뭘 겨냥하느냐? 언약을 받았던 그 아버지와 그리고 그 언약 받은 아버지를 통해서 언약이 야곱의 후대에 전달될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생각해 놓은 그 언약의 내용이 거기에 관여하게 되어 있어요.
보통 아버지가 자식에게 돈을 주게 되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유산을 남겨주고 자식이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그 돈에 주목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가 유산을 줬고 받은 관계기 때문에 내가 준 그 돈 가지고 몇 배나 남길까, 내가 죽고 난 뒤에 자식들이 더 큰 부자가 될 것인가, 신경 쓰는 반면에 야곱 같은 경우에는 야곱에게 하나님이 약속을 줬다는 말이지요.
약속을 준 것이 그 자식들의 일대기를 통해서 보다 더 선명하게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약속의 내용과, 야곱이 살아 있으면서 자식들에게 일어난 예상 못할 어떤 변화 같은 것, 추이, 하나님이 자식들을 일방적으로 이끄시는 가운데서 아버지 야곱이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언약의 깊이를 더 아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인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움직였다, 이렇게 보시면 제일 쉬워요. 세상에서는 모든 세상의 움직임과 변화는 인간이 먼저 나서서 움직일 때 어떤 결과를 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상식에도 그게 맞고요.
하지만 특수하고 특이하게 하나님 쪽에서 먼저 움직여서 인간의 예상 밖의 어떤 결과가 나타나게 되면 그 낯선 결과들의 규합, 그러한 결합이 하나님이 정작 인간세계에 하나님자신의 본뜻, 본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시겠지,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그냥 땅에 앉아 있어버리면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인간의 지혜의 범위 안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뭐가 누락되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인간과 협의나 의논이 없이 먼저 움직였다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그 사실을 빠트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생각하는 고상한 그 모든 것은 아무리 고상해도 엉터리고 허구지요. 믿어도 소용없는, 있지도 않는 하나님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펼쳤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 뜻을 펼쳤다면, 그 뜻을 야곱에게 줬으면 야곱에게 준 그 언약이 어떤 결과를 낳아야 될 텐데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라고 했을 때 야곱의 언약이 자식들에게 전수되면서 그 자식들에게 일어나는 아주 특이한 변화 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들이 예상 못한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뜻이 야곱가정을 통해서 펼쳐지게 됩니다.
그 중 하나로 지난 시간에 요셉 이야기를 먼저 했지요.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해놓고 요셉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요셉이야기부터 먼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야기를 하면서, 요셉은 난데없이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했고 우리가 짐작하듯이 그 꿈속에는 하나님이 이 땅에 전달하고자 하는 언약적인 특이한 내용이 담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특이한 내용으로 인하여 야곱의 자식들 가운데서 한 명과 그 나머지 모든 자식들이 격리가 되었어요.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 하나가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 버리고. 그게 다 어디서 나왔는가? 꿈 때문에 나왔어요. 그러면 꿈을 누가 꾸게 했는가? 하나님이 꾸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움직인 그 결과가 세상적으로 봐서 야곱의 가정에 우환을 준 겁니다.
열일곱 먹은 애가 아버지입장에서는 일찌감치 죽은 자가 되어버렸지요. 자식 하나 잃은 것이 되는 겁니다. 자식을 잃었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 지상에 자기 뜻을 드러내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앞으로 요셉의 진척과정을 통해서 드러날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셉이 가정이라는 울타리, 우리는 야곱이가 아버지고 형제들이 있다는 그 가정이라는 소규모 울타리를 벗어나서 애굽이라는 권세가 작용하는 국가체제 속으로 요셉이 혼자 몸으로 잠입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부모와 형제를 떠나서 잃어버린 소년 하나가 애굽나라에 비밀리에 잠입한 것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꿈을 꾼 소년의 잠입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고 그 당시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애굽나라의 만남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냥 가정의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가정울타리를 떠나서 애굽이라는, 인간들이 염원하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힘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국가체제에 드디어 언약의 핵심인물이 섞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꿈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꿈의 내용대로 전개하게 되면 그 국가체제에 어떤 변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 변동이 순전히 요셉을 통해서 일어났다는 말은 요셉에게 주신 분, 곧 하나님에 의해서 국가의 변동사항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국가는 절대로 인간들의 힘에 의해서 하루하루 운영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국가가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언약은 간단하게 야곱의 가정에서 버림받은 소년 요셉에 의해서 실시되고 실현된다, 하나님에게 야곱에게 주신 그 야곱언약은 이제는 야곱가정에서 잃어버린 자 요셉 하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상에 펼치고자 하는 그 뜻은 요셉을 통해서 다 드러내게 되겠다고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38장에 보면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갑자기 유다이야기가 나와요. 창세 37장에서 야곱의 족보가 이러하니라, 해놓고 야곱 이야기는 안 나오고 요셉이야기가 선수 치면서 꿈 이야기와 함께 나오고 그 다음에 38장 전부가 사적인 유다가정 이야기가 나와 버립니다.
뭔가 요셉 이야기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 전부 다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어요. 요셉은 요셉대로 움직이고 유다는 유다대로 따로 움직여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의 뜻을 펼치고자 실시하고 있는 겁니다. 유다는 야곱의 아내 가운데 언니 레아의 네 번째 아들이에요. 르우벤, 시므온, 레위, 그 다음에 유다, 네 번째 아들입니다.
이 네 번째 아들인 유다의 사적인 이야기가 야곱의 족보를 언약대로 형성하는데 왜 들어가느냐 하는 그 문제와, 요셉으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요셉이 예수님처럼 이 지상에서 돈 몇 푼 받고 종으로 팔려서 결국은 이 세상의 주가 되시는 그 스토리를 요셉 한 사람으로 충분할 텐데 왜 언약에 있어서 요셉으로 충분하지 않고 유다가 왜 들어갔느냐, 이 두 가지 문제가 설명이 되어야 되겠지요.
만약 요셉 한 사람으로 설명이 된다면 이것은, 야곱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그 언약의 모든 혜택이 야곱가정으로 다시 돌아와 버려요. 요셉 하나 국무총리 되어서 야곱은 역시 하나님의 뜻대로 복을 받는 티를 낸다, 야곱 가정은 다른 가정과 다르다, 하고 야곱가정 하나로 모든 복이 굳어져버려요. 그것으로 다 종결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야곱가정은 영원한 것이냐? 과연 야곱가정은 문제가 없느냐 하는 그런 점이 나타나지 않아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기 언약을 드러낼 때는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야곱가정이 훌륭해져버리면 안됩니다. 야곱가정이 다른 가정 못지않게 근원적으로 문제 있는 가정임을 들춰내야 되겠지요.
1차는 야곱가정이 그렇게 온전한 가정이 아니라는 사실, 그거 하나가 있지요. 하나, 둘, 하게 되면 둘 할 때는 앞선 하나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요. 단단히 해야 됩니다. 복 받은 야곱가정도 다른 가정 못지않게 그들이 의로운 것이 없다는 그것 하나, 그리고 그 야곱 가정에 있는 어떤 자가 문제성 있는 야곱가정에 문제 있는 아들인 요셉을 통해서 야곱이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요셉이든 야곱이든 유다든 다 문제성이 있는 가정이에요.
아버지 어머니가 문제가 있으니까 자식들도 아무리 요셉이라도 문제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유다가정을 이야기하는 이유, 첫 번째가 뭐냐? 야곱가정이라도 기존가정 못지않게 근원적으로 문제가 있는 가정이라는 것과 야곱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언약대로 복을 주고 구원하기 위해서 투입된 것은 야곱가정에 속한 혈통이 아니라 외부인이 개입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외부인이라 하는 것은 이방인이지요. 이방요소가 개입되어야 돼요. 그걸 저는 외재적요소라 하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신 분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잖아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이 땅에 와서 언약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 법칙을 지금 유다가정을 통해서 나타내는 겁니다.
세 번째가 뭐냐? 세 번째 나오면 첫 번째, 두 번째는 잊어버렸지요. 첫 번째는 야곱가정도 기존가정과 다를 바 없이 문제가 크다. 죄인 중에 괴수다. 두 번째는 뭐냐? 유다가정의 인물 말고 외부적인 인물이 유다가정을 구원해야 된다.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구원하는 그 모습이 희생자의 모습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무엇이 희생자냐? 이게 의의 문제에요. 의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에 뭐가 실려 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언약이 완성이 되면 죄인도 의인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부분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가 들어 있어요. 복음이지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은 몰라요. 하나님은 아셔요. 의입니다. 의가 없이는 천국에 못가요. 영생의 나라에 못갑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뭘 최고로 보느냐 하면, 몸의 문제에요. 몸의 문제는 혈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다가정을 통해서 혈통이 우선이냐 하나님의 의가 우선이냐를 유다가정을 통해서 들춰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는 그것은 들러리에 불과하냐? 들러리가 아니에요.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개인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권세가 있는 그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의 영향력이 미친다는 것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게 된 그 요셉은 인간들이 상상하는, 인간들이 가장 완벽하다고 여기는 최고의 힘의 집결, 국가지요, 그 국가의 권세에 요셉이 언약의 사람으로 파견근무하지요.
암약, 지령 받고 스파이로 들어가는 거예요. 언약의 사람으로서, 언약이 없는 애굽에 대한 권세와 꿈을 꾼 언약의 사람이 만났을 때 누가 주도권을 쥐고 누가 우위에 서고 누가 통치자의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겁니다.
세상의 많은 국가들, 힘센 국가들이 있지만 그 국가는 국가의 자체적인 능력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암묵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잠재적인 힘을 위해서 세상국가권세들은 쓰이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세상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예수님 자신에게 주셨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어두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을 데려가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국가의 권세를 예수님 맘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을 아버지로부터 일임 받은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이 세상에서 자기백성을 빼내기 위한 활동입니다. 구원될 자는 구원되고 지옥 갈 자는 지옥가라고 주께서는 그 권세를 오늘도 활용하고 있고 오늘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가격 올라가니까 아파트 다주택자들에게 세금을 좀 더 매겨야 되겠다. 그 권세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스웨덴이 덴마크를 이겼다. 그 권세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축구 이기라고 활용한 것이 아니에요. 그 축구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주님이 개입했음을 아는 자기 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월드컵축구를 준비하셨던 겁니다.
모든 범사에 주님이 개입 안하는 곳이 없어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그 스케줄 속에도 예수님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난치병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약도 없이 살아가는 사정 딱은 그 이름 모를 가정의 소년 소녀의 일도 주께서 자기백성 건지기 위한 조치입니다.
뉴스에 나오는 모든 일들, 해군 성폭행부터 야산의 폭행사건, 그 어느 것 하나 주님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들입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일도 주님께서 개입하시는 일입니다. 인간들은 그것까지를 보지를 못하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까 몇 가지를 이야기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야곱은 복 받을 자격도 없이 다른 가정과 마찬가지로 죄인이에요. 두 번째는, 그 죄인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자가 등장해야 되고 그 희생자는 외부자로 와야 되고 그 외부자가 오기 전까지는 야곱가정은 복 받았기 때문에 더 의롭고 복 받을 만해서 복 받았다고 여겼을 겁니다.
그러나 유다가정에 있어서 그 외부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현상이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게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구성에 있어서 본 내용을 차지하는 거예요.
그러면 요셉이 애굽권세와 결합되는 것은 뭐냐? 그 내용의 결과가 권세에 대한 접수입니다. 애굽권세마저도 꿈을 통해서 소년 요셉에게 접수되는 것은 그것이 외부적으로 나타난 결과지만, 형식에 불과하지만 그 형식을 알차게 채우는 것은 요셉이 아니고 유다가문에서 일어난 언약적인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야곱가정의 어떤 사람도 자동적으로 복 받을 자격 없다. 복 받을 자격은 야곱의 구성원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 때문에 희생을 당해야 될 낯선 외부인물의 위치가 바로 언약이 일어나는 본래위치가 돼요.
그렇다면 야곱뿐만 아니고 야곱언약 안의 모든 사람은 어디를 그 원천지, 센터로 봐야 되느냐 하면, 다말, 이방여자 다말에게 무슨 언약적변화가 일어났는가에 주목해야 돼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다말의 문제는 몸의 혈통의 문제가 아니고 우선이 아니라 의의 문제라는 말이지요.
유다가문의 자식이 죽잖아요. 두 명이나 죽어요. 죽는 이유가 언약 받은 사람은 몸을 살리기 위해서 애쓴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자꾸 죽는 이유는 네가 죄인이고 그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되고 그 의는 이 지상에 구체화될 때에 네 죄로 인하여 피해자가 되는 그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노골적으로 증거로 나타났다는 겁니다.
하나님 보고 의롭게 해주세요, 라고 외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요.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교회 처음 나와서 처음 성경 대하는 대목이 이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야곱의 대표자가 요셉이 아니고 유다가 되어버려요. 그리고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유다가정의 “다말에게서” 여기서 다말은 여자 이름이에요. 족보에 여자 이름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남자가 있으면 그 여자를 대표하기 때문에 남자에게서 났다고 하면 그걸로 그 가정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남자이름이 있고 거기에 여자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주도권이 남자가 아니고 여자를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그 여자가 이방여자, 이스라엘혈통이 아닌 외부에서 투입된 그 혈통, 흔히 말하는 언약적인 혈통 말고 그 외부의 혈통이니까 없는 혈통이에요. 언약적으로 봐서 없는 혈통, 존재하지 않는 혈통, 암묵적인 혈통, 잠재적 혈통,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대기상태에 있던 혈통, 그 혈통은 그 혈통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혈통은 사라지고 사건 하나로 하나님의 언약철로, 언약노선, 족보노선에 사건으로 끼어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본래내용은 신약에서 유다가 차지하지만 유다의 그 결과로 인하여 야곱의 가정에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파견근무하게 하는 식이 되어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권세도 야곱에게 언약을 주신 그 하나님의 권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장악되고 다루어진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그 내용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되면 축구로 말하면 투톱이지요. 장신 두 공격수가 나란히 있는 겁니다. 투톱의 체계를 보게 되면 창세기 끝날 즈음 49장에서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할 때에 유독 장대같이 불쑥 튀어나오는 두 지파가 있어요.
한 지파가 유다지파고 또 한 지파는 요셉지파에요. 창세기 49장 9절에 보면 “유다는 사자새끼라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이렇게 해서 마치 유다가 야곱의 축복을 대표적으로 받는 최고봉에 올라간 지파처럼 보입니다.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고요. 그리고 실로가 오시기까지, 메시아가 올 때까지, 라고 해서 유다가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못지않게 22절이 나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해놓고 24절에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해서 목자는 요셉지파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 축복의 구절을 보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대표자가 한 명이 아니고 두 명이라는 점에서 당황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거지요. 언약이 완성되었으면 완성된 그것을 두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이 뭔가 체계적이고 질서가 안정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개를 해버리면 불안정하게 분리되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되는가? 과연 주도권이 둘로 영원히 가느냐? 둘로 영원히 가지는 않지요. 아까 마태복음 1장 2절에서 본 것처럼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이렇게 유다가 야곱이 대표자가 되는데 그러면 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그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시편 78편 67절에서 6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다시 읽어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또 요셉의 장막(북쪽 이스라엘이지요)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리임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지파(유다지파는 남쪽 이스라엘)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택함의 마지막 최후의 결승전은? 세상과 이스라엘을 택해서 세상은 버리고 이스라엘을 택했다. 이것은 최후의 결승전이 아니에요. 최후의 결승전은 바로 요셉이냐 유다냐, 그걸로 결정되는 겁니다. 택함이라는 것을 마지막 이야기하기 위해서 후보감이 둘로 나타나는 거예요. 둘로 나타나면서 하나님이 마지막 유다를 택하면서 유다에는 있고 요셉지파에는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라는 거예요.
그것은 외부적인 분의 투입입니다. 외부인의 투입. 아담에서 내려오는 혈통 말고 외부인의 투입이에요. 투입되었다는 그분을 과연 어디서 찾는가? 바로 인간의 혈통위주로 인하여 살해당하신 분, 인간의 가족, 내 혈통, 내 몸이지요, 내 몸을 지키는 것은 본능인데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본능에 의해서 미움을 받고 내쫓김을 받고 버림받는 사태, 사건 속에 정말 하나님의 본심, 하나님께서 이 땅을 향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그 본심이 그 사건에 있어요.
그게 바로 십자가사건이잖아요. 그 십자가사건을 말하기 위해서 투톱구조로 체계를 이뤄가는 겁니다. 야곱언약을 두 개로 분리시켜서 나란히 가게 한 거예요. 나란히 가면서 둘 다를 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를 버려버려요. 에브라임지파를 버리고 유다지파를 살리는 겁니다. 처음부터 유다지파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을 저는 본질변경이라고 하는데, 본질이 처음에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변경되었어요. 그러면 유다가정에서 본질변경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 마땅하지요. 창세기 38장에 다말과 유다,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동침해서 아기를 낳는데 산파가 보니까 쌍둥이 중에서 혼동되지 않도록 먼저 나오는 애의 손에 붉은 끈으로 매었어요.
그런데 그 손을 도로 들이밀며 다른 형제가 튀어나와 버려요. 새치기 한 겁니다. 이것은 뭐냐? 처음 야곱이 리브가에서 출생할 때 쌍둥이로 나오는데 그 때는 새치기는 안했지요. 먼저 나온 에서가 형이 되었지만 나중에 야곱이가 아버지 앞에 거짓말을 해서 새치기를 하는데 그 거짓말이라는 그 속에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기 때문에 정말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본질자체가 변경되어야 된다는 그 사실을 유다가정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유다가정을 통해서 알려주는 이 사실이 이미 야곱과 에서의 만남에서 이미 그 징후와 징조가 나왔어요. 그래서 38장 29절에 보면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산파가 보기에도 희한하다는 말이지요.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와요.
육적인 인간들이 복 받으려고, 맏이 되려고 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시되 허락한 다음에 그것을 뒤엎어 버리지요. 모든 인간은 자기가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왜? 자기가 몸에서 나왔거든요. 내 몸은 남 몸 보다 천국가고 영생 얻어야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의도가 아담계통의 모든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이고 주께서는 이것을 죄로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 중심을 하나님의 의중심으로 바꿉니다. 너희들은 네 몸밖에 모르지. 네 몸밖에 모르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보낸 의로운 자를, 그 몸들의 집합체가 예수님을 살해해 버린 거예요.
그 살해한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와버리면, 우리는 얼마나 지독하게 내 몸만 챙기고 내 몸만 위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늘 확인할 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 언약이 작용하고 있는 영생 얻는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의 뜻 내 위주로, 나에게 이익 되라고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악마의 본심인가를 다시 한 번 노출시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인간혈통위주로 몸 위주로 산다는 것이 세상풍토라면 그것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 생각하면서 몸보다 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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